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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 공주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그러다가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칼 씨는, 정말 핸드레이크 같아요.”
“예?”
“그날 전하께서 하신 일, 아직도 앙금이 남아 있으신가요?”
…좋은 추억은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정말 핸드레이크 같아요. 핸드레이크도 페어리퀸 다레니안을 구했죠. 그러고는 페어리퀸 다레니안에게 ‘그건 그저 나의 왕, 루트에리노 전하를 위해 행한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페어리퀸 당신을 염두에 두고 한 일은 아닙니다.’라고 말했지요.”
칼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오! 정말, 정말 오래간만이다. 아니, 처음인가? 칼이 우리들과 똑같이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것이 말이다.
“저,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예. 그러실 거예요. 그건 왕실 기록물에만 조금 남아 있는 이야기이고 핸드레이크는 자서전이나 자기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은 사람이니까요.”
칼의, 저 독서가의 눈이 번쩍였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의 언행이나 업적은 거의 루트에리노 대왕님의 전기를 통해서만이 파악됩니다. 자랑할 만한 정도는 못 되지만 그래도 꽤 많은 서적을 읽어보 았습니다만, 그 어떤 기록에도 핸드레이크는 직접 거론되는 일이 없더군요. 항상 다른 사람의 기록에만 조금씩 편린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을 루트에리노 대왕의 그림자 속에 있게 하려고 애썼지요.”
“그런데 공주님은 그 내용을 어디서 읽으셨습니까?”
“예. 왕실에 남아 있는 핸드레이크의 일지에서 읽었습니다. 일기라고 하기엔 작은, 그러니까 수기 비슷한 것입니다.”
길시언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그런 게 있어?”
데미 공주는 눈을 곱게 흘기면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읽으라는 책은 안 읽고 매일 궁성을 빠져나가 이상한 책이나……………”
“으랏찻차! 야, 그거 나 어릴 때의 일이야!”
으음. 여동생이 저렇게 말할 때 자지러지는 것은 왕족이라고 해서 별 다를 바는 없군. 우리는 모두 겸연쩍은 얼굴로 궁성의 생김새를 관찰하기 시작했고 길시언은 벌 겋게 된 얼굴로 테이블을 노려보았다. 데미 공주는 생글거리며 말했다.
“에, 어릴 때 읽은 이야기였어요. 그 이야기를 참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되는군요.”
“얘, 얘는 원래 책을 좋아했어요, 예. 으하하하! 어릴 때부터 책하고 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몰랐거든요. 껄껄껄!”
길시언은 아주 호탕하게 웃으려 애썼고 그래서 우리도 어쩔 수 없이 미소를 지어주었다. 오로지 칼만이 화장실로 달려갈 때의 표정으로 데미 공주를 쳐다보았다. 그 애걸하는 듯한 표정에 데미 공주는 천천히 설명했다.
“예……………. 영광의 7주 전쟁 제2주째의 일입니다.”
칼이 곧장 아는 척했다.
“연속으로 세 개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한 드래곤 로드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직접 전선에 나타났을 때를 말씀하십니까?”
“훤히 외시는군요? 음, 조금 더 말씀해 보시겠어요?”
칼은 두 손을 깍지껴 무릎에 올리더니 그윽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에, 그러니까 그 앞의 세 차례 전투는 드래곤 로드를 불러내기 위한 핸드레이크의 철저한 심리전이었습니다. 이 점은 대개의 전사학자들이 동감하는 바로서, 절대 적 세력비에서 불리한 입장을 일거에 역전시키기 위해 단숨에 드래곤 로드를 공격하여 결판을 짓는다…………는 핸드레이크의 작전이었지요. 아군의 피해를 돌보지 않는 그 완전한 파괴와 기만적인 전후 처리 방식은 드래곤 로드를 대로하게 만들었고, 결국 드래곤 로드는 친정을 결심하게 됩니다. 허즐릿의 저서에서도 여기까지는 핸드 레이크의 전략적 우위였음을 인정합니다. 드래곤 로드가 스스로의 이점, 즉 방대한 배후 지원 세력과 수성만으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확실한 보급선의 이점을 포 기하고 직접 전선에 나서게 만든 핸드레이크의 수완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아아! 샌슨마저! 외로워라. 아프나이델이나 길시언이 관심을 곤두세우는 것은 이해하더라도 샌슨까지 저 골치 아픈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다니. 전사니까 그런가? 그 래서 네리아와 나, 엑셀핸드는 멀뚱한 표정으로 칼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칼의 이야기는 점점 재미있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대륙 전사 최고의 전격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길시언이 무릎을 탁 쳤다.
“그렇습니다. 그건 정말 전무후무한 전격전입니다!”
“예. 장대한 전략에 의해 기어코 드래곤 로드의 친정을 이끌어낸 지혜로운 핸드레이크는 전선 곳곳에 산개되어 있던 여덟 별, 루트에리노 대왕의 여덟 기사를 세미 나스 평원으로 집결시킵니다. 핸드레이크의 전략적 우위가 가장 빛날 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드래곤 로드는 핸드레이크를 기만한 것입니다. 세미나스 평
원으로 집결한다는 것은, 결국 부대의 이동이 노출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핸드레이크에게 속아넘어간 것처럼 위장하여 여덟 별을 노출시키는 데 성공한 드래 곤 로드는 세미나스 평원으로 나서는 대신, 그곳으로 향해 오고 있던 여덟 별의 각개격파에 나섰습니다.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그 신속한 진격에 의해 여 덟 별 중 세 개의 부대가 괴멸당했습니다. 세미나스 평원에서 그 비보를 접한 핸드레이크가 남긴 말이 기억나는군요.”
“이빨이 다 빠진 줄 알았는데, 아직 물어뜯을 힘은 남아 있군. 꽤 아픈데?”
길시언의 우스꽝스러운 말과 표정에 우리는 미소를 지었다. 핸드레이크가 그렇게 말했다고? 허허, 참. 칼도 웃으며 말했다.
“예. 그러나 여덟 별 중 다섯이 남아 있었고, 핸드레이크는 좌절하는 대신 남은 세력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간신히 후퇴에 성공합니다. 이 또한 허즐릿의 저서에서 ‘후퇴의 모범 답안은 아니지만, 최고 답안이다.’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는 걸작입니다.”
