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 오크들’이라고? 우리는 곧 샌슨의 말을 알아차렸다. 네리아도 아까 내가 이야기해 주어서 곧 알아차리는 표정이었다.
“아이구, 오크와 복수의 옹호자 화렌차여! 정말 엄청난 복수심을 녀석들에게 주시는군요!”
내 탄식을 가로지르며 눈을 부비적거리고 있던 칼이 물었다.
“어떤가, 덮쳐올 모양인가?”
“가까이 와 있습니다. 약 오륙백 큐빗쯤 떨어져 있는데 지금 포위망을 만들어보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무리무리로 나뉘어 움직이던데요. 어두워서 수효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사오십 마리 정도 됩니다.”
“이런, 또 달아나야 하는가?”
“밤중에 산 속을 달리는 것은 위험할 텐데요.”
“허어, 낭패로군.”
“결판을 짓겠습니다.”
샌슨은 그렇게 말하고는 이루릴을 슬쩍 보면서 말했다.
“다 죽여버리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계획이 있으세요?”
“글쎄요…………. 제 판단이지만 그들로서도 이젠 한계 상황일 겁니다. 식료품 등의 보급이 얼마나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갈색 산맥에서 우릴 놓치 면 더 이상 따라오지는 못하겠지요. 그리고 갈색 산맥을 넘으면 곧 바이서스 임펠이 나타나니까요. 따라서 이번이 그들로서는 마지막 기회일 겁니다. 그러니 이번만 막으면 됩니다.”
“어떻게요?”
“그들은 지금 불빛을 보고 오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지금은 방심하고 있겠죠. 거꾸로 덮치는 겁니다. 인원은 많이 필요없습니다. 의외의 방향에서 기습함으로써 놀라게 하는 것이 목적이니까요. 저와 후치가 가겠습니다.”
“왜 두 분이서죠? 저도 가겠어요.”
“저, 이루릴은……”
“전 이제 괜찮아요. 얼마든지 칼을 쓸 수 있어요. 빨리 가죠.”
“운차이의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자 이루릴은 난처한 표정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차갑게 미소지었다. 기습하러 가면서 그를 데려갈 수는 없다. 난전중에 달아나버 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놔두고 갈 수도 없고.
·믿으면 되는데.”
이루릴은 안타까운 듯이 말했지만 샌슨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자 네리아가 발딱 일어섰다.
“가자고. 시간 없어.”
“야, 네리아.”
그러나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챙겨들더니 곧장 숲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젠장. 멋대로군. 칼, 운차이를 부탁합니다. 이루릴도 여기 계십시오. 작전이 원활하지 못하면 그대로 달아나는 겁니다. 그러니 말들을 준비시키고 기다리고 계십시오.”
“알았네. 조심하게.”
“가자, 후치.”
나와 샌슨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모닥불가에서 좀 떨어지자마자 곧 주위는 캄캄해졌다. 하늘에는 셀레나가 벌써 진 모양이다. 그래도 루미너스는 아직 남아 있어 잠시 후 달빛에 푸 르게 물든 분지의 지형이 그런 대로 보였다.
“그런데 이 여자는 어디로 간 거야?”
샌슨이 투덜거렸다. 정말 네리아가 보이지 않는데. 어디로 숨어간 거지? 어쨌든 잠시 샌슨의 뒤를 따라가는데 샌슨이 갑자기 멈추었다. 그는 땅에
한쪽 무릎을 꿇고는 풀들 위로 머리만 내밀고 있었다.
“보이냐?”
뭐가? 온통 검푸른 것들밖에 보이지 않는데? 분지의 풀밭은 검푸른 바다처럼 보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옆에 있는 샌슨의 얼굴도 시커멓게 보여 서 잘 보이지 않는다.
“안 보여.”
“저기……………, 글레이브가 번쩍이잖아. 저놈들은 무기에 비반사 처리하는 방법도 모르는군.”
“옳거니 보인다.”
간신히 글레이브의 번쩍임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위치로 미루어보아 그 머리도 찾을 수 있었다. 풀들 사이로 간신히 구별할 정도의 움직임이 보였 다.
“작전은?”
“거대한 함성으로 공격하는 거지.”
“서로 흩어지자. 여러 방향에서 함성을 지르는 게 낫지 않겠어?”
“그게 좋겠네. 그럼, 난 저기 저쪽에 나무, 보이지? 그쪽에서 기습한다. 내가 먼저 움직이면 그 다음에 네가 공격해라. 하지만 절대로 과격하게 할 필 요는 없어. 포위되지 않도록 주의해. 우리가 완전히 엉뚱한 방향에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만 하고 달아나라. 알겠지?”
“그러다가 놈들이 모닥불 쪽으로 달려가면?”
“아냐. 기습을 당하면 모닥불은 미끼라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면 죽도록 달려가서 말을 타고 튄다. 알겠지? 네리아에게도 외 치면서 달려라. 이 여자 정말 어디 숨어 있는지 모르겠네.”
“알았어.”
샌슨은 조심스럽게 풀이 흔들리지 않도록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찌나 감쪽같던지 샌슨의 모습이 사라지자 곧 나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자, 그런데 네리아는 어디 있을까?
난 눈을 부릅뜨고 간신히 보이는 오크들의 모습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했다. 오크들은 느리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 하도 여러 번 쓴맛을 보고 나니 까 꽤나 조심스러워진 모양이다. 샌슨은 어디쯤 도착했을까? 저 나무 쪽에서 함성이 들려오면, 곧장 돌격이다.
