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3권 – 제5부 : 복수의 검은 손길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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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3권 – 제5부 : 복수의 검은 손길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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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입니다. 래디. 그 동안 바람은 많이 피워………, 끼어들지 마!에, 그 동안 잘 지냈습니까?”

래디는 길시언을 잘 아는 건지 그의 괴상한 말에도 화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길시언과 악수를 나누며 크게 웃을 뿐이었다.

“반갑습니다! 그래, 이게 얼마 만입니까? 왕자님이 리치몬드를 잡겠다고 떠난 게.”

“리치몬드는 잡았습니다만, 대신 선더라이더가 사춘기∙∙∙∙∙∙, 젠장! 선더라이더가 저주에 걸렸습니다. 임마! 좀 닥치란 말이다! 웃지 마!”

전혀 변함없는 모습이다. 길시언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래디와 몇 마디 더 나누고는 우리 테이블로 왔다. 내가 테이블 위로 올라가 앉기로 해서 자리를 겨우 만들었 다. 나는 닐시언 전하처럼 테이블 귀퉁이에 앉았다.

칼은 한쪽 귀를 막고 고함질렀다(주위가 너무 시끄러웠으니까.).

“언제 바이서스 임펠에 오셨습니까?”

“지금 오는 길입니다. 오자마자 하트 브레이커나 한잔 바르려고…………, 아냐! 에, 마시려고 찾아왔습니다. 흠, 이거 엄청난 열기군요. 이 스트레이트 헤븐은 항상 지옥 같은…………, 아니! 푸근하고 조용한 펍이었는데, 아무래도 여러분 소행인 것 같습니다?”

길시언은 그렇게 말하며 껄껄 웃었다. 칼도 웃으며 말했다.

“건강하신 걸 보니 기쁩니다.”

그리고 샌슨도 고함질렀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시끄러우니 칼자루를 놔도 될 텐데요?”

“그렇게 생각합니까?”

길시언은 빙긋 웃더니 칼자루를 놨다. 와르릉! 와르릉! 와르릉!

유리컵 깨지는 줄 알았다……………. 주위에서 노래부르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랐다. 문 쪽으로 뛰어가 밖의 날씨를 살피는 사람도 있었다. 잠시 후, 어쨌든 원래의 분위 기로 돌아가 다시 노래부르며 난장판이 되어버렸지만.

샌슨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성능 좋은 마법검입니다.”

길시언은 씨익 웃고는 계속 칼자루를 쥔 채 말했다.

“그래, 국왕 전하는 알현했습니까?”

칼은 조금 슬픈 듯이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시언은 칼의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아뇨. 잘됐습니다. 저희들이 바라는 것 이상으로 잘되었지요. 몸값 마련하느라 애쓸 필요도 없게 되었고.”

“그런데 표정은 개 핥은 죽사발…, 죄송합니다. 야! 조용히 못해! 주인을 이렇게 바보 만들래? 뭐야! 에, 음. 어쨌든 칼 씨의 얼굴은 좋지가 않습니다?”

칼은 그저 미소만 지었고 테이블 귀퉁이에 앉은 내가 말했다.

“길시언. 전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요?”

길시언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국왕 전하 말이냐? 왜, 뭐 기분 나쁜 일이 있었어?”

“글쎄요.”

말을 하려고 들면 뭔 말을 못하겠느냐만, 백성된 자로서 국왕을 모욕하는 것은 자기 아버지 욕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고, 게다가 앞에서 듣고 있는 사람이 그 형이니 뭔 욕을 할 수 있나. 길시언은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을 받은 것 같군. 내가 알기로 그는 좋은 사람이다. 조금 우유부단한 면이 있지만, 좀 조용히해! 에, 그건 오히려 따스한 성품에서 나오는 것이 었고, 어쨌든 인간미가 있는 사람인데?”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죠?”

“그야 6년 전이다.”

“우린 세 시간쯤 되었군요. 6년 사이에 뭐가 바뀌어도 많이 바뀐 모양이에요. 최소한 따스한 성품에서 나오는 우유 부단은 빼도 될 것 같군요. 이해득실을 냉혹하게 따지며………….”

“네드발 군. 입 조심하게.”

칼이 나지막하게 끼어들었다. 하긴, 조금 전에 교수대 밧줄의 감각을 궁금하게 여겼던 주제에 다시 이런 망발이라니. 취했나 보군.

길시언은 내 말에 몹시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갑자기 프림 블레이드의 칼자루를 꽉 쥐면서 말했다.

“지금부터 30분만 조용히해라. 그러지 않으면 널 당장 대장장이에게 데려간다. 그리고 검신에다 수다쟁이 칼이라고 새기게 할 거다. 여기는 바이서스 임펠이니까,

마법검에 글자를 새길 수 있는 기능공을 찾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알았지?”

그리고 길시언은 칼자루를 놔버렸다. 프림 블레이드가 그 협박에 겁을 먹었는지 아니면 분위기 때문에 입을 다물기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림 블레이드는 웅웅거 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칼? 국왕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별로……………. 대단할 것 없습니다.”

그리고 칼은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는 뜻이 강하게 내비치는 표정을 지었다. 길시언은 근심스러운 얼굴이 되더니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아뇨. 국왕 전하께서 아무르타트에게 줄 몸값을 마련해 주실 때까지는 기다려야겠지요. 뿐만 아니라 세레니얼 양과 만나기 위해서라도 2주 동안은 수도에 머무를 계획입니다.”

“그 엘프 아가씨 말입니까? 어디 갔습니까?”

“그분은 수도가 아니라 델하파의 항구에 용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들른 다음, 2주 뒤에 이곳으로 돌아오시기로 했지요.”

“2주? 흠………… 좋습니다. 여러분들이 계신 여관은 어디입니까?”

“유니콘 인이라고, 여관 거리에 있는 곳입니다만.”

“거기 묵을 만합니까?”

“괜찮은 곳입니다만.”

“그럼 저도 거기 묵도록 하겠습니다. 좀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칼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이상하네? 길시언은 레브네인 호수 옆에서 분명히 말했다. 자신과 함께 있으면 우리도 위험할 것이므로 함께 있을 수 없다고. 길시언도 우리가 왜 의아하게 여기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아, 걱정 마십시오. 수도에서는 안전합니다. 외딴 황야에서 죽는다면 모험가답게 죽은 것으로 여기게 만들 수도 있지만, 내가 수도에서 죽는다면 그 혐의가 누구에 게 돌아가겠습니까? 여기서는 조금만 조사해도 내가 누군지 당장 알 수 있습니다.”

아, 그런가?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앰뷸런트 제일을 이끌고는 머리를 끄덕거리며 걸어갔다.

앰뷸런트 제일은 자신의 주인이 없어진 것을 어떻게 느끼는지 모르겠다. 녀석은 그냥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이놈을 팔아야 되겠지. 여관 주인에게 여관비 대신 줘버릴까?

해가 지고 다시 불장대가 켜지기 시작했다. 불장대 앞의 건물에 사는 사람들이 고리 달린 긴 막대기를 들고 나오더니 불장대의 구를 회전시켰다. 불장대의 구가 반구 로 바뀌자 안에서 컨티뉴얼 플레임이 빛나기 시작했다.

“흠, 저 사람들은 아침 저녁으로 저런 일을 해야 되는가 보군.”

“맞다.”

길시언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공공복리를 위한 자신의 노동에는 인색한 법이다.

“그래요? 그럼 불장대를 열고 닫는 일로 시청에서 돈을 받나요?”

“불장대? 아, 가로등 말이니?”

“가로등이라고 하나요?”

“응. 그런데 돈을 받거나 하지는 않는다. 자기 집 앞에 가로등을 설치하는 것은 집에 퍽 도움이 되거든? 일단 밝은 데다가 선전이나 집의 품격에도 도움이 된다. 그래 서 사람들은 자기 집 앞에 설치해 달라고 시청에 요청서를 많이 낸다. 그리고 기꺼이 저런 일을 하는 거다.”

“아하.”

내가 그 불장대, 아니, 가로등을 재미있게 본 것만큼이나 재미있는 시선이 우리들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나와 샌슨은 취해 버려서 말 위에서 휘청거리고 있었지만 수도 시민들의 놀란 시선을 받게 된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축제 기간이라 그런지 주정뱅이의 모습은 희귀한 것이 아니니까. 우리가 시선의 집중을 당하고 있는 것은 우리 둘 앞에서 황소를 타고 걸어가는 전사 때문이다. 전사는 분명 체격도 좋고 멋진 검에 방패도 가 졌고 갑옷도 훌륭하지만, 그것보다는 그 황소 때문에 수도 시민들의 정신없는 시선을 받고 있었다.

어쨌든 열렬한 시선 속에 유니콘 인으로 돌아왔다. 몇몇 아가씨들은 우리들을 끝까지 따라오면서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정말 용감하다아?’, ‘저 남자, 네 취향 아 냐?’, ‘뭐야, 농담하지 마!’ 등으로 할 일이 퍽이나 없나 보지. 취향이 아니면 왜 끝까지 따라오며 구경하냐고?

유니콘 인의 말구종도 갑자기 황소를 만나게 되자 퍽이나 당황했다.

“거, 건초를 먹이면 됩니까?”

“그냥 말 먹이는 대로 귀리나 보리 먹이면 돼. 원래 말이다.”

“예?”

“저주에 걸려서 그렇게 된 거다.”

길시언은 간단히 설명한 다음 선더라이더를 건네주었다. 말구종은 그 황소가 모둠발로 걷는 것을 보고 더 놀랐다.

“진짜 말인가 봐?”

우리가 홀로 들어서자 벌써 돌아와 테이블에 앉아 있는 네리아가 보였다. 네리아는 길시언을 보더니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 황야의 왕자!”

“안녕하십니까, 발 빠른 레이디.”

“여기 오셨군요? 반가워요. 우리랑 함께 머물 거예요?”

네리아는 대단히 기쁜 표정을 지었다. 어라? 왜 저렇게 기뻐하지? 혹시 아직도 프림 블레이드를 슬쩍할 야욕에 빠져 있나? 샌슨과 나는 속도 좀 차릴 겸 맥주를 주문 하며 의자에 앉았다. 길시언은 친절하게 네리아에게 대답했다.

“예. 그럴 생각입니다만.”

네리아는 희색이 만면해서 말했다.