“예. 그것은 정말 멋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상대가 후퇴할 거라고 믿을 멍청이는 없었겠지요. 드래곤 로드가 추적을 단념한 것도 할말은 있을 겁니다.”
길시언의 말에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 공주는 방그레 웃으며 말했다.
“정말 학식이 높으시군요. 7주 전쟁의 전사를 완전히 암기하시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2주째 전투의 후퇴전에서, 드래곤 로드의 암살이 기도되었다는 것은 모르시 겠지요?”
칼의 눈이 커졌다.
“예? 암살이라고요?”
“이야기가 좀 긴데…………, 괜찮으시겠어요?”
칼은 주위를 둘러보았고 모두들 찬성의 표시였다. 오늘 하루 동안 너무 심적 충격이 컸다. 느긋하게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겠지. 모두들 관심어린 표정을 짓자 칼 역시 찬성했다.
그래서 우리는 데미 공주의 부드러운 말소리로 영광의 7주 전쟁의 가장 급박했던 장면,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부러진 창과 검, 신음하는 병사와 그를 안락사시키는 동료의 눈물, 프리스트들의 소매는 이미 피와 땀에 굳어버려 더 이상 피에 젖지도 않는다. 부상자를 간호하기 바쁜 프리스트들에게는 음식물을 만들어낼 여력도 남지 않았다. 다행히 보급선을 최대한 안전하게 보호했던 핸드레이크의 선견지명으로 부상병들에게 음식물은 보 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용기는 보급할 수 없었다.
핸드레이크는 우울한 눈으로 속속 도착하는 부상병들의 행렬을 바라본다.
이곳으로 이동하는 도중 각개격파당한 세 별의 군대다. 현 시점에서의 집결지는 세미나스 평원, 그들을 버리고 달아날 수는 없다. 부상병들의 행렬이라도 끝까지 기 다려 모두 수용한 다음 이동해야 한다. 그러나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드래곤 로드의 손길은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패배한 세 별 중 캄드리는 온몸 곳곳에 꽂힌 화살을 뽑아내지도 않은 채 그의 주군 앞에 무릎을 꿇는다. 패장은 죽음 이외엔 바랄 것이 없으며, 죽을 육체에 치료는 필요없다는 그의 절규. 루트에리노 대왕은 눈물을 흘리며 그를 껴안는다. 주군의 품에서 기절한 캄드리는 프리스트들의 손에 넘겨진다.
라인버그는 피로한 얼굴이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짤막하게 패전 보고를 마친다. 금일 일출 직전, 갈색 산맥 물푸레나무 고개에서 드래곤 로드의 본진으로 추측되는 부대와 조우. 1시간 전투 후 부대의 4할을 잃고 후퇴 결정. 주군의 처분을 기다립니다. 뻔뻔하다고까지 표현할 수 있는 무표정한 얼굴. 그러나 루트에리노 대왕은 그 의 눈이 아닌 가슴으로 쏟아내는 피눈물을 본다. 루트에리노 대왕마저 목이 메어 간단히 그를 물러나게 한다. 가서 쉬도록. 패전의 책임은 묻지 않는다.
나머지 한 별은 우타크, 그의 활은 이제 다시는 멍청한 활이라 불리지 못할 것이다. 과녁 가운데를 맞추는 일 이외엔 아무것도 못한다고 해서 그의 활에게 붙인 루트 에리노 대왕의 농담. 이봐, 가끔은 가운데 말고 조금 빗나가게 쏘아보라구? 그것, 너무 어려운데요. 싱글거리며 대답하던 우타크의 얼굴을 떠올리며 루트에리노 대왕 은 부러진 우타크의 활을 부여잡는다. 유품인가? 그렇습니다. 기어코 루트에리노 대왕은 뜻모를 괴성을 지르고는 혼절해 버린다. 핸드레이크는 혀를 차며 그를 막사 로 옮기도록 지시한다. 승전보다 더 어려운 패전의 뒷수습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트에리노 대왕이 기절할 권리를 잃지는 않는다. 핸드레이크가 있으므로.
핸드레이크는 진지 외곽에 혼자 서서 먹구름 낀 하늘과 처참한 모습의 진지를 번갈아 보며 한숨을 쉰다.
여덟 별 중 최연장자인 제로딘이 핸드레이크에게 다가온다.
“뜻밖이군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상병들을 기다려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로딘의 무골다운 시커먼 얼굴이 핸드레이크의 하얀 얼굴을 마주한다. 그 두꺼운 눈두덩이 아래에 차가운 시선이 번뜩인다.
“당신이라면, 즉각 후퇴 준비를 명령할 줄 알았습니다.”
“후퇴? 후퇴는 다음 승리를 위해 하는 겁니다. 그리고 다음 승리를 위해서라면 부상병들이라도 끌고 가서 고쳐놔야 써먹을 수 있죠. 신병 모집과 훈련하는 비용보다 는 부상병 치료 비용이 싸게 먹힙니다.”
제로딘의 관자놀이가 사납게 떨린다. 핸드레이크는 무심하게 제로딘을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먹구름 낀 하늘을 본다.
“비 맞는 건 싫은데.”
무심한 말투. 수많은 부상병들에게 쏟아지는 비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약속이 있는데 비가 올 것 같아서 걱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로딘은 기어코 말 해 버린다. 몇 년 동안 묵혀두고 하지 않았던 말을.
“당신을 한 대 치고 싶습니다.”
핸드레이크는 여전히 하늘을 본다.
“주먹 맞는 것은 더 싫은데.”
제로딘은 목울대를 울렁거리다가 간신히 참는다.
“부상병의 수용에는 반나절이 소모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야영 준비를 갖출까요?”
“그래야죠.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여덟 별 중 최연장자답게 제로딘은 검의 손잡이를 쥐었을 뿐 뽑지는 않는다. 제로딘은 물러난다.
핸드레이크는 생각한다.
