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2권 – 제4부 : 황소와 마법검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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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2권 – 제4부 : 황소와 마법검 5화

5

우리는 더 이상 전진을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분지 끄트머리에 있는 숲으로 들어갔다.

“이라무스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세레니얼 양.”

칼의 질문에 이루릴은 파리한 얼굴을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내일이면 나을 거예요. 이라무스로 되돌아가면 시간을 더 소모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에겐 숲이 더 안온합니다. 이라무스 로 돌아간다고 더 나을 것은 없을 거예요. 오히려 거기까지 가느라 더 힘겨워지겠죠.”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이루릴은 엘프라 어떤 기후에도 크게 거리낄 것이 없다지만 그것도 건강할 때의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는 장작을 많이 준비하기로 했다. 샌슨은 손 도끼를 들고 나무들을 바라보더니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원이긴 하지만 분지 지형이라 바람을 별로 안 타는지 나무들은 모두 우람한 것들 이었다. 작은 것도 직경이 한 뼘은 되었다. 손도끼로 찍으면 하루 종일 걸리겠군. 내가 앞으로 나섰다.

“이 나무를 내가 바스타드로 자를 수 있을까, 없을까?”

“칼날 부러진다.”

“그럼 곰 흉내를 내는 게 좋겠군.”

네리아는 이상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손바닥에 침을 뱉어 문지르고는, 있는 힘껏 돌격해서 나무에 부딪혔다. 콰지지직! 첫 번째 충돌에 나무 는 뿌리가 들리고 말았다. 그러자 나머지는 나무의 무게로 알아서 넘어가게 되었다. 쿠궁. 네리아는 입을 쫘악 벌리고는 말도 제대로 못했다.

난 샌슨에게서 도끼를 건네받아 쓰러진 나무 위에 도끼날을 곧게 세웠다. 그리고 주먹으로 도끼머리를 내리치자 나무는 반 동강이 났다. 그런 식으 로 기다란 나무를 가로로 몇 토막으로 내고는 다시 세로로 쪼개고를 몇 번 하니 곧 훌륭한 장작더미가 만들어졌다. 네리아가 질문해 왔다.

“너 사람 아니지?”

“들켰군요. 그건 당신과 나만의 비밀로 남겨둬요.”

내 실없는 말에 네리아는 실소했다. 칼은 나무에 기대어 앉은 이루릴 옆에 앉아서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분지를 둘러보고 있었다.

“밤이 되면…………, 사방의 몬스터가 다 몰려들 수 있는 지형이구만. 주위의 산등성이가 모조리 몰려 있는데. 산 속에 있는 평지니까, 어쩔 수 없겠지.” 샌슨과 나도 그 옆에 앉았다.

“울타리를 세울까요?”

“글쎄. 퍼시발 군. 갈색 산맥의 몬스터 분포는 어떠한가?”

샌슨은 자신의 짐 배낭에서 책을 꺼내들더니 바닥에 앉아 그 책을 무릎 위에 펼쳤다.

“어, 장난이 아니군요. 중부 대로가 지나는 부분에서는 꽤 자주 토벌이 있었지만 아직 미확인 몬스터들의 출몰이 확인되고 있답니다. 갈색 산맥이 워낙 넓어서 중간에 평야 지형이나 암석 지형, 언덕 지형 등 각양각색의 지형과 수종을 가지고 있어 여러 몬스터들에게 적절한 환경이랍니다. 우리가 지나는 길은 그래도 가장 짧은 길이지만 그래도 말로는 2, 3일 정도 소요될 정도니까 얼마나 넓은지는 짐작이 되죠.”

“자주 출현하는 몬스터는?”

샌슨은 미간을 문지르며 몇 쪽을 더 넘기더니 읽기 시작했다.

“화염의 창이라 불리는 이그누스 드래곤 크라드메서………….”

“크억?”

난 눈을 뒤집을 뻔했다. 드래곤이라고! 그것도 이그누스 드래곤이라고! 그러나 샌슨은 유유히 읽어나갔다.

