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2권 – 제3부 :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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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2권 – 제3부 :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 8화

8

터커에게 깔려 있던 사만다는 머리를 마구 헤집어서 먼지 구름을 일으켰다. 아무도 죽지는 않았지만 떨어지는 돌멩이에 맞아 상처를 입은 사람은 많 았다. 사만다를 감싸주었던 터커는 등에 찰과상을 좀 입었고 다리 관절에도 돌멩이를 맞아 부어오르고 있었다. 사만다는 터커의 뺨에 키스해 주었다. “고마워.”

“무덤을 같이 써줘서 고맙다는 말이야? 이왕이면 침대를 같이……………, 미안.”

터커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되지도 않는 농담을 말하다가 황급히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기랄…………. 저건 얼마 못 가서 다시 무너질 거야. 입구 쪽은 완전히 막혔으니 나갈 방법이 없어.”

우리는 불안하게 균열을 멈춘 동굴 천장을 바라보았다. 펠레일은 이루릴에게 질문했다.

“놈을 부려서 입구를 만들 수는 없습니까?”

“어디에 만들죠? 흙이 약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어요. 우리가 들어온 거리를 생각해 볼 때 그렇게 긴 거리의 터널 을 만들 수는 없어요. 그리고 섣불리 그런 시도를 하다간 간신히 균열을 멈춘 동굴이 통째로 무너지겠죠.”

펠레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리들이 잡아둔 포로에게 다가갔다. 그 포로는 차가운 표정으로 우릴 보고 있었다.

“다른 길은 없습니까?”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어. 부탁이 있는데, 동굴이 무너지기 전에 자살하게 해주겠어? 좀 나을 것 같은데.”

“당신은 태어남으로써 이미 자살하지 않았습니까. 또 자살할 필요는 없습니다.”

펠레일의 너무 고차원적인 대답에 난 좀 어이가 없어졌다. 나는 부지런히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샌슨과 칼에게 다가갔다. 아이들은 이제 멍한 상태 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정신을 차리네요?”

펠레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요…………. 확신할 순 없지만, 저희들이 그 디바인 마크를 회수한 것, 아니면 그 뱀파이어가 떠난 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군요. 어쨌든 다행한 일입 니다.”

아이들은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 하나씩 정신을 차리더니 겁먹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마 어처구니가 없어 울음도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정신을 차려보자 어두컴컴하고 밀폐된 동굴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 모양이다. 그때 슈가 내 모습 을 보더니 내게 달려들었다.

“후치 오빠! 엉엉엉!”

난 슈를 안아올리면서 골치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슈의 울음은 당장 아이들에게 전염되었다. 아이들은 모두 훌쩍거리기 시작하더니 아 예 대성통곡을 했다.

“엉엉엉!”

귀가 멀 지경이다. 밀폐된 동굴은 울림이 너무 좋았다. 터커가 기겁했다.

“얘들아! 울지 마! 울면 동굴이 무너진다고!”

농담이 아니다. 정말 50여 명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울리다 보니 그런 것도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아이들도 질겁을 하더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지 만 억지로 울음을 참느라 꺽꺽거리며 숨이 막히는 소리를 내었다. 이루릴이 다가왔다.

“얘들아. 안심하렴. 곧 나가게 될 거야. 얌전히 있으면 곧 예쁜 하늘과 새들을 볼 수 있단다. 하지만 너희들이 울면 우리들이 나갈 길을 찾을 수 없어 요.”

아이들은 이루릴의 말보다는 그 분위기에 더 매혹되는 모양이다. 언젠가 슈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은 서서히 진정하더니 웃음을 짓기까지 했다. 이루릴도 미소를 지으며 손을 움직였다. 그녀가 손짓을 하니 공중에 떠 있던 윌로위스프가 아이들의 머리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입을 쩍 벌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난 슈를 내려서 그것을 구경하게 해놓고는 주위를 살폈다.

곧 나가게 된다고? 글쎄. 원래 영혼은 바위산이 아니라 강철 벽이라도 통과할 수 있으니까 죽으면 얼마든지 나갈 수 있겠지. 펠레일은 끙끙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인원이 너무 많으니 공기가 빨리 없어질 텐데. 공기가 없어지든, 그 전에 동굴이 무너지든, 양쪽이 다 달갑지 않은데.”

나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펠레일 씨. 마법 중에 텔레포…………, 어쩌고 하는 것이 있잖아요?”

펠레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그걸 못해요. 이루릴 양은?”

아이들과 놀고 있던 이루릴도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아이들은 윌로위스프의 장난을 구경하면서도 어른들의 불안한 분위기를 잘 감지하는 모양이 다. 아이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래서 난 짐짓 기운차게 말했다.

“뭐, 방법이 없네요. 뚫죠?”

“예?”

“뚫어야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잖아요? 어디 뚫을 만한 곳이 있는지 찾아보죠. 아무래도 그 방법뿐이잖아요?”

터커가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치. 여기가 얼마나 깊은 줄 몰라? 우린 한참을 내려왔다고.”