자, 언제쯤이냐. 지금인가? 지금인가?
어랏?
난 다음 순간 이상한 것을 보고 헛바람을 삼켰다.
분지 저편에서 웬 사나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달빛을 받으며 걸어오는 남자는 좋은 체격에 뭔가를 타고 있었는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 말은 아니 고 덩치가 꽤 좋은 것이 혹시 황소가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설마 황소를 타지야 않았겠지. 달빛 아래에 어슴푸레하게 보이는데다가 풀밭에 몸이 가려져 있어 도대체 뭔지를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말은 아니다.
갑옷도 근사한 걸 입은 모양이다. 달빛을 받아 번쩍이는 품이 아무래도 금속제인 듯하다. 저런 건 비쌀텐데. 왼팔에 있는 저것은 방패겠지?
그런데 그 남자 꼴이 영 이상하다. 자기 허리에 손을 얹고 마치 취한 것처럼 머리를 홱홱 저으며 뭐라고 혼잣말을 중얼중얼하고 있는데 고요한 밤의 산 속에서 꽤 멀리까지 들려온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런데 그 남자는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뭐야? 오크들? 네놈들 여기서 뭘하는 거지?”
어라? 어떻게 발견했지? 남자는 상당히 먼 거리에서 고함을 질렀다. 그건 꽤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멍청한 작자도 있나? 눈이 좋아서 발 견했으면 그냥 조용히 사라지든가 할 일이지 무슨 들꽃을 발견한 처녀 모양으로 ‘오크 아냐?’라는 식으로 말하다니. 오크들은 놀라서 몸을 일으키며 새로 나타난 사람을 바라보았다.
“취치익! 뭐, 뭐냐?”
“취치익, 취익!”
풀밭 곳곳에서 날카로운 글레이브의 반사광이 빛났다. 샌슨은 정말 대단하군. 확실히 사오십 개 가량의 글레이브의 반사광이 나타났다. 곳곳에 퍼져 접근하고 있었는지 꽤 넓은 범위에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모습이 섬뜩했다.
이상한 것 위에 앉아 있는 그 작자는 사방에서 나타나는 글레이브를 둘러보는 눈치더니 맥이 풀린다는 음성으로 말했다.
“어? 어? 한두 마리가 아니잖아? 뭣들 하는 거…. 시끄러워, 말 좀 하자! 아, 저기 보이는 불빛 때문이군? 녀석들, 여행자를 덮치려고 했군?”
장난치나! 뭘 타고 있다면 빨리 뒤돌아 도망쳐! 아직 그 남자의 뒤는 막히지 않았다. 나와 그 남자 사이로 오크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형국이다. 나 서야 되나? 고함질러야 되나?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덥썩 짚었다.
난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네리아였다.
“네리아, 어디 숨어 있었어요? 아니, 그것보다. 웬 골빈 남자 하나가……………”
“나도 보여. 좋은 표현이네. 골빈 남자라. 저거 정말 뭐하는 녀석이야? 그건 그렇고 샌슨은 어디 있어?”
그러자 풀숲이 흔들리면서 샌슨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여기 있다. 저거 모험가는 아닌 모양인데 단독으로 밤중에 갈색 산맥을 넘어가면서 저렇게 고함을 탕탕 지를 정도의 사람에는 어떤 사람이 포함될까?”
“자살 기도자, 정신 이상자, 지진아…………….”
우리는 모두 이맛살을 찌푸리며 오크들과 대치하고 있던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젠장, 뭐에 타고 있으니 여차하면 달아날 수 있겠지. 도와준다면 오 크의 뒤를 칠 수 있도록 저 남자가 움직이고 나서다. 그런데 그 남자는 도대체 위기 감각이 없는지 넉살 좋게 말하고 있었다.
“아직 별짓 하지 않았으니 봐주겠다. 어서들 가거라. 좀 조용히해!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것 안 들려? 아, 오크들. 흠, 어서 가라. 밤길 조심하고. 아, 참. 너희들은 밤중에 돌아다니지?”
저 남자 말을 꽤 이상하게 하는군. 하지만 내가 오크라도 저 말에는 돌아버리겠다. 오크들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취이이익! 누가 누굴 봐준다고?”
“저거, 취이익? 돌아버린 인간 아냐?”
옆에서 샌슨이 숨 넘어가는 신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나도 저 말에 전폭적으로 찬성이야. 으으음……………. 도대체 저거 뭐지? 아무리 풋내기 모험가라도 저렇게 앞뒤 없지는 않을 텐데? 게다가 말투는 왜 저 래?”
나 역시 어이 없는 표정으로 그 남자를 계속 쳐다보았다. 남자는 피곤한 음성으로 말했다.
“안가? 왜 안 가. 봐준다고 했잖아? 야! 닥치라면 닥쳐! 그만 울어! 내가 오크들 보내준다고 하잖아! 그만 짜라고! 젠장. 야, 너희들 빨리 가!”
뭐야? 누가 울고 있다는 거야? 샌슨은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 친구……, 아무래도 환청을 듣는 모양인데?”
“아, 환청? 흠. 그렇군. 정신병자란 말이지.”
오크들도 그런 판단을 내린 모양이다. 오크들은 이제 낄낄거리고 있었지만 그중 하나가 외쳤다.