“좋네요. 그런데 칼 아저씨? 가셨던 일은 잘 되었어요?”

칼은 웃으며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네리아는 뭔가 긴 설명을 기다리고 있다가 대답이 너무 간단하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애개? 궁성에 다녀온 사람 치곤 너무 대답이 짧네요? 난 당신들이 앞으로 평생 동안 그 이야기를 자랑해 댈 줄 알았는데. ‘이봐, 내가 궁성에 들렀을 때 말이 야………….’, 이런 식으로.”

네리아는 칼의 목소리를 우스꽝스럽게 흉내내었다. 칼은 빙긋 웃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뭐, 자랑하려 들면 끝이 없다. 우린 국왕도 만났고, 공주 전하도 만 났고, 여러 번 죽음의 고비도 넘겼고, 기분도 엉망이다. …………자랑할 게 없군. 네리아는 자기 혼자서 뭐가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흐흠, 당신들 역시 예사롭지 않아요. 이라무스에서 내가 제대로 봤지.”

“과찬의 말씀이군요.”

저녁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칼과 나, 샌슨이 묵는 큰 방으로 올라왔다. 운차이가 없어 침대는 하나 비어 있었고, 그래서 길시언은 그냥 우리 방에 머무르기로 했다. 여관 주인장은 새로 온 손님이 다른 손님과 함께 방을 쓴다고 투덜거렸지만 길시언은 우리 대신 두둑하게 여관료를 줘버려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허어, 이런 신세를.”

“됐습니다. 나 때문에 여러분이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난 수전노라서……………, 젠장! 에, 보답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네리아는 이루릴과 둘이서 쓰던 방을 혼자 쓰려니 심심하다고 우리 방에서 함께 술이나 마시다 물러나기로 했다. 그녀는 내 목을 껴안고는 흥얼거렸다.

“흥흥, 둘이서 지내다가 혼자 맞이하게 되는 밤은 쓸쓸할 거야. 나도 여기서 자면 안 될까?”

난 그녀의 팔을 떼어 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떼어 내려 하면 더 달라붙기 때문이다. 우웃! 등 뜨겁다!

“여긴 침대 더 없어요.”

“후치 씨 침대에서 함께 자면 안 될까?”

“칵!”

정말 성격 이상하네…………… 애 데리고 노는 게 그렇게 재미있나? 난 화를 내면 네리아의 뜻에 맞게 행동하는 것임을 알았지만, 그래도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목덜미 가 벌게질 지경이거든. 네리아는 까르르거리면서 대단히 재미있어했다.

한편 길시언과 칼은 선더라이더의 저주에 대한 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래, 어느 신전에 가볼 생각입니까?”

“그랜드스톰에 가볼 생각입니다. 코스모스와 폭풍의 에델브로이의 총본산인 데다가, 대대로 왕가와 깊은 관련을 가진 신전이죠. 나도 어릴 적에 거기 많이 들렀습니 다.”

“오호……. 그렇습니까? 그럼, 함께 들러도 될까요? 견문을 넓히는 좋은 기회가 될 듯합니다.”

“그러시죠.”

샌슨이 옆에서 갑옷을 벗다가 말했다.

“그랜드스톰? 에델린이 자라난 그 신전이오?”

길시언은 고개를 돌려 샌슨을 바라보았다.

“어라? ‘치료하는 손’ 에델린을 아주 친근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날 밤은 술과 우리들의 여행 이야기로 흠뻑 젖은 밤이 되어버렸다. 나는 대낮부터 너무 마셔버려서 일찌감치 곯아떨어져 버렸다.

아버지는 아무르타트에 깔려 있었다. 아버지는 대충대충 하듯이 말씀하셨다.

“아들아. 파라핀 양초의 제조법에 대해 말해 보아라.”

아무르타트는 수다스런 마법검 때문에 나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르타트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했다.

“파라핀 양초는…………, 저주 걸린 말의 머리에서 짜내는 경뇌유로 만듭니다. 이때 하트 브레이커를 섞어 경뇌유를 완전히 돌아버리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옳거니! 역시 내 아들이다. 그리고?”

“불장대의 커버를 벗긴 다음 기름을 붓고 커버를 닫습니다. 그리고 밤이 올 때까지 놔둡니다. 밤에 커버를 벗기면 찬란한 빛이 나옵니다.”

“불장대가 아니라 가로등이다.”

“앗! 그렇군요. 어쨌든 그 다음에 걸프스트림 가까이 피워둡니다.”

“이유는?”

“그래야 자이펀 인들의 낙타가 제대로 다닙니다. 자이펀 인들의 낙타는 밤눈이 어둡거든요.”

“그렇지. 그래서 데미 공주를 시집보내야 하는 것이다.”

“잘 알겠습니다.”

그때 아무르타트가 마법검의 칼자루를 놓았다. 와르릉! 아무르타트는 날 내려다보더니 외쳤다.

“우하하! 100만 셀! 100만 셀에 마법검을 팔겠다.”

그러자 내 목을 껴안고 있던 네리아가 외쳤다.

“필요없어! 훔치면 되지.”

네리아는 내 목을 더 바싹 끌어당겼다.

“캑캑! 이거 놔요!”

우르릉, 우르릉!

“우으음.

아이고 머리야. 하트 브레이커가 아니라 헤드 브레이커다. 천장이 이상하게 보였다. 비스듬한 모습이… 아무래도 내가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양이군. 천장은 아침 햇살 때문에 반쯤 환하고 반쯤은 어두워 바라보고 있자니 더욱 현기증이 났다.

난 아픈 머리를 휘저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일어나지지 않았다. 뭐야, 이건? 난 내 가슴에 팔이 하나 올라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팔을 쭉 따라가보니 시트 위쪽으로 선명한 빨간 머리의 일부가 보였다.

“흐어억?”

난 조심스럽게 시트를 내려보았다. 입가에 침 흘린 자국이 가득한 네리아의 얼굴이 보였다. 맙소사! 내가 제일 먼저 시트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내 아랫도리를 더듬 어봤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휴우……, 다행이다.”

망할! 정말 내 침대에서 같이 잤군. 난 조심스럽게 네리아의 팔을 치우고 밖으로 나왔다. 네리아는 몇 번 몸을 뒤척였지만 여전히 쌕쌕거리면서 잘 잤다. 난 네리아에 게 시트를 덮어주고 침대 밖으로 나왔다.

아침 햇살에 두드려맞는 기분이었다. 으윽!

난 휘청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칼은 자신의 침대에서 평온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샌슨과 길시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챙! 채챙! 탕!

뭔 소리야? 난 창문 쪽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흐음? 샌슨과 길시언이 여관 뒤뜰에서 대무를 펼치고 있었고 그 주위에는 바쁜 아침 시간인데도 아랑곳없 이 여관 하인들이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은 박수를 보내거나 응원하고 있었고, 자세히 보니 여관 뒤뜰에 면한 골목길에도 화사한 나들이 옷을 차려입은 아가씨들과 청년들이 샌슨과 길시언의 대무를 구경하고 있었다. 얼래? 마차도 한 대 멈춰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난 세수를 하고 정신을 좀 차린 다음 아래로 내려갔다.

홀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부 뒤뜰로 나가버린 모양이지? 그때 여관 주인이 기지개를 켜면서 홀로 들어섰다. 그는 날 보더니 아는 척했다.

“으하암……. 잘 잤냐?”

저 여관 주인 이름이 뭐더라?

“아, 예. 리테들 씨. 그런데 뒤뜰로 가는 길이 어디죠?”

“응? 거긴 왜?”

“지금 하인들이 다 거기 가 있거든요.”

“뭐야?”

리테들 씨는 놀라서 어느 복도로 달려갔고 난 느긋하게 그 뒤를 따랐다. 내가 바깥으로 나가기도 전에 맞은편에서 하인들이 우르르 달려 들어왔다. 흠. 그리고 그 뒤 에선 리테들 씨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이 게으름뱅이 자식들아! 10분 내로 아침 준비하지 않으면 우리 집 망하는 줄 알아!”

그리고 리테들도 달려 들어왔다. 난 피식 웃고는 뒤뜰로 나갔다. 뒤뜰로 나가니 칼 부딪히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합!”

“하앗!”

샌슨과 길시언은 모두 기합을 가볍게 끊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다. 하긴 기합이 길어봐야 뭐에 좋겠나. 어쨌든 샌슨은 롱소드 하나를 양손으로 잡고 있었고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와 방패를 들고 있었다. 샌슨은 양손으로 들고 있어서 속도에 훨씬 자신이 있다는 투였고 길시언은 방패가 있어 방어는 걱정 없다는 투였다. 그래서 대 무는 주로 샌슨의 공격으로 이루어져 있어 샌슨이 더 유리해 보였다. 하지만 길시언도 침착한 동작으로 잘 막아내고 있었다.

난 뒤뜰 구석의 나무에 가서 나무 아래 기대어 앉아 구경했다.

확실히 샌슨의 공격이 더 빨랐다. 방어가 아무리 좋아도 결국 공격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법이지. 공격이 최고의 방어라고 하지 않나. 게다가 방패 든 손과 칼 든 손 은 결국 같은 몸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방패로 막으며 칼로 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방패의 충격이 반대쪽 팔까지 간다. 더구나 저 오거의 쌍수로 쥔 롱소드

에 맞는다면 더욱 힘들 것이다. 길시언은 손을 들어 잠시 떨어질 것을 요구했다.

“후우……. 역시 당신 말대로 방패 들고 싸울 만한 상대가 아니군요.”

“방패를 놓으시겠습니까?”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몸을 돌렸다. 그는 나를 발견하더니 인사를 건네고는 곧바로 나에게 직업을 주었다.

“방패 좀 맡아줘.”

그리하여 나는 기사의 종자 비슷하게 길시언의 방패를 들고 두 사람의 대무를 구경하게 되었다.

방패를 놓은 길시언은 팔을 한 번 휘두르더니 역시 프림 블레이드를 쌍수로 쥐었다. 길시언은 신중한 중단 겨누기의 자세로 롱소드를 허리 앞에 세워들었고 샌슨도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양자 모두 같은 자세이니 허점이 잘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두 사람은 모두 섣불리 덤벼들지 못하고 검끝을 서로 맞댄 채 신중히 노리기만 했 다.

“허엇!”

