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3권 – 제6부 : 톱메이지 6화 (3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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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3권 – 제6부 : 톱메이지 6화 (3권 끝)

6

밤하늘엔 구름이 끼어 있어 달빛 하나 없이 칠흑 같은 밤이다. 요 며칠새 계속 구름이군.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꺾으며 담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으세요?”

“응? 어, 괜찮다. 걱정 마.”

아프나이델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 어깨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추워서 떠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몹시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타고 있는 앰뷸런트 제일의 목을 쓰다듬었다. 운차이가 없어지고 처치 곤란이던 앰뷸런트 제일은 오늘밤의 모험을 위해 아프나이델을 태우고 있었다.

담은 그렇게 높지도 않았고 게다가 이런 밤이라면 누구의 눈에도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저 담 뒤쪽에는 다른 차원에서 왔다는 유령 견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젠장. 그놈들은 투명한 물건도 볼 수가 있으니 어둠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프나이델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엑셀핸드 님.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나도 엑셀핸드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곧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엑셀핸드는 이루릴의 말 래셔널 셀렉션을 타고 있었다. 우하하. 엑셀핸드는 절대로 말에는 탈 수 없다고 말했지만 오늘 밤의 계획에서 그를 말에 태우지 않을 수는 없었다. 엑셀핸드는 불평하고, 투덜거렸고, 자신의 신세를 좀 저주한 다음, 래셔널 셀렉션 위에 올라타 있었다. 래셔널 셀렉션을 고른 이유는 그 말이 가장 얌전할 뿐 만 아니라 한때 엘프를 태웠던 말이기에 기수를 낙마시키지 않을 정도의 지혜와 배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리의 근거 없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나 엑셀핸드는 그런 믿음은 전혀 따르지 않고 대신 자기만의 안전 장치를 구사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안장에 묶어버린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말 위에 묶인 채로 당당하게 말했다.

“걱정 마! 자네나 조심하게. 마법사들은 항상 느리게 움직이다가 엉덩이에 칼 맞는다는 내 소견을 따라서는 안 된다구!”

아프나이델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긴장이 조금 풀리는 모양이다.

엑셀핸드는 말을 마치자 곧 기운차게 담벼락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기운찬 것은 래셔널 셀렉션이었고 엑셀핸드는 꽁꽁 묶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떨 면서 걸어갔다. 그 다음, 길시언과 샌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우리에게 기운찬 손짓을 해보이고는 각자 멀어져갔다.

엑셀핸드는 건물의 동편, 샌슨은 서편, 그리고 길시언은 북쪽을 맡는다. 정문이 있는 남쪽에는 나와 칼, 그리고 아프나이델이 남았다. 한쪽 옆에 서 있던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시오, 아프나이델. 그리고 네드발 군, 자네도. OPG가 없는 이상 자네는 평범한 전사도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네. 웬만하면 자네에게 그 일을 맡기지 않았으면 했는데…………”

“염려 마세요. 그래도 제가 제일 다리가 빠르잖아요. 그리고 목숨 날릴 자리는 따로 준비해 뒀으니 걱정 말아요.”

“목숨 날릴 자리? 어떤 곳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대륙 최대의 미녀 백 명이 운집하여 내 옷깃이라도 만져보려고 애쓰는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행복에 겨워 죽어갈 생각입니다.”

“……자넨 영원히 살지도 모르겠군.”

칼은 이런 대답을 한 다음 역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와 아프나이델은 각자 정문 옆에 서서 준비를 갖췄다. 아프나이델은 계속 호흡을 크게 하고 있었다. 겁이 나는가 보군. 하긴 나도 긴장이 되어 어깨가 결릴 지경이다. 나는 어깨 위로 손을 올려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지는 바스타드의 손잡이를 쥐어보았다. 설마 OPG 가 없다고 검을 놓쳐버리는 꼴불견은 보이지 않겠지? 자, 할 수 있어!

시작은 엑셀핸드부터다.

“야호오!”

건물의 동편에서 굉장한 고함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러자 곧 저택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해졌다. 천지가 진동할 정도의 개소리였다(어째 말이 좀 이상하다.). 엑셀핸드는 그 커다란 목소리로 구슬픈 드워프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기억하지.

밤과 낮이 처음으로 갈릴 때 고개 숙여 바라본 호수 속에 하늘의 가장 깊은 노천광에

점점이 박혀 있는 보석들.

별이여, 아름다운 그대, 신비여.

내게 와서 빛나라!

나는 땅을 파네.

딱딱한 바위는 나의 침상이니

망치는 휘두르고, 정으로는 쪼고

주의 깊게 살펴보고, 세심하게 더듬어

대지의 품속에, 나의 별을 찾는다.

보석이여, 땅으로 내려온 별이여.

내게 와서 빛나라!

그들의 한없는 욕망이 올올이 서려 있기 때문인지, 엑셀핸드의 노래는 무겁고 강한 리듬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한없이 구슬프기도 했다. 그러나 할슈타일 저택 의 그 유령견들에게는 그야말로 개소리였나 보다. 엑셀핸드가 ‘내게 와서 빛나라!’라고 외칠 때마다 더 크게 짖어대고 있었다. 왈왈왈!