“젠장, 취익! 저놈 때문에 기습 못하겠다! 쳐라!”
그러자 오크들은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취이이익!”
“젠장!” 샌슨은 벌떡 일어섰다.
“야! 임마들아! 내가 간다!”
“그리고 나도 간다!”
오크들은 내 목소리를 기억하는 모양이다.
“취치치치엑! 괴, 괴물 초장이다!”
나와 샌슨은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자기 위에서 바람이 불더니 네리아가 우리 머리 위로 지나갔다. 뭐야? 엄청난 텀블링이군! 네리아 는 창대를 수평으로 쥐고 공중제비를 넘으며 우릴 뛰어넘더니 오크들에게 곧장 달려갔다.
“하아! 트라이던트의 네리아!”
달빛이 정말 멋지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허리까지 뒤덮는 풀밭에서 눈부시게 움직이며 오크들을 유린했다. 마치 양떼를 모는 번견처럼 네 리아는 한가운데로 뛰어들지 않고 가장자리로 돌며 오크들을 찔러나갔다. 오크들이 크게 반회전하는 순간, 나와 샌슨이 그 사이로 뛰어들었다. “흐아아압!”
샌슨은 롱소드를 검집에 꽂은 채 맹렬하게 움직여 나갔고 나도 역시 맹렬하게 샌슨과 등을 대며 바스타드를 휘둘렀다. 오크들은 글레이브를 휘둘러 우릴 치려 했으나 풀숲 지형에서는 거의 턱까지 오는 풀 때문에 동작이 원할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암흑과 풀더미의 도움으로 무리 없이 오크들 을 밀어붙였다. 나는 잠시 빈틈을 타서 그 남자를 흘깃 보았다. 그 남자가 타고 있는 것은………….
황소였다.
샌슨도 그걸 봤는지 순간적으로 칼부림이 흐트러졌다. “푸엑?” 그 남자는 정말 황소를 타고 있었다. 뭐야, 저건? 진짜 정신병자인가? 그러나 난 오크 들과 싸우느라 그 남자를 오래 볼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스르르르..
번쩍!
눈이 너무도 부셔서 잠시 눈을 가렸다. 황소에 타고 있던 남자가 아래로 뛰어내리더니 검을 뽑은 것이다. 그런데 샌슨의 은도금 롱소드 저리 가라로 빛나고 있었다. 아니, 아무리 날이 좋아도 그렇지 달빛에 이렇게 번쩍일 수가 있나?
오크들은 기습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네리아 쪽에 있던 녀석들은 크게 돌아서 물러났고 그 틈을 타서 나와 샌슨은 네리아와 합류 했다. 그 남자는 그 번쩍이는 검을 들고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우리가 아니라 오크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걸어가면서 혼잣말을 했다.
“어쩌겠냐. 그만 좀 울어라! 싸움이란 말이다. 젠장, 좋아서 펄쩍펄쩍 뛰는 주제에 내숭은 관둬! 시끄럽단 말야! 오크다, 오크. 너도 퍽 좋아하잖아? 뭐, 아냐? 웃기네!”
아무래도 저 친구는 맛이 갔다. 저 남자는 머리를 홱홱 휘두르며 환청을 듣고 있었다. 오크들은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다가오는 그 남자에게 돌격했 다.
“취이익!”
“위험! ・하지 않네?”
샌슨이 다급하게 외치다가 이상하게 마무리했다. 나도 턱이 빠져서 샌슨에게 질문했다.
“난 못 봤어. 샌슨은 봤어?”
“아니. 못 봤어.”
뭐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 남자가 검을 휘두른 모양이다. 남자에게 달려들던 오크가 그대로 나동그라지며 두 개로 쫙 나뉘었다. 허리 를 멋지게 절단해 놓았다. 오크들은 기겁하며 물러났지만 남자는 계속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좋지? 좋지? 웃기지 마! 그만 좀 울어!”
그러더니 남자는 오크 무리에게 달려들어갔다.
“우와자자잣!”
이건 정말 눈으로 봐도 못 믿겠는데, 시커먼 분지의 밤하늘 아래에 보이는 것은 검의 잔영뿐이다. 눈 바로 앞에서 손을 휘저으면 손가락이 수십 개로 보이는 그것처럼 남자의 그 번쩍이는 검이 갑자기 수십 개가 되어버리더니 오크가 절단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게 가능한가?
“일단 돕자.”
샌슨은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그 남자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갔다. 샌슨은 그 남자의 동작을 유심히 살피더니, 곧 자신의 방향을 정했다. 아마 남자 의 동작에서 발생하는 빈틈을 엄호하려는 모양이다.
남자는 어깨 너머로 샌슨의 움직임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솜씨가 괜찮소? 야! 남자잖아! 날 이상한 놈으로 만들지 마! 난 남자에게 관심 없어!”
샌슨은 대답하지 않았다. 별로 대답할 기분이 아닐 것이다. 나도 일단 뛰어들어 오크들의 뒤를 후렸다. 네리아는 그 기다란 트라이던트로 나에게 보 조를 맞추어 싸웠다.
잠깐 동안에 남자는 오크 열 마리 정도를 해체해 놓았다. 어디 푸줏간에 취직하면 정말 깔끔한 솜씨로 주인에게 사랑받겠다. 오크들은 허리에 뼈가 없나? 에이, 설마. 그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허리를 잘라놓지?
