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3권 – 제5부 : 복수의 검은 손길 1화
……그러므로 위대하신 루트에리노 국왕께서 말씀하시길, “내 벗의 하루의 슬픔은 나의 백 일의 슬픔이오, 내 벗의 하루의 기쁨은 나의 백일의 기쁨일 것이다.” 하셨다. 그러자 현명한 핸드레이크가 대답하였다. “치료해 드릴까요?”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추발렉의 도움으로 출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 도 가치 있는 이야기」 돌로메네 지음, 770년. 제6권 211쪽.
1
“어어어, 살려줘!”
나도 저랬나! 흠, 아냐. 난 더 심했지. 어쨌든 네리아는 말에서 굴러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아무리 몸놀림이 좋더라도 날뛰는 말에서 굴러 떨어질 때는 대책이 없 겠지. 겨우 몸을 둥글게 만들어 충격을 좀 줄일 뿐이다. 네리아는 땅에 나동그라지더니 그대로 팔을 쫙 펼친 채 큰대자로 누워 헥헥거리고 있었고 샌슨과 나는 날뛰는 말을 붙잡기 위해 뛰어다녔다.
“그쪽이다, 잡아!”
“으아아압!”
말이 말을 할 줄 안다면 내 욕을 무지무지하게 했을 것이다. 내가 말을 잡는 방법은 언제나 그 목에 뛰어들어 매달린 다음, 목을 겨드랑이에 끼고 쓰러뜨려 버리는 것 이니까. 콰당! 말은 땅에 나동그라져서 씩씩거리며 날 노려보았다. 자욱한 먼지에 재채기가 난다.
“엣취! 인마. 후욱, 후욱. 나도 죽을 맛이다. 너 정도의 덩치를 눕히는 게 쉬운 줄 알아? 헉, 헉, 에, 엣취! 성깔 좀 그만 부려라.”
그 암살자들의 말들 중 네리아의 말을 하나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 풀어주었다. 야생마가 되겠지. 이들이 제대로 훈련받은 말이라면 알아서 자기 마구간으로 돌아갈 테고.
그런데 아무래도 제대로 훈련된 말인 것 같다. 주인이 바뀌니까 엄청난 성깔을 부리는 것이었다. 게다가 네리아가 고른 말은 제일 덩치가 큰 말이었다. 샌슨이나 이 루릴이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네리아는 무조건 제일 큰 말을 고집했다.
“네 체격을 생각해. 저렇게 큰 말은 네 팔다리에 맞지 않아.”
“샌슨 씨의 말이 맞아요. 게다가 이 말은 성격이 사납군요.”
그러나 네리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싫어! 제일 큰 말이 팔아먹을 때도 제일 비쌀 거야. 미래를 생각해야지, 미래를!”
샌슨은 울화통이 터져서 조언을 포기했다.
“차라리 돈자루를 타고 다녀라!”
“어머나, 돈자루도 달릴 수 있어? 그럼 더 좋지. 사료값이 안 들겠네?”
그러고는 네리아는 이렇게 자신과, 자신의 말과, 우리를 동시에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난 그 시커멓고 덩치 커다란 말을 조심스럽게 일으켜세웠다. 말은 용틀임을 하며 일어났으나 내가 왼손으로 고삐를 단단히 쥐고 오른손으로 한 대 칠 듯이 을러대자 도망가지는 않았다. 대신 내 왼손을 물어뜯으려 했다.
“우와랏찻차!”
나는 기겁을 하며 손을 빼서 간신히 물리지는 않았다. 칼은 나무 꼬챙이로 땅에 한 줄을 그었다.
“17번째 시도 실패.”
그 옆의 나무에 묶여 있던 운차이가 킥킥 웃었다. 네리아는 누운 채 하늘을 향해 외쳤다.
“그럼, 18번째 시도!”
네리아는 다리를 끌어올렸다가 핸드스프링으로 발딱 일어났다. 정말, 아무리 충격을 줄이며 나동그라진다지만 말에서 17번이나 떨어진 여자가 저렇게 건강하다니 믿어지지 않는데. 말도 대단한 고집이지만 네리아도 엄청난 고집이야.
“요오오오옵!”
“저건 뭐야……?”
샌슨이 얼빠진 모습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앞으로 텀블링하며 달려오더니 하늘로 솟구쳐올라 원 트위스트 원 서머솔트의 멋진 공중제비를 넘으며 말 에 올라탔다.
“짠!”
“거꾸로야.”
“……짠! 놔, 후치.”
“차마 볼 수가 없어………….”
난 눈을 가리며 고삐를 놓았다. 이힝힝힝! 다각, 다가닥, 이히르힝힝!
“사람 살려!”
장장 39번째 시도에서 말은 간신히 네리아의 말을 듣게 되었다. 네리아는 말의 귀를 쓰다듬으며 미소지었다.
“착한 말이야.”
