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3권 – 제5부 : 복수의 검은 손길 3화
3
“칼. 미리 이야기를 좀 해주시지 그랬어요?”
“이야기?”
“그러니까, 그 전쟁을 끝장낸다는 계획 말이에요. 미리 이야기를 좀 해줬다면 덜 놀랐을 것 아닌가요?”
“흐음. 미안하게 됐군. 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네. 국왕 전하를 직접 만나뵙고 말씀드릴 때까지는 입을 조심하자고 생각했거든. 언짢다면 용서하게나.” “아니, 뭐, 생각해 보니 이야기해 줘봐야 어쨌겠어요. 잘하셨어요.”
우리는 국왕의 서재를 나와 걷고 있었다.
칼의 말이 맞다. 칼이 그걸 내게 이야기해 봐야 뭐 어쨌겠는가? 이 이야기가 필요한 사람은 우리 국왕님이니까 다른 사람들이 들을수록 비밀의 낭비다. 그렇지 않아 도 닐시언 전하는 이 이야기를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명심하십시오. 이 이야기는 극비입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전쟁의 승패가 달린 문제를 함부로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닐시언 전하는 무조건적으로 이유 붙일 필요 없이 궁성에 머무르라고 말했다. 국왕의 가장 귀중한 손님으로 대우하겠다면서. 하지만 칼은 아직도 좀 화가 덜 풀린 모양이다. 나라도 그렇겠다. 처음에는 시골에서 수도까지 올라와 징징 우는 소리나 하며 국왕을 귀찮게 하는 상소꾼으로 취급하더니, 전쟁을 끝장내는 계획을 말해주자마자 사근사근하게 군다면 누가 예쁘다 그럴까.
그러나 칼은 점잖게 말했다.
“동행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궁성에 머무를 필요는 없습니다. 필요한 말씀은 다 드렸으니, 이제 현명하신 전하의 처분만 있으면 될 듯합니다. 저, 그런데 아 무르타트가 요구한 몸값은………….”
“걱정 마십시오. 보석으로 준비하라고 했지요? 보석을 갑자기 모으기는 힘들지만, 준비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성은이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전혀. 내 백성의 일인데요.”
뻔뻔하시군. 내 백성의 일이라고? 언제는 귀찮다며? 칼은 굳이 그런 말까지는 하지 않고 점잖게 물러났다.
하지만 칼은 내심 꽤나 기뻤던 모양이다. 그는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여보게들.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나로선 전쟁에서의 확실한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전략을 말씀드렸다는 것보다는, 아무르타트에게 줄 몸값을 쉽게 마련 하게 된 것이 훨씬 기쁘다네.”
샌슨은 뒤통수를 긁으며 웃었다. 나도 그렇다. 우리 아버지를 구하는 것이다. 전쟁? 미안하지만, 우리 일이 아니다. 제기랄, 닐시언 전하가 먼저 ‘당신들의 일’이라 고 말했다. 마치 자기가 바이서스의 모든 백성을 책임져야 할 국왕이 아닌 것처럼. 그렇다면 나도 바이서스와 자이펀의 전쟁은 ‘닐시언 전하의 일’이다! 죄책감 없이 기뻐해 버릴테다! 입 밖에 내어 말할 수는 없지만.
다시 궁성의, 그 길 잃어먹기 딱 적당한 길을 리핏 트왈리전의 안내를 받아가며 나갔다. 리핏 트왈리전 궁내부장은 도저히 치솟아오르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다는 듯이 우리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질문을 하거나 하는 것은 품위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궁금하면 그냥 묻지.
“이쪽입니다.”
엥? 어라? 바깥이 아니네?
우리가 안내된 곳은, 정확히 뭐하는 공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척 보기엔 집무실 비슷해 보이는 공간이었다. 벽면 가득한 창문으로 실내는 환했다. 닐시언 전하의 서 재도 꽤나 밝았지만 여기는 자연광이라서 한결 좋군. 한쪽 옆에는 커다란 책상과 책장이 있었고 중앙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꽃이 꽂힌 수반이 있었다. 벽에는 태피스 트리, 몇 개의 장식물이 있었다. 한귀퉁이에는 몇 개의 무기들과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보였다.
지금 창문 앞에는 웬 남자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는 우리가 들어가자 몸을 돌렸다. 조나단 아프나이델이라는 그 궁성 수비대장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알현은 잘 마치셨는지요.”
칼은 멀뚱히 조나단 아프나이델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유익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만…………….”
