드래곤 라자 1권 – 제 1부 :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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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아악, 퉤!”
성에서 음식 찌꺼기를 받아나오는 길에 나는 성 뒷문에다 침을 뱉었다. 영주 저택의 집사 하멜은 쪼그만 게 술 냄새 풀풀 풍기면서 성에 들어오다니 간덩이가 붓지 않았느냐고 내 건강 상태를 걱정했다. 정강이를 걷어차고 머리를 쥐어박는 것도 걱정하는 태도라면 말이지만.
내가 이용하는 것은 정문이 아니라서 아무 걱정이 없다. 공식적인 손님들은 모두 정문을 이용할 뿐 이 뒷문은 영주의 저택에 물건을 납품하는 나 같 은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경비병도 없고 따라서 내가 침을 뱉든 어쩌든…….
“이 자식, 이 무슨 무례한!”
다시 뒤통수에 불이 번쩍했다. 맞은 데 또 맞다니. 하지만 성에서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 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만 무의식 중에…….”
“음, 잘못을 뉘우치느냐?”
잠깐. 이 목소리는 아무래도 어디서 많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보았고, 히죽히죽 바보처럼 웃고 있는 샌슨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샌슨! 이런, 간 떨어질 뻔했잖아!”
“그러게 왜 놀랄 짓을 해, 임마. 뭐야? 고기 받아가는 거야?”
“고기는 무슨. 비곗덩어리지. 그런데 경비 대장이 뒷문에서 뭐하는 거지?”
“아, 어젯밤에 술김에 여길 들어오다가 뭘 흘려서…….”
샌슨은 마음 턱 놓고 말하다가 문득 자신이 말하고 있는 대상이 나라는 사실을 떠올린 모양이다. 샌슨의 얼굴이 굳어버렸고 난 그것을 놓치지 않았 다.
“뭘 흘려서? 그런데 혼자서 살짝 찾으러 왔다는 것은…….”
“그, 그거야 경비 임무를 비워둘 순 없잖아?”
“아니지, 아니지. 비번들이 있을 텐데. 부탁하면 얼마든지 도와줄 텐데. 즉, 그것은 누군가에게 들키면 안 되는 물건일 수도 있겠고…….”
“무, 무,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으응? 어랏, 흥분하는데? 즉, 그것은 비밀스러운 것이며 흘릴 정도로 작은 물건. 흠. 하지만 꼭 되찾아야 되는 물건. 그것은…….
샌슨은 눈이 동그래졌지만 설마 네까짓 게 보지도 못한 물건을 어떻게 정확하게 말하랴 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난 아주 먹음직스러운 음 식을 앞에 둔 표정으로 말했다.
“반지군?”
샌슨은 기절할 듯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너, 어, 어떻게……?”
“그 아가씨의 손에서 반지가 없어진 걸 봤거든. 그 아가씨는 반지를 누구에게 줬을까? 뭐, 그 아가씨라고 말하는 것도 귀찮군. 그 아가씨의 이름 은…….”
턱! 샌슨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제발…… 부탁이야.”
샌슨의 표정은 가관이었고 난 그만 배를 잡고 웃어버렸다. 뭐? 오거를 상대할 만한 전사라고?
잠시 후, 나와 샌슨은 성의 뒷문 근처 풀밭을 뒤지고 있었다. 날씨는 가을이라 귀뚜라미들이 펄쩍 뛰는 일이 많았다. 샌슨은 풀밭을 뒤지면서도 몇 번 이나 내게 아무에게 말하지 말 것을 맹세하라고 재촉했고, 난 17세라서 맹세는 못한다고 잡아뗐다. 맹세는 자기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성년이 되어야 할 수 있는 것이잖아.
“그럼 약속해!”
“약속이라. 그것 곤란한데. 내 입은 때론 나도 주체하지 못해서.”
진실을 얘기하고 싶어하는 내 입과는 달리 샌슨은 갖은 욕설이 터져나오는 입을 가지고 있었다. 흠, 그러고 보면 난 얼마나 고상한가.
잠시 후 나는 조그만 구리 반지를 찾아냈다.
“샌슨, 찾았어!”
