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1권 – 제 2부 : 주전자와 머리의 비교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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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나는 대야를 앞에 두고 세수를 하며 눈물을 흘릴 뻔했다.
“대야가 이렇게나 소중한 것인지는 몰랐어!”
게다가 세면실에는 비누까지 있었다. 난 말로만 듣던 이 진귀한 물건을 쓰느라 퍽 고생해야 했다. 도대체 손에 쥘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샌슨은 그 런 내 모습을 보며 피식거렸지만 초조한 기색이었다. 그는 아침 식사를 하러 가는 도중에도 계속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는 퍽 일찍 일어났기 때문에 식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스네는 우리가 들어왔는데도 일부러 못 본 척하며 다른 테이블을 닦고 있었다.
“야, 유스네! 그렇게 둔감하니 남자에게 걷어차였지?”
“아침부터 저게!”
유스네는 발칵 화를 내었다. 나는 유들유들한 표정으로 말했다.
“주문이나 받아, 빵하고 수프면 어떤 종류라도 상관없어.”
칼과 샌슨도 각자 주문했다. 샌슨은 초조하게 식당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고 칼은 짐짓 그런 샌슨을 못 본 체하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른 테이블 위 에 넓은 종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주워 읽기 시작했다.
“그게 뭐예요?”
“잡지라네. 네드발 군.”
“잡지?”
“이건 주간 잡지로군. 매주 이 도시에서 일어난 일을 적은 종이야. 마을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거지.”
“영주님 포고문 같은 거예요?”
“아냐. 이건 시민이 발행하는 거야. 누구네 집의 암소가 실종되었다든지 돌아오는 화요일이 누구 생일이라든지. 아니면 남쪽 자이펀과의 전쟁 소식 이라든지. 이거 재미있군. ‘자이펀이 왜 해군력이 강한가…………….’ 라는 사설인데?”
“헤에…………. 그건 나도 대답하겠네. 사막이 많으니까 바다로 진출할 수밖에 없잖아요?”
내 대답에 칼은 크게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훌륭하네, 네드발 군. 어쨌든 여행자들에게 그런 소식을 받아서 잡지에 싣는 거라네. 그러고는 이 종이를 팔아서 돈을 받는 거지.”
“허! 그걸 돈을 주고 사본다고요? 헤, 그냥 누구에게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니에요?”
“아니, 그렇게 비싸진 않아. 그리고 이 도시는 우리들의 고향보다는 훨씬 크니까 모든 소문이 다 퍼지기는 어려워요. 어디 보자. 여기 이 광고를 보 게. 네드발 군. 헤이즐 언덕의 그랑엘베르 신전 소식이군. 그랑엘베르 신전에서 동절기 교리 연구가 있으니 관심 있는 시민들은 겨울 동안 수습 신관 이 되어 그랑엘베르 탐구에 동참해 보라는군. 가을걷이도 끝나고 이제 신전에서도 농사일이 없으니까 교리 연구에 들어가겠지?”
“어, 그거야 그냥 알릴………… 수가 없나?”
“이 도시는 꽤 크다네. 그러니까 이렇게 알리고 싶은 소식이 있는 사람은 잡지사에 돈을 주고 그 소식을 실어달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여긴 영지가 아니라 도시니까 시청 같은 곳에서 시민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면 역시 이런 잡지사에 돈을 주고 싣기도 하고…………. 그래서 잡지 값은 그렇게 비싸지 않아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종이 값은 엄청 비싸잖아요?”
“글쎄. 아마 잡지사에서는 신전과 계약하고는 신전에서 제공하는 종이를 공급받겠지. 대신 신전에서는 싼 값에 잡지에 이런 소식을 싣든가 하겠지.” 칼은 싱긋 웃었고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끔찍스럽네. 이런 여행이라도 나오지 않았다면 잡지라는 것이 있다는 거 죽을 때까지 몰랐겠는데요?”
옆에서 테이블을 닦던 유스네는 내 말을 듣고는 코웃음을 쳤다. 흥. 그래, 나 무식하다. 너도 헬턴트 영지 같은 곳에서 살아봐, 어떻게 되는가. 칼은 말했다.
“여행은 항상 새 지식의 습득이라는 유쾌한 선물을 준다네.”
“흠. 아! 우리도 그럼 잡지사에 소식을 팔아먹어요.”
“응?”
“제9차 아무르타트 정벌군 패배하다.어때요?”
“좋은 생각이네만, 먼저 국왕께 알리고 생각해 보세. 순서라는 게 있거든. 왕의 드래곤이 패배했다는 이야기는 먼저 국왕께 보고해야 하지 않겠는 “가?”
그때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왕의 드래곤이 패했다고요?”