조나단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전하께서는 제가 책임지고 여러분을 호위하라고 하시더군요. 상당히 당황했습니다.”
우리 전하는 좀 조증 아닌가? 조나단은 테이블 옆의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말했다. 우린 일단 죽 둘러앉았다. 조나단은 자신의 감정은 ‘상당히 당황했습니다.’라 는 한마디로 끝내고는, 필요한 것만을 물어오기 시작했다.
각자의 이름, 현재 머물고 있는 여관, 얼마나 머물 것인가, 아, 걱정 마시오. 그 여관 주변을 경계하기 위해서입니다. 궁성 수비대원을 파견하겠습니다. 예? 누가 우 릴 죽인답니까? 그렇다기보다는, 귀하들에게 국왕의 가호가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칼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헬턴트 영지에서 이 영광스러운 성도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국왕 전하의 가호 덕분이었습니다. 전하의 가호가 항상 함께하는데 구태여 다시 그런 것을 바라 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젠 여러분은 궁성 임펠리아를 방문한 인물입니다. 궁성은, 간단히 보자면 하나의 장소일 뿐입니다만 하나의 장소로만 볼 수는 없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꼭 언짢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그저 여러분들이 바이서스 임펠을 구경하시고 싶다거나 명사들의 저택이라도 방문하고 싶다면, 저희들이 그 편의를 돌 봐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칼은 피식 웃었다.
“궁성 수비 대원을 시종으로 쓰기라도 하라는 말씀입니까?”
“얼마든지 그렇게 쓰십시오.”
조나단의 대답에 칼이 오히려 놀라버렸다.
실제로 바이서스 임펠 자체가 훌륭한 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궁성 수비대원이라면 궁성을 수비한다기보다는 국왕의 경호원 같은 인물들 아닌가? 국왕의 경호원 을 우리 시종으로 쓰라고? 칼이 뭐라고 이야기하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이 열리며 플레이트 메일을 멋지게 차려입은 병사가 들어왔다. 샌슨은 자꾸 주눅든다는 표정이었다. 병사는 조나단 아프나이델에게 경례를 딱 붙였는데, 갑옷이 별로 소리도 나지 않았다. 경량화 갑옷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소리가 별로 나지 않게 만들었나?
“제4분대. 출동 준비를 마치고 대기중입니다.”
“느려터진 놈들! 얼마나 걸린 거야!”
“시정하겠습니다.”
“흐음. 밖에 있나?”
“예, 그렇습니다.”
조나단은 일어나더니 우리들에게도 일어나라고 손짓하며 창가로 걸어갔다. 그러고 보니 창을 열면 베란다가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 베란다로 나가니 밖에 도열한 병 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샌슨은 완전히 의기소침해져 버렸다.
4열 횡대로 늘어선 40명의 병사들이 바닥에 금을 그어놓고 선 것처럼 잘 맞춰서 서 있었다. 모두 붉은 독수리 모양의 문양이 들어 있는 풀 플레이트를 걸치고 있었 고 손에 손에 번쩍거리는 핼버드를, 역시 공중에 줄 매어놓고 맞춘 것처럼 정확히 비껴들고 서 있었다. 눈이 부셔서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는 장관이었다.
조나단은 멋있지 않느냐는 듯이 바라보며 푸근하게 말했다.
“여러분을 모실 궁성 수비 대원입니다.”
맙소사.
나는 기가 막혀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고 칼도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저 번쩍이는 40명의 궁성 수비 대원을 우리 시종으로 쓰라고? 차라리 우리 세 명이 저들 중 하나의 시종이 된다면 훨씬 어울리겠다. 너무 당황스러운 친절이라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나는 칼을 바라보았다. 쓰자구요! 끝내 주네. 저들에게 내 발을 닦 게 할까요? 젠장. 끔찍스러워서 못하겠네.
그런데 칼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졌다.
칼은 눈을 가늘게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을 꽉 다물어 입술이 하얗게 바뀌었다. 조나단은 그 표정을 보더니 놀라서 그 궁성 수비 대원들이 뭐 잘못된 것이 있는지 다시 살펴보았다. 칼은 조용히 몸을 돌려 조나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저들을 데려가진 않겠습니다.”
“예?”
“전하께 이렇게 전해 주십시오. 촌부께 내려주신 하해와 같은 성총을 감당할 수 없으니 부디 거두어달라고. 그럼, 이만 저희들은 물러가겠습니다.”
“아, 저……………?”