“그래요? 하지만 내려오다 중간에 꺾어졌어요. 그러니 어쩌면 우리가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절벽에 가까울지도 모르죠. 다른 방법 있으면 말해 보시 고, 없으면 뚫을 만한 장소를 생각해 봐요. 조금 전의 진동 때문에 어쩌면 없던 틈이 새로 생겼을지도 몰라요. 뭐해요! 앉아서 죽을 생각은 없겠죠?” 일행은 모두 씨익 웃으며 일어났다. 헬턴트 토박이들인 샌슨이나 칼도 그렇지만, 터커 일행도 상당히 강인한 면이 있군. 우리는 흩어져서 틈이 있는 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바위를 두드리며 소리를 듣다가 이루릴을 보았다. 이루릴은 이제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루릴은 갖가지 희한하게 생긴 불덩어리들을 만들어내어 춤을 추게 하고 있었다. 나비 모양, 새 모양, 꽃 모양. 아이들은 정신을 잃은 채 그것에 열중해 있었다. 내 옆에 있던 펠레일이 한숨을 쉬 었다.

“저건 댄싱 라이트………… 시장 거리의 요술쟁이도 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지만 저렇게 능숙하게 움직이는 것은 처음 보는군요.”

아무리 멋있는 것이라도 지금 걱정되는 것은 하나뿐이다.

“저거, 공기를 태워요?”

“그렇지 않아요. 다른 차원의 모습을 투영시키는 것이라서.”

“그래요.”

그때 크라일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이리와 봐.”

어쨌든 크라일은 뭘 찾으라고 하면 제일 먼저 찾는군. 대단해. 우리는 크라일에게 다가가보았다. 크라일은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 소리를 들어보라고.”

우리는 크라일이 벽을 두드리길 기다렸다. 하지만 크라일은 벽을 두드리진 않았다.

“이런, 귀를 대고 소리를 들어보라고.”

우리는 머쓱해져서 귀를 대어보았다. 벽에 댄 내 귀에, 쉬이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소리?”

“뭔가 틈이 있긴 있어. 벽 너머에 틈이 있는지, 어쨌든 공기가 지나는 소리야.”

“바람이 분다면……, 아무래도 바깥에 가까운 것이겠지.”

그때 이루릴이 다가왔다.

“제가 들어볼까요?”

우리는 이루릴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루릴은 벽에 그 큰 귀를 붙이더니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바깥이군요. 뭔가 복잡한 틈이 밖에 있어서 그 사이로 바람이 부딪히는 모양이에요. 잠깐…… 우리들이 들어온 동굴은 절벽에 있었죠? 그럼 절벽의 무슨 틈인가 보군요.”

펠레일이 말했다.

“두께를 알 수 있겠어요? 실프의 기운을 찾아보면 안 될까요?”

“글쎄요. 틈이라서…………. 절벽 자체는 두껍고 틈이 깊은 것일 수도 있지요. 잠깐.”

이루릴은 위치를 옮겨가며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는 잠시 후 벽 한 군데를 짚으며 말했다.

“여기서 실프가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데요. 거리는 20큐빗 정도.”

우리는 이루릴이 가리킨 벽을 바라보았다.

“어쩌지?”

샌슨이 물어왔다. 막막한 질문이다. 이루릴은 20큐빗이라고 했다. 20큐빗 바깥에 자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 20큐빗을 어떻게 뚫느냐……… 이런 바 위벽을. 그때 펠레일이 나섰다.

“사만다 님. 후치 군의 검을 마법으로 강화 할 수 있습니까?”

사만다는 내게 바스타드를 뽑게 하고는 곧 기도에 들어갔다. 잠시 후, 사만다의 손이 번쩍 빛났다. 사만다는 그 빛나는 손으로 내 바스타드의 검신을 쓰다듬었다. 마치 그 손에서 빛이 옮겨오듯, 내 바스타드가 빛났다.

난 황홀한 눈으로 바스타드를 들여다보았지만 이걸 가지고 어쩌란 말이지? 설마 내가 바위를 오려내길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 펠레일은 말했다.

“조심스럽게…………, 충격이 가지 않도록 바위에 깊은 흠집을 내어주십시오.”

“예?”

“찔러보세요. 당신 힘이면 가능할 겁니다. 단, 아래로 비스듬히 찔러주십시오.”

난 어깨를 으쓱한 다음, 바스타드를 뒤로 당겼다가 힘껏 바위를 찔렀다. 팔이 부러지는 느낌이 왔지만 바스타드는 바위 속으로 1큐빗 정도나 들어갔 다.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우와?”

펠레일은 몇 번 더 그렇게 하도록 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 바위벽에다가 여러 개의 흠집을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이런 칼집을 내어서 어떻게 하려는 거지?

펠레일은 잠자코 포로들의 물품이 있던 곳으로 갔다. 그는 크라일을 부르더니 물통을 들게 하고는 자신은 주머니와 그릇을 하나씩 들고 왔다. 펠레 일은 주머니를 내려놓고 그릇으로 물을 바위벽에 조금씩 뿌렸다. 내가 칼집을 내어놓은 바위벽의 흠집 안으로도 물이 배어들어갔다. 비스듬히 찌르 라는 것이 이것 때문인가?

