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다바다!”
“뭐라고?”
“아, 아니 바바다!”
“후치…….”
“으아, 바다다!”
바다구나. 저게 바다구나. 우와, 신기하다. 물이 너무너무 많다. 심하게 많다. 수평선에서 항구를 향해 들어오는 조그만 범선들의 모습이 흰 점으로 보인다. 사실 조 그만 범선은 아니겠지. 하지만 산기슭에서 내려다본 바다의 넓은 수면과 범선의 모습은 평야에 던져둔 흰 꽃잎 같다. 배들의 뒤로 길게길게 이어지는 항적들에서 하 얀 길이 생겨난다. 하지만 그 하얀 흔적 끄트머리의 배는 너무 작아 보인다. 이른 아침의 태양이 바다에 뿌린 햇살들이 파도에 넘실거리며 수면을 구른다. 으아, 바다 다!
바람에선 희한한 냄새가 난다. 비릿한 듯하면서 뭔가 강렬하다. 이상하군. 민물고기에선 이런 냄새가 나지 않았는데. 비릿한 걸 봐서 물고기 냄새인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그럼 무슨 냄새지? 평야에서 부는 바람과는 너무 이질적인 바람이 분다.
나와 샌슨이 좀 심하게 코를 벌렁거리고 있어서 칼과 이야기를 나누던 일스 공국의 국경 수비대 대장은 피식 웃으며 한마디 했다.
“수행원들이 초행인 모양이군요.”
“예.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군요.”
“아, 말씀 낮추십시오. 귀하는 귀국을 대표하시는 사절이시고, 전 국경 수비를 맡고 있을 뿐입니다. 연락은 이미 받았습니다. 들어오십시오.”
산 가운데 조그맣게 자리한 바라크지만 그래도 엄연한 국경 수비대였다. 그래서 그 안에는 마구간도, 병기고도, 그리고 사절 대접용 식당도 모조리 있었다. 우리는 간단한 조찬을 대접받고는 국경 수비 대장의 안내를 받아 일스 공국으로 들어섰다.
산 위에서 바다를 볼 때는 꽤 가까워 보였는데 어떻게 된 것이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어쨌든 산길을 꾸준히 걸어가다 보니 정오쯤 되어 평야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저게 델하파의 항구에요?”
이루릴은 내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후치. 델하파의 항구는 해안선을 따라 훨씬 더 올라가야 해요. 여긴 그저 국경에 인접한 조그만 포구일 뿐이랍니다.”
“아, 그래요? 이게 조그만 포구인가요?”
이렇게 커다란 항구가 조그만 포구라고? 그것 참.
“예. 이곳도 꽤 크긴 하지만 델하파의 항구는 훨씬 더 거대하답니다.”
“허어.”
그 항구 마을의 이름은 세들레스였다.
입구로 들어서자 바이서스의 사절단 일행을 영접하기 위해 길거리로 나와 환호를 보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수효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얼굴 붉어지는 장면이다. 11월의 바닷바람이 매서운데 저렇게 바알간 코만 내놓은 차림으로 나와서는 열심히 손을 흔드는 것이다. 아이고 부끄러워라.
그런데 그들은 외국 사절의 기이한 모습에 꽤 놀라는 모양이다. 사절단에 포함된 아름다운 엘프와 거대한 말을 탄 처녀의 모습은 당연히 기이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의아한 얼굴로 우리를 보았다가 서로에게 이야기를 걸었다.
“바이서스에선, 여기사들이 많은가 보지?”
“그래도 엘프 기사 이야기는 못 들어봤는데.”
난 그들의 발음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국경 수비 대장의 발음은 거의 흠잡을 데 없는 바이서스 발음이었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의 발음은 우리와 고저가 조금 달랐다. 아하! 저게 그 방언이라는 건가? 하지만 별로 많이 다른 것도 아니네, 뭐. 어쨌든 단어나 문법은 아무런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퍽 감명을 받은 표정으로 환호의 수준을 높였다. 이루릴은 별 표정 없었지만 네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샌슨이 제발 품위를 지키라 고 억압하지 않았으면 끝까지 손을 흔들었을 것이다.