그 남자가 싸우는 모습은 어쨌든 그렇게 멋있긴 했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뭐, ‘오크들도 생명인데……… 따위의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생명 이면 어쩌라는 거냐? 라고 물어볼 수도 있는 문제니까. 내가 오크들을 세상에 창조한 것이 아닌 이상, 난 오크들의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없고 따라 서 그 살해가 부당한 이유도 설명할 수 없다. 사실 누군가 농담 하나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식의 딱딱한 얼굴로 내 존재 이유를 물어오면 난 정말 할말 이 없다. 내가 ‘왜’ 세상에 있는 거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날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외엔 없다. 비참할 정도로 없다. 그러니 오크들을 죽이면 안 되는 합리적인 이유는 모른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그 남자는 그 이유를 아는 듯이 보이고 그 강철 같은 의지로서 오크들을 도륙한다는 것뿐이다. 더군다나 상당히 깔끔한 솜 씨로 오크들을 해체하고 있다. 오크들을 빼고, 그 남자의 손놀림, 발놀림, 시선의 이동, 다음 행동의 결정을 위한 행동의 변화 등만 본다면 그것은 꽤 나 아름답긴 했다. 예술적일 정도로.
어쨌든 샌슨과 그 남자의 호흡 잘 맞는 공격에 나와 네리아가 진로를 차단하자 결국 오크들은 분지 입구 쪽으로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나기 시작했 다.
남자는 달아나는 오크들을 바라보더니 칼을 휘둘러 피를 뿌리고는 몸을 돌렸다. 우리는 순간 대단히 싸늘한 느낌이 등골을 후리고 지나가는 것을 느 꼈다. 저 미치광이가 우리 쪽으로 곧장 오고 있는 것이다. 샌슨은 주춤거리며 우리 쪽으로 물러났고 샌슨의 등 뒤에 숨어 있던 네리아가 다급하게 말 했다.
“야, 야! 샌슨! 뭐라고 좀 해봐, 다가오지 말라고!”
“어,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말해…………. 같이 싸웠는데.”
그 남자는 털레털레 걸어왔다. 일단 공격 자세는 아니지만 정신병자가 시간 정해 놓고 발작하는 것은 아닐 테니 나와 샌슨은 긴장한 자세로 검의 칼 자루를 꽉 쥐었다.
가까이서 본 그는 서른 살 정도의 건장한 남자로 잿빛 머리에 하프 플레이트의 흉갑을 걸치고 있었다. 다리에는 금속제의 레깅스도 붙이고 있었고 왼손엔 카이트 실드도 들고 있어 중무장을 잘 갖춘 모습이다. 하지만 그건 기능적인 모습이었고 품위나 우아함은 없었다. 걸치고 있는 것들은 한 세 트라기보다는 여기저기서 한두 개씩 구해서 붙이고 다니는 듯한 모습이다. 그는 우릴 보더니 피식 웃었다.
“오크들이 그쪽들 노리고 있었던 모양이군. 칼들 놓으시지요. 당신들 산적…………, 야! 너 무조건 그럴래? 산 속에서 만났다고 다 산적이냐!”
남자는 자기 말에 자기가 고개를 젓더니 의아한 표정의 우리에게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아, 미안하오.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 것은 내가 미쳤기 때문….., 장난치지 마!”
결국 나와 샌슨은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난 샌슨을 보았다.
“돌았지?”
“이것 참. 이상한걸. 돌아버린 자의 솜씨로 보기엔 칼솜씨가 보통이 훨씬 넘던데. 돌아서 그런가?”
남자는 우리가 물러나는 것을 보더니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아냐. 미안하오. 달빛이 곱지…………, 아냐, 이런 빌어먹을. 에, 누구 좀 저에게 키스해 주세…………, 아냐! 에, 누구 좀 가까이 와주겠습니까?”
“샌슨, 가봐.”
“시, 싫어! 키스를 한다잖아!”
“할 수 없군.”
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갔다. 힘으로 제일 나은 게 나니까 키스를 하려고 해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지. 내가 다가서자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자기 검을 거꾸로 해서 칼날을 쥐더니 내게 내밀었다.
“각설하고, 제발 그것 좀 쥐어봐.”
난 얼떨떨해져서 그 검을 바라보았다. 설마 정신병자라도 검을 내게 주면서 어떻게 하지는 않을 텐데? 이상하군. 남자가 내민 것은 롱소드로 멋지게 생긴 검이었다. 제멋대로에 가까운 남자의 복장에 비해 볼 때 검은 정말 고급으로 보였다.
검신 부분은 검은색의 금속이었는데 그 가운데로 흰색 금속이 길게 박혀 있었고 그 흰색 금속이 무지무지한 빛을 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손막 이 부분은 검신과 일체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완만히 넓어지던 검신이 갑자기 크게 넓어지며 손막이가 된 모양이다. 손막이의 중간에는 검정색으 로 보이는 보석이 박혀 있다. 남자가 내 쪽으로 내민 칼자루 부분에는 흰색 가죽이 칭칭 감겨 있었고 폼멜은 그저 장식 정도의 기능만 있도록 작았고 손막이에 있는 것과 비슷한 보석이 박혀 있었다. 이상하군. 이 정도의 롱소드에 폼멜이 없다면 균형 잡기가 어려울 텐데.