반나절이면 드래곤 로드는 얼씨구나 하면서 바이서스 군을 공격할 것이다. 평소라면, 그리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누구도 세 개의 부대를 패주시키고 나서 그날로 본 진을 습격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신속한 부대 운용을 보고 난 후 핸드레이크는 드래곤 로드가 그날로 전투를 걸어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 전격전은 처음부터 드래곤 로드가 핸드레이크의 기만 전술을 파악했음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그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을 것이다. 그는 오늘 온다. 남 은 것은 다섯 별의 다섯 부대. 원래 계획대로 여덟 별의 여덟 부대가 다 집결했다면 승리의 자신도 있었다. 다섯 부대가 남은 지금이라도 방어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 드래곤 로드와 맞붙게 된다면 지리한 소모전으로 이끌어가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소모전이라면 루트에리노 대왕 측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그들의 보급선은 가늘다. 실처럼 가늘다. 핸드레이크가 드래곤 로드에게 기만전술을 사용한 것도 이런 약점 때문이다.
“이빨이 다 빠진 줄 알았는데, 아직 물어뜯을 힘은 남아 있군. 꽤 아픈데? 젠장, 완전히 저쪽에게 자리 깔아주고 박수까지 치게 되었군.”
이제 드래곤 로드는 자기 방식으로 싸울 수 있게 되었다. 전면전으로, 여덟 별이 아니라 다섯 별이므로 전면전의 승산은 드래곤 로드에게 훨씬 크다. 결코 도망쳐서 전력을 재정비할 시간은 주지 않을 것이다. 핸드레이크는 자신이 왜 수염을 기르지 않았는지 안타깝게 생각한다. 수염을 길렀다면 좀 잡아당겨 볼 텐데. 그래서 핸드 레이크는 수염 대신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 그 모습을 보며 누군가가 웃음을 터뜨린다.
“페어리퀸?”
하늘 저편에서 다레니안이 그에게 날아온다.
페어리의 날개는 날고 있을 때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투명하다. 햇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날씨였다면 반사광이 아름답겠지만 지금 먹구름 아래에서는 그런 반사 광도 없다. 그래서 핸드레이크에겐 그녀가 둥둥 떠서 다가오는 것처럼 보인다.
핸드레이크는 그의 얼굴 앞쪽에 둥둥 떠 있는 다레니안을 보며 말한다.
“여기는 웬일이십니까?”
“당신의 승리를 보러 왔어요. 그런데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군요.”
“당신 구경거리를 제공하려고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핸드레이크의 대답에 페어리퀸의 얼굴이 굳어진다.
멀리 떨어져 있던 병사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인다. 핸드레이크에게 이상한 소문이 따라다니는 것도 당연하다. 그들 단순한 병사들에게는 간혹 밤중에 평원 한가운데 서서 허공에 뜬 요정과 이야기하곤 하는 핸드레이크의 모습이 너무도 무섭게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먹구름이 끼었지만 낮이다. 병사들은 감히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아무것도 못 본 체하는 것이다.
페어리퀸은 쌀쌀맞은 어투로 말한다.
“이대로 기다리다간 궤멸하는 당신의 모습을 내게 구경시켜 줄 것 같은데?”
핸드레이크는 차갑게 말한다.
“페어리답지 않은 저급한 취미시군요. 보고 싶으시다면 기다려보시죠.”
“패배할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이길 거죠?”
핸드레이크는 잠시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는 병사들과, 그 너머로 보이는 부상병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페어리퀸도 그의 시선을 따라 바이서스 군의 처참한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핸드레이크는 말한다.
“이 상황에선, 잘 달아나는 것이 이기는 것이겠죠.”
“드래곤 로드는 지금 당신이 달아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핸드레이크는 쓴 미소를 짓는다.
그라도 그럴 것이다. 바이서스 군은 맞서 싸워야 한다. 패배할 것이 두려워 달아난다면 드래곤 로드는 즉각 그 뒤를 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 궤멸이라는 결과 이외에 다른 결과를 바란다는 것은 욕심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맞서 싸운다고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의미가 있다면 패배의 순간을 조금 더 지연시킨다는 의미뿐. 어떤 방법으로도 좋은 결과는 얻기 어렵다. 핸드레이크는 다시 한번 자신이 왜 수염을 기르지 않았는가를 안타깝게 여긴다.
페어리퀸은 말한다.
“조언할까요? 달아나는 것이 좋겠군요.”
“무슨 말입니까.”
“부대를 해체하고 달아나 버리세요.”
핸드레이크는 무서운 눈길로 페어리퀸을 노려본다.
루트에리노 대왕에게 그의 몸을 던진 후, 그와 더불어 갖은 고난의 세월을 견디며 키워온 꿈과 희망을 포기해 버리라고 말하는 요정의 여왕이 그의 눈앞에 있다. 지 금 부대를 해체해 버린다면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는 방법밖에 없다. 아니, 전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다시는 그들의 꿈을 실현시킬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대답을 보류한다. 그는 눈을 돌려 다시 한번 부상병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바이서스 군을 바라보았다. 저들을 다 죽일 것인가?
핸드레이크는 결심을 굳힌다.
“아니, 달아나지 않겠습니다.”
페어리퀸은 차가운 눈으로 핸드레이크를 바라보며 노골적인 비난이 섞인 말투로 말한다.
“모두 함께 이루어지지 못한 꿈과 더불어 이 땅에 뼈를 묻겠다는 건가요?”
“아니, 대왕께서는 이루어진 꿈과 함께 이 땅을 통치하실 겁니다.”
페어리퀸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른다.
“왜 우리라고 하지 않고 대왕께서라고 하지요?”
“아무러면 어떻습니까.”
페어리퀸은 핸드레이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러나 핸드레이크의 얼굴에는 잠시 결심의 빛이 떠오르다 사라졌을 뿐, 아무런 표정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갑자기 확고한 걸음걸이로 진지로 돌아가 버린다. 남겨진 페어리퀸 다레니안은 망연히 그 뒷모습을 바라본다.
암흑이 가릴 수 없는 것이 단 하나 있다. 암흑이다.