샌슨이 먼저 공격에 들어갔다. 샌슨은 검끝으로 길시언의 검끝을 쳐내린 다음 그대로 찌르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길시언은 뒤로 물러나며 샌슨의 검을 쳐올렸다. 그 러자 샌슨도 빠르게 물러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다시 대치. 길시언은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좋은 기술입니다.”

“감사합니다.”

길시언은 빙긋 웃더니 오른발을 들었다.

“OF!”

길시언은 오른발을 들어올리며 그대로 머리를 칠 자세를 취했다. 샌슨은 롱소드를 들어올려 머리 위를 막으려 했으나 길시언은 오른발로 땅을 밟으며 동시에 샌슨의 허리를 치고 지나갔다. 탕!

샌슨의 등 뒤에서 길시언이 외쳤다.

“한대!”

“허어, 이런.”

샌슨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몸을 돌렸다. 검 옆면으로 쳤나 보다. 주위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골목길에서 여관 뒤뜰을 구경하던 사람들이었다. 샌슨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방패를 놓으니 확실히 빨라지는군요.”

“어? 이런, 두 번은 못 써먹을 모양입니다?”

길시언도 미소를 지으며 다시 대치 자세를 취했다. 샌슨은 롱소드 끝을 빙빙 돌리더니 공격해 들어갔다.

“이얍!”

샌슨은 앞으로 뛰며 그냥 무식하게 오른쪽 위에서 대각선 치기로 들어갔다. 길시언은 칼을 들어 막아내었으나 그것은 속임수. 샌슨은 대각선 치기에서 갑자기 자세 를 바꾸었다. 길시언의 칼에 걸린 자신의 칼을 당기면서 왼발을 내딛어 왼쪽 팔꿈치로 친 것이다. 부우웅!

팔꿈치는 길시언의 코앞에서 멈추었다. 길시언은 눈을 껌벅거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엄청난 기술입니다?”

“한 대입니다. 실전에서 나오는 거죠.”

다시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흠, 두 사람 정말 행복하겠군. 에라, 나도 바스타드 들고 내려와서 대무나 하자고 해볼까? 관둬라. 내가 샌슨이나 길시언과 싸웠다간 박 수보다는 조롱이나 동정을 더 많이 받게 되겠지.

흠. 그러고 보니 저 마차 아직도 있네. 거참 요상하네. 마차를 타고 간다면 어디 갈 일이 바쁘다는 말일 텐데 왜 가지 않고 저렇게 구경하고 있지? 마차 안을 슬쩍 훔 쳐보자 20대 중반 가량의 젊은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입을 쩍 벌리고 샌슨과 길시언의 대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침 떨어지겠다아! 옷 입은 품새로 보아 귀족가의 청년인가 보다. 화려한 윗도리의 모습이 잘 보였 다. 마차 창문 밖으로 거의 몸을 내밀듯이 하고 구경하고 있었으니까 잘 보이는 거지. 흠. 젊은이, 황야에서 방금 트롤 두세 마리쯤 잡고 온 듯한 남자들의 싸움은 처 음 보시지?

난 다시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허업!”

“얍!”

둘은 한참 동안 자신들의 밑천을 다 드러내듯이 보여주었다. 정말 멋진 기술들이 많았다. 특히 샌슨은 여러 가지 볼 만한 기술을 많이 보여주었다. 샌슨이 수직 내려 치기를 한 다음 되돌려 치기를 할 때는 길시언도 크게 놀랐다. 샌슨은 왼발을 내딛으며 수직 내려치기를 한 다음 오른발을 왼발의 왼쪽으로 보내며 완전히 돌아 수평 뒤돌아 베기로 들어갔다. 오른쪽으로 돌던 길시언은 갑자기 옆에서 날아오는 칼날에 기겁했다.

“아악!”

골목길에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올 정도였다. 샌슨은 검날 옆면으로 길시언의 어깨를 가볍게 치고는, 질려버린 길시언에게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한 대입니다. 오른손잡이를 상대할 때 오른쪽으로 도는 것은 검사의 상식이죠? 하지만 그런 상식도 고정화되면 위험합니다.”

“허, 아무리 그래도 뒤돌아 베기가 들어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습니까? 후치 저놈은 나보다 더 엄청난 기술을 가지고 있죠. 저놈은 수직 올려치기를 두 번씩이나 하는 무식한 놈입니다.”

길시언은 새삼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고 난 머쓱해져 버렸다. 그때였다.

“아아아악!”

고막이 터질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앙칼지고도 구성진 함성이 들려왔다.

“나가! 나가라고! 멀쩡하게 생겨서!”

“네리아잖아?”

나와 샌슨, 길시언은 부리나케 뛰어들어갔다. 계단을 몇 단씩 건너뛰며 우리 방문을 열어젖혔다.

퍼억! 뭐야? 윽. 베개에 맞았군. 네리아는 시트로 온몸을 감싼 채 베개를 집어던졌고 칼은 방구석에서 두 손을 휘젓고 있었다.

“아, 아니오. 네리아 양, 오해가…..”

그 순간 길시언과 샌슨은 차마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았고 칼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버렸다. 네리아는 계속 구성지게 외쳤다.

“음흉하게! 누굴 건드리려는 거야앗!”

칼은 못 참겠다는 듯이 고함을 질렀다.

“나, 난 네드발 군인 줄 알았단 말이오! 그래서 일어나라고 시트를 벗겼을………….

네리아는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씩씩하게 외쳤다.

“후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앳! 내 방에서 후치는 왜 찾아!”

윽! 아이고 맙소사. 샌슨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리아…………. 여기 우리 방이야.”

네리아는 눈을 크게 뜨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네리아는 침대 수를 세더니, 그 다음 천장의 무늬를 보고, 그 다음 우리 얼굴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기어코 시트 속으 로 파고들어가 버렸다. 네리아는 시트 속에서 머리를 감싸고 웅크린 자세로 외쳤다.

“나 세 개 던졌어요! 세 대만 때려요!”

“커허험! 흠, 흐흐흠!”

어쨌든 우린 그 소란 끝에 아침 식사하러 내려올 수 있었다. 칼은 내 침대에 누워 있는 네리아를 나로 착각해서 점잖게 시트를 들추었고, 네리아는 시트가 들추어지 자마자 칼의 얼굴이 보여서 기겁해 버린 모양이다.

“죄소옹해요.”

“뭐, 실수였잖소.”

칼은 힘들게 미소지으며 네리아를 용서했다. 샌슨은 네리아에게 ‘너 정도의 용모로 칼을 유혹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냐?’ 등의 말을 하다가 발등을 찍히고는 펄쩍펄 쩍 뛰었다.

아침 식사를 하며 샌슨과 길시언은 조금 전에 나누었던 기술들에 대해 토의했다.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옆에서 훔쳐듣자니 샌슨은 변칙과 임기응변에 능하고 길 시언은 정통파의 기술이란다. 그냥 칼 휘두르는 데 정통이 있고 변칙이 있나? 길시언은 빵을 쪼개면서 말했다. 프림 블레이드는 그 짧은 시간이라도 길시언이 칼자루 를 놓자 당장 울어젖히기 시작했다. 웅웅웅.

“칼 휘두르는 데는 정통과 변칙이 따로 없다. 어떤 무기라도 기본은 모두 주먹 쓰기에서 파생되는 것이니까 똑같다.”

“샌슨에게 들었던 말이군요. 그런데…………?”

“다만 어떤 때 어떤 기술을 사용하느냐, 거기서 정통과 변칙의 차이가 나오는 거지. 그리고 그것에 대해 묻지는 마라. 설명하려면 한 달은 걸린다.”

샌슨은 웃으며 수프를 떠먹었다. 그는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이거, 발목이 묶이지 않고 식사하니 그것도 참 희한하군.”

“그새 미운 정이 들었나 보지?”

“그런가 봐. 그래도 동고동락하던 사이였으니까.”

“하긴, 진짜 동고동락이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이를 쑤시면서 홀로 갔다.

“응?”

샌슨이 날 돌아보았다.

“왜 그래?”

“저 사람…….”

홀 한귀퉁이에 앉아 있는 젊은 남자의 모습. 아까 골목길에서 마차를 세운 채 샌슨과 길시언의 대무를 구경하던 바로 그 남자였다.

그는 단정한 자세로 홀 한쪽 끝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일행으로 보이는 마부의 모습이 보였다. 마부는 탄탄한 몸집의 중년 남자로 마치 경호원 비슷한 자세로 청년의 옆에 앉아 있었다. 등에 롱소드 하나를 메고 있는 것도 꼭 그렇게 보였다.

청년은 우릴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마부도 기민한 동작으로 청년을 뒤따랐다. 분명히 우리에게 걸어오고 있는 것이라 우리는 가만히 서서 그 청년을 바라보 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이런 고약한 경우를 봤나. 우리 일행이 다섯인데 다섯 명을 향해 한꺼번에 말을 걸어오니 누가 대답할지 순간적으로 당황해 버렸다. 칼은 길시언을 바라보았지만(왕 자니까.), 길시언은 칼을 바라보았다(최연장자니까.). 그래서 청년은 자신의 인사말에 대한 대답을 받지 못할 뻔했다.

“누구세요?”

딱 부러지는 음성으로 네리아가 물었다. 휴, 다행이다. 우리는 네리아의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몹시 궁금하다는 얼굴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청년은 귀족 가의 자제답게 그런 대로 준수한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뭔가 깊은 수심이 있다는 듯이 안색이 좋지 않았다.

“전 넥슨 휴리첼이라고 합니다.”

휴리첼 휴리첼이라. 칼이 먼저 대답했다.

“혹시, 휴리첼 백작의…………?”

“제 아버님 되십니다.”

기사 휴리첼, 제9차 아무르타트 정벌군의 사령관. 수도에서 캇셀프라임을 호송하여 우리 마을에 왔던 그 백작. 흠, 나야 그 사람 멀리서밖에 못 봤지. 넥슨 휴리첼은 바로 그 휴리첼 백작의 아들이라고 했다.

“어제 임펠리아에 들렀다가 아버님의 소식을 가져온 분이 계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전 아직 젊고 세력도 없는 사람이라 그 보고에 대해 더 많이 듣지는 못했습니 다만, 간신히 그 보고를 가져오신 분이 여기 계시다는 말은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들으시려고 오셨습니까?”

“예. 이 여관으로 오는데 뒤뜰에서 대무하시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대번에 저분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샌슨과 길시언은 동시에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칼은 진중한 표정으로 넥슨을 바라보았다.