난 되도록 빠르게, 그러나 무례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칼자루를 쥐었다. 그 검은 놀랍도록 가벼웠다. 그래서 폼멜이 없어도 되는 건가? 하 지만 난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너무해! 앙앙앙! 치한, 치한! 어디다 손을 대! 너 손은 씻었니? 꺄아아………….., 이 지저분한 손 좀 봐! 잉잉잉! 살살 잡지 못하니? 내 몸 부서져! 너무했 어, 정말! 외간 남자에게 날 넘기다니, 으흑흑! 이럴 줄 알았어. 엉엉엉, 배신이야, 배신! 언젠가는 날 배신할 줄 알았지만…………, 어어어.”
난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고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남자는 피곤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예요? 이게 말한 거예요?”
그때 샌슨이 말했다.
“후치! 남의 무기를 그렇게 땅에 집어던지다니.”
“앗, 죄송해요.”
난 후다닥 다시 검을 쥐었다. 그러자 또 머릿속으로 앵앵거리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니? 뭐니? 싫다고 집어던질 땐 언제고 또 들어올리니? 어헝어헝! 나 멍들었을 거야. 내 몸이 얼마나 연약한데 오크들을 치고, 아아악! 생각해 버 렸어! 잊으려고 했는데! 나, 날 오크 몸 속에 집어넣었어! 욕지기가 나와, 꺄아아…… 오엑오엑! 그리고 땅에 던지기까지 해. 살기 싫어! 죽고싶어죽고 싶어죽고싶어!”
“……말을 퍽 빨리 하네요?”
내 얼빠진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샌슨과 네리아는 이제 날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칼은 질겁을 하더니 검을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나처럼 황급하게 주워들더니 입을 쩌억 벌렸다. 이루릴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그 러나 이루릴도 그 검을 쥐게 되자 곧 안색이 변해 버렸다. 칼은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에고 소드입니까?”
“그렇습니다.”
길시언이라는 이름의 그 남자는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에고 소드가 뭐죠?”
칼은 넋빠진 얼굴로 말했다.
“마법검…………들 중에서도 최고의 물건이지. 대단히 높은 수준의 마법사가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간신히 만들 수 있는 칼이라네. 검이 스스로의 자아 를 가지게 되지.”
마법검? 난 네리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과연 네리아는 눈에서 반짝반짝하는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 이 남자가 그 남자군 위험하겠는걸.
“와, 그런데 검이 자아를 가지게 하는 이유가 뭐죠? 그럼 좋나요?”
“응? 그야 검이 스스로 주인을 알아볼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 자아가 없는 것이 어떻게 마법을 쓰겠나.” “검이 마법을 써요? 우와! 그럼 비싸겠네?”
“허허허. 돈으로 따질 수가 있겠나. 네드발 군. 웬만한 영지와도 바꾸기 어렵겠지.”
“와악! 영지를 손에 들고 다니는 셈이네?”
난 감탄해 버렸다. 네리아를 보니 그녀의 눈에서는 이제 불똥이 튀기고 있었다. 정말 위험하군. 네리아는 시선으로 꿰뚫을 듯이 그 검을 노려보고 있 었다. 설명을 마친 칼도 감동한 표정으로 이루릴의 손에 쥐어져 있는 그 검을 바라보다가 다시 길시언을 보며 말했다.
“에고 소드라면 이만저만한 보물이 아닐 텐데, 혹시 어딘가의 기사님이십니까?”
“천만에요. 떠돌이입니다.”
“떠돌이라고요? 허어.”
검을 손에 쥔 이루릴은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전혀 평소의 이루릴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러니? 고맙구나.”
길시언은 궁금하다는 얼굴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걔가 뭐라든가요?”
“아, 제가 마음에 든다는군요.”
그러자 길시언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녀석. 밝히기는. 저 녀석은 용모 단정하고 마음씨 착하면 남녀를 안 따지고 좋아합니다.”
음. 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퍽이나 음란하게 들릴 법한 이야기로군. 남녀를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고? 칼은 점잖게 말했다.
“성격이 좋은 에고 소드로군요. 사악한 마법사가 만든 에고 소드의 경우에는 선한 이의 손에 쥐어지면 그 사람을 상처입히거나 지배하려고 들기도 한다던데요.”
네리아는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성격이 좋아서 지배하려 들거나 피에 미치게 만들거나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칼날도 좋아서 훌륭한 검이고, 마법도 잘 쓰는 녀석입니다만…….”
길시언은 하늘을 보며 절규하기 시작했다.
“다만 저 수다! 저 끝없는 수다 때문에 주인을 반쯤 미치게 만듭니다! 게다가 내숭을 떤단 말입니다!”
갑작스러운 절규에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랐다. 길시언은 꽤나 쌓인 감정이 많았나 보다. 처음 보는 우리에게 넋두리하듯이 외쳐대었다.
“자기도 검이라서 결국 좋아하면서도 적의 몸 속에 들어가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척, 도도한 척합니다! 어떻게 자기를 오크나 고블린 같은 동물 에게 꽂아넣느냐고 엉엉거리면서도 전투만 벌어지면 미쳐 날뛴단 말입니다! 저게 정말 우습지도 않은 게, 하루 종일 입을 다무는 일이 없는데 단 한 순간, 상대의 몸 속에 꽂아넣을 때만 조용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칼은 좀 끔찍스러운 말이 아니냐는 듯이 머뭇머뭇 웃었다.