그리고 펠레일은 우리를 물러나게 하고는 캐스팅을 시작했다.

“프로스트 핸드.”

펠레일의 손으로부터 뭔가 허연 기운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윌로위스프의 빛을 반사하며 눈부시게 반짝였다. 서리, 얼음 조각이었다. 우 리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구경했다.

바위벽 틈으로 배어들어간 물은 당장 얼음이 되었다. 벽에 허옇게 김이 서리며 얼음들이 조금씩 비어져나왔다. 그리고 바위벽에 잔금이 가기 시작했 다. 짜자작, 짝, 짝!

“살짝 두드려보십시오. 손은 대지 마시고, 무기로.”

우리는 멀거니 서로 쳐다보았다. 터커가 핼버드로 두드려보았다. 몇 번 두드리자, 바위들이 와스스 부서지며 돌멩이가 되어 쏟아졌다. 난 무너지는 가 싶어 놀라서 물러났다. 벽에는 깊이 1큐빗, 직경 4큐빗 정도의 구덩이가 만들어졌고 그 아래에는 돌멩이가 쏟아졌다.

펠레일이 웃으며 설명했다.

“바위들이 흙이 되는 것은 이런 방식이죠. 바위의 틈에 물이 배어들고, 겨울에 그것이 얼고, 얼음은 물보다 부피가 크기 때문에 바위에 금이 가고, 그리고 흙이 되지요.”

우리는 감탄한 표정으로 펠레일을 바라보았다.

다시 바스타드로 바위에 구멍을 뚫는다. 물을 붓고, 그것을 얼린다. 그리고 두드리면, 와스스! 부서져나간다. 난 기운이 올라서 다시 바위에 구멍을 내어놓았다. 그런데 펠레일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프로스트 핸드 주문은 두 개만 외워둬서…………. 이제 다 썼는데요?”

우리는 당연히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루릴도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보고는 낙담의 한숨을 쉬었다. 묶여 있던 포로들마저도 큰 한숨을 쉬었 다. 그러나 펠레일의 계획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어차피 더 이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바위굴이 무너질지도 모르니까요.”

“그럼?”

“밖을 좀 살펴볼까요?”

펠레일은 정신을 집중하고는 캐스팅을 시작했다.

“클레어버이언스.”

펠레일은 눈을 꼭 감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 나는 칼을 쳐다보았고, 칼은 대답해 주었다.

“원하는 장소를 보는 마법이야.”

펠레일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눈을 떴다.

“다행이군요. 바깥에 금이 좀 가 있어서 대충 위치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들어왔던 절벽 기억하십니까? 진동 때문인지 거기에 금이 가 있더

군요. 잘하면 될 것 같습니다.”

펠레일은 물통과 함께 가져온 주머니를 들어올려 보였다. 그는 그것을 풀더니 물통에 쏟아부었다.

“소금입니다.”

악! 악! 저 귀한 소금을! 우리는 멍청하게 펠레일이 하는 모양을 바라보았다. 펠레일은 소금물을 만들더니 내가 뚫어놓은 흠집에 그것을 뿌렸다. 소 금물로 어쩌겠다는 거지? 펠레일은 미소를 씩 짓더니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그는 포로들의 밧줄도 다 풀어주라고 말했다.

“다 풀어주라고?”

펠레일은 포로들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 챙길 여유가 없어요. 자기 다리로 달려야 됩니다. 그러니 서로 쓸데없는 싸움은 맙시다.”

포로들은 영문을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 싸운다는 것은 말이 안 되니까. 터커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포로들을 풀어주었다. 펠레일은 아이들을 모두 모으더니 잠시 고민했다. 갑자기 그는 피식 웃어버렸다.

“자, 잘들 들어요. 단 한 판의 승부입니다. 무너지든가, 문을 만들든가. 문을 만들어도 어차피 곧 무너질 겁니다. 그러니 빨리 달려야 됩니다. 아시겠지요?”

우리는 뭔지 몰랐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펠레일은 이루릴을 불렀다.

“라이트닝 볼트 됩니까? 전격계(電擊界)로 아무거나………….”

“체인 라이트닝을 기주했는데………..”

그러자 펠레일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그러자 우리도 덩달아서 몹시 근심스러워졌다. 그리고 펠레일은 다시 피식 웃어버렸다.

“뭐, 단판 승부니까. 저기에 체인 라이트닝을 캐스팅하십시오. 단, 제가 먼저 캐스팅하고 바로 연이어서 시동되도록 해주시겠습니까?” “곧장 말입니까?”

“예. 마치 그대로 연결되듯이.”

“해보겠습니다.”

그러자 펠레일은 크게 심호흡했다. 그는 우리 각자를 비장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입매에는 여전히 가벼운 미소가 맺혀 있었다.

“죽기 직전에 해보지 않으면 후회될 일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나는 고개를 갸웃한 다음 샌슨에게 말했다.

“샌슨. 나 평소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남자끼리 키스하면 기분이 어떨까?”