소란스러운 발자국 소리와 함께 드디어 정원에서 램프의 불빛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아마 그 30명의 전사들이 움직이는 모양이다. 불빛이 저택의 동쪽 담장 쪽으 로 움직여가더니 곧 고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 짜리몽땅한 광부 녀석이! 여기가 어디라고 고함을 지르는 게냐!”

“밤중에 무슨 짓이야! 네 녀석들 땅굴인 줄 알아!”

그런 여러 가지 욕설이 퍼부어지기 무섭게 곧 엑셀핸드의 노랫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대단해. 곧 전사들은 더 크게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으아아악! 유령 개다!”

멀리서 들려오는 처절한 고함소리. 저택의 서쪽이다. 그러자 곧 전사들은 기겁하며 외쳤다.

“침입자다!”

흐음. 샌슨의 고함소리 정말 끝내주네. 샌슨은 정원 안으로는 들어가지도 않은 채 저택 바깥에서 고함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사들은 침입자가 들어와서 페 이스풀 하운드에게 공격당하는 줄 알고 놀라서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 동안에도 샌슨의 고함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으악! 살려줘! 유령 개다! 이런! 으악!”

“내게 와서 빛나라!”

저택의 동쪽과 서쪽에서 고함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페이스풀 하운드들은 온갖 보석의 이름을 대면서 무조건 자기에게 와서 빛나라고 외치는 엑셀핸드가 상당 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한편 전사들은 페이스풀 하운드들이 모조리 동쪽에 있는데도 서쪽에서 누군가가 유령견들에게 쫓기고 있다고 여기고는 그를 구해 주 려는 목적은 절대로 아닌 걸음걸이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순간 저 멀리 북쪽에서 길시언이 행동에 들어갔다.

“도둑이야!”

그러자 곧 전사들은 크게 당황했다.

“뭐, 뭐야! 이런, 저택 뒤에도 침입자다! 아니, 이건 양동 작전이야!”

바로 그 순간, 아프나이델과 나는 재빨리 철문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급하게 올라갔던지 바지가 걸려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투둑! 우리는 거의 굴러 떨어질 듯이 철문 뒤로 뛰어내린 다음 곧장 한 바퀴 구르고는 앞으로 달 려갔다. 이야아아아압! 전사들이 이중의 양동 작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금방일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정문에서 본관까지 달려가야 한다.

아프나이델과 나는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갔다. 왼쪽에서는 개들의 울음소리가 요란하고 오른쪽에서는 전사들의 고함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우리는 다리가 빠져나갈 듯이 달려 간신히 본관 입구에 다다랐다. 자, 이제 내 차례다!

나는 달려가던 그 자세 그대로 땅을 박차면서 뒤로 돌았다. 다리가 뒤로 지지직하고 밀렸지만 어쨌든 몸은 돌렸다. 그러고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목이 터져라 고함 을 질렀다.

“이런, 빌어먹을! 잠겼잖아!”

“으아악! 본관이다앗!”

왼쪽에서 전사들의 기겁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내 지친 영혼의 안식이여.”

“누구냐! 섰거라!”

서란다고 서냐? 내가 돌았냐? 개들도 요란하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젠장! “내게 와서 빛나라앗!” 엑셀핸드의 노랫소리가 거의 악쓰는 소리로 들릴 만큼 높아졌지만 개들은 이제 엑셀핸드에게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다. 개들의 고함소리가 점점 커졌다. 난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갔다.

“나 지금 그대에게로 달려가노라.”

“섰거라! 제기랄, 거기서!”

정중하게 요청해 봐. 그러면 혹시 설 마음이 생길지도 몰라!

“월월월월!”

젠장, 너희들의 이빨에는 관심이 없어!

“아름다우신 나의 레이디.”

정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사들의 발소리도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졌다. 빌어먹을! 페이스풀 하운드들의 발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데 울음소리는 지척 이다. 유령견이라서 발소리가 없나? 왼쪽 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저기다! 잡아….. 으악!”

전사들의 당황한 외침이 들려왔다.

“뭐, 뭐야?”

“화살을, 으윽, 화살을 쏜다! 팔에 맞았어!”

칼이 한대 쏘아붙인 모양이다. 좋아, 그럼 일단 전사들은 좀 뒤처지겠고, 페이스풀 하운드들은? 그때 오른쪽 뒤에서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크아아악!”

뭐야, 그새? 젠장, 물린다! 눈앞에 철창이다, 해보자!

“제미니잇!”

나는 몸을 날렸고 간신히, 그야말로 간신히 철창에 매달리는 데 성공했다. 나는 거의 철창을 제대로 밟지도 않으면서 문 위로 기어올라갔다. 내 뒤에서 달려오던 유 령견은 허공을 물었다가 그대로 속도를 줄이지 못한 채 철문을 들이박고 말았다. 깨갱! 얼씨구, 유령견 주제에 할 건 다 하네. 나는 굉장한 속도로 철문을 넘었고 곧 땅에 나동그라졌다. 땅을 구르는 내 귀에 말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힝힝힝!

칼이 트레일에 탄 채 제미니까지 끌고 왔다. 나는 한 바퀴 구르자마자 다시 뛰어 제미니의 안장을 붙잡았고 한 호흡도 하기 전에 올라탔다. 그러자 칼은 안쪽을 향해 들으라는 듯이 목청껏 외쳤다.

“실패다! 도망가자! 이랴!”

“제기랄! 실패라니! 어째서 실패를! 왜 실패를! 이런 실패가!”