세들레스 마을의 대로를 그렇게 환호를 받아가며 걸어간 끝에, 국경 수비 대장은 마을의 커다란 공회당으로 안내했다.
공회당인지 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해변 대로를 따라 조금 올라간 위치의 해안 절벽 위에 세워져 있는 그 커다란 건물은 2층 높이의 건물이었다. 한쪽 면은 완전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서 건물 내의 전망이 퍽 좋을 것 같았고 벽에는 두툼한 판자들이 대어져 있어 사나운 바닷바람을 막아주고 있었다. 난 샌슨의 허리 를 쿡쿡 찔렀다.
“지붕에 왜 밧줄을 매는 거지?”
샌슨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붕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글쎄? 아! 태풍이나 바닷바람에 날려가지 말라고 그러겠지.”
“아, 그래?”
하긴 바람이 정말 보통 대단한 것이 아니다. 하다못해 좁은 골목길에도 최소 세 가지 종류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바람의 도시라고 하면 어떨까. 공회당 안까지 우리를 안내한 국경 수비 대장은 말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시는 대로 나우르첸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나우르첸에서 수도에서 오신 영접단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칼은 당혹한 얼굴로 말했다. 점심 식사? 흠. 겸손한 표현이군. 오찬이라고 표현해도 되겠는데?
공회당 안의 1층은 전부 넓은 홀이었는데 지금 그 넓은 홀 가득히 테이블이 정성스럽게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테이블에 앉았다. 갖가지 요 리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무엇보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테이블 가운뎃자리에 놓여 있는 거대한 괴물이었다. 머리는 도마뱀처럼 생긴 괴물이었는데 발 은, 와, 저런 발로 도대체 어떻게 걸을까? 마치 통나무 같은 발이다. 그런데 등에는 단단한 방패를 둘러쓰고 있었다. 난 다시 샌슨의 허리를 찌를 수밖에 없었다. “저, 저게 뭐야?”
“모, 모르겠는데? 왜 테이블 위에 몬스터를 올려놓은 거지?”
그래서 난 반대쪽에 있는 네리아를 바라보았지만 곧 고개를 돌려버렸다. 네리아는 하얀 얼굴로 입을 크게 벌리고는 그 괴물이 덤비면 곧장 달아나버리기 위해 의자 에서 엉덩이를 조금 띄운 상태였다. 스카일램이 우리를 구원했다.
“바다거북이다.”
“바다거북이오?”
“음. 일스 공국의 유명한 요리 중 하나다.”
이루릴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 바다거북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걸 통째로 먹나? 잠시 후 우리의 시중을 들기 위해 젊은 처녀들이 몰려왔을 때에야 난 그것을 어떻 게 먹는지 알 수 있었다. 처녀들 중 하나가 바다거북 등의 방패를 살짝 떼어내자 그 안에 온갖 양념이 되어 있는 살이 보였고 거기서 김이 무럭무럭 올랐다. 하지만, 하지만………… 이건 정말 이상한 취미로군. 왜 요리에 원래 모습이 남아 있도록 하는 거지? 이루릴은 아예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식사가 끝날 때까지 바다거북은 쳐다보 지도 않았다.
그리고 조금 후에는 처녀들이 접시를 날라와 우리 앞에 내려놓았다. 아이구 맙소사! 이 지방 사람들은 도대체 자기가 뭘 먹는지는 확실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보 지? 내 앞에 놓인 접시에는 물고기가 거의 완벽한 원형을 보존한 채로 허연 눈을 내게 홉떠 보이고 있었다. 물론 살은 저며 있고 양념도 되어 있는데다가 요리도 잘 되 어 있었다. 하지만 그 커다란 생선의 머리와 꼬리는 완전하게 남아 있었고, 그래서 난 왜 음식물과 눈싸움을 하면서 먹어야 하는 건지 의아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 다. 요상한 취미네? 몇 번에 걸쳐 놀랐기 때문에 잠시 후 커다란(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이름으로! 저렇게 크다니!) 가재가 접시에 담겨 나타났을 때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그 가재 역시 요리는 되었지만 완전한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확실히 맛으로 음식 이름 맞추기가 싫은가 봐. 척 보면 알도록 해놓는데?”
