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2권 – 제3부 :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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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2권 – 제3부 :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 5화

5

아침이 되었다. 푸르게 물들어가는 동녘 하늘 아래로 아스라한 산맥의 그림자가 떠오른다. 산맥은 미드 그레이드의 등뼈인 갈색 산맥이겠지.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검정 산맥이군. 난 시선을 돌려 다시 칼질을 계속했다.

새벽에 나는 이미 부엌으로 와 있었다. 보통 때는 우리 일행의 요리만 준비하면 되지만 오늘은 거의 백 명에 가까운 인원의 요리를 준비함으로써 나 의 요리사적 자질을 시험해 봐야 되는 것이다. 음, 맛에 대해서는 포기하고, 양이나 정확하게 맞출 수 있으면 다행일 텐데. 그때 부엌문에서 누군가가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난 고개를 돌렸다.

에델린이 졸린 눈을 부비며 들어왔다. 그녀는 나를 보면서 환하게 미소지으며 콧구멍을 벌렁거리더니 부엌문 위턱에 부딪히지 않도록 주의하며 들 어왔다.

“후치, 요리 준비하고 있나요?”

“보시다시피…………. 잘 잤어요?”

“예. 어디 보자, 칼 이리 줘요.”

“도와주겠어요? 잘 됐네. 그렇잖아도 물 뜨러 가야 했는데. 좀 부탁하지요.”

난 에델린에게 부엌칼로 쓰던 대거를 건네주었다. 에델린이 드니까 무슨 앙증맞은 주머니칼처럼 보이는데. 난 그것을 보며 미소짓고는 밖으로 나왔 다.

밖의 정원에는 샌슨, 크라일, 터커가 서로 뭉쳐서 덜덜 떨면서 자고 있었다. 하긴 아직 해도 뜨지 않은 가을 새벽의 공기는 엄청나게 차갑다. 난 그들 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봐요! 안으로 들어가 자요. 날이 밝아오니까 이젠 여기 있을 필요 없어.”

샌슨은 일어나면서 턱이 잘 안 돌아간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터커와 크라일은 일어나는 모습이 완전히 달랐다. 크라일은 눈을 뜨고도 그대로 누운 채 한참 허공을 바라보며 웅얼거리다가 정말 참기 어렵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터커는 눈을 먼저 떴는지, 몸을 먼저 일으켰는지 구분하기 도 어렵게 순식간에 일어났다.

“크라일, 이 자식아. 일어나! 새벽잠이 그렇게 많아서.”

“터커…………, 하루라도 그 말 좀 빼먹을 수 없어?”

“요 며칠은 전부 앓아 누워서 그 말 안했잖아?”

크라일은 진저리를 치며 일어났다. 난 피식 웃으며 신전을 나섰다.

물통을 휘두르며 언덕 아래에 있는 우물로 걸어간다. 밤은 지나갔지만 아직 뭔가 위험한 것이 나타날지도 몰라서 바스타드를 꽉 쥐었다. 하지만 아 무 일이 없었다. 나는 싱거운 기분으로 두레박을 우물 안으로 던져넣었다.

텅!

이게 무슨 소리야? 물이 출렁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뭔가 단단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 난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새벽의 으스름한 하늘 아 래에서 우물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한참 동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서 아래를 보았다. 그제야 뭔가 희끗희끗한 것이 보였다. 그런데 눈보다 코가 먼저 반응했다. 이 냄새는…………, 나는 입술을 깨물며 두레박을 황급히 끌어올려 보았다.

두레박에는 물과 함께 썩어들어가고 있는 팔 하나가 담겨 올라왔다.

“물도 못 먹게 하는군. 이젠 더 이상 치료에도 신경쓸 수가 없게 되었어.”

칼은 낙담한 투로 말했다. 물이 없어서 오늘 아침은 퀴퀴한 냄새가 나는 건육과 곰팡이가 살풋 피어 있는 빵을 씹을 수밖에 없었다. 칼은 빵에 붙은 곰팡이를 털어내며 말했다.

“결판을 내야겠어. 오늘 중에 이 영지가 세이크럴라이즈된 이유를 밝혀내고, 그 뱀파이어도 쫓아내야겠어. 아니, 결국 뱀파이어는 질병이니까 이 영 지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면 그것도 사라지겠지.”

에델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이곳이 게덴의 세이크리드 랜드라서 뱀파이어도 생겨났겠지만, 일단 생겨난 뱀파이어는 죽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습 니다. 절대로 원래대로 돌아올 방법이 없습니다.”

칼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환자들에게 마땅히 먹일 것이 없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물기도 없이 바싹 마른 빵과 건육을 넘기는 것은 건강한 사람에게도 힘들다. 하 물며 열 때문에 입이 바짝바짝 타오르고 있는 환자들에게 먹일 수야 없다. 나와 터커, 샌슨, 크라일 등이 마을을 미친 듯이 뒤져서 간신히 포도주와 브랜디 등을 찾아내긴 했지만 환자들의 약한 비위에 술은 너무 독했다.