샌슨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뒤로 물러나더니 맹렬한 동작으로 롱소드의 칼자루를 쥐는 것을 보고서 일행은 모두 폭소해 버렸다. 손발이 잘 맞는단 말이야. 펠레일도 피식 웃더니 말했다.

“라이트닝 볼트는 원래 저렇게 두꺼운 암석은 관통하지 못해서 반사됩니다. 하지만 소금물은 그 전격을 암석 전체로 전달할 겁니다. 하지만 그 정도 로는 파괴력이 모자랄지도 모르며, 또한 폭발이 안쪽으로 전달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전 공진폭발(共震爆發)을 일으켜볼 계획입니다. 폭발 최대 충격파 에서 이루릴 양이 체인 라이트닝을 사용하며, 다시 그 최대 충격파에서 제가 다시 라이트닝 볼트를 사용할 겁니다. 이러한 연쇄 충격파는 적은 충격 으로도 원하는 부위를 파괴할 것입니다.”

칼잡이들은 대단히 감명 깊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난 나 외에도 다른 칼잡이들 전부가 이해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펠레일은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라이트닝 볼트의 지속 시간과 속도는 잘 아시겠지요? 예. 좋습니다. 하지만 전 체인 라이트닝에 대해선 익숙하지 못합니다. 제발 위에 발을 올려놓 으세요. 그리고 발을 밟는 것으로 신호를 보내주세요. 연습을 해볼 수 없는 것이 아쉽군요. 시작할까요? 여러분, 동굴 양쪽에 붙어선 다음, 달릴 준비 를 하십시오. 길이 생기면, 달립니다.”

우리는 빨리 뛰지 못할 것 같은 아이들을 하나씩 안아올린 다음 달릴 준비를 갖추었다. 난 슈를 업어들었다. 펠레일과 이루릴은 벽에서 조금 멀리 떨 어져서 자리를 잡았다. 펠레일이 말했다.

“눈 조심해요.”

펠레일은 캐스팅에 들어갔다. 마치 이중창처럼 한 호흡 후에 이루릴도 캐스팅에 들어갔다. 펠레일의 고함소리가 먼저 들렸다.

“라이트닝 볼트!”

쿠과아악! 갑자기 지독한 순백색의 빛이 보였다. 눈이 부셔서 제대로 볼 수도 없다. 번개의 강렬한 줄기가 벽에 맞은 순간, 이루릴의 캐스팅이 끝났 다.

“체인 라이트닝!”

콰르으응!

이번엔 정말 뒤로 날려버릴 것 같다. 허공에 무시무시한 빛의 강이 만들어졌다. 마치 벼락이 치는 날에 그러하듯이 살갗이 근질거리는 느낌이 왔다. 이루릴의 체인 라이트닝은 치열하게 꿈틀거리며 암벽을 두드렸다. 동굴 전체가 눈도 제대로 못 뜰 것 같은 무서운 빛으로 가득 찼다.

우르릉! 우르릉! 동굴이 흔들린다, 이거, 그대로 무너지는 것 아닌가? 그때 펠레일의 고함소리가 다시 들렸다. “라이트닝 볼트!”

세 번째의 빛은 그런 대로 참을 만했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지자, 무서운 진동만이 남았다. 콰르르르 쾅! 위에선 다시 돌가루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돌이 마찰되는 지독한 소음. 펠레일이 외쳤다.

“달려요!”

앞을 보니, 엄청난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우리는 그 안으로 일제히 달려갔다. 내 앞쪽으로 샌슨이 가장 먼저 달렸다. 갑자기 샌슨의 낭패한 비 명소리가 들렸다.

“막혔어!”

앞이 막혀 있는 것이다. 뒤에서는 사람들이 계속 달려오고 있다. 동굴은 곧 무너질지도 모른다.

“비켜! 얼마 안 남았어!”

샌슨이 옆으로 비키는 것과 내가 돌격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나는 있는 힘껏 주먹을 뻗었다. “으아아아압!”

허리를 쭉 뻗으며, 주먹을 날린다. 발이 땅으로 박혀드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씨이잉 쾅!

세상에, 이게 무슨! 내 주먹의 크기가 별로 큰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귀를 찢는 굉음이 들리며 벽에 직경 5큐빗의 동그란 원이 생기며 그 반경 안에 있 던 암벽이 모두 가루가 되어 밖으로 날려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생각할 여유도 없이 우린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밖은 바로 그 절벽 앞의 숲이었다. 나는 나무 사이로 달려가 슈를 내려놓고는 뒤를 보았다.

절벽에 동그란 구멍이 생겨 있고 거기서 아이들이 가득 쏟아져나온다. 마지막으로 나온 것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이루릴에게 부축되어 나온 펠레일 이었다. 그들은 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는 먼지들 사이로 콜록거리면서 달려나왔다. 터커는 고개를 휘저으며 말했다.

“안 나온 사람 있으면 말해.”

물론, 대답은 없었고 터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다 나온 모양이군.”

그야 이루릴과 펠레일이 제일 뒤쪽에 있었으니 다 나온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먼지를 피워올리고 있는 절벽의 구멍을 보았다. 갑자기 그 구멍 위 쪽으로 검은 줄이 생겼다.