핸드레이크는 암흑이 되어 벌판을 가로지르고 있다. 엄밀하게 보면 그는 현재 날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몸은 암흑의 말에 실려 있다. 새카만 몸과 역시 새카만 갈기가 밤바람을 할퀸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희미한 다리는 거세게 움직여 허공을 밟고 있다. 그리고 하얀 눈에는 아무런 눈동자가 없다.
마법사의 의지에 따라 현실에 소환되는 말 팬텀 스티드는 무서울 정도의 속도로 세미나스 평원 위의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다. 유혈의 냄새를 담은 바람이 부는 세미 나스 평원에 설 정도로 겁이 없는 자가 지금의 그를 본다면 오크와 복수의 화렌차가 복수의 대상물을 찾아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전운이 감도는 세미나스 평원에는 지각 있는 생물은 전혀 다가오지 않고 있었고, 그래서 핸드레이크는 그야말로 무인지경을 달려가고 있다.
핸드레이크는 그날 저녁의 대화를 생각한다.
“도주를 제가 책임지라고 하셨습니까?”
제로딘은 어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왕은 현재 극심한 충격으로 올바른 지휘를 하실 수 없는 상태니까요.”
“그러나, 당신이 참모장이잖습니까?”
“무슨 말씀을. 바이서스 군율에는 참모장의 지휘권을 명시하는 부분이 없습니다.”
제로딘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이 실질적인 총지휘권자이지 않은가, 제로딘은 그 말을 하고 싶었다. 핸드레이크는 빙긋 웃었다.
“그 동안 절 한대 치고 싶으셨죠?”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제로딘은 완전히 얼빠진 얼굴로 핸드레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당신을 싫어하는 부하들은 맡지 않겠다는 겁니까? 당신, 그 정도밖에 안 됩니까?”
“아니,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절 치고 싶다면 지금 치시죠. 다시는 기회가 없을 테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현상황에서 도피란 말도 안 된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하실 겁니다.”
“나도 검으로 뼈가 굵은 무부요. 대충은 짐작할 수 있소.”
“따라서 도피를 하려면 적을 저지해야 됩니다.”
“어떻게……, 당신!”
제로딘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그대로 테이블에 앉은 채 말했다.
“유피넬의 저울에 실린 우리의 추는 너무 무겁군요. 아래로 처지고 있습니다. 헬카네스의 도움이 아닌 바에야 저울대를 다시 올릴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나는 마법 사입니다.”
제로딘은 핸드레이크를 노려보았다. 수년간 함께해 왔으면서도 처음으로 보내는 시선이다. 핸드레이크는 변함없는 어조로 말했다.
“저울눈을 속일 겁니다.”
장탄식, 거부의 말, 호소, 감정과 상관없이 당신은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럴 수는 없다. 인륜에 의거한 갖가지 말들, 제로딘은 자신이 웅변의 대가임을 입증하기 위해 애썼다. 검으로 뼈가 굵었다는 제로딘, 아마 일생 최대의 연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모두 무시했다.
“당신이 한 번이라도 날 설득한 적이 있습니까?”
제로딘은 입을 다물었다.
“대왕께는 알리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제로딘의 눈가에 참으로 오래간만에 눈물이 흘렀지만 그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핸드레이크는 세미나스 평원을 가로지르고 있다.
밤의 습격은 확실하다. 드래곤 로드는 어둠과 함께 공격해 올 것이다. 그러나 핸드레이크 역시 밤이 되기 전에는 단신으로 이곳을 가로지를 수 없다. 이것은 시간과
의 싸움이다. 핸드레이크의 의지가 팬텀 스티드에게 전달되면서 팬텀 스티드는 북풍의 매서움으로, 그러나 남풍의 고요함으로 달려간다. 마침내 멀리 드래곤 로드의 진지가 보인다.
암습의 준비를 갖추는 그들의 모습은 분주해 보인다. 횃불이나 기타 등등의 조명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핸드레이크는 느낄 수 있다. 확실한 승리의 예감으로 그들 의 입가에서는 부지불식간에 낮은 웃음과 거친 고함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다. 사기를 북돋우는 고함소리이다. 저들이 과연 어제와 오늘 새벽에 걸쳐 세 개의 부대를 패주시킨 부대인가? 핸드레이크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피로한 모습이나 흐트러진 태도 같은 것은 없다. 마치 전투를 한 번도 치르지 않은 부대의 모습처럼 깨끗하고 정돈된, 규율이 흐르는 모습이다.
수백 년에 걸쳐 이 땅에 드래곤의 지배를 가능하게 한 저력이 느껴진다.
핸드레이크는 조용히 땅에 내려섰다.
드래곤 로드의 진지에서 훨씬 떨어진 언덕에 내려선 핸드레이크는 팬텀 스티드를 돌려보낸다. 그는 자리에 앉았다. 밤이슬의 축축함이 그를 적신다. 핸드레이크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죽을 것을 각오하고 찾아왔으면서, 옷이 젖는 것을 신경 쓰는군.
그는 고요하고 캄캄한 구릉의 기슭에 앉아 멀리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드래곤 로드의 진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먹구름이 지독해서 별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핸드레이크는 다리를 쭉 펴보았다. 딱딱하며 축축한 땅의 느낌이 다리 전체로 전해져 온다. 핸드레이크는 당황하며 다시 다리를 모아 가슴 앞에 세웠다. 너무 궁상맞 아 보이는걸? 흠. 아무도 안 보겠지. 핸드레이크는 다리를 모으고 팔로 무릎을 감싸쥐었다. 그렇게 약간은 궁상맞은 모습으로 핸드레이크는 기다리기 시작했다. 귀뚜라미의 울음소리.
언덕을 스치는 바람에 풀들이 스치는 소리.
핸드레이크는 눈을 감는다.
세월을 되짚는다. 주군과의 만남, 동지적 결속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애증에 가까운 감정들로 점철된 세월, 그러나 야망의 실현이 다가옴에 따라 보다 현실적으로 바뀌어버린 두 사람. 루트에리노 대왕은 루트에리노 대왕이고 핸드레이크는 핸드레이크다. 두 사람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었고 그들은 세상의 정점에 힘겹게 올라가고 있다. 그러나 이젠…………
주군께 글이라도 남기고 올 걸 그랬나.
핸드레이크는 눈을 뜬다.