“이게 가장 유명하지만 아직 수면기입니다.”

나와 칼은 동시에 엄청난 한숨을 쉬었다. 샌슨은 뭐가 재미있는지 열심히 책을 읽는 눈치였다.

“와! 수면기에 들어가기 전,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가 사망했답니다. 그래서 발광해 버려서 갈색 산맥과 미드 그레이드 각지를 쑥대밭으로 만들 었다는군요. 그때는 굉장했다는데요? 결국 토벌은 꿈도 못 꾸다가 크라드메서가 수면기에 들어가서 겨우 파괴는 멈추었답니다.”

칼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어흠, 지식의 습득은 기분 좋은 일이네만, 지금은 우리의 관심을 현실적인 위험이 될 수 있는 몬스터에 맞추어보세.”

“예. 어, 그 외에 스톤 자이언트가 조금 발견되었고, 오거……………, 이건 좀 의외군요. 어쨌든 발견은 되었답니다. 산능선을 따라 6부 능선쯤에 분포한다

는데, 야생 동물을 사냥하는 모양입니다. 오거가 사냥할 게 있을지 모르겠네. 트롤이 여행자를 습격하는 일이 간혹 있답니다. 그리고 오크나 고블린 은 그저 산을 넘을 일이 있어서 오가는 정도. 와이번이나 키메라 등이 좀 분포한답니다. 맨티코어도 있고.”

샌슨의 말을 들으며 난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그런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뱀 종류가 무서운 게 꽤 되지만, 이건 가을이 깊었으니 벌써 동면에 들어갔겠고…………. 곤충형 몬스터들도 역시 가을이라 별로 나타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식물형 몬스터는 이동성이 없으니 상관없겠고. 스터지나 슬라임 계열, 기타 여러 가지 몬스터도 있긴 하지만, 역시 길이 있는 이 부분까 지는 나오지 않고 보다 깊은 산 속까지 들어가야 나타난다는군요. 우와! 유니콘이 있을 수도 있다는데요? 그리고 그 외에 요정 종족들, 드라이어드나 페어리, 님프 등도 있지만 이런 존재들은 인간을 습격하지 않으니 상관없겠습니다. 그리고 온순한 성격의 몬스터들도 모두 제외해도 좋을 테고. 어쨌 든 산이나 숲을 좋아하는 몬스터라면 없는 게 없을 정도랍니다.”

없는게 없다…라. 우후후후훗.

“하지만, 야! 이런 말이 적혀 있군요. ‘이것은 모두 생존자의 보고를 기반으로 한 것이므로 생존자를 남겨두지 않을 정도의 몬스터는 수록되지 않았 음을 명심하도록. 조언하자면, 길에서 만나는 몬스터라면 그건 길을 가는 인간을 덮칠 만큼의 몬스터라는 점을 유념하여 항상 조심하라.’고 적혀 있 군요. 음,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그 정도입니다.”

샌슨은 태평하게 읽었지만 나와 칼, 그리고 운차이의 얼굴은 핼쑥해져버렸다. 난 주위를 둘러보고는 좀 으스스한 느낌을 받으며 샌슨에게 질문했다. “그럼, 어쩌지?”

“뭐, 평소에 하던 대로 불침번 서면서 불이나 열심히 지피는 거지.”

“응?”

샌슨은 만사가 아주 간단하다는 듯이 푸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목책을 세워도 날아오는 것은 못 막아. 하지만 숲이니까 날아오는 것은 상관없지. 그리고 땅 밑으로 기어들어와도 나무 뿌리들 때문에 역시 상관없 어. 그래도 다가올 녀석들은 있겠지만, 밤에 나돌아다니는 것들은 불을 싫어해. 네가 산더미처럼 장작을 만들어놨잖아? 열심히 태우는 거지. 뭐가 올 줄 알아서 대비를 하냐?”

샌슨의 말은 무성의하게까지 들리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그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 것 같다. 뭐가 온다는 것을 알면 그에 대비해 방법을 취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방도가 없다. 장작은 충분하니까 불이나 열심히 지피는 게 최상이겠다.

