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3권 – 제5부 : 복수의 검은 손길 2화

랜덤 이미지

드래곤 라자 3권 – 제5부 : 복수의 검은 손길 2화

2

좀 떨어진 테이블의 남자 하나가 네리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30대 정도로 보이는 기민해 보이는 털보였다. 네리아는 내 대거를 그대로 수건 틈에 감싸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못 봤을 것이다.

“어머! 오래간만이야. 어머니는 잘 계시니? 저, 여러분. 저기 고향 친구가 있네요. 잠깐 갔다올게요.”

그러더니 네리아는 반갑다는 웃음을 지으며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려니 생각하고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나는 테이블 옆에 기대어놓았던 바 스타드의 끝을 발로 밀어 내 무릎 쪽으로 쓰러지게 만들었다. 난 그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면서 그 남자와 네리아를 살폈다. 고향 친구라고? 그 고향에서는 오래간만에 만날 때는 대거를 숨기고 만나야 되나 보군. 따사로운 고향 인심인데?

난 그 남자를 자세히 훑어보았지만, 그저 평범하게 생긴 남자였고 갑옷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하마터면 그자의 신발을 놓칠 뻔했다. 언뜻 보기엔 보통의 신과 똑같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신발 바닥에 털가죽이 붙어 있었다.

걸을 때 소리가 나지 않겠군.

불안하네. 네리아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놔두어야 하나? 네리아가 우리 일행에게 알리지 않고 저렇게 한 것은 자기가 알아서 해결하겠다는 뜻일 게다.

그때였다.

왼쪽 눈에 흉터가 있는 남자 하나가 네리아와 그 털보의 옆을 지나쳤다. 그 흉터 남자는 아주 기술적으로 둘을 가렸다. 그러나 난 보았다. 그 흉터가 살짝 가리는 틈 을 타서, 털보는 네리아의 손목을 비틀어 대거를 뺏어내고는 네리아의 허리를 쿡 찔렀다. 네리아의 몸이 굳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네리아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 털보는 네리아의 어깨에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약간 떨어져서는 흉터가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리아는 털보와 함께 우리 에게로 걸어왔다.

“이봐요, 나, 고향 친구와 잠깐 어디 가서 이야기 좀 하고 올게요.”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시오. 늦으시겠소?”

“좀 늦을지도 모르겠네요. 기다리지 말아요.”

그리고 네리아는 물러날 채비를 갖췄다. 제길, 안 돼!

“아차, 네리아!”

네리아와 그 털보는 놀라서 날 바라보았다. 난 테이블에서 후다닥 일어나면서 외쳤다.

“그, 그거! 그거 까먹었어요! 이런 젠장! 네리아가 가지고 있죠? 빨리 좀 와봐요. 아, 잠깐 실례!”

그렇게 말하며 난 네리아의 손을 끌어당겼고 그러자 털보는 할 수 없이 네리아를 놓아주었다. 난 네리아의 손목을 끌고 부리나케 홀을 빠져나갔다. 일행들은 멍한 눈 으로 날 봤으나 설명할 새가 없다.

홀을 빠져나와 복도의 벽에 붙어 섰다. 네리아는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빙긋 웃었다.

“고마워.”

“뭐예요? 저 작자들 뭔데요?”

네리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골치 아픈 애들이야. 저 녀석들은 나이트호크도 아냐. 파렴치한 사기꾼들이지.”

“좋아요. 방으로 올라가죠.”

네리아와 난 우리들 방으로 올라왔다. 혹시 누가 본다면 복도에 멍청하게 서 있을 순 없으니까. 우리들은 방에 올라와서 베란다로 나갔다. 이 여관은 2층이 1층보다 면적이 작았으며 그 나머지는 베란다로 만들어져 있었다. 베란다와 방 사이에는 미닫이문이 있어 잘 때는 그것을 닫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누군가 문 밖에서 들을까 봐 베란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여긴 탁 트였으니 감시할 수도 없겠지. 눈앞에 바이서스 임펠의 야경이 펼쳐졌지만 그 기막힌 광경 을 감상할 새도 없었다.

“저 친구들이 원하는 것은?”

“날 쓰고 싶대.”

“복잡한 이야기는 빼고, 좋아요, 싫어요?”

“싫어. 보수도 많이 준다고 하지만 일 끝나면 나 죽일 거야.”

끔찍스럽군. 내용이 아니라 그런 내용을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는 네리아가 끔찍스럽다는 말이다. 난 잠시 호흡을 고른 다음에 말했다.

“알았어요. 털보와 흉터 두 명뿐입니까?”

네리아는 놀란 눈으로 날 보았다.

“너 흉터도 알아차렸구나? 제법이네. 응. 그 둘이야. 하지만 어딘가 다른 패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돌려보내면 또 올까요?”

“강제로 돌려보낸다면. 아마 여자가 필요한 일거리가 있나 봐.”

“길드의 일입니까?”

“아냐. 길드에서 왜 죽이려 들겠어? 저놈들은 길드에서도 추격하는 고약한 녀석들이야. 어쩌다가 저런 놈들을 알게 되었는지…………, 칫.”

“좋아요. 길드 소속이 아니라면, 저놈들을 요리해도 상관없다?”

네리아는 내 손을 잡아쥐더니 말했다.

“후치. 저놈들은 무서운 놈들이야.”

“이렇게 묻죠. 죽을 거예요? 마음에 있는 대로 말해요. 친구니까.”

“……살려줘.”

“좋아요. 여기서 기다려요. 샌슨을 데려오죠.”

난 네리아를 두고 다시 방을 나왔다.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간 다음 홀로 들어서자 그 남자가 멀뚱히 서서 날 바라보았다. 그 털보는 내 옆에 네리아가 없는 것을 보 자 날 사납게 노려보았다. 난 시치미 떼고 샌슨에게 말했다.

“샌슨! 네리아도 모르겠대. 젠장, 그게 어디 있지?”

샌슨은 멍청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아니, 뭘 말야? 말을 좀 제대로 해봐. 서두르지 말고.”

어떻게 하면 털보가 눈치채지 못하게 저 오거를 데려간다? 난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그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거 있잖아? 성 밖 물레방앗간에는 방앗소리 요란한데………….”

“으으아아가각!”

샌슨은 조건 반사적으로 나에게 돌진했고 곧 운차이와 함께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여전히 발목을 서로 묶어 두었으니까.

“으억!”

“꽤액!”

그러나 샌슨은 곧 벌떡 일어서더니 운차이를 확 들어올려 어깨에 둘러메곤 날 쫓아왔다. 운차이는 땅에 나동그라졌다가 어깨 위로 올라갔다가 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다. 무섭군, 무서워.

우리 방에서 간신히 샌슨을 정지시켜 네리아의 위기를 전해 주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샌슨은 곧 침착을 되찾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알았어. 털보와 흉터는 사기꾼들이란 말이지?”

“맞아. 그놈들은 내가 말 안 들으면 죽이려 들 거야.”

“내려가서 박살내 놓지.”

아이고, 머리야.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다른 패거리가 있다잖아?”

“찾아오면 다 박살내지.”

“잘 때 찾아와서 심장에 나이프 하나 꽂아두고 가면 어쩔래?”

“……아래에 있는 놈들 붙잡아서 족친 다음 패거리들도 다 잡지.”

“……그건 왠지 마음에 드는데?”

그야 당연하지. 난 헬턴트 토박이니까. 네리아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나와 샌슨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너희들은 가장 위험한 계획을 좋아하는구나?”

“다른 계획이 있다면?”

“지금 당장은 모르겠어. 하지만 좀더 생각해 보면……..”

“시간 없어. 가자, 운차이, 잠깐 실례.”

그리고 샌슨은 운차이의 턱을 올려쳤다. 뻐억! 열심히 듣고 있던 운차이는 그대로 기절했다.

“네리아는 운차이를 감시해.”

샌슨은 벌떡 일어났다. 네리아는 머리를 휘젓더니 운차이를 침대에 묶기 시작했다.

샌슨과 나는 계단에서 간단히 계획을 세운 다음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홀에 내려오자마자 난 울화통이 터진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런, 빌어먹을! 도대체 되는 게 없어!”

샌슨도 이마를 짚고 쓴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휘저으며 은근슬쩍 흉터 남자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아이고, 나도 모르겠다! 그런데 화장실이 어디 있지?”

좋아, 지금이다. 난 털보에게 다가섰다.

“앗! 잠깐만.”

털보는 당황해서 날 바라보았다. 난 황급하게 말했다.

“당신 배에 파리가 있어!”

퍽! 털보는 복부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아마 배가 뚫리는 느낌이었을 거야. 내가 끼고 있는 장갑이 뭐냐? 샌슨도 흉터 남자의 어깨를 잡으며 기세좋게 외쳤다. “어? 오래간만이네?”

빡! 흉터 남자는 턱이 돌아갔다. 샌슨은 그대로 쓰러지려는 남자의 어깨를 붙잡은 채 다시 복부를 호되게 올려치고 말했다.

“야! 이거 정말 반갑네. 네놈들이 도박장에서 내 돈 떼어먹고 달아난 거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린다!”

그러자 홀 안에 있던 손님들도 사태를 파악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재빨리 외쳤다.

“이거, 사람들 많으니 방으로 가자.”

그리고 난 그 기절한 털보 남자의 뒷덜미를 들어올렸다. 여관 주인이 황급하게 달려왔다.

