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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리아를 놓아준 밤도 결국 꽤나 잠을 설치는 밤이 되어버렸다. 샌슨은 침대 속에서 끊임없이 끙끙거리는 소리만 내었다. 저 인간은 잠도 없나?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난 꿈 속에서 메리안을 보았다. 음. 상당히 에로틱한 꿈을 꾸게 되었다. 꽤나 침착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그 상황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겨둔 모양이다.
메리안은 혹시 내 꿈을 꿨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열여섯 처녀, 밤에 마당에 나왔지.
달빛이 너무 부끄러워, 순결을 빼앗긴 느낌.
처녀는 달을 피해, 그림자를 찾았네. 어두운 밤, 붉어진 뺨 누가 볼까 봐.
열여섯 처녀, 홀로 달을 마시는 나이.
에구…………. 여자 나이 16세라니 그건 몬스터에 가깝다. 용서하지. 그런 골 때리는 말로 내 복장을 다 뒤집어놓고 밤새도록 끙끙거리게 만들었지만, 용서해 버리지. 하지만 허리가 정말 뻐근하군. 그녀는 못된 삼촌에게 꿈만 먹고도 배가 불러야 할 유년기를 빼앗겼다. 좋은 남자를 만나면 좋겠다. 난 부스스한 머리를 긁으며 씻으러 내려왔다.
잠을 설쳤다고 했지만 그래도 오래간만에 다시 침대에서 자니까 기분은 정말 좋았다. 세수를 하고 나서 홀로 나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여관의 홀. 낯선 장식과 낯선 방 모양. 컴컴해서 더욱 이상해 보인다. 여행을 할 때 아침마다 새로운 것을 본다 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인지 모르겠군. 나는 조심스럽게 가까운 테이블로 걸어갔다. 창밖으로는 파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검은색 도시가 보였다.
주방 쪽에 불빛이 바알갛다. 거기서 왔다갔다하며 일하고 있던 레네즈 아주머니가 날 보고는 흠칫 놀란 모양이다. 하긴 어두컴컴한 홀에서 내 모습 은 시커멓게 보였을 테니까. 내가 먼저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 너니? 일찍 일어났네?”
밖에서는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새 지저귀는 소리들. 뭔가 털썩거리며 지나가는 소리. 아침이 밝아오기 전부터 움직이는 사람들. 나는 기 지개를 켰다. 너무 일찍 일어났나? 다시 올라가서 좀더 잘까? 에이, 관둬라.
알게 모르게 조금씩 주위가 밝아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홀의 벽이 조금 전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난 다시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레네즈는 이런 이른 시간에 손님인가 싶어 부엌에서 황급히 나왔다.
들어선 사람은 시커멓게 보였다. 완전히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누군지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자는 들어서자마자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말했다.
“야, 주인 아주머니. 안녕하쇼? 좋은 아침임다! 딸꾹! 여기 샌슨이라든가 하는 녀석들 묵고 있지요?”
네리아잖아? 레네즈 아주머니도 놀란 눈으로 술에 취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머리를 휘휘 저으며 테이블 쪽으로 걸어왔다.
“그 녀석들 좀 깨워줘요. 네리아가 왔다고, 음냐. 딸꾹! 어……, 어? 너?”
네리아는 머리를 휘휘 젓더니 초점이 잘 안 맞는다는 듯이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와락 달려들 듯이 내 얼굴 앞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야! 너, 딸꾹! 그 꼬마구나?”
우욱, 술 냄새에 정신이 몽롱하군.
“후치입니다. 그런데 우릴 찾고 있었어요?”
“잘 됐네. 와,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아이코!”
네리아는 앉으려다가 그대로 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어디서 엄청나게 취해서 왔네. 난 그녀를 부축하며 의자에 앉혔다. 의자에 앉히자 네리아는 테이블을 붙들고는 허리를 세우고 눈을 껌벅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허리가 앞뒤로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어, 어, 후이, 아니 후치, 졸리냐?”
내가 기우뚱거리는 게 아니라 당신이 기우뚱거리는 거야. 참 못 말리겠군. 난 레네즈를 바라보았다.
“아주머니. 찬물 좀 갖다주시겠어요?”
“찬물보다는 좀더 진한 게 있어야겠다.”
레네즈는 한숨을 쉬더니 부엌으로 걸어갔다. 난 잠시 말을 걸지 않고 네리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그 동안에도 계속 의자 옆으로 굴러 떨 어질 듯한 자세여서 가슴을 졸이게 만들었다.
“중심이 안 잡히면 그냥 테이블에 엎드려요.”
“어, 아아안 되지! 엎드리면 다 올라온다고. 딸꾹!”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셔요. 속 버리게.”
“까르르르! 나 걱정해 주니? 딸꾹, 너희들 돈, 모조리 꿀꺽 삼켰는데?”
“돈을 훔쳐갔든 어쨌든 사람 걱정해 줄 수야 있는 거잖아요.”
“파하, 딸꾹! 파하하하하!”
네리아는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내가 재빨리 일어서서 의자 등받이를 잡았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대로 뒤로 넘어갈 뻔했다. 난 의자를 끌어와 서 네리아의 옆에 앉았다. 참나. 왠지 싸늘하고 고즈넉해서 좋은 아침이 순식간에 주정뱅이 하나 때문에 깨어지는군. 네리아는 죽어라고 웃어대고 있 었다.