드래곤 로드의 진문이 열린다. 선두는 항상 그래왔듯이 와이번의 부대들이다. 새카만 날개의 움직임은 먹구름 낀 밤하늘 아래 거의 판별이 어렵다. 하지만 적의에 충 만한 그 붉은 눈만 보아도 충분하다. 핸드레이크는 그들을 보낸다. 와이번은 하늘로 솟구쳐 사라져간다.
그 다음 진문을 나서는 것은 오크들의 부대, 사나운 콧김소리가 언덕 위까지 들려온다. 핸드레이크는 마치 군대의 출병식을 구경하는 노인이나 된 듯이 태연히 앉아 서 그 모습을 굽어본다. 오크들의 행렬은 끝이 없는 것 같았다. 핸드레이크는 박수라도 쳐줄까 하는 잡념이 들었다.
간혹 트롤들의 거체가 그 사이사이에서 움직인다. 쿵쿵거리는 발자국소리가 들려온다. 의외로군. 핸드레이크는 차라리 냉철한 제삼자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암습을 하려 하면서 저렇게 시끄러운 녀석들을 선봉으로? 핸드레이크는 쓴웃음을 짓는다. 고맙군, 드래곤 로드. 오늘밤의 암습쯤은 내가 예측할 거라고 믿는다는 말이지? 그 렇다면 암습이 아니라 전면전의 개시가 되겠군.
드래곤 로드는 핸드레이크가 암습을 당할 거라고 믿지는 않는다. 그는 당당하게 진격한다. 그러나 그조차도 핸드레이크가 이렇게 무모한 짓을 벌일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핸드레이크가 설마 드래곤 로드의 공격에 앞서 부대를 버려둘 것이라고는, 게다가 단신으로 드래곤 로드의 진지 곁에 와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핸드레이크에게 암살 따위의 가장 확률이 적은, 그러나 배당이 가장 높은 판을 노리는 도박사 기질이 있다고는 더욱 믿지 못할 것이다.
미안한데, 늙은이.
오크들의 행렬은 아직까지 이어진다. 놈들은 흥분했고 지금 당장이라도 서로에게 칼질을 해댈 것 같은 흉흉한 분위기이다. 하지만 핸드레이크는 행렬의 길이에 지루 한 기분이 들어서 팔을 높이 올려 기지개를 켠다.
빨리 나와. 삶에 미련이 남을 것 같잖아.
그때 핸드레이크는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다시 한번 주의깊게 드래곤 로드 군의 편성을 바라본다. 지금 진문을 나서는 것은 손에 팔치온을 든 채 거대한 늑대들에 올라탄 오크들의 모습이다. 평범한 모습이지만, 이상한 일이다.
울프라이더가 왜 보병의 뒤에 나오지?
암습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울프라이더의 정숙성은 크게 떨어진다. 따라서 보병으로 선제 공격을 감행하고 혼란해진 적군들 사이로 울프라이더들이 뛰어든다…………, 안 돼. 역시 그럴 수는 없다. 정숙성 하나를 위해 울프라이더의 돌격력을 포기하는 처사다. 게다가 암습이 아니지 않은가.
핸드레이크의 척추를 타고 싸늘한 기분이 든다. 그와 동시에,
“취이이익! 잡아라!”
울프라이더들은 정확히 핸드레이크가 서 있는 언덕으로 돌격해 온다. 늑대들의 포효가 철판을 긁는 칼날의 소름끼치는 매서움으로 핸드레이크를 후려친다. 핸드레 이크는 벌떡 일어섰다. 뒤를 돌아본다. 선두에 진격했던 오크들과 트롤들은 이미 언덕 배후에 포진을 마쳤다. 플라이 주문? 안 된다. 날아올라도 도망갈 수는 없다. 와 이번들이 상공에 대기하고 있겠지.
핸드레이크는 피식 웃는다. 난 하나인데 너무 많잖아.
바로 다음 순간 핸드레이크의 입이 빠르게 움직인다. 울프라이더들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다. 늑대들의 발톱에 흩날리는 풀.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미동도 하 지 않는다. 빠르게 끝난 캐스팅.
“타임 스톱!”
순간, 달려오던 울프라이더들이 허공에 얼어붙어 버린다.
밤바람과 늑대들의 거친 발놀림으로 흩날리던 풀들마저 단단한 조각상처럼 굳어버렸다. 시간은 핸드레이크에 의해서 그 거침 없는 모래를 정지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핸드레이크는 걸어간다. 그는 울프라이더들 중 가장 앞쪽에 달려오고 있던 오크에게 다가갔다.
오크의 입은 크게 벌어져 있고 그의 눈은 증오의 불길로 타오르고 있지만 움직임은 없다. 늑대의 앞발은 허공을 걷어찬 자세 그대로이다. 핸드레이크는 그놈을 바라 보며 피식 웃은 다음 캐스팅한다.
“혹시 친구들 사이에서 주목받지 못해 불만이었다면, 좋은 기회가 왔어. 주제로는 ‘오크는 왜 취익취익거리는가.’가 어떨까?”
핸드레이크는 다시 그 뒤의 몇 마리를 지나친 다음 캐스팅에 들어갔다.
핸드레이크의 모습이 서서히 변한다. 키가 작아지고, 얼굴은 마치 돼지처럼 변한다. 이제 그는 한 마리 오크가 된다.
그리고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시간의 모래는 다시 떨어진다. 바람이 다시 불고, 풀은 흩날린다. 오크로 변한 핸드레이크가 씨익 웃는다.
곧 뒤쪽에서 핸드레이크의 마법에 의해 엄청난 지도력을 가지게 된 오크가 격렬한 토론의 불을 당겼다.
“취이익! 생각하라! 사랑하는 오크 동지들이여!”
좋은 시작이군.
“취익! 우리의 의사를 전달함에 있어, 취익! 취익취익거리는 소음이 무엇에 필요하냐, 취익! 우리는 오크의 자긍심을 버릴 셈인가? 취이이익! 취익취익거리는 소음은 흡사 우리를 돼지 같은 하등 동물, 인간이든 우리든 똑같이 먹을거리로밖에, 취익! 취급하지 않는 하등 동물로 여기게 하지 않는가! 취취취익!”