크지직! 구멍 위쪽으로 거대한 금이 줄달음쳤다. 우리는 그것을 보다가, 그 의미를 깨닫고는, 걸음아 나 살려라 줄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절벽이 안으 로 함몰되는 것이다.

쾅쾅쾅, 콰르릉!

“우우와아아아!”

우리는 취향껏 비명을 지르며 달렸다. 어찌나 달렸는지, 우린 거의 신전 가까이까지 돌아와버렸다. 그제야 나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뒤를 바라보았 다.

산 쪽에서 거대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먼지 구름이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나무에 기대어 앉은 샌슨이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 다.

“허어, 허억, 우린 산을 날려버렸군.”

“이상하단 말이야.”

“뭐가?”

“마지막에 말이야, 내가 벽을 찔렀을 때, 당연히 벽에는 내 주먹만 한 구멍이 생겨야 되는 것 아냐? 그런데 희한하게도 벽에는 5큐빗 정도의 구멍이 뚫렸다고. 어떻게 된 거지?”

나와 샌슨은 아이들을 이끌고 가면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아이들은 우리가 이끌지 않아도 이 근처 지형을 잘 아는지 흥분하여 비명을 지르며 마 구 달려갔다. 내 뒤에서 힘없이 걸어오던 펠레일이 말했다.

“그건 후치 군이 팔을 다 뻗었을 때 주먹이 벽에 닿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팔이든 무기든, 공격 동작이 끝나는 순간에 목표에 맞았을 때 가장 타격이 큰 것입니다. 제로 지점에서의 타격은 순수 운동 에너지의 전달이 가능 합니다. 그래서 그 충격파가 암석 전체에 전달되었죠.”

나는 감명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못 알아들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샌슨은 정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끊어치기.”

“무슨 말이야?”

샌슨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건 설명보단 보여주는 게 낫지.”

그리고 샌슨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땅에 떨어진 단풍잎을 하나 주워들었다.

“잘 봐?”

그리고 샌슨은 다른 손으로 주먹을 쥐고 그 낙엽을 후려쳤다. 물론 낙엽은 휘어졌고 주먹은 지나쳤다.

“그럼 이번엔.”

샌슨은 다시 후려쳤다. 하지만 이번엔 낙엽에 부딪히는 순간 다시 뒤로 뺐다. 짜악! 낙엽은 조각나며 흩어졌다.

“차이를 알겠어?”

“그러니까 뭐냐, 공격은 목표물에 맞을 때 끝나야 된다는 말이야?”

“응. 공격이 끝났을 때도 맞지 않는 것은 문제지만, 공격 도중에 맞는 것도 별로 타격이 없어. 가장 좋은 공격은 공격이 끝나는 그 순간에 목표에 맞 아야 돼.”

우리가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걸어오는 동안 어느새 영지의 모습이 가까워져 있었다. 아이들은 자지러지면서 달려갔지만 슈는 내 옆에서 걷고 있었 다. 슈는 뚱한 표정이었다.

“왜 그래, 슈? 기분이 안 좋아?”

슈는 갑자기 내게 팔을 내밀었다. 내가 슈를 안아올리자 슈는 내 귓가에 대고 말했다.

“쟤들 아빠 엄마 죽었어.”

나는 입안이 깔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눈앞이 부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간신히 말했다.

“쟤들은 그걸 몰라?”

“응. 톰도, 수지도 몇 밤 전에 잡혀갔어. 그 다음에 톰 아빠가 죽었어. 수지 언니도. 지금 가면 알 거야.”

나는 갑자기 영지에 엄청나게 가기 싫어졌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그들도 거의 비슷한 심정인 모양이다. 그제야 난 내가 왜 샌슨과 잡 담을 나누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난 이 사실이 닥쳐온다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누워 있던 환자들의 아이들은 그래도 재잘거리며 조금 전의 모험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그중에서 자신의 친지들을 찾지 못한 아이들도 있었다. 아 빠나 엄마, 혹은 다른 친지들을 내어놓으라고 외치는 아이들에게, 우리는 정말 할말이 없었다. 이루릴은 상냥하게 그분들은 벌써 죽었다는 말을 하려 했고 그래서 나는 엄청난 속도로 이루릴의 입을 막았다. 난 이루릴의 입을 틀어막고는 고함을 질렀다.

“얘들아! 엄마 아빠는 잠깐 여행 가신 거야!”

이루릴은 입이 틀어막힌 채 눈을 크게 뜨고 날 봤다. 하지만 아이들의 질문은 연이어졌다.

“몇 밤 자면 와?”

“내일 와?”

난 눈물을 닦고 싶었지만 이루릴의 입을 놓을 수가 없었다.

“꽤 멀리 여행가셨어. 응. 아주 멀리 가셨어.”

“으흑!”

사만다가 갑자기 기성을 지르며 신전 밖으로 달려가 버렸다. 아이들은 뭔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뭔지도 모를, 이해하지도 못할 불안을 느 끼고 있었다. 아이들 중 머리가 좀 굵은 녀석들은 이미 사태를 파악한 모양이다. 그런 아이들은 힘없이 신전 구석으로 가서 움츠리고 앉았다. 무력하 고 무력한 모습으로. 그런 아이들은 내게 싸늘한 조소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웃기지 말라는 듯한.