“짐작이 가지 않는군요. 혹시 비통해서 그런 게…”
길시언은 악에 받혀서 외쳤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럼 천사게요? 저게, 저게 그때 조용한 까닭은,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려고 그러는 겁니다! 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듣고 있 죠! 어떤 때는 심장 박동 소리를 유심히 들으며 헤죽헤죽 웃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정말 쥐고 있는 내가 소름이 돋습니다! 그러면서도 죽어도 아니라 고 막 잡아떼고는 왜 자신 같은 고귀한 몸을 저렇게 추악한 것의 몸 속에 쑤셔박냐고 오히려 엉엉 울며 앙탈입니다! 피에 젖었다면서 향수 목욕 시켜 달라고 고함지를 때는 어이가 없습니다. 아니, 어느 골빈 놈이 검을 향수로 씻습니까!”
“허, 허허……. 그런가요?”
난 피식피식 웃었고 샌슨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킬킬거렸다. 내숭을 떠는 칼이라. 그것 참 웃기네. 길시언은 그 정도로는 멀었다는 듯이 계속 이야기 했다.
“그래서 저 녀석은 슬라임을 싫어합니다. 아마 베는 맛이 나지 않아서 그렇겠지요. 굴이나 좀비 같은 언데드를 찌르면 마구 토하는 소리를 내어서 쥐고 있기 고역스럽게 만듭니다. 스켈레톤을 두드리면 또 얼마나 시끄러운 줄 아십니까? 비명을 질러댑니다. 자기가 멍들었다고 생각하죠. 웃기지도 않습니다. 저 녀석으로 스톤 골렘을 잘라봤는데 이도 안 빠지더군요. 그렇게 칼날이 좋은 주제에 말입니다. 나도 저놈 때문에 검법이 바뀔 지경입니 다.”
“검법이 바뀌셨다고요?”
“예. 찌르기를 거의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 녀석을 상대의 몸 속에 꽂아넣을 때 저 녀석이 헤죽거리는 것을 듣고 있으면 머리 끝이 쭈뼛 선단 말 입니다. 아니, 그것까지는 견디더라도, 그 뒷일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루 왼종일 질질 짜면서 어떻게 자기에게 그런 짓을 시켰냐고 칭얼거립니다. 돌아버리는 게 느껴집니다.”
칼은 도무지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투로 힘겹게 미소지었고 나와 샌슨은 길시언을 외면하며 킬킬거렸다. 그때 이루릴이 말했다.
“아, 돌려드려야죠.”
길시언은 두 손을 다 내밀어 손을 휘저었다.
“아닙니다! 제발, 조금만 더 쥐고 있으세요! 부탁입니다. 그놈이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단 말입니다. 불편하시겠지만 제발. 난 눈 뜨고 있을 때는 계 속 그 녀석 수다를 들어야 합니다. 아니, 걔는 심심하면 잘 때도 날 깨웁니다. 꼴에 성능은 좋아서 검날을 진동시켜 소리도 낼 줄 압니다. 저놈이 웅웅 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자다가 가위에 눌립니다. 제발 날 좀 봐주셔서………….”
길시언은 거의 애걸복걸하는 수준이었고 마음씨 착한 이루릴은 승낙했다.
“예에…………. 알겠습니다.”
길시언은 안심한 듯한 표정이었다. 칼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런데, 길시언 씨는 왜 황소를 타고 다니시오?”
칼은 우리들의 말 옆에 묶여 있는 황소를 가리키며 물었다. 흠. 나도 그것 참 궁금하게 생각하던 참이다. 길시언은 또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저건 황소가 아니라 말입니다.”
“… · · · · ·œ?”
“저건 한때 북부 대로의 황제로 불렸던 선더라이더였습니다. 북부 대로에서 가장 빠른 야생마, 속도의 신, 찰나의 강탈자…………, 그런 근사한 이름이 많이 있던 놈이죠. 어쩌다가 저 지경이 되었는지………….”
“저주에 걸렸습니다. 스네어트레일의 다크 메이지 리치몬드와 싸울 때 그놈이 선더라이더에게 저주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저 북부 대로의 황제가 황소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예?”
우리는 입을 쩍 벌린 채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뭐 이렇게 흥미 무쌍하게 사는 사람이 다 있냐? 이건 진짜 모험가인가 보다. 난 이런 작자가 옛날 이야기에나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 눈앞에 지금 마법검(수다가 심하지만)을 휘두르며 북부 대로에서 가장 빠른 말(황소가 되었지만)을 타고 돌아다니는 모험가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난 질문을 하 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당신 애인은 어느 나라 공주고 지금 어느 드래곤에게 잡혀 있죠?”
“무슨 말이야? 나 애인 없어.”
“그래요? 꼭 그럴 것 같은데.”
“여동생이 드래곤에게 잡혀 있긴 하지만.”
“음. 그렇군요. 샌슨, 안녕. 이만 자야겠어. 이럴 땐 자야 해………….”
내 기절하는 모습을 보며 길시언은 싱긋 웃었다.
“농담이었어. 걱정하지 마.”
아무도 걱정 안한다. 오히려 실망이다. 꼭 그러면 어울릴 듯한데. 샌슨은 확실히 실망하는 듯한 눈빛을 지었다. 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어디로 가시는 길이시오?”