곧 격렬한 반응.
“취이익! 우리는 돼지가 아니다! 취익!”
“그렇다! 취익! 경애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취이익! 오오, 그대들에 대한 나의 사랑, 취취익! 벅차 끓어올라 말로 다할 수 없도다! 취익! 그러나 생각하라, 형제들이 여, 오, 나의 아들이여! 까마귀가 취익취익거리는가? 피라미가 취익취익거리는가? 지렁이가 취익취익거리는가? 취이익취익! 그렇다면 우리가 왜 취익취익거려야 된 단 말인가!”
오크의 감동어린 연설은 절정을 치닫고 있다. 인간이라면 누군가 나서서 끌어내려야 된다고 생각할 시점에서, 역시 오크들 중에서도 반골 오크 하나가 나선다.
“옳은 말이다. 취익! 그러나 본성을 억누르는 것은, 취익! 잔인한 처사다. 우리는 오크고, 취익! 오크는 취익취익거릴 때 가장 숭고한, 취익! 만족감과 기쁨을 느낀다! 취익! 그것은 우리의 자아의 확인이다! 취취취익!”
여지 없이 맞받아쳐야겠지.
“취익! 자아! 저열한 본능과 자아를 혼동하진, 취익! 말아라! 그러한 논법은 신물이 난다! 취췻! 음습한 욕망에 자아 확인이라는 이름의 면죄부를 주지 말지어다! 취 익!”
핸드레이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달려간다.
그의 등 뒤의 언덕에서는 격렬한 노변 대토론이 더욱 열기를 더해가고 있었으며 주위의 군대들이 새카맣게 몰려들어 그 격렬한 토론에 참가한다. 그러나 핸드레이크 는 생각한다.
도대체 어떻게 내가 온다는 것을 알았을까.
내가 한 짓은 도저히 논리적인 행동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비논리적인 행동을 어떻게 추측할 수 있었을까. 마법을 써서 내 위치를 파악한 것인가? 아니다. 그런 마 법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나를 관찰했다면 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핸드레이크는 생각을 관두기로 한다. 어느새 본진 입구가 가까워지고 있다. 진지의 병사 오크들이 놀란 눈으로 언덕 위의 일대 소란을 바라보다가 그를 멈추게 한다. “취익! 무슨 일인가!”
“취익취익. 급하다! 마법사의 마법으로, 취익! 부대가 혼란에 빠졌다! 급보다!”
핸드레이크의 다급한 오크 목소리에 오크들은 놀라서 목책을 열어준다. 핸드레이크는 부리나케 안으로 뛰어든다. 평소에 오크로 변하는 연습을 많이 해두었기에 다 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갑자기 짧아진 다리 때문에 뛰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핸드레이크는 그야말로 허겁지겁 달려간다.
그런데 드래곤 로드의 막사는? 마법을 사용한다면 들키게 될 것이다. 아예 여기서 그냥 자폭해 버릴까? 그러나 마법사의 정신은 그것을 가로막는다. 확실치 않은 방 법에 기댈 수는 없다. 목숨을 건 만큼, 대가도 톡톡히 받아내어야 한다. 드래곤 로드는?
다행히도 핸드레이크는 급히 달려가는 장교급 정도로 보이는 오크를 본다. 장교급이 급히 달려간다면, 어디로 달려가 보고하겠는가. 핸드레이크는 그 뒤를 따른다. 진지답게 곳곳에 화톳불이 켜져 있다. 하지만 인간의 그것과는 달리 이 진지에 화톳불은 퍽이나 적다. 불을 싫어하는 놈들이 대부분이기에. 그래서 핸드레이크는 어 둠을 타고 유유히 오크 장교를 쫓는다.
무거운 갑옷을 걸친 그 오크는 씩씩거리며 달려가더니 곧 중앙의 커다란 막사로 뛰어든다. 핸드레이크는 주의깊게 막사에 다가간다. 안에서 고함소리 같은 오크 장 교의 보고가 들려온다.
“보고합니다, 드래곤 로드. 취익! 그 마법사는………….”
핸드레이크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 뒤의 말은 필요없다. 여기 드래곤 로드가 있다는 것만 알면 그만이다. 핸드레이크는 캐스팅에 들어간다.
파악!
막사의 천이 찢어지며 핸드레이크의 옆구리에 화끈한 느낌. 이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일격에 관통하는 고통. 핸드레이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찢어진 천막 안 을 노려본다.
“죽이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페어리퀸 다레니안. 그녀였군. 정신없이 퍼덕거리는 그녀의 날개는 으스름한 촛불 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난다. 핸드레이크는 시선의 초점을 좀 앞으로 당긴다. 그러
자 천막과 함께 자신의 허리를 베어버린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하얀 수염, 기다란 백발,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 달려 있는 커다란 눈썹도 희다. 그 아래의 눈은 깊고 심원하다. 마법사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면 최고의 모델이겠지. 그러나 그 마법사의 품격을 가지고 있는 늙은이는 거대한 롱소드로 핸드레이크의 허리를 베었다. 핸드레이크는 허물어진다.
노인은 쓰러진 핸드레이크를 경멸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군. 고작 암살인가. 믿기 어려웠거늘, 정말 실망을 금할 수 없군.”
드래곤 로드로군. 폴리모프한 상태인가 보다. 하긴 원래의 거대한 몸이라면 이런 조그만 막사에 들어갈 수도 없겠지. 핸드레이크는 갑자기 우스워졌다.
페어리퀸 다레니안이 부리나케 날아온다. 그녀는 통곡한다.
“미안…………… 미안해요. 핸드레이크. 내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던 그녀는 핸드레이크의 상처에 날아가 어떻게든 그 손으로 피를 막아보려 한다. 핸드레이크는 더 우스워졌다. 맨손으로 폭포를 막으려 드는 것과 같다. 다레니안은 한편으로는 눈물을 쏟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드래곤 로드를 쏘아본다.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드래곤 로드는 별 말도 하지 않고는 검으로 다레니안을 후려갈겼다. 다레니안은 급히 피하려 했으나 페어리의 속도와 그 작은 몸에도 불구하고 드래곤 로드의 롱소 드에 날개를 잃고 만다. 다레니안은 비명을 지르며 마치 날개 잃은 나비처럼 흐느적흐느적 떨어진다.