“이봐요, 손님들! 방에서 소란을 부리면………….”

샌슨이 재빨리 10셀짜리 은화 하나를 집어주면서 말했다.

“절대로 조용히 있지요. 만일 우리가 시끄럽다면, 그때 쫓아내십시오. 괜찮겠죠?”

여관 주인은 손바닥의 돈과 샌슨의 체격, 그리고 그 말을 번갈아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소란을 부리면 안 됩니다! 집기를 부숴도 안 되고.”

“염려 마십시오.”

칼과 이루릴은 대단히 놀란 눈으로 우릴 바라보다가 영문도 모른 채 우리 뒤를 따라왔다. 샌슨이 그 흉터 남자를 끌고 나올 때까지 난 칼에게 빠르게 설명했다. “이놈들 사기꾼들이에요. 네리아와 아는 사이인데, 네리아를 위협해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구요.”

“아, 그런가?”

샌슨도 흉터 남자를 끌고 나왔다. 기습을 당한 둘은 거의 실신 상태였다. 우리는 둘을 끌고 네리아가 기다리는 방으로 올라갔다. 네리아는 우리가 둘을 질질 끌고 들 어가는 것을 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빚을 졌네………….”

“뭔 빚.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돕고 살아야지.”

샌슨은 간단히 말한 다음 배낭에서 밧줄을 꺼내어 둘을 묶고 재갈까지 물렸다. 두 남자를 바닥에 앉히고 나서 우린 고민에 빠졌다. 이 친구들에게는 패거리가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달래서 패거리들이 우릴 공격하지 않도록 해야 될까?

네리아가 나섰다.

“음…………. 이젠 내게 맡겨.”

네리아는 둘 중 털보를 먼저 깨웠다. 털보는 눈을 뜨더니 험악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재갈을 풀어주었다.

“자, 문댄서, 내 친구들은 이렇게 세다고. 난 너희들하고 동업할 생각 없어.”

문댄서? 괴상한 별명의 그 털보는 침을 뱉더니 말했다.

・저놈들은 밤이슬 맞는 놈들이 아닌데?”

“이분들은 그런 분들이 아냐.”

“흠, 트라이던트의 네리아도 갈 데까지 갔군. 모험가 흉내라도 낼 생각인가?”

“난 열쇠 따기나 함정 해체 같은 것은 할 줄 몰라. 그건 특별히 더 미화된 열쇠 기술자이지 성실한 나이트호크가 아냐. 그리고 이분들은 보물만 있다면 산꼭대기든 땅 밑이든 찾아가는 그런 사람들도 아니고. 우린 그냥 친구야.”

문댄서는 사나운 눈길로 우릴 쏘아보았다.

“죽은 친구가 될 거야.”

샌슨이 욱 했지만 네리아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말을 못 알아듣는구나. 할 수 없지. 후치? 술 한 병만 받아올래?”

술? 갑자기 술이라니? 그 말을 듣자 문댄서의 눈빛이 순간 흩어졌다. 그는 이를 악물면서 말했다.

“난 머저리가 아냐. 그런 장난으로 날 어떻게 할 것 같아?”

“해봐야 알지. 후치. 드래곤의 숨결을 달라고 하면 돼. 그리고 컵은 다섯 개.”

뭔말이지? 어쨌든 나는 방을 나와서 홀로 내려갔다. 주인장을 불러 드래곤의 숨결을 한 병 달라고 하니까 주인장은 날 쏘아보기 시작했다.

“네가 그걸 마시냐?”

“심부름이지요. 그거 무슨 술인데요?”

“자네들 중에 그걸 마실 사람은 없어보였는데.”

“이보세요. 그게 금지 물품이라도 되나요?”

“그건 아니지. …………여기 있다. 가져가라.”

방에 돌아와 보니 문댄서라는 그 털보는 의자에 앉아 벽에 등을 대고 있었다. 네리아는 내가 가져간 술병과 컵들을 받아들더니 먼저 다섯 개의 컵을 테이블 위에 일 렬로 세웠다. 그리고 밀봉된 술병을 뜯었다.

난 현기증을 느꼈다. 진짜 냄새만 맡아도 기절할 듯한 독주였다. 샌슨도 눈을 껌벅이더니 말했다.

“후아, 이거, 레너스에서 유스네가 가져왔던 그거잖아?”

아, 그 진짜 엄청난 술? 칼과 이루릴도 어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리아는 다섯 개의 잔을 모두 채우더니 우리들 각자가 가진 대거들을 모았다. 나와 샌슨, 칼은 대 거를 가지고 있었고 이루릴은 허벅지에 묶어두었던 망고슈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네리아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대거도 꺼내었다. 네리아는 그 다섯 개의 대거들을 다 섯 개의 잔 옆에 역시 일렬로 늘어놓았다. 무슨 대거 전시회 하는 것 같은데? 네리아는 두 손을 깍지 껴서 머리 위로 들어올려 기지개를 켜고는 말했다.

“이봐. 문댄서, 여자가 필요하다는 그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여자를 구해 보면 되잖아. 너희들은 오늘 처음 날 봤어. 그냥 돌아가서 날 잊으면 되잖아.” “너 말고 다른 여자는 안 돼.”

“그래? 음, 이렇게 해. 돌아가서 날 쓰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해.”

“싫어.”

“할 수 없지. 여러분, 네리아가 재미있는 거 보여드릴게요.”

네리아는 우리에게 허리까지 숙여보이면서 인사했다. 박수를 쳐야 하나? 그 대신 우리는 네리아가 지시하는 대로 침대 위에 앉았다. 네리아는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침대에서 일어나지 말아요. 끼어들지도 말고. 이건 우리 세계의 일이니까 끼어들면 곤란해요. 알았어요?”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리아는 몇 번이나 더 다짐을 받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네리아는 먼저 테이블 위의 첫 잔을 들어 문댄서에게 건배하듯이 내민 다음 쭉 들이켰다. 오! 저 엄청난 술을 한 번에 비워? 네리아는 그것을 내려놓더니 눈을 조금 깜빡거렸다.

그러고는 대거를 들어 한두 번 위로 던지면서 무게를 살피더니 휙 집어던졌다.

“아악!”

이루릴의 낮은 비명. 대거는 날아가서 문댄서의 왼쪽 귀 옆에 꽂혔다. 손가락 한두 마디 정도 차이일까? 우리는 모두 기겁해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말했 다.

“포기해.”

문댄서는 전혀 흔들림 없는 태도였다.

“안 돼.”

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두 번째 잔을 들었다. 이거 말려야 되는 것 아닌가? 네리아는 역시 단숨에 잔을 비우더니 이번엔 두 손으로 얼굴을 확 감쌌다. 그녀 는 손가락 사이로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욱. 역시 세네………….”

그리고 네리아는 두 번째 대거를 들어올렸다. 역시 한두 번 공중으로 던졌다 받았다 하면서 균형을 살펴보더니 그대로 집어던졌다. 문댄서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이 번에는 그의 오른쪽 귀 옆에서 한 마디쯤 떨어진 벽에 꽂혔다.

“포기해.”

“안 돼.”

네리아는 별로 신경 쓰는 투도 아니었다. 그녀는 문댄서의 대답을 듣자마자 세 번째 잔을 들어올려 그대로 비웠다. 그녀의 입술에서 턱을 타고 술이 가늘게 흘러내렸 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는 한두 번 휘청거렸다. 그녀는 테이블 모서리를 쥐고 거칠게 숨을 쉬더니 머리를 심하게 흔들며 다시 똑바로 섰다. 칼이 도저히 참지 못하 고 일어났다.

“네리아 양!”

“뒤에서 말하지 마! 죽일 거야!”

거침없이 터져나온 폭언에 칼은 굳어버렸다. 그것은 울부짖음이었다. 네리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세 번째 대거를 들어올렸다. 그것은 이루릴의 망고슈였다. 네리아는 그것을 한두 번 던졌다. 이번엔 그녀가 그것을 놓쳤으며 망고슈는 아래로 떨어져 네리아의 발 앞에 똑바로 꽂혔다. 네리아는 히죽 웃었다.

“칼날이 좋네……”

네리아는 그것을 뽑아들다가 망고슈가 쉽게 빠져버리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코코!” 그녀는 씩씩거리며 의자를 잡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크게 심호흡 을 하고 다리를 벌린 다음 팔을 뒤로 당겼다. 그때 문댄서가 말했다.

“포기하지.”

“난 맺고 끊는 게 확실한 남자가 좋더라.”

네리아는 해죽 웃더니 비틀거리며 문댄서에게 걸어갔다. 네리아는 문댄서의 뺨에 키스해 주었지만 문댄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질린 표정으로 네리아 와 문댄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문댄서는 별로 표정의 변화도 없이 시무룩한 얼굴이었고 네리아는 다시 비틀거리며 돌아와 의자에 주저앉으며 자기가 들고 있던 세 번째 컵을 칼에게 내밀었다.

“칼 아저씨. 고함 질러서 미안해요.”

칼이 거의 무의식중에 그것을 받아들자 네리아는 술을 채워주었다. 칼은 문댄서를 한 번 보고, 네리아를 한 번 본 다음, 고개를 흔들고는 잔을 그냥 비워버렸다. “흠, 좋군…….”