말도 기가 막혔을 것이다. 어쨌든 그 동안 계속 말과 씨름하던 나와 샌슨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땅에 주저앉고 드러누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내가 질문했다. “후우, 후우, 이름은 뭘로 지을 거죠?”
“이름? 까만색이니까 이거 어떨까? 에보니 나이트호크스 세이버 위다웃 풋스텝.”
발자국 없는 칠흑의 쏙독새의 구원자’라∙∙∙∙∙∙. 난 왜 말 이름을 이상하게 짓는 사람만 만나는 거지?
“약간 긴 것 같은데요.”
“그래? 그럼 어때. 뭐라고 부르든 어차피 못 알아들을 텐데. 꼭 길다면 자르면 되잖아.”
“잘라요?”
네리아는 싱긋 웃더니 말의 정수리 갈기에 손을 얹고 엄숙하게 말했다.
“나 네리아는 성실한 나이트호크로서 널 에보니 나이트호크라 부른다. 넌 나의 모든 작업의 반려이며 나의 도주의 제1지원자로 행동해야 한다. 알았지?”
그게 좀 낫군. 칠흑의 쏙독새라. 칠흑의 밤도적인가? 놀랍게도 말은 고개를 끄덕였으며, 네리아는 그것을 보더니 까르륵 웃으며 그 목을 껴안고 갈기에 얼굴을 묻었 다.
“에, 에취!”
저놈 무지무지하게 땅에 쓰러졌지? 갈기에 먼지가 가득하겠지.
그래서 도둑의 말이라기보다는 용사의 말로 훨씬 어울리게 생긴 그 성깔 사납고 덩치 큰 흑마는 에보니 나이트호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네리아의 요란스러운 말 길들이기 때문에 그날 오후는 그냥 지나갔다. 하지만 어차피 메드라인 고개는 내일 넘을 생각이었으니까 별 상관은 없었다. 우리는 닐 드루 카봉우리 아래에서 야영을 했다.
닐 드루카 봉우리를 왼편에 끼고 메드라인 고개를 넘어가는 길은 중부 대로에서도 가장 바쁜 고개라고 한다. 물론 고개가 바쁠 수는 없고, 거기만 넘어서면 수도 바 이서스 임펠이 지척이기 때문에 고개를 넘는 여행자들의 걸음이 바빠진다는 의미이다.
또한 이곳부터는 수도의 치안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간혹 돌로 만들어진 바라크가 서 있는 모습도 보였다. 수도에서 파견된 레인저들이 바라크에 근무하며 여행객들 의 불편 사항을 돕는다. 식량이 떨어지거나 잠자리가 필요하다는 등의 사소한 것에서부터 조난을 당했다거나, 몬스터로부터 습격당했다거나 하는 경우에 구출 임무 도 맡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 근처의 길에서는 몬스터가 출몰하는 경우가 거의 드물며 따라서 안전한 길이기도 한데 레인저들이 자주 근처를 순찰하기 때문이다. 하 지만 그들은 페어리퀸 다레니안의 영토를 침범할 수는 없어서 그 이상 서쪽으로 진출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여행객들의 보호라고 해봐야 반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조금 전에도 산악 지형에 적절해 보이는 무장을 한 레인저 대원들과 서로 지나쳤다. 그들은 모두 수염이 덥수룩했고 옷차림도 깔끔하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우리에게 친절히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운차이를 묶고 가는 우리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여행객들에게는 그보다 더 신기한 일도 잘 일어난다나.
멀어져 가는 레인저를 돌아보며 샌슨이 말했다.
“저, 레인저 대원들에게 호위를 요청하면 안 될까요?”
“응? 왜 그러나, 퍼시발 군?”
“그러니까…………, 운차이는 적군 포로입니다. 그러니 레인저들의 호위를 받으며 수도로 갈 수도 있지 않습니까?”
“글쎄. 우리들만으로도 운차이 씨의 호송에는 차질이 없지 않은가? 레인저 대원들은 이 근처의 경비 업무만으로도 바쁠 텐데. 그리고 그들의 임무는 국왕께서 정하 는 것이지 우리 마음대로 요청하여 쓸 수 있는 것은 아닐세.”
“그래도 전범의 호송인데요.”
“우리 인원으로 호송이 힘들 것 같은가?”
샌슨은 그냥 미소지어 버렸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냥 가죠. 어차피 다 왔으니.”
운차이를 돌아보니 얼굴이 좋지 않았다. 이제 바이서스 임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도망은 꿈도 못 꾸게 되었다. 샌슨도 그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이봐. 혹시 도망가더라도 이 근처에서라면 대번에 체포될 테니, 차라리 얌전히 호송당하면 정상 참작의 기회가 많을 거야.”
운차이는 이를 박박 갈았다.
“생각해 줘서 정말 고맙군.”
“뭐, 천만에.”
같은 중부대로라지만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길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확실히 수도 가까이 오니까 훨씬 낫군. 몬스터의 출몰에 대한 걱정도 없이 마음 편 한 여행 끝에 우리는 메드라인 고개를 넘었다.