칼은 더 못 참겠다는 듯이 일어섰다.

“가세! 수색을 시작하세. 여러분도 도와주시겠습니까?”

터커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에델린에게 말했다.

“태양이 떠오르면, 저 환자들은 다시 악화되겠지요?”

“그럴 겁니다.”

“그렇다면 에델린께서는 여기서 어제처럼 신전을 지켜주십시오. 저희들이 영지를 수색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 전에, 여러분들을 축복하겠습니다. 수색하는 동안 병에 걸리면 곤란하겠지요.”

에델린은 신심 어린 표정으로 송곳니를 번쩍거렸다. 칼은 어제처럼 정중하게 축복을 받았고 샌슨과 나도 그랬다. 터커와 크라일은 영문도 모른 채 에델린의 축복을 받았지만 펠레일과 사만다는 그것을 사양했다. 펠레일은 말했다.

“치료하는 손 에델린의 디바인 파워라면, 제겐 너무 위험합니다. 전 마력을 다루죠. 마력은 신력을 거부하는 법입니다.”

무슨 말이야? 하지만 에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만다는 물론 다른 신의 성직자이므로 에델린의 축복을 받지 않았고 이루릴도 어제처럼 축복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사만다까지 동행할 필요가 있을까?

“저, 사만다. 당신은 무기도 없는데, 여기서 환자들을 돌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어, 불쾌하게 생각하진 마시고…………….”

사만다는 날 보며 웃었다.

“까르르르……………. 날 생각하는 거니? 고맙구나. 하지만 나도 무기는 있어.”

나는 사만다가 들어올리는 로드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참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긴 하지만, 남자들이 쓰는 굵직한 전투용 몽둥이라기보다는 가벼운 작대기 정도였다. 게다가 사만다의 체격으로 저걸 휘둘러봐야…………. 하지만 사만다는 밝게 말했다.

“게다가 수색하면서 테페리의 조력을 빼놓을 수는 없지.”

나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자 칼은 덧붙이듯이 설명했다.

“하플링과 갈림길의 테페리의 성직자들께서는 갈림길의 권능을 지니셨네.”

“갈림길의 권능이요?”

그러자 사만다는 웃으면서 땅에서 돌멩이 하나를 들어올리더니 내게 내밀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거대한 장난을 기획하는 악동 같았다. “자, 후치? 이걸 등 뒤에서 아무 손에 쥐고 주먹쥔 채 내밀어 봐. 눈을 감고 있을게.”

응? 무슨 장난이야? 난 어쨌건 시키는 대로 등 뒤에서 돌멩이를 쥐고 앞으로 내밀었다. 사만다는 눈을 뜨더니 말했다. “왼손이군. 갈까?” 나는 왼손에 든 돌멩이를 던지며 입을 쩍 벌렸다.

“갈림길의 권능은, 결국 선택의 폭이 둘 중 하나라면 백발백중으로 맞춘다는 것인가요?”

사만다는 왼쪽 길로 꺾어들어 가면서 얼굴은 날 향한 채 말했다.

“대개는 그래.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결국 다른 성직자들과 마찬가지로 신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지. 아까의 그 돌멩이 같은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지? 하지만… 음, 이거 어떨까. 내가 어떤 악당의 목에 대거를 들이대고 있어. 살짝 그으면 끝이야.”

성직자의 이런 말은 사람을 퍽 놀라게 하는 법이야.

“물론 대거를 치우고 ‘죄송합니다.’ 하겠지요?”

“얘는! 내가 에델브로이의 성직자인 줄 아니? 어쨌든 악당의 생사여탈권은 내게 있어. 그런데 말이야, 이 악당은 내 애인의 원수야. 그런데 이 악당 은 고아들을 끌어모아 키우는 아주 골치 아픈 취미가 있거든? 쉽게 말하면 의적이라는 거 있지? 자, 목젖을 자를까, 말까?”

갈수록…………. 이게 성직자가 하는 말 맞나? 사만다는 싱글거리며 목젖을 어쩐다는 말을 했고 그래서 나는 기분이 이상해져서 엉뚱한 질문을 하고 말 았다.

“당신 애인도 있어요?”

“고향에서 다른 여자에게 한눈팔고 있을 거야. 흥! 어쨌든 그런 상황이 되면, 난 내가 어떻게 할지는 몰라도 선택은 해. 그리고 그건 테페리의 뜻대 로 될걸. 알겠지? 난 신의 뜻에 따르는 경우를 맞춘다는 것이지 내가 원하는 것을 맞춘다는 것은 아니야. 그렇다면 그건 성직자가 아니라 도박사게?” 사만다는 오른쪽으로 돌아갔고 나도 그래서 오른쪽으로 따라들어간 다음 미간을 긁으며 질문했다.