그런데 네리아는 다른 데 더 관심이 있나 보다.

“야, 샌슨. 그 책 얼마야? 정말 탐나.”

“이건 왕실 지리원에서 편찬해서 각 영지에 배포하는 책이야. 돈 주고 사는 물건이 아니지.”

그러다가 샌슨은 빙긋 웃었다.

“참, 넌 원래 돈 주고 물건 사지 않지?”

네리아는 그 말에 입술을 삐죽거렸다. 샌슨은 책을 탁 덮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작업도 대충 끝났으니 점심 먹으며 네 이야기나 좀 듣자.”

“내 이야기?”

“돈을 어떻게 돌려줄 수 있었지?”

히엑? 나와 네리아는 동시에 놀랐다. 네리아는 날 바라보았고 난 고개를 휘저었다. 그러자 샌슨이 말했다.

“뻔하잖아. 너 말고 누가 있어. 그건 바보라도 생각할 수 있는 일이고. 내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말이야, 후치가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야. 왜 그 랬을까? 그 돈이 좀 께름칙한 것이기 때문이라면 난 슬플 거야.”

네리아는 입을 딱 벌리고 나와 샌슨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나는 얼굴이 벌개져서 그 시선을 외면했다. 샌슨은 갑자기 우리 둘이 왜 바보가 되었는지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 천천히 듣자고. 뭐, 네가 좋은 의도로 그랬으니까 그렇게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 후치? 점심 도시락이나 꺼내. 먹고 하자, 응?” 샌슨은 배를 문지르면서 지금 당장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뭔지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난 부리나케 말에 매어둔 도시락 바구니로 달려갔 다. 흘깃 돌아보니 네리아는 우물쭈물하며 샌슨의 눈을 피한 채 앉아 있었다.

샌슨은 네리아에게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내가 바구니를 대령했다. 그러자 샌슨은 만사 제쳐두고 도시락 바구니에 대한 치열한 공격을 감행 했다. 생존자가 거의 없어질 무렵이 되어서야 샌슨은 트림을 하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얼굴이 되어 나무에 기대 앉았다. 아무래도 갈색 산맥에 출 몰하는 몬스터의 목록에다가 샌슨 퍼시발도 추가해야 될 것 같다.

성명: 샌슨 퍼시발 (남성)

출현 빈도: 유니크

활동 범위/시간: 모든 지형에서/주로 낮

특성: 이 강인하고 흉포한 생물은 음식물에 대한 무한한 복수심으로 불타오르며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어떠한 종류의 음식물도 잔혹하리만큼 처절하게 먹어치워 버림.

내가 이런 목록을 구상하고 있을 때 샌슨은 이루릴에게 말했다.

“이루릴, 좀더 드시죠?”

이루릴은 미소를 지었고 난 어이가 없어서 외쳤다.

“먹을 걸 남겨두고 그렇게 말해!”

“바구니 더 없냐?”

“그건 저녁 때 먹을 거야!”

“뭐, 어떠냐. 오늘은 시간도 많은데 네 요리 솜씨 발휘하면 되지.”

“됐다, 됐어! 적당히 하자. 사람같이 살자고!”

샌슨은 머쓱한 표정으로 와인 병을 쥐어들었다. 그는 배낭에서 그릇들을 꺼내어 사람들에게 돌리고는 와인을 따르기 시작했다.

“이루릴, 와인 괜찮겠습니까? 회복에 혹시 해가 된다거나………….”

“아뇨, 상관없어요. 치료는 끝났는걸요.”

이루릴의 얼굴에 혈색이 돈다면 나쁘지 않겠지. 환자가 술을 마셔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와이번에게 씹혔던 환자가 이렇게 멀쩡하게 앉아 있으니 와 인 한 잔에 죽을 것 같지는 않군. 난 샌슨이 네리아에게 질문을 꺼낼까 봐 화제를 계속 이루릴에게 집중시켰다.