이야기에 빠져 있느라 우리는 이루릴이 다가와 있다는 것도 못 알아차렸다. 이루릴은 우리들의 테이블에 앉으며 다시 물어왔다.
“왕의 드래곤이라면, 누가 누구와 싸우다가 패했다는 거지요?”
누구? 흠. 어느 것이냐고 묻지 않고 누구냐고 물으니 조금 이상하네. 칼은 대답했다.
“좋은 아침이외다. 세레니얼 양. 우리 이야기를 들으셨다면 아시겠지만, 먼저 전하께 보고해야 되는데요.”
“그분은 저의 국왕이 아니에요.”
이루릴은 담담하게 칼의 실수를 지적했다. 칼은 미안한 듯이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세레니얼 양, 캇셀프라임이 아무르타트에게 패했습니다.”
“캇셀프라임이라면 할슈타일 가의 화이트 드래곤 말인가요?”
“어, 잘 아시는군요?”
이루릴은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무르타트면… 석양의 감시자, 헬카네스의 검은 창인 그 블랙 드래곤의 이름이군요. 그가 깨어났나요?”
어, 어? 무슨 말이야, 깨어나다니. 언제는 잠들어 있었나? 그러나 칼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예. 약 50년 전에 깨어났습니다.”
“그런가요.”
윽. 관념을 뒤엎는군. 이 엘프 아가씨는 50년 동안이나 그 소식을 몰랐단 말인가? 나는 그것을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때 유스네가 우리 식사를 가져 왔다. 유스네는 이루릴이 우리와 합석한 것을 보더니 말했다.
“당신은 뭘 드시겠어요?”
“빵과 우유.”
유스네는 당장 가져왔다. 주문이 간단하다보니 퍽 빠르군. 난 엘프들에게 식사하는 동안 말을 걸어도 되는 건지 몰라서 잠자코 있었고 샌슨은 이루 릴이 먹는 모습을 감탄한 듯이 바라보았다. 참 별 게 다 구경거리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 먹는 걸 저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다니. 난 테이블 아 래로 샌슨의 다리를 차서 주의를 주었다. 샌슨은 당황하여 다시 자신의 식사를 했지만 어느새 스푼을 든 채 멀거니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스푼에서 수프가 떨어져 테이블을 적시는데도 모르고 있었다. 아이고! 못봐주겠다! 이루릴도 샌슨의 그런 모습을 보더니 놀라서 말했다.
“샌슨 씨. 수프가 떨어지는데요?”
“예? 아, 예.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거야…………, 정말 미치겠네. 이루릴도 의아해서 샌슨을 바라보았고 샌슨은 수프 접시에 얼굴을 가져다 박듯이 하고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유스네의 오빠인 그 털북숭이는 요리 솜씨가 정말 좋았다. 난 수프 접시를 핥지 않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써야 했다. 유스네가 날 노려보고 있지만 않 았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조용히 식사가 끝나자 유스네는 후식을 물어왔고 전부 주스를 부탁했지만 칼만은 커피라는 것을 주문했다. 커피 가 뭐지? 잠시 후 유스네는 김이 펄펄 나는 시커먼 것을 가져왔다. 찻잔에 담아온 것으로 보아 차 비슷한 것 같은데.
칼은 기쁜 듯이 커피를 마셨다.
“허, 오래간만이군.”
저게 뭘까? 맛있나? 나는 주스를 홀라당 마셔버리고는 유스네에게 커피 한 잔 더 가져오라고 말했다. 유스네는 가소롭다는 듯이 날 바라보더니 곧 커피를 가져와 지나치게 정중한 동작으로 내 앞에 내려놨다. 난 그것을 한 모금 마셔보았다. 옆에서 보고 있던 샌슨이 궁금한 듯이 물어왔다.
“야, 후치. 그거 맛있냐?”
내가 대답하지 않자 샌슨은 더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주 불길한 추리를 하느라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잠시 후 나는 처절한 눈빛으로 유스네를 바라보았다.
“우………… 유스네! 네, 네가 날 독살하려고?!”
일대 소동 끝에 나는 칼의 설명으로 그게 약을 탄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런 맛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스네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고 샌슨은 숨이 넘어갈 듯이 웃어대었다. 망신이다, 망신. 하지만 도대체 이걸 무슨 정신으로 마시는 거야?
어쨌든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샌슨과 이루릴은 말을 사러 가게 되었고 칼과 나는 시장을 보러 나섰다. 그러자 이루릴은 모두 함께 다 니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자신도 살 물건들이 있으니 같이 시장을 돌아다녀 보자고 했다. 나는 유스네에게 부탁해 손수레를 얻었다. 유스
네는 내가 손수레를 부숴먹을 거라는 듯이 툴툴거리면서 내주었다.