나도 실패라는 말을 대단히 강조해 버린 다음 욕지거리를 좀 곁들이고는 굉장한 속도로 달려갔다. 등 뒤의 저택 쪽에서는 저놈들을 잡아서 대단히 아프게 때려줘야 된다는 의미를 험악한 욕설로서 퍼부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달려갔다. 침입 시도는 이렇게 실패로 막을 내려야 하니까.

골목길을 달려가는 동안 곧 샌슨과 길시언이 합류했다. 잠시 후 질린 얼굴의 엑셀핸드가 나타났다. 우리 모두 엑셀핸드에게 대단히 훌륭한 승마술이라는 칭찬을 해 주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는 질려서 멋대로 달아나버리지도 않고 정확하게 우리에게 합류했으니까. 하지만 엑셀핸드는 정신이 없어서 우리의 칭찬을 받아들일 여 유가 없었다. 어쨌든 꽤나 멀리 떨어진 다음에, 추격자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칼은 숨을 돌리고 말했다.

“좋아. 전부들 괜찮은가?”

“예. 추적자는 없군요.”

“그럼, 이제 아프나이델에게 달려 있군.”

후우, 후우. 숨이 막힐 지경이군. 볼이 얼얼한데. 어쨌든 이젠 시작이다.

경비병들이 침입자들에 대한 보고를 하려면 본관 문이 열릴 것이다. 적어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문을 열 것이다. 후우우. 그리고 보고가 이루어지며 조사에 따른 소란이 일어나는 동안, 인비저빌리티를 사용한 아프나이델은 열린 문을 통해 유유히 2층으로 올라갈 것이다. 우리의 작전은 사실 삼 중의 양동 작전이었거든. 아프나이델은 이미 시동어를 알고 있으니 역시 유유히 3층까지 올라갈 것이다.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문제가 있다면 아프나이델은 3층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것. 엑셀핸드는 묶여 있으면서도 래셔널 셀렉션의 안장을 꽈악 거머쥐고 고개 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젠장. 그 친구, 수완이 좋은 녀석은 아니었는데.”

칼은 안심시키려는 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자신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믿어보시죠.”

“흠. 어차피 믿었으니 시작한 걸세. 그건 그렇고, 젠장. 엄청나게 높구먼. 이제 좀 말에서 내려도 되나?”

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추적자들이 없다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잠시 기다리시죠.”

엑셀핸드는 투덜거리며 아래를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들어 하늘만 쳐다보았다. 허, 수도까지 걸어오신 노커가 수도에서 말을 타게 되시는군. 난 숨을 몰아쉬다가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이 터져나오려 했고, 결과적으로 딸꾹질에 시달리게 되었다. 딸꾹! 딸꾹!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하늘을 보던 샌슨이 말했다. 칼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구름이 저런데, 별이 보이는가?”

“별을 본 건 아닙니다. 아까부터 속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대충 다섯 번 불렀으니 시간이 맞을 겁니다.”

“그런가? 재미있는 기술이구먼. 좋아. 그럼.”

어두운 골목에 숨어서 동정을 살피던 우리들은 다시 살금살금 밖으로 나갔다. 할슈타일 저택 쪽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저택에는 모두 불이 켜져 있었고 정원에 는 횃불들이 마구 오가고 있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던 칼이 혀를 찼다.

“어허. 실패하고 달아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모양인데?”

그럼 작전 실패인데? 젠장,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며 달아난 이유는 우리가 실패했다고 여기게 만들기 위해서인데 저 사람들은 아직까지 소란을 떨고 있잖아. 몇몇 은 문 밖에 나와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도대체 뭐야?

그때였다.

“땡땡땡땡땡……!”

갑자기 건물의 3층 정면에서 굉장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저택에서는 놀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이건?

“3층에 침입자다! 정면 창문이다!”

“어디야! 어느 곳이야?”

우리는 놀라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런, 아프나이델이군! 길시언이 외쳤다.

“알람 주문! 그렇다면 창문으로?”

설마 아프나이델은 3층 창문을 열고 뛰어내릴 생각인가? 이런 제기랄, 지금 정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3층에서 뛰어내려 살아난다 하더라도 도망갈 수는 없다! 샌슨은 돌격 준비를 갖추었고 그러자 래셔널 셀렉션 위에 묶여 있던 엑셀핸드는 카리스 누멘께 자신의 영혼을 맡긴다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샌슨은 외쳤다.

“뛰어듭시다! 그를 구해야…………”

“뒤쪽으로!”

칼의 고함소리가 더 컸다. 우리는 놀라서 칼을 바라보았으나 칼은 이미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랴, 에하!”

칼이 달려가는 방향은 저택 뒤쪽이었다. 우리도 영문을 모르고 달려갔다. 저택이 크긴 하지만 말로 달리니 순식간이었다. 순식간에 저택 뒤쪽에 도착하고 나자 칼은 빠르게 말했다.

“길시언, 샌슨! 담을 넘으시오, 엄호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칼은 말을 담 옆에 붙이더니 안장 위에 서서 담 위로 올라섰다. 저렇게 날렵한 동작이라니. 길시언과 샌슨도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얼떨떨해하면서도 일단 담장을 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로프 트릭!”