“그 약 정말 좋네요. 힐링 포션? 비싼 값을 하네요?”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모험가들이 신전을 자주 찾는 것은 그들의 모험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서보다는 힐링 포션을 구입하기 위한 경우가 더 많다더군요. 이 약 은 너무 비싸서 모험가들처럼 위험하게 사는 사람들 이외에는 구입할 수도 없죠.”

“하긴, 100셀이라니. 100셀이면…… 어디 보자, 5퍼셀짜리 양초가 2000개로군. 휘유. 하루에 쉰 개씩 만들어도 한 달 열흘 동안 계속 만들면 2000 개. 하지만 재료 준비하고 기타 먹고 쓸 일이 있으니. 에고에고.”

네리아가 눈을 둥글게 뜨더니 말했다.

“초?”

다른 것 다 내버려두고 왜 초를 말하는 건지 의아하다는 표정이다. 난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직업 정신이죠. 난 초장이거든요.”

“초장이?”

네리아의 얼굴이 더 이상해졌다. 난 윙크를 하며 말했다.

“어어, 직업엔 귀천이 없어요! 멋진 나이트호크라고 해서 초장이를 우습게 보면 곤란하다고요. 옛 선인들 중 똑똑하신 분이 우리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어요. ‘빛의 세공사..”

“빛의 세공사? 멋지네. 그런데 초장이라고? 초장이는 모두 힘이 엄청나게 세야 하니?”

“그건 내 개성이죠. 초장이의 개성은 아니죠.”

나는 말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 마을의 이야기와 훌륭하신 우리 영주님의 이야기, 그리고 아무르타트와, 타이번과, 우리의 여행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네리아에게 들려주었다.

칼은 나와 함께 겪은 사건들이 자신의 관점이 아닌 나의 관점을 통해 새롭게 이야기되는 것을 들으며 즐기는 듯했다. 그는 때때로 고개를 갸웃거리 기도 했고, ‘그렇게 생각하는가?”라는 식의 시선도 보내어왔지만 전혀 방해는 하지 않았다. 운차이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잠자코 꽤 열심히 들었다. 하지만 샌슨은 엄청난 방해를 해대었다. 화자가 하나가 아니라 둘일 때는 이야기하는 것이 세 배로 어렵다더니 정말 그렇군.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그래서 이루릴이 그 30명의 경비병들을 하늘로 날려보내자…………….”

그러면 샌슨이 냉큼 끼어든다.

“아냐, 후치. 실리키안 남작의 경비병은 32명이었지.”

“어, 그래? 어떻게 그렇게 빨리 세었지?”

“존경해라. 경비대 필수 과목이다. 다섯 명씩 묶어서 세는 거지.”

“아하, 그런 거야?”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면 네리아는 볼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야, 야! 그거 중요하니? 30명이든 32명이든 말이야. 어쨌든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어? 빨리 말해 봐, 후치.”

이렇게 무수한 방해를 받아가며 이야기하려니 지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간신히 나는 칼라일 영지의 세이크럴라이즈의 이야기까지 진행했고 그 이야기는 네리아를 퍽 놀라게 만들었다. 네리아는 그 엄청난 단어의 길이에 놀란 모양이다.

“자, 잠깐. 뭐라고?”

“세이크럴라이즈라고요. 그래서 칼라일 영지는 세이크리드 랜드가 되어서………….”

·초장이는 원래 그렇게 어려운 말을 써야 돼?”

“그것도 내 개성이라고 해두죠. 그런데 계속 이야기해도 될까요?”

“응? 아, 그래. 계속해.”

시간 가는 것이 재미있을 정도다. 어쨌든 늦은 점심 식사 뒤의 이야기는 하늘이 마구 막막해 보이는 시간, 오후가 무르익는 시간까지 계속되었다. 네리아는 꽤 착실한 청자였다. 그녀는 미소를 짓거나 긴장하거나 하면서 얼굴의 표정을 지어주는 데 충실하여 이야기하는 사람을 기쁘게 만들었다. 어쩌면 네리아가 날 조종하지 않았을까? 이야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테니까.