“수도로 갑니다. 선더라이더에 걸린 주문도 해소해야 되고,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마법 칼집입니다.”
“마법 칼집이요?”
“예. 마법사 길드에 의뢰해서 사일런스 주문이 걸린 칼집을 구할 생각입니다. 저놈 수다를 좀 막아야 되니까요. 6년을 참고 견뎠지만 이젠 더 못 참 겠습니다.”
그때 이루릴이 기겁해서 펄쩍 뛰어올랐다. 그녀는 황급히 자신의 큰 귀를 막았지만 곧 손을 내리더니 고개를 휘저었다.
“아…………, 놀랐어요. 갑자기 프림 블레이드가 비명을 질러서.”
프림 블레이드? 저 칼 이름이 프림 블레이드인가? 새침데기 칼이라. 길시언은 이루릴에게 물었다.
“뭐라고 그러던가요?”
“아……………. 그냥 마구 비명을 지르더니, ‘추악한 짐승, 내가 적을 쓰러뜨릴 땐 내가 싫어하는데도 내 몸 구석구석에 그 꺼실꺼실한 볼을 비비며 좋아하 더니 이젠 내가 말도 못하도록 그런 고약한 칼집을…………..”
길시언은 황급히 손을 내밀었다.
“됐습니다. 직접 듣겠습니다.”
그래. 그게 낫겠다. 이루릴이 그렇게 말하니 너무 이상하다. 이루릴은 얌전히 프림 블레이드를 길시언에게 돌려주었다. 칼자루를 받아든 길시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는 그것을 왁살스럽게 검집에 꽂아넣었고, 그러자 곧 프림 블레이드는 검집 안에서 떨리기 시작했다. 웅웅웅웅웅.
와, 신기하군. 저게 칼이 운다는 것인가? 샌슨과 나는 눈이 튀어나올 듯이 칼집을 바라보았다. 네리아의 숨소리는 너무 커서 옆에 있는 내게 잘 들렸 다. 길시언은 밉살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검집을 노려보았다.
그때 조용히 있던 운차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댁의 몸에서 피 냄새가 나오.”
우린 모두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놀란 듯이 되물었다.
“나 말입니까?”
“그렇소.”
“거야 조금 전에 오크들과 싸웠으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니, 인간의 피요. 꽤 많군. 얼마나 죽이셨어? 코가 떨어져나갈 것 같군.”
순간 길시언의 얼굴에서 지금까지 볼 수 없던 미소가 떠올랐다. 아주 희한한 종류의 미소였다.
“모험가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흠. 죽을 고비를 엄청나게 넘기셨군. 댁은 거의 빌린 목숨으로 대지를 걷는데.”
운차이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고 길시언도 이를 드러내었다. 이가 깨끗한 빛을 뿜었다.
“당신, 살기를 감지하는군? 그것도 꽤 능란한데, 자이펀인입니까?”
“그래서 이렇게 포로로 잡혀 있지.”
길시언은 운차이가 보여주는 밧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입을 조심하십시오.”
운차이는 다시 차갑게 웃더니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져버려서 칼이 입을 열었다.
“어, 그래, 길시언께서는 갈색 산맥을 넘어 바이서스 임펠까지 가실 계획이오?”
“그렇습니다.”
“그럼 우리랑 동행하시지 않겠소? 이런 험한 곳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길시언은 조금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동행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만.”
“내가 위험한 사람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길시언의 말에 나와 샌슨은 조금 흠칫했다. 그러나 칼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 마법검은 마음씨 착한 사람을 좋아한다면서요?”
아, 그렇군. 그러나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령 내가 선량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어떤 불행이 따라다닐지도 모릅니다. 인간 관계라는 것이 단순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것은 생각해 보 셨습니까?”
어라? 뭐가 이렇게 복잡해? 옆에서 듣고 있던 이루릴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보였다. 칼은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저희들이야말로 미안하지요.”
“예?”
“아까의 그 오크들은 저희를 추적하던 놈들이었으니까요.”
길시언은 얼굴을 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음…………, 좋습니다. 여러분께 폐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샌슨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저, 그런데 우리는 말을 타고 있습니다. 황소로 따라오시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그러자 길시언은 빙긋 웃었다.
“저래뵈도 북부 대로의 황제로 불리던 놈입니다. 아마 도저히 황소로 믿어지지 않을 겁니다.”
새벽이다. 네시쯤 되었을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주위는 컴컴하다. 사람들이 오가는데, 그것은 모두 그림자뿐이다. 쌀쌀할 새벽 공기 사이로 샌슨이 기지개를 켜는 것 이 간신히 보인다.
수건에 물을 뿌려서 얼굴을 닦는다. 우와! 얼굴이 갈라진다.
이루릴은 얼굴을 닦고 나서 윌로위스프를 불러내더니 머리를 마구 휘젓는 그녀만의 독특한 머리 손질을 하고는 책을 꺼내었다. 윌로위스프의 빛으 로 책을 들여다보며 기주를 하는 것이다. 캄캄한 새벽 공기 속에서 그녀만이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편리하군. 난 사그라드는 모닥불 위에 솥 을 걸고 다시 불을 일으켜 물을 끓였다. 주위가 한층 밝아졌다. 나는 엊그제 이라무스에서 사둔 고기랑 야채를 집어넣어 끓이기 시작했다. 수프 스톡 이지. 길시언이 이상하다는 듯이 날 바라보았다.