“시장 볼 거야?”
“응.”
유스네의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그녀는 억지로 화를 참는 표정이 되더니 말했다.
“쳇. 하필 내가 시장 보러 나갈 때로군. 따라와.”
“어, 그래? 다행이네. 그런데 너 혼자 시장 보려고? 이 큰 여관에서 사용할 거라면 부피가 클 텐데?”
“흥! 촌뜨기. 주문만 하면 돼! 그럼 배달해 주는 거야.”
“어? 그래?”
유스네가 인도해 주어서 시장을 찾는 것은 간단했다. 유스네는 시장에 도착하자마자 우리와 헤어졌다.
밀가루, 건육, 베이컨, 오늘 저녁에 만들어 먹을 야채들 조금, 소금과 기타 등등. 물건값은 대단히 저렴했다. 우리 마을에서라면 상상할 수도 없이 싼 가격이다. 특히 종이 가격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칼을 졸라서 종이를 가득 샀다. 종이는 뭣에라도 쓸모가 있겠지. 최소한 뭘 적어둘 수 있 는 거니까. 나는 내친 김에 펜과 잉크도 사서 짐수레에 담으며 기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왜 이렇게 싼 거죠?”
칼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 마을이 너무 비싼 거라네. 상인들이 잘 들락거리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곳 레너스 시는 휴다인 강의 수로도 있고, 또 중부 대로의 관문이니까 물건들은 많지. 그러니 쌀 수밖에.”
“우리도 아무르타트만 없어지면 중부 대로의 관문 도시예요. 그러면 우리 마을도 물건이 많아지고 가격도 싸지겠지요.”
칼은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때 이루릴이 말했다.
“후치. 당신은 보다 즐겁고 풍족해지기 위해 아무르타트가 없어지길 바라는 건가요?”
“보다 덜 비참하기 위해 아무르타트가 없어지길 바라는 거예요.”
이루릴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즐거운 쇼핑에서 아무르타트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아마 고블린들의 동굴에 갇혀서 입에도 댈 수 없을 것 같은 음식들을 먹고 계시겠지. 빌어먹을. 그런데 나는 여기서 대단히 싼 물건들 사이에서 즐거워하고 있다. 아버지, 아버지의 자식은 왜 이 모양이지요?
생각이 거기까지 진행되었을 때였다.
“크아아악!”
비명소리. 여기가 헬턴트 영지인가? 시장의 분위기는 돌변했다. 사람들은 마구 뛰고 있었는데 방향성이 없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이곳 으로. 하지만 샌슨은 날카롭게 비명의 진원지를 파악했다.
“저기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가보세나.”
칼이 앞장섰다. 그 동안에도 계속 비명소리와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우리가 달려가는 방향에서 사람들이 마구 달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뭘까? 이윽고 그 사람들의 등 뒤에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젠장, 어디선가 한 번 겪었던 일이로군. 트롤 세 마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뭐야? 트롤이잖아? 어떻게 도시 한가운데에서?”
샌슨은 당황하며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사람들은 정신없이 달아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앞쪽에서 웬 건장한 사나이가 앞의 할머니를 밀쳐버리는 장 면이 보였다. 그 할머니는 땅으로 구르더니 일어나지 못했다. 발목을 다쳤는지 비척거리며 일어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공포와 고통으로 도저히 일 어나지 못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아니다, 이건 아니다! 우리 마을에서라면 저 정도의 사나이라면 죽어서라도 버텼을 것이다. 실제로 얼마 전에 우리 마을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내 몸은 내 생각보다 빨랐다.
난 그 사나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사나이는 거친 동작으로 그대로 날 밀고 지나가려 했지만 나는 그 사나이를 붙잡으며 말했다.
“이봐요! 저 할머니를 일으켜 세워요!”
“이 새끼가! 이게 돌았나? 너 저 할마씨 손자야?”
“아니, 그렇진 않아요. 하지만 이럴 수는 없어요!”
그 사나이는 두말하지 않고 주먹을 날려왔다. 이게! 난 그 사나이의 팔목을 붙잡았다. 힘껏 내지른 팔이 갑자기 막히자 그 사나이는 어깨가 부러지는 느낌을 받은 모양이다.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그자를 적당히 처리해 주고 싶었지만 달려오는 트롤이 더 급했다. 난 그 사나이를 집어던져 버리고는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사, 살려줘!”
그 할머니는 울면서 외치고 있었고 트롤들은 거칠게 달려오고 있었다. 트롤이 내려치는 돌도끼가 보였다. 할머니의 머리가 쪼개지기 직전, 난 급한 나머지 할머니의 다리를 잡아당겼다. 간신히 할머니를 구할 수 있었다. 나는 할머니를 뒤로 돌렸다.