“응. 그런가 봐.”
스카일램은 근엄하게 우리들에게 그 바닷가재 요리의 우수성과 희귀성, 그리고 높은 영양가와 더없이 훌륭한 맛에 대해 설명해 주었지만 우리는 찜찜한 표정으로 노 려볼 수밖에 없었다. 네리아는 비싼 음식이라는 말을 듣기가 무섭게 냠냠거리며 먹기 시작했지만 이루릴은 창백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음식물의 맛뿐만이 아니라 그 생물의 모습까지도 사랑하는가 보군요.”
“그런가 보네요.”
샌슨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하긴, 우리도 돼지 바비큐 같은 것을 만들기도 하지.”
“그건 그래도 거의 모습이 안 남잖아. 그리고 그걸 직접 먹나? 베어내어서 먹지.”
“뭐, 다들 먹고 건강하게 사는 음식이니까 우리도 먹을 수 있을 거야.”
샌슨은 역시 어려울 것 없다는 듯이 간단히 말하고는 요리에 달려들었다. 난 되도록 요리가 맛없어서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원래 소식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 면서 점잖게 식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되도록 진저리를 치며 달아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 애쓰면서 예의 바르게 홀에서 나왔다.
바깥으로 나오니 곧 맹렬한 바닷바람이 볼을 때렸다. 우화! 속이 다 후련해지는 것 같네.
절벽 위에 지은 건물이라 그런지 건물 앞의 넓은 마당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수평선이었다. 더군다나 하늘엔 먹구름이 끝도 없이 펼쳐져 기막히게 넓어 보였 다. 난 주위의 경관에 질려 조금 주춤하다가 마당 한쪽에 세워져 있는 마차로 다가갔다.
마차에는 두 명의 병사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운차이를 감시하느라 연회에 초대되지도 못하고 마차의 마부석에 앉아서 식사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가져다준 것인지, 어쨌든 그들은 빵과 케이크 몇 종류, 그리고 고기 요리 한 접시와 와인 한 병을 들고서는 서로 기분 좋게 주고받으며 소탈하게 식사중이었다. 그들은 날 보더 니 웃으며 말했다.
“어, 벌써 식사 끝내셨소?”
“말 놓으세요. 전 후치에요. 후치 네드발.”
두 사람은 자기 소개는 하지 않고 그저 빙긋 웃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마시던 술병을 나에게 건네주었고 난 감사히 받아 마셨다.
“안으로 들어가 식사하시죠? 마차는 어차피 잠겼잖아요?”
“아, 명령이야.”
호위대원은 간단히 대답했고 난 별로 할말도 없어져 고개를 끄덕였다. 술병을 돌려준 다음 운차이는 어쩌는가 싶어서 마차 뒤로 돌아가 문의 창살 사이로 안을 들여 다보았다. 운차이 역시 빵과 와인, 접시 하나를 가지고 대충 식사를 하고 있다가 창쪽이 어두워진 것을 깨닫고는 날 바라보았다.
“비켜라, 어둡다.”
난 어깨를 으쓱하고는 마차 뒷문의 발판에 앉았다. 마차의 싸늘한 쇠장식 등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눈앞에는 끝도 없이 펼쳐진 광막한 바다가 보였다. 그리고 수평 선에서부터 머리 위까지 회색 먹구름이 펼쳐져 있었다.
“아직 거기 있냐?”
등 뒤쪽 마차 안에서 울려나오는 운차이의 목소리였다.
“어떻게 알았어요?”
“네가 발을 구를 때마다 마차가 울리니까.”
흐음. 그러고 보니 난 발판에 앉은 채 발을 흔들고 있었군.
“그 안, 춥지 않아요?”
“어머니 품속 같지야 않다. 구름 때문에 어둡기도 하고.”
난 고개를 돌려 마차 문에 귀를 댄 채 멍하니 옆쪽을 바라보았다.
“바깥도 별로 밝지는 않아요. 컴컴하군요.”
“비가 올 것 같군.”
“예?”
운차이가 뒤척거리는 것인지 마차가 조금 울렸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 운차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한 것을 볼 거야.”