고개를 넘어 평지에 내려서도 별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거대하고 완만한 언덕들과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로 중부 대로의 유장한 흐름은 계속되고 있었다. 칼은 하늘을 보며 말했다.
“곧 황혼이 내리겠는데. 퍼시발 군. 바이서스 임펠까지의 거리는 어떻게 되는가?”
“에, 전속력으로 달리면 오늘 밤중엔 닿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럼 하루를 더 손해볼 필요는 없겠군.”
샌슨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달려보자! 오늘 밤 안에는 바이서스 임펠에 도착하고 내일부터 우리의 임무를 시작하는 거지.”
“그럼 오늘이 여러분과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길이겠군요.”
이루릴의 말에 샌슨은 입을 딱 벌렸다.
“어, 후, 후치. 좀 피곤하지 않아? 천천히 갈까?”
여기서 피곤하지 않다고 말하면 내가 살 수 있을까? 칼은 그만 고개를 돌리며 웃어버렸다. 하지만 이루릴이 먼저 대답했다.
“오늘은 편안한 여행이었는걸요. 전 빨리 좀 씻었으면 좋겠어요. 괜찮다면 오늘 중 여관에…….”
“예! 물론입니다. 출발!”
“나…………, 난 대답 안 했는데.”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샌슨은 달려가기 시작했고 그러자 운차이는 여전히 그 저주스러운 밧줄에 이끌려 꼬리에 불 붙은 고양이마냥 샌슨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이 루릴과 칼도 뒤따라 달려가기 시작했고 네리아는 먼저 한마디 선언을 했다.
“자! 에보니 나이트호크 첫 번째 질주다. 잘해 보자! 이랴!”
에보니 나이트호크는 곧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정말 덩치에 어울리는 롱 스트라이더의 걸음걸이로 죽죽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비명처럼 탄 성을 질렀다.
“우와! 너, 눈물나게, 잘 달린다!”
난 뒤질세라 제미니를 출발시켰다.
“하아! 하아!”
“이랴아!”
석양이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 뒤가 서쪽이라 그림자는 우리 앞쪽으로 길게 늘어졌고, 우리는 모든 것이 붉게 타오르는 평야 위로 여섯 개의 그림자를 쫓아 달려갔 다. 빛이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을 테고, 그 동안 조금이라도 더 질주해야지.
이윽고 해가 졌다. 우리는 달이 떠오를 때까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사방이 완전히 트인 평야, 그 위로 내린 거대한 어둠 속에서 우리들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은 채 걸어갔다. 한참 후 우리 앞쪽의 동쪽 지평선에서 두 개의 달이 동시에 떠올랐다.
“오! 오늘은 셀레나와 루미너스가 동시에 뜨는 날이군.”
멋진 광경이었다. 동쪽 지평선 위에서 크고 작은 두 개의 달이 동시에 하늘로 솟아올랐다. 처음 그것은 마치 거대한 무엇이 땅에서 손톱을 내미는 듯이 보였다. 마침 내 솟아오르자, 그것은 똑같은 크기의 보름달이었다.
우리는 두 개의 달을 향해 달려갔다.
지평선 위로, 달빛 아래로, 불빛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샌슨이 감격 어린 말투로 말했다.
“바이서스 임펠이야. 드디어 도착이군!”
검은 지평선 위에 바이서스 임펠은 불야성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갈색 산맥이 동쪽으로 달리다가 약간 남동쪽으로 휘어지는 부분에 위치한 이 도성은 밤하늘로 굉장 한 불빛을 뿜어올리고 있었다. 희한한데? 그냥 촛불이 많다거나 하는 정도로 저렇게 멀리까지 밝은 빛이 비칠 수 있나?
“마법사들이 많아서 그렇지.”
네리아가 말해줬다.
“마법사?”
“빛의 탑이라는 마법사 길드 건물도 있고, 저 도시 길에는 밤마다 곳곳에 마법의 불이 켜져. 그래서 밤에도 아무런 등불 없이 돌아다닐 수 있어.”
“와아!”
우리는 바이서스 임펠을 감싸고 도는 임펠 리버에 이르렀을 때 그것을 구경할 수 있었다.
임펠 리버에는 커다란 아치형의 석조 다리가 놓여 있었다. 열 명이라도 동시에 걸어갈 수 있을 듯한 큰 다리 양쪽에 초소 같은 것이 서 있었다. 초소 건물 위에는 도 대체 뭔지 모를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횃불은 아니고 그저 밝은 빛 덩어리가 둥둥 떠 있었다. 이루릴은 그것을 보더니 말했다.
“컨티뉴얼 플레임이군요. 초소 건물에까지 저런 마법을 쓰다니, 대단한데요.”
“그래요? 그럼 낮에도 빛나요?”
“그렇겠죠. 낮에는 뭘로 덮어두든가 하나 보죠.”