“젊고 세력이 없어 듣지 못했다고 하셨습니까?”

넥슨은 얼굴을 조금 붉히더니 대답했다.

“예.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세력이나 지위를 이용하여 제 소관도 아닌 정부의 중요 문건이나 정보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원래 공식 발표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는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제 아버지입니다.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더군요.”

“이해합니다.”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도 아버지 소식이 궁금해서 하멜 집사의 회의에 고집 부려 참가했던 입장이므로 넥슨의 심정은 이해가 간다.

칼은 어떻게 말할까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넥슨은 더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물어왔다.

“고민하실 필요도 없고 위로할 말을 생각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병사들이 달려온 것이 아닌 바에야 승전보는 아니겠지요. 패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칼은 무거운 시선으로 넥슨을 바라보았다. 넥슨은 얼음장 같은 얼굴로 말했다.

“아버님의 생사만 말씀해 주십시오. 아버님께서는 명예롭게 전사하셨습니까?”

뭐? 명예롭게 전사?

칼과 샌슨은 모두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특히 칼은 황당할 것이다. 명예롭게 ‘전사’했냐고 물어온다면, 불명예스럽게 ‘생존’해 계신다고 대답해야 하나? 이런, 제 기랄. 질문이 처음부터 엉망이잖아? 어떻게 대답해도 불유쾌한 대답밖에 할 수가 없는 질문이잖아? 그러나 칼은 능숙했다.

“기쁘게도 춘부장의 명예와 목숨, 모두를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넥슨은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예? 이겼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오……. 저 회색 산맥의 공포 아무르타트는 춘부장의 위용에 대한 솔직한 경탄으로, 몸값을 받고 춘부장을 돌려보내 주기로 했습니다. 자신이 다스리거나 죽여 버릴 수 있는 범용한 인물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겠지요.”

넥슨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포로가 되신 겁니까?”

“아무르타트의 보호를 받고 계시는 것이지요.”

“외교 용어를 쓰시는군요. 외교관 일을 하셨습니까?”

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넥슨은 입술을 꾹 깨물더니 말했다.

“몸값은 얼마입니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춘부장의 몸값을 마련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닐시언 전하께서요?”

“그렇습니다.”

넥슨은 입술 끝을 실쭉거렸다. 저건 무슨 의미지? 넥슨은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아버님의 소식을 전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수도에서 뭐든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휴리첼 가문이 성심껏 도와드리겠습니다. 바람 속에 흩날리는 코스모스 를.”

어랏? 어디서 많이 듣던 인사다? 칼은 넥슨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폭풍을 잠재우는 꽃잎의 영광을 에델브로이의 신자셨군요?”

“재가 프리스트입니다.”

넥슨은 그렇게만 말하고 몸을 돌렸다. 곧 이어 그 마부도 몸을 돌려 넥슨을 따라나갔다. 그러고 보니 저 마부는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네?

난 칼에게 물어보았다.

“재가 프리스트가 뭐죠?”

“아, 그건, 프리스트이긴 한데 신전에 머물지 않고 집에서 머무는 프리스트를 말하는 거야, 네드발 군.”

“집에서? 집에서 뭐하는데요?”

“그러니까 일종의 명예직에 가까운 것일세. 흠. 그러니까 평신도보다 조금 높은 신도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프리스트가 될 정도로 신앙이 깊어 디바인 파워를 쓸 수

도 있지만, 교단의 제재에서는 조금 자유로운 프리스트라네. 귀족의 경우 신전에 들어가면 가문을 이을 수 없지 않는가? 그래서 재가 프리스트가 되는 거야.”

“어, 디바인 파워를 쓴다고요? 에델린처럼?”

“아마 그 정도까진 아닐 거야. 하지만 최소한 잔병치레하는 일은 적겠지. 그리고 시시한 몬스터들은 접근하기 어려울 테고.”

듣고 있던 길시언이 말했다.

“그리고 그런 재가 프리스트가 많은 교단은 확실히 패싸움할 때 유리………….., 으윽! 아니, 위세가 높다.”

난 퍼뜩 어제의 데미 공주를 떠올렸다. 난 역시 민첩해.

“그럼, 왕족들은 아샤스의 재가 프리스트겠군요?”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람이 많지.”

난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아마 데미 공주님은 아샤스의 재가 프리스트겠지. 어제 인사말 기억나는가?”

길시언이 빙긋 웃었다.

“내 누이를 만나셨군요?”

“예.”

“어떻던가요, 건강합니까?”

“예? 예. 제가 뵙기에는 건강해 보이던데요.”

그때 네리아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말이죠. 난 저 사람 마음에 들지 않아요. 딱딱하게 구는 것도 싫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데 기뻐하는 구석이 전혀 없네요?”

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왜 기뻐하지 않는 거야? 포로로 잡혀 있는 것이 수치다, 뭐 그런 말인가? 웃기네! 길시언이 말했다.

“그는 그럴 수도 있지.”

우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말했다.

“그의 가문에는 씻을 수 없는 불명예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겠지요.”

“씻을 수 없는 불명예라고요?”

“그 말씀은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입이 개구리만큼.. 그만둬! 어, 남의 가문의 불명예를 거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가요? 흠.”

네리아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래도 마음에 안 들어.”

우리는 피식 웃어버렸다.

어쨌든 우린 밖으로 나섰다. 네리아는 오늘도 수도를 돌아보겠다고 하면서 가버렸고, 우리 세 명은 별로 할 일도 없어진 참이라 그랜드스톰으로 가는 길시언을 따라 갔다. 여전히 황소를 바라보며 놀라는 수도 시민들의 당황스러운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시 외곽으로 빠져나오자, 난 누구에게 묻지 않아도 대번에 그랜드스톰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우……와!”

샌슨은 입을 쩍 벌렸다.

언덕 위에 날아오를 듯이 우뚝하게 서 있는 장엄한 건물이 보였다. 아래쪽에서 여러 번 굽이지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곧 깎아지른 듯한 절벽 같은 건물의 벽이 보였 다. 벽에는 곳곳에 창문이 뚫려 있었다. 그러나 반대쪽으로 돌아가 보니 몇 층에 걸쳐 정원과 마당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2층 정원, 3층 마당, 이런 식으로, 그리고 현 아한 계단들과 난간들, 우아한 담장과 다리들이 건물 내의 층층과 곳곳을 서로 잇고 나누고 하고 있었다. 엄청난 위용이었다.

우리가 정문에 도달하자 곧 어린 수련사들이 나섰다. 수련사들은 고개를 꾸벅이며 우리에게 인사했다.

“바람 속에 흩날리는 코스모스를.”

“폭풍을 잠재우는 꽃잎의 영광을.”

길시언은 그렇게 대답한 다음 말했다.

“하이 프리스트를 뵈러 왔습니다. 선약은 없지만, 길시언이 찾아왔다고 말씀드려 주시겠습니까?”

수련사들의 얼굴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그 어린 수련사들은 길시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황급히 우리들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예엣? 뭐라고 하셨습니까?”

길시언은 펄쩍 뛰어올랐다. 덕분에 테이블에 있던 찻잔이 쏟아질 듯이 흔들려 나와 샌슨이 부리나케 찻잔을 붙잡아야만 했다. 길시언은 눈이 튀어나올 듯이 하이 프 리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이 프리스트는 귀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귀를 후비더니 말했다.

“두 번 말한다고 해서 뭐 바뀔 건 없네.”

“그럼 안 됩니다!”

“……하늘을 향해 해가 동쪽에서 뜨면 안 된다고 고함을 질러보게.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지 두고 보겠네.”

하이 프리스트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긴 ‘그럼 안 됩니다.’라니. 우습지 않은가?

주위에는 지나가던 수련사들이 우릴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길시언의 고함 소리가 하도 커서 그랜드스톰이 울릴 지경이다.

우린 지금 그랜드스톰의 후원에 와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확실히 멋진 건물이었다. 회랑과 문설주의 기둥들이 모두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하다못해 바닥도 석재로 포장되어 있었다. 부지도 대단히 넓어서 커다란 마당과 분수들이 몇 개씩이나 보였고 건물 내에 구역을 나누는 담장들이 여러 군데 서 있을 정도였다. 우리는 그런 담장을 몇 개나 지나서 하이 프리스트가 있는 이 후원까지 안내되어 왔다.

하이 프리스트는 후원 한귀퉁이의 정자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흰색의 단순한 모직 로브를 입고 있는 중늙은이 모습을 한 그랜드스톰의 하이 프리스트는 보슈왈이라고 자기를 밝혔다. 성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그는 우리와 가볍게 환담을 나누다가 우리 일행이 에델린을 만나서 칼라일 영지의 저주를 풀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크게 기뻐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 자이펀의 흉계였다 는 것까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것은 현재는 국가 기밀에 해당하니까. 왕실에서 그것을 잘 가다듬어 외교적으로 써먹을 수 있을 때까지는 함구하라고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은 그저 알 수 없는 저주였고, 에델린과 협력하여 병자들을 구출했다고만 말했다.

“오호…………. 다행한 일이로군요.”

칼은 정중하게 대답했다.

“에델브로이의 은총에 힘입었음입니다. 하이 프리스트.”

칼은 존칭을 사용했다. 나나 샌슨이 먼저 입을 열었다면 큰일날 뻔했군. 흠. 에델린은 그냥 이름을 불렀지만 하이 프리스트는 경칭을 사용해야 하나 보지? 어쨌든 길시언은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우리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은 다음, 선더라이더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리고 하이 프리스트는 선더라 이더를 살펴본 다음 길시언을 펄쩍 뛰게 만든 것이다.

길시언은 절망적인 얼굴로 말했다.

“리, 리치몬드는 제가 죽였단 말입니다!”

“자랑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하지만 저주의 주체만이 풀 수 있다니요! 그 밖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지금으로선.”

“예? 지금으로선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럼 무슨 방법이………….”

하이 프리스트는 이마를 긁적이더니 말했다.

“저주를 푸는 건 원칙적으로 저주의 힘의 근원을 없애는 것이야. 대개의 경우 저주의 시전자가 죽어버리면 저주가 풀리는 것도 그것 때문이지.”

“그럼, 선더라이더는…………?”

