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4권 – 제7부 : 항구의 소녀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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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4권 – 제7부 : 항구의 소녀 2화

2

몸을 돌리자 말 다섯 마리가 보였다. 넥슨이 있었고 나머지 네 명의 남자들이 그 뒤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롱소드를 어깨에 멘 그 과묵한 마부도 있었는데 그 마부의 등 뒤에 네리아가 타고 있었다. 밝은 곳에서 보니 네리아의 얼굴엔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하지만 네리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닦아버리고 는 우리에게 미소까지 지어보였다.

넥슨은 우리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가실까요?”

어? 말투가 바뀌었네? 아하. 바깥으로 나왔으니까? 하긴 그러고 보니 지나가던 시민들은 이렇게 많은 남자들이 말을 타고 서 있자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 다.

샌슨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내가 먼저 말했다.

“예. 그런데 넥슨 씨. 중앙 광장으로 가고 싶은데, 좀 안내해 주겠어요?”

넥슨의 눈가에 순간 빛이 번뜩였다. 이 자식아! 중앙 광장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장소라며? 속 아프지? 그러나 넥슨은 차분한 목소리로, 심지어 부드럽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알았다. 날 따라오렴.”

“그럼, 부탁드릴게요.”

나와 샌슨, 그리고 넥슨은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리아와 네 명의 남자들 역시 평온한 걸음걸이로 우리들 뒤에서 따라왔다.

뒤가 좀 근질거리는군. 하지만 넥슨은 계속 평온한 얼굴로 샌슨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날씨가 좋죠? 아직은 가을이라 해도 좋겠군요.”

샌슨은 물끄러미 앞만 바라보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난 겨울이오.”

넥슨은 빙긋 웃고는 다시 말을 걸었다.

넥슨의 인도를 받아가며 우리는 중앙 광장으로 걸어갔다. 넥슨은 계속 샌슨이나 나에게 말을 걸었고 그것은 대개 기품 있고 온화한 말들이었다. 정말 혀를 내두르고 싶군. 샌슨은 거의 대답을 하지 않거나 퉁명스런 몇 마디만을 짤막하게 뱉어내었지만 난 가차없이 대답해 주었다.

“후치? 초장이라고?”

“예. 생각해 보세요. 직업이라는 것은 모두들 고귀한 거예요. 그런 점에서 난 초장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워요. 세상에는 도둑이라는 직업도 다 있대요. 허 참!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들이 그런 고약한 직업을 가지는 걸까요? 아, 물론 도둑들 중에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도둑들을 다시 등쳐먹으 며 사는 길드 마스터는 도저히 인간이라고 불러주기엔 아까울 정도로 지저분하고 더럽고 야비한 놈일 거예요. 넥슨 씨 생각은 어떠세요?”

・그렇게 생각하니. 음. 그래. 그건 그렇고 해가 기울어가는구나.”

“예. 해가 기울어가네요. 그건 도둑들이 활동할 시간이 다가온다는 의미죠. 그러면 그 도둑 길드의 마스터는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겠죠. 내 도둑들아!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칼날을 다듬어라! 이제 달려가 나의 배를 불려줄 보물을 훔쳐와라! 뭐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을지도 몰라요. 아마 붉은 노을보다 더 시뻘건 혓바닥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샌슨이 킬킬거리기 시작했고 넥슨은 여전히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 아, 저기 저 건물이 보이지? 저게 루트에리노 대왕 기념관이다.”

“예. 루트에리노 대왕 기념관을 바라보며 수도 시민들은 우리나라라고 부를 수 있는 나라를 이 대륙 위에 세운 그를 생각하고 기릴 거예요. 하지만 도둑 길드의 마스 터라면 저런 건물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건물이라고 생각하겠죠. 훔칠 물건이 들어 있지 않은 집은 집이 아니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그의 더럽고 야비한 근성에서 설마 고귀한 추모의 감정 같은 것이 나오겠어요? 도둑 길드의 마스터라는 것은 절대적인 인간 말종이고 세상에서 제거해도 상관없는 목록을 만들 때 가장 먼저 그 이 름을 올리게 되겠지요. 이런 제 생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넥슨은 다른 사람에게는 미소로 보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이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샌슨은 얼굴을 크게 일그러뜨리며 웃음을 참고 있었 다.