“그래도 테페리는 당신이 알거지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 도박을 해도 승률이 높겠네요.” “전혀 그렇지 않아. 한번 시험해 봤어.”

“시, 시험? 도박을 했어요?”

“응. 도박장 주인은 불경스럽게도 성직자가 들어가니까 재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더군. 말이 되냐? 신의 은총이 내리는 거지. 어쨌든 밤새도록 술 마 시며 도박을 했지. 술은 마셨지만 그래도 평소와 똑같은 컨디션으로 내가 판단한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갔지. 블랙잭을 했거든. 그건 판단이 두 가지 중 하나니까 테페리의 권능이 그대로 드러나는 게임이야. 더 받느냐, 끝내느냐.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

“파문당했을 것 같아요.”

“에이, 들키진 않았어.”

사만다는 아주 자연스럽게 들키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 마치 들키지 않으면 아무런 죄도 되지 않는다고 믿는 어린애들처럼. 사만다는 왼쪽으로 꺾어 들어 갔기 때문에 나는 좀 따라간 다음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 어떻게 됐죠?”

“새벽에 나올 때 내 수중엔 전날 저녁에 가지고 들어갔던 것만큼 남아 있었지. 퍼셀 한 닢 틀리지 않고.”

나는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흠, 테페리의 성직자들은 모두 재미있는 사람인가. 그때 펠레일이 끼어들어 미안하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 다.

“저, 사만다 님. 후치 군. 조용히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여긴 게덴의 율법을 따르는 다른 생명체들이 존재하는 만큼・・・・・・.”

펠레일은 정중하게 말했지만, 왜 나는 그만 보면 웃음이 나려고 할까. 여자 손목도 못 잡아본 주제에 그 병에 걸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펠 레일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사만다는 입술을 샐쭉하더니 다시 또 오른쪽으로 획 꺾었다. 그런데 오른쪽으로 꺾자마자 사거리가 나타 났고 사만다는 주춤했다.

칼이 사거리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왼쪽 길입니다. 진행 방향으로 보아선…

사만다는 왼쪽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니까 이런 게 문제인 모양이다. 두 갈래 길에서는 마음내키는 대로 갈 수 있지만 세 갈래가 되면 그때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주춤거린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대단히 놀라운 능력일 것 같군. 겨우 두 가지 갈래라지만, 때론 그것은 지독한 고통이 따르는 선택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사만다는 그런 데에는 고민하지 않는다. 내키는 대로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를 괴롭히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테페리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 일 뿐 그녀 자신을 위하는 길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테페리가 그녀의 죽음을 더 바란다면 그녀의 권능은 그녀를 죽음의 길로 인도할 수도 있겠 지. 하지만 그녀는 테페리의 프리스티스니까 그것도 충분히 감수할 뿐 아니라 오히려 즐겁게 받아들인다…………는 식인 모양이다. 그러니 고민이 없고 낙천적일 수밖에.

검소한 녹색 능직 로브를 입고 지팡이도 검소해 보이는 스태프를 들고 있어서 레너스 시의 그 아프나이델보다는 훨씬 고상해 보이는 펠레일이 말했 다(고상해 보이지만, 그래도 난 웃음이 나온단 말이야.).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사만다는 멈춰서더니 고개를 돌렸다.

“왜, 펠레일?”

“이 지점의 지형이 신경을 불편케 합니다.”

지형이라. 그냥 기다란 길이다. 양 옆으로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저 앞으로는 다시 두 갈래 길이 보인다. 길이는 약 60큐빗 정도. 그러나 그 중간에 다른 갈림길은 없다. 하지만 펠레일은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본 모양이다.

“이 근처의 골목길의 형태로 볼 때, 누군가 우릴 감시하고 있다면 저 앞쪽에서는 반드시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숨을 수가 없어요. 따라서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샌슨은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펠레일께서는, 엄폐와 진형에 대해 좀 아시는 것 같습니다?”

“우연히. 허즐릿의 저서 몇 권을 읽었지요.”

“어, 그래요? 14권에 나오는 글이지요?”

“그랬던 것 같습니다.”

펠레일과 샌슨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크라일을 점점 화나게 만드는 모양이다. 크라일은 앞으로 척 나서면서 그 살벌한 팔치온을 뽑아 들었다.

“아아! 쓸데없는 소리 그만. 그러니까 덮친다면 여기란 말이지? 알았어. 어차피 앞에서 달려들어 오겠군. 내 뒤로는 한 놈도 지나가지 않게 해줄 테 니 따라만 와.”

그렇게 말하며 크라일은 팔치온을 오른손에 들어 어깨에 멘 채 앞으로 척 나섰다. 그때 터커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앞이 아냐! 왼쪽, 위!”

우리는 화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왼쪽의 건물 위에서 늑대들의 머리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른쪽의 건물 위에서도 나타났다.

“크르르르.”

“며, 몇 마리야?”