샌슨은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했다. 난 건네주며 말했다.
“작아서 손가락엔 못 끼겠군. 또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실에 꿰어 목에 걸어.”
“아, 그랬는데 끊어졌던 거야. 이번엔 쇠사슬이라도 준비해야겠어.”
샌슨은 날 보지도 않고 말했다. 시선은 모조리 그 구리 반지에 쏠려 있었고 혹시나 그것이 어디 상하지나 않았나 살피듯이 이리 돌려보고 저리 뒤집
어보고 쓰다듬어보고 난리도 아니었다. 나만 옆에 없다면 입 안에 넣어 맛이라도 볼 듯한 태세다. 정말 닭살 돋아 못 봐주겠다.
우리 둘은 잠시 땀을 식히기 위해 나무 아래에 앉았다. 샌슨은 그때까지도 반지를 만지작거리더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번에 돌아오면 정식으로 사람들에게 알리고 결혼식을 올릴 거야.”
“돌아오면이라니?”
“그야 아무르타트 정벌에서 돌아오면.”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샌슨도 가? 샌슨은 성의 경비대잖아.”
“성의 경비대라기보다는 헬턴트 영주님의 경비대지. 성을 지키는 것은 곧 영주님을 지키는 것이잖아.”
“아, 그야 그렇긴 한데…..
“이번엔 우리 영주님도 출진하신다.”
이건 우리 아버지가 정벌군에 자원했다는 것보다 더 웃긴다. 난 기가 막혀서 말했다.
“영주님이? 말 타는 법은 안 잊어먹었어?”
“응? 어떻게 알았냐? 그래서 전차로 나가시는데.”
난 입을 딱 벌렸다. 아니, 전차라니? 내 상상력으로는 전차 같은 것은 저기 남쪽의 자이펀과의 국경에나 있어야 어울리지 우리 성에 그런 것이 있을 거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우리 성에 전차가 있었어?”
“응. 영주님 명령으로 우리 아버지가 만드셨어. 짐수레를 개조해서.”
난 더 이상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짐수레도, 개조 전차도 아니라 장의 마차일 것이다. 정말 기가 막힌다는 말의 의미를 확실히 깨닫는 순간이었 다.
“영주님이 가서 뭐하신다고? 솔직히 말해서 우리 영주님, 전차에서 굴러 떨어지지만 않으면 다행일 텐데 설마 포차드라도 휘두르시겠어?” 샌슨도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뭐, 죄송스럽지만 나도 별로 그러실 수 있을 거라고 믿어지지는 않는군.”
“그럼 왜 나가시는 건데?”
“글쎄. 이번엔 수도에서도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가 왔잖아? 그런데 이 마을의 주인으로서 영주가 안 나갈 수는 없겠지.”
“그럼 할 수 없이 나가는 것이군?”
“할 수 없어서는 아니지. 이번엔 하멜 집사도 말릴 수 없다는 거지.”
“응?”
“제6차 정벌군 이후로 영주님은 계속 출진하고 싶어하셨어. 하지만 그 동안은 하멜 집사가 계속 못 가도록 막아왔거든? 하지만 이번엔 수도에서도 귀빈들이 왔으니까 하멜 집사도 막을 수 없지.”
6차 정벌군……. 아아. 영주님의 외동아들인 젊은 영주님이 전사했을 때다.
기억이 난다. 젊은 영주 헬턴트 남작. 우리야 귀족의 이름엔 관심 없고 우리 마을에 귀족이라고는 영주이신 헬턴트 자작 이외엔 없으니 헷갈릴 것도 없었다. 하지만 헬턴트 자작의 아들인 알반스 헬턴트가 수도에서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자이펀과의 전투에서 뭔가 공을 세운 다음, 헬턴트 남작이 되 어 우리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영지를 얻어 돌아왔을 때는 우리들도 좀 헷갈렸다. 그래서 우린 처음엔 헬턴트 자작, 헬턴트 남작, 이렇게 부르다가 그냥 귀찮아서 입에 익은 대로 우리 영주님, 그리고 젊은 영주님이라고 불렀다. 젊은 영주님도 그걸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젊은 영주님은 자기 영지를 오래 다스리지는 못했다. 자기 아버지의 영지를 괴롭히는 아무르타트에 대한 증오는 젊은 헬턴트 남작이 태어났 을 때부터 키워왔던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헬턴트 자작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6차 정벌군에 합류했다.