칼은 그대로 고개를 숙이더니 문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나와 샌슨도 어쩔 줄을 모르고 일단 칼을 따라나왔다. 밖에 나오자 당장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헷갈려버렸 지만 칼은 무턱대고 걷기 시작했다.
칼의 얼굴은…………, 말을 걸면 내 혀를 뽑아버릴 듯한 얼굴이었다. 칼이 저렇게 화난 얼굴을 하는 것은 처음 보겠군. 칼라일 영지에서 운차이의 턱을 걷어찰 때도 침착 한 얼굴이었지 않나?
하지만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사람이 갑자기 없던 능력이 생겨나진 않는다. 칼은 계속 걷다가 그만 울화통이 터져버렸다.
“도대체 어디가 나가는 길이야!”
샌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쪽입니다.”
그러자 칼은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샌슨의 기억이 정확했는지, 우린 곧 정문을 찾을 수 있었다. 지나가던 궁내부원들이나 시녀들이 우릴 보고 놀랐지만 칼은 거기에 눈길도 주지 않고 걸어갔고 우리 둘도 칼을 따라가느라 주위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뛰쳐나왔다는 것이 적합할 듯한 동작으로 칼은 정원으로 나왔다. 정원으로 나온 칼은 당장 하늘을 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뭐가 저렇게 화가 난 거지? 나와 샌슨은 말도 못 걸고 아주 불쌍한, 그러니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화가 잔뜩 난 수탉을 피해 다니는 병아리 모양으로 조심스럽게 칼에게서 떨어져 있었다. 칼은 자신의 분노를 억제하듯이 한참을 후후거리더니 나직이 한마디했다.
“빌어먹을 놈….”
당황해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뻔했다. 샌슨이 물었다.
“누구 말입니까?”
“닐시언이라는 놈 말고 누가 있겠어.”
목소리는 높이지 않았다. 칼도 어느 칼에 맞아죽을지 모르는 그런 말을 함부로 고함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샌슨과 나는 소름이 돋아 말도 제대로 못했다. 샌슨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고 나도 황급하게 둘러보았다. 저 멀리 아까의 그 40명의 궁성 수비대원들이 보였지만 거리가 충분히 멀었다. 아무도 못 듣겠다.
샌슨은 일단 안심하고 나서 허옇게 질린 얼굴로 칼을 바라보았다.
“카, 칼, 저, 무슨 일로 화가 나신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화를 좀 가라앉히시고………….”
“가라앉히시고? 대거라도 입에 물고 닐시언을 찾아갈까?”
나도 더 못 참게 되었다.
“칼! 제발. 왜 이러세요!”
칼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노래하듯이 말했다.
“제기랄 놈, 대가리는 여물어서 형의 자리를 꿰찰 정도는 됐겠지. 하지만 더러운 근성은 어찌할 수 없었군. 젠장, 루트에리노 대왕의 핏줄에 저렇게 비열한 자손이 나왔다는 것이 불가사의하군.”
“카, 카아아아알!”
“아무도 안 듣잖아!”
이게 정말 칼 맞나? 칼은 아무도 안 듣는다고 이렇게 누굴 험담할 사람이 아닌데? 도대체 얼마나 화가 났길래 이러는 거지?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내가 듣는데요?”
죽었구나.
돌아보니, 정원수 뒤에서 한 아가씨가 나타났다.
20대 중반쯤? 꺽다리 아가씨로 상당히 훤칠했다. 이루릴 정도로 키가 크지만 몸이 좀 가냘프다. 아니, 그것보다는 이루릴처럼 잘 짜이지 않은 평범한 몸매라고 해야 겠다. 이루릴은 키가 큰데도 몸이 잘 짜여 있어 키가 크다는 느낌이 별로 없지만, 이 아가씨는 키에 어울리는 몸매를 하고 있어 훤칠하다는 느낌이 바로 온다. 잿빛 머 리에는 머릿수건을 쓰고 가슴까지 올라오는 작업복을 입고 손에는 전정가위를 들고 있었다. 작업복의 커다란 주머니에는 밧줄 오라기, 작은 가위, 칼 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 정원사인가?
칼은 당황했다. 흠, 죽게 되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나?
“누구십니까?”
“데미 바이서스. 원래는 데밀레노스 바이서스지만 데미라고 불러요. 데미 전하는 이상하죠?”
“공주님이시군요………….”