초소의 경비병들은 모두 화려한 복장을 걸치고 있었다. 샌슨은 그들의 무구를 보더니 자신의 갑옷과 검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모두 하프 플레이트 메 일을 완전한 풀 세트로 입고 있었다. 바이서스의 상징인 붉은 독수리 문양이 가슴에 새겨져 있었고 머리에는 멋진 깃털 장식의 투구, 허리엔 화려한 롱소드를 장비하 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정지시켰다.
“바이서스 임펠에 들어가려 합니까?”
칼이 우리를 대표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야심한 밤이라 조사가 필요합니다. 신분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칼은 짐 속에서 자신의 서류들을 꺼내주었다. 경비 대원은 그것들을 빠르게 읽었다. 곧 경비 대원들의 동작과 어휘에 약간의 경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헬턴트 영지의 전권 대리인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국왕님을 알현키 위해 왔습니다.”
경비대원은 칼 뒤쪽의 우리를 훑어보았다.
“수행 인원이 좀 독특하군요?”
하긴. 샌슨은 좀 초라하지만 수행 무관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외에는 어린애, 엘프, 밧줄에 묶인 남자, 큰 말을 탄 여자니까 영주의 수행 인원이라면 기이하다 하 겠다. 칼은 웃으며 말했다.
“여기 엘프분은 저희 여행 동료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분들은 훌륭한 헬턴트의 시민들이죠.”
경비대원은 빙긋 웃으며 서류를 돌려주었다. 아마 깡촌의 영주라 수행 인원도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쳇. 그렇게 보일 테니 어쩔 순 없군.
“알겠습니다. 옥새는 확실하군요. 국왕의 봉신으로서 당신과 당신 수행원의 통행권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엘프께서는 우리 국왕님의 친우로서 바이서스의 모든 땅을 마음대로 지나실 수 있습니다. 통과하십시오.”
경비 대원은 비켜주었고 우리는 그 옆을 지나 다리로 들어섰다. 엘프는 바이서스의 시민이 아니지만, 따라서 바이서스의 법률에 저촉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경비 대 원은 이루릴에게 무례하게 이름이 뭐냐, 목적이 뭐냐 등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샌슨은 주눅든 모습으로 뒤를 돌아보더니 혼잣말처럼 말했다.
“저게 진짜 ‘경비 대원’ 이야……. 굉장해.” 칼은 헛기침을 하더니 농담 삼아 말했다.
“갑옷 말인가, 그 안의 인물 말인가?”
샌슨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칼. 칼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저런 갑옷을 입고 저렇게 경쾌하게 움직인다는 것은 대단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죠. 전사로서 존경스럽군요.” 그러자 이루릴이 방긋 웃었다.
“대단할 것 없어요. 샌슨이 훨씬 강해요.”
“이런…………, 과찬의 말씀을.”
그러자 네리아도 말했다.
“이런, 샌슨아, 샌슨아! 저 갑옷들에는 경량화 마법이 걸려 있어 대단히 가벼운 거란다. 넌 갑옷 볼 줄도 모르면서 그러니?”
“어? 너 그거 어떻게 알아?”
“저런 갑옷 입은 사람과 사귄 적이 있거든.”
“그래? 흐음……. 그래도 대단해. 그런 귀한 갑옷을 입었다는 것은 말이야.”
난 이루릴이나 네리아처럼 친절하진 못한 모양이다. 주변을 보기가 더 바빴다.
굉장했다.
임펠 리버를 가로지르는 그 아치형의 돌다리 난간에도 그 컨티뉴얼 플레임이 걸려 있는지 은은한 빛이 비쳐나와 우리는 흡사 빛의 다리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아치 형의 다리라 마치 무지개를 밟고 지나가는 느낌도 들었다. 컴컴한 밤중이라 그 광경은 더욱 아름다웠다. 밤에 와서 다행이야! 다리 난간의 빛은 검은 강물을 반짝거리 게 만들었다. 강물 위에 보석을 뿌려둔 것 같았다.
그리고 다리를 다 건너자 곧 엄청난 성벽이 다가왔다. 높이가 적어도 150큐빗은 되어 보이는 성벽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다. 돌을 어떻게 저렇게 쌓았을까! 저 무 게로 땅이 꺼지지 않나? 그 높은 성벽 위로도 일정하게 무슨 빛이 깜빡이고 있었는데 그건 횃불인 듯했다. 검은 하늘에 규칙적으로 늘어선 불빛은 최면 작용을 일으킬 것 같았다.
그리고 정면에는 20큐빗 정도의 성문이 보였다. 밤이라서 그런지 성문은 닫혀 있었으나 그 옆의 작은 문은 열려 있었다. 그 작은 문을 지키던 경비 대원들은 다리에 서 통과시켰으면 상관없다는 듯이 그대로 아무 말 없이 우리들을 통과시켰다. 샌슨은 그들의 복장을 보더니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작은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니 곧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우와……!”