그리고 칼은 그대로 졸도해 버렸다. 칼은 네리아가 아니니까 저걸 한 번에 비운다는 것은 무리가 있지. 칼은 침대에 쓰러진 다음 그대로 완전히 잊혀진 인물이 되었 다.

네리아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네 번째 잔을 이루릴에게 건네었다. 이루릴은 그것을 받아들지 않고 네리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이 대거를 잘 던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술을 마신다는 것은 실수를 하겠다는 뜻인 것 같은데요?”

“그래요.”

“죽어도 상관없다는 의미였어요?”

“그건 저 친구의 판단이죠. 자기가 죽어도 상관없다면 계속 버텼을 테고, 목숨이 귀하다면 포기하는 거죠. 내가 선택하는 것은 아니죠. 난 상황을 만들 뿐.”

“생명과 의지, 둘 중에 하나를 강제로 선택하도록? 하지만 그것은 상대의 자유?”

“정확하네요.”

이루릴은 술잔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얌전히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눈을 심하게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후우우, 헉, 헉. 이거 너무 독해요오오오…….”

“효과가 빠르죠.”

이루릴은 상체를 흔들거리며 흐느적흐느적 말했다.

“……당신은 후치와는 또다르은 의미에서, 후우, 친구를 만드는군요오오. 후우, 강제적인 서언태액의 요구우. 인간이라안, 이해하기 어려어어…………

네리아는 그런 이루릴을 보더니 배슬배슬 웃으며 다섯 번째 잔을 샌슨에게 내밀었다. 샌슨은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네리아는 빈 잔 두 개에 술을 채우더 니 나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아까 들어보니 너 이걸 마셔본 모양이더라?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주는 술이지.”

난 그것을 받아들었지만 별로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네리아는 잔을 들더니 베란다 쪽으로 나갔다.

“바람이나 쐬자…………. 혼자 있게 해줘.”

그리고 네리아는 베란다 쪽에 가서 난간에 팔꿈치를 괴었다. 난 내 손에 들린 잔을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문댄서를 보았다. 문댄서는 베란다 쪽을 노려보고 있 었다. 난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한잔 할래요?”

“놔주기나 해.”

“확실히 포기한 것 맞지요?”

“저 여자가 저렇게 믿는 것 보면 모르겠냐?”

“좋아요.”

난 술잔을 내려놓고 한손에 바스타드를 뽑아들고 다른 손으로만 문댄서의 밧줄을 풀어주었다. 문댄서는 손목을 문질렀다. 난 거리를 좀 두고 말했다.

“저 남자 밧줄은 당신이 풀어요.”

문댄서는 흉터 남자의 밧줄을 풀었다. 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쾅 닫은 다음 나가버렸다. 남은 것이라곤 바닥에 흩어진 밧줄과 벽에 꽂혀 있는 두 개의 대거뿐 이다. 정확히 사람 머리 하나 들어갈 정도의 간격.

난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거를 뽑았다.

돌아보니 샌슨은 잔을 비우고 있었고 이루릴은 몸을 휘청거리면서 칼을 편히 눕히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루릴은 칼의 다리를 들어올리다가 놓치고 침대에 코 를 박는 등 악전고투중이었다. 내가 걸어가서 칼을 똑바로 눕히자 이루릴은 방긋방긋 웃으며 테이블에 놓아둔 자기 잔을 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핥으면서 말했다.

“음냐, 지이인짜 도옥해요. 하아아………….”

“괜찮겠어요?”

“그래에도 차암, 맛있어요오오.”

그리고 이루릴은 잔을 들고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난 그녀를 부축했다. 이루릴은 해죽해죽 웃으며 말했다.

“우리 바앙에 좀 데려다줘요오오.”

그렇잖아도 그럴 생각이었어. 난 그녀를 부축하여 우리 방 바로 옆에 있는 그녀와 네리아의 방에 데려다주었다. 이루릴은 그 동안에도 홀짝거리면서 술잔을 비워대 더니 침대에 앉자마자 모로 쓰러져 잠들어버렸다.

우리 방에 돌아와보니 샌슨은 다시 자기 잔을 따르고 있었다. 난 그의 옆에 앉아서 내 잔을 들었다.

“정말 강한 술이다.”

“나도 좀 마셔볼까?”

난 잔을 코 앞에 가져와 그 냄새를 맡은 다음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천천히, 향을 즐기면서. 네리아는 술을 마실 줄 몰라. 좋은 술은 세 단계로 마시는 법. 먼저 코 앞에서 향을 즐기고, 입에 머금어 미각을 즐기고, 마지막으로 목구멍에서 넘길 때의 감각을 즐긴다……… 고 칼은 얘기했다. 그렇게 말한 주제에 벌컥 마시고 뻗어 있다 니. 난 피식 웃었다.

“세긴 세네.”

샌슨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대거를 보며 말했다.

“도둑이라는 직업에도 윤리관이 있을까?”

난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글쎄? 뭔 직업엔들 규칙이 없겠어. 다른 사람 보기에 좀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일반론, 일반론.

“그럴 거야. 음. 포기한다고 한마디 하니까 그냥 놔주는군.”

“문댄서나 네리아나 둘 다 풋내기가 아닌가 보지. 자기 말에 책임을 져야 되는 인물.”

보편적, 보편적. 참 재미없는 말이군. 하지만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 된다.”

난 베란다 쪽을 보았다. 네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어? 네리아 어디갔어?”

“응. 조금 전에 공중제비를 넘더니 옆의 베란다로 넘어갔어.”

“헤에. 술 마시고 공중제비?”

“깔끔하게 넘어가던데.”

샌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난 갑자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난 입을 쩍 벌리고 샌슨을 바라보았다.

“아……! 그럼?”

샌슨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까 취한 척한 것은 연극이었지. 그 여자 정말 술 세군.”

이루릴은 우리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녀는 어젯밤에 그 드래곤의 숨결인지 트림인지를 마셔서 좀 피곤한 상태였다. 오늘 아침엔 네리아가 그녀가 죽은 줄 알고 기겁하는 소동도 있었다. 알고 보니 그녀 는 술에 완전히 취해 버려 아무런 감각도 없이 호흡을 매우 느릿하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네리아가 그녀를 들춰업고는(그래도 다리가 질질 끌렸다.), 욕탕으로 들어간 지 한 시간 만에 이루릴은 간신히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루릴은 인간처럼 푸스스해지거나 속이 뒤집히거나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그런 식의 숙취는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대신 평소에 보기 힘든 좀 피곤해진 모습을 보 여주고 있었다. 레너스 시의 지하 감옥에서 그 고생을 했을 때도 단정하고 침착하던 모습이었던 그녀가 그 술 한 잔에 이토록 피곤한 모습을 보이다니. 음, 정말 엄청 난 술이다.

“두 주 후에 뵐게요.”

“조심하세요. 그리고 부탁 하나 할게요. 조심하세요.”

이루릴은 내 농담에 방긋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운차이에게도 손을 내밀었으나 운차이는 본체만체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네리아가 눈썹을 곤두세우며 험악한 표정 을 지었지만 이루릴은 오히려 고개를 꾸벅이며 사과했다.

“아, 불쾌하게 해드려 죄송해요.”

그러고 나서…………, 그녀는 우리들의 말에게도 인사를 시작했다. 우리는 미소 이외에는 합당한 표정이 없어서 미소를 지은 채 그 광경을 구경했다. 이루릴은 말들의 콧 등을 쓸면서 말했다.

“슈팅스타, 광활한 황야의 노예. 이 돌의 도시는 네게 갑갑하겠지만 주인을 잘 모셔요. 트레일, 끝까지 걷는 끈기 있는 구도자. 네 주인의 중요한 임무를 잘 헤아려 성심 성의껏 보필하렴. 제미니, 쾌활한 주인을 좋아하지? 넌 주인과 함께라면 어디서든 행복하겠지. 앰뷸런트 제일, 사랑하는 주인과 헤어지겠지. 유피넬께 다시 만나 게 해달라고 기원해요. 에보니 나이트호크, 패할 수 없는 용맹의 화신. 그래서 오히려 아름다운 숙녀에게 항복한 너. 넌 유니콘을 닮았구나.”

오. 우리 말들이 그렇게 대단한가? 말들은 이루릴의 말을 알아듣는 건지 얌전히 이루릴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가장 사납고 거친 에보니 나이트호크도 얌전히 이루릴이 쓰다듬는 대로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루릴은 자신의 말 래셔널 셀렉션의 콧등을 쓰다듬었다.

“래셔널 셀렉션. 난 돌아와요. 나와 함께했던 시간이 즐거웠다면, 날 기억하고 기다려줘요.”

“푸르릉, 히힝, 히힝힝힝!”

놀라워. 자기 주인을 닮았는지 우리 말들 중 가장 조용하고 온화한 말 래셔널 셀렉션이 갈기를 마구 휘저으며 이루릴에게 대답하듯이 머리를 움직였다. 래셔널 셀렉 션은 이루릴의 말을 확실히 알아듣는 모양인데?

그리고 이루릴은 말들에 대한 인사도 마치고 우리에게 돌아왔다.

“그럼, 귓가에 햇살을 받으며 석양까지 행복한 여행을.”

우리들 중 칼이 대표로 대답했다.

“웃으며 떠나갔던 것처럼 미소를 띠고 돌아와 마침내 평안하기를.”