그때 레네즈가 돌아왔다. 그녀는 색깔만 봐도 뭔지 이것저것 굉장히 많은 것을 섞은 듯한 음료를 들고 왔다.
“자, 마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웃고 있던 네리아는 그 잔을 들더니 외쳤다.
“건배!”
가지가지 하는군. 네리아는 그것을 쭈욱 들이켰다.
“어? 술 아니네? 이거 뭐지?”
“약술이야. 좀 있으면 정신 들 거야.”
레네즈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버렸다. 난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얼마 있지 않아서 해님이 솟아오르시겠군. 꽤나 밝아졌는데? 난 다시 네리아의 얼굴을 봤다. 순간 나는 숨을 삼켰다.
“당신, 어디서 맞았어요?”
네리아는 고개를 휘휘 젓더니 뺨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아……, 속이야. 뭐라고 했니?”
“당신 눈이…… 그거 왜 그래요?”
“응? 아, 부었어? 괜찮아, 딸꾹!”
네리아는 가슴을 쾅쾅 치기 시작했다. 딸꾹질이 나와서 못 견디겠다는 투다. 좀 밝아지고 나서 자세히 보니 옷차림이고 뭐고 모조리 엉망이다. 눈에 는 멍이 들어 있고 윗옷은 바지 밖으로 나와 있다. 바지도 부츠 속으로 쑤셔넣다 말아서 엉망으로 부풀어 있다. 군데군데 찢어진 망토도 말이 아니다. 네리아는 가슴을 두드리더니 숨을 좀 들이켰다. 그러곤 품속을 뒤지더니 자루를 하나 꺼내어 테이블에 올렸다. 테이블에 부딪히는 소리로 봐서 돈자 루다.
“자, 내가 훔쳐간 돈.”
“에엑? 돌려주는 거예요? 하지만, 당신 어제는 돈이 없다고…………….”
“어제는 없지만, 오늘은 있지.”
이제 정신이 좀 드는 모양이다. 아직 몸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지만 네리아는 좀 침착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난 돈자루를 보면서 미심쩍게 물 었다.
“돌려줘서 고맙긴 한데요.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어떻게 돈이 생겼죠? 설마 이 돈………….”
네리아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훔친 건 아냐. 길드료로 냈던 돈을 돌려받았지. 정보료도. 그러니까 그건 백 퍼센트 완전히 너희들 돈이야.”
“그걸 돌려줘요?”
“흠. 여자에겐 네가 모르는 수단이 있단다, 꼬마야.”
나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그런 내 얼굴을 보더니 와하하 웃었다.
“아하하! 이런, 알 거 다 아니? 미안해, 꼬마야. 그래. 길드 마스터랑 같이 자줬어. 그 자식, 변태더라.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놓냐.”
난 정말 이럴 때는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어허, 돈 귀한 줄 모르고!”
네리아는 방긋 웃었다. 그런데 왜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네리아는 부어오르는 눈두덩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꼬마야. 누님은 너희 샌슨 씨가 퍽 마음에 들었단다. 아니, 너도 마음에 들고 그 인자해 보이는 아저씨도 꽤나 마음에 들었어. 푸후………. 세상 살기 어려운 사람들이야.”
난 아무 말도 못하고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계속 말했다.
“그런데 그런 맹추들 때문에 나이트호크 네리아가 훔친 돈을 돌려주게 되다니 말이야. 참 우습지! 깔깔깔!”
네리아는 다시 배를 붙잡고 웃어대었다. 난 그저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일 외에는 다른 일을 못했다. 정신없이 웃던 네리아는 간신히 웃 음을 그치고 말했다.
“휴우………… 너, 누님이 마음에 들지 않지? 그래, 난 도둑이고, 그리고 아무하고나 막 자는 나쁜 여자야. 뭐, 그러니까 이런 수단도 마음대로 쓸 수 있 는 거지. 낄낄낄.”
네리아는 그렇게 낄낄거리며 말하더니 일어났다.
“관둬라, 관둬. 애를 데리고 내가 무슨 소릴 하냐. 나 나가고 나거든 욕해라. 그런데 말이야, 내가 취해서 실수했거든? 조금 전에 들은 이야기는 절대 로 하지 마. 알았지?”
“……알았어요.”
네리아는 다시 한번 다짐하듯이 말했다.
“몸 판 돈이라고, 더럽다고 받지 않겠다고 할지도 몰라. 사람들은 그런 걸 따지지. 이건 말이야, 오로지 너희들 돈이었을 뿐이야. 잠깐 왔다갔다했을 뿐이지. 알았지?”
“예. 그런데 그래가지고 어딜 가려고?”
네리아는 잠시 창 밖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딘들 내 한 몸 기댈 곳 없겠냐. 아침엔 해가 떠오르는 동쪽이 따스하겠지. 저녁엔 해가 저무는 서쪽이 포근할 거야. 멋진 행운은 언제나 남동쪽에 서 찾아와. 그러니 황야에선 북서풍을 따라가면 돼.”
“저, 네리아…….”