잡담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나는 사실 그 기념관을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넥슨이 사납게 노려보는 바람에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넓은 광장과, 그 중앙에 있는 작은 건물이 보였다.

커다란 삼단 케이크처럼 생긴 계단이 둥글게 놓여 있고 그 위에 건물이 서 있었다. 계단들은 모두 큼직큼직하고 넓었다. 그러나 그 위에 있는 건물은 그렇게 크지 않 았다. 방을 넣는다면 네 개 이상은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그것은 아름다웠다. 건물 전체는 커다란 팔각형이었고 여덟 개의 기둥마다 칼을 짚고 선 기사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마치 건물이 여덟 기사에 의해 수호 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저게 여덟 별인가?

그리고 기둥과 기둥 사이의 벽에는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그 그림들의 모습은 아마도 루트에리노 대왕의 업적들을 단계별로 새겨둔 것인 모양이다. 지금 정면으로 보이는 조각에는 커다란 거인이 바위를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그 앞에 검을 곧게 세워들고 있는 한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저건 아무래도 그덴 산의 거인과 겨룬

싸움을 나타내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저 자그마한 기사의 모습이 루트에리노 대왕인 모양이군. 조각가가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한 모양인지, 거인과 대왕의 크기 비교는 사실적이었지만 대왕의 모습은 작아 보이지 않았다. 멋있는데?

중앙 광장에는 오후의 뉘엿해진 햇살을 받으며 계단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혹은 누군가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인지 가만히 서서 눈길을 어디로 둘지 몰라 하는 사람들, 그저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확실히 사람들이 꽤나 많군.

“말에서 내려라.”

넥슨은 그렇게 말하며 말에서 내렸다. 뭐지? 젠장, 내가 네 말을 왜 들어야 해? 그러나 넥슨은 설명했다.

“기념관 앞에서 말을 타고 지나갈 수는 없다.”

아, 그런가? 샌슨은 아직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말에서 내려 말고삐를 쥔 채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자 그도 말 에서 내렸다.

뒤를 보니 따라오고 있던 네 명도 말에서 내렸다. 그 마부는 한 손에 네리아의 트라이던트를 들고는 연인이나 된 듯이 네리아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네리아는 뭐 씹 은 듯한 얼굴이 되었지만 뿌리치고 달아날 배짱은 없는 모양이다. 나머지 세 명이 네리아를 거의 둘러싸듯이 서 있었다.

넥슨이 갑자기 말했다.

“좋은 장소로군. 당신들 정말 철두철미한데?”

샌슨은 으르렁거렸을 뿐 별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여, 넥슨 씨! 반갑습니다!”

칼의 목소리였다. 칼은 광장 중앙에 있는 그 계단들 중 가장 낮은 단 위에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엑셀핸드가 검은 빛이 뿜어나오는 듯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칼은 트레일과 에보니 나이트호크의 말고삐를 쥔 채 서 있었고 엑셀핸드는 래셔널 셀렉션의 고삐를 잡고 서 있었다. 드워프가 말고삐 를 붙잡고 서 있으니 그것 정말 희한하군. 그런데 아프나이델은 어디 있지?

넥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친근하게 말했다.

“아, 많이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양쪽 다 정말 뱀 같은 모습이로다. 으음.

샌슨은 갑자기 걸음을 빨리했고 나도 그의 뒤를 따랐다. 우리는 계단 아래에 멈춰 서서 뒤로 돌아 넥슨을 바라보았다. 말은 없었지만 우리 둘은 칼과 엑셀핸드를 보 호하듯이 서서 넥슨을 가로막은 것이다.

칼은 친절한 얼굴 그대로 넥슨에게 걸어갔다. 그러나 그는 우리 두 명보다 더 앞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엑셀핸드도 따라 걸어왔다. 넥슨은 주저없이 걸어와서 칼에게 손까지 내밀었다. 무서운 놈. 칼은 조금 찔끔했지만 곧 표정을 풀고 손을 내밀었다. 이런, 안 돼!