그리고 이루릴은 가볍게 몸을 돌려 바이서스 임펠의 중앙 대로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볍게, 마치 바람을 밟아가듯이. 그녀는 걸을 때 다리를 쭉쭉 뻗는다. 그 렇게 이루릴은 바이서스 임펠 시민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멀어져 갔다.

“자, 우리도 가볼까?”

칼의 말에 따라 우리는 말에 올랐다. 먼저, 이루릴과 작별하기 위해 데리고 나왔던 래셔널 셀렉션을 여관의 마구간에 도로 데려다놓은 다음 우리는 도시 중심가로 들 어섰다.

가게들이 밀집한 장소에서 우리는 옷가게를 찾았다. 칼은 네리아에게 말했다.

“네리아 양. 골라보시겠습니까? 네리아 양이 돈을 돌려준 덕분에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옷 한 벌쯤 선물하는 것 어렵지 않아요.”

“헤에, 칼 아저씨도. 자꾸 부끄럽게 하시네. 전 옷 필요없어요. 응응, 여러분은 이대로 왕궁에 가실 거죠?”

“그렇소.”

“전 왕궁이라면 두드러기가 나요. 돌아다니면서 일거리나 찾아볼래요. 축제라서 일거리 찾는 게 쉬울지 모르겠네. 오래간만에 수도에 왔으니 친구들도 만나보 고…………… 밤에 여관에서 봐요.”

“아, 예. 편하실 대로.”

그리고 네리아는 그대로 에보니 나이트호크를 걷게 했다. 흠. 네리아도 정말 이루릴만큼이나 이목을 집중시키는군. 네리아는 엄청난 흑마에 올라타고 등에는 희귀한 창 트라이던트를 걸쳐 메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가죽 갑옷도 입지 않고 그냥 편한 대로 걸친 남자 셔츠라 가냘픈 몸매가 더욱 두드러진다. 에보니 나이트호크 위에 있다면 어차피 커 보이긴 힘들겠지만 더 작아 보이는 것은 간단하지. 주위의 시민들은 탄복한 눈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킥킥. 네리아가 에보니 나이트호크를 고 른 건 오로지 팔아먹을 때 비쌀 거라는 이유에서였지?

우리는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딸랑딸랑.

“어섭셔!”

쾌활하고 싹싹한 주인이 우릴 맞이했다. 주인은 산더미 같은 옷 속에서 헤엄쳐 나오듯이 하면서 우리 앞에 나섰다. 칼은 우리에게 말했다.

“마음에 드는 걸 골라보게. 하지만 우린 예절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 간다는 것을 명심하고.”

난 잠깐 고민한 다음 검은 셔츠와 검은 바지, 그리고 검은 재킷을 골랐다. 검정색은 때가 안 타니까. 우히히. 아무리 궁궐에 들어가기 위해 구입하는 옷이라 해도 옷 이 한 번 입고 말 물건인가? 칼도 원래 점잖은 옷이라 회색 망토 하나만 골랐다. 그런데 문제는 샌슨이었다.

“어, 팔이 안 들어가는데?”

“윽, 목이 좁아.”

“수, 숨 막혀서…………. 이건 안 되겠는데?”

샌슨의 팔에 달려 있는 좀 끔찍스러울 정도의 이두박근 때문에 웬만한 옷의 소매에는 팔이 들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머리는 별로 크지 않지만 목 둘레에 뭉쳐진 승모 근 때문에 목구멍이 맞는 것도 없었다. 게다가 삼각근은 왜 저렇게 발달했는지 가슴 둘레는 웬만한 여자도 못 따라올 지경이다.

“손님, 도대체 지금 입고 계신 옷은 어디서 구했습니까?”

“이거요? 우리 영주님 지급품이죠.”

“그쪽 영주님은 덩치가 얼마나 크시길래?”

“아, 아뇨. 우리 경비 대원들이 모두 덩치가 좋아요.”

하긴 그렇지. 우리 고향에 가면 샌슨보다 더 큰 해리 같은 경비병도 있다. 그래서 경비병 제복은 모두 보통 사람의 두 배에 가까운 옷감이 든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 하다. 체격이 빈약하고 약한 경비병은 오래 못 살아남는다.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설령 그런 사람이 들어와 살아남는다 해도 끔찍 한 현실과 치열한 훈련 때문에 몸에 근육이 엄청나게 달린다.

“손님은 천생 옷을 맞춰 입어야겠군요. 점잖은 옷을 찾으신다고 했죠? 점잖은 옷에는 그렇게 커다란 옷이 없습니다. 모험가들이나 입을 옷이나 작업복 등에는 그렇 게 큰 것도 있습니다만.”

칼은 고민했다.

“어쩌지?”

“뭐, 상관없습니다. 칼. 전 경비 대원이니까 경비대 제복이 정복이죠.”

“……국왕 전하 앞에서 갑옷을 걸칠 수 있는 것은 국왕 전하의 근위병이 아니라면 전장에서뿐이네.”

“그런가요? 그럼 가죽 갑옷만 벗죠.”

그럼 그냥 셔츠 차림인데. 칼은 간단히 해결했다.

“망토 큰 거 하나 주시오.”

그래서 샌슨은 셔츠 위에 망토를 두른, 좀 희한한 모습이 되었다. 하지만 근사한 체격이 있으니 그렇게 걸쳐놔도 보기 흉하지는 않았다. 운차이는 우릴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번쩍번쩍하는군. 이제 날 진상할 준비가 다 된 건가?”

샌슨은 턱을 쑥 내밀면서 말했다.

“네가 무단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그 따위 쓰레기 같은 짓을 할 때부터 너에게 배정되었던 장소로 데려갈 준비가 끝난 거다. 억울하다는 식으로 말하진 마.” 아니! 저렇게 긴 말을 하다니! 운차이는 잇소리를 내었다.

·별로 할말은 없다.”

“그럼 가지.”

우리는 궁성으로 용감하게, 대책 없이 찾아갔다. 용감한 건 샌슨이고 대책이 없는 것은 나다. 칼은 우리에게 어떤 행동을 주의하라든가 무슨 말을 하라든가 하는 이 야기를 전혀 해주지 않았다. 이것, 참.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집으로 갈 때는 도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 거지?

길가에 주욱 늘어선 그 불장대는 모두 둥근 구 모양으로 닫혀 있었다. 아마 우리가 낮에 왔더라면 왜 거리에 장대를 세우고 쇠공을 얹어놓았는지 이상하게 여겼겠지. 대로에 사람들은 또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정신이 하나도 없군. 하지만 아가씨들은 모두 참 예뻐!

성이 보였다.

이미 도시를 둘러싼 훌륭한 외성이 있는데도 궁성은 전투용 성이었다. 그러니까 궁전이라든가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첨탑과 해자, 도개교, 높은 석벽과 총안. 어느 산꼭대기나 험악한 고개 등에 세워놔도 손색이 없을 모양이었다. 규모가 상당히 크긴 했지만. 난 칼에게 물었다.

“이상하네요. 국왕의 궁전이라면 그냥 아름답게 만들어도 될 텐데 왜 이렇게 전투용 성처럼 만들어뒀죠? 우리 영주님 성보다 더 전투적이네요?”

칼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루트에리노 대왕은 뼛속까지 무골이었으니까. 핸드레이크가 그것 때문에 골치가 많이 아팠다더군.”

“그래요? 흠. 그래도 이건 정말…….”

웃기는 노릇이다. 난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이 도시 바깥에 벌써 엄청난 장벽이 있지 않은가? 그것을 돌파할 정도의 적이라면 이 성으로 뭘 막겠는가. 칼은 말했다.

“좋은 의미도 있지. 저 성은 국왕이 기사도의 제1수호자라는 것을 상징하거든. 루트에리노 대왕의 명언이 있지. 기사들은 추운 북풍 맞아가며 성 위에 서고, 기사 중 의 기사, 만인의 종복인 국왕은 궁전의 비단 쿠션 위에서 뒹굴면 개도 웃을 노릇이라고 하셨네.”

샌슨은 그 말을 듣고는 엄청난 감동을 실은 눈길로 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난 여전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품위라든가 위엄 같은 문제도 있을 텐데요? 나라의 국민이 모두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바보 같은 왕 아닐까요? 완전 무골인 국왕을 원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위엄 있는 국왕을 원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 그걸 다 포용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칼은 대견하다는 얼굴로 날 보며 말했다.

“바로 그것 때문에 핸드레이크가 골치 아팠다는 걸세. 하지만 핸드레이크의 조언이라면 벌거벗고 바이서스 임펠을 달리는 일이라도 세 번쯤은 생각해 보고 나서야 반대하겠다던 루트에리노 대왕도 그 일에서는 고집을 피우고는 궁전 대신 궁성을 세웠다더군.”

“흠.”

“그리고, 사실 나쁘지는 않아. 국왕 전하께서 저렇듯 성에 살고 있으니 그 아래 신하들이 무슨 배짱으로 화려한 집을 짓고 호화로운 별장을 짓겠는가?”

“그건 맞군요. 괜찮네요.”

어쨌든 루트에리노 대왕 덕분에 궁성 임펠리아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 고향의 영주 저택을 찾아가는 것만큼이나 평범한 일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도개교를 따라 들어 가자 궁성 수비대로 짐작되는 인물들이 우릴 막아섰다.