“뛴다!”

늑대들이 뛰었다. 크라일은 오른손은 그대로 둔 채 허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첫 번째 늑대가 부딪히기 직전, 허리를 튕겨올리며 왼손을 크게 올려쳤 다.

“캐애앵!”

어이구 세상에. 늑대는 도로 위로 튕겨나갔고 크라일은 그때 오른쪽 어깨에 메었던 팔치온을 양손으로 휘둘러내렸다. 허공에 떠오른 늑대가 허리가 거의 끊어질 듯한 모습으로 나가떨어졌다. 역시 왼손의 크라일이다. 그러나 늑대들은 일제히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칼은 고함을 질렀다.

“건물 벽으로!”

우리는 일제히 각자 가까운 건물 벽으로 달려 벽을 등졌다. 위에서 뛰어내리니 건물 벽을 등지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저쪽으로는 이루릴, 펠레일, 터커가 섰고 내 쪽에는 샌슨, 칼, 크라일, 사만다가 섰다. 그렇게 양쪽으로 갈라진 채 늑대들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하아압!”

크라일의 싸우는 방식은 어제도 보았지만 정말 아슬아슬하면서도 통쾌하다. 방어는 포기, 왼손만으로 싸우며, 결정타는 오른쪽 어깨에 멘 팔치온. 따라서 현란하게 발이 움직인다. 아니, 아예 상체와 발이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저 덩치가 우아한 춤이라도 추는 것 같아!

“으아!”

크라일의 모습을 보고 샌슨도 기세가 오른 모양이다. 샌슨은 낮은 위치의 늑대들을 걷어찬 다음 롱소드로 내려찍었다. 늑대는 피했지만 그 등이 찢 겨지고 말았다. “쾌애앵?” 늑대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그리고 그대로 마구 발광하기 시작했다. 늑대의 등에 있는 상처가 타오르고 있었 다. 터커의 뒤에 있던 펠레일이 외쳤다.

“그거, 그거 은이군요? 그렇다면 저것! 제대로 된 늑대가 아냐! 죽은 늑대가 게덴의 힘으로 법칙을 깨고 움직이는 거야!”

어제 이루릴이 말한 대로다. 늑대들은 오전의 태양빛을 받아 무서우리만큼 번쩍이는 샌슨의 롱소드를 보자 달려들 엄두를 못 내었다. 그런데 왜 나 에겐 덤비냐, 이놈들아!

“에에라, 사정 안 본다!”

나는 낮은 곳에 있는 늑대의 머리를 노리고 내리쳤다. 늑대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가 내가 검을 내리쳐 상체를 비운 순간 뛰어들었다. 그러나 난 아 래에서 올라오는 특별한 수단이 있지!

“일자무식!”

퀘게게엑! 늑대가 조각나며 두 조각이 양쪽으로 한참 날았다. 으어, 내 허리! 펠레일이 입을 쩍 벌리는 것을 볼 새도 없이, 나는 버릇대로 다시 한 바 퀴 더 돌고 말았다. 그러지 않으면 허리가 뒤틀리니까. 그때 뭐가 등에 부딪혀왔다. 곧 등을 긁는 소리에 목 뒤의 털이 곤두섰다. 늑대가 등에 달라붙 었어! 목에 뜨거운 침방울이 튀는 것이 느껴졌다.

“아아아!”

난 뒤로 돌진해 벽에 부딪혔다. 콰르릉! 벽이 무너지며 난 집 안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세상이 마구 뒤집히는 느낌이 들며 난 나동그라졌고 먼지와 돌가루가 숨막힐 듯이 날렸다. 낮에 별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군.

황급히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려봤다. 그 늑대는 목이 부러진 모양이다. 난 다시 바스타드를 고쳐쥐며 벽에 뚫린 구멍으로 뛰쳐나왔다.

“후치? 저 집과 원수졌어?”

사만다는 집 밖으로 등장하는 나에게 이런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건네는 사만다에게 난 바스타드를 휘둘렀다. 사만다는 기겁했지만 나는 그녀 옆에 서 육박하는 늑대를 친 것이다. 워낙 급하게 내려치다가 나는 기세에 못 이겨 땅을 쳤다. 늑대와 함께 내 바스타드를 땅 속에 박아버린 것이다. 이거, 자꾸 왜 이래!

사만다가 이번엔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 능숙한 모험가들은 정말 굉장하군. 그런데 바스타드가 왜 안 뽑혀! 저쪽 벽에 기대어 있던 이루릴이 내 모습을 보자 재빨리 달려들었다.

“오오오!”

크라일의 감탄소리. 이루릴은 마치 번개가 치듯 지그재그로 뛰며 늑대 사이로 달렸다. 늑대들은 이루릴에게 달려들었으나 그 턱은 번번이 허공을 깨 물 뿐이다. 한 놈이 이루릴의 발목을 물려 하자 이루릴은 그대로 앞으로 뛰며 땅을 짚고 텀블링했다. 그리고 착지하자마자 내 가슴을 걷어찼다. “웁!”