네리아는 등을 돌린 채 무서운 음성으로 말했다.
“입 닥쳐! 꼬마. 난 등 뒤에서 말하는 걸 가장 싫어해!”
나는 입을 다물었다. 네리아는 그대로 휘청거리면서 문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잠시 문 기둥을 붙잡고 서 있었다. 몸은 돌리지 않은 채, 그냥 그렇게 잠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냥 나가버렸다.
삐이이걱.
문짝이 가늘고 뻑뻑한 음을 내며 다시 닫혔다. 난 테이블에 놓여 있던 돈자루를 바라보다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문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어젖히고 여관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리고 울타리를 지나 밖의 길에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없었다.
대로에는 아침 안개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시커먼 건물들의 머리머리가 이제 조금씩 제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밤은 지나가고 또 다른 날이 밝아왔 다.
하지만 잃어도 가슴 아파할 일이 적은 사람만 덮치는 착한 나이트호크 아가씨, 네리아는 지난 밤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난 그저 안절부절하며 좌우 를 돌아보았다. 뭔가 미치도록 안타까운 기분이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난 어깨를 늘어뜨리고 도로 여관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돌렸다. 눈이 부셨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뭐라고? 다시 말해 봐.”
“말했잖아. 천사가 와서 이걸 돌려주고 갔다고.”
샌슨은 내 이마를 짚어보았다. 샌슨은 심각한 표정으로 날 보더니 말했다.
“그럼…………, 그 천사는 어디로 갔지?”
“하나의 밤이 영영 사라지듯 그렇게 떠나갔지.”
샌슨은 이제 본격적으로 날 노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돈주머니를 보면서 뭐라 말은 못했다. 옆에선 칼이 빙긋 웃었다.
“다행이군. 우리 여행에 천사께서 도움을 주셨다니. 유피넬의 천사인지 헬카네스의 천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네드발 군. 내 생각엔 밤의 천사 같 은데 말이야, 맞나?”
나는 싱긋 웃었고 칼도 웃었다. 샌슨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로 웃고 있는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머리를 휘휘 젓고는 자 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운차이는 기겁하면서 같이 일어났다. 샌슨은 레네즈에게 말하려다가 운차이를 보더니 말했다.
“넌 왜 따라오냐?”
“너, 너! 도대체 머리에 뭐가 들었어?”
운차이는 화난 표정으로 자신의 발목과 샌슨의 발목을 연결한 밧줄을 가리켰다. 샌슨은 밧줄을 보더니 알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 참. 그렇지. 흠. 레네즈 씨?”
“뭐요, 총각?”
“10인분 도시락 좀 부탁합니다. 점심 때 먹을 거랑 저녁에 먹을 겁니다. 아무거나 양만 맞춰서 해주면 돼요. 물론 대금은 지불하지요.”
“알았소.”
샌슨은 다시 자리로 돌아왔고 운차이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표정으로 샌슨을 졸졸 따라왔다. 샌슨은 자리에 앉더니 말했다.
“자, 돈도 돌아왔고, 도시락만 준비되면 떠나자.”
“침대가 또 안녕이로군. 오늘 밤은 야영이지?”
“응. 걱정 마. 갈색 산맥 통과에 이틀쯤 걸리겠지. 내일과 모레만 지나면 수도야.”
“긴 여행이 드디어 끝나는군.”
아침 식사를 마치고 푸근하게 도시락이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 동안 운차이는 빵 자르는 나이프를 하나 슬쩍했지만 레네즈가 귀신같이 알아 내었다.
“여봐요들! 나이프가 하나 모자라!”
그래서 운차이는 잠자코 그것을 내놓아야 했다. 칼은 빙긋 웃었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래간만에 푸근한 시간이군. 오랫동안 여행해 왔지만 지붕이 있는 곳에서 이렇게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 틈이 생기자마자 샌슨은 밖에 나가서 온몸을 뒤틀고 있다. 밖의 마당에서 해괴한 기합소리가 들려온다.
“헬턴트 경비 대원 지침서 검격 14번 공격세!”
“헬턴트 경비 대원 지침서 검격 21번 변형세!”
뭐…………, 저 모양이다. 난 구경이나 해볼까 해서 어슬렁어슬렁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역시 운차이는 후다닥 일어나며 날 따라왔다. 샌슨이 내 발에다 가 밧줄을 묶어놓고 나갔거든. 운차이는 위궤양이 도진다는 식의 표정을 지으며 내 뒤를 따라왔다.
아이고, 이유가 있구나?
여관 밖의 대로에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멈춰 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샌슨은 저런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던 것이군. 그러고 보니 입 을 헤 벌린 채 우유통에서 우유를 반쯤 흘리고 있는 아가씨(아마 어딘가의 목장에서 받아오는 길이렷다. 아침 식사의 우유가 좀 모자라겠어.), 감탄을 표하며 어깨 를 움찔거리는 노인, 킥킥거리며 팔짱을 낀 채 바라보는 젊은이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오가며, 혹은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난 현관 옆의 건물 벽에 기대어서서 그것을 구경했다.