넓은 대로가 쫙 뻗어 있었다. 대로 양쪽으로는 30큐빗마다 규칙적으로 기다란 막대기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꼭대기에도 컨티뉴얼 플레임이 빛나고 있어 대로는 환했다. 그것은 정말 교묘하게 생겼는데, 크기가 조금 차이나는 쇠로 된 반구 두 개를 모아 구 모양으로 만든 다음, 두 개의 구가 겹치는 부분에 쇠막대기를 꽂아 중심 축을 따라 움직이게 만들어두었다. 그리고 그 중심축에 컨티뉴얼 플레임이 빛나는 것이다. 그래서 반구를 한쪽으로 겹쳐 모으면 빛이 나오고 반구를 닫으면 완전한 구가 되어 빛이 가려지는 그런 모양이었다.
대로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이런 밤중인데도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마치 한낮처럼 사람들은 오가며 이야기하고 물건을 팔았다. 요란한 소리 때문에 정말 낮으로 착각하기가 쉬웠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모두 가볍고 밝은 색의 옷이었다. 갑자기 내 가죽 갑옷이 칙칙하게 보였다. 가죽 갑옷을 입은 남자들도 많았지만 그들의 가죽 갑옷은 모두 흰색이나 붉은색이고, 간혹 푸른색도 보였다. 희한한 갑옷이군. 게다가 모두들 화려한 망토를 두르고 걸어가고 있었다.
남자들은 대개 아름다운 옷의 처녀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처녀들도 모두 빛이 나는 듯했다. 모두 밝은 색 계통의 옷을 입고 있어서 주위의 불빛에 아주 잘 어울렸다. 이렇게 조명이 좋은데 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을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저런 밝은 빛깔 옷이라면 세탁하기가 만만찮겠는데.
칼이 말했다.
“허어………., 참. 저건 갑옷이 아니군.”
“예?”
“저렇게 눈에 잘 띄는 색깔이 갑옷일 리가 있나. 아무래도 장식용 갑옷인 모양이군. 축제인가?”
축제? 어, 그럴지도 모르겠군. 저렇게 많은 처녀 총각들이 밤중에 이렇게 데이트라니. 네리아가 칼의 말을 확인해 주었다.
“아, 오늘 보름달 두 개가 동시에 떴죠?”
“그렇소.”
“그럼 오늘은 트윈문의 축제군요.”
“아! 오늘이…….”
그때 내가 끼어들었다.
“보름달이야 원래 두 달에 한 번은 같이 뜨지 않아요?”
“아, 네드발 군. 오늘은 초대 바이서스 임펠의 시장이자 루트에리노 대왕의 셋째 왕자이신 세류델헨 왕자가 이 땅에 수도를 정하게 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라네. 전설 에 따르면 세류델헨 왕자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수도로 정할 땅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두 개의 보름달이 동시에 지평선에 떠오를 때 독수리와 영광의 신 아샤스를 만나셨네. 그리고 아샤스의 명령으로 이 땅을 수도로 정했어요. 그래서 바이서스 임펠에서는 그날을 기려 축제를 가진다네.”
아, 그런가? 그래서 이렇게 화려하게 돌아다니는 모양이군.
마차들도 얼마나 많이 오가는지 모르겠다.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이 대로는 모두 사람들이 걸어다니기 좋은 대로였지 말이 편자를 따각거리 며 걸을 길은 아니었다. 샌슨과 나는 잔뜩 주눅들어서 그 밝은 색 옷차림의 사람들 사이로 말을 몰아갔다. 사람들이 우릴 흘깃흘깃 쳐다보는 듯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 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사람들은 모두 이루릴과 네리아를 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숨죽인 탄성이 들려왔다.
“오, 맙소사…………… 엘프인가?”
“저말좀봐! 저 여자, 저런 말을 탔어!”
“이건……, 이건 정말……………”
주위의 장대 위의 불빛들이 이루릴의 머릿결을 타고 흘러내렸다. 검은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마음껏 흘러내리고 있다. 바이서스 임펠의 처녀들은 모두 금발이나 갈색 머리카락으로 머리를 올리거나 부풀려 한껏 모양을 내었지만 이루릴의 자연스러운 검은머리에 견줄 만한 것은 없다. 그러고 보니 정말 매력적인 흑발 아가씨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모두 칙칙한 금발이나 갈색뿐이군. 그리고 이루릴의 낡은 가죽 재킷에 가죽 바지. 가죽은 낡을수록 그 빛깔이 깊어지고 아름다워진다. 처녀들의 화려하고 섬세한 옷차림을 욕할 생각은 없지만, 이루릴의 가죽옷 앞에선 몽땅 세탁장의 빨래처럼 보일 뿐이다. 저 가죽 바지는 최고야!