“달아나실 수 있겠어요?”
그 할머니는 절뚝거리며 달아났다. 그리고 나는 길을 막아선 채 바스타드를 뽑아들었다. 제기, 잘 봐둬! 헬턴트 영지의 사나이라면 이렇게 한다고! 내 목숨 하나가 얼마의 시간으로 바꿔질 수 있을까. 빌어먹을, 그런데 누구에게 남길 말을 전하지?
“야, 이 자식들아. 날 죽이는 데 얼마 걸릴 것 같냐?”
OPG가 있으니 조금은 버티겠지. 그 동안 저 할머니가 어디까지 달아나려나.
하지만 나에게는 응원군이 있다. 또 다른 헬턴트 토종 사나이 샌슨이 달려와 내 옆에 섰다. 샌슨은 별말도 하지 않고 롱소드를 휘두르기 시작했고 돌 도끼를 든 트롤의 팔이 삽시간에 뼈를 드러내는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샌슨은 낮게 외쳤다.
“내 목숨은 한 개! 그래서 비싸지! 유니크하거든?”
좋아, 저거다! 빌어먹을 정도로 짜릿하군.
“에라, 나는 끝까지 일자무식!”
내가 제일 잘하는 건 그것뿐이야! 트롤은 엉겁결에 돌도끼를 내려치다가 내 바스타드에 두 번이나 맞고 팔이 뎅겅 잘려나갔다.
“키륵!”
그놈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샌슨이 상대하고 있던 놈 말고도 한 놈이 더 있다. 그놈은 내 옆구리에서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날카로운 빛이 나와 그 트롤 사이를 지나쳤다.
이루릴이었다. 이루릴의 망고슈가 아주 희한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이루릴은 내려떨어지는 트롤의 팔에 마치 사과 깎듯이 비스듬히 망고슈를 들이대었다. 그러자 별 힘도 들이지 않고 트롤의 팔 근육은 육포 떠내듯이 들어올려졌다. 도대체 얼마나 침착할 수 있으면 저런 기술을 쓸 수 있을까? “키르르르! 키키륵!”
그놈은 허둥지둥 뒤로 물러섰다. 상처가 빠르게 아물고 있었다. 제길, 트롤이지. 난 이루릴에게 일단 그놈을 맡기고 내 앞의 팔이 날아간 놈을 상대 했다. 그놈의 팔은 아직 재생이 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돌도끼를 들지 않은 반대편 팔이 날아왔다.
“우우욱!”
배에 한 방 맞았다. 내 몸은 부웅 떠올라 뒤로 나뒹굴었다. 죽지 않은 것은 OPG 덕분이겠지. 타이번, 고마워요. 그대로 기절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죽음이다. 나는 구르다가 그대로 일어섰다.
날 바라보며 놀라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고함을 질렀다.
“좀 도와줘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내 목소리가 신호가 된 듯이 다시 몸을 돌려 달아나거나 옆의 건물로 들어가며 문을 닫아버렸다. 이건 말도 안 돼! 쾅쾅거리며 문 닫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네드발 군!”
칼의 목소리에 난 정신을 차렸다. 그 트롤이 나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놈은 어느새 재생된 팔로 날 껴안듯이 후려치려고 했다.
“죽어보자!”
난 한 손으로 바스타드의 검신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칼자루를 쥔 채 땅을 짚으며 앞으로 데굴 굴러버렸다. 트롤의 팔은 허공을 쳤고 난 트롤의 다리 옆을 굴렀다. 그러고는 일어설 사이도 없이 그대로 뒤를 보지도 않고 팔을 뒤로 돌려쳤다. 뭔가 닿았다.
“키르륵!”
놈의 허벅지를 벤 모양이다. 나는 다시 앞으로 구른 다음 일어섰다. 트롤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역시 뒤로 돌아나와 마주섰다. 재생될 틈은 주지 않는 다!
“일자무식, 옆으로!”
나는 바스타드를 수평으로 든 채 허리를 빙글 돌렸다. 하지만 이번엔 한 바퀴 돌고 나서 무릎을 꿇어버렸다. 두 번째는 아주 낮게 베었으며 허리를 뒤로 젖히며 피하던 트롤은 다리를 맞았다. 못 움직이겠지. 지체없이 세 번째 돌 때 무릎과 허리를 폈다. 다리 관절이 부러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앞으로 뛰어오르며 세 번째 회전을 성공시켰다.