뭐, 폼이야 봐줄 만하다. 아침 햇살을 등지고 땀방울을 흩날리는 샌슨. 롱소드가 정말 가슴이 시릴 정도로 번쩍이고 있다. 은도금이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것 차치하고, 정말 폼 하나가 봐줄 만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도약하며 베어내리고 그대로 허물어지듯이 돌려친다. 다섯 번을 앞으로 끊어치며 돌격하다가 검의 회수 동작으로 그대로 뒤를 돌아친다. 도대체 끊 어짐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모든 방향으로의 공격이 원활하다. 저런 가벼운 동작이 가죽 갑옷까지 입고 가능하다.
나는 샌슨의 동작에 맞추어 내 동작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어떻게 공격할 수 있을까?
안 되겠다. 도대체 칠 각도가 안 나온다. 저렇게 치면…………, 난 이렇게 피할 방법밖에 없군. 그러니 다음 공격은 둘 중 하나인데… 쳇, 벌써 하나는 봉쇄당하는군. 그럼 이 공격으로 들어가면…………, 역시군. 허점이 나온다. 아무래도 샌슨도 지금 가상의 적을 상대하면서 검을 휘두르는 모양이다.
똑같이 건물 벽에 기대어 구경하던 운차이가 말했다.
“영자 팔법(法) 모두 익숙하군. 좋은 도량이다.”
“무슨 말이에요, 그거?”
“우리 검사들이 하는 말이다. 신경쓸 거 없어.”
“국가 기밀쯤 돼요?”
내 농담에 운차이는 피식 웃더니 다시 샌슨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둘도 만인의 시선의 중심이 되고 있다. 우리 둘은 마치 형제처럼 똑같이 건물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팔짱을 끼고 구경하고 있었고 그 발목에는 밧줄이 서로 묶여 있다. 참 봐줄 만하겠다.
결국 야유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헤이, 이봐! 우리 마을에 서커스가 들어왔나?”
농담을 던진 것은 인상이 사납게 생긴 젊은이였다. 사람들은 뭔 일이 나나 싶어서 모두 입을 다물고는 그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샌슨은 그 말을 듣더니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곤 빙긋 웃더니 대거를 꺼내들고는 입을 왁 벌려서 먹어치우는 시늉을 했다. 사람들은 와아 웃으며 박수 를 쳤다. 하는 짓이 귀여우니까. 그 젊은이도 피식 웃어버렸다.
그런데 그 다음은 조금 사태가 심각했다.
“여보게, 젊은이? 내가 대무해 줄까?”
“아아! 아버님, 안 돼요!”
딸과 아버지일까, 며느리와 시아버지일까? 어쨌든 팔팔하게 보이는 중년 아저씨 하나가 농을 던져온 것이다. 그 옆의 여자는 사색이 되어 그 아저씨 를 말렸다. 샌슨은 얼떨떨해져서 그 중년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아저씨를 위아래로 쳐다보더니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 죽고 싶지 않은데요.”
“와하하! 걱정 마! 살살 해줄게!”
“아버님! 저 청년 하는 것 못 보셨어요? 참으세요! 안 된다고요. 저 청년이 겸손해서 저러는 거예요.”
딸보다는 며느리 쪽이 확실한 것 같다. 그러나 그 아저씨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는 여관 마당으로 불쑥 들어섰다.
“내가 말이야, 이래봬도 왕년에 자이펀의 개들을 수도 없이 잡았지! 자넨 그런 것은 구경도 못 해봤겠지? 아무래도 실전 경험이라는 건 말이야………….” 난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그냥 조금 전과 똑같이 여관 벽에 기대어선 채,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샌슨은 결국 점잖은 말로 그 아저씨를 돌려보내었다. 다행히도, 그때 안에서 준비가 끝났다는 레네즈의 말소리도 들려왔다. 그 아저씨는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 몸을 돌렸다.
말들을 도로 꺼내었다. 샌슨의 말이며 가장 우람한 슈팅스타, 놈은 우리 말들 중 우두머리처럼 당당하다. 아담하고 날씬한 내 말 제미니, 저놈과 정 말 무지무지하게 싸웠지만 이젠 친하다. 칼의 말은 트레일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가볍게 걸을 때는 발을 조금 끄는 버릇이 있어 붙인 이름이다. 병은 아닌데 희한하게 버릇이 그렇다. 이루릴의 말 래셔널 셀렉션은 왠지 주인을 닮아가는 느낌이다. 다른 말처럼 행동하지 않고 침착하며 차분하게 움직 인다. 주인을 닮아가나? 운차이는 자신의 말을 앰뷸런트 제일(이동 감옥)이라고 부른다. 꽤나 그럴듯하다.
마구를 얹고 짐을 고정한다. 샌슨은 자신의 말과 운차이의 말을 긴 밧줄로 서로 묶었다. 아침 햇살은 이제 중천을 향한 도약을 시작하고 있다. 가을 아침의 싸늘한 바람에도 이제 안온한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하는 시간. 여행을 다시 시작하는 거야.
“항상 여행객으로 북새통을 이루세요!”
“원, 고마운 말을 다 하네. 잘들 가요.”