“이곳은 국왕의 성 임펠리아입니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칼이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안으로 연락해 주시오. 국왕의 드래곤 캇셀프라임의 일을 보고드리러 헬턴트 영지에서 사람이 왔다고.”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우리는 도개교 위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몇 명의 무관들을 동행한 남자가 나왔다. 수도 경비대나 궁성 수비대 모두 화려한 플레이트를 입고 있었지만 지금 나온 남자는 간단한 푸른 무늬의 흰색 무 관 제복을 입고 있어 대단한 인물로 생각되었다. 우리는 어쩔까 하다가 말에서 내렸다.

그 남자는 반백의 머릿결과 그와 잘 어울리는 반백의 수염을 가진 늙은이였으나 아직 꼿꼿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궁성 수비대장 조나단 아프나이델입니다. 귀하들은?”

아프나이델? 어? 샌슨과 난 동시에 서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칼은 선선히 품에서 서류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조나단 아프나이델이라는 이름의 궁성 수비 대장은 서 류를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헬턴트 영지의 전권 대리인이라. 그렇군. 아무르타트라는 블랙 드래곤 때문에 할슈타일 가의 캇셀프라임을 요청한 그 영지군요?”

“그렇습니다.”

“따라오시죠. 보고는 먼저 국왕 전하께 드려야 하니까.”

오, 칼의 말이 맞군. 국왕 전하의 드래곤이라는 이유로 그냥 일사천리인데? 우리는 조나단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조나단은 궁성 수비 대원에게 지시하 여 우리 말들을 마구간에 데려가도록 했다.

성의 마당으로 들어가니 그래도 국왕의 집다운 맛이 느껴졌다.

마당은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길에는 포석이 깔려 있었고 그 외의 지대는 모두 잔디와 풀이 돋아 있었다. 관목과 정원수들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밖에서 보 던 것과는 딴판이군. 무엇보다도 많은 나무와 꽃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본성 건물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 덩굴에서부터 성벽 곳곳에 서 있는 나무들과 만발한 꽃 들이 퍽이나 아름다운…………….

잠깐! 꽃이라고? 이 가을에?

샌슨과 나는 다시 서로 쳐다보았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 계절에 꽃이 피어 있는 것이지? 여기가 별로 따뜻하거나 특별한 기후인 것은 아닌데?

우리는 그게 무지 묻고 싶었지만 칼이나 조나단 모두 엄숙하게 걸어가고 있어 우리 같은 졸병들이 뭐라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기회가 되면 물어보기로 하고 꾹 참고서 걸어갔다. 칼은 도중에 조나단에게 말했다.

“궁성에 감옥이 있을까요? 어떻게든 감금 시설이면 됩니다.”

“무엇 때문이십니까?”

“저희가 호송해 온 인물은 자이펀의 간첩입니다.”

조나단의 얼굴이 크게 바뀌었다. 그는 황급히 운차이를 돌아보았다.

“저자가……?”

“그렇습니다.”

“아, 그럼 저자의 신병을 일단 구속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운차이는 궁성 수비 대원들에게 끌려갔다. 흐음, 드디어 안녕이군. 조금 씁쓸한 것 같기도 하다.

운차이는 끌려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본성 건물의 입구에 도달하자 조나단은 뒤로 물러났고 대신 다른 인물이 나타나서 우릴 맞이했다. 그는 궁내부장 리핏 트왈리전이라는 사람으로, 궁내부장은 말하자 면 우리 영주님 저택의 하멜 집사 같은 일을 담당하는 사람인가 보다. 그는 우리들을 응접실로 데려가 앉히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말했다.

우린 그렇게 궁성의 응접실에 앉아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주위는 모두 하얀 벽이다. 벽에는 장식 삼아 방패와 검 등이 걸려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먼지 한 톨 떨어져 있지 않다. 청소를 잘하나 보지. 가운데에는 우리 엉덩짝 을 가져다대기 황송스러울 정도의 소파들이 둥글게 놓여 있었다. 화려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우린 어차피 땅바닥에서 뒹굴던 몸이라 소파라면 좀 떨떠름한 것이다. 잠시 후 시녀로 짐작되는 인물이 얌전히 나타나더니 뭘 드시겠냐고 물어보았다. 골치 아프네. 맥주 한 잔! 이렇게 말하면 웃길 텐데. 샌슨은 잔뜩 긴장했는지 무의식 적으로 말했다.

“맥주 있어요?”

…………미치겠다. 시녀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샌슨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전하를 알현하러 오신 손님들 아니신가요? 술을 드시고 알현하실 생각이십니까?”

“아, 아차! 실수. 물이나 주세요.”

시녀는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주스를 부탁했고 칼은 여전히 그 괴상한 커피를 주문했다. 저걸 마실 수 있다니, 칼은 정말 존경해도 괜찮을 거룩한 인물이야. 마침내 거룩하신 물 한 잔과 주스 한 잔과 커피가 다 비워져버렸고 우린 몸이 근질거려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음. 인내, 인내를 배우자. 아무리 심심해도 지금 샌슨 이 하는 것처럼 컵을 빙빙 돌려본다든가 하는 저런 추태를 부려서는 안 된다. 이윽고 리핏 트왈리전이라는 그 궁내부장이 다시 나타났다. 샌슨은 허둥거리다가 컵을 떨어뜨릴 뻔하고는 얼굴이 빨개졌다.

“절 따라오십시오.”

복도를 따라 걸으니 정말 위압스러웠다. 천장이 왜 이리 높지? 바닥에 깔린 카펫은 또 왜 이리 푹신푹신하고 벽에 늘어선 창문들은 또 왜 이리 큰지. 흠. 이윽고 우리 는 어떤 방문 앞에서 멈춰 섰다. 리핏 트왈리전이 먼저 방문을 노크했다.

“들어와요.”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리핏 트왈리전은 옆으로 물러났다. 뭐지? 우리가 문 열고 들어가란 말인가? 아무래도 그런 뜻인 것 같아서 칼은 문을 열었다.

우리는 방 안에 들어섰다.

방에는 벽이 없었다. 벽 대신 전부 책장이었다. 아무래도 무슨 서재인 것 같은데? 가운데는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한쪽엔 책상이 있었다. 빛이 들어올 곳이 없는데도 안은 환했다. 천장을 보니 천장이 빛을 내고 있었다. 임펠 리버의 그거나 거리의 불장대처럼 마법을 걸고 영구화시킨 모양이다.

책상 귀퉁이엔 한 남자가 걸터앉아 있었다.

무명 셔츠에 무명 바지. 위 아래로 통일이 잘된 옷을 입고 있는 그 젊은이는 대략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잿빛 머리카락의 그 남자는 그때까지 책을 읽고 있었던 모양인지 우리가 들어가니 책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그대로 책상 귀퉁이에 앉아 다리를 흔들면서 우릴 바라보았다.

칼은 잠시 당황한 듯 그 남자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남자도 똑같이 멀거니 칼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 남자가 먼저 자기 머리를 딱 쳤다.

“아, 실례. 거기들 앉으시죠. 미안해요.”

우리는 일단 시키는 대로 앉았다. 그 남자는 책상에서 풀쩍 뛰어내리더니 이젠 우리 맞은편의 소파 귀퉁이에 앉았다. 귀퉁이를 참 좋아하나 보군. “날 만나러 오셨다고요?”

순간 칼은 고슴도치라도 깔고 앉은 듯이 벼락치듯 일어났다.

“저, 전하. 에, 처음 뵙겠습니, 아, 아냐.”

“어? 어, 그럼 의미가 없어요.”

“예?”

“여러분들을 서재로 불러들인 의미가 없잖아요.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려 했는데.”

아이고 맙소사!

저, 저분이 우리 국왕이야? 샌슨과 나도 튕겨나듯이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길시언과 비슷하기는 하다. 아니, 길시언을 어디 도서관 같은 곳에 가두고 한 3년쯤 묵혀 두면 저렇게 될 것 같다. 국왕 전하께서는 멀뚱히 우릴 보더니 황급히 손을 저어 우리를 앉혔다.

“앉아요, 앉아요들.”

“저, 전하, 에, 그러니까………….”

무릎을 꿇어야 되겠는데 앞에는 테이블 때문에 방해가 되는군. 그러면 소파 뒤로 돌아가야 되나? 우리가 허둥거리자 국왕은 아주 간단히 우리 문제를 처리하셨다. “앉아요. 어명이오.”

“옙.”

우린 일어났을 때와 거의 비슷한 속도로 주저앉았다. 국왕 전하께서는 콧잔등을 긁적거리시며 말씀하셨다.

“나 국왕 닐시언 바이서스입니다. 그쪽은?”

“칼 헬턴트, 헬턴트 영주 대리이자 전권 대리인입니다.”

“샌슨 퍼시발, 헬턴트 경비 대장입니다.”

“후치 네드발, 헬턴트 초장이 후보입니다.”

“예?”

“아, 아니, 헬턴트 시민입니다.”

“아, 예. 그렇군요.”

닐시언 전하께서는 머리를 갸웃하셨고 난 궁성에도 쥐구멍이 있을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있다면 들어가고 싶은데. 닐시언 전하는 두 손을 모아 손가락을 부딪치며 말씀하셨다.

“캇셀프라임에 대한 이야기를 가져오셨다고요?”