예상대로다. 넥슨과 악수한 칼이 갑자기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칼이 이를 악무는 것이 느껴졌다. 제기랄 녀석! 넥슨은 칼의 손을 꽉 쥐면서 낮게 말했다.

“시골뜨기 주제에 머리가 돌아간다…………, 틀림없이 네놈의 머리지? 궁성에서는 왕을 크게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도 들리더군.”

몸에 전율이 감돈다. 지금까지 말을 타고 오면서 보여주던 침착하고 부드러운 모습이 아니었다. 넥슨은 사악한 목소리로 쉭쉭거리듯이 말했다.

칼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고 그의 이마에선 땀이 흘러내렸다. 넥슨의 손에 쥐어진 칼의 손은 허옇게 바뀌어 있었다. 샌슨은 험악한 표정으로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검 을 뽑아들 듯했다. 하지만 저쪽에서는 아직까지 네리아가 붙잡혀 있다. 나와 샌슨은 턱을 부들부들 떨면서 넥슨을 노려보았다.

그때 엑셀핸드가 나섰다.

“여어, 반갑구먼! 넥슨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말하며 엑셀핸드 역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넥슨은 어쩔 수 없이 칼의 손을 놓았다. 엑셀핸드 덕분에 살아난 칼은 한숨을 쉬었지만 곧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넥슨은 역시 엑셀핸드의 손을 쥐었다.

“넥슨 휴리첼입니다. 하이 프리스트께 말씀 들었습니다. 노커 님.”

“아, 자네 재가 프리스트라고 했지? 나 엑셀핸드 아인델프…………… 일세.”

엑셀핸드의 말끝이 흐려졌다. 넥슨은 또 손을 꽈악 쥐어버린 것이다. 엑셀핸드는 부르르 턱수염을 떨더니 팔에 힘줄이 돋아나도록 마주 쥐었다. 엑셀핸드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장담해도 좋다. 지금 엑셀핸드는 평생 가장 강력한 힘을 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넥슨은 부드럽기 짝이 없는 얼굴이다. 제기랄 자식. 남의 물건으로!

누가 봐도 이상하게 보일 즈음에야 넥슨은 손을 놓았다. 엑셀핸드는 이를 악물면서 넥슨을 노려보았다. 젠장. 그의 두꺼운 손이 허옇게 변해 있었다. 샌슨은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만 넥슨은 여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아, 참. 제게 주실 책이 있었죠?”

으응? 젠장. 지금 책을 줄 순 없어! 네리아가 먼저야!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지? 칼은 떨리고 있는 오른손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말했다.

“예. 네리아도 그 책을 받으면 크게 기뻐하겠죠. 어? 같이 나왔군요! 네리아!”

칼은 넥슨이 미리 대답하기도 전에 네리아를 크게 불렀다. 그러자 저쪽에 있던 네리아도 마주 손을 들면서 외쳤다.

“칼 아저씨! 아저씨! 우와, 오래간만이에요!”

네리아가 호들갑을 떨자 그 마부는 어쩔 수 없이 네리아의 팔을 놓아버렸다. 네리아는 그대로 마치 몇 년 만에 만난 좋아하는 친척 아저씨에게 달려오듯이 팔을 흔들 며 달려왔다. 네리아는 아예 풀쩍 뛰어 칼에게 안겨버렸다. 칼은 당혹하는 눈치도 전혀 없이 기쁜 듯이 말했다.

“어이구, 어디 보자. 많이 컸구나? 이젠 숙녀가 다 되었는걸?”

감탄이다…………. 나와 샌슨보다도 더 손발이 잘 맞는군. 샌슨과 나는 얼빠진 얼굴로 엄청난 호흡을 보여주는 네리아와 칼을 바라보았고 넥슨은 뭐 씹은 얼굴이 되었다. 네리아는 칼의 가슴에 얼굴을 마구 부비며 계속 외쳐대었다.

“제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 줄 아세요? 엉엉. 너무 하셨어요! 이 예쁜 네리아가 보고 싶지도 않았어요? 편지라도 쓰셨어야지요!”