“까르르르…………… 재미있네. 그럼 완전히 모험가 초보들이구나?”

“모험가는 아니죠. 우린 모험을 찾아나온 것은 아니니까.”

“상관없어. 사람들은 다 모험가야. 산다는 것만큼 큰 모험은 없어.”

평범한 말이었지만 네리아의 말은 꽤나 비장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흔히 그러하듯, 비장한 말이 꺼내어지고 나자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자 네리아는 재빨리 운차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넌 수도로 끌려가면 끝장이겠네?”

운차이는 네리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네리아는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폴짝 뛰어서 운차이의 바로 옆에 붙어섰다. 그리고 운차이의 귓가에 숨을 불 어넣듯이 말했다.

“지금 기분이 어때……?”

운차이는 귀뿌리까지 벌겋게 되더니 후다닥 일어났다. 그는 마치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듯한 몸짓을 했지만 샌슨은 롱소드의 칼자루를 잡아올려 보 여주었다. 운차이가 움찔하자 샌슨은 낮고 위압적으로 말했다.

“행동의 자유는 보장하지만,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은 안 돼.”

그러자 운차이는 내 왼편에 와서 앉더니 내게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후치! 바이서스 여자들은 모두 방종한 성격을 가지고 있냐?”

“예에……?”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네리아도 내게 뛰어와 내 오른편에 앉았다. 결국 나는 운차이와 네리아 사이에 끼여버렸다. 네리아는 나에게 말하기 시작했 다.

“후치. 자이펀에서는 도대체 애정 생활이 어떻게 실현될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운차이가 내 반대쪽 귀에 대고 외쳤다.

“후치. 건전한 애정 생활이라는 것은 두 사람의 성숙한 성인이 서로에게 충실함으로써 느껴지는 감정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아무에게나 자신 의 성적 매력을 은유적으로 남발하는 것이 여자의 특권이라고 생각해? 마치 남자들을 기쁘게 하면 좋은 일이라는 것처럼 여자들이 은근히 음란한 복 장이나 교묘히 외설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남자들을 자극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

역시 난 대답할 틈이 없었다. 네리아는 말했다.

“후치. 여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로서 여자를 바라보며 자기가 느끼는 음란한 충동을 여자가 고의적으로 발산한다는 식으로 여자에게 뒤집어씌 우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니? 여자는 자연스럽게 행동하는데 남자 혼자서 흥분해 버려서는, 자기 혼자 깨끗해지고 싶어서 ‘여자가 먼저 잘못했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느냐?’ 이런 식으로 모든 죄는 여자에게 있다고 뒤집어씌우는, 그런 소아병적인 추태를 어떻게 생각해?”

난 한숨을 쉬고 말했다.

“………두 분, ‘후치’는 빼고 말해도 좋아요. 계속하세요.”

양쪽 귀가 멍멍해지는 느낌이다. 정말 우스운 꼴이잖아. 그냥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 되는 것 아니냐? 왜 날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하느냐고. 하지만 난 샌슨에게 네리아가 돌려준 그 돈에 대해 질문할 틈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잠자코 그 수난을 겪어야 했다.

어쨌든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게 운차이와 네리아의 악다구니는 끝났다. 난 양쪽에서 들려오는 말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야기의 요 지나 결말이 뭔지는 모르겠다. 내 생각이지만 결말은 없었을 것이다. 둘 다 서로에게 말하지 않고 나에게 말했으니 그건 일종의 혼잣말이고, 혼잣말 을 서로 떠들어대는 토론에서 무슨 근사한 결론이 나올 것 같지가 않다. 특히나 두 사람이 모두 성깔이 대단하고 고집스러운 면이 있으니 무슨 제대 로 된 결론이 나올까.

어쨌든 지금은 해가 지고 저녁 식사도 끝났다. 칼의 제안에 따라 네리아는 갈색 산맥을 넘을 때까지 우리와 동행하게 되었다.

“그래도 돼요, 아저씨? 내 직업 알잖아요?”

네리아의 약간은 도전적인 어투에 칼은 싱긋 웃어버렸다.