칼은 맥이 탁 풀린다는 음성이었다. 이제 죽게 되었으니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인지 무릎도 꿇지 않고 태평한 모습이다. 뭐, 난 재빨리 무릎을 꿇으려 했지만, 칼이 이렇게 나오니 나만 무릎을 꿇는 것도 어째 치사스러운 것 같아 무릎을 꿇지 않았다. 샌슨도 멍하니 서 있었다.
데미 전하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정원수의 가지 하나를 잘라내더니 우리에게 다가왔다.
“당신은?”
“칼 헬턴트. 공주님의 오빠를 알현하고 가는 길입니다.”
“국왕 전하를 욕하시던데요?”
“욕 먹어도 싸니까 욕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을까?
“왜죠?”
“공주님의 오빠는 자기가 루트에리노 대왕, 제가 핸드레이크, 이런 식으로 꾸미려 했습니다. 제게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저마저 속여넘기려 했지요.” 이게 무슨 말이야? 나와 샌슨은 멍하니 칼을 바라보았고 데미 전하도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죠?”
칼은 고개를 돌리더니 멀리 떨어져서 이제 해산하고 있는 궁성 수비 대원들을 가리켰다.
“저들이 왜 나왔는지 아십니까?”
“어떤 귀중한 손님을 호위하기 위해서라더군요. 그래서 나도 나무 뒤에 숨었죠. 내가 시종도 동행하지 않고 나무를 손보면 시끄럽거든요.”
“그 귀중한 손님이 바로 저올시다. 황송스러워 견딜 수 없을 정도군요.”
데미 전하는 머리를 갸웃거리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말인지…”
“우릴 보십시오.”
“예?”
“우리가 어디 귀중한 손님처럼 보입니까?”
“아니오. 전혀.”
“40명이나 되는 궁성 수비대원이 호위에 나설 인물로 보입니까?”
“그렇지 않군요.”
“그러니까 더 좋죠. 우리는 시골 구석에서 올라왔습니다. 운이 좋아서 공주님의 오빠에게 우리나라와 자이펀과의 전쟁에서 크게 이득이 될 수 있는 조언을 할 수 있 었습니다. 공주님의 오빠도 기뻐하더군요.”
칼은 끝까지 국왕 전하라 부르지 않고 공주님의 오빠라고 말하는군. 데미 전하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말했다.
“고마운 일이군요. 그런데요?”
“음유시인들의 노랫거리가 됩니다. 전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만, 공주님의 오빠는 했나 봅니다. 황야에 숨어 있던 은자가 표표히 나타나서 국왕을 도와 대륙을 질타 한다는 식의 이야기 말입니다. 대마법사 핸드레이크도 그랬지요. 루트에리노 대왕은 핸드레이크를 만나서 비로소 바이서스를 건국할 수 있었고, 핸드레이크는 루트 에리노 대왕을 만났기에 비로소 그 웅대한 위력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하지 않습니까?”
“그럼, 국왕 전하는 당신을 숨겨진 은자로 만들 생각이란 말입니까?”
“실제로 촌구석에서 방금 올라왔으니까. 그러고는……………, 아마 이렇게 되겠지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던 저의 진면목을, 오로지 공주님의 오빠만이 알아보고는 저에 게 과분한 은혜를 내리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놀라지만, 제가 드린 조언에 따라 전쟁을 승리할 경우에는 이렇게 말하겠지요. 아아! 우리의 국왕만이 그를 알아보았 구나!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의 만남의 재현이로다. 이해가 되십니까?”
칼은 그 내용을 전혀 듣지 않아도 그 어투만으로도 충분히 비아냥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말했다. 젠장, 난 지금 죽을 걸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가둘 수도 있겠지? 그럴 바엔 차라리 깨끗이 죽여달라고 부탁해…………. 어헛, 제기랄! 내가 뭘 잘못했다고! 칼 때문에 나까지 죽을 순 없어! ・치 사스럽군.
데미 전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그게 싫으십니까?”
“싫습니다. 이게 뭡니까? 광대를 만드는 겁니까? 저렇게 번쩍번쩍하는 병사들로 호위시켜서 가공의 천재 전략가를 만들어내어 뭘 어쩌겠다는 말입니까? 공주님의 오빠는 처음엔 우릴 제대로 맞이하지도 않았습니다. 공주님의 오빠는 잠깐 시간 내어 서재에서 우릴 만나고 쫓아버릴 계획이었죠. 그런 무례한 경우를 당했지만 그래 도 전 꾹 참고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계획을 말씀드리자마자 번쩍거려서 쳐다볼 수도 없는 40명의 궁성 수비 대원을 보내어 절 가공의 은자 로 만들어 자기 위엄까지 높이려 드는군요. 치사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데미 전하는 ‘저놈의 목을 쳐라!’라고 말하는 대신 빙긋 웃었다.