그리고 3주 후, 비오는 마을 대로에서 젊은 영주님의 투구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던 젊은 영주님의 어머니 영주 마님의 모습이 보였다. 난 그때 사정 도 모르고 영주 마님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울기에 덩달아 울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영주 마님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전혀 저택 밖으로 나오지 않으시는 것이다.
난 그때를 떠올리며 낮게 말했다.
“하긴…… 젊은 영주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우리 영주님은 살아도 곧 그곳이 지옥. 차마 아침마다 떠지지 않는 눈을 뜨며 아드님이 존재하지 않는 현
실을 바라보고, 밤마다 감기지 않는 눈을 감으며 아드님이 죽는 악몽 속에 잠드셨겠지.”
샌슨은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야, 혹시 머리에 열이 난다든가, 맥박이 좀 이상하다든가…….”
“됐어요, 됐어. 몰래 연애할 시간이 있으면 책 좀 읽어!”
이건 언젠가 칼이 나에게 했던 말을 좀 바꾼 것이다. 하지만 샌슨은 싱긋 웃을 뿐이다.
“그럼, 돌아오면 축복 속에 결혼식?”
“응. 축하해 줄 거지? 너도 정식으로 초대할게.”
혹시 살아서 못 돌아온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난 17세였다. 하지만 그런 나로서도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렇게 질문해 봤자 무슨 좋은 대답을 들을 것인가. 그 스스로도 그
런 생각, 엄청나게 떠올려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난 그 말을 꺼내는 대신 밝은 표정을 지으며 정답게 말했다.
“정말…… 정말 그 아가씨 불쌍해. 어디서 이런 오거 같은 남자를…… 오호, 물레방앗간이 웬수로다.”
“뭐야, 이 자식아!”
“아니, 누구를 원망하랴. 그 밤에 물레방앗간으로 나오라는 말에 왜 아무런 경계심 없이 나갔더냐. 그날 이전까지 청년은 처녀의 것이었지만, 그날 이후로는 처녀는 청년의 것 되었도다. 달빛도 붉게 물들일 청년의 애타는 고백이여. 청년은 거부의 말도 못하도록 처녀의 입술에 감미로운 자물쇠를 채웠으니, 아아, 애닯도다. 애처롭다. 그 입술을 도둑맞음으로써 처녀의 자유는 이미 사라졌으니. 새장에 갇힌 새요, 고삐 채운 야생마…….”
“임마! 후치! 서! 안 때릴 테니까 서! 너 잡히면 죽어!”
샌슨은 눈물을 쫙쫙 뽑으며 경비 대장의 임무도 망각한 채 앞뒤 안 맞는 말을 하며 날 추적했고 난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마을 대로를 달려갔다. 마을 사람들은 대단히 협조적이어서 샌슨은 곳곳에서 이상하게 발이 걸리고 요상하게 부딪혀서 나는 여유 있게 노래를 할 수 있었고 마침내 마을 사람들의 열렬한 호응과 기대 속에 처녀의 이름이 공개될 뻔했으나…… 불쌍해서 관뒀다. 다음에 또 써먹으려면 아껴둬야지.
음식 찌꺼기가 든 나무통을 둘러멘 채 나는 숲 속의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을 정도로 좋은 날씨였고, 샌슨이 쥐어박은 정수리 의 통증도 가실 듯이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기름 비린내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망치고 있었다. 난 그저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때 오솔길 옆 나무 뒤에서 제미니가 팔짝 뛰어나왔다.
“안녕!”
제미니는 두 손을 뒤로 돌린 채 나타났다. 엉덩이를 쓰다듬고 있는 것이다.
“꽤 맞았냐?”
제미니 어머니의 손바닥에 맞을 바에는 웬만한 남자의 주먹을 맞는 것이 나을 거야. 하지만 17년 동안 단련된 제미니는 까딱없는 모양이다.