“그래그래, 미안하구나. 하지만 여기 이렇게 오지 않았니?”

주위의 그 누가 봐도 따사로움이 넘치는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별일이 아니구나 하는 표정으로 흘긋 바라보다가 곧 걸어갔다. 넥슨이 뭐라고 말하려 할 때, 칼 은 재빨리 선수를 쳤다.

“감사합니다! 넥슨 씨. 아, 참. 저기 아프나이델 씨가 넥슨 씨께 드릴 것이 있다고 해서 모셔왔습니다.”

넥슨은 칼이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그러자 광장 저편에 있는 아프나이델의 모습이 보였다.

아프나이델은 앰뷸런트 제일의 고삐를 쥔 채로 광장 주위의 건물들 중 하나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그리고 아프나이델의 다리 옆에는 무슨 가방 같은 것이 하나 놓여 있었다. 칼의 손짓이 신호였던 모양인지, 아프나이델은 손을 들어 위로 휘저어 보이더니 살짝 자신의 옆에 놓여 있는 가방을 가리켰다. 넥슨은 의아한 표정으로 칼과 아프나이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칼과 네리아가 서로 손을 맞잡고 뒤로 걸어갔다. 넥슨은 눈썹을 찌푸리며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었다. 그때 샌슨과 내가 그의 앞을 막았다. 넥슨은 우리 둘을 사납게 노려보며 이를 드러내었다. 그때 광장 저편에 있던 아프나이델이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아, 넥슨! 반갑습니다!”

아프나이델은 그렇게 외치며 다시 한 번 가방을 가리켰다. 넥슨은 사나운 눈길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지만 아프나이델은 이쪽으로 걸어오지 않았다. 칼은 빠르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넥슨.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어느 틈엔가 칼은 에보니 나이트호크의 말고삐를 네리아에게 건네주었다. 네리아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잠시 사나운 눈길로 넥슨을 노려보았다. 넥슨은 잠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책은 분명히 저쪽에 있는 아프나이델의 옆에 있는 가방에 들어 있을 것이다. 넥슨은 재빨리 손을 들어올려 뒤에 서 있던 마부에게 손짓했다.

“가서 책을 받아오너라.”

마부는 곧장 아프나이델에게 걸어갔다. 젠장! 칼의 얼굴에 낭패감이 떠올랐다.

대충 알겠다. 넥슨과 그 일행이 모두 아프나이델 쪽으로 걸어가면(여기선 말을 못 타니까), 그 틈에 이 자리를 벗어날 생각이었나 보다.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가방을 놔 둔 채 말에 올라타 다른 곳으로 달려가 버리고. 그런데 넥슨은 그대로 우리 앞에 서 있었고 넥슨의 부하들도 마찬가지다. 저 입이 무거운 마부 녀석만이 아프나이델에 게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칼은 힘겹게 말했다.

“저, 우리들은 이만 바빠서………….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아뇨, 섭섭하게 왜 그런 말씀을. 이렇게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헤어지다니요. 잠시만 시간을 내어주십시오.”

넥슨은 유려하게 말했고 칼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젠장. 결국 저쪽의 마부는 아프나이델에게 거의 다가갔다. 그때 아프나이델이 외쳤다.

“이보시오, 여보세요!”

아프나이델은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분명한 어조로 외쳤다. 그러고는 곧 허둥지둥 말을 끌면서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마부는 주위의 눈을 의식해 그런 아프나 이델에게 제동을 걸지는 않았다. 아프나이델은 로브 자락을 마구 흩날리며 달려왔다.

그런데 그는 그 가방을 놔둔 채로 달려온 것이다.

넥슨은 움찔하는 표정이 되더니 몸을 조금 저쪽으로 기울였다. 아프나이델은 주저없는 태도로 달려왔고 그러자 그쪽으로 걸어가던 마부는 아프나이델과 가방을 번 갈아 쳐다보더니 곧 가방 쪽으로 걸어갔다. 그 사이에 아프나이델은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넥슨의 부하들이 사나운 동작을 취했지만 역시 그를 막아서지는 못했다. 아프나이델은 칼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팔을 황급히 붙잡으며 말했다.