“뭐 하는 거야?”
“요리.”
“뭐? 그 귀찮은 걸 한다고?”
“야외에 나오면 더 잘 먹어야죠. 당신은 그럼 요리하지 않고 뭘 먹으며 돌아다니죠?”
“휴대 식량이지, 뭐.”
“당신 정말 재수 좋았어요. 우리와 동행하기로 결정한 것. 특히 오늘 아침. 왜냐하면 재료가 떨어지면 나 요리 안하거든. 엉성한 요리를 할 바에야 때려치운다는 거지요. 그런데 오늘은 재료가 충분하거든요.”
“그런데 그 음식 냄새는 갈색 산맥 전체에 퍼질 텐데?”
“오면 나눠주죠. 어차피 밤새도록 지핀 불은 잘 보였을 텐데.”
길시언은 하긴 그렇다는 듯이 웃었다. 난 돌멩이를 모아 따로 불을 일으킨 다음 프라이팬을 꺼내었다. 버터로 밀가루를 볶는다. 우유와 생크림이 있 다면 크림 수프를 만들 텐데. 아쉽군. 볶은 밀가루를 수프 스톡에 집어넣어 휘젓는다.
“샌슨, 이리 와 이것 좀 저어.”
그리고 난 프라이팬에다가 베이컨을 굽기 시작한다. 어디서 킁킁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네리아가 눈곱도 떼지 않은 얼굴을 불쑥 내민다.
“고소한 냄새…………. 발작하겠네……….”
“프라이팬에 눈곱 떨어져요! 수통 저기 있으니 수건에 물 적셔서 손이랑 얼굴이랑 닦고 와요!”
“니에, 마님.”
네리아는 허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귀엽게 걸어갔고 난 그만 웃어버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샌슨은 그야말로 구도의 자세로 수프를 젓고 있다. 완벽한 원을 그리는 팔의 움직임. 스으윽, 사아악. 팔 이외에는 미동도 하지 않 는 상체. 강철 같은 얼굴. 불꽃을 응시하는 타오르는 눈빛. 하지만………….
“그만 저어! 불에서 내려.”
“어, 그러냐? 음.”
“거기 옆에 크래커 있을 거야. 부서뜨려 넣어. 그리고 주전자 올려.”
“알았어.”
베이컨도 다 되었고, 이제 팬케이크를 굽는다. 샌슨은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보골거리는 물거품 소리.
하늘이 조금씩 파랗게 바뀌어간다. 흠, 또 다른 하루, 시작이군, 내일 아침에 눈 뜨는 고통을 맛볼 때까진 하루나 남아 있군. 룰루루.
길시언은 대단히 감명 깊은 아침 식사였다고 감상을 피력했다. 기쁘군. 모두에게 차를 돌렸다. 이루릴은 매일 얻어먹기만 해서 미안하다고 한다. “오늘 저녁은 제가 해볼게요.”
“이루릴이요? 흐음. 엘프 음식에 대해서 듣기로…………….”
잠깐,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보아도 엘프들이 먹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군. 그게 인간이 먹을 수 있다 없다, 해가 된다 아니다를 떠 나서 아예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본 기억이 없는데. 이루릴은 고개를 저었다.
“여러분들이 엘프의 음식을 먹는다면 몹시 기분이 상하실 거예요. 먹기도 힘들고. 인간식으로 해보죠.”
“그래요? 어, 그럼 인간의 음식은 이루릴에게………….”
“아뇨. 맛있어요, 후치. 걱정 말아요.”
“휴우, 다행”
운차이와 샌슨은 마지막 팬케이크를 가지고 다투고 있었다. 샌슨은 롱소드를 절그럭거리는 등의 치사한 방법까지 동원하고 있었다. 정말 창피하군. 그러자 운차이는 무서운 눈으로 샌슨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샌슨은 움찔했다.
“살기(氣)군. 정말 컨트롤이 자연스러운데?”
구경하던 길시언의 감탄이었다. 오, 어제 운차이가 저걸로 와이번을 겁주는 것을 봤다. 난 길시언에게 살기가 뭐냐고 물었다.
“드래곤 피어에 대해 알아?”
“어, 그건, 드래곤이 상대를 마구 겁주는 오러…….”
“그거랑 비슷해.”
“사람도 그게 돼요?”
“사람과 드래곤만 그게 되지. 살기는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킬링 오러. 학자들은 드래곤만 그게 된다고 생각했지만, 흰 토끼를 보셨나요. ……………아냐! 젠장. 어, 자이펀인들은 그걸 해냈어. 내 생각엔 모든 동물이 다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것은 드래곤과 인간일 거야. 인간은 원래 짐승에 가까우니…………, 방해하지 마! 에, 그러니까 엘프는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사니까 될 것 같기는 한데, 성격상 안 될 것 같다. 엘프는 몸매가 너무 좋으…………, 그아아아악! 임마! 아니, 엘프는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니까!”
결국 운차이의 살기에 눌려, 샌슨은 마지막 팬케이크를 양보했다. 운차이는 내게 말했다.
“살기를 퍼뜨릴 정도의 맛이야. 훌륭하다, 후치.”
난 미소지었다. 아마 샌슨이 음식을 양보한 것은 이게 평생 처음이 아닐까? 속으로 눈물을 쫙쫙 뽑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