트롤의 목이 뎅겅 날아갔다. 그리고 나는 목이 없는 트롤의 몸에 그대로 부딪혀버렸다. 트롤은 쓰러졌고 내 입엔 트롤의 피가 가득 들어왔다. 우웩! 현기증이 난다. 게다가 아무래도 발목이 어떻게 된 것 같은데. 나는 발목의 고통을 참으며 그대로 트롤의 시체 위를 굴러 일어섰다. 주위를 둘러보았 다.
샌슨은 트롤의 정면에 서서 그 오거 같은 힘으로 상대의 몸에 계속 상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웬만한 인간이라면 단번에 죽을 상처였다. 하지만 트 롤은 돌도끼를 휘둘러 샌슨을 물러나게 하면서 계속 상처를 재생시키고 있었다. 한편 이루릴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계속 트롤의 등 뒤쪽이나 옆에 서 있었으며 절대로 정면에 서지 않았다. 트롤은 옆으로 공격해야 되었고, 그럴 때마다 이루릴은 그 팔에 비스듬히 망고슈를 들이대거나 비어버린 허리
나 등에 에스터크를 꽂아넣었다. 하지만 샌슨의 롱소드에 의한 상처도 재생해 버리는 트롤에게 에스터크의 상처는 너무 작았다. 누굴 도와야 되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무의식중에 몸을 일으켰다. 발목에서 엄청난 고통이 느껴져 자칫 쓰러질 뻔했다.
“우음…….”
시장 보러 온 길이라 롱 보를 가지고 오지 않아서 뒤에 있던 칼이 허둥지둥 나를 부축했다. 난 칼의 어깨를 붙잡고 분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커다란 도시. 우리 마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커다란 건물과 넓은 길. 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눈을 들자 2층이나 3층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얼굴들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창문마다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욕지기가 올랐다.
“으아아아아아!”
난 칼을 뿌리치며 앞으로 뛰었다. 내 앞에는 이루릴을 쫓느라 등을 보인 트롤이 있었다. 다리가 휘청거리자 나는 더 생각할 것 없이 한쪽 다리로 뛰 어올랐다. 난 바스타드를 거꾸로 쥐고 그대로 그놈의 등에 바스타드를 꽂아넣으며 매달렸다.
“키르르켁!”
“아아아아아!”
나는 있는 힘껏 바스타드를 밑으로 당겼다. 뭔가 계속 걸리는 느낌이 들다가 일순 바스타드를 쥔 손에 아무런 느낌도 없어지며 바스타드는 자유롭게 빠져나왔다. 놈의 허리 옆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그놈은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나는 쓰러진 그놈의 등에 올라탄 채 바스타드를 내리찍기 시작했 다.
“으아! 으아! 으아아아!”
몇 번을 내리찍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놈의 등과 목은 완전히 너덜너덜해졌고 내 몸엔 그놈의 피가 가득 튀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놈의 머리를 잡 았다. 머리카락이 없었지만 내 손가락은 그놈의 머리를 뚫고 들어갔다. 나는 그놈의 허리가 부러져라 상체를 끌어올린 다음 목 앞에 바스타드를 대고 는 그놈의 머리를 밑으로 밀어버렸다. 목이 간단히 잘렸다. 나는 그 목을 팽개쳤다.
이루릴은 날 보고 있지 않았다. 침착한 그녀. 그녀는 벌써 샌슨을 돕고 있었다. 이루릴은 등 뒤에서 놈의 무릎 뒤를 찔렀고 트롤은 무릎을 꿇었다. 그 리고 샌슨이 그놈의 머리를 쪼개버렸다.
주위는 살점과 핏물로 가득했다. 샌슨이나 이루릴은 그런 대로 깨끗한 상태였지만 내 가죽 갑옷은 완전히 피에 젖어 있었고 얼굴과 손도 피범벅이었 다. 나는 그렇게 트롤의 몸 위에 올라타 앉아 있었다.
샌슨이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휘청거려 다시 쓰러지려 했으나 샌슨이 재빨리 내 겨드랑이를 안아올렸 다.
“다리 다쳤니?”
“접질렸어. 괜찮을 거야.”
“다행이구나. 아무도 안 다쳤어.”
“그런데 이 빌어먹을 도시에는 경비대도 없나?”
“출동이 좀 늦는구나.”
나는 망연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의 건물들의 문이 하나씩 열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왔다. 나온단 말이지? 하! 도와주시려고? 그 사 람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흐르는 핏물이 자기 집 쪽으로 흐르지 못하도록 발로 비벼버렸다. 건물 벽과 문에 튄 피와 살점을 기분 나빠하며 닦아내는 모습도 보였다.
“샌슨. 빨리 돌아가자.”
“돌아가자고?”
“여기 더 있다간 살인날 것 같아.”
샌슨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샌슨의 부축을 받아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칼이 짐수레를 끌고 왔으며 이루릴은 내 옆에서 걸으며 손수건으 로 내 얼굴의 피를 닦아내었다.