“그렇게 생각되는군요. 그래서 당신을 가공의 은자로 만들려는 그 계획을 따르지 않겠다는 겁니까?”
“절 제대로 대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한 복수의 의미만은 아닙니다. 그건 거짓이기 때문에 따를 수 없습니다.”
“백성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예?”
“황야에 숨어 있던 지혜로운 은자가 홀연히 나타나 국왕을 돕는다면, 백성들은 안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럴듯하네? 그러나 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 지혜로운 은자도 아닐 뿐더러, 이 이상의 조언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능력도 없지만서도. 제가 공주님의 오빠에게 말한 전략도 제 생 각이 아닙니다. 제가 여행길에서 만난 어떤 지혜롭고 선량한 젊은이의 생각이었습니다. 차라리 그 젊은이에게 그 역할을 주면 어울리겠군요. 어쨌든 거짓은 곧 들통 날 것입니다. 백성들이 기만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왕가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떨어지겠습니까?”
글쎄. 펠레일은 말했잖아? 칼은 전령 노릇이나 할 사람은 아니라고. 펠레일의 짤막한 말 한마디로 칼은 그것을 다 알아들어 버렸으니까, 내가 보기엔 칼은 핸드레이 크의 역할을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때였다. 멀리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핏 트왈리전이라는 그 궁내부장이었다. 그는 몇 명의 궁내부원과 함께 황급하게, 그러나 품위를 잃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우리에게 걸어왔다.
“아, 데밀레노스 전하도 여기 계셨군요. 이분들과 환담을 나누셨습니까?”
“예. 몹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재미있는………… 재미있는……………
“글라디올러스의 구근을 재배할 때의 주의점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칼.”
칼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천만에요, 공주님.”
공주님은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영광의 창공에 한 줄 섬광이 되어.”
응? 저게 무슨 말이지? 그런데 칼은 능숙하게 대답했다.
“그 날개에 뿌려진 햇살처럼 정의롭게.”
그리고 데미 전하는 다시 정원수로 걸어가 버렸다. 저게 무슨 인사말이지? 어쨌든 고마운 공주님. 아샤스의 축복이 3년이 세 번씩 세 번 지나갈 때까지 공주님께 계 속되길.
리핏 트왈리전은 순간적으로 시종도 없이 정원을 돌아다니는 공주를 붙잡아야 될지, 안내도 없이 돌아다니는 궁성의 손님인 우리를 붙잡아야 될지 갈등을 느끼는 모 양이다. 결국, 항상 그러하듯, 손님이 먼저다. 바이서스의 왕가는 바이서스 기사도의 총본산이니까.
“돌아가시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말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군요.”
“절 따라오십시오.”
그리고 리핏 트왈리전은 궁내부원을 불러 말을 데리고 오도록 했다. 우리는 되도록 서두른다는 느낌을 주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점잖게 궁성을 나온 다음, 부리나케 걸어가기 시작했다(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고 묻지는 마라, 우리들은 분명히 ‘부리나케 걸었다. 다시는 그렇게 못할 것이다.).
“헉헉, 목숨이 10년은 짧아졌을 거야.”
“헉헉, 난 20년은 짧아졌을 거야.”
“……아무래도 내 목숨이 30년은 짧아진 것 같은데?”
“……안녕, 이제 죽나 봐.”
・커험, 흠. 죽을 뻔하게 만들어 미안하구만, 친구들.”
수도 대로를 따라 돌아왔다. 여러 번이나 죽을 뻔한 고비를 지나고 나자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밥이었다. 얼마나 감미로운가! 살아 있는 것의 확인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축제로 요란한 바이서스 임펠의 대로에서도 다른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수도의 요리를 먹자, 응? 후치 네 솜씨보다 나은지 볼까?”
“비교할 걸 비교해! 난 조악한 재료로 거의 몸부림에 가깝게 만들었단 말이다!”
“네게 재료를 충분히 공급했다면?”
•할말 없음.”
할말 없지. 내가 다룰 줄 아는 재료의 범주 내에서라면 난 자신이 있다. 하지만 정말 고급 요리에 사용되는 재료라면 난 구경도 못 해봤다. 특히 난 해산물 요리라면 절대적으로 몰지각하다. 내가 구경한 물고기는 민물고기뿐이니까.