“끝까지 듣게. 그런데 해괴한 수단이나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면 문제가 까다로워져. 프리스트들 중에 타락한 자들이 쓰는 방법으로 신의 이름으로 저주를 내리는 방 법이 있네. 이때는 성직자를 죽여봐야 아무 소용이 없고, 신과의 계약을 나타내는 증거물을 파괴해야 되지.”

나와 샌슨은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그렇다. 칼라일 영지의 세이크럴라이즈는 그 게덴의 디바인 마크를 회수함으로써 해제되지 않았는가? 펠레일은 그 디바인 마크가 ‘의식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하이 프리스트는 ‘신과의 계약을 나타내는 증거물’이라고 하시는군. 하이 프리스트는 계속 말했다.

“이해가 되는가? 그럼 선더라이더를 볼까? 잘생긴 황소군. 허, 인상 풀게. 어쨌든 리치몬드라는 그 마법사를 죽였는데도 저주가 풀리지 않았다는 것은 리치몬드가 뭔가 다른 것에 걸고 저주를 내렸다는 것이 되지. 자네 머리엔 힘들겠지만, 이해되나?”

하이 프리스트는 왕자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농담을 던지고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조금 놀랐다. 길시언도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아니, 아주 구겨진 얼굴로 대답했다. “차라리 이해 못하면 좋겠군요.”

“이해했군. 좋아. 그런데 마법사니까 신의 이름으로 저주를 내리지는 않았을 거야.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선 잘 모르겠네만, 어쨌든 내 디바인 파워로 해 제가 안 되는 것을 봐서 보통 하는 식으로 마나를 집중시키는, 그런 방법은 아닌가 보네.”

“그럼?”

하이 프리스트는 턱으로 어느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빛의 탑으로 가보게. 아무래도 마법사끼리는 서로 잘 알 테지. 혹 다른 사람의 수법을 알아볼 수도 있을 테고 말이야.”

길시언은 입을 딱 벌렸다.

“빛의 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까? 제 말 듣지 못하셨습니까? 제가 리치몬드를 사랑한단…………, 아니! 죽였단 말입니다.”

“아무래도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군?”

“아니오. 마법사를 죽인 제가 빛의 탑으로 가라니요. 그게 말이나 됩니까?”

“글쎄. 리치몬드는 다크메이지라고 하지 않았나?”

“다크메이지든 어쨌든 마법사입니다. 저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정중히 섹스를 요구……………, 죄송합니다. 제발! 내가 지금 하이 프리스트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 모 르겠어? 입 좀 닥쳐엇! 그리고 그런 말을 하고도 네가 숙녀냐! 아아악! 웃지 말고 내 말을 들으란 말이다!”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뽑아들고는 검신에 침을 튀겨가며 바락바락 악을 써대고 있었다. 흠. 저 짓을 6년 동안이나 했다고? 미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하이 프 리스트는 참으로 보기에 즐거운 광경이라는 듯이 길시언의 모습을 감상하다가 호기심이 동한다는 표정으로 길시언에게 말했다.

“그거 나도 한번 쥐어보면 안 될까?”

길시언의 얼굴이 허옇게 되었다. 그는 주춤주춤했지만 거절할 명분이 떠오르지 않는지 머리를 절절 흔들다가 프림 블레이드에게 말했다.

“하이 프리스트께 무례하게 굴지 마.”

길시언은 그렇게 말하면서 프림 블레이드를 건네었다. 하이 프리스트는 점잖게 프림 블레이드를 쥐다가 어깨를 흠칫했다.

이윽고 하이 프리스트는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수련사들은 그들의 하이 프리스트가 롱소드를 들고서 히죽거리는 것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 개중에는 황 급히 디바인 마크를 꺼내들고 에델브로이를 부르며 기도를 올리는 수련사도 보였다. 하이 프리스트는 말했다.

“오냐, 그래. 너 참 귀엽구나. 응? 글쎄다. 아름다운 숙녀가 될 것 같구나. 하지만 여자를 모르는 늙은 프리스트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겠니, 응? 떽. 늙은이를 놀리 다니.”

남녀를 안 가리고 좋아하는 검이라…………. 이제 보니 노소도 가리지 않는가 보군. 하이 프리스트는 프림 블레이드를 길시언에게 되돌려주며 말했다.

“귀여운 검이구먼. 자넨 퍽 즐겁겠네?”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지옥이 따로 없습………… 으악!”

길시언은 귀를 틀어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하이 프리스트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가보게. 그들은 요즘 돈이 모자라는 모양이더군. 자네가 제시하는 것처럼 그런 커다란 일거리는 크게 반길 거야.”

길시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돈이 모자라다니요? 마법사들이요?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될 건 또 뭐겠나.”

“항상 마법 물품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왜 돈이 모자라겠습니까?”

“에끼. 이 사람아. 그런 건 만들기 쉬운가? 재료비는 또 얼마나 드는데.”

길시언의 얼굴에 조금 희망이 떠올랐다.

웅장한 담장과 소문을 몇 개 지나서 간신히 그랜드스톰을 다시 빠져나오게 되었다. 아무래도 길 잃어먹기 딱 알맞은 곳이군.

아마 수련사들은 간혹 길을 잃겠지. 그리고 그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그만 제자리에 무릎을 꿇고 디바인 마크를 꺼내들어 목청껏 ‘에델브로이여, 길을 열어주소 서!’라고 외치겠지. 그럼 밖에서 듣는 사람들은 참으로 신심 깊은 수련사들이 모인 곳이라고 생각을 하겠지. 음.

우리는 수련사들이 대기시켜 둔 각자의 말을 타고 나왔다. 난 엉뚱한 생각을 하느라 등자에서 발이 두 번이나 미끄러졌다.

수도의 쾌청한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랜드스톰은 수도 외곽의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했고 외성에 바로 접해 있는 곳이다. 그래서 아래로 넓고 규칙적으로 늘어선 시가지의 모습과 저 멀리 반대쪽 외성 바깥의 검붉은 황야까지 굽어보였다. 황야에는 은실 같은 강물이 지평선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임펠 리버인 모양이다. 우리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언덕길의 굽이진 길을 따라 내려왔다.

“그래, 어쩌시렵니까. 빛의 탑으로 가보시겠습니까?”

칼의 질문에 고민에 잠겨 있던 길시언이 한숨을 쉬었다.

“어렵겠습니다. 아무리 다크메이지였다 해도 리치몬드는 마법사였고, 따라서 마법사를 죽인 나 같은 백정…………, 그만해! 나 같은 전사에게 잘 대해 주리라고는 생각되 지 않습니다. 그들은 희귀한 사람들이고, 그래서 동아리 의식이 남다릅니다.”

“그런데, 어차피 마법 칼집을 구하러 마법사 길드에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길시언은 푸우 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것도 꽤나 호된 가격을 부를 테지요.”

“허어. 어쨌든 방법이 없으니 그곳에 들러보아야겠습니다?”

“그렇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언덕을 내려와 빛의 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수도에서도 꽤나 유명해져 버렸다. 정확하게는 우리가 아니라 길시언이었지만, 황소를 탄 채로 돌아다니는 중무장의 모험가라는 것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자신의 입 넓이를 과시하는 사람들 사이로 이상한 사열식을 하고 있었다. 혹은 자신의 눈 크기를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길시언은 그런 데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을 모두 프림 블레이드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뒤를 따라가는 우리들로서야 상당히 신경 쓰이는 일임에 틀림없다. 길시언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아, 저기가………….., 응? 왜 그리 늦으십니까?”

“아, 아닙니다. 말씀하시지요.”

칼은 대답하기 위해 목소리를 조금 높여야 했다. 우리는 일행으로 보기에는 의심스러운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길시언을 따라가고 있었으니까. 길시언은 고개를 갸 웃거리며 우리가 다가설 때까지 기다렸다. 왕자님, 친절하시군요. 왕자님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어디 가서 돼지라도 구해 와서 타고 다녀야 하는 것 아닐까? “이제 다 왔습니다. 빛의 탑입니다.”

길시언은 말했다. 그래서 샌슨과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빛도 없고 탑도 없는데요?”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그야말로 보통의 건물들이 모여 있는 길거리였다. 주위를 둘러봐도 무슨 커다란 광장이나 분수대는커녕 상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보통의 기다란 길일 뿐이다. 뭐가 빛의 탑이라는 거지? 그러나 길시언이 가리킨 곳을 보고 나와 샌슨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옆의 건물들 중 하나의 입구 오른쪽에 고풍스러운(좋은 말로 그렇고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촌스러운) 현판이 두 개 붙어 있었다. 그중 큰 것은 ‘커웨인 대서소’라고 적혀 있 었고 그 옆에는 보다 작은 현판이 붙어 있었다.

‘빛의 탑2F

아이고 맙소사. 샌슨은 딸꾹질을 시작했다. 역시 단련된 전사답군. 나는 딸꾹질할 기운도 안 나는데?

그 건물은 우리가 묵고 있는 유니콘 인보다 별로 좋을 것도 없는 보통의 2층 목조 건물이었다. 게다가 건물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박공 형식으로 된 지붕 중 일부는 조금씩 무너져 있었다. 바람이라도 심하게 불면 지붕에 얹어둔 널들이 그냥 쏟아질 것 같다.

그 건물은 양옆의 건물보다 훨씬 오래되었을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더 장엄해 보인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오래되었다는 것에서 좋은 의미는 다 빼고 나면 남는 것, 오로지 낡아빠진 건물일 뿐이다. 그런데 거기서 모자라 2F라고? 그렇다면 2층만 쓴다는 말인가? 칼은 얼빠진 얼굴로 말했다.

“퍽…… 유서 깊어 보이는………… 건물입니다만.”

흠, 역시 칼이군. 표현을 잘하시네. 나와 샌슨은 반쯤은 뭔가 속았다는 기분을, 반쯤은 우스꽝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빛의 탑’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황소에서 뛰어 내리더니 입구 옆에 세워져 있는 말뚝에 선더라이더를 묶었다. 우리들도 일단은 그렇게 했다.

난 기가 막힌 심정 때문에 길시언에게 말했다.

“저, 한꺼번에 네 명이 올라가도 괜찮을까요?”

“계단이 좁긴 하지만…….”

“아니, 무너지지 않을까요?”