“어서, 급합니다! 기다리십니다!”

칼은 잠시 얼떨떨한 얼굴이 되더니 곧 알아차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넥슨에게 말했다.

“이런, 아무래도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그럼, 이만.”

그리고 칼은 두말하지 않고 몸을 돌려 아프나이델이 뛰어온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프나이델은 그의 팔을 잡아 끌며 더욱 급하게 걸어가려고 애쓰는 모양이었다. 엑셀핸드와 네리아도 덩달아 걸어갔고, 나와 샌슨도 그 뒤를 막아서는 자세로 걸어갔다. 잠시 넥슨은 저쪽의 가방과 멀어져가는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며 당황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이미 꽤 멀어져버렸다. 아프나이델이 호들갑을 떨면서 칼을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맨 뒤에 걸어가던 나는 고개를 슬쩍 돌려 저쪽의 마부를 바라보았다. 마부는 가방을 들어올리더니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는 표정이었다. 마부는 곧 넥슨에게 고개 를 끄덕였다. 그러자 넥슨은 안심한 표정을 짓더니 우리에게 미소까지 보내주었다. 저 망할 미소! 제기랄, 기분 같아서는 도망은커녕 저놈 얼굴을 한번 갈겨주고 싶은 데.

우리가 광장 끝까지 와서 말에 올라탈 준비를 했을 때였다.

그 마부는 어느새 넥슨에게 돌아가 가방을 건네주었다. 가방을 열어젖히고는 그 푸른 책을 꺼내어 휘리릭 넘기는 넥슨의 모습이 아스라이 보였다. 요놈아. 책은 그대 로지만 서류는 없다!

응? 저게 뭐냐?

넥슨은 갑자기 책을 집어던지더니 고함을 질렀다. 온 광장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였다.

“제기랄, 저놈들 붙잡아! 빼돌렸다!”

이런! 어떻게 벌써 알았지? 내 속마음을 읽었나? 우리는 후다닥 말에 올라탔다. 샌슨은 엑셀핸드를 거의 집어던지듯이 래셔널 셀렉션 위에 올려놓았고 엑셀핸드는 죽어라고 말의 목을 껴안았다. 그리고 샌슨은 슈팅스타에 올라탔고 네리아는 멋지게 몸을 날려 에보니 나이트호크에 올라탔다. 그러나 아프나이델은 허둥거리며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뎠다. 젠장! 급히 제미니에 올라탄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들은 허둥거리며 말을 끌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좋아! 광장에서는 말에 탈 수 없다고 했지! 이러면 시간은 충분하겠군.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말 위에 올라타고

질주해 오는 넥슨을 보고는 내가 너무 순진했음을 깨달았다. 넥슨은 고함을 질렀다.

“병신들아! 말을 끌고 뛰냐! 차라리 업고 뛰지 그러냐!”

남자들은 완전히 당황해 버린 모양이었다. 광장에서는 말에 탈 수 없다는 규칙과 우두머리의 호된 명령 사이에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넥슨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고 그러자 남자들도 허둥지둥 말에 올라탔다. 광장의 시민들이 비명과 욕지거리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꺄악! 사람 살려!”

“저게 돌았나?”

“이 자식들아! 여기가 어디라고 말을? 어, 으아!”

고함을 지르던 시민 하나는 넥슨이 뽑아든 롱소드를 보고는 놀라 달아나버렸다. 뭐야, 저 자식! 완전히 갈 데까지 가보자는 거냐? 광장에 있던 시민들이 좌우로 좌악 갈라졌고 넓은 중앙 광장에는 순식간에 공포의 기운이 번져나갔다. 그때 뒤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후치! 달려가!”

샌슨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아프나이델이 힘겹게 앰뷸런트 제일에 올라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칼은 곧장 말을 출발시켰고 샌슨과 네리아도 출발했다. 나도 허 둥지둥 제미니를 걷어찼다.

“이랴, 하아하앗!”