이루릴이 걷어차 준 덕분에 나는 간단히 땅에 박힌 바스타드를 뽑았다. 좀 점잖은 방법으로 할 수는 없냐고 불평하기도 전에, 이루릴은 내 가슴을 찬 반동력으로 그대로 뒤로 날았다. 내 가슴 앞, 이루릴이 있던 공간으로 늑대가 날았다. 나는 잽싸게 다시 내려쳤다. 그놈의 뒷다리를 맞히는 데 성공했 고 이번엔 땅에 박지 않았다. 뒷다리를 맞은 놈은 땅에 뒹굴었고 그 앞에 있던 칼이 그놈의 턱을 걷어찼다. 칼이 외쳤다.

“크레틴 양! 이놈들은 당신 담당이오!”

정말 대단한데. 난 어제 한 번 들었던 사만다의 성을 벌써 까먹었는데 칼은 기억하고 있었군. 사만다는 재빨리 품속을 뒤지더니 동그란 쇠붙이를 꺼 내었다. 둥근 고리에 가운데는 자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테페리의 디바인 마크인 모양이다. 사만다는 그것을 앞으로 내밀며 기도를 했다.

“대지가 거부하는 시체여, 사라져라!”

“퀘르르, 카악!”

늑대들이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터닝이구나! 저게 바로 성직자의 터닝이다. 대지가 받아들이지 않는 시체, 그래서 대지에 잠들지 못하고 지상을 배 회하는 시체를 쫓는 것. 늑대들은 미친 듯이 달아났다. 그러나 그게 좀 안 좋은 게, 늑대들이 모두 저쪽으로 달려간 것이다. 저쪽이란 여러 가지 의미 로 쓰일 수 있지만 지금의 경우엔 터커와 펠레일, 이루릴이 있는 쪽을 가리키는 말이다.

“제기랄!”

터커는 악을 쓰며 핼버드를 휘둘러 늑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터커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두른 순간 왼쪽에 있던 놈이 터커에게 달 려들었다. 쉬이익! 무엇이 대기를 가르는 소리. 터커의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이루릴이 자신의 특기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달려드는 늑대의 몸에 비스듬히 망고슈를 들이대었고 곧 늑대는 공중에서 완전히 면도를 당했다.

“캬아아아악!”

땅에 떨어진 늑대의 허리는 말끔하게 털가죽이 벗겨져 나가 빨간 속살이 보였다. 터커는 어제도 본 그 모습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 뒤에 있던 펠레 일은 고개를 숙이더니 캐스팅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와 샌슨, 크라일은 등을 보인 늑대들에게 돌격했다.

“어억!”

늑대가 몸을 뒤집으며 샌슨의 발을 물었다. 그 옆에 있던 크라일이 재빨리 팔치온으로 내려치자 샌슨의 다리에는 늑대의 머리만 남게 되었다. 그러 나 그 머리는 끝까지 샌슨의 발목을 물고 있었다. 샌슨은 눈에 불을 튀기더니 무릎을 들어올리며 롱소드의 자루로 늑대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 뒤에 있던 사만다가 재빨리 샌슨의 어깨 너머로 디바인 마크를 내밀더니 다시 고함을 질렀다.

“물러가라!”

상처입은 샌슨에게 달려들려던 놈들이 깽깽거리는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그리고 그쪽에서는 터커가 핼버드로 장작 쪼개듯 늑대들을 내리찍었다. 나도 바스타드를 휘둘렀다. 그런데 늑대는 머리를 어떻게 움직이더니 내 바스타드를 물었다. 나는 놀라서 당기려고 했으나 늑대는 놓지 않았다. 그리 고 그때 내 왼쪽에서 늑대가 달려들었다.

“일자무식, 옆으로!”

난 바스타드에 늑대를 매단 채 옆으로 뱅뱅 돌았다. 바스타드를 물고 있던 놈은 내 옆에서 달려들던 놈과 충돌해서 나가떨어졌고 난 갑자기 너무 세 게 도느라 어지러워 휘청거렸다. 황당하게도 난 휘청거리다가 늑대 한 놈의 꼬리를 밟았다. 늑대가 펄쩍 뛰어올랐으나 땅에 도로 내리기도 전에 그 목에 이루릴의 에스터크를 맞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 펠레일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엔라지 퍼슨!”

사만다의 몸이 부쩍부쩍 크기 시작했다. 사만다는 잠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뒤뚱거렸으나 곧 당당하게 선 다음 늑대들 앞에 섰다. 늑대들은 부들부 들 떨었다. 사만다는 구름 사이로 내밀듯 팔을 아래로 내렸고 그 손에는 거의 방패 크기가 되어버린 거대한 디바인 마크가 빛을 발했다. 사만다가 특 별히 터닝을 하지도 않았지만, 조금 전 터닝당했던 놈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자 다른 놈들도 덩달아 달아나버렸다.