“자네들의 위장에 경탄을 보내도록 하지. 죽을 뻔했는데 밥 생각이 나는가?”
“긴장했으니까 배가 고프지요.”
우리는 그래서 축제 풍경보다는 식당을 구경하며 돌아다니기로 했다. 뭐, 양쪽 다 겸사겸사
“샌슨. 지리서에 여기 특산물이 뭐라고 나와 있어?”
“어, 바이서스 임펠에 대해서는 워낙 길게 적혀 있어서 끝까지 다 안 읽었는데.”
“흐음. 이번에도 시민들에게 물어볼까?”
“네가 물어!”
“알았어.”
그래서 난 지나가던 풍채 좋은 아저씨를 붙잡아 물어보았다. 그 풍채 좋은 아저씨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실례합니다. 바이서스 임펠 최고의 요리를 맛보려면 어디로 가면 될까요?”
“어, 자네 정말 재수 좋았어. 우리 집으로 오게!”
“…………예, 물론 안주인의 음식 솜씨가 훌륭할 것은 믿어 의심치 않겠습니다만…….”
“아, 아니. 우리 집이 식당이네! 우리 주방장은 바이서스 최고의 수플레를 만들고 스테이크 뒤집는 솜씨 하나가 정말 일품이지! 난 하트 브레이커로 바이서스 임펠 시장의 트로피도 받았다네.”
“하트 브레이커가 뭐죠?”
“자네가 마셔보고 정의를 내려보는 건 어떻겠나?”
흠, 좋은 상술이군. 그래서 우리는 그 이름이 래디라는 아저씨를 따라 ‘스트레이트 헤븐’이라는 펍으로 가게 되었다.
스트레이트 헤븐은 작고 아담한 펍이었다. 식사 때는 지났고 아직 술 마시러 오는 사람은 없어 손님은 우리 셋뿐이었다. 하긴 축제 기간이니 이런 작은 펍엔 손님이 없겠지. 테이블은 전부 여섯 개였고 반지하 건물이라 낮에도 조명이 필요했다. 그래서 테이블마다 조미료통과 함께 촛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그 초의 밝기라는 게 정말 기가 막혀서 초 이외에 다른 조명이 필요없었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어디 가서 내가 초장이라는 말 하면 무진장 웃겠군. 이건 도대체 뭘로 만든 거야?”
주인장 래디가 말해 주었다.
“경뇌유로 만든 거야.”
“경뇌유……?”
“말향고래의 머리에서 채취하는 기름이야. 델하파 특산품이지.”
나는 샌슨의 옆구리를 찌른 다음 귓속말로 물었다.
“말향고래가 무슨 몬스터지?”
“나도 모르겠는데… 희귀한 몬스터인가 봐.”
흠, 다음에 언제 그 말향고래라는 몬스터가 델하파 어디에 살며 잡기 쉬운지도 좀 알아봐야겠군. 정말 고운 빛을 내면서 타는데? 말로만 듣던 고래 기름 양초가 이럴 까? 하지만 샌슨이나 칼은 초의 밝기를 감지하지 못하는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어이구, 보면 모르냐? 이렇게 빛깔이 고운데?
그러고 보니 샌슨과 칼은 그 바이서스 최고의 수플레를 만든다는 주방장의 스테이크 뒤집는 솜씨에 홀딱 반해 있었다. 어디 보자. 오? 정말 멋있는데?
그 주방장은 프라이팬과 뒤집개를 멋지게 이용하고 있었다. 마치 방심하고 있는 듯한 무덤덤한 시선과 귀찮다는 듯이 놀리는 손, 그런데 스테이크는 철푸덕 떨어져 서 기름을 튀긴다거나 하는 일이 전혀 없고 눌어붙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부드럽군.
역시 어떤 기술이든 달인이 되면 그 몸놀림이 대충대충 하는 것처럼 바뀌어버리는 모양이야. 완전히 손에 익어버리니까. 우리 아버지가 양초틀에 기름 붓는 것을 보 면 기름을 흘리든 말든, 넘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대충대충 붓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절대로 흘리는 일도, 넘치는 일도 없다. 반면 내가 양초틀에 기름 부을 때 보면 그야말로 구도의 자세가 따로 없다. 산속에 틀어박혀 수련을 하는 성직자들 못지않은 진지한 자세가 되어버린다. 그런데도 흘리거나 넘치거나 하는 일이 가끔씩 은 일어나거든?