그리고 그 옆의 네리아. 남자들도 못 탈 것 같은 엄청난 흑마를 타고 있는 날씬한 아가씨. 가죽 갑옷과 망토까지 입고 있지만 에보니 나이트호크가 워낙 크다 보니 네 리아는 작아 보인다. 도발적인 붉은 단발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리고 당당하게 걸어간다. 아니, 경쾌하다고 해야 할까? 등에는 거대한 트라이던트를 메고 있다. 에보니 나이트호크가 뿜어내는 거대하고 야수적인 매력과 네리아의 발랄하고 청신한 매력은 희한하면서도 매력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내 보기에, 주위의 처녀들은 모두 순식간에 자신의 청년들을 잃는 아픈 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들은 모두 입을 쩍 벌리고 이루릴과 네리아를 바라보고 있었 다. 정말, 과장 없이, 대로가 훨씬 조용해졌다.
“킥킥킥…….”
불쌍하리만큼 잔뜩 주눅들어 있던 샌슨이 날 바라보았다.
“왜 웃어?”
“아가씨들이 불쌍해서.”
“불쌍하다니?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들인데.”
“주위를 자세히 봐. 지금 남자들은 그 아름다운 모습에 전혀 눈길을 보내고 있지 않아. 킥킥.”
샌슨은 주위를 둘러보았고, 남자들이 모두 침을 질질 흘리면서 이루릴과 네리아를 바라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상하네. 이루릴은 아름답지만, 화려한 옷은 아닌데. 게다가 아가씨답지 않게 말까지 타고……………”
“어이구, 오거야! 주위를 봐. 모두 화려한 옷에 인형처럼 생긴 아가씨들뿐이잖아. 그러니까 이루릴과 네리아는 정말 살아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거라고!”
“그러냐? 휴우, 어렵다.”
난 그때 친절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내가 하나 더 가르쳐줄까?”
“응?”
“여기 수도의 아가씨들은 말이야. 샌슨 같은 완전 오거형의 전사는 처음 보는 것이거든? 장식용의 갑옷을 걸친 샌님들이 아니라 방금 트롤 목이라도 하나 치고 온 듯 한 광폭해 보이는 남자는 처음 본단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샌슨의 허리가 당장 곧아지고 가슴은 성벽처럼 굳건히 펼쳐졌다. 그는 사나운 눈길로 지그시 아래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에구. 누가 말리겠냐. 내 농담이었지만 진짜 몇몇 아가씨들은 숨이 멎는 듯한 얼굴로 도시 한복판에서 거친 야성을 풍기는 싸나이 샌슨을 바라보았다. 아가씨들, 정신 차려! 저건 인간이 아니라고!
어쨌든, 수도 시민들에게 사열을 받는 듯한 걸음걸이로(샌슨이 사납게 노려보고 있자 마차 하나는 황급히 길 옆으로 비켜나기까지 했다.), 우리는 여관이 밀집한 거리로 들어섰 다.
“칼, 역시 시민들에게 물어볼까요?”
“그게 좋겠지.”
난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봐. 샌슨이 한번 물어봐.”
“내가? 알았어.”
샌슨은 주위를 사납게 노려보더니 곧 지나가는 아가씨 하나를 눈빛 공격으로 마비시켜 버렸다. 뱀파이어나 메두사라도 지금의 샌슨보다 더 무서운 눈을 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봐, 아가씨.”
샌슨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난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 불쌍한 아가씨는 완전히 주눅이 들어 발발 떨면서 샌슨의 거무튀튀하고 거대한 실루엣을 올려다보았다. 샌슨은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어두운 밤하늘의 성좌를 바
라보며, 마치 옛노래를 부르는 선원의 구슬픈 음성처럼 애잔한 울림이 있는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여행자요. 좋은 여관 하나 소개해 주겠어?”
여자는 멍한 얼굴로 샌슨을 보더니 대답했다.
“나, 난 몰라요! 아무데나 가보세요!”
그리고 여자는 부리나케 달아나버렸다. 샌슨은 얼빠진 얼굴로 그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난 너무 웃느라 결국 말에서 떨어졌다.
“새, 샌슨! 우히히히! 어, 어떻게 아가씨가 여관에 대해, 헥헥, 잘 알 거라고 생각했지? 우킬킬킬킬! 저, 저 아가씨가 집 내버려두고 이 여관, 저 여관에서 자겠나? 우 헤헤헤헤!”
“아, 아차!”
“나, 나이 지긋한 아, 아저씨에게 물어봐야지, 에헤헷헤헷! 그, 그래야 여관 주인들도 좀 알 테고, 킬킬킬!”
결국 칼이 물어서 우리는 ‘유니콘 인’이라는 여관에 들어설 수 있었다. 난 그 동안에도 계속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웃었고 샌슨은 의기소침하여 아무와도 말을 하 지 않으려 했다.
수도니까 무조건 비쌀 거라는 내 생각은 오류였다. 수도라서 오히려 물건들이 풍족해서 물가는 별로 비싸지 않았다. 여관비도 그랬는데, 수도라서 여행객들이 많이 들러 그런지 상당히 훌륭한 여관이면서도 여관비는 저렴한 편이었다.