하지만 내 바지춤을 부여잡고 몇 밤 자면 아빠가 오냐고, 엄마 없으면 내가 밥 해먹어야 되느냐고 묻는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은 내게 간절한 시선을 보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누구라도 이 사태를 어떻게 해준다면 무슨 보상이든 하겠다. 아이들의 눈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가? 도대 체 들여다볼 수가 없어 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때 에델린이 날 구원했다.

“얘들아, 배고프지 않니?”

당장 아이들은 눈앞에 없는 부모들보다 맛보게 될 음식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버렸다. 아이들은 그 간첩들의 동굴에서 제대로 먹지 못했던 모양이 다. 나는 부엌으로 달려가면서 외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너무 행복했다.

“잠깐만 기다려! 맛있는 것 만들어줄게!”

뭐라도 좋다, 재료, 재료가 없나? 아이들의 이빨이 몽땅 썩어버려도 좋으니 설탕 좀 구할 수 없나? 벌꿀이라면 더 좋다. 잼, 우유, 계란, 밤, 딸기, 빌 어먹을! 찾는 것마다 있을 리 없는 물건이다. 별로 만들 기회는 없었지만, 그래도 난 케이크를 잘 만든단 말이야! 내가 크림을 얼마나 잘 만드는지 알 아? 아이들이 맛있게 먹으며, 어차피 닥칠 진실이지만 잠시라도 그것을 잊을 수 있게 될 음식이 없나? 그리고 배가 불러서 행복하게 잠들어, 꿈속에 서라도 그들의 부모를 만나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음식 없나?

“우라질!”

난 부엌의 벽에 구멍을 뚫어놓고 숨이 막힐 때까지 울었다. 이번엔 아까처럼 정확하게 치진 않았는지 벽에는 작은 구멍이 생겼고 손은 퉁퉁 부어올 랐다. 하지만 고통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어른들의 모습은 모두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들은 아이들을 모두 재워두었다. 아이들은 대모험과 격렬한 식사로 모두 잠들어 있었다. 물론 식사 도중엔 크라일이나 샌슨마저도 아이들에게 아양을 떨면서 시중을 들어 아이들의 건강한 소화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쳤다(사실은 사실이니까.). 그래서, 지금, 우리는, 전반적으로 지쳐 있었다.

“거창한 모험을 했는데 건진 건 하나도 없군……………”

“애들은 건졌잖아?”

크라일과 사만다의 대화다. 터커가 피식 웃었다.

“어쩌지? 발목 잡혔는데?”

터커의 말에 크라일은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얌전히 있던 펠레일이 말했다.

“아이들을 버리고 가실 계획입니까?”

“그렇다고 데려가냐? 골치 아프네. 우린 모험가야.”

“저, 땅을 갈며 몇 년을 보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응?”

“여긴 잘 정비된 땅과 집이 있습니다. 없는 것은 사람뿐이죠. 힘겨운 개척 도시의 삶도 아니고…………. 전, 이곳에 남아서 밭을 일구며 살고 싶습니다.” 펠레일의 말에 터커가 입을 딱 벌렸다.

“어? 어? 뭐야?”

“제가 그러고 싶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떠나십시오.”

“잠깐, 잠깐! 대륙 최고의 마법사가 되고 싶다던 꿈은 어쩌고?”

펠레일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전 아직 젊습니다. 전사분들은 지금으로부터 몇 년은 인생 최대의 황금기이고, 그 다음엔 뭘 하고 싶어도 하실 수 없게 되겠지요. 하지만 저로서는 몇 년을 낭비해도 상관없습니다. 노동은 전투력을 잠식하지만 마력을 잠식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입을 딱 벌린 채 펠레일을 바라보았다.

마법사, 전사들의 야망과는 또 다른 야망에 얽매여 사는 사람. 그것은 정신 세계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갈구이기 때문에 전사들의 그것보다 더 치열 하고 준엄하다. 마법을 익히고, 새로운 지식을 익히고, 마력을 운용하는 것은 우리 같은 칼잡이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욕망으로 이루어진다.

전사가 되는 것에 비하면 마법사는 차라리 선택받은 사람이다. 매일같은 단련은 전사들도 한다. 하지만 몸의 단련이 아닌 정신의 단련은, 끝없이 광 대무변해서 동시에 끝없이 나약해지고 나태해질 수도 있는 정신을 한결같이 가다듬는 치열한 투쟁을 일상처럼 해낸다는 것은, 그것은 우리 같은 범 부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일단 마법사는 머리가 좋아야 된다는 데서부터 벌써 우리완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그런데 펠레일은 간단히 정착해서 땅이나 일구겠다는 것이다. 나야 그의 실력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터커나 크라일 같은 자들과 함께 다니는 것, 그 동굴에서 우리를 꺼낸 것만 보아도 그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수련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가 그런 인고의 세월을 간단히 버리고 여기서 땅이나 일구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펠레일은 신비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지는 넓습니다. 전 간혹, 대지와 뒤엉켜 싸우며 마침내 대지가 되어버리는 농부들이 가장 위대한 영웅이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 몇 년, 그 흉내 를 내어보고 싶습니다.”