“캐르릉! 캥캥!”

늑대들은 미친 듯이 달아나 이윽고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히익, 히익! 내, 숨소리가, 피리 소리 같아.”

“그게 테페리의 디바인 마크인가요?”

“응, T자는 테페리의 머리글자이기도 하고 갈림길을 상징하기도 하지.”

아하! 그렇구나. 자는 그러고 보니 갈림길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질문했다.

“그런데요, 궁금한 게 있어요. 아까 그 늑대들은 아마 게덴의 힘 때문에 날뛰는 시체잖아요? 그런데 게덴도 헬카네스의 하위신이고 테페리도 헬카네 스의 하위신인데, 왜 그렇게 무서워 도망가는 것이죠?”

“에이, 얘는. 언데드는 유피넬의 혼돈으로, 헬카네스의 조화로 존재하는 반(反)의 세계, 어둠의 세계의 주민이란 말이야. 그래서 파괴신 레티의 성직 자들도 언데드를 터닝할 수 있는걸?”

내가 알아듣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사만다는 계속 설명했다.

“그리고 흔히 헬카네스의 하위신, 유피넬의 하위신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그건 이해하기 편한 대로의 관념이고. 헬카네스나 유피넬이 각자 자기 하 위신들의 두목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해. 헬카네스나 유피넬은 그저 만물의 법칙을 나타내는 이름일 뿐. 그리고 신들은 그 부하가 아니야. 그렇 지. 중력을 생각해 보자. 넌 중력을 무시할 수는 없지? 하지만 네가 중력의 부하인 것은 아니잖아. 중력이 너에게 뭘 시키는 것도 아니고.”

“시킨다고 따르지도 않겠어요…………. 정말 어렵군요.”

그래, 정말 어렵다. 유피넬과 헬카네스는 그저 우주의 원리를 나타내는 고차원적인 은유라는 사만다의 설명이 뒤따랐지만 난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 난 역시 신학에는 적성이 안 맞아.

어쨌든 우리는 다시 사만다를 앞세워 걸어가고 있었다. 늑대에게 발목을 물린 샌슨은 이루릴의 걱정을 샀지만 끄떡없다는 투였다. 아마 크라일의 비 웃는 듯한 시선을 의식해서 만용을 부리는 모양인데, 어쨌든 샌슨은 조금 절뚝거리면서도 꿋꿋이 걸어오고 있다. 이루릴은 한숨을 쉬며 혁대에 매어 둔 가방을 열었다.

“그럼 이거 한 모금만 마셔요. 당신이 아프지 않다면, 날 위해서라도 마셔줘요.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파요.”

샌슨은 눈물을 흘릴 듯한 표정이 되더니 이루릴이 내민 약병을 받아 단숨에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이루릴의 눈이 커졌다.

“아, 아니 저, 한 모금만…………….”

샌슨의 표정이 돌변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양팔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는 가슴을 만져보고 팔을 휘둘렀다. 크라일은 저놈이 갑자 기 미쳤나 하는 눈으로 샌슨을 바라보았지만 샌슨은 신경쓰지 않으면서 외쳤다.

“우, 우와! 후치! 날 쳐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난 어처구니없어서 샌슨을 바라보았고 샌슨은 가슴을 탕탕 치면서 말했다.

“힘이 솟아난다! 정말 엄청나! 후치, 한번 네 힘으로 쳐봐!”

그래? 이런, 한 모금만 마시라는 것을 너무 많이 먹어버린 것 때문인가 보군. 나는 우정으로써 샌슨의 복부를 쳤다. 샌슨은 벽을 뚫고 들어가 기절해 버렸고, 다시 깨워서 데리고 가느라 시간을 많이 잡아먹게 되었다. 어쨌든 샌슨의 발목은 나았다. 복부에 대해서라면…………, 별로 할말은 없다.

우리 일행은 주위를 경계하며 걸어갔다. 지형 지물을 읽어내며 전술 전략에 도통한 펠레일이 있긴 하지만 경계해서 손해볼 것은 없으니까. 게다가 조금 전 늑대와의 싸움으로 우리는 모두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그래서 앞에 있는 사만다 옆에 나와 터커가 서고, 그 뒤에 칼과 펠레일과 이루릴이 뒤따랐다. 샌슨과 크라일이 맨 뒤쪽에서 따라왔다.

다시 네 갈래 길이 나타났다. 사만다는 멈춰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뒤에 있던 칼이 말했다.

“진행 방향으로는 오른쪽이오.”

그런데 사만다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사만다를 쳐다보았다. 사만다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이상해.”

“예?”

“음…………. 아마 이런 건가 본데, 갈 것인가 말 것인가에서 나는 가지 않을 것을 선택한 것 같아. 그래. 더 가고 싶지가 않아.”