레네즈와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출발했다. 다가닥다가닥
거창한 건물들 사이를 지나서 한참 달리자 마을의 반대편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도시 둘레를 둘러싼 외성에 난 성문으로 그 옆에는 경비병들의 초소로 보이는 건물이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었다. 경비병들이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긴 했지만 별로 걸음을 멈추게 하거나 하지는 않는 다. 아무래도 이 근처는 미드 그레이드의 중심지니까 유동 인구가 많은 모양이다. 그들은 그저 쌀쌀한 아침 날씨에 작은 장작불을 피워놓고 앉아서 잡담을 나누고 있을 뿐이다.
샌슨이 희한한 휘파람을 불었다.
“추울 텐데……, 거참.”
“응?”
“네가 침대로 끌어들인 아가씨다.”
아, 그랑엘베르여!
성문에는 메리안이 나와 있었다. 불쌍하게 여긴 성문 경비병들이 껴주었는지 모닥불 옆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똑바로 내 쪽을 바라 보았다. 샌슨은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메리안은 걸어오더니 다른 사람에게 목례하고는 나에게 다가왔다.
“지금 가니?”
난 말에서 내렸다.
“너, 어떻게 여기 나와 있는 거야?”
“그냥…………. 지나던 길에 혹시 후치가 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잠시 말이 끊어졌다. 메리안은 추운지 손을 치맛자락 속으로 묻으면서 말했다.
“또 오니?”
“그럴 거야. 수도에 갔다가 그대로 돌아올 거야. 아, 그렇지. 내가 어제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보라고 그랬지? 수도에서 뭐라도 사다줄까?” 메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으응. 됐어. 그럴 필요는 없구……. 다시 돌아온다고? 그럼, 우리 주점에 들러줄래?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꼭 들를게.”
“꼭이야? 기다릴 거야?”
“응. 저, 그런데 말이야………….”
난 메리안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혹시…………, 그 일 때문에 네가 시집도 못 가는, 뭐 그런..
메리안은 발그레해진 얼굴로 웃었다.
“헤에. 걱정해 주니? 그럼 네가 나 책임지렴?”
이건 장난이 아닌데? 난 우물쭈물하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말 위에 앉아 있던 다른 일행들은 모두 재미있다는 시선만 보내고 있었다. 메리안은 말했다.
“걱정 마. 후치에겐 레이디가 있잖아.”
“푸히흐어아하하!”
샌슨이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저 인간은 도대체! 메리안은 멍한 표정으로 샌슨을 보더니 다시 내게 말했다.
“그럼, 꼭 돌아오는 거지?”
“물론이야.”
“알았어. 그럼 작별은 아직 필요없네. 잘 갔다오라고 할게.”
“그럼 ・・・・・・ “
난 다시 말 위에 올랐다. 메리안은 잠시 내 모습을 바라보다가 뭐라고 말할 듯이 입술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뛰어가버렸다.
“가자.”
샌슨의 재촉을 듣고서야 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성문을 빠져나왔고, 곧 속도를 내어 야산에 인접한 도로를 따라 달려갔다. 산자락을 굽이굽 이 돌면서 펼쳐진 길이며, 길 옆으로는 가을걷이가 끝난 밭들이 펼쳐져 있다.
우리는 갈색 산맥으로 들어섰다.
가을의 산 속은, 꽤 추울 듯하지만 희한하게 별로 춥지 않다. 적어도 낮에는 그렇다는 말이다. 어쨌든 가을 햇살이 내리쬐어 헐벗기 시작하는 나뭇가 지들 위로 부서지고 있다. 산길을 따라 걷는 것도 고역스러운 일은 아니며, 꽤 즐길 만한 여행이다.
펠레일이 있다면 산 모양만 척 보고서 ‘에, 이 산맥의 뻗어내린 모양을 보아 하오에 접어들면 수목 한계선이 나올 듯합니다. 야간에 수목 한계선보다 고지에서 잠들게 되는 것은 고려할 수 없으므로 진행 속도를 변경해야 할 듯합니다.’ 등의 말을 했겠지. 그 똑똑한 마법사는 지금 전설에 남을 위대한 업적, 그러니까 50명의 꼬마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을 것이다. 흠, 말해 놓고 보니 그거 정말 전설적인 업적이 되겠군. 대마법사 핸드레이크라도 그 런 일은 못할 거다. 나? 나라면 한 명의 꼬마만 맡게 되더라도 하루만 지나면 쓰러질 거다.
그때였다.
쉬이이이, 펄럭, 펄럭.
날개 소리기는 한데, 그게 무슨 새인지는 모르지만 저렇게 느리게 날면 떨어질 텐데? 난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기겁할 듯이 놀랐다. 샌슨의 고함소 리가 들렸다.
“길 옆으로! 어서, 길 옆의 나무 아래로!”
우리는 황급히 나무 아래에 숨었다. 저놈이 독수리처럼 시각이 좋다면 어쩌지?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바라보지 않고 그냥 날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숨소리도 제대로 못 내며 머리 위의 나뭇잎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침엽수림이라 가을인데도 나뭇잎이 울창했다.
그것은…………… 마치 도마뱀처럼 생겼고 독수리는 비교도 안 되게 덩치가 컸으며, 박쥐의 날개 같은 커다란 피막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거꾸로 올려 다보아서 그런지 온통 시커멓게 보였다. 그것을 얼핏 본 순간, 나는 뒤통수의 머리털이 일제히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크윽, 아무르타트?”