“괜찮아요. 이루릴. 어차피 그래가지고 닦이지도 않을 텐데.”
“눈은 보여야 걷지 않겠어요? 자………….., 이제 얼굴은 대충 닦았어요.”
“고마워요. 꼭 손수건 하나 사줄게요.”
이루릴은 대답없이 빙긋 웃었다. 여관까지 빌어먹을 정도로 머네. 거기까지 이렇게 절뚝거리며 가야 된다니 앞이 노랗다.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군. 다리 하나가 말썽이라도 이렇게 불편한데 앞이 안 보이는 타이번은 얼마나 불편할까. 타이번. 당신이 있었다면 깨끗하고 간단하게 트롤들을 처리했겠지요. 이런 역한 광경을 보지 않았어도 됐고 말이야.
“네드발 씨?”
누구야? 이런 황당한 호칭으로 나를 부르는 사람이? 난 피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앞을 보았다. 아는 사람이군.
“야, 용맹 무쌍한 레이디!”
유스네는 시장 한모퉁이에서 질린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뭐라고 할지 짐작이 가서 먼저 말했다.
“여관에 피 묻히진 않을게. 혹시 묻으면 내가 다 닦지.”
“아, 아냐, 후치. 저, 응…………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지 못할 말을 하더니 유스네는 달려가 버렸다. 쳇, 그런데 이 모양으로 어떻게 피를 묻히지 않고 여관에 들어가지? 난 뒤를 잠 깐 돌아보았고 대로에 남아 있는 내 발자국을 보았다. 아주 멋진 붉은색 발자국으로 능숙한 레인저가 아니라도 날 쫓는 것은 간단할 것처럼 보인다. 점점이 이어진 발자국.
내 발자국, 그렇군. 내 발자국이군.
어지럽다.
여관에 무슨 정신으로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도착하니 유스네의 오빠인 그 털북숭이가 여관 현관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는 내 몰골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스네 말대로군요, 손님. 잠깐…….”
“어?”
그 털북숭이는 그대로 날 번쩍 들어올렸다. 뭐야?
“어어! 약간 접질린 거예요! 이거 부끄럽게 왜 이래요?”
그 털북숭이는 그대로 나를 안아올린 채 계단을 달려 올라갔고 칼과 샌슨, 이루릴도 그 뒤를 따랐다. 그는 여관 안으로 들어오더니 식당 옆에 있는 어느 방으로 날 데려갔다. 아무래도 이 사나이의 방인 것 같다.
그는 날 테이블에 앉히더니 내 다리를 살폈다. 그는 내 다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아프지 않습니까?”
“내, 내 표정 보면 모르겠어요?”
“붓고 있군요. 뼈가 부러진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아마 다리 뼈에 금이 간 것 같군요.”
그러자 이루릴이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이루릴은 뭔가를 들고 왔다. 저건 본 적이 있는 건데? 아, 우르크에게 줬던 그 약병과 같은 것이군.
“마셔요. 후치.”
“다리가 부러진 데도 들어요?”
“칼에 찔린 상처도 낫는 것을 봤을 텐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약병을 받아 마셨다. 털보는 놀란 눈으로 나와 이루릴을 번갈아 보았다. 잠시 후, 다리의 통증이 싹 가셨다. 나는 유쾌하 게 테이블 아래로 내려설 수 있었다.
“이런, 테이블이 엉망이 됐군요.”
“그거야 닦으면 되니 상관 마세요. 그런데 다리는 괜찮습니까?”
“끄떡 없어요. 그런데 좀 씻어야겠군요. 여관을 엉망으로 만들겠어요.”
“유스네가 목욕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따라오세요.”
허. 먼저 달려오더니 그 준비를 한 건가? 제법이네. 고맙네. 기특하네. 갸륵하네.
잠시 후, 나는 깨끗이 씻고 옷도 갈아입고는 말쑥하게 홀에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모여 있었고 우리는 맥주 한 잔씩을 마시고 있었다. 그 리고 그 털보도 우리 테이블에 함께 앉아 있었다. 그 털보의 이름은 쉐린이라고 했다. 나는 그 사나이가 여관 주인이라는 말을 듣고 놀랐다.
털보 쉐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래 아버지가 주인이셨습니다. 작년에 지병으로 돌아가시고는 제가 이 여관을 경영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시내 다른 곳의 집에서 살고 계십니다. 장사에는 관심이 없으시거든요. 전 아버지가 계실 때도 요리사였고 장부 정리나 출납은 유스네가 정리하니까 그대로 요리사 일을 하고 있 지요.”
“유스네는 당찬가 보네요.”