아프나이델의 목소리! 그리고 저택 3층의 뒤쪽 창문에서 던져진 밧줄이 허공에 서는 것이 보였다. 땡땡땡땡땡! 저건 레너스에서 보았지. 밧줄은 허공에 묶인 것처럼 꼿꼿이 섰다. 곧 3층 창문에서 시커먼 것이 뛰쳐나오는 것이 보였다.

허공으로 뛰쳐나온 것은 아프나이델이었다. 아프나이델은 죽을 힘을 다해 밧줄에 매달렸고 마법에 의해 꼿꼿이 곤두선 밧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밧줄에 매 달려 아래로 주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그의 로브가 크게 부풀어올랐다.

멀리 본관 앞쪽에서 외치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속았다! 뒤쪽이다!”

“뒤로! 뒤로 가라앗!”

길시언과 샌슨은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고 아프나이델도 떨어지는 속도와 다름없이 땅으로 내려왔다. 그는 곧장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그때였다. 드디어 저택을 돌아온 것인지 저택의 양쪽 모서리에서 횃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길시언과 샌슨은 아프나이델의 뒤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칼은 활을 당기기 시작했다. 탱탱탱!

“으악! 화살이다!”

칼은 저택의 벽을 맞추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저 커다란 저택을 집중 사격하고 있었다. 탱! 태댕, 탱탱! 저렇게 큰 건물이 과녁이니 아무렇게나 쏴도 되겠지. 창문 깨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쨍그랑! 그리고 창문이 깨질 때마다 알람 주문이 발동되면서 요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땡땡땡땡땡!

횃불은 갑자기 낮아졌다. 아마 전사들은 어둠 속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맞을까봐 재빨리 허리를 숙인, 혹은 땅에 엎드려버린 모양이다. 그 동안에도 아프나이델과 길 시언, 샌슨은 계속 달려왔다. 엑셀핸드는 애가 타서 어쩔 줄을 몰라했지만 마침내 그들은 담장을 넘었다. 그리고 칼은 드디어 화살통을 완전히 비워버렸다. 화살 서른 개 정도를 순식간에 쏴버린 모양이다.

세 사람이 담을 넘어서자마자 우리는 각자를 말에 태우고는 곧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확실히 추적자들이 있겠지. 길시언은 목청껏 지시했다. “날 따라오시오!”

길시언은 바이서스 임펠의 복잡한 뒷골목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한참 동안 정신없이 이리 꼬이고 저리 비틀어진 골목길을 누비다보니 어디가 어딘지 도 모르겠다. 그런데 갑자기 길시언은 황소에서 내려서더니 우리에게 낮게 외쳤다.

“모두 말에서 내리시오.”

우리도 일단 말에서 내렸다. 엑셀핸드만이 말에 묶여 있어서 빠르게 내리지 못했다. 어쨌든 다른 사람들이 다 내리고 나자 길시언은 느긋하게 황소를 끌면서 걸어가 기 시작했다. 마치 산책이라도 가는 걸음걸이다.

“말발굽 소리를 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조용히 걷다가 곧 으슥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이곳에는 가로등도 없었다. 길시언은 아예 선더라이더를 세우더니 벽에 기대어 서버렸다.

“조용히 기다립시다.”

“알겠습니다.”

엑셀핸드는 살았다는 표정이 되더니 곧 밧줄을 풀고는 샌슨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품위를 지킬 정도의 모습으로 말에서 내렸다. 그러더니 그는 파이프를 꺼내어 물 었다. 아프나이델은 벽을 짚고 헉헉거리고 있었지만 역시 달아날 자세가 아니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질문했다.

“추적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그냥 기다린다고?”

“그렇지. 잠시 기다리면 저택의 하인들과 전사들은 성문까지 달려가 버리겠지.”

성문으로? 아하. 그거군. 모두들 성 밖으로 도망갔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죽어라고 성문으로 달려갈 테니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면 된다는 말이로군. 역시 말에서 내 린 칼은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괜찮소, 아프나이델? 손은? 밧줄을 잡았는데.”

“괜찮습니다. 후우, 후우. 손수건을 대고 밧줄을 잡았습니다.”

“아, 그런가요?”

아프나이델은 숨을 몰아쉰 다음 차분하게 로브 자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나온 그의 손에는 무슨 책 같은 것이 보였다. 캄캄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난 저 책의 표지가 무슨 색깔일지 장담할 수 있다.

“푸른 표지의 책입니다.”

“성공하셨군요!”

샌슨은 크게 기뻐하며 아프나이델의 어깨를 두드렸다. 엑셀핸드는 손이 닿지 않아 그렇게는 못하고 대신 그의 손을 잡고 흔들며 기뻐했다. 아프나이델은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아,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뒤로 나올 줄 알았습니까? 제발 예측해 달라고 빌긴 했습니다만, 정말 길시언 씨와 샌슨 씨가 달려올 때는 내 눈을 믿지 못할 뻔했습니다.”

그 말에 우리는 다시 칼을 바라보며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칼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마법사잖소.”

칼의 그 말에 엑셀핸드는 목청껏 웃었다. 기겁한 샌슨이 엑셀핸드의 입을 틀어막아 그는 간신히 웃음소리를 죽였다.

“큭큭큭! 그래! 이 친구는 마법사라고! 그리고 칼 자네는? 허허, 마법사의 계략도 가볍게 알아차리는 괴물이구먼. 큭큭큭!”