아냐, 저건 블랙 드래곤이 아니다. 좀더 자세히 관찰하던 난 이마의 땀을 닦아내렸다. 그것은 훨씬 날씬하고 덩치도 작다. 꼬리 길이까지 다 쳐도 15 큐빗 정도밖에(?)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은 캇셀프라임이 하늘을 날 때처럼 저렇게 큰 것이 하늘을 날다니 말도 안 된다…………는 느낌으로 날지는 않았 다. 아주 가볍게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와이번이다.”
칼은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낮게 말했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어떻게 우리가 저걸 못 봤지?”
“갑자기 날아오른 모양이군요.”
이루릴이 말했다. 샌슨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하늘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깜빡했군. 잘못하면 큰일날 뻔했어.”
샌슨은 멀어져가는 와이번을 보며 덧붙였다.
“우리를 보진 못했군. 정신없이 날아가는데? 마치 뭘 쫓아가는 것처럼………….”
그때였다.
“아아아악!”
비명소리. 젠장! 분명히 공포에 질린 목소리이다. 샌슨의 말처럼 와이번은 뭔가를 노리고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샌슨은 곧장 말의 배를 걷어찼다. “빌어먹을! 이랴! 하!”
운차이는 대경실색했다.
“이 자식아, 죽고 싶어서!”
운차이는 악을 썼지만 역시 기겁하면서 말을 달리게 했다. 밧줄이 서로 연결되었으니 자칫하면 둘 중 하나가 낙마할지도 모르니까. 운차이는 기를 쓰고 샌슨을 따라갔으며 다른 사람들도 샌슨의 뒤를 따라 비명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뭇가지가 정신없이 머리 위로 흘러 지나갔다. 볼을 할퀴며 귓가에 소용돌이치는 바람소리. 쉬익, 쉬익, 쉬익. 급격한 말발굽 소리에 호응하듯 다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사, 살려줘요!”
샌슨은 앞뒤 볼 것 없이 달려갔다. 잠시 후, 우리가 뛰어나온 곳은 산과 산 사이에 생긴 넓은 분지였다. 중부 대로가 지나는 장소라 그런지 나무들이 별로 없었고 잡풀만이 무성한 분지였는데 모두 허리를 넘을 듯한 풀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말에 타고 있어서 멀리 볼 수 있었다. 분지 저쪽으로부 터 뭔가가 다급하게 우리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쪽의 하늘에서는 와이번이 크게 선회하고 있었다. 방향을 바꾸어 내려꽂힐 기세였다. 이루릴이 외쳤다.
“네리아군요!”
뭐? 저게 보이나? 우리는 그것을 물어볼 새도 없이 달려갔다. 그러고 보니 붉은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것이 보이는데. 그런데 그때 네리아의 뒤를 쫓 고 있던 와이번은 선회를 끝내었다. 그것이 이제 땅에 있는 네리아를 덮쳐 내려꽂히려 하고 있었다. 샌슨은 발악을 하며 와이번의 주의를 끌어보려 했다.
“이 자식아! 여기 더 많다!”
그때 나는 황당한 것을 보고야 말았다.
내 앞에 달려가던 칼은 고삐를 놓아버리더니 롱 보를 뽑아들었다. 불가능하다! 말 위에 앉은 채론 정면으로 롱 보를 쏠 수 없어! 그런데 칼은 다리 하 나를 들어올려 옆으로 앉은 자세가 되었다. 수평으로 들어올려진 롱 보. 빠아아아……………. 롱 보가 비명을 지른다. 이 거리에서, 달리는 말 위에서? 내가 칼에게 그의 정신 상태에 대한 의문을 피력하기도 전에 칼은 시위를 놓았다. 쐐애애액!
“쾌애애액!”
숨이 막히는 희한한 비명소리. 땅으로 내려꽂히려던 와이번이 순간 몸의 균형을 잃으며 기우뚱거렸다. 와이번은 거세게 날갯짓을 하며 다시 솟구쳐 올랐다. 우리는 쾌재를 올렸다.
“우와!”
그러나 놈은 공중에서 다시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네리아에게 최고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루릴이 갑자기 처지기 시작하더니, 말을 세우고 캐스팅을 시작했다.
“매직 미사일!”
부우우웅! 이루릴의 몸 주위에서 언젠가 보았던 것처럼 하얗게 타오르는 다섯 개의 광선이 나타났다. 그것은 제각기 허공에 어지러운 궤적을 그리며 와이번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쾅쾅쾅쾅쾅!
다섯 개의 광선들이 차례차례로 와이번에게 부딪혀갔다. 하늘을 날고 있는 와이번은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균형을 잃을 염려가 있는데 저런 것이 다 섯 개나 작렬했으니 제정신일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와이번은 광선들을 무시하면서 날아들고 있었다. 맞아도 상관없다는 투잖아.
“크아아아악!”
“흩어져!”
샌슨의 고함소리와 함께 우리는 양 옆으로 갈라져 달리기 시작했다. 샌슨과 운차이가 왼쪽으로, 그리고 나와 칼이 오른쪽으로 달렸다. 그런데 캐스 트하느라 제자리에 서 있던 이루릴은 출발이 좀 늦었다. 그녀는 뒤로 돌아 달려갔으나 와이번은 똑바로 그녀를 쫓아갔다.