길시언은 빙긋 웃으며 그냥 들어섰다. 아무래도 무너질 것 같은데. 샌슨은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길시언을 따라 들어갔다. 그 래서 할 수 없이 나와 샌슨도 따라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더 답답했다. 채광이 어떻게 되어먹었는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마치 이불 속에라도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간신히, 왼쪽에 붙은 문과 위로 올라 가는 계단이 보였다. 왼쪽에 붙은 문에는 바깥에 붙어 있는 것을 그대로 줄인 듯한 ‘커웨인 대서소’라는 명판이 붙어 있었고 계단은……, 아이고 맙소사.

저게 계단이면 우리 영주님이 타고 나간 그것도 전차가 맞다. 용감한 길시언은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삐이…………걱, 삐이…………걱.

“한 번에 한 사람씩 올라가죠. 예?”

내 간절한 말에 칼은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먼저 칼이 올라서고 나서 내가 조심스럽게 발을 얹었다. 삐이…………걱. 뼈 긁는 소리를 내며 계단이 울어젖혔다. 어쨌든 간신히 2층까지는 올라갔다. 2층에 도달하니 역시 아래와 같은 문이 붙어 있었다. 문에는 역시 명판이 붙어 있었다.

‘빛의 탑마법사들의 길드’

그리고 그 아래에는 조금 작지만 더 화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눈이 별로 좋지 않은 칼은 코를 바싹 붙이고서야 그 글을 읽어내었다. 저렇게 눈이 안 좋은데 활은 어떻게 그렇게 잘 쏘시지? 하긴 창문도 없는 곳이라 엄청나게 어두워서 나도 그 글을 읽기 쉽지 않았다.

‘유피넬과 헬카네스가 저울과 저울추를 만들었다면, 나는 저울눈을 속이겠다.’

흐음. 대단한 자존심이 엿보이는 글귀군. 나는 칼을 흘긋 바라보았고, 칼은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핸드레이크의 말이로군.”

길시언은 우리가 충분히 구경하고 나자 문을 두드렸다. 쾅쾅. 안에서 가느다랗지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시오.”

안으로 들어서자 휑뎅그렁한 공간이 나타났다.

2층 전체가 하나의 방인 모양인데, 무슨 가구나 기타 등등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맞은편 벽에 문이 하나 있고 그 문 옆에는 책상과 의자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이상하군. 이 방 넓이로 보니 2층엔 거의 남은 공간이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반대쪽의 저 문은 뭐지? 그 문의 옆에 놓인 책상 뒤에는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초상화는 젊은 남자의 얼굴이었다. 약간 지친 듯이 머리를 방만하게 하늘 저편 어딘가로 기울인 자세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 보통 초상화에서 흔히 그러하듯 이 태풍이 불어도 머리카락 하나 날리지 않을 정도의 경직성을 띤 몸 위에 어색한(물론 곧은 자세이지만 너무 곧아서 어색한) 머리가 달려 있고 그 머리에서는 타오르는 안 광이 앞을 노려보고 있는……………, 그런 초상화와는 달랐다. 그것은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초상화였다. 젊은이의 얼굴은 무슨 밤을 새운 작업이라도 끝내고 뿌옇게 밝아오 는 새벽 하늘을 보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피곤한 기색이 알게 모르게 드러나 있지만 그 눈빛에는 뿌듯한 감정이 가득해 있었다.

핸드레이크의 초상화인가? 마법사의 길드에 걸려 있는 초상화니까 그것 이외에는 생각할 게 없다. 흐음. 핸드레이크가 저렇게 생겼나?

초상화 아래의 의자에는 ‘인간이 여길 찾아온 것은 수천 년 만이군……’ 하는 식의 옛날 이야기에 잘 나오는 말을 해도 썩 어울릴 듯한 노인이 하나 앉아 있었다. 위 의 생기 있는 젊은이의 얼굴에 비해 볼 때, 처음에는 앉은 채 죽은 시체로만 보이던 그 노인이 입을 열어서 난 크게 놀랐다.

“마법사는 아닌 듯한데, 용건이 뭐요?”

길시언이 말했다.

“마법적인 일에 대한 상담을 원합니다.”

“규칙은 아오? 자격을 보이시오.”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속을 뒤지더니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보석을 꺼내어 책상에 올려놓았다. 와! 방이 열 배는 밝아진 것 같 다. 보석은 자그마한 것이지만 꽤나 아름다웠다. 노인은 뼈마디가 툭툭 불거진 손가락으로 보석을 집어들더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곤 보석을 도로 내려놓았다. “가져가시오.”

길시언이 그것을 다시 집어들었다. 저건 뭐야?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보이라는 건가? 노인은 말했다.

“들어가 보시오.”

“알겠습니다.”

가라니? 어디로? 길시언은 노인의 책상 옆에 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저 뒤에는 그저 벽장 정도의 공간밖에 없을 텐데? 칼이 들어가고 나서 샌슨 도 들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샌슨은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왜 그래?”

샌슨은 얼빠진 얼굴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난 의아해서 앞으로 나서서 문을 열었다. 그러곤 나도 역시 문을 쾅 닫아버렸다.

“문부서져!”

노인이 고함을 빽 질렀다. 할 수 없어서 우린 다시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하지만 들어가자마자 샌슨과 나는 부리나케 도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 이거, 잠깐. 여긴 그 방인데?”

“……두 가지 중의 하나야. 샌슨도 그걸 본 모양이니 난 안 미쳤어. 아니면 샌슨과 내가 동시에 미친 거야.”

노인은 우리를 험악하게 노려보고 있었고, 그래서 샌슨과 나는 도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건 말이 안 되는데?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선 곳에는 아래로 길게 계단이 놓여 있었다. 벽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그저 계단만 놓여 있었다. 계단은 저 아래의 평야까지 뻗어 있었다. 하늘은 주황 색조였다. 평야에서 조금 멀리로는 탑이 하나 솟아 있었다. 그리고 주위는 그저 넓은 공간뿐이었다. 사방으로 지평선이 보였고 우리가 서 있는 계단은 허공에서 그냥 끝나 있었다. 그리고 계단 꼭대기에 우리가 들어온 문 하나만 서 있었다.

아무래도 발걸음이 안 떨어져 나와 샌슨은 우리가 들어온 문을 다시 노려보았다. 그건 그냥 공중에 서 있는 문이었다. 몸을 옆으로 돌려 문 뒤쪽을 보니 허공이었다. 하지만 문을 여니까 다시 아까의 그 어두운 방과 우리를 째려보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왜 자꾸 문을 여닫는 거야!”

노인이 고함을 빽 지르는 바람에 우리는 황급히 문을 도로 닫았다. 샌슨은 결정짓는 듯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둘 다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겠어.”

“존경스러워, 샌슨. 샌슨은 참으로 똑똑한 거 같아………. 내가 왜 샌슨을 오거라고 생각했지?”

우리는 히죽히죽 웃으며 그 말도 안 되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웃음밖에 안 나왔으니까.

계단을 다 내려서자 아름다운 평야에 서 있게 되었다. 주위는 산 하나도 볼 수 없는 완전한 평야였다. 들판 곳곳에 피어 있는 꽃들에 황금 잎사귀가 피어 있는 것이 나, 머리 위 하늘을 날고 있는 몇 개의 양탄자는 별로 괴상할 것도 없다. 지금 내 왼쪽에서 코를 드르렁거리며 졸고 있는 드래곤도, 그 드래곤의 꼬리를 베고 잠들어 있는 노인도, 그 노인의 다리를 베고 잠들어 있는 블링크 도그의 모습도 있는데 뭐. 블링크 도그는 졸면서 껌벅거리고 있어 보고 있기가 어지러웠다.

난 그 드래곤을 보고는 다시는 드래곤을 무서워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저건 뭐야? 왜 드래곤이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있는 거지? 도대체 저 바지는 어떻게 만들었지?

“꼬리 구멍은 내놓았군.”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야.”

나는 뭐가 다행인지 되묻지 않았다. 말할 기분이 아니니까.

길시언과 칼은 탑 앞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시언은 평온한 모습이었지만 칼은 경탄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시언은 말했 다.

“정식으로는 이게 빛의 탑입니다.”

빛의 탑? 나 같으면 뒤죽박죽 탑이라고 하겠다.

탑에 창문들이 제멋대로 달려 있다는 것도 별로 내 눈을 잡아놓지는 못했다. 탑은 층마다 크기가 다 다른 모양이다. 아니, 층이라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중간 중간에 아무렇게나 튀어나오고 들어가 있었다. 심한 경우 탑 벽에 새로운 방을 몇 개씩 달아둔 것도 보였다. 아무래도 생각나는 대로 크기가 각자 다른 방을 하나씩 둘씩 마구 쌓아올린 탑 같았다. 중간에 아무렇게나 튀어나와 있는 베란다나, 그 베란다 끝에 매달린 거대한 새장에 새 대신 스크롤이 들어가 있는 것도 별로 놀라고 싶은 광경은 아니다.

칼은 이 빛의 탑에 대한 단순 명쾌한 감상을 말했다.

“허…… 허…… 허…… 허…….”

칼의 비평은 참으로 날카로운 데가 있군.

정문으로 들어서자 넓은 홀이 보였다. 그리고 홀 주위에는 예상대로 들쭉날쭉한 벽 중간에 뚫려 있는 통로, 높이가 제멋대로인 천장에 수직으로 뚫려 있는 통로 등이

보였다. 통로라기보다는 방을 마구 쌓아올리다가 중간중간에 생긴 틈처럼 보였다. 정상적으로 걸어다니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더 이상 탑의 다른 곳으로 갈 방법이 없 겠는걸. 어쨌든 그 넓은 1층 홀에는 둥글고 약간 낮은 바닥이 있었고 그 중앙에 2큐빗 정도의 기둥과 그 위에 얹힌 수정구가 보였다.

길시언은 수정구에 손을 얹고 말했다.

“마법 물품의 구입과 마법적 저주에 대한 상담을 원합니다.”

그러자 어디선가 맑은, 남녀를 구분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입하시려는 마법 물품은 어떤 종류입니까?”

우와흐하흐하……….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간드러진 목소리다. 길시언은 대답했다.

“마법 검집입니다. 사일런스 주문이 걸린 검집의 제작을 원합니다.”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대답이 다시 들려왔다.

“피리자니옵스 님께서 여러분을 맞이하실 겁니다. 그 후 마법적 저주에 대한 상담을 해주실 분을 수배하겠습니다.”

피리자니옵스? 발음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별로 품위가 없는 이름이군. 우리는 그 피리자니옵스라는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으아아아아!”