사만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상해. 여긴 아무것도 없는 네 갈래 길인데. 하지만 테페리의 뜻이니까, 난 더 이상 가지 않겠어.”

칼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주위로 보이는 것은 평범한 집들뿐이었고 뭐 하나 이상한 것이 없었다. 칼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허, 신의 뜻을 해석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때 터커가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따르려 했지만, 터커는 손을 휘저어 나를 물러나게 하고는 혼자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런데 걸음걸 이가 독특했다. 마치 발로 무엇을 밀 듯이 천천히 발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마치 장님이나 된 듯이 핼버드를 앞으로 길게 내밀어 땅을 짚어보 거나 허공을 휘저어보면서 걸었다. 그 광경을 보던 펠레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함정은 없습니다. 터커.”

터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펠레일은 계속 설명했다.

“함정의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넌디텍트를 사용하면 마법의 흔적을 지울 수 있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함정을 설치할 이유가 없는 장소입니다. 던전 도 아닌 대로에 함정을 설치하는 것은 우습지 않을까요.”

터커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주위를 다시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 그럼 뭐지?”

“아마 이곳이 목적지인 것 같습니다.”

“뭐?”

펠레일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이 네거리는 평범해 보이지만, 영지 전체에서 볼 때는 중앙에 해당하는 부분이군요.”

“아!”

우리는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난 여기가 중앙인지 잘 모르겠다. 내 눈엔 다 똑같아 보이는걸?

“잠시 기다리십시오.”

펠레일은 고개를 숙이고 캐스팅에 들어갔다. 한참을 웅얼거리던 펠레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땅 속이군요. 터커 씨. 물러나십시오.”

터커가 물러나자 펠레일은 우리 모두를 우리가 걸어온 골목 쪽에 물러나 있도록 하고는 혼자서 네거리의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주위를 휙휙 둘러보더니 돌멩이를 들어 벽에 뭔가를 갈겨쓰기도 하고 땅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타이번이 저렇게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마지막으로 펠레일 은 돌멩이 몇 개를 이상한 모양으로 쌓아두더니 말했다.

“한가운데입니다. 땅을 좀 파야겠는데요? 그렇게 깊진 않습니다.”

“땅을 파?”

“땅 속에 있는 뭔가가 보입니다. 위험할지도 몰라서 안전 장치를 했습니다.”

서로를 보며 어깨를 으쓱한 다음, 크라일과 나, 샌슨이 앞으로 나서서 각자의 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칼은 땅을 파기엔 적당하지 않은 물건이지만 어쨌든 잠시 후 샌슨이 뭔가를 발견했다. 펠레일은 직접 손을 대지 말라고 경고했고, 그래서 샌슨은 롱소드의 끝에 그것을 꿰어올렸다.

샌슨이 들어올린 것은 작은 쇠붙이였다. 마치 사만다의 디바인 마크 비슷한 둥근 고리였는데 그 가운데는 머리가 두 개인 까마귀의 모습이 보였다. 펠레일과 사만다가 앞으로 나서서 샌슨의 롱소드 끝에 매달려 있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칼이 먼저 말했다.

“게덴의 디바인 마크인 것 같은데?”

펠레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 머리가 두 개인 까마귀는 체로이인 것 같군요. 그런데 이것 예사 물건이 아니군요. 장식의 모양으로 보나 쇠붙이의 색깔, 무늬의 선 택으로 볼 때 거의 200년은 족히 된 물건인데요?”

크라일이 입을 벌렸다.

“200년? 와, 비싸겠네?”

사만다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그 디바인 마크를 보면서 고민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저주네. 응. 그럴 거야. 누군가가 의식을 행한 다음 이것을 여기에 묻은 걸 거야.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병에 걸렸고…………… 잠깐. 그렇다면 의 식의 제물이 있을 텐데. 이 디바인 마크는 의식의 보증이니까 틀림없이 제물이 있을 거야.”

터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제물이 뭘까?”

펠레일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샌슨의 롱소드 끝에서 그 디바인 마크를 들어올렸다. 우리는 놀랐지만, 펠레일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이게 제법 대단한 물건이긴 하지만, 그것은 골동품으로서 그렇다 이말입니다. 세이크럴라이즈의 힘을 낼 수는 없습니다. 이건 그저 상징적 인 의미로 파묻었을 뿐입니다. 제물이나 의식의 주관자의 능력이 더 중요합니다. 어쨌든 이걸 회수했으니 의식의 상징은 없어진 셈이고, 따라서 세이 크리드 랜드는 취소될 겁니다.”

펠레일이 너무 평온하게 말해서 우리는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다였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제대로 기 쁨의 표시를 낼 수 있었다.

“색깔! 색깔이 돌아왔어! 우하!”

내 말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건물들의 색깔이 제대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어두운 부분은 어둡고, 밝은 부분은 밝다. 그림 자도 생겼다. 내 그림자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이 이렇게 유쾌한 일인 줄은 몰랐어. 하하하!