“글쎄. 네리아 양의 경우에는 모르지만, 나라면 우리 일행 같은 사람의 짐보따리는 노리지 않겠소. 가난하잖소?”

칼의 온화한 말에 네리아는 얼굴이 발갛게 되었다. 칼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자신을 체포하고도 놔주고, 그리고 와이번에게 쫓길 때 목숨 걸고 구해 준 사람의 짐보따리는 노리지 않아야 되는 것이 아니냐고.

·고마워요. 저, 갈색 산맥을 넘을 때까지 여러분께 도움이 되도록 할게요.”

일행은 오늘 손해본 시간을 내일 되찾기 위해 모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어갔다. 첫 번째 불침번은 내가 서게 되었다. 난 모닥불에 장작을 던져넣으 며 일행을 둘러보았다.

샌슨은 모포를 다 걷어차 버리고 큰대자로 누워 코를 골고 있다. 내가 조금 전에 모포를 다시 덮어줬는데도 저 모양이다. 그냥 모포를 몸에 감고 밧 줄로 묶어버릴까? 에이, 관둬라. 저러고 자도 감기에 안 걸리는 체질이니. 다른 편에서는 칼이 얌전히 죽은 사람처럼 자고 있다. 이루릴과 네리아는 같은 모포 속에서 서로 따스하게 자고 있다.

운차이는 나무에 발목이 묶인 채 누워 있었다. 운차이의 얼굴을 보니, 그는 눈을 뜨고 있었다.

“안 자요?”

“잠이 오지 않는다. 너무 이르군.”

“자둬요.”

“걱정 마라. 난 불침번도 세우지 않을 것 아니냐. 포로가 편한 점도 있지.”

하긴 그렇다. 운차이를 불침번으로 세울 수야 없으니 나, 샌슨, 칼이 서로 번갈아가며 불침번을 설 것이다. 이루릴은 다쳤고, 게다가 아침에 일어나 기주하려면 푹 자둬야 된다. 네리아? 할 수 없지. 믿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냥 안 세우는 것이 낫겠다.

“후치.”

운차이가 말을 걸었다. 난 장작개비를 다시 던져넣으며 바라보았다.

“날 놔줘.”

“……그건 곤란해요.”

“사례하마. 기필코 하겠다. 날 놔줘.”

“안 돼요.”

“기어코 바이서스 임펠에 데려가서 교수대에 걸겠다는 거냐?”

기분 나쁘지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난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당신은 간첩이 되었을 때 이미 각오가 되어 있었을 거 아녜요?”

“끝까지 살아남겠다는 각오도 있었다.”

“…………살아남겠다고요? 당신은 전쟁 포로로 취급되긴 어렵겠죠. 간첩 활동을 했으니까. 그리고 당신들이 칼라일 영지에 일으킨 해악을 생각해 봐요. 그러고도 살아남겠다고요?”

“그건 그 여자의 짓이다. 우린 그 여자의 호위였을 뿐이지. 우리는 그저 그 땅에 아지트를 만들어두고 그 여자를 기다렸을 뿐이다.”

“재판에서는 막지 않았다면 공범이나 다름없다고 할걸요. 그걸 방조죄라고 하던가?”

운차이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건 옳은 말이지만, 옳은 말이 아니기도 하다. 자신의 손에 닿지 않는 것도 많다.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책임질 수는 없다. 내 듣기에, 넌 전장과 멀리 떨어진 웨스트 그레이드의 주민으로 바이서스와 자이펀의 전쟁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이 살았구나. 하지만 만일 자이펀이 바이서스를 침공 해서 너희 고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너희 국왕이 우리나라에 전쟁을 건 것을 막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널 죽이려 든다면, 넌 뭐라고 하겠냐?”

“장기판의 말 신세인 아랫사람만 죽어난다는 식의 이야기로군요.”

“억울하지 않으냐?”

“전혀.”

“……이유를 말해 봐라.”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내가 독수리처럼 날 수 없어서 억울할 수도 있어요. 내가 물고기처럼 물 속에서 숨쉴 수 없어서 억울할 수도 있지요.”