“몇 년? 어, 그럼 몇 년 후 다시 움직이겠다는 거야?”

“예. 오랜 세월은 걸리지 않을 겁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곳은 개척 도시가 아니니까요. 어쩌면 내년 정도에 당장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지도 모 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펠레일은 잠든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몇 년 있으면, 저 아이들은 성장하여 사랑을 하고 자손들을 퍼뜨릴 수 있겠지요. 이 대륙의 한귀퉁이에서, 인간이 살아가고 그들의 번영을 노래할 기틀을 다지기 위해 저 개인의 인생 중 몇 년을 투자하는 것은, 썩 수지맞는 장사라고 생각합니다.”

터커는 입을 다물 줄 몰랐다.

“허! 이것 참.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갑자기 펠레일의 얼굴에 노기가 스쳤다. 그렇지만 그의 선량해 뵈는 얼굴이 완전히 바뀔 정도는 아니었다.

“그 동굴에서의 일이 아마도 원인이 된 것 같습니다.”

“응?”

“실험 보고서를 기억하십니까? 그들이 자이펀인이라는 것은 잠깐 접어두고, 그들도 인간이라는 점에서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인간, 그중에서도 막 강한 지식을 다루는 자들이었지요. 우리들이 흔히 존경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실험은 그런 사람, 즉 선조의 지혜와 피나는 업적을 다루어온 마법사나 성직자들의 소행일 것입니다. 그러한 지식의 선물로 해내는 일이 고작 이런 것입니다!”

펠레일은 결코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힘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모두 숙연한 표정으로 펠레일을 바라보았다.

“인간이 행한 일은 인간이 책임져야 됩니다. 저 아이들은 책임을 요구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합리적인 이유가 있지요. 말 씀드렸다시피, 전사분들은 인생의 몇 년을 간단히 허비할 수 없습니다. 검을 쥘 수 있는 시기는 길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만다 님. 당신은 테페리의 뜻을 대륙에 퍼뜨릴 의무를 가지고 있는 순례자입니다. 그러니 저 외에는 불가능합니다.”

펠레일은 다시 그윽한 시선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여긴 90여 명의 어른과 50여 명의 아이들이 있지요. 제 왕국을 만들어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왕국에 왕은 없을 겁니 다. 여러분들께 원하는 것이 있다면………….”

펠레일의 눈이 갑자기 가늘어졌다.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대륙에 퍼뜨려 주시겠습니까?”

“푸핫하하하!”

크라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터커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올랐고, 사만다는 감탄한 눈으로 펠레일을 바라보았다. 펠레일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괜찮죠? ‘열두 드래곤과 대마법사 핸드레이크’, ‘백 명의 데스 나이트와 무지개의 솔로처’ 등의 쟁쟁한 이야기들만 대륙에 퍼져서는 사는 게 삭막하 겠죠. 그러니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의 이야기’ 같은 소박한 노래도 어두운 주점의 한구석에서 불려질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노래를 듣는 주정뱅이들이 모두 따뜻한 표정을 지으며 오늘 정말 따스한 노래를 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도 썩 괜찮겠지요.”

다음날, 우린 칼라일 영지의 대로에 있었다.

자이펀 간첩들로부터 찾아낸 실험 보고서는 우리가 가져가기로 했다. 우리는 국왕님을 알현하려 찾아가는 길이므로 같이 보고하면 될 것이다. 펠레일은 칼라일 영지에 남기로 했다. 그리고 그의 동료들과 트롤 프리스티스 에델린은 며칠 더 환자들을 보살핀 다음 떠나기로 했다.

성직자인 사만다와 에델린은 신의 계율에 얽매여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한 장소에서만 신의 복음을 전파할 수 없다. 그것은 신전의 책임자가 될 만 한 하이 프리스트의 일이며, 순례자인 사만다나 에델린은 자기 마음대로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정도는 거기서 봉사 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소개장을 써주면서, 여행중 곤란한 일이 있거든 에델브로이의 신전이나 테페리의 신전에 소개장을 보여주며 도움을 청 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감사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터커와 크라일. 그들은 전사다. 전사는 싸움을 찾아 떠돌아야 한다. 안주는 그들에게 사치이다. 그들은 자신이 죽을 땅을 찾아서 영원히 떠돌아야 되 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도 머무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도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은 무기 대신 망치와 괭이를 들고 돌아다니기로 했다.

네 명의 자이펀 간첩들은 우리가 데려갈 수 없었다. 우리 인원도 네 명인데 믿을 수 없는 자들을 데려가면 이동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는 한 명만을 데려가기로 했다. 수도에서 실험 보고서를 내놓을 때 증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동굴에서 우리에게 음험하게 대답하던 남자가 우리 와 함께하게 되었다. 그자의 이름을 묻자 그는 운차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펠레일은 나머지 세 명에게 농기구를 쥐어주며 이 영지에 내린 그들의 해악을 스스로 퇴치하도록 명령했다. 간첩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죽음의 동굴에서 끝까지 데리고 나와 살려준 데는 감사하는 눈치였다.