그때 칼이 의문을 제시했다.
“그런데 어떻게 도시 한가운데서 트롤들이 갑자기 나타난 걸까요?”
쉐린은 곰곰이 생각하는 투였다.
“직접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아마 투기장에서 달아난 놈들인 것 같습니다. 여관의 하인들을 보내 알아보게 했습니다.”
“투기장이요?”
“예. 이 도시에는 투기장이 있습니다. 거기에 트롤도 몇 마리 있다고 들었는데 그놈들이 달아난 모양입니다.”
투기장이 뭐냐? 어제 듀칸 버터핑거라는 그 하플링이 그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긴 들었는데. 난 얼떨떨한 표정으로 샌슨을 바라보았지만 샌 슨도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쉐린에게 물어보았다.
“투기장이 뭔데요?”
“말 그대로 싸우는 곳입니다. 전사들과 전사들, 혹은 전사들과 몬스터가 싸울 수도 있습니다.”
“왜요?”
쉐린은 당황한 표정으로 날 보더니 말했다.
“구경거리죠. 도박도 하고요. 승패에 돈을 걸고 도박을 하는 겁니다.”
“예에?”
우리들은 당황해 버렸다. 구경거리라니. 내가 우리 고향에서 타이번이 불러낸 일루전과 싸울 때처럼? 하지만 그것은 일루전이니까 일종의 연극 같 은 것이었다. 하지만 아까 트롤은 실제였는데?
“실제의 몬스터와 싸우는 건가요? 그럼 죽을 수도 있는데?”
“그렇습니다. 죽기도 하지요.”
샌슨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그런 미친 짓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누가 거기서 싸우는데요?”
“직업 검투사도 있고……. 보통은 돈이 궁한 사람들이죠. 배당이 낮은 전사가 이기면 막대한 돈을 받을 수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뭐냐, 목숨을 걸고 돈을 번다?”
“그런 셈이죠.”
칼이 의아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그런 사람이 많습니까? 많으니까 투기장 영업이 되겠지만, 내 생각에는 그렇게 목숨을 내던질 정도로 돈이 궁한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직업 검투사라 해도 웬만한 검사라면 자기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승패는 그것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텐데.”
샌슨이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칼은 마치 노련한 전사처럼 이야기했다.
쉐린의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지나쳤다. 수염에 가려 잘 보이지 않긴 했지만 그 눈은 분명 분노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쉐린은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 다.
“여러분은 고리 대금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고리 대금? 그거 비싼 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거 아니야? 그런데 그게 갑자기 왜 나오는 거지? 그런데 칼이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설마………, 그 투기장 주인이 빚 대신 거기서 싸우게 만드는 겁니까?”
“정확하시군요.”
“아니, 시청에선 그런 걸 가만 둡니까?”
“그 사람은 대단히 힘이 세지요. 시청 직원들은 모조리 매수했고 사실 시장도 내키면 갈아치울 수 있습니다. 쉬쉬하지만 다들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리고 우리 시의 경비대는 거의 그 사람의 사병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가진 사병도 대단하지요.”
“맙소사.”
어처구니가 없어지는데.
대충 감은 잡힌다. 그러니까 급하게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준다. 그리고 엄청난 이자로 꼼짝을 못하게 하고선 투기장에서 싸우도록 하는 것이다. 이겨도 돈을 줄 필요는 없겠지. 빌린 돈을 갚는 셈이니까. 그리고 지면 그만이다. 도박을 이용해 돈을 벌 테니까. 이성적으로는 대충 알아먹 겠지만, 가슴으로는 도저히 그런 일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빌린 돈 대신 목숨을 내놓고 싸우라고 말할 수 있는 그 투기장 주인의 머릿속은 어떻게 생 겨먹었을까.
그때 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곧 저벅거리며 복도를 걷는 소리가 들렸다. 샌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지?”
쉐린은 당황한 얼굴이 되었는데, 아마 무슨 소리인지 짐작하는 모양이다. 이윽고 완전 무장을 갖춰입은 여덟 명의 전사들이 홀 안으로 들어섰다. 모 두 체인 메일을 입고 핼버드를 들고 있었다. 대단한 무장이네? 그리고 그 뒤에선 유스네가 달려와 그들을 막아섰다.
“이봐요! 손님들이 있는데 뭐하는 짓들이에요?”
하지만 그 병사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도시의 경비대인가? 하지만 쉐린은 말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사람의 사병입니다.”
에엑? 사병들이 저렇게 무장을 잘 갖춰입었어? 우리 영주님의 경비대 대장인 샌슨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가죽 갑옷을 내려다보았다. 그
들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쉐린, 이 사람들인가?”
쉐린은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병사는 말했다.