제기랄, 저 자식이 이렇게까지 마구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 서류가 뭐 그리 중요한 것이라고? 물론 중요한 거지만, 저놈이 왜 저렇게 마구 나오는 거지?

“비켜! 비켜요!”

앞에서는 샌슨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가고 있었다. 슬쩍 보니 엑셀핸드의 얼굴은 백짓장 같았다. 그렇게 하얀 드워프의 얼굴은 처음 보았다. 네리아도 정말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슈팅스타와 에보니 나이트호크는 그 커다란 덩치로 골목길을 거의 가로막듯이 하고 달려갔다. 그리고 그 뒤로 아프나이델과 엑셀핸드 가 달려갔고 칼과 내가 제일 마지막이었다.

“으아아아아아!”

주위의 시민들은 모두 죽어라고 뛰어 그 앞에서 비켜났다. 여섯 마리의 말들이 골목을 질주하니 그만한 구경거리가 없다. 벽에 달라붙을 수 있었던 자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고 급히 우리들을 피하느라 진흙탕에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까지 보였다. 그때였다.

저 앞에 웬 아이 하나가 골목길에 주저앉는 것이 보였다. 다섯 살? 여섯 살 꼬마는 멍한 얼굴로 땅바닥에 앉아서 달려오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골 목이 너무 좁아서 급하게 움직일 수 없다!

“꺄아아악!”

옆에서 들려오는 자지러지는 비명소리. 아이의 어머니인가? 주위의 사람들이 맹렬히 그 여자를 붙잡았지만 그 여자는 무서운 힘으로 주위 사람들을 뿌리치고는 길 가로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아이를 부둥켜안았다. 앞에서 샌슨이 고함을 질렀다.

“꼼짝 마시오!”

“이힝힝힝!”

슈우우웃! 슈팅스타는 그대로 날아올랐다. 그 여자의 등 위로 잠시 그림자가 하늘을 가렸다. 슈팅스타는 가볍게 여자와 아이를 뛰어넘었다. 여자는 놀라서 머리를 들 었으나 그 뒤에 달려가던 에보니 나이트호크를 보더니 다시 급하게 머리를 숙였다.

“뛰어! 뛰지 않겠다면 날아!”

네리아의 어처구니없는 기합소리, 에보니 나이트호크는 거대한 덩치에 걸맞게 가뿐히 여자와 아이를 뛰어넘었다. 주위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 다음은 아프나이 델. 아프나이델은 눈을 꼭 감은 채 말을 뛰어넘게 했다. 앰뷸런트 제일도 가볍게 뛰어넘었다. 정말 걱정스러운 장면, 오, 엑셀핸드!

“카리스 누멘께 맹세코 뛰지 않으면 널 잡아먹을 거야!”

나라도 뛰어넘겠다. 래셔널 셀렉션, 한때 엘프를 태웠던 그 말은 서툰 기수를 싣고도 마치 자신의 의지인 것처럼 가볍게 뛰어넘었다. 엑셀핸드는 비명을 질렀다. “봤냐! 세계 최고의 드워프 기수다! 우하하!”

그 웃음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트레일이 여자와 아이를 뛰어넘었다. 잠깐, 트레일까지 뛰어넘으면 그 다음은 누구냐? 여자는 머리를 쳐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젠 장! 이건 연습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어차피 인생에 연습이 어디 있냐? 제미니, 너만 믿는다!

“하아앗!”

제미니! 네가 해내는구나!

제미니는 부드럽게 뛰어올랐다. 잠깐 동안 몸의 중량감이 사라지고 주위의 처마들이 내 눈높이까지 내려왔다 싶더니, 곧 격렬한 충격이 엉덩이를 가격했다. 좋아! 엉 덩이가 부서져도 좋다! 주위에선 박수소리가 터져나왔고 뒤를 보니 그 여자는 안도의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였다. 주위에서 다시 비명소리 가 터져나왔다.

“이보시오, 고개를 숙여요!”

“고개 숙여요, 아줌마!”

여자는 질겁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저쪽에서 달려오는 넥슨과 그 부하들,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다시 한번 곡예가 펼쳐지는 것을 기대하면서. 여자 역시 머리를 푹 숙인 채 다시 뛰어넘어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기대는 무너졌다.