아프나이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 책을 칼에게 넘겨주었다. 칼은 컴컴한 골목길에서 그것을 읽을 수는 없는지라 그냥 말안장의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다.

할슈타일 저택의 사람들은 성문 경비병들에게 물어보고는 우리가 성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러면 곧 여관들을 돌아다니며 우리들을 찾으려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리 짐을 챙겨서 나왔었다. 골목길에서 한 시간쯤 기다린 다음, 우리는 모두 흩어져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명씩, 혹은 두 명씩 짝을 지어 그랜드스톰으로 돌아왔다.

낮에 미리 약속을 해두었기 때문에 수련사들은 별말 없이 우리를 들여 보내주었다. 하이 프리스트에 의해 배정받은 우리 방으로 돌아오고 나자 우리는 그제야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 아무도 잠들지 않았다. 모두들 눈을 비벼가며 테이블 주위에 몰려앉았고, 칼은 아프나이델이 훔쳐내 온 그 책을 가져왔다. 칼은 피로한 목소리로 그 표 지를 읽기 시작했다.

“『바이서스 임펠 여행객을 위한 가볼 만한 술집들』이라………….”

모두들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이 되었다. 샌슨은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넥슨은 술 마시고 싶을 때 꺼내볼 책이 필요했나 보군요?”

그러나 아프나이델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칼도 단조롭게 웃으며 말했다.

“비밀이 있는 책이라면 표지는 가짜겠지. 어디 보세나.”

칼은 표지를 넘겼다.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는 후다닥 책을 넘기기 시작했다. 칼은 빠른 속도로 맨 뒷페이지까지 읽었고, 그러고는 다시 뒤에서 앞쪽으 로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어? 전부 술집 이름 맞는데?”

우리는 놀라서 모두 다 그 책을 한 번씩 보았다. 진짜였다. 각 페이지마다 맨 위에 주점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주점의 주인이라든지 자랑할 만한 술의 이름이라든 지 하는 것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스트레이트 헤븐의 이름과 함께 바이서스 임펠 최고의 수플레를 맛볼 수 있는 곳이라는 설명도 찾아낼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 책이 마지막으로 아프나이델의 손에 들어갔을 때, 아프나이델은 빙긋 웃었다.

“시크릿 페이지입니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예?”

“페이지들 중에 서류 몇 개를 끼워놓았습니다. 그리고 마법으로 그 서류를 다른 페이지와 똑같아 보이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마법으로 풀어야 됩니까?”

“아뇨. 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찾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냥 꼼꼼히 읽어서 앞뒤가 맞지 않는 페이지를 찾아내어도 됩니다만, 그건 시간이 걸리겠군요. 음, 엑셀핸드 님?”

“으응?”

“여기선 엑셀핸드 님의 손이 가장 정교하겠군요.”

엑셀핸드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드워프니까 손재주는 가장 정교하겠지. 아프나이델은 책을 엑셀핸드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눈을 감고 페이지를 만져보십시오. 읽으려고 하면 속게 됩니다. 그러니까 눈을 감고 감촉만으로 느낌이 다른 페이지가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런가? 알았네.”

엑셀핸드는 그 책을 받아들고는 눈을 턱 감고 한 페이지씩 넘기며 손으로 페이지를 쓰다듬었다. 누가 보면 드워프는 눈이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는 광경이었다. 엑셀핸드는 자기의 감각에 자신이 있는지 그야말로 대충 스치듯이 한 페이지씩 만져보며 빠르게 넘겼다. 우리는 그가 너무 살짝 만져서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잠시 후, 엑셀핸드는 그중 하나를 접어버렸다. 저것인가? 엑셀핸드는 계속 페이지를 넘기다가 중간중간 페이지를 하나씩 접곤 했다. 빠른 속도로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만져보고 엑셀핸드는 눈을 떴다.

“자네 말이 맞군. 접어놓은 것들은 느낌이 달라.”

아프나이델은 씩 웃으며 말했다.

“역시 드워프다우십니다.”

그 다음은 샌슨이 나이프를 꺼내어 책을 묶은 끈을 자르고 접어놓은 페이지를 뽑아내게 되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책의 한 페이지였을 때는 그야말로 빼곡한 술집

이름의 나열이었던 종이들이 책 밖으로 빠져나오게 되자 곧 글자들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우리는 감탄하면서 그 광경을 보았다.

서류를 모두 뽑아내기도 전에 칼은 다급한 마음에 첫 페이지를 읽었다. 서류를 뽑아내는 샌슨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숨죽여 칼을 바라보았다.

칼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그는 얼빠진 얼굴로 말했다.

“이건………… 바이서스의 군단 편성과 군단장들에 대한 조사 보고서인데?”

“예에?”

모두들 크게 놀랐다. 길시언은 황급히 손을 내밀었고 칼은 그에게 서류를 넘겨주었다. 길시언은 눈이 빠져라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이럴 수가….. 이건 군 기밀인데!”

칼은 샌슨이 뽑아놓은 다음 종이들을 서둘러 읽어 내려갔다. 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씨구, 이건 군대의 보급 계획표 아닌가! 보급선과 중간 집결지가 다 표시되어 있어!”

우리는 완전한 당혹에 빠져버렸다. 모두들 앞다투어 서류들을 보았다. 모두다 군 기밀에 속하는 것들이었다. 바이서스 군대 보급 계획표, 인사표, 배치도, 기본 전술 과 응용, 작전 단기 계획, 장기 계획! 길시언은 너무 기가 막히자 허탈하게 웃어버리면서 말했다.