“좋아. 우리는 실리키안 남작의 병사다. 당신들이 트롤들을 죽였지?”
실리키안 남작? 그 사람이 귀족이었나?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트롤 한 마리당 200셀이니 모두 600셀이다. 보상금을 지불하도록.”
나는 뭔가 잘못 들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잠깐 동안 샌슨도 말도 못한 채 병사를 올려다보았고 칼과 이루릴도 마찬가지 였기 때문이다. 샌슨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잠깐, 우리가 내놓으라고?”
“그럼 누가 내놓는단 말인가?”
“우리가 트롤들을 죽여준 데 대해 고맙다고 상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보상금을 내라고?”
“이 자식, 이거 돈 녀석 아니야?”
병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내려보더니 당장 샌슨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샌슨은 헛바람을 삼키더니 곧 눈에서 불똥을 튀기며 일어섰다. 그리 고 나도 동시에 일어섰다.
“너 지금 뭐한 거냐?”
“이것 좀 보게?”
“이것? 난 헬턴트 자작의 부하로 헬턴트 본성의 경비대 대장 샌슨 퍼시발이다. 너 지금 나에게 뭐한 거냐?”
병사들은 샌슨의 당당한 말투에 노골적인 비웃음을 띠었다.
“자작이 뭐 어쨌다는 거야? 어디서 굴러먹던 촌놈이 위 아래도 모르고 덤비네?”
“깡촌에서 방금 기어올라온 놈들은 정말 문제야. 도대체가 막혀서 뭘 모른단 말이야. 보면 정말 불쌍한 정도라고.”
“어느 산골에서 산적 두목 비슷한 귀족 모시고 있던 모양이군…………. 퉤!”
이걸 가리켜 어이가 없다고 말하는가 보다. 하도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샌슨도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니 화도 못 내고 있었다. 그때 그 병사가 다시 샌슨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완전히 자기 부하 다루듯이 하네. 샌슨은 신음소리를 내며 허리를 숙였고 그 병사는 핼버드의 창끝으로 샌슨 을 찍으려 했다.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 핼버드를 잡았으니까. 그 병사의 표정이 험상궂어졌다.
“이 꼬마는 또 뭐야?”
그는 핼버드를 당기려 했다. 나는 그것을 한 손으로 쥐고 있었지만 그는 양손으로도 빼앗지 못했다. 나는 핼버드를 비틀며 당겼고 그는 핼버드를 놓 쳤다. 그의 얼굴이 변하기도 전에 나는 그것을 두 손에 쥐었다.
“이건 얼마야?”
“뭐, 뭐야?”
난 그 창대를 부러뜨렸다. 병사들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반으로 부러진 창대를 다시 모아쥐고는 그것을 부러뜨려 네 조각으로 만들 었다. 난 그 조각난 창대를 그 병사에게 던져주면서 말했다.
“너희는 얼마야?”
병사들의 질린 표정에서 드디어 공포가 떠올랐다. 나는 매몰차게 말했다.
“너희를 죽이고 나면 얼마를 내놓아야 되지?”
핼버드를 뺏긴 병사는 뒤로 물러섰고 나머지 병사들은 일제히 핼버드를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서 바스타드를 뽑아들려고 어 깨로 손을 가져갔지만 씻고 갈아입느라 바스타드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샌슨은 롱소드를 뽑으려들다가 참았다.
“밖으로 나가자.”
샌슨은 쉐린의 입장을 생각한 모양이다. 병사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도 핼버드 같은 무기로 실내에서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고 생각했 던 모양이다. 그들은 몇 발자국 물러나더니 곧 밖으로 달려나갔다. 샌슨은 씩씩거리며 곧 그 뒤를 따라 걸으려 했다. 칼이 불렀다.
“여보게, 퍼시발 군. 어쩔 생각인가?”
“우리 영주님이 모욕당했습니다. 그것도 고작 남작의 부하에게. 아니, 남작이라는 것도 믿어지지 않는군. 쉐린? 그 실리키안인가 하는 사람, 정말로 남작입니까?”
“귀족의 부하가 저 모양이겠습니까?”
“생각대로군. 자칭 남작이란 말이지? 어디 두고 보자.”
“그래도 저 많은 인원과 싸울 생각입니까?”
“죽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지만 원하는 장소와 시간을 선택하기는 어렵지요. 따라서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죽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샌슨은 앞뒤가 맞는 듯하면서도 뭔가 이상한 말을 해버리고는 그대로 걸어나갔고 난 부리나케 2층으로 올라갔다. 갑옷은 입을 시간이 없어 바스타 드만 들고 아래로 내려왔다. 여관 밖에서는 이미 샌슨과 그 가짜 남작의 부하 여덟 명이 대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