꽝! 천장에 뚫린 틈 중 하나에서 웬 노인이 하나 떨어져 홀 바닥에 쫙 엎어졌다. 두 다리와 두 팔을 완전히 펼친 안정감 넘치는 자세였다. 우리들은 놀라서 그 노인에 게 다가갔다. 노인은 심한 타박상을 입은 채 기절해 있었다.

“크, 큰일이다. 의사 의사 없어요?”

다시 그 간드러지면서도 우아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의료적 상담을 추가하시겠습니까?”

“……사람이 떨어졌어요!”

그때 우리의 고함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이 노인이 눈을 떴다. 노인은 끙끙거리더니 눈을 감고 뭔가 캐스팅을 하는 눈치였다. 노인은 곧 몸을 툭툭 털면서 일어났다. “이런, 젠장. 내 방을 수직 통로 옆으로 옮겼던가?”

칼이 얼빠진 목소리로 질문했다.

“괘, 괜찮습니까?”

노인은 허리가 쑤신다는 듯이 뒤로 좀 젖혔다가 대답했다.

“괜찮소. 끄응. 그런데 무기에 대해 상담을 요청한 것이 당신 일행이오?”

칼은 황망한 얼굴로 길시언을 바라보았고 길시언도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노인은 말했다.

“그럼, 내 방으로…………….”

노인은 말을 멈추고는 구멍과 틈이 숭숭 뚫린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노인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어디서 떨어졌지?”

“저긴데요?”

“에잇! 올라가기 귀찮군. 루! 내 방을 1층으로 옮겨줘!”

그러자 다시 고막이 녹아내릴 듯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리자니옵스 님. 당신은 이번 달에만 벌써 방을 네 번 옮기셨습니다. 길드장 님의 요구에 따라 더 이상의 방의 이동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피리자니옵스는 입을 쩍 벌리더니 외쳤다.

“거짓말! 난 세 번 옮겼어!”

“뮤테온 님이 유니콘페가수스 교배 실험을 하던 당시 주무시는 데 방해가 된다고 옮기신 것이 네 번째 이동입니다.”

·유니콘과 페가수스를 교배하면 그건 뭐라고 불러야 하지? 유니서스? 페가콘? 난 잠시 머리에 뿔이 나고 등에 날개가 달린 말을 생각해 보았다. 나쁘지 않은데? 선더라이더와 싸워도 뿔싸움이 볼 만하겠군.

“아차! 젠장. 잠결에 옮겼지. 그래서 내 방이 수직 통로 옆에 있었군! 젠장. 알았어, 알았어!”

피리자니옵스는 역정을 내었다. 그리고 그는 손가락을 입에 꺾어넣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익! 곧 수직 통로에서 뭔가 불그스름한 것이 밑으로 떨어졌다. 그것은 둘둘 말린 양탄자였다.

피리자니옵스는 양탄자를 펼치더니 그 위에 올라서면서 우리에게 말했다.

“올라서시오.”

우리는 쭈뼛거리며 양탄자에 올라섰다. 우리가 다 올라서자 그는 말했다.

“내 방으로 올라가자.”

양탄자는 둥실 떠올랐다. 나는 무릎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양탄자는 그대로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올라갔다. 구멍 옆 벽은 마치 여러 개의 방을 쌓아올린 사이의 틈처럼 보였다. 들쭉날쭉한데다가 기다란 틈도 있었고 통로도 있었고 문도 보였다.

잠시 후, 다른 건물이라면 대략 3층 정도로 느껴질 높이까지 올라왔을 때 양탄자는 멎었고 우리 앞에는 문이 하나 있는 것이 보였다. 피리자니옵스는 그 문을 열더니 안으로 훌쩍 뛰어들어갔다.

난 양탄자가 출렁이면 어쩌나 싶었지만 양탄자는 단단하게 굳은 바닥 같았다. 그래서 우리 일행도 모두 쉽게 방으로 들어섰다. 흠, 요런 구조니까 문 열다가 그대로 아래로 곤두박질쳤군. 건망증이 심하면 비명횡사하겠는걸?

방 안은 창문이 몇 개 있었지만 그 창문이라는 것이 별로 소용이 없었다. 창문 바깥은 또 다른 방의 벽이 막아서 있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방 천장에 뭔지 모 를 빛나는 공을 붙여두었기 때문에 방 안은 밝았다.

피리자니옵스는 벽 한쪽의 책장에서 어린애 장난감처럼 보이는 테이블 하나와 의자 다섯 개를 꺼내들더니 등 뒤로 휙휙 던졌다. 그러자 테이블과 의자는 거대해졌 다. 이젠 말할 기분도 들지 않는다. 그래서 샌슨과 나는 묵묵히 의자를 만져본 다음 털썩 주저앉았다. 피리자니옵스는 술병과 잔을 들고 와서 테이블에 놓으며 말했 다.

“이건 여기서도 만들 수 없는 거란 말이야.”

칼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예?”

“여기선 뭐든 되지만 제대로 된 술은 안 되지요. 허허.”

칼은 곧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이런 놀라운 기적들은 이 공간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하긴……… 이런 말씀 뭣합니다만, 밖의 공간에서도 가능했다면 바이서스는 예전에 마법 왕국이 되었겠군요.”

피리자니옵스는 놀란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우시군? 하긴, 이런 일들이 저 바깥에서도 가능했다면 예전에 우리 마법사들은 세계를 지배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걱정 마시오. 여기는 가장 깊은 꿈의 뿌 리와 가장 선량한 거짓말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공간이오. 한마디로 말하자면 총체적 환상이지.”

“실제가 아닙니까?”

“바깥의 사람들이 보기엔 실제가 아니지. 하지만 댁은 지금 여기 앉아 있지 않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칼의 푸근한 대답에 피리자니옵스는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허……………. 오늘 잘못하다간 크게 물어뜯기게 생겼군. 핸드레이크의 백일몽에 타이거가 한 마리 들어왔구려.”

“가당찮은 말씀이십니다.”

결국 길시언 또한 갈데없는 칼잡이가 되어버려, 나와 샌슨과 더불어 역시 감명 깊은 대화라는 듯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간신히 피리자 니옵스는 용건을 물어보았고 길시언은 별로 설명하지도 않고 프림 블레이드를 피리자니옵스에게 건네었다.

“으랏차, 와차와차앗!”

피리자니옵스는 대단히 희한한 비명을 지르며 프림 블레이드를 테이블에 던졌다. 프림 블레이드는 웅웅거리기 시작했고 피리자니옵스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 는 눈을 번쩍번쩍 빛내면서 프림 블레이드를 바라보았다.

“오오! 이, 이건! 이런 엄청난 마법검이……………. 혹시 당신은?”

“길시언 바이서스입니다.”

피리자니옵스는 눈을 크게 뜨더니 곧 길시언에게 목례했다.

“역시! 미욱한 마법사가 전하를 뵙소. 그렇다면 이건 장물이구먼?”

피리자니옵스는 짓궂은 표정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지만 길시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장물은 아닙니다. 난 왕자고, 궁성은 내 집입니다. 가출한 셈이지만. 어쨌든 내 집의 창고에서 꺼내온 것이 장물이 될 순 없지 않겠습니까?”

“헛, 알겠소. 그런데 저에게 뭘 원하시오, 왕자님? 이런 엄청난 마법검에 제가 뭘 더 추가할 수는 없는데?”

“검이 아니라 검집의 문제입니다. 저게 하도 시끄러워서 그러는데, 내 검집에 사일런스 주문을 영구히 걸어주시겠습니까?”

피리자니옵스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래서 길시언은 좀더 설명했다. 하루 종일 칼자루를 쥐고 말을 들어줘야 하며,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끊임없이 울어젖힌다는 식 으로, 피리자니옵스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그게…… 거참. 왕자님은 이런 말씀 들어보셨소? 자연력은 한곳에 비정상적으로……”

“마력이 집중되는 것을 거부한다.”

사람들이 모두 날 쳐다보아서 난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피리자니옵스에게 말했다.

“아, 제가 아는 마법사 한 분이 들려줬습니다.”

“그런가? 좋아. 들으셨소, 왕자님? 마력이 계속 한 장소에서 위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은 자연력에 위배되는 일이기 때문에 대단히 어려운 일이오.”

“그런데요?”

“영구히 효과를 나타내는 마법검이 비싼 이유가 바로 그것이지. 그러니 검집 하나에 사일런스 주문이 계속 작용하게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 이런 말이지.” “안 됩니까?”

“차라리 새로 만드는 게 낫소.”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해주십시오. 모양은 아무렇게나 해도 좋지만, 방음은 확실히 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보통 좋은 검집이 가져야 할 조건을 그대로 따르면 됩니 다.”

“그래요? 흠…………, 잠깐.”

피리자니옵스는 뭔가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천장에 대고 말했다.

“루, 내 스톡에 아다만틴이 얼마나 남아 있지?”

곧 어디선가 그 착착 달라붙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없습니다.”

“뭐야? 없어? 그럼 미스랄은?”

“3파운드 가량 남아 있습니다.”

“엇? 3파운드라고? 이런…………, 내화석은?”

“2파운드 가량 남아 있습니다.”

피리자니옵스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천장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그럼, 다른 마법사들 중에 혹시 창고에 여유분 남아 있는 사람 없나?”

“여유분으로 취급된 품목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피리자니옵스는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그는 갑자기 책장으로 달려가더니 수정구를 꺼내왔다. 그러고는 수정구를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어이, 케이지. 어, 혹시 아다만틴이 남아 있는 것 있나? ・…뭐, 없어? 미스랄도, 아무것도 없다고? 이런 젠장. ………시몬슬, 시끄러, 너 말고 진짜 시몬슬을 데려와! 클론과 이야기할 거 아냐. 그래, 시몬슬, 혹시 아다만틴이나 미스랄………… 없다고? 아, 고맙네. ……………한, 한! 좀 일어나! 제길, 또 정신 동결에 들어갔군. …………키뤼시나! 오, 내 사랑. ………뭐야? 없다고! 이런, 알았네.”

피리자니옵스는 한참 동안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포기해 버린 얼굴이 되었다.

“이거 정말 마법사란 족속은 재료 아낄 줄을 모르고 써댄다니까. 그 귀한 금속들을 무슨 진흙이나 모래 정도로 여기고 실험을 해대니, 거참. 안 되겠군. 길시언 왕자 님. 내일 다시 들러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회색 산맥이나 갈색 산맥에 연락을 좀 해봐야겠습니다.”