“정말이군요. 아주 간단하게 해결되는군요?”

칼도 기쁜 듯이 대답했다. 하지만 펠레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만다 님이 있었으니까 간단히 위치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해결이라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부정해야겠군요.”

“무슨 말씀이시오?”

펠레일은 근심스러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물건이 있다면, 파묻은 자가 있겠지요. 그자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아이들을 찾아야 합니다.”

“흠………… 그렇겠구려. 그렇다면 어떻게 찾는다?”

펠레일은 사만다를 둘러보았다.

“사만다 님?”

그런데 사만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까 말했잖니. 더 이상 가기 싫다고. 아직도 그래. 아이들을 찾아봐야 되겠지만, 어디론가로 가고 싶은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걸.”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면 호통을 치겠지만 갈림길의 권능을 가진 테페리의 말이니 오히려 그 말을 그대로 따르고 싶다. 우리는 곤혹스러운 얼굴 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크라일이 주저하며 말했다.

“혹시…………, 테페리가 아이들을 찾는 걸 원하지 않는 것은?”

터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봐, 크라일.”

“어, 가정해서 말이야, 음. 가정만 하는 것은 상관없잖아?”

사만다는 우울한 표정이었다. 신의 뜻을 해석할 수는 없으니, 어떤 가정이든 가능하다. 땅에서 파낸 디바인 마크를 들여다보던 펠레일은 말했다. “어쩌면…….”

펠레일은 끝말을 잇지 않았다. 터커는 입맛을 다시더니 펠레일에게 말했다.

“펠레일. 자네가 말을 끊으면 대개 뒷말은 듣기 싫은 것이지. 하지만 해봐.”

펠레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쩌면, 제물은 아이들일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아이들을 찾을 수 없으니, 사만다 님이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 것도 이해됩니다.”

우리들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버렸다. 펠레일은 게덴의 디바인 마크가 마치 대답이라도 할 거라고 믿는 것처럼 그것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의식이 있다면, 제물이 있었겠지요. 그리고 이 영지에서 없어진 것은 아이들입니다. 괴로운 추측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크라일이 고함질렀다.

“도대체 어떤 미친 새끼가!”

펠레일은 여전히 게덴의 디바인 마크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의 어조는 서늘했다.

“저주. 신의 저주는 대개 신격 상징물을 필요로 합니다. 순결을 상징하는 처녀, 처녀는 생산이 되지 않는 불모를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만 역시 순결 의 상징으로 쓰입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는 그 자체로 이미 신이며, 따라서 합당한 제물이지요………….”

펠레일의 말은 끔찍스러웠다. 크라일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렇다고 죄 없는 아이들을 몽땅 제물로? 그런 미친 놈이 어디 있어?”

샌슨도 이번에는 크라일에게 찬성했다. 그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런 모진 짓을 한다는 것은………….”

그러나 터커는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난 펠레일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본다. 사람이란 자기의 사소한 감정 때문에 다른 사람의 가장 소중한 것들도 거리낌없이 파괴하는 모습도 보여주지.”

나는 터커의 말에 다른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이루릴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이루릴은 평소처럼 별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속마음은 어떨까. 이루 릴은 인간에 대한 혐오를 느끼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 무표정한 얼굴만 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이루릴은 내 시선을 알아차렸다.

“후치? 왜 그러죠?”

“아, 아뇨. 펠레일의 말대로라면, 참 지독한 놈이죠?”

“놈? 알 수 없지요. 인간일지, 인간이 아닐지.”

아아! 그래서 이루릴은 별 표정 없었구나! 그렇네. 꼭 인간이라는 법은 없군? 하지만 나는 은연중에 인간 위주로…………, 그러니까 좋은 일이든 나쁜 일 이든 항상 인간을 주체로 놓는 관념에 익숙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루릴은 항상 모든 종족을 한꺼번에 생각한다. 친구가 되기 위해 손을 내미는 것은 내가 아니라 이루릴이 아닐까?

펠레일은 이루릴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예. 사람일지 아닐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아마도 사람일 가능성이 높겠지요. 게덴의 신자들은 거의 인간이니까요. 물론 신자도 아니면서 게덴의 힘만을 불러 썼을 수도 있겠지만, 게덴도 신이므로 자신의 신자도 아닌 자의 부름에 함부로 역사하진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덴의 성직자라. 환자들에게 물어봐야겠군. 일단 세이크럴라이즈는 해소되었으니 환자들은 쉽게 회복될 거요. 그들에게 짐작가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봅시다. 그랑엘베르의 신전이 있는 것을 보아 이 영지의 주민들은 대개 그랑엘베르의 신자겠지. 그렇다면 범인은 이방인일 테고, 뭔가 짐작 가는 사람이 있을 거요.”

“알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몸을 돌려 다시 신전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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