“제기랄!”
난 다시 말을 돌렸다. 그리고 이루릴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하늘에 있는 와이번을 어떻게 공격할 것인가. 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 다.
“진실을 알려주마! 내가 바로 네 아버지의 원수야!”
그러나 와이번은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절망적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지금 와이번을 공격할 수 있는 것은 칼뿐이다. 칼은 역시 롱 보 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피이이웃! 허공을 가로지른 화살이 와이번의 날개에 명중했다.
“쾌애액!”
그러나 와이번은 그대로 몸으로 뭉개버리겠다는 듯이 이루릴에게 부딪혀갔다.
“아아아악!”
충돌! 와이번은 뒤에서 이루릴의 말에 부딪혀갔다. 이힝힝힝힝! 래셔널 셀렉션이 비명을 지르며 발을 헛디디는 것이 똑바로 보인다. 말라 있던 풀이 마구 하늘로 튕겨오르고 낙엽이 폭풍이 되어 흩날렸다.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땅을 진동시키는 굉음. 이루릴은 충돌의 순간 앞으로 튕겨 날아갔다. 충 격으로 정신을 잃었는지 이루릴은 그저 맥없이 땅에 부딪혀 굴러가버렸다. 래셔널 셀렉션도 네 다리를 휘저으며 나가떨어졌다.
와이번도 성할 리 없다. 땅에 온몸으로 부딪혀버렸으니. 그놈은 날개가 너덜너덜할 정도로 찢어졌다. 칼의 화살에 맞은 데다가 충격까지 겹쳤으니 까. 그러나 와이번은 용틀임을 하더니 몸을 뒤집으며 일어났다. 놈은 그대로 머리를 높게 들어올려 휘휘 목을 저었다. 그 아래에는 정신을 잃고 쓰러 져 있는 이루릴이 보였다. 놈은 이루릴을 발견하더니 곧 머리를 밑으로 내려꽂았다.
“안 돼!”
“멈춰!”
샌슨이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고 나도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러나 와이번이 머리를 내려찍는 것보다 빠를 수는 없다. 놈의 이빨 이 희게 번뜩였다.
“아아악!”
이루릴의 비명소리. 놈은 이루릴의 허리를 물어올렸다. 사방으로 튀는 붉은 피. 놈은 그대로 이루릴을 휘휘 휘두르다가, 달려가는 우리를 발견하자 이루릴을 우리 쪽으로 집어던졌다. 허공에 피를 뿌리며 이루릴이 날아오고 있었다.
“이루릴!”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안장을 두 손으로 강하게 내려찍으며 뛰어올랐다. 나 외에는 안 된다. 말 위에서 뛰어오를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 안장이 박살나는 느낌과 함께 나는 날아올랐고, 내가 강하게 아래로 밀어버리느라 제미니는 그대로 땅에 가슴을 들이박으며 나동그라졌다. 이힝힝힝! 허공에서 간신히 이루릴을 잡아내었다. 땅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온다.
“아아아압!”
나는 죽을 힘을 다해 허리를 뒤틀어 이루릴이 위로 가도록 했다. 콰광! 눈앞이 순식간에 엄청나게 밝아졌다. 백색, 화끈한 백색과 함께 세상이 뒤집 히는 감각. 귀가 땅에 쓸리는지 통째로 떨어져 나갈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난 이루릴을 꼭 껴안았다.
“너 이 죽일 놈아!”
샌슨의 고함소리에 난 머리를 간신히 들어올렸다.
“우으음!”
등에서 모진 고통이 다가왔지만 난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내 품에 안겨 있는 이루릴을 보았다.
이루릴의 검은 머리는 흙먼지로 더러워져 있었고 그녀의 하얀 살갗 곳곳에 붉은 핏방울이 튀어 있었다. 손바닥에 닿는 질척거리는 감각에 부들부들 떨며 그녀의 허리를 보았다. 그녀의 옷에는 구멍이 나 있었고 피는 계속해서 하얀 블라우스를 물들여가고 있었다. 나는 이빨을 딱딱 부딪히며 일단 와이번이 어떻게 되었는지 살폈다.
샌슨은 와이번에게 말을 달리면서 롱소드를 후려쳤다. 그러나 와이번은 찢어진 날개를 퍼득거리며 옆으로 피하더니 샌슨의 뒤를 따라가고 있던 운 차이에게 달려들었다. 샌슨은 황급히 뒤로 칼을 휘둘렀다.
샌슨의 슈팅스타와 연결되어 있던 밧줄이 잘리자 운차이는 급히 앰뷸런트 제일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와이번의 공격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그 러나 와이번은 이제 운차이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놈은 찢어진 날개를 펄럭이며 두 발로 땅을 박차며 마치 거대한 수탉처럼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리고 수탉에게 쫓기는 지렁이 신세가 된 운차이는 죽어라고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 와이번 옆의 풀숲에서 갑자기 뭔가가 튀어나왔다.
“이야아아압!”