“으응. 그런데 웬 기름통이야? 어제 일 끝났다고 했잖아.”
“주문이 더 들어왔어. 아무르타트 정벌군에 사용될 양초.”
“그래? 얼마나 더 만들어야 되는데?”
“그건 나도 몰라. 수도에서 온 기사들과 정벌군 지휘관들이 작전을 세워야 소모량이 정해지는 거지. 하지만 내 생각이지만 별로 많이 쓰이지는 않을 것 같아.”
“왜애?”
제미니는 나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야 기사들도 별로 없고 작전도 별로 없을 테니까. 다른 때는 사람들이 많아서 양초도 많이 필요했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잖아. 이번 싸움은 결국 아무르타트와 캇셀프라임의 대결이야. 그러니 기사들이 밤을 새워가며 작전을 짤 까닭은 없고…… 열흘 거리니까 오가는 데 소모될 양을 다 따져봐도 100개 정도 되겠지.”
“흠. 그렇겠네.”
제미니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그런데 어제 드래곤 라자 말이야, 싸움이 시작되면 그 아이가 캇셀프라임에 타는 거야?”
“응? 왜? 타지 않아.”
“어? 캇셀프라임을 타고 지휘해야 되는 거 아니야?”
“그 꼬마가 무슨 싸움을 안다고. 네가 말하는 건 드래곤 나이트야. 드래곤의 허락으로 드래곤을 타게 되는 기사. 드래곤 라자는…… 그러니까 드래곤 과 인간의 매개물 정도지. 드래곤이 인간의 명령을 듣게 되는 계약을 나타내는 일종의 상징물.”
나는 장엄하게 설명했지만 제미니는 입술을 실룩거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고, 골이야. 야이 계집애야! 그러니까 말이야, 네가 사는 곳은 어디야? 영주의 숲이지?”
“응.”
“그런데 영주의 숲지기는 영주님 자신이지? 그러니까 실제로 이 숲에서 나무를 자르고, 과일을 따고, 버섯을 캐고, 사냥을 할 권리는 모두 영주님에 게 있잖아.”
“어…… 그렇지.”
“하지만 사실 숲지기는 네 아빠지. 알겠어? 이 숲에서 나무를 자르고 버섯을 캐려면 영주님께 허락을 얻는 것이 아니라 네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아야 되잖아.”
제미니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알겠어? 드래곤 라자도 드래곤의 주인이지만 실제로 드래곤에게 뭘 부탁하려면 드래곤 라자에게 할 필요 없어. 드래곤에게 직접 부탁해야 돼. 캇셀 프라임도 마찬가지야. 아무르타트를 무찔러주면 좋겠다고 인간들이 말했고, 캇셀프라임은 그 말을 들어주기로 결심했으니까 가서 싸우는 거야.” 제미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응, 저,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캇셀프라임에게 ‘날 태워주세요.’그러면 캇셀프라임이 좋을 경우 날 태워주는 거야? 그러니까 드래곤 라자의 허락 을 받지 않아도?”
“어라? 정확해. 제법이군. 그러니까 이런 거야. 드래곤과 인간이 직접 의사를 나누는 거지. 드래곤 라자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 하지만 드래곤 라 자가 없는 드래곤은 인간과 아예 아무런 의사도 나누지 않고 보는 족족 죽여버리려고만 하지.”
“아무르타트처럼?”
“그래…… 그 빌어먹을 새끼처럼!”
나는 돌멩이를 걷어차 버렸다. 얄밉게도 돌멩이는 나무에 부딪혀 다시 내 발 앞으로 돌아왔고, 난 그걸 더 힘껏 걷어찼다. 돌멩이는 풀숲 속으로 사라 졌다.
“화내지 마아.”
“제길, 난 그 이름이 싫어!”
제미니는 날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고 난 외면해 버렸다. 그러자 제미니도 시선을 돌려버렸다. 우리는 말없이 그렇게 조금 걸었다. 갑자기 제미니가 말했다.
“정말 그래볼까?”
“응?”
“캇셀프라임에게 날 태워달라고 부탁해 볼까?”