어쨌든 멋진 솜씨로 스테이크 세 개가 접시에 놓이고 깔끔하게 단장되어 우리 앞에 나왔다. 흠, 멋지군. 포크를 대기가 송구스럽군.
그러나 샌슨, 오, 나의, 으윽, 오거여………….
샌슨은 대충대충 먹어치워 버린 것이다…………. 그도 달인인가 보다.
두 번째 코스로 잘 부풀어오른 수플레와 함께 바이서스 임펠 시장님의 트로피도 받았다는 그 하트 브레이커를 시음하게 되었다.
하트 브레이커는 일종의 칵테일인가 본데, 얼핏 보기엔 브랜디와 진을 다 사용하는 모양이다. 허어. 나야 칵테일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저렇게 강한 술을 두 개나 사용해서 칵테일을 만들 수 있을까? 이윽고 래디는 우리 테이블에 하트 브레이커를 내려놓았다.
“자, 하트 브레이커입니다!”
“유리잔이닷!”
래디 씨에겐 대단히 죄송스러웠지만, 우린 유리잔에 더 감탄해 버렸다.
“이야, 정말 투명하다.”
“으아아, 후우치! 넌 OPG 벗고 잡아! 유리잔은 잘 깨진대!”
“아, 그래, 맞아맞아.”
우리 둘이 이런 난리를 치는 가운데 칼은 빙긋빙긋 웃으며 하트 브레이커를 들어올렸다. 나와 샌슨은 손가락에 힘을 주면 깨질까 봐, 그러나 힘을 주지 않으면 미끄 러질까 봐 너무 조심스러웠다. 처음엔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 순간, 촛불이 두 개로 보이기 시작했다.
우와, 이거 이빨이 뽑혀나갈 정도로 센데?
“화끈하다아…….”
“차가운데에
“화끈하다니깐.”
“아냐, 역시 시원해.”
우리는 서로 좀 으르렁거린 다음, 다 마셔보고 다시 한번 감상을 말하기로 했다. 다 마시고 나서도 서로 감상이 통일되지 않는다면, 한잔 더 마시지 뭐.
샌슨은 잔을 비우더니 바지춤을 붙잡고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야, 따라와.”
“응? 어딜?”
샌슨은 잠시 풀린 눈으로 날 보더니 자기 머리를 딱 쳤다.
“이런, 항상 운차이를 발목에 묶어다니던 것 때문에…………. 버릇이 됐군. 아냐. 화장실에 좀 다녀올게.”
“음, 그래.”
운차이는 지금 감방에 들어가 있겠지? 흠. 에잇, 잊자! 잊어! 간첩은 감방에, 우리는 술집에 운차이, 간수한테 살기를 마구 뿜어봐요. 혹시 알아? 살기에 겁먹고 좋은 대접을 해줄지.
하트 브레이커는 첫맛은 도대체 뭐라 말할 수 없이 강하고, 여운은 상당히 오래 가는 칵테일이었다. 그것도 꽤나 진한 여운이 남았다. 심장이 깨져나가는 듯한? 어쨌 든 샌슨과 나의 감상은 통일되지 않았지만, 한 잔 더 시켜본다는 데에는 의견 통일을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한 잔 더 주문한 다음 좀 느긋하게 마시기로 했다. 그때까 지도 칼은 첫잔도 비우지 않고 있었다. 그는 거의 10분에 한 모금씩의 느린 속도로 마시고 있었다.
샌슨은 탁자를 또각거리며 흥얼거리듯이 말했다.
“이루릴은, 이루릴은…….”
“그래서?”
“그걸로 끝이야. 음…….’
“그렇구나. 어쩔 수 없지……
샌슨과 난 서로 말도 되지 않는 말을 나누면서 완전히 취해 버린 채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칼은 멍청히 손등에 턱을 얹고 천장을 바라보는 것이 흡사 깊은 생각 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샌슨은 다시 흥얼거리며 말했다.
“후치. 노래나 불러봐. 성밖 물레방앗간이 어쩌고 하는 건 빼고………….”
“……그럼 뭘 부르지?”
“아이야 이켈리나의 구두장이 믹 더 빅. 난 그게 좋아.”