길시언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피리자니옵스를 바라보았다.

“재료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빛의 탑에?”

피리자니옵스는 턱을 쓸면서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 마법사란 동물이 죽었다 깨어나도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재료가 불순해서 실험이 실패한다고 믿는 동물이거든. 그래서 실험 한 번 할 때마다 희귀 금속 수십 파운드씩을 날려버리는 놈들이라서. 걱정 마십시오. 내일까지는 재료를 충분히 구해 놓고 견적도 낼 수 있을 거요.”

피리자니옵스는 마치 자신은 마법사가 아닌 것처럼 마법사에 대한 험담을 퍼부었다. 길시언은 눈썹을 찡그리면서 뭔가 생각에 잠기는 표정이었다. 그는 잠시 후 의 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내일 언제쯤이면 되겠습니까?”

“지금 이 시간 정도라면 되겠습니다. 이거 정말 미안합니다.”

“아니, 누가 잘못한 일은 아니잖습니까.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우리는 피리자니옵스에게 인사를 보내고는 다시 그 양탄자를 타고 1층까지 내려왔다. 그 동안 길시언은 계속해서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1층 홀에 도달하고 나서 길시언은 우릴 둘러보더니 말했다.

“갑시다.”

“예? 선더라이더의 저주는…………….”

“그것도 어차피 재료가 없어서 못한다고 할 겁니다. 몇 가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길시언은 별다른 설명도 하지 않고 빛의 탑 바깥으로 나왔다. 난 아쉬워서 계속 뒤를 돌아보며 일행의 끄트머리를 따라 걸었다.

정말 기막힌 경관이다. 바람을 따라 황금 꽃잎이 수천 개씩 흩날리는 모습도, 까마득한 주황색 하늘 아래에 하얀 점이 되어 날고 있는 해오라기들의 모습도, 졸면서 껌벅거리고 있는 블링크 도그나 그 목 위에 다리를 얹어놓았다가 발뒤꿈치를 물리고 펄쩍펄쩍 뛰는 늙은 마법사의 모습도.

계단을 다 올라가 문을 열고 원래의 공간으로 나왔다.

숨막혀.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컴컴하고 냄새 나는 도시 건물의 2층이었다. 어쩐지 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는 진저리를 치며 길시언을 따라 아 래로 내려왔다. 하지만 바깥에 나왔어도 여전히 꾀죄죄하고 냄새가 난다. 도시니까.

하늘빛깔 하나만이 봐줄 만했다. 푸른색이었다.

길시언은 깊은 생각에 잠겨 프림 블레이드가 웅웅거리는 것도 거의 듣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프림 블레이드는 끔찍한 소음을 내었고 길시언은 화다닥 칼자루 를 쥐었다.

“이봐, 이봐! 나 지금 대장간에 가는 길이다. 그래도 계속 떠들래?”

그리고 길시언은 칼자루를 놓았으며 프림 블레이드는 고요해졌다. 칼이 물었다.

“대장간에 가신다고요?”

“대장간이나…… 보석상 몇 군데 돌아봐야겠습니다. 길드도 몇 군데 돌아봐야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계속 따라다니기 힘드시다면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어, 저희는 상관없습니다만.”

“그러신가요. 그럼.”

그리고 우리는 길시언을 따라 대장간 순례에 들어갔다.

길시언은 조그만 대장간에는 들르지 않았다. 커다란 무기 공방이라고 불릴 만한 곳에 주로 들렀으며, 책임자 정도 되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요즘 귀금속 시세 가 어떠냐는 질문이었다. 대답은 대개 요즘 귀금속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라는 대답이었다. 길시언은 상인 길드나 상회에도 몇 군데 들렀다. 찾아간 곳마다 대접하 는 방식이 모두 달라서 나는 별별 종류의 차를 다 얻어마시게 되었다. 하지만 커피를 내놓는 곳에서는 마시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길시언은 보석상들을 돌아다니게 되었고 그때는 이미 해가 서쪽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는 시간이었다. 샌슨은 당연히 하루 중 이 시간에 가져야 할 중대 행사를 생각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고 길시언도 그 생각이 든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트레이트 헤븐으로 찾아갔다.

“여! 어서 오시오!”

샌슨은 고함을 질렀다.

“스테이크 5인분! 수플레 10인분!”

샌슨은 산더미 같은 음식을 먹어치우고는 배에 손을 얹어둔 채 더없이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플레를 씹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칼과 길시언이 나란히 앉 아 있었고 나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하트 브레이커를 마시고 있었다. 길시언은 하트 브레이커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말했다.

“내 생각이 틀렸습니다. 난 마법사 길드에서 날 괴롭히려고 재료가 없느니 하는 말을 꺼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돌아다녀 봤습니다.”

길시언은 말을 꺼내고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바이서스 임펠에서 귀금속이 진짜 동이 난 것 같습니다. 이건 예삿일이 아닌데요.”

칼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유가 뭘까요?”

“글쎄요……………. 철이라면 모르겠지만 귀금속이 품귀 현상을 보이다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철이라면 전쟁에 꼭 필요한 금속입니다. 그리고 귀금속이라도 금이나 은 같은 것이 품귀를 일으킨 것은 이해가 갑니다. 결제 수단으로 사용되는 물품이니까요. 하지만 아다만틴이나 미스랄 같은 마나 메탈마저도 품귀 현상이라니. 그건 너 무 귀중한 금속이라 마법사 말고는 아무도 쓸 일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전장으로 갈 일은 없을 텐데요.”

나와 샌슨은 칼과 길시언의 대화를 열심히 들었다. 프림 블레이드마저도 호기심을 느끼는 건지 아직 겁을 먹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렇지요. 전쟁은 양산의 다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 더 과격하게 소모해 버리고도 버틸 수 있느냐.’라는 뜻이지요. 전략 전술이라는 것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예. 그렇기에 양산과 관련이 없는 그런 물품이 품귀를 일으킨다라…………, 글쎄요. 혹 채굴 인원이 모두 전장으로 나갔기 때문이 아닐까요?”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귀금속들은 드워프들만이 캐낼 수 있습니다.”

“드워프만이?”

“예. 그것은 채굴의 난이도의 문제라기보다는 카리스 누멘의 허락에 대한 문제입니다. 결국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드워프들이 채굴을 못한다거 나, 혹은 중간 상인 누군가가 반출을 하지 않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최소한 드워프들은 매점매석으로 자신들의 광물의 물건값을 올리는 일은 하지 않으니까 그들 이 광물을 반출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겠습니다. 두 번째가 조금 가능성이 높겠군요. 전쟁의 특수 경기를 노리는………….”

길시언은 말을 끝내지 않고 대신 눈썹을 더욱 찌푸렸다. 그는 잠시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난 특히 여러분들이 걱정스럽습니다.”

칼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길시언은 말했다.

“여러분들은 아무르타트에게 보석을 지급해야 되지 않습니까? 국왕 전하가 보석을 준비해 주겠다고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오전에 들러보셔서 아시겠지만 바 이서스 임펠에서 귀금속뿐만 아니라 보석도 구경하기가 하늘에 별따기가 아닙니까?”

앗! 어, 억? 그런가? 그게 그렇게 되나? 칼은 입을 크게 벌리고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낮고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의견을 말하자면, 여러분들은 무작정 국왕 전하만 믿고 기다려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대비책이 있어야겠습니다.”

“허나 무슨 대비책이 있겠습니까? 보석이 정말 모자란다면 저희들로서도 대책을 강구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길시언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을 굳힌 듯이 말했다.

“이유를 알아보도록 해야겠습니다. 이것이 전쟁의 특수 경기를 노린 상인의 매점매석인지, 아니면 뭔가 불가항력적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만일 어 느 거상의 농간이라면 그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길시언은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덩달아 우리도 비장해져 버렸다.

“우리가 전선에 있지 않다 해서 전쟁이 우리 일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형제의 일이며 우리 아버지의 일이며 우리 아들의 일입니다. 그런 자들의 피의 값으로 지켜내는 이 나라의 평화를, 한낱 상인의 이익 증대를 위해 양도할 수는 없습니다.”

음, 상거래의 부정은 용납할 수 없음이다! 그것은 저 남부의 열사의 뙤약볕 아래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병사들에 대한 모독이다! 그들은 일부 거상들의 부의 증대 를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런 작자들 때문에 우리 아버지의 몸값을 마련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절대 용납 못해!

길시언은 엄숙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자! 여러분!”

우리는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 왕자님 좀 싱거운 데가 있군. 엄숙하게 말하기에 무슨 방법이 있는 줄 알았더니.

한참 고민 끝에 칼이 의견을 내놓았다.

“첫째로, 물건을 고가에 구입하겠다는 소문을 유포시키는 방법이 있겠습니다. 통상 가격의 열 배나 스무 배로 구입하겠다고 말한다면 매점매석의 경우 물건을 내놓 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 방법은 우리 스스로가 무슨 거상이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질 거라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렇겠군요.”

“둘째로, 창고들을 조사해 보는 겁니다. 정말 바이서스 임펠의 모든 귀금속을 모조리 수거했다면 그 부피는 엄청날 겁니다. 창고 영업을 하는 사람들을 조사해 보면 대충 윤곽이 나올 듯합니다. 하지만 이 방법의 문제는, 우리가 창고 영업자들의 장부를 조사할 권한이 없다는 점이겠지요. 혹 개인 창고를 가진 상회의 경우라면 아예 조사가 안 될 겁니다.”

“세 번째는?”

“……전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는 말씀드리지 않았는데요?”

길시언은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아, 보통은 세 가지 아닙니까? 그리고 보통은 세 번째가 가장 기가 막힌 방법인데.”

“글쎄요. 지금 당장은 더 이상 생각나는 방법이……………, 아! 네리아 양!”

“예?”

칼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네리아 양은 우리도 알고 있는 어떤 직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금속이나 보석류의 정보라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가장 빠르겠습니까?”

그러네? 달아나는 귀중품을 쫓으려면 레인저에게, 달아나지 않는 귀중품을 쫓으려면 도둑에게 맡기라고 했던가? (달아나는 귀중품이란 발이 달린 것, 즉 중요 인물을 말한 다.)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세 번째가 있고, 항상 그렇듯이 세 번째 방법이 가장 적당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트레이트 헤븐을 나와 우리 여관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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