칼은 심호흡을 하고는, 앉아서 이야기하니 너무나도 송구스럽다는 태도로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예. 지극, 지존, 지고, 지인, 지애로우신 우리의 국왕 닐시언 바이서스 전하께서 그 어린 백성이자 나날이 우리의 국왕 닐시언 바이서스 전하를 흠모하는 정을 되새 기는 헬턴트 영지의 주민들이 극악, 간교, 포악, 잔혹, 무도한 창조의 실패물 블랙 드래곤 아무르타트의 부적합하며 몰가치적이며 무목적이며 야수적이며 비탄스러운 폭력에 의해 그 지극, 지존, 지고, 지인, 지애로우신 우리의 국왕 닐시언 바이서스 전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사………….”

닐시언 전하는 고귀하신 하품을 하신 다음 말씀하셨다.

“오늘중엔 끝납니까?”

“예?”

“아, 혹시 내일까지 계속된다면, 내일 일정을 좀 조절해야겠군요.”

불쌍한 칼은 그만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닐시언 전하는 두 손을 깍지 껴 뒤통수를 받치고는 소파에 기대었다.

“간단히 말해 주십시오. 그것도 어명으로 할까요?”

“예. 캇셀프라임은 아무르타트에 패했고 휴리첼 백작은 아무르타트에 포로로 잡혔습니다.”

“……차라리 긴 게 나을 뻔했군. 젠장.”

아아아니! 젠장이라니? 지금 전하께서 ‘젠장’이라고 하셨잖아?

“골치 아프군. 캇셀프라임을 써먹을 곳이 있었는데. 흠, 용건은 그게 답니까?”

“예?”

“내가 불같이 진노했고, 당신은 용서를 빌었고, 그래서 은혜로운 내가 용서했다고 기록해 두면 되겠죠?”

“예, 예?”

“없다면, 이만.”

그리고 닐시언 전하는 소파 귀퉁이에서 일어나 또 다른 귀퉁이, 책상 귀퉁이로 옮겨갔다.

이거 뭐야? 사람 무시하는 건가? 아, 그러고 보니 정식으로 접견실로 불러들이지 않고 이렇게 서재로 불러들인 것 정말 괘씸한데? 젠장! 우리가 고작 서재에 불려와 이런 취급이나 받으려고 새옷 사입고 가슴 두근거리며 왔나? 난 그렇지 않아도 아직 길이 들지 않아 거북한 옷을 확 벗어던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우릴 뭘로 취급 하는 거지? 아무리 국왕이라 해도………….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세상에서 그 ‘아무리’라는 말이 절대로 붙을 수 없는 사람이 국왕이긴 하다. 난 어금니를 사리물며 꾹 참았다.

칼은 당황해서 말했다.

“아, 그 외에도 보고드릴 일이·

“뭡니까?”

“저, 저희들은 이 성스러운 성도로의 복된 여행 도중 모처에서 벌어진 어떤 불민한 사태에 봉착하여 그 사건의 배후를 조사하던 중, 국왕 전하께 크게·

“짧게 하시오. 어명이오.”

“간첩을 잡았습니다.”

닐시언 전하의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그건 좀 길게 말해 봐요. 하지만 궁정 사집관들이나 좋아하는 그런 수식어는 빼고.”

칼도 이젠 조금씩 얼굴에 안 좋은 기색을 띠고 있다.

거창한 환영식을 기대하며 그 먼 거리를 달려온 것은 아니지만 이건 도대체 뭐냐? 백성으로서 나라의 가장 큰 어른께 어려움을 말하러 왔는데 자기가 필요한 말만 듣겠다는 식의 저런 태도는 뭐지? 최소한의 관심을 보여주며 그대들의 어려움을 가슴 아파한다는 식의 말 정도는 해줄 수도 있는 것 아냐? 그게 어렵나? ‘이러이러하 게 기록해 두면 되겠지? 그럼 이만.’, ‘그건 좀 들어야겠다. 길게 해봐.’라고?

그러고 보니 서재로 불러들인 것 생각할수록 정말 기분 더럽군. 칼은 헬턴트 영지의 전권 대리인이다. 헬턴트 영지는 국왕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가지지만, 그러므로 국왕은 헬턴트 영지에 대해 그 충성에 합당한 명예로운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뭐야, 이건?

칼은 되도록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태도로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는 아무런 감상도 없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었고, 그 일들을 같이 겪었던 나에게도 낯설게 들릴 정도였다. 우리가 그랬나? 흠, 왜 그랬지? 이런 생각이 자 꾸 들었다. 특히 50명의 꼬마를 맡게 된 펠레일의 이야기는 너무나 가식적인, 마치 못된 귀족들이 고아들 끌어모아 자칭 후견인이 되는 그런 이야기로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하지만 그건 그런 게 아니었어. 그걸 그런 식으로 말할 순 없어.

여기가 다른 자리였다면 나나 샌슨은 벌써 몇 번은 끼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칼은 국왕 전하께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니만큼 끼어들 수가 없었다. 비록 여기는 서재 고, 국왕 전하는 우릴 ‘공식적’으로 만나줄 생각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똑같은 사람이 되긴 싫다. 쳇!

이윽고 칼은 그 보고서를 전하에게 건네주었다. 전하는 그것을 빠르게 읽어내렸다.

“굉장하군요! 그런데 혹시 실험 개요서나 설명서는 없습니까?”

실험 개요서? 설명서? 내 옆에 앉아 있던 샌슨이 꿈틀하는 것이 잘 느껴졌다. 칼의 얼굴에서는 엄청난 혐오감이 드러났다.

“……아쉽게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굳어버린 칼의 얼굴을 보던 닐시언 전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 혹시 내가 그 세이크럴라이즈를 흉내내어 보고 싶어한다고 생각하진 마십시오. 증거가 뚜렷해야 자이펀을 공박하기 쉽지 않겠습니까? 증거가 불확실하면 허튼 소리다, 흑색 선전이다라는 말을……”

말 돌리기는. 지금 칼의 눈빛은 거의 운차이의 살기 어린 눈빛에 맞먹을 정도였다. 닐시언 전하는 그 눈빛에 움찔했다. 칼은 나직이 점잖은 그 어투 그대로 말했다. “……자이펀을 공박하기에 앞서 칼라일 영지의 주민들의 비극에 대해 먼저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닐시언 전하의 얼굴에 눈에 띄게 당황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칼은 조용한 어투로 못박듯이 말했다.

“물론, 하해로운 성총의 힘입음으로 칼라일 영지의 비극은 역사의 장에서만 취급되는 비극으로 탈바꿈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어렵군. 닐시언 전하는 헛기침을 좀 한 다음 말했다.

“그 영지에 대해서는, 강구될 수 있는 모든 조력이 함께할 것입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칼은 온화한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상대를 기분좋게 하는 온화함은 아니었다. 상대가 개라고 해도 난 인간처럼 굴겠다는 식의 온화함이었다. 어쨌든 칼의 이야기는 계속 진행되어 이윽고 갈색 산맥에서 길시언과의 만남까지 접어들었다. 닐시언 전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길시언? 그 모험가는…………….”

칼은 아무런 표정도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가면 같은 얼굴로 말했다.

“전하의 형님이라고 주장하더군요.”

“………다 아는 모양이군. 계속하세요.”

칼은 계속 무감각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길시언이 암살자들에게 쫓기는 바람에 우리가 죽을 뻔한 그 이야기도 칼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칼은 ‘암살자들’이라는 말 대신 ‘정체 불명의 괴한들’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칼의 태도는 마치 그것이 무슨 산적들의 습격 정도로, 그 배후나 음모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도 전혀 없는 하찮은 사건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하지만 닐시언 전하는 바보가 아니었다.

“암살자군요.”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국왕 전하 만세!’라고 했다면서요?”

“한 개인이 죽을 때 무슨 말을 할지는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어쩌면 그자는 평소에 만인을 두루 살피시는 전하의 덕을 남몰래 흠모해 왔기 때문에 그 죽음의 순간에 전하의 만세를 기원한 것일 수도 있지요.”

칼은 그야말로 냉기가 묻어나는 어투로 말했다. 닐시언 전하는 결국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입술 끝을 올렸다.

“내가 당신들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저는 전하의 성은에 힘입어 술 빚고, 빵 사며, 책을 읽는 독서가입니다. 전 그것을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엄격히 정의한다면 그것은 이 나라 바이서스에 대한 사 랑이겠죠. 그러나 전하께옵서는 바이서스라는 이 국가를 개인으로서 대신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닐시언 전하는 은근한 어투로 말했다.

“터놓고 이야기합시다. 당신, 말하는 투로 보아하니 촌구석에서 올라와 자기 고장의 일로 한 국가의 장인 날 귀찮게 만들 정도의 위인은 아니군요. 당신은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길시언 형님은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이 나라에서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많은 분입니다. 쿠데타를 일으킬 만한 세력의 앞잡이가 되기 에는 가장 훌륭한 대외 명분감입니다.”

칼은 닐시언 전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전하. 제가 알기로, 국왕은 어느 변두리 시골의 촌로가 키우는 수탉이 여우에게 잡혀가도 그에 대한 책임을 지셔야 되는 분인 것 같습니다.”

닐시언 전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칼은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

“촌구석에서 올라와 자기 고장의 일로 한 국가의 장인 전하를 귀찮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런 귀찮은 일이 싫어서 우리를 이런 장소로 불러들여 간단히 끝내기로 마음먹으신 겁니까? 저희들이 전하께 찾아온 목적은 캇셀프라임의 패퇴 소식과 이에 따라 저희 영지에 대해 끼쳐질 해악에 대해 상의드리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그것은 도외시하시고 길시언 폐태자에 대한 일을 말씀하시는군요.”