“맙소사, 이것들을 보기 위해서라면 자이펀 군대에서는 뭐든 내놓겠는데?”

엑셀핸드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엑셀핸드는 바이서스의 군대 기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나 보지만 우리는 숨죽여서 그것들을 읽었다. 그때 느닷없이 칼이 고함을 지르며 테이블 위에 온몸을 던지듯이 하면서 서류를 그러모았다.

“모두들! 읽지 마시오!”

칼이 너무나 험악하게 외쳐서 우리는 찔끔했다. 그러나 칼은 주저하지 않고 마치 빼앗듯이 우리 손에 들려져 있는 서류를 가져갔다. 너무 급하게 당긴 나머지 찢어질 뻔한 것도 있었다. 칼은 황급히 서류를 모으면서 말했다.

“이건, 이건 절대로 외부에 유출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기겁하면서 서류를 내던졌다. 그래서 칼은 한결 편하게 서류를 모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모으면서도 그 스스로도 역시 절대로 보지 않으려 애쓰는 동작이 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확신시키듯이 혼잣말 비슷하게 중얼거렸다.

“만일의 경우 우리 입에서 나갈지도 모르는 일이오. 절대, 절대 읽어서는 안 됩니다.”

모두들 그 말에 찬성했다. 샌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다시 끼워넣을까요?”

칼은 크게 심호흡한 후에 말했다.

“아니, 그건 안 되네. 이 서류가 왜 할슈타일 저택에 있는지, 그리고 왜 넥슨이 이 서류를 훔쳐내려고 하는지 알기 전까지는, 이건 누구에게도 줄 수 없네.”

칼은 자기 손에 모여진 서류를 내려다보면서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투다. 그러자 길시언이 말했다.

“태우십시오.”

“예?”

“그 서류, 누구에게도 유출되어서는 안 됩니다. 태워버리십시오.”

칼은 그게 합당한 말인지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길시언은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곧 초를 자기 앞으로 끌고 오더니 칼에게 손을 내밀었다. 칼은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한 어투로 말했다.

“너무 성급한 판단이 아닐까요?”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군대에서는 성급하고 자시고가 없습니다. 행동은 즉각이어야 합니다.”

“아뇨. 안 되겠습니다. 이 서류는 국왕 전하께 제출해야 됩니다.”

“전하께 말입니까?”

“예. 그리고 전하께서 할슈타일 후작을 불러 추궁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왜 할슈타일 후작이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는지를.”

길시언은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럼, 내일 즉각입니다. 날이 밝는 대로 임펠리아에 가야 합니다. 이 서류가 우리 손에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위험합니다.”

“당연한 말이십니다.”

“네리아가 먼저예요.”

칼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가 말했고 그러자 길시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급하게 말했다.

“네리아가 먼저예요. 넥슨이 진짜 도둑 길드의 마스터라면 우리가 궁성으로 향하는 것쯤은 간단히 알아차릴 거예요. 수도에 정보망이 쫙 깔려 있을 테니까. 그럼 우 리가 서류를 빼돌리는 것도 짐작하겠죠. 그러면 네리아가 위험해져요.”

그 말에 길시언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갑자기 험악한 얼굴이 되었다.

“젠장. 이 서류들은 바이서스의 안보가 걸린………….”

길시언은 말을 맺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불편한 표정이 되었다. 잠시 후, 길시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치. 네 말은 이 서류들을 넥슨에게 넘겨주자는 말이냐?”

“아뇨. 그런 말이 아니에요. 이 서류는 넘겨주면 안 되죠. 하지만 네리아를 먼저 구출해야 돼요. 네리아를 구한 다음에 이 서류를 전하께 드리도록 하죠.” “어떻게 네리아를?”

말문이 막힌다. 서류는 전하에게 갖다줘야 한다. 하지만 네리아를 구하기 전에는 가져다줄 수 없다. 그런데 네리아를 구하려면 서류는 넥슨에게 줘야 한다. 그러나 넥슨에게 주면 전하에게는 줄 수 없다. 뭐가 이래?

칼은 턱을 긁으며 이 복잡한 상황을 단순하게 만들어버렸다.

“넥슨이 원한 것은 푸른 책이니까. 책만 가져다주지. 술 마시고 싶을 때 이용할 수 있도록.”

우와, 간단하시군. 길시언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프나이델은 부정적인 표정이었다.

“서류가 빠진 것을 알면 가만 있지 않을 텐데요.”

“그는 마법사가 아니지 않소.”

“예. 하지만 어떻게 확인을 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그 스스로도 책에 뭔가 있다는 것을 아니까 책을 노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확인할 수단은 갖춰두었을 텐 데요.”

“그렇겠군요. 음. 이젠 그걸 고민해 봐야겠군요. 아프나이델. 당신은 그거, 시크릿 페이지, 맞습니까? 예. 그것을 사용할 수 있습니까?”

“사용할 수는 있습니다만 기주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기주를 하면 되겠군요?”

“예.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당신은 지금부터 푹 자두십시오. 내일 아침엔 그 마법을 기주해야 됩니다.”

“그럼?”

“예. 가짜 서류를 만들겠습니다. 오랫동안 속일 수는 없지만 네리아 양을 구할 정도의 시간은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 그럼 되겠군요.”