이루릴과 네리아는 지하에 욕탕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환호를 올리고 지하로 잠적했다. 그리고 두 여자는 욕탕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는지 전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대충 씻고 먼저 저녁 식사를 주문하여 먹고 나서 홀로 물러났다.
이 도시의 모든 건물이 그런지 모르겠지만, 유니콘 인의 건물 안은 엄청나게 밝았다. 홀 천장에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있었고 벽마다 초가 두 개씩 세워져 있으니 그 야말로 앞사람 땀구멍이 보일 정도로 밝았다.
“이건 엄청나군. 그림도 그리겠는데?”
칼은 식후 디저트로 커피를 마시며 주위의 밝기에 감탄했다. 그 동안 나와 샌슨, 그리고 운차이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우리 앞의 컵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아아알…….”
“응? 왜들 그러나?”
“저, 이거 주문해 주신 것은 고맙지만, 못 먹겠어요.”
“아니, 왜?”
“슬라임 같아요. 스푼으로 찌르니 물컹거리는 것도 그렇고…….”
“흐음. 자네들 기호엔 젤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겠군. 여보쇼, 주인장. 맥주 셋.”
“그거예요! 그래요!”
우리는 젤리 컵엔 손도 대지 않고 치워둔 다음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운차이도 훨씬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훨씬 낫군. 소화에도 도움이 되고 말이야. 옆의 테이블 손님들이 그런 우리를 보고 슬며시 웃었다. 에라, 웃든지 말든지. 우리 좋아하는 것 먹으며 살기에도 짧은 인생이야!
“음, 맥주 맛은 괜찮군. 좋은 맛이야.”
그때 이루릴과 네리아가 홀로 들어왔다.
아아……………, 파격적인 그녀들.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않고 그냥 어슬렁어슬렁 들어섰다. 네리아는 아예 머리에 수건까지 얹어둔 채로 들어섰다. 이루릴은 그 정도는 아 니었지만 그래도 검은 머리에 물기가 반짝이는 것이 잘 보였다. 게다가 이루릴의 하얀 볼이 발갛게 물들어 있는 것은 정말 못 봐주겠다.
이루릴은 블라우스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리고 단추는 몇 개 풀어둔 채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는 복장이었고 네리아도 그에 별로 뒤떨어지지 않았다. 가죽 갑옷은 던져두었는지 헐렁한 셔츠 하나만 걸치고 들어섰다. 셔츠는 남자들이 입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고, 그래서 그녀의 목깃 부분은 크게 벌어져 어깨가 보일 정도 였다. 내려오기는 또 얼마나 내려오는지 허벅지를 다 덮었다. 그래서인지 네리아는 머플러 같은 천을 허리에 두르고는 옆에서 질끈 묶고 나머지를 늘어뜨렸다. 흠. 그 렇게 입으니 그것도 괜찮네.
“여기들 계셨군요.”
“식사는 하셨소?”
“예. 식당에 갔다가 여러분이 이미 나가셨다고 해서 먹고 오는 길이에요.”
이루릴과 네리아가 우리 테이블에 앉자 당장 주위의 시선이 경멸에서 시샘으로 확 바뀌었다. 날아오는 시선에 뒤통수가 뚫리는 느낌을 받으며 난 네리아에게 질문했 다.
“그 옷은 어디 있었어요?”
“응? 이거? 내 옷이지. 편해서 좋아.”
“네리아 옷 같지는 않은데요. 너무 큰데. 꼭 남자 옷처럼.”
네리아는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 내가 훔쳤다고 생각하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이상하잖아요. 왜 자기한테 맞지도 않는 옷을 가졌어요?”
네리아는 피식 웃더니 의자를 움직여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귓속말로 말했다.
“변장용이야.”
“남자로요? 그런 몸으로?”
“할 수 있어. 키 작고 뚱뚱한 남자로 변하는 건 쉬워. 샌슨같이 변하는 거야 불가능하지만 너 정도는…………… 그러고 보니 너랑 나랑 키가 비슷하네?” “무슨 소리! 내가 훨씬 더 커요! 앉은 키가 비슷한 거죠.”
“그런가? 에휴. 다리가 짧아서. 나 욕탕에서 이루릴 다 봤지. 정말 다리 길더라. 부러워서.”
“…이루릴 다리 긴 건 원래 아니까 그 이야긴 그만하죠.”
“아냐. 훌쩍. 나 정말 슬퍼. 치마 입고 다니는 여자는 이 마음 모를 거야. 난 성실한 나이트호크로서 치마를 입지 못한다는 게 너무 슬퍼.”
“으하하, 으하, 그만해요, 닭살 돋아요!”
샌슨은 우리 둘이 귓속말을 한참 주고받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의 눈길은 우리에게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흘끔흘끔 이루릴을 쳐다보다가 얼굴 이 붉어졌다.
“저, 이루릴.”
“예?”
“사람들이 자꾸 쳐다봅니다.”
“왜지요? 아, 제가 엘프라서 그런가 보군요.”
“그런가 봅니다.”