“넌 독수리나 물고기가 아니라 인간이다. 그리고 너의 국왕, 귀족, 장군들도 너와 같은 인간이다. 같은 인간이면서 왜 아래에 있는 사람들만이 대가 를 뒤집어써야 되느냐. 나도 인간이고, 날 바이서스로 파견한 내 상관도 같은 인간이었다. 하지만 난 명령 때문에 여기로 왔고 결국 죽게 되었지만, 내 상관은 또 다른 간첩을 육성시키며 지금도 배불리 잘 살고 있을 것이다. 나보다 그놈이 더 나쁜 놈 아니냐?”

“같은 인간? 허, 웃기는군요.”

내 대답에 운차이는 놀란 모양이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뭐?”

“바보나 그런 말을 해요. 같은 인간이면서 어쩌니저쩌니. 헤, 같은 인간이 세상에 어디 있어. 다른 사람들을 모조리 자신과 비슷한 범주에 넣고 이해 하는 것은 다시 없는 바보죠. 당신처럼 생각하면 귀족이나 왕족을 욕하기에는 쉽겠죠. ‘제기랄, 같은 인간인데 왜 난 보리빵에 물 한 그릇으로 아침 때우는데 녀석들은 미녀들의 시중을 받아가며 산해진미를 먹느냐.’ 그게 억울하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어버려요. 그게 귀찮아서 하지 않겠다면 입 다물고 앉아 있어요.”

“귀찮아서…라고?”

“귀찮은 것 아니에요? 당신 말마따나 같은 인간이면, 당신도 자이펀의 왕(거기서도 왕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처럼 왕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 런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은 귀찮아서 하지 않는 것 아닙니까?”

“그게 귀찮아서 하지 않는 거냐? 불가능하지………….”

“얼씨구. 이젠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무시하시는군요. 당신 같은 화법은 추해요. 불평할 때는 같은 인간이고, 당신을 그런 사람들에게 비교해서 꾸 짖을 때는 다른 인간인가요? 누구나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비판하면 기분 나쁜 법이죠. 동일성을 가져요. 그렇게 같은 인간이라면, 이 넓은 대지 어느 한편에 나라를 세워요. 이제 너는 왜 그러지 않겠냐고 묻겠지요?”

“묻고 싶군.”

“난 귀찮아요. 난 헬턴트 영지의 초장이 후보로 남는 게 훨씬 속 편해요. 내가 야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겠지요. 간혹 나도 귀족들이 되고 싶기는 해 요. 하지만, 난 그렇게 되지 않겠어요. 하지만 누군가가 야심 없고 능력 없는 자의 자기 위안이라고 날 욕하게 하진 않겠어요. ‘쳇, 넌 야심이 있으면 서도 능력이 안 되니까 비굴하게 자기를 합리화시키는 것 아니냐?” 바보 아녜요? 그런 사람들은 야심이 사람의 본능인 것처럼 생각하죠. 자기가 그 야심 때문에 목숨까지 걸며 허겁지겁 돌아다니니까 다른 사람도 그런 줄 알아요. 그런 작자들은 남을 이해할 줄 몰라요. 뭐, 보통은 그런 자들이 왕이 되고, 영웅이 되고 하겠지만,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지요? 만일 그런 영웅이 무능력하고 비굴하다고 날 비판하겠다면, 난 그 작자에게 초를 만들어 보라고 하겠어요. 그러고는 ‘초 한 자루도 못 만드는 주제에. 시장 한편에 집어던지면 굶어죽기 십상이겠군.’이라고 말해 주지요. 그러면 그 작자는 화내겠지요? 하지만 그런 영웅들은 자기 손으로 먹고 살 재주는 없을 걸요? 다만 무한한 야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부려서 왕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가 졌을 뿐이죠. 그리고 난 그런 야심이 없는 대신, 내 손재주로 내 호구지책을 마련할 수 있고.”