위를 올려다보자 운차이는 창살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는 창턱에 팔을 모아 기대서 있었다. 무슨 굉장한 것을 본다는 거지? 그러나 잠시 후 난 그것이 뭔지 깨달았다. 후두두둑. 마차 앞쪽에서 호위 대원들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랑비인데 뭐. 그리고 난 마차 발판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운차이가 말한 굉장한 장면, 기가 막힌 장면을 보게 되었다.
겨울 바다에 비가 오는 것이다.
쏴아아아………….
머리 위 마차 지붕에서 빗물이 방울져 뚝뚝 떨어졌지만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굉장했다. 저 넓은 바다에 비가 오는 것이다. 마치 하얀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 같다. 쏴아아아…………. 주위가 온통 희거나 회색이었다. 그리고 바다 표면을 비가 때렸다. 바다 표면이 튀어올랐지만 이 먼 거리에선 그저 아련하고 신비로운 흰색과 회 색의 일렁거림일 뿐이다. 짓누르는 회색 사이로 초점 없이 흔들리는 바다, 저 거대한 해수면과 저 거대한 하늘이 빗방울로 이어지고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빗방울들. 너무나 많은 하얀 실과 은실이 눈에 보이는 곳, 모든 곳에서 세로로 뻗어 있다.
해수면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는 너무 자잘하게 섞여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이 수많은 하프 현이 동시에 흔들리는 소리처럼 아련하게 들려왔다. 쏴아아아…………, 상 쾌하면서도 우울한 빗소리. 회색빛 겨울 바다에 내리는 빗소리. 어느새 수평선은 희미해져 보이지 않고, 주위는 온통 우윳빛의 세계다. 현실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 와 있는 것 같은, 부드럽고 촉촉한 공기와 빗방울들.
휘이 휘휘이 휘이 휘리릭 휘이이.
운차이는 창살 사이로 얼굴을 내민 채 휘파람을 불었고 그 아래 발판에서는 내가 앉아 빗방울 그려지는 하늘을 보았다. 운차이는 말했다.
“내 고향은 사막이지. 이런 광경은 내겐 현실 이상이야.”
“행복한가요?”
“지금은.”
“지금 외엔 생각지 않고?”
“생각은 부질없어.”
쏴아아아………….
“전향해서, 새롭게 살 거야.”
“그럴 건가요.”
“네 말이 도움이 되었다. 뭐가 될지는 모르지만 만들어 가야지.”
“만들어간다구요?”
“인생을.”
쏴아아아……………
“어젯밤 모닥불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불티가 하나의 생애라면, 불티는 우리들이 까무러칠 정도로 느리고 답답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할 거라고. 그런데 빗방 울은 어떨까요.”
“바다는 어떨까.”
“예?”
“신은 어떨까.”
“할말 없군요.”
“할말이 없으면 안 되지. 인간이니까. 무슨 말이든 해야지. 어떻게든 살아야지.”
“국왕 전하께서 약속했나요? 제대로 증언하면 살려준다고.”
“목숨 외에 많은 것을 약속했어. 난 이제 일스 공국의 수도 바란 탄에 가서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가 세상에 다시 없을 악의 소굴이라고 말해야지. 그러곤 적당히 대가를 받는 거지. 고국이 내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지.”
발 앞에 어느새 물구덩이가 생겼다. 마차가 굴러오느라 생긴 바퀴 자국에 물이 고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면에 빗방울이 좁은 파문을 그려나갔다. 수면에 부딪혔다 가 날아 흩어지는 물방울들이 어지럽다. 마차 지붕의 쇠장식에 부딪히는 빗방울소리, 탕 타당, 탕탕.
“그러곤, 자이펀도, 바이서스도 다 상관없는 땅으로 가서 살아갈 거야.”
“우리 고향에 오세요.”
운차이는 머리를 불쑥 내밀어 날 내려다보았고 난 머리를 조금 기울여 위를 보았다. 어느새 머리카락은 비에 젖어 눈을 찔렀고 그래서 난 젖은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말했다.