“아, 그건, 아무르타트가 10만 셀을 원한다고요? 알겠습니다. 내가 마련하죠. 그건 그렇고…….”

“감사하신 말씀입니다. 전하의 확언으로, 어리석은 촌부인 전 커다란 안심을 느낍니다. 그럼 성총에 대한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전하의 귀중한 시간을 더 이상 방해 하지 않도록 물러남을 허락해 주십시오.”

“젠장, 이보십시오!”

닐시언 전하는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나와 샌슨은 움찔했으나 칼은 꼼짝도 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어쩌란 말입니까! 지금 자이펀과의 전쟁만 해도 숨가쁘단 말입니다! 내 머릿속에는 그 전쟁에 대한 일로 꽉 들어차 있습니다. 전쟁과 상관없는 일은 눈에도 들 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들의 일에 시간을 뺏길 수는 없단 말입니다! 난 지금도 어전 회의를 잠시 중단시켜 놓고 시간을 낸 겁니다!”

칼은 묵묵히 닐시언 전하를 바라보았다. 닐시언 전하는 팔까지 휘두르며 말했다.

“끊임없는 어전회의가 매일 계속됩니다. 당신 영지에 대해서는 미안하지만, 지금 웨스트 그레이드의 어느 외딴 영지에 대해서까지 신경 쓸 수는 없을 만큼 시급한 현안들이 쌓여 있습니다. 내 형님인 길시언의 일도 그중 하나입니다만 그 밖에도 산적한 문제가 끝도 없습니다. 이 지역의 병탄은 전략적으로 어떤 이점을 주는가, 저

장군의 아들을 강등시키는 일은 그 장군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내 여동생은 과연 예쁜가!”

마지막 말에 우리 셋은 한방 맞은 표정을 지으며 닐시언 전하를 바라보았다. “예에?”

닐시언 전하는 한숨을 푹 쉬고 나서 말했다.

“우습니까? 내 여동생, 이 임펠리아에 꽃을 피어나게 할 정도로 재주 좋고 상냥한 내 여동생을 과연 헤게모니아 국왕의 빈으로 보내는 것으로써, 헤게모니아가 장 악한 북부 대로에서 우리 상인들이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게 하여 원활한 상거래로 소금값의 안정을 가져와 전쟁 이전의 비율로 물가 성장률을 억제시키는 것이 가능 한가라는 긴 물음을 간단히 줄인 겁니다.”

난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하려 했지만 벌써 앞부분은 가물가물, 도대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저긴 말을 한 문장으로 말하는 거지? 생각나는 것은 이 성에 꽃이 피는 것은 닐시언 전하의 여동생이 재주가 좋아서라는 것뿐이다.

칼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간단히 대답했다.

“안 됩니다.”

“예?”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뭐가………… 말입니까?”

칼은 한숨을 푹 쉬더니, 들려주기 아깝기 그지없지만 국왕이니까 애기해 준다는 식의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내었다.

“북부 대로를 통해 소금을 운반하는 상인은 독과점 영업이 가능할 겁니다. 실제로 그 정도의 상단을 조직할 수 있는 상회나 재벌은 드뭅니다. 북부 대로는 험악한 곳 인데, 전시이기 때문에 인력이 부족하니까요. 정부의 규제를 아무리 강화한다고 하더라도 군대에 납품하게 되는 소금에 대해서는 규제가 불가능합니다. 결국, 북부 대로의 통행권을 원활하게 하는 것은 새로운 독과점을 육성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규모 상단에 의해 공급되는 소금으로 현재의 소규모 소금 채취 업자들은 모두 도산하게 될 것이며, 현재 군대에 소금을 납품하며 생계를 잇는 영세 업자들의 잇따른 도산이 예상됩니다.”

닐시언 전하는 입을 쩍 벌리고 칼을 바라보았고 샌슨과 나는 여전히 감명 깊다는 식의 표정밖에 짓지 못했다. 책 좀 읽었어야 했는데…… 다. 졸음이 올 지경인걸?

칼은 계속 유수처럼 말했

“전시가 아니라면, 소규모 생산 업자들도 공정한 경쟁을 통해 북부 대로의 소금 수송에 뛰어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 됩니다. 게다가 그런 대규모 상회에 의해 소금이 매점매석되게 된다면 바이서스 내부에 소금 채취 산업이 더욱 피폐해져 전후에도 지속적으로 수입된 소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태도 야기될 수 있습 니다. 소금은 향신료 등의 상품이 아닙니다. 필수품이죠. 따라서 절대로 그런 사태를 일으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물가가 치솟는 대로 내버려둘까요?”

닐시언 전하는 바삐 물어왔다. 칼은 손가락을 깍지 껴 무릎에 얹고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어전 회의에서 상의해 보시죠.”

졸음이 확 달아났다.

샌슨도 아마 그럴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머릿속으로 ‘교수대의 밧줄이 목에 감길 때의 기분은 어떨까?’ 등의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아악, 칼! 우, 우릴 죽일 생각입 니까? 난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다. 새로 산 옷의 불편함이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져 왔다. 아마 내 감각이 엄청나게 긴장해서 그런 모양이지?

닐시언 전하는 무서운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국왕 모독은 사형이라는 것 아십니까?”

“모독을 느낄 줄은 아십니까? 전하의 머릿속엔 전쟁에 대한 생각뿐이실 텐데.”

칼은 아예 본격적으로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오, 맙소사! 난 항상 샌슨은 몰라도 칼은 헬턴트 사나이의 규격 미달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전혀 그렇지 않잖아? 칼은 완전한 헬턴트식 배짱을 부리고 있다. 그러니까 ‘네가 날 죽이는 것 말고 더 뭘 하겠냐? 하지만 내 목숨은 내 것이고, 내 마음대로 종말 처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네가 날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죽는 것이니 넌 사실 날 죽일 수조차도 없다. 멋대로 해봐!’라는 식의 배짱 말이다.

닐시언 전하가 헬턴트식 배짱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화를 삭이느라 엄청나게 고생중이라는 것이다. 그는 소파 가장자리를 꽉 쥐면서 말했다. “당신은…….”

닐시언 전하는 입술을 한 번 적시고 다시 말했다.

“어전 회의에 가봤자 지금 들은 것보다 더 명료한 의견을 들을 것 같지 않습니다.”

이건 항복 선언인 것 같은데?

“고견이 있다면 들려주십시오. 겸허히 수용하겠습니다.”

항복 선언 맞군. 교수대 밧줄아, 안녕! 난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받으며 샌슨을 바라보았고 샌슨도 죽었다 살아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칼은 닐시언 전하를 삐 딱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고견이요? 글쎄요. 제 생각엔, 전쟁이 끝난다면 물가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닐시언 전하는 칼의 말이 농담인지 아닌지 구분이 되지 않아 의심스러운 눈으로 칼을 볼 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칼은 계속 말했다.

“그리고 전쟁을 끝내는 것에 대해서인데, 제가 칼라일 영지에서 만났던 펠레일이라는 젊은 마법사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조금 전 저희들의 여행에 대해 말씀드릴 때에도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만, 그 마법사는 지형, 풍토, 기후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 펠레일은 정말 지형을 잘 읽었지. 그러고 보니 기억난다. 칼라일 영지를 떠나올 때, 펠레일은 칼에게 무언가 귓속말을 했지. 그 이야기인가?

“그는 말했습니다. ’12월까지 루펠만 해안을 차지하면 전쟁이 끝날 것이다..”

“루펠만 해안?”

닐시언 전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며, 따라서 샌슨과 나도 참으로 근심스러워졌다. 칼은 느긋하게 말했다.

“루펠만 해안은 일스 공국에 소재한 해안입니다.”

“아, 그, 그렇습니까?”

모른다는 말이군.

“예. 일스 공국에 있는 이 루펠만 해안은 볼품없는 장소죠. 일사량이 모자라고 백사장도 없어 염전을 할 만한 곳도 아니고, 어패류 채취도 역시 기대되지 않습니다. 항구로 쓸 수 있는 장소도 못 됩니다. 아마 군사 지도에는 ‘전략적 성과가 기대되지 않음.’이라고 적혀 있을 겁니다. 하지만 펠레일은 대륙을 주유하던 중 루펠만 해안 에 잠시 머물렀고, 거기서 놀라운 발견을 했나 봅니다.”

“예?”

“루펠만 해안은 오세니우스 걸프스트림이 대륙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장소지요.”

“거, 걸프스트림?”

칼은 아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왠지 교활해 보이는 미소다.

“오세니우스 걸프스트림에 대해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될 경우 생기는 이점에 대해서는 전하께서도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펠레일은 그래서 더 이상 설명 하지 않은 것입니다.”

닐시언 전하의 얼굴이 크게 붉어졌다. 거의 비슷한 속도로 나와 샌슨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닐시언 전하는 굴욕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거, 걸프스트림이 무엇입니까?”

칼은 입을 딱 벌리더니 어떻게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쪽의 총애를 받는 인간으로서 이다지도 무지할 수 있느냐는 식의 표정으로 닐시언 전하를 쳐다보았다. 아마 저 표정의 상당 부분은 복수의 쾌감을 위한 것일 게다. 그런데 걸프스트림이 정말 뭐지?