내 분노는 남김 없이 사라져버렸다. 아이고, 그랑엘베르여!
.물론 캇셀프라임은 널 태워줄 거야.”
“정말?”
“응. 그리고 높은 하늘로 올라가서는 널 냠냠 씹어서 꿀꺽 삼키고는 시치미 뚝 떼고 내려오겠지. 아마 트림도 안할 거야. 너 정도론 배가 별로 부르 “지…….”
“후치! 끔찍한 말 자꾸 할래?”
제미니는 내 발을 콱 밟고는 달려가 버렸다. 망할 계집애. 메고 있는 기름통 때문에 달려가지 못해서 난 고함만 좀 질러주었다. 제미니는 멀리서 나에 게 감자를 먹였다.
망할, 망할, 망할! 저 예쁜 것!
응? 어라, 내가 미쳤나?
양초를 고기 시작했다.
미리 잘 다듬은 동물 지방을 물 속에 넣고 은근한 불에 끓인다. 잠시 후 물 위로 기름이 떠오르면 그것만 살짝 떠낸다. 이것은 꽤 덥고 냄새도 고약하 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힘든 작업이다. 이렇게 기름만 걸러 모은 다음, 여기에 왁스 등의 고형제를 집어넣는다. 그러고는 미리 가운데 심지를 묶어둔 틀에 이걸 붓는다. 심지는 보통 갈대를 사용한다. 실을 꼬아서 심지로 쓰면 불꽃이 곱지만 실은 비싸다. 그래서 갈대를 기름에 적셨다가 잘 말려서 심 지로 쓴다. 갈대 심지는 불꽃이 탁탁 튀고 광도도 약하지만, 재료가 공짜니까.
그러곤 응달에서 적당히 식힌다. 그런 뒤 틀을 떼어내면 양초가 완성된다.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지만 직접 해보라고.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 을 알게 될 것이다.
나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다. 기름의 녹은 정도를 살피는 것이라든지, 고형제의 양을 정하는 것, 갈대 심지가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기름을 붓는 것, 모두 손끝의 기술이 필요하다. 재수 없어서 심지를 끊어먹기라도 하면 양초 한 개분의 재료를 다 버려야 된다. 한 번에, 정확히 붓는 이 기술은 나도 익히는 데 꽤 세월이 걸렸다.
그런 중요한 모든 업무가 전부 내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난 탁 트인 작업장 가운데 앉아 냄비의 기름을 부으며 아버지를 감상했다.
아버지는 옆에서 좀 지시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아예 작업장 근처에도 안 오신다. 어디서 나무 작대기 하나를 깎아와서는 마당에서 휘두르고 계신다. 아마 창이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저기에 이름이나 붙이지 않았다면 다행이겠다. 다 큰 어른이 나무 작대기를 휘두르면서 아주 진지하게 ‘야! 하 앗! 얍!’ 따위의 기합을 지르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리 내 아버지라 해도 정말 못 봐드리겠다.
“아버지.”
“다 했느냐?”
“예. 틀은 다 채웠어요.”
우리집에는 양초틀이 전부 40개다. 따라서 100개를 만들려면 세 번에 걸친 작업이 필요하다. 물론 아무도 100개를 만들면 된다고 하진 않았지만 내 예상으론 그 정도 될 것이다. 그리고 난 지금 그 40개의 양초틀을 다 채우고는 정확하게 냄비를 비웠다. 남는 건 무조건 버려야 되는 것이니까(두 번 끓 이면 못 쓴다). 난 눈대중으로 아주 정확하게 재료를 맞췄던 것이다.
아버지도 그걸 보셨다. 내가 냄비를 들어올려 보였으니까.
“사랑받는 남편이 되겠다.”
ແ .감사합니다.”
난 양초틀을 응달로 옮기고 냄비를 씻고 재료를 갈무리했다. 그 동안에도 아버님은 계속해서 ‘으랏차차!’ ‘어기여차!’ ‘으샤으샤!’ ‘어절씨구!’ 등의, 창술과는 무관할 듯한 기합을 동원하며 나무 작대기를 휘두르고 계셨다.
“보고 있기가 괴로워요.”