펠레일은 우리들에게만 살짝 귀띔했는데, 그들을 도망보내 줄 생각인 모양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간단히 잡힌 것으로 보아 조무래기들이고, 어차피 책임자는 그 검은 뱀파이어 여자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데리고 있는 것은 양자 모두에게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다. 하물며 재건으로 바쁠 영지에서 그들을 감시하기도 귀찮다. 그래서 도망보낼 작정이라는 것이다.

“국왕님께 전해 주십시오.”

펠레일은 말했다.

“칼라일 가문의 후계자를 찾아 조속히 보내달라고. 전 성심성의껏 그를 맞이할 것이며, 그가 허락한다면 그를 보좌하고 싶습니다. 그가 허락하지 않 는다면? 뭐, 제 동료들을 찾아 떠나야겠지요. 어쨌든 그 동안 세금은 못 보내드리니까 빨리 보내는 게 좋을 겁니다.”

칼은 빙긋 웃고는 그러마고 말했다. 하지만 펠레일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갑자기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여러분이 운반하는 서류는 전쟁의 중요 열쇠입니다. 아쉽게도 완성이 되지는 않았지만, 운차이 씨가 증언을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운차이는 콧방귀를 뀌었다. ‘고문할 테면 해봐라, 내가 입이나 벙긋할까.’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펠레일은 신경쓰지 않고 말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 바이서스와 자이펀의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던 나라들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둘기파로 활동하고 있는 몇몇 공작들과 영주들에게도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매파라면 말할 것도 없고……………. 어쨌든 그 서류를 노리는 암살자들이 여러분을 쫓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펠레일은 말했다.

“그건 제가 어떻게 해드릴 수 없는 일입니다. 조심하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하지만 국왕님께 이 말 한마디는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펠레일은 칼의 귀에 귓속말을 했다. 칼은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걸프스트림 말이군요.”

펠레일의 얼굴이 환해졌다.

“예. 거기가 가장 가깝습니다.”

“놀랍군요. 대충 이해했습니다.”

펠레일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칼 님은 전령 노릇이나 하실 분이 아닙니다.”

“당신도 이곳에서 농기구를 쥘 사람은 아닌 것 같소.”

터커 일행도, 우리들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뭔가 다행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말을 돌렸다. 사만다가 등 뒤에서 외쳤다.

“테페리가 돌보실 거예요! 갈림길에서 주저하지 말아요, 마음가는 대로 가세요!”

에델린도 말했다.

“폭풍을 잠재우는 것은 가녀린 코스모스입니다. 에델브로이의 축복이.”

우리는 터커, 크라일, 펠레일, 사만다, 에델린의 전송을 받으며 출발했다. 앗, 잠깐! 그리고 말 안했는데, 물론 그 뒤에는 50여 명의 아이들이 우리를 환송하고 있었다.

“잘가! 후치 오빠!”

“돌아오는 길에 꼭 선물 사올게!”

나는 슈의 목소리에 대답해 주고는 칼라일 영지를 벗어났다.

“사흘을 흘려보냈군. 하지만 그 사흘은 낭비한 것은 아니었어.”

칼은 고개를 돌려 칼라일 영지를 바라보았다. 나도 뒤돌아 보았다.

우리가 첫날 느꼈던 그 기괴함, 모든 색깔이 똑같은 요괴스러움은 이제 없었다. 따스한 가을 햇볕 아래 정겨운 영지의 모습만이 보였다.

나는 운차이를 힐끗 보았다.

그는 포로 상태였지만 묶어서 말에 태울 수는 없었다(이 마을을 샅샅이 뒤져 간신히 발견한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풀어주었지만 말을 타고 있으니 그냥 달아날지도 몰랐다. 샌슨은 잠깐 머리를 긁적인 다음, 운차이의 말과 자신의 말의 안장을 기다란 밧줄로 묶어버린 다음, 운차이의 두 발목에 밧 줄을 묶어 말의 배 아래로 연결했다. 운차이는 말에서 뛰어내리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칼은 운차이에겐 관심 없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 며 말했다.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이라………….”

우리는 모두 미소를 지었고 이루릴도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완벽한 아버지가 될 만한 사람은 아니야. 하지만 어차피 완벽한 아버지는 없어. 노력하는 아버지가 있을 뿐이지. 그런 면에서, 저 영지의 내일 이 어둡지는 않을 거야.”

칼의 말에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영지의 내일을 담보할 만한 자라면, 그는 대마법사라 불릴 만한 인물이겠지요.”

나는 놀란 눈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헛기침을 좀 하더니 외쳤다.

“자, 달려볼까요?”

우리는 가을 벌판을 달려갔다. 풍요로운 수확은 없겠지만, 풍요로운 인간의 마음이 있지 않은가. 헬턴트 사나이 세 명, 아름다운 엘프, 그리고 자이 펀 간첩은 그 황금빛의 벌판을 질풍처럼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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