네리아였다. 갑자기 나타난 그녀는 온몸을 던지며 그녀의 트라이던트를 와이번의 옆구리에 꽂아넣었다. 와이번은 머리를 하늘로 들어올리며 비명을 질렀다.
“패애애액!”
그러나 놈은 곧 날개를 휘둘렀다.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놓아버리며 뒤로 텀블링해서 빠져나왔다. 난 일단 와이번이 내게서 멀어졌기 때문에 떨리 는 손으로 이루릴의 허리 상처를 막았다. 이루릴은 상처를 꽉 누르자 신음을 뱉었다.
“으으음…… 하아, 하악.”
나는 그녀에게 충격이 가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녀의 허리 뒤를 만져보았다.
기억대로다. 그녀의 혁대 등쪽에 있는 작은 가방이 만져졌다. 난 떨리느라 잘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힘겹게 움직여서 힐링 포션을 꺼내었다. 이루 릴의 얼굴은 벌써 파리하게 변하고 있었다. 인간이라면 쇼크사가 일어날 텐데, 엘프는 제발 아니길 빈다. 난 힐링 포션의 병 주둥이를 거의 부수듯 하 며 열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려넣었다.
이루릴은 입술을 적시는 감각에 눈을 떴다. 그녀는 약병을 보더니 목이 타듯이 말했다.
“사, 상처에도……”
상처에? 아, 상처에도 바르라고? 난 이루릴의 혁대를 풀고 블라우스를 끄집어내었다. 피에 젖어 끈적거리는 블라우스를 조심스럽게 치우고는 그녀 의 허리의 상처를 드러내었다. 참혹했다. 이루릴의 허리와 배에 둥글게 나 있는 구멍들에는 내 손가락도 들어가겠다. 난 조심스럽게 약을 발랐다. 피 를 먼저 닦아내어야 되는 것 아닌가? 그 순간, 나는 쭈뼛하는 느낌을 받았다. 뭘 느꼈던 거지?
내게 다가오는 큼직한 발자국소리다. 그것을 느꼈던 것이다.
“조심해! 후치!”
고개를 돌려보니 벌써 육박하고 있는 와이번이 보였다. 아니, 와이번은 보이지 않고 놈의 허연 이빨과 입 안만이 보일 지경이다. 시간이 없다! “죽어보자!”
난 무릎 위의 이루릴을 덮치며 웅크렸다. 목만 물지 마라. 그럼 좀 버틸 수 있겠지. 그러면 그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러………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안 오는데? 머리를 살그머니 들어보았다. 내 앞에는 사람의 다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 등을 따라 올라가 뒤통수가 보였다. 그 좌우에는 펼쳐진 양팔. 누군가 내 앞을 막아서 있었다.
운차이였다.
그리고 운차이 앞에는 와이번이 서 있었다. 머리를 꼿꼿이 들고 서 있으니 그 거대한 몸은 운차이의 뒤에 앉아 있는 내게도 똑바로 보일 정도이다. “크르르르………….”
놈은 으릉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덤벼들지 않는다. 운차이는 그저 양팔을 벌려선 채 내 앞을 막아서 있을 뿐인데 저놈이 왜 덤벼들지 않지?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Peca, Nanysanchee amai…………… Ahn choudar.”
운차이의 목소리는 낮은 으르렁거림 같았다. 그러더니 운차이는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그러자 해괴한 일이 일어났다.
와이번이 뒤로 물러난 것이다.
“Ahn choudar!”
운차이는 다시 한 발 내디뎠다. 그러자 와이번은 두 발자국이나 물러났다.
와이번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그 눈빛은 자신이 왜 물러나는지도 모르겠다는 듯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놈은 갑자 기 물 속에서 뛰쳐나온 듯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놈은 뒤로 물러나는 것을 정지했다. 놈의 눈에서 불똥이 뿜어졌다.
“크르르르………….”
놈은 다시 머리를 앞으로 내밀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운차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여기까지군. 달아나. 후치.”
“꽤애애애액!”
와이번은 마치 무엇을 떨쳐버리는 듯이 포효하며 날개를 쫙 펼쳤다. 엄청나다! 놈은 양 날개를 쫘악 펼치고 목을 울리고 있었다. 귀가 먹어버릴 지경 이다.
“꽤애애애액!”
놈은 땅을 박차며 운차이에게 달려들었다. 운차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콰당! 놈은 운차이의 옆을 스치며 땅에 턱을 박았다. 놈의 기다란 목은 운차이의 뒤에 앉아 있던 내 옆에까지 와서 땅에 나동그라졌다. 놈은 혀를 빼 물고 죽어 있었다.
운차이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나도 바라보았다. 그 목에는 화살깃이 보였다. 목을 깨끗이 관통당한 것이다.
“여어! 다들 괜찮은가?”
저 멀리서 칼이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칼이 우릴 구했군. 운차이는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도 아무 말 없이 앉은 채로 헉헉거렸다. 운차 이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후우. 하루에 두 번은 못할 일이군………….”
내 가슴에 안겨 있는 이루릴의 얼굴을 내려보며, 나도 말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조금 전엔 어떻게 된 거죠?”
“응?”
“그 와이번 말이에요. 완전히 질려버린 듯하더군요.”
“아, 그거?”
운차이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질려버리게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