“참으로 죄송스럽습니다. 이런, 저 간악한 자이펀을 패퇴시키기 위한 불세출의 전략을 짜내시느라 공사다망하신 전하께 그런 사소한 것은 관심 밖일 것이라는 것을 미처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칼은 아주 간곡한 태도로 사과했고 따라서 우리 얼굴에선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제발, 제발 그만하세요, 칼! 그 정도면 됐어요! 일단 사는 게 중요하다고! 칼도 이 정 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비꼬지는 않았다.

“촌부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우리나라는 해양업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오세니우스 걸프스트림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분은 드물 것입니다.” 닐시언 전하는 헛기침을 하며 굴욕을 삼키는 듯했다. 칼은 여전히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전하. 자이펀은 현재 우리나라와 교전 상태이므로 중부 대로를 이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나라에서 어떻게 수출입이 가능하겠습니까?”

“그야, 자이펀에는 강력한 해군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나라는 해양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나라라서 그 강한 해군력으로도 우리에게 해를 입히지는 못한다 는 것이 다행스럽지요.”

“예. 그 점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어쨌든 자이펀에서는 그 해군력 덕분에 우리나라와 교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영향 없이 수출입을 계속할 수 있 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 해군력을 사용하지 못할 경우 어떻게 되겠습니까?”

닐시언 전하는 펄쩍 뛰어올랐다. 농담이 아니다. 정말 소파에서 1큐빗은 뛰어올랐다. 덩달아 샌슨과 나도 소파에서 뛰어오를 뻔했다. 닐시언 전하는 그야말로 하얗 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그,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적어도 12월까지 바이서스가 루펠만 해안을 이용할 수 있게 될 경우 그것이 가능해집니다.”

“12월? 그게 무슨 뜻입니까?”

“12월에 접어들면 대륙의 동쪽 해안에는 계절풍의 영향으로 배들은 거의 북진 항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세니우스 걸프스트림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항행 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12월에 접어들면 배들은 어쩔 수 없이 루펠만 해안 바로 근처를 지나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거, 걸프스트림이 무엇이길래?”

“세계에서 가장 큰 해류입니다. 오세니우스 해 전체를 주유하는 거대한 해류지요. 게다가 속도가 거의 6, 7노트에 가까운 초고속 해류입니다.”

난 엄청나게 출세했다.

왜냐하면 난 현재 닐시언 전하, 즉 우리나라의 국왕과 똑같은 입장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렇냐고? 지금 칼은 교사가 되어 닐시언 전하와 샌슨, 그리고 나에게 해류 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세 명은 똑같은 학생 입장인 것이다. 에헤헤.

해류란, 칼의 설명에 의하면 바닷물이 흐르는 길이란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똑같은 물인데 그중에서 다르게 흐른다고? 내가 그렇게 질문하자 닐시언 전하도 몹 시 궁금하던 차에 내가 질문해서 다행이라는 얼굴을 했다. 정말 똑같은 입장이지 않은가? 칼은 설명했다.

“똑같은 공기 중에도 바람이 흐를 수 있지 않습니까?”

간단한 설명! 하지만 이해는 쉽군. 칼은 좋은 교사였고 닐시언 전하도 아주 착실한 학생이었다. 궁내부장 리핏 트왈리전이 점잖게 들어와서 어전회의의 각료들이 기 다리고 있음을 알리자 닐시언 전하는 간단히 처리했다.

“어명이오! 각료들은 모두 대가리를 테이블에 박고 있으라고 전하시오!”

“예?”

“젠장! 아, 아닙니다. 이렇게 전하십시오. 어전 회의를 마칠 테니 모두 자택으로 돌아가 근신하고 있으라고 전하시오!”

“예?”

“몇 달 간에 걸쳐 하루도 빼지 않고 어전 회의를 가졌으면서도 이분이 가져오신 것의 반만큼이나 귀중한 정보를 이야기한 각료가 없잖습니까! 고작 한다는 이야기가 내 여동생을 헤게모니아에 보내 소금값이나 내려보자는 의견뿐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무슨 어전 회의를 계속하잔 말입니까! 조속히 어명을 시행하지 못하겠습니 까?”

리핏 트왈리전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나갔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닐시언 전하는………… 길시언을 도서관에 넣어 3년쯤 묵힌 것처럼 생겼지만 속으로는 비슷한 성격을 가졌나 보다. 길시언은 조금 더 외향적이라서 뛰쳐나왔고 닐시언 전하는 조금 더 내성적이라서 왕이 되었다는 차이뿐인가 보다. 아무래도 형제니까 비슷하겠지. 아니, 어쩌면 그것은 루트에리노 대왕의 핏줄을 이은 왕족의 공통된 성격이 아닐까? 날 보라. 우리 아버지와 참으로 비슷한 성격…………, 오, 맙소사. 내가?

어쨌든 칼은 계속 설명했다.

그 해류라는 놈을 잘 알면, 바람이 적어도 배를 움직일 수 있단다. 그리고 그런 해류들 중에서도 가장 큰 해류가 오세니우스 해를 일주하는 오세니우스 걸프스트림이 다. 그런데 12월에 들어서면 대륙의 동부 해안에서는 북풍이 불기 때문에 배들이 북진 항해를 할 수가 없다. 역풍도 이용하려 들면 이용할 수는 있지만 자이펀의 군함 들이나 상선 같은 거대한 배는 역풍 항해가 거의 힘들단다. 허어? 배가 역풍을 타고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는걸?

어쨌든 이 시기 동안은 대륙 동편에서 북진하는 해류인 오세니우스 걸프스트림을 이용하지 않으면 자이펀에서는 항해가 불가능하다. 돛을 다 접어버리고, 해류를 타 고 올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내려올 때는 걸프스트림에서 살짝 벗어난 다음 북풍을 타고 내려온다. 간단하다.

그런데 여기서 루펠만 해안의 중요성이 등장하는 것이다.

지도에서 보면 루펠만 해안은 대륙에서 오세니우스 해를 향해 툭 튀어나온 뿔처럼 생겼다. 그리고 걸프스트림은 오세니우스 해를 일주하다가 루펠만 해안에서 가장 해변에 가깝게 흐른다. 따라서 이때 루펠만 해안에 마법사들과 노포, 기타 장거리 공격 부대를 잔뜩 주둔시켜 지나가는 자이펀 배를 박살내어 버린다. 배가 아무리 빠 르다 해도 결국 배다. 바람이 없으니 그 해류 이외엔 달리 이용할 것이 없어 도망도 못 가고 꼼짝없이 두드려 맞게 된다. 자이펀 배들이 상륙해서 해안을 공격할 걱정 을 할 필요도 없다. 루펠만 해안은 전혀 항구로 쓸 만한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배들을 두드려잡으면 자이펀으로서는 해상 무역이 단절되므로 대단히 곤란한 처지에 빠진다는 것이다. 물론 봄이 되면 다시 바람이 불기 때문에 걸프스 트림에서 벗어날 수는 있지만 이 겨울 동안만 해도 충분하다. 원래 자이펀은 사막이 많은 나라라서 생필품의 고갈은 쉽게 찾아올 것이다.

닐시언 전하는 거의 발작에 가까운 흥분 상태였다.

“그, 그러나 루펠만 해안은 분명히 일스 공국의 땅인데……

“여기서, 그 운차이라는 간첩의 증언이 필요해집니다.”

“예?”

“일스 공국은 분명히 우리와 자이펀의 전쟁에 대해 중립을 지키고 있습니다. 일스 공국에서는 장미와 정의의 오렘의 총본산이 있으며 일스 대공 자신도 정의를 사랑 하시는 분으로 그분의 기사단인 일스 기사단의 이름을 저스티스 기사단이라 칭할 정도입니다. 그분을 직접 뵙진 않아 정말로 정의로운 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것은 중요하지 않겠지요?”

칼의 말에 나와 샌슨은 어리둥절해졌지만 닐시언 전하는 교활하게 웃었다.

“중요하지 않지요. 정의로운 분이라고 알려져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사실 그자는 지금 어느 쪽에 더 승기가 있느냐를 따지고 있을 겁니다.”

그러자 칼도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대외적으로 그분은 우리와 자이펀, 어느 한쪽에 편드는 것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중립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운차이의 증언과 그 실험 보고서를 일스 대공께 제출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정의를 수호하시는 일스 대공의 반응은 어떠해야 될까요?”

“아샤스여………….”

닐시언 전하는 탄식 비슷하게 바이서스 왕족을 지켜준다는 독수리와 영광의 아샤스의 이름을 불렀다. 칼은 미소를 지으며 결론을 내렸다.

“전 외교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만, 위의 두 가지가 있을 경우 외교에 능숙한 각료라면 쓸모없는 땅인 루펠만 해안의 임대와 군대 주둔을 부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닐시언 전하는 계속된 흥분에 탈진해 버렸다. 뭐 그 정도 가지고 그러시나. 샌슨과 나는 죽었다 살았다를 계속해서 지금 쓰러질 정도로 지쳐 있는데. 어쨌든 닐시언 전하는 칼에게 말했다.

“당신은……,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당신은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의 현신입니까?”

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전하의 성은에 힘입어 술 빚고, 빵 사며, 책을 읽는 독서가입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