“겸허하게 존경해라. 질투는 곤란해.”
“제가 대무(武)해 드릴까요?”
“드디어 골육상쟁이로구나. 작대기 하나 준비해 오너라.”
난 작업장 한켠의 막대기를 고르다가 아버지께서 들고 있는 것을 흘깃 보았다. 그러고는 월등히 길고 묵직한 놈으로 골랐다. 아버지의 눈썹이 올라갔다.
“허허허. 목수는 연장을 탓하지 않는 법.”
난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른 것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더 커다란 걸 집어들었다.
“망할 놈.”
난 그걸 머리 위로 들어올려 붕붕 돌렸다. 샌슨이나 그 부하들이 가끔 이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동작에 나만의 고유한 동작을 끼워 넣었다. 샌슨은 마지막에 창을 내려 허리 높이에 들지만, 나는 그것을 놓치고 헐레벌떡 주우러 달려갔으니까.
어쨌든 아버지와 나는 간신히 마당에서 나무 작대기를 든 채 노려보고 있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보기엔 도대체 들고 있는 자세부터가 엉성했 다. 무슨 칼을 드는 것도 아닌데 가슴 앞에 세워들고 다리는 각각 제멋대로 가 있다. 이래서야 찌르면 피하지도 못하시겠다.
“다리를 좀 좁혀 어깨 넓이로 하세요.”
“작전이냐?”
.순수한 조언이에요.”
아버지는 순순히 다리를 좁히셨다. 난 자세를 취해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창은 이렇게 드시고요. 무슨 도끼질 하세요? 넓고 헐겁게 잡으세요.”
역시 아버지는 내 말대로 하셨다. 그러곤 우리 둘은 약 30분에 걸쳐 정말 눈 뜨고 못 봐줄 광경을 연출했다.
난 내가 이런 놈인 줄은 몰랐다. 난 막대기를 뻗다가도 움찔해서 도로 물렸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네미를 개 패듯이 두드리셨다. 뭐, 피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엉뚱한 곳을 찌를 정도였으니까. 오히려 내가 피하려다가 아버지의 막대기를 찾아가서 맞는 일이 잦았다.
“흠, 더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보이세요?”
“전혀. 일어나거라.”
난 아버지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석양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어깨에 기대어 오두막 앞의 테이블까지 걸어갔고 아버지는 몸소 물병을 가져오셨다. 주위는 온통 붉었고 아버지의 얼굴은 그래서인지 따스해 보였다.
난 물을 한 모금 들이키고 말했다.
“아버지. 정말 이래가지고 돌아오시겠어요?”
“그래. 나도 그게 걱정이다. 지휘관이 내 솜씨에 반해서 그대로 수도에 끌고 가 임금님께 알현이라도 시키겠다면 어떻게 하지? 난 이 마을이 좋은 데.”
아버지는 내 머리를 헤집으면서 웃으셨다.
“걱정 마라. 나아지겠지. 앞으로 8일 남았으니.”
“8일 후가 출전이에요?”
“응. 오늘 성에서 그렇게 들었다. 내일부터는 성의 훈련에도 참가할 테고.”
“고작 1주일 훈련해서…….”
“뭐, 작전 지휘관들은 우리에게 별로 기대하지 않는 모양이더구나. 어차피 싸움은 거의 캇셀프라임이 맡게 될 테니까.”
“캇셀프라임 뒤에 꼭 숨어 있으시고 혹시나 ‘돌격!’어쩌고 하면 그대로 ‘으악! 적의 화살에 맞아버렸나 봐!’ 하고 쓰러져버리세요.”
.아무르타트가 활도 쏘느냐? 지휘관에게 그 정보를 알려줘야겠구나.”
“지휘관은 누군데요?”
“드래곤 라자를 호위해 온 수도의 기사다. 기사 휴리첼. 백작이라던데.”
“백작이면 우리 영주님보다 높네요?”
“자이펀 전쟁의 최전선이 아니라 이런 시골 영지의 작전에 파견된 인물이니 뻔한 것이니라. 능력이 없거나 수완이 없는 백작이겠지.”