난 벽 쪽으로 몸을 옮긴 다음 벽에 기대어앉았다. 등이 서늘한 게 기분좋았다. 그리고 의자의 등받이에는 팔을 올려놓고 다른 팔은 테이블에 기대었다. 그런 삐딱한 자세로 앉아 다리를 쭉 뻗었다. 구두장이 믹 더 빅은 꽤나 긴 노래니까 편한 자세가 좋겠지. 또한 구두장이 믹 더 빅은 흥겨운 노래다. 난 발뒤꿈치로 땅을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었다.
아이야 이켈리나. 미치광이의 마을에,
그래, 용감한 구두장이 믹 더 빅!
오른손에는 망치, 왼손엔 작은 못.
용감하고 쾌활한 구두장이 믹 더 빅!
구두장이치고도 너무나 용감한 사내였지만,
창밖에 리틀 브리짓. 산책을 나서면, 그날은 왼발만 두 개씩, 이야히호! 창밖에 리틀 브리짓. 산책을 나서면, 그날은 오른발만 두 개씩, 이야히호! 그래서 착한 리틀 브리짓. 언제나 산책은 반드시 두 번씩 다녔지.
그래서 아이야 이켈리나. 미치광이의 마을엔
할아버지도, 꼬마도, 새침한 아가씨도.
구두는 모두 두 켤레씩 있었다지?
칼은 키들거리기 시작했고 샌슨은 벙긋거리며 따라부르려 했다. 하지만 노래가 워낙 길어서 샌슨은 중간에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샌슨은 노래가 막히면 웃 으며 듣고, 아는 부분이 나오면 다시 따라부르며 즐겼다.
결국 나는 최고의 구두용 가죽을 구하겠다고 드래곤 사냥에 나선 용감한 믹 더 빅이 거의 장난에 가까운 모험 끝에, 구두 수선용 작은 못으로 드래곤을 때려잡는 모 험 장면과 봄맞이 축제에 나선 수줍은 리틀 브리짓이 믹 더 빅이 만든 드래곤 가죽 구두를 신고 춤추는 장면까지 감동적으로 불러젖혔다.
“이야히호!”
주인장 래디와 그 멋드러진 주방장도 우리 테이블로 다가와 같이 술을 마시며 벌겋게 된 얼굴로 함께 노래를 부르며 ‘이야호!’라는 구두장이 믹 더 빅의 독특한 후 렴을 함께 고함질렀다.
대낮부터 쾌활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바이서스 임펠의 시민들은 스트레이트 헤븐을 기웃거리기 시작했고 잠시 후엔 여섯 개의 테이블을 꽉꽉 채우고도 모자라 선 채로 손에 술잔을 들고 노래를 부르는 손님들로 가득 차 버렸다. 작고 아늑한 펍이라도 함께 노래 부르고 즐길 수 있는 사람들로 가득 채운다면 궁성이 부러울까, 빛의 탑이 부러울까.
내 노래는 많은 박수를 받았고 곧 새로 들어온 손님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우리들만의 축제…………, 왠지 그런 말이 어울리겠군. 바이서스 임펠 곳곳에 축제가 벌어 지고 있지만, 여기 작고 아늑한 펍에서는 사람들이 몸 부대끼며 노래와 술뿐인, 그렇지만 신나는 축제를 열고 있었다.
어느새 황혼이 되었는지, 새로운 손님이 문을 열어젖혔을 때는 지면 높이에 있는 문으로부터 반지하의 펍 안으로 황금색의 노을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손님은 잠시 실루엣으로 서 있다가 주인을 불렀다.
“주인장, 계시오?”
“어, 주인장, 계십니까?”
새로 들어온 손님은 두 번은 점잖게 부르고 세 번째는 악을 쓰다시피 불렀다.
“주인장 계시냐고!”
래디는 벌겋게 된 얼굴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고함질렀다.
“보시다시피, 손님. 테이블 아래에 들어가거나 천장에 매달리지 않고서는 더 이상 손님 못 받겠는데요?”
그러자 그 시커먼 손님의 그림자는 투덜거렸다.
“이런 하트 브레이커를 바를 수………, 아냐! 마실 수 없다면 수도에 온 즐거움이 하나 사라지는데?”
래디는 벼락 맞은 듯이 몸을 돌렸다.
“오, 이런 길시언!”
누구라고? 난 노래를 부르는 사람에게서 새로 들어온 사람으로 시선을 옮겼다. 샌슨과 칼도 놀라서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건장한 체구와 잿빛 머리가 보였다. 무엇 보다도 왼손을 허리의 칼자루에 올려놓은 자세.
“정말! 길시언!”
“어라? 후치! 오, 여러분들, 벌써 와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