샌슨은 아무렇게나 대답해 버리고는 붉어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맥주잔을 들어올렸고 네리아는 그런 샌슨을 보면서 배슬배슬 웃었다. 네리아는 맥주를, 이루릴은 와 인을 주문한 후, 우리는 홀에 앉은 채 만인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내일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세레니얼 양은?”
“내일 델하파로 출발할 생각입니다.”
“그런가요. 혹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여러분들은 여기 얼마나 머물 계획이시죠?”
흠. 그건 나도 알고 싶은 건데. 칼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못 돼도 2주는 걸릴 겁니다. 어쩌면 한 달 정도는 너끈히 있을 수도 있고.”
“그럼…………, 제 용무는 그렇게 길지는 않을 것입니다. 2주쯤 후에 수도에 들를 테니, 절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돌아갈 때도 같이 돌아간다면 좋겠군요.”
샌슨은 숨을 죽이며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웃으며 말했다.
“좋겠지요.”
샌슨의 얼굴은 엄청나게 바뀌었다. 좋아서 죽겠다는 얼굴이다. 나도 좋지. 이루릴은 같이 여행하기에 좋은 동료야. 칼도 잘 쓰고 마법도 잘 쓰고, 일단 눈이 즐겁지. 같이 이야기를 나눌 때는 상식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것도 참 좋고. 이루릴은 우리 모두가 찬성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래셔널 셀렉션은 여러분들이 좀 맡아주시겠습니까?”
“걸어가실 생각입니까?”
“전 엘프니까요. 숲을 통해 갈 땐 말보다 훨씬 빨리 갈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네리아 양은?”
머리에 뒤집어썼던 수건으로 복면을 만들어본다든지 목에 둘러본다든지 팔에 묶어 휘두른다든지 하는 장난을 치고 있던 네리아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당신들은 어쩔 건데요?”
“우리? 우린 계속 이 여관에 머물면서 수도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게 될 겁니다. 대개의 경우, 내가 주로 돌아다니게 될 테고 퍼시발 군과 네드발 군은 좀 심심하겠 죠.”
내가 끼어들었다.
“우린 따라다니면 안 돼요?”
“글쎄. 난 여러 관리와 귀족가에 들를 생각이네. 사실 말해서 동냥질을 다니는 거지. 그런데 거기서는 별로 실질적인 도움도 되지 않는 예의범절이 까다롭거든. 자네 들은 그런 것 잘 모르잖아? 그리고 날 따라다녀 봐야 별로 재미는 없을 텐데. 구걸하는 사람 따라다니는 것도 자존심 상할 테고.”
“구걸………이요?”
“몸값을 마련해야잖나.”
샌슨과 나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칼은 10만 셀을 어떻게 장만할 생각일까? 우리도 따라나서서 돕고 싶다고 말했으면 좋겠지만 우리가 수도에 지인이 있나, 친지가 있나?
“흠. 꼼짝없이 여관에 드러누워 천장만 바라보아야 되나?”
“걱정 말게. 자네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만나서 유익할 만한 분들께는 꼭 데리고 갈 테니.”
그러자 네리아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칼 아저씨. 하루에 1셀씩 해서 애 봐주기. 어때요?”
“예?”
“내가 후치랑 샌슨이랑 돌봐줄 테니까 안심하고 돌아다녀요.”
“괜찮은 제안 같습니다만. 허허허.”
“농담. 난 당장은 별로 할 일이 없어요. 이 근처에서는 통행세 받는 그런 일도 못하고, 또 수도 경비대원 무서워서 다른 일도 할 게 없고. 뭐, 여기 계속 머물면서 일 거리 찾아볼 거예요.”
네리아는 수건을 내 목에 걸어 당기면서 말했다. 켁켁!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씀하시오. 하지만 저…………….”
“불법적인 일? 됐어요. 그런 부탁 안 해요.”
“예. 그럼 퍼시발 군, 네드발 군. 자네들은 내일 오전 일찍 나랑 같이 옷을 사러 가세. 예복을 갖출 수야 없지만 궁궐에 들어갈 테니 옷은 제대로 갖춰야겠지. 그리고 운차이 씨의 신병을 넘기고 국왕 전하를 알현하세.”
어? 아주 쉽게 말하시네? 내 생각엔 아랫관리들에게 먼저 요청을 하고 윗관리를 만나 허락을 받고 어쨌든 층층 시하를 밟아가야 알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 어? 알현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알현할 수 있어요?”
“우리야 보통의 탄원자 같은 사람은 아니니까 걱정 말게. 우리의 임무는 국왕의 드래곤에 관한 것이니까.”
그때 날 마구 당기며 놀고 있던 네리아가 내 귀에 대고 말했다.
“가만히 있어.”
그러더니 테이블 아래에서 내 허리를 더듬기 시작했다. 난 질겁했지만 네리아는 내게 윙크하더니 내 벨트에 꽂혀 있는 대거를 뽑아들었다. 뭐지?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래?
그때였다.
“야! 네리아! 오래간만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