드래곤 로드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한다.
“날파리나 다름없는 페어리 주제에 위대한 드래곤에게 명령하는 것인가.”
그리고 드래곤 로드는 그대로 발을 들어 그야말로 파리라도 뭉개듯이 다레니안을 뭉갠다. 아니, 밟아버리려 한다. 날개를 다친 다레니안은 꼼짝도 하지 못한다. “아압!”
핸드레이크는 죽을 힘을 다해 손을 뻗어 드래곤 로드의 발을 붙잡아 올려버린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드래곤 로드는 뒤로 기우뚱하고, 핸드레이크는 그 틈을 타 서 몸을 굴린다. 벌떡 일어서는 그의 입에서 부상자의 그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고 정확한 스펠이 읊어진다.
“게이트!”
중심을 잡은 드래곤 로드가 본 것은…… 허공에 만들어진 차원문과 그 앞에서 허리를 숙여 다레니안을 들어올리는 핸드레이크의 모습이다. 드래곤 로드는 노호하며 롱소드를 휘두른다. 아직 충분히 커지지 못한 게이트를 바라보며 핸드레이크는 주저없이 다레니안을 집어넣고는 옆으로 몸을 굴린다.
“핸드레이크!”
다레니안의 찢어지는 목소리는 차원문을 통과하며 희미해진다. 핸드레이크는 드래곤 로드의 롱소드는 간신히 피했으나 드래곤 로드에게 보고를 하고 있던 오크 장 교는 생각지 못했다. 느닷없이 날아온 팔치온이 그의 다리를 할퀴고 지나간다. 검은 하늘이 붉게 보이는 이유는, 핸드레이크의 눈에 튀어들어온 핏방울 때문일까. 미 친 듯이 타오르는 모닥불 때문일까.
“크윽!”
차원문을 통과하여 단숨에 드래곤 로드의 진지로부터 수백 큐빗 떨어진 평야까지 날아가 버린 다레니안은 허공에 튕겨져 나오자마자 날개를 잃은 극심한 고통을 느 끼며 다시 땅에 떨어진다. 조그만 돌멩이조차도 페어리에겐 바위나 마찬가지다. 다레니안은 돌멩이와 흙덩이에 부딪혀 멍들고 상처입으며 땅에 구른다.
“으으윽……, 으음.”
다레니안은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몸이 부서져 나가는 고통이 느껴지지만, 다레니안은 입술을 깨물며 일어난다. 키를 덮는 풀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레니안 은 순간 몸을 부르르 떤다.
다레니안은 어처구니없는 걱정을 한다. 그녀가 가장 무서워하는 동물, 개구리가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걱정이다. 움직이는 것은 뭐든 먹어버리니까. 하지만 곧 다레 니안은 자기가 과잉 불안에 시달린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언덕에 무슨 물기가 있다고 개구리가 있겠는가. 다레니안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똑바로 선다. 눈 앞을 완전 히 가려버리는 잡초들 때문에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다.
“개굴.”
“으아아아! 개구리다……………!”
다레니안은 급히 몸을 돌린다. 실수다. 가벼운 페어리의 몸은 제자리에서 몇 바퀴나 돌면서 곧 중량감보다 원심력이 강해져 데구르르 굴러버린다. 다레니안은 고꾸 라진 채 자신의 다리 사이로 뒤를 본다.
“하하하.”
씨익 웃고 있는 핸드레이크의 얼굴이 보인다.
“핸드레이크!”
핸드레이크는 미소를 지은 채 그대로 무겁게 앞으로 쓰러진다.
“꺄아아!”
쾅! 다레니안은 눈을 감는다. 휘리릭. 다레니안은 날려가 버린다. 핸드레이크가 쓰러지면서 일으킨 바람은 가벼운 페어리를 멀찌감치 날려버린다. 다레니안은 힘겹 게 핸드레이크에게 기어간다.
다레니안은 핸드레이크의 얼굴을 본다. 핏기없이 싸늘한 얼굴. 독한 죽음의 냄새가 퍼지는 것 같다.
“핸드레이크! 핸! 핸! 정신차려요!”
다레니안은 핸드레이크의 입술을 마구 민다. 그러고는 코를 잡아당긴다. 핸드레이크는 코가 간지러워진다.
“에취!”
데구르르……………. 다레니안은 다시 온몸에 멍이 든다. 핸드레이크는 말한다.
“아직 안 죽었습니다.”
허리에서 피를 흘리며 땅에 얼굴을 박고 있는 남자의 말투라기엔 차분하다. 다레니안은 눈물을 글썽이며 핸드레이크에게 기어간다. “핸…….”
“텔레포트 됩니까?”
핸드레이크가 말을 할 때 날리는 먼지가 다레니안에게는 먼지폭풍이다. 하지만 다레니안은 애써 참아내며 되묻는다.
“예?”
“텔레포트 되냐구요.”
“아………… 예. 기주했어요.”
“절 좀 옮겨주십시오.”
“아, 예. 저, 그리고 고마워요. 핸. 살려줘서.”
핸드레이크는 피식 웃는다. 죽기 직전에라도 웃음을 지어야 남자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그건 그저 나의 왕, 루트에리노 전하를 위해 행한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페어리퀸 당신을 염두에 두고 한 일은 아닙니다.”
“예? 무슨 말입니까?”
“당신 덕분에 암살이 실패한 이상, 난 살아 있는 것이 주군께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다레니안은 앞쪽 말에 창백해졌다가 곧 뒤쪽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살아나려면, 그 진지 안에서 내 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를 이용하는 것이 낫겠지요.”
“당신이 살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살려는 이유는 주군을 위해?”
“그렇습니다.”
다레니안은 잠시 말을 멈춘 채 핸드레이크를 바라본다. 예고없이 그녀의 입이 열린다.
“도대체 왜 사는 거예요!”