아프나이델도 찬성했다. 그러자 길시언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좋습니다. 그럼 가짜 서류를 만드십시오. 저는 불침번을 서겠습니다. 이 서류가 우리 손에 있는 한, 설령 이곳이 그랜드스톰이라 해도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샌슨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교대로 서도록 하지요.”

뒷정리에 들어섰다.

먼저 책을 다시 원상태로 만들어놓고 그 서류는 따로 모아 추렸다. 그러고는 그것을 누가 맡을 건지 잠시 고민하게 되었다. 아프나이델은 자기 배낭을 모조리 비우고 나서 서류를 배낭에 집어넣고는 배낭에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온갖 물건을 다 꺼내어 흔들고 뿌리고 중얼거리고 나서 아프나이델은 이마의 땀을 닦았다. “웬만한 마법사가 아니라면 이제 이 배낭은 제 허락 없이는 열 수 없습니다.”

그러자 길시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프나이델의 배낭의 용도를 쿠션으로 바꿔버렸다. 그는 그렇게 배낭을 아래에 깔고는 험상궂은 표정으로 프림 블레이 드를 지팡이 삼아 짚고 당당한 자세로 앉았다. 마치 ‘날 죽이기 전에는 내 엉덩이 아래의 이 물건엔 손도 못 댄다!’고 외치는 듯한 표정이다. 칼은 말했다.

“네드발 군? 종이와 잉크, 펜을 꺼내게.”

“알았어요.”

칼은 곧 테이블에 앉았다. 길시언은 여전히 험악한 눈초리로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방문을 노려보고 있었고 아프나이델은 곧 침대로 갔다. 칼은 나와 샌슨에게도 종 이를 내밀면서 말했다.

“자네들, 졸린가?”

샌슨은 허허 웃고 나서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뭘 쓰면 됩니까?”

“언뜻 보기에 마치 군 기밀인 것처럼 보이게 쓰도록.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글쎄요. 군 기밀인 것처럼 쓰는 게 쉬운 일은…….”

“아니, 그렇게까지 정확할 필요는 없네. 그저 언뜻 보기에 그렇게 보이도록 쓰면 된다 이 말이네. 자신이 없다면 아무 말이나 써도 좋네만 최소한 무슨 서류처럼은 보여야 하네. 마구 갈겨쓴 낙서만 아니면 되네.”

“알겠습니다. 해보죠.”

나와 샌슨도 곧 위조 서류 작업에 동참했다. 엑셀핸드는 글쓰기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며 질색했지만 그렇다고 잠자리에 들 생각도 하지 않고 우리 옆에서 작업을 구 경했다. 그리고 길시언은 여전히 그 엄청난 서류들을 자신의 굳건한 엉덩이로 지켜내겠다는 단호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허, 이런 날씨에 바닥에 앉아 있으면 힘 들 텐데.

그러나 곧 우리도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젠장. 도대체 무슨 말을 써야 하지?

난 샌슨을 흘깃 바라보았지만 샌슨은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이 팔로 감싸고 쓰고 있었다. 에엑! 관둬라. 안 본다, 안 봐! 그럼 어디. 난 칼을 슬쩍 보았다.

칼은 그야말로 펜이 날아갈 듯이 써대고 있었다.

‘상기의 예에서 추측될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전력의 배치에 대한 군단장 개개인의 차이는 대저 허즐릿의 저서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그 군단장이 아침 식사 로 무엇을 먹었느냐에 따르는 것임은 의심할 바 없는 진리이다. 그러나 군단장이 아침 식사를 섭취할 때 사용한 수저의 형태에 대한 다원적이고 심오한 고찰이 동반 되지 않은 결론은 자칫………….’

나는 자지러질 듯이 웃고 나서 곧 펜을 잉크에 적셨다. 좋아. 그런 식이라면, 나는 또박또박 정서로, 아주 공식 서류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글씨체로 써내려가기 시 작했다.

따라서 전략의 최우선적인 보루는 바로 헬턴트 영지 내에 소재한 사바인 언덕이 아닐 수 없다고 해야 마땅할 것임을 다시 한번 주장한다. 사바인 계곡에 산재해 있 는 민트의 형태와 그 배치에 대한 최우선적인 고려가 선결 조건이라면, 그 이후 동반될 수 있는 조건은 바야흐로 민트 채집단이라는 암호명으로 암약하고 있는 비밀 의 부대 헬턴트 경비대에 대한 완벽한 조사가 될 것이다. 헬턴트 경비대는, 흡사 인간으로 착각하기 쉬운 외모를 가졌으되 그 식사 형태나 음식물에 대한 무서우리만 큼의 탐욕으로 미루어보아 의심의 여지없이 오거임이 분명한 전사 샌슨 퍼시발에 의해 지휘되는 공포의 부대로서……………’

“푸흐허아하하하!”

엑셀핸드가 웃어버리는 바람에 샌슨은 내 글을 보게 되었고 잠시 후 우리는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서로 상대의 몸을 아껴주지 않고 그 관절을 꺾어주게 되었다. 그리고 칼의 헛기침 소리에 머쓱한 표정으로 몸을 털면서 일어나 다시 차분하게 글을 쓰게 되었다.