“꺄아아악!”

콰드득, 콰!

“으아아아아!”

도저히 못참겠다. 나는 말을 돌렸다. 빌어먹을 자식! 길거리에 뒹구는 시체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다. 흐르는 핏물. 제기랄, 제기랄 놈! 이 죽일 놈아! 넥슨은

여자와 아이를 밟아버리며 지나쳐왔다! 그리고 그 뒤로 그 부하들이 이미 죽은 그 시체를 다시 죽이기 시작했다. 두 번 죽이는구나, 두 번! 주위 사람들의 하얀 얼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보아버린 그 눈동자들은 자신이 본 장면을 거부하고 있었다. 너덜거리는 여자의 치마와 핏덩이로 바뀌어버린 아이. 눈 앞이 부옇게 바뀌어 온다.

“너, 죽인다!”

바스타드를 뽑아드는 손바닥이 차갑다. 젠장, 손에 도는 한기가 너무 차가워 바스타드를 놓칠 것 같았다. 눈을 닦는다. 바스타드를 부여잡는다. 넥슨, 머리를 날려주 마!

“죽인다앗!”

제미니의 허리를 걷어찬다. 제미니는 달려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넥슨의 모습이 커진다. 개새끼! 입에 미소를 띠고 있다! 넥슨은 롱소드를 뽑아들더니 앞으로 뻗었 다. 나도 바스타드를 들어 앞으로 뻗고는 돌격 자세로 나아갔다. 온몸의 흔들림은 말의 동작과 내 몸 자체의 경련으로 더욱 심해진다. 모든 것이 흔들린다. 그러나, 모 든 것들이 흔들리는 가운데 단 하나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절대의 부동으로 그것은 차갑게 나를 겨냥하고 있다. 넥슨의 눈! 인간의 눈이 아니다. 저건 사람이 아냐! “매직 미사일!”

힘겨운, 짜내는 듯한 아프나이델의 고함소리. 내 등 뒤에서 하얀 빛의 화살이 하나 휙 날아왔다. 그것은 그대로 내 옆을 지나쳐 넥슨에게 날아갔다. 당황한 넥슨은 칼 을 휘둘렀지만 그 빛의 화살은 그대로 넥슨이 아니라 그 말을 명중시켰다.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던 넥슨에겐 그것으로 충분했다. 말은 나가떨어졌고 넥슨은 그대 로 하늘을 날아 옆의 건물을 부수고 들어가버렸다. 쾅! 콰드득! 목조의 건물 벽은 크게 부러지며 넥슨을 받아들였고 뒤를 따라오던 그 부하들은 날리는 먼지와 나뭇조 각으로 급히 말을 멈추었다. 갑자기 귓가에 샌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돌려! 이 자식아, 말을 돌려!”

“저 자식 죽이고 나서!”

“이 빌어먹을 자식이!”

그때 샌슨과 함께 돌아왔던 엑셀핸드가 빠르게 말했다.

“말을 돌려라.”

나는 잠시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질린 얼굴로 래셔널 셀렉션 위에 앉아 있는, 그러나 엑셀핸드의 눈은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은 나에게 명령이 아니라 호소를 말하고 있었다.

“제기랄!”

제미니를 뒤로 돌렸다. 뒤에서는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먼지, 그리고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울음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난 몸을 돌려 달려갔다.

볼이 차갑다. 젖은 볼에 부딪히는 바람은 내 얼굴을 저며내는 것 같다.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무슨 눈물이 이렇게도 많이 흐르는 거지? 우리가 여기로 도망오지만 않았다면, 저 여자와 아이는 죽지 않았겠지. 그리고 아이는 커서 행복을 노래하고 사랑에 목멜 수도 있었겠지. 어른이 될 수 있었겠지. 무엇이 되었을까? 아이는 과연 무엇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제 그 가능성, 그 열리지 않은 미래,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남은 것은 차가운 대로 위에서 식어가는 핏덩어리 시체뿐이다. 파리가 몰려들고 있을까? 먼지 가 그 위에 쌓이고 있을까?

“으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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