다레니안의 짜랑짜랑한 목소리. 물론 크지는 않지만 핸드레이크의 얼굴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라 핸드레이크에겐 천둥소리나 다름없다. 핸드레이크는 땅에 뺨을 가져다댄 채 옆으로 선 것처럼 보이는 다레니안을 바라본다.
“왜, 무엇 때문에 사는 거예요! 100년도 살지 못할 인생이면서, 왜 자기를 위해 살지 않아요!”
“다레니안………….”
다레니안의 눈은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
“내가, 내가 왜 드래곤 로드에게 그 사실을 알렸는지 알아요?”
“물론 날 체포되게 하려고 했겠지요.”
“그래요! 그래야 당신이 죽지 않을 테니까! 오후에 당신 얼굴엔 모두 다 드러났어요. 당신이 죽을 생각이라는 것 알아차렸죠. 난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겼어요. 당신 이 체포되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도, 멍청한 이상도 모두 버리고 자신을 위해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렇습니까?”
갑자기 다레니안은 핸드레이크의 손가락을 쥔다. 그녀는 낮지만 열성적인 어투로 말한다.
“핸. 늦지 않았어요. 지금이라도 괜찮아요. 자기를 위해 살아요. 당신이 루트에리노를 도와 왕국을 세울 수도 있어요. 그 왕국이 수천 년간 번영할 수도 있겠죠. 하지 만 당신은 수천 년 후를 살지 않아요. 다른 사람 대신에 사는 것도 아니에요. 당신이 세운 왕국도 영원하지는 않을 거예요. 왜 가장 소중한 목숨을 쓸데없는 것 때문에 희생하려는 거죠?”
“쓸데없는 것………..”
“그래요. 당신이 대륙 최고의 왕국을 세우고, 아니, 대륙을 아예 통일할 수도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하지만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과연 제대로 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핸드레이크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격한 고통으로 신음이 흘러나오지만 핸드레이크는 언덕 위에 정좌한다. 밤바람이 그의 뜨거운, 그러나 차가운 뺨을 스친다. 핸드레이크는 손바닥을 내밀어 다레니안을 올라타게 한다. 핸드레이크는 손을 다리 위에 올려 다레니안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사랑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다레니안은 느닷없는 질문에 의아해한다. 하지만 핸드레이크는 재촉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본다. 다레니안의 얼굴에 홍조가 떠오른다. 그녀는 단호하게 말한다. “사랑을 하고 있어요.”
이번엔 핸드레이크가 당황한다. 그는 물끄러미 자신의 손바닥에 올라타 있는 요정의 여왕을 내려다본다.
“날 사랑합니까.”
다레니안은 고개를 끄덕인다. 핸드레이크는 눈을 들어 다레니안을 외면한다. 그는 밤하늘을 바라본다. 어느새 먹구름이 걷혔는지, 밤하늘엔 루미너스의 빛이 반짝인
다. 핸드레이크는 달을 보며 말한다.
“그렇다면 내 모든 것을 사랑하십시오.”
“예?”
“우리는 인간입니다. 당신 같은 페어리나 조화의 엘프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독단의 드워프도 아닙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무슨 뜻이죠?”
“우리는 하나일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는 주군의 신하 핸드레이크, 루트에리노의 친구 핸드레이크, 바이서스 군의 참모장 핸드레이크, 클래스 9의 마법의 마스터 핸 드레이크, 드래곤 로드의 철천지 원수인 핸드레이크, 그리고………….”
핸드레이크의 입이 잠시 멈추었다가 말한다.
“고귀한 페어리퀸의 사랑을 받는 핸드레이크입니다.”
다레니안은 붉어진 얼굴로 핸드레이크를 올려다본다. 하지만 무정한 핸드레이크의 얼굴은 아래를 향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달을 향해 말한다. 밤기운이 차갑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바로 나 핸드레이크입니다.”
다레니안은 참지 못하고 말한다.
“무슨 말씀이죠?”
“인간은……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총애를 동시에 받습니다. 원래 불안하죠. 우리는 관계 속에 형성되는 존재입니다. 엘프나 페어리, 드워프들을 부러워할 수도 있겠 지만, 부러워한다 해서 우리가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모르겠어요. 무슨 말인지.”
“페어리인 당신은 이해하기 어렵겠지요. 인간에게 있어 나는 하나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단수형이 아닙니다. 나라는 것은 원래 다면적이고 여럿입니다. 그 래서 자기를 위해 산다는 말이 원래 통하지 않는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왜죠? 왜 안 된다는 거죠? 굴뚝새에서부터 크라켄까지, 페어리에서부터 악마까지 모두 자신을 위해 살아요. 그런데 왜 인간은 그럴 수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인간이죠.”
다레니안은 얼빠진 얼굴로 핸드레이크를 올려다 본다. 핸드레이크는 침울하게 말한다.
“당신이 날 사랑하려 한다면, 대왕의 원대한 희망을 함께 수행하는 핸드레이크, 루트에리노의 인간적인 갈등에 같이 가슴 아파하는 핸드레이크, 바이서스 군의 승리 를 위해 목숨을 거는 핸드레이크, 사상 최초로 클래스 10의 마법을 만들려 애쓰는 핸드레이크, 드래곤 로드를 죽이기 위해 무슨 짓이든 불사하는 핸드레이크, 이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다레니안은 격하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당신은 내 눈앞의 핸, 그것일 뿐이잖아요? 핸을 사랑하려고 수많은 핸을 찾아낼 필요는 없어요. 여기, 언덕 위에 앉아 있는 핸이잖아요! 나 를 들고 있는 핸이잖아요. 드래곤 로드가 당신을 죽이려고 그 많은 핸을 일일이 하나씩 죽이지는 않잖아요! 드래곤 로드는 오로지 여기 있는 이 핸만을 죽이면 그만이 잖아요! 마찬가지예요. 나도 그 많은 핸을 사랑할 수는 없어요. 여기 있는 이 핸만 사랑해요.”
핸드레이크는 드디어 얼굴을 내려 다레니안을 바라본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영원히 사랑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나 또한 당신을………….”
다레니안은 충격에 말을 잃는다. 그런데 핸드레이크는 말을 채 맺지도 못한 채 두 번째로 앞으로 기울어진다. 다레니안은 크게 외친다.
“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