운차이는 날카로운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러지? 정말 되지도 않는 말재주로 장황하게 말하자니 머리가 아프군. 결론을 어떻게 내려 야 되나? 에라. 좀 거칠더라도 그냥 끝내자.

“그게 진정한 ‘같은 인간’이지요. 내가 남이 될 수 없고, 남이 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어요. 당 신은 당신을 이곳으로 파견한 상관이 될 수 없어요. 당신의 가족, 당신의 추억, 당신의 사랑, 당신의 과거의 소중한 것을 모두 팽개치고 그 상관의 자 리에 대신 들어가라면, 그렇게 할 거예요? 그럴 수 있어요? 당신 상관의 아내를 부인이라 부르고, 당신 상관의 자식들을 ‘내 아들아’, 혹은 ‘딸아.’, 이렇게 부를 수 있어요?”

・내 상관은 독신이다.”

난 웃어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운차이도 피식 웃어버렸다.

“걱정하지 말아요. 난 잘 모르겠지만, 펠레일의 말에 의하면 당신은 중요 인물이래요.”

“중요 인물?”

“뭐라더라…………. 당신은 우리나라의 비둘기파, 그러니까 주화파(主和派)들을 주전파(主戰派)로 바꿀 수 있는 산 증거라더군요. 그러니 당신의 증언은 중 요해요. 그러니까 수도에 도착하면, 당신이 한 짓을 뉘우친다는 식으로 말해 봐요. 그리고 당신 상관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라고 말해 보세 요.”

“그런다고 내가 살겠냐?”

“그럼 끝까지 조국에 대한 충성을 지켜 교수대의 이슬이 되든가.”

운차이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쉽게 말하는군.”

“당신이 결정하기 쉬우라고 쉽게 말하는 거죠. 결정을 내려요. 살고 싶다면, 전향을 해서 당신 조국을 마구 꾸짖고 선전 책동의 앞잡이가 되어요. 그 럴 수 없다면, 표표히 죽어가요. 양자가 다 싫다면, 재주껏 달아나요. 하지만 나에게 도와달라고 하지는 말아요. 알아서 도망쳐요.”

운차이는 내 말에 피식 웃으며 다시 드러누웠다.

“……알겠다. 책임지지도 못할 꼬맹이에게 할 말은 아니었구나. 알아서 도망치지.”

“그게 좋은 태도지요. 잘해봐요. 난 잘 지킬 테니까. 조언해 봐요? 샌슨은 의외로 마음씨가 착해요. 샌슨이 불침번일 때 꼬셔봐요. 고향에 있는 처녀 가 날 애타게 기다린다는 식이면 꽤 흔들릴 걸요?”

윽, 실수다. 샌슨은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위험한 조언이었군. 운차이는 얼빠진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고 난 헛기침을 하며 외면했다.

그때 샌슨이 벌떡 일어섰으니 내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뭐, 어, 안 자고 있었어?”

“요놈아, 흉측한 계획을 말하더군. 정말 무서운 계획이라서 모포 속에서 소름이 돋는다.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너에 대한 처 리는 좀 있다가 하자.”

“소변 마려워?”

“땅에 귀를 대고 있자니 뭔가의 발소리가 들리더라.”

난 재빨리 허리를 튕겨 엉거주춤한 상태가 되었다. 샌슨은 갑옷을 걸쳐입더니(갑옷 입는 것이 정말 빠르다. 저것도 훈련인가 보다.), 한 손에 롱소드를 들고 는 내게 손짓했다.

“그냥 앉아 있어. 살펴보고 올게.”

“다른 사람 깨울까?”

“조용히.”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칼과 이루릴, 네리아를 깨웠다. 그들을 흔들어 깨우고는 조용히하라고 시키는 사이에 샌슨은 숲의 나무들 사이로 사라 졌다.

“발소리?”

이루릴은 누운 채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대로 땅에 귀를 대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예….., 맞군요. 꽤 많은데요?”

우리는 모두 조심스럽게 일어나 각자의 무기를 당겨쥐었다. 잠시 후 샌슨이 돌아왔다. 그는 이를 마구 갈아대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 오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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