잠시 후 엑셀핸드는 샌슨의 글을 보고 마구 웃어버리게 되었고 샌슨의 글 내용을 보게 된 나는 비명을 올리게 되었다. ‘그날 밤 순진한 소녀 제미니에게 술을 먹이고 그녀를 숲으로 끌고 간 후치 네드발의 야비한…………….?

“샌스으은!”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번 바닥에서 뒹굴게 되었고, 이 이상한 분위기에서 홀로 삼엄하고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지키려 애쓰는 길시언의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었다.

“괜찮습니까?”

아프나이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샌슨과 나는 모두 녹초가 된 채로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었고 칼은 완전히 부어버린 눈으로 신중하게 우리가 만들어낸 가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펜을 쥐었던 손가락이 떨어져나갈 듯이 아파왔다. 와! 늦은 가을밤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 그렇게 정신 없이 글을 쓰고 나니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저려온다.

“허어, 허어………… 어, 어어어어.”

샌슨은 팔을 조금 움직이려다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난 움직일 힘도 없이 테이블에 뺨을 갖다댄 모습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애써 참고 있지만 밤새도록 우리가 글을 써버리느라 아무도 그와 교대해 주지 않은 후유증으로 몹시 괴로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아프나이델의 부축을 받 으며 간신히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놀라운 자제력으로 신음소리는 내지 않았고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도 그대로였으나 그의 다리는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기절할 듯한 얼굴로 침대로 다가가서는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그러나 칼은 한결같은 얼굴로 서류를 검토하더니 그중에서 몇 개를 추려내었다.

“흠, 됐어.”

그리고 칼은 그 가짜 서류를 엑셀핸드에게 주었고 엑셀핸드는 세심한 손놀림으로 책을 분해해서 그 가짜 서류를 끼워넣은 다음, 나이프로 밖으로 삐져나온 여백들을 정확하게 잘라내었다. 저 두껍고 짤막짤막한 손가락들이 어쩌면 저렇게 교묘하게 움직이는지. 엑셀핸드가 책을 붙잡고 조금 꿈지럭거리고 나자 이제 누구의 눈으로 도 원래 종이와 끼워넣은 종이를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칼은 그 책을 아프나이델에게 건네었다.

“당신 차례입니다.”

“알겠습니다.”

아프나이델은 배낭에서 꺼내두었던 물건들 중에서 몇 개의 주머니와 몇 개의 약병들을 들고 오더니 곧 책에 가루를 뿌리고 물건을 위로 집어던지고 아래로 던져 깨 며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 동안 그의 얼굴에서는 끊임없이 땀이 흘러내렸고 그의 입술은 잠시도 쉬지 않으며 주문을 웅얼거렸다.

“시크릿 페이지!”

아프나이델은 격렬한 동작으로 책을 가리켰다. 그의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이 책을 겨냥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라? 뭐야. 실패인가? 이런 어이없는. 그 러나 아프나이델은 곧 손을 내리더니 이젠 편안한 동작으로 책을 뒤적거렸다. 그의 얼굴에서 만족한 웃음이 배어나왔다. 그는 칼에게 책을 내밀었다.

“찾아보시죠.”

칼은 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하더니 곧 미소를 지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미소를 지으니 보기가 좀 그렇다.

“훌륭합니다.”

칼은 그렇게 말하며 우리에게도 책을 내밀어주었다. 페이지를 좌르륵 넘겨보았지만 어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술집 소개서처럼 보일 뿐이다. 칼은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됐군요. 그럼 도둑 길드로 출발………… 하고 싶지 않군요.”

칼은 허리를 채 펴지도 못한 모습으로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일어난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닌 자세로 고통스럽게 말하는 것이다. 침대에 누워 있던 길시언도 말했다.

“지금은…… 도저히 못 가겠군요.”

“조금 쉬었다가 갑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제각기 쓰러져버렸다. 다섯 도적들은 에델브로이의 가호를 바라며 그렇게 잠들었다. 푹 자버린 아프나이델은 우리들을 지키고, 또한 그 서류를 지키게 되었다.

침대에 드러누운 채 보니 그는 빙긋빙긋 웃으며 그 푸른 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헤헷.

“자신의 솜씨가 자랑스러우세요?”

“응? 어, 안자냐?”

“너무 피곤하니까 오히려 잠이 안 오는 것 같네요.”

“아. 그래.”

아프나이델은 겸연쩍은 모습으로 책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조금 불확실한 발음으로 말했다.

“당신 솜씨는 썩 훌륭해요. 아프나이델.”

“뭐, 별것 아닌 마법이다. 시크릿 페이지 같은 거야 초급의 마법이지.”

“초급이든 고급이든 필요한 순간에 도움이 되면 그게 최고죠.”

“그런가? 고맙구나. 후치.”

“흐음. 그거 괜찮네. 당신, 다음에 별명을 붙일 정도로 유명해지면 최고 마법사라고 정하는 것이 어때요? 대마법사는 솔직히 너무 많이 쓰잖아요.”

“녀석. 미안하다, 그래. 그만 놀려라. 그건 젊은 날의 치기라는 낡은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되는 거였다.”

“놀리는 것 아녜요. 괜찮잖아요? 톱메이지 아프나이델. 어때요?”

“톱메이지? 어처구니가 없군.”

내 말에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아프나이델은 싫은 표정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미소를 보며 잠이 들었다. 어이구. OPG가 없으니 더 피곤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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