“그런데 백작쯤 되는 사람이 끌고 온 병사가 고작 그거예요?”
“글쎄. 캇셀프라임을 가리켜 고작 그거라고 말하느냐?”
“하긴 그렇군요.”
난 고개를 돌려 서쪽을 바라보았다. 붉게 타오르는 석양. 서쪽은 아무르타트가 있는 곳이다. 갑자기 난 그 붉은 석양이 아무르타트가 토하는 불꽃처 럼 느껴졌고, 그 따스한 붉은 빛 속에서 어처구니없게도 한기를 느꼈다. 난 몸을 부르르 떤 다음 그대로 테이블에 엎어져 잠들어버렸다. 대무가 너무 힘들었던 모양이다.
타오르는 붉은 불꽃.
집을 태우고, 마을을 태우고, 하늘과 땅을 태우고 있다. 보이는 건 불꽃뿐이다.
어머니가 불타고 있다.
불의 신발, 불의 옷, 불의 머리카락. 팔에는 불의 팔찌가 타오른다.
어머니의 표정은 평온하여, 그 광경은 아름다워 보였다. 어처구니없게도 난 어머니가 참 따스해 보였다. 그 품에 안기면 저 불이 날 따스하게 해줄 것 같다.
어머니께 달려간다.
어머니는 두 팔을 벌리신다. 어서 오렴, 어서 오렴.
어머니의 두 팔이 활짝 펼쳐진다. 어서 오렴. 계속 펼쳐진다. 어서 오렴. 마침내 다 펼쳐진 그것은 검은 날개.
어머니의 어깨 위에, 엉뚱한 머리가 있다. 검고 번쩍이는 피부. 그래서 주위의 불꽃을 일그러진 모습으로 반사한다. 앞으로 휘우듬하게 돋은 뿔, 그 대로 달려가면 저기에 찔려버리겠지. 그 머리는 입을 벌린다. 그 안은 터무니없이 거대한 동굴, 절대, 암흑, 영원, 무한.
난 왜 계속 달려가고 있을까.
“멍청아! 어딜 달려가는 거야!”
아버지에 의해 간신히 나는 벽난로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멈추게 되었다. 조금만 더 달려갔다간 그대로 머릿가죽을 홀랑 태워먹을 뻔했다. “꿈꿨냐?”
그러고 보니 난 모포에 둘둘 말린 채 오두막 바닥에 있었고 아버지는 침대에 걸터앉아 뭔가를 쓰고 계셨다. 아버지는 쓰고 계시던 것을 장 위에 올려 놓으시고는 나에게 다가와 이마를 짚으셨다. 그러곤 머리를 갸우뚱하셨다. 내 이마엔 땀이 흠뻑 돋아나 있었고 난 그때까지도 멍한 눈으로 앉아 있었 다. 아버지가 내 눈을 뒤집어보기까지 하셨는데도 난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아버지는 결국 주먹을 불끈 쥐고 뒤로 당기셨다.
“거기서 멈추시죠.”
“다행이구나. 저녁도 먹지 않고 자서 그런 게냐? 하긴 네 나이에 그건 예삿일이 아니지. 저기 테이블 위에 빵 있으니 먹어라.”
난 일어섰지만 빵을 먹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대로 오두막 바깥으로 나온 것이다.
“땀 좀 식힐게요.”
“그래라.”
모포 속에 있다가 밖에 나오니 무시무시하게 추웠다.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하지만 땀을 흘린 이후라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내일 감기로 쓰러 지든 말든, 난 작업장의 물통에 다가갔다. 물통에 머리를 박으려는 순간, 나는 움찔했다.
물통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암흑이었다. 물이 들어 있는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도저히 머리를 갖다 박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머리를 집 어넣기만 하면 그대로 온몸이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난 치를 떨며 물통에서 물러나 오두막의 벽에 기대어 앉았다.
“엄마…….”
어머니라고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겐 어머니라는 말로 어머니를 부른 시기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내 오랜 기억이 시키는 대로 말은 그렇게 나왔 다.
풋. 이게 무슨 감상 어린 사춘기 꼬마의 말투냐.
그런데 왜 볼이 축축해지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