“우리 고향은 바이서스이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살 만한 동네지요. 그리고 거기 가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꽤 도움되고 사랑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예 요.”
“왜지?”
“몬스터가 많아요.”
운차이는 차갑게 웃으며 다시 앞을 보았기 때문에 난 그의 턱을 보게 되었다. 난 다시 고개를 내려 발 근처에 흩어지는 빗방울들을 보았다. 운차이는 느릿하게 말했 다.
“그런 동네에 오라는 거냐?”
“예. 칼의 말에 의하면, 그 때문에 우리 마을은 정말 괜찮은 마을이래요.”
운차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난 별로 대답하지 않았다. 빗줄기들이 기분좋게 시야를 가려 마을의 모습은 투명하면서도 불투명했다.
쏴아아아………….
운차이의 목소리마저 내 귀까지 날아오는 동안 젖어버리는 것 같다.
“하긴, 몬스터가 많을 거라는 것은 짐작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흉포한 몬스터는 지금 식당 안에 있고?”
그때 공회당 문이 열렸다. 나와 운차이는 동시에 돌아보았다.
“어라? 비오네?”
가장 흉포한 몬스터의 얼빠진 목소리였고, 그래서 나와 운차이는 동시에 킥킥거렸다.
비는 그치고 하늘은 푸르렀다. 하얀 구름 몇 조각이 유유히 비개인 오후의 하늘을 가로질렀다.
국경 수비대장의 인도를 받으며 우리 일행은 다시 출발했다. 세들레스의 시민들은 다시 우리들에게 환호를 보내었다. 뭐 특별히 기쁜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자기 나라를 찾아준 손님에게 보내는 것 같은 예의 바른 환호였다. 그들은 그 정도면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시간까지 환호를 보낸 다음 정중히 자기 일로 돌아갔다. 세들레스 마을을 벗어나 해안을 따라 나 있는 길을 걷게 되었다. 고개 돌려 포구 쪽을 보았다.
비가 개이자 곧 출항 준비를 하는 어선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두 사람이 충분히 다룰 것 같은 나룻배들이었고 주로 낚싯대를 들고 나서는 모습이었다. 아하. 아마 저 녁거리라도 준비하러 나가는 모양이지? 흠. 집 앞에 무진장한 음식 창고를 가진 사람들이로군. 그들은 그렇게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 어울리는 느긋한 태 도로 나룻배를 저어 앞바다로 나갔다. 흰 구름 아래로 수평선을 지향하여 고요히 떠가는 나룻배들이 이제 작은 점들처럼 보이게 되었다.
해안을 따라 길은 계속되었고 나른한 오후였다.
“하아아아……품.”
네리아는 하품을 하며 몸을 기우뚱거렸다.
“많이 먹었더니 졸린다아. 음냐.”
바람은 짭짤하지만 부드럽게 불었다. 아무리 비가 왔다지만 오전과 오후가 이렇게 다른 날씨라니. 네리아는 크게 기지개를 켜더니 에보니 나이트호크를 운차이의 마 차 옆으로 붙였다. 그러곤 마차 위의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그녀는 지붕 위에서 에보니 나이트호크에게 말했다.
“너 혼자서도 잘 갈 수 있지?”
마부석에 앉아 있던 병사들이 쓴웃음을 짓는 가운데 네리아는 마차 지붕 위의 짐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는 졸기 시작했다. 에보니 나이트호크는 잠시 당황했고, 그러 자 이루릴이 미소를 지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그러자 에보니 나이트호크는 별 투정도 부리지 않고 이루릴의 옆에서 함께 걷기 시작했다.
우리 앞쪽에서는 샌슨과 스카일램이 국경 수비 대장과 함께 걷고 있었다. 스카일램 트리키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그는 자신이 굳은 얼굴을 하고 있을 때 가장 매력적으로 보 인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전방을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하긴 국가 사절을 호위하고 있으니 만큼 지금의 이 여정은 그의 경력뿐만 아니라 그의 자존심 전반에 걸쳐 획기적이면서도 인상적인 일이어야 마땅하겠지만 지금 그 호위당하고 있는 사절단들이 너무나도 방만한 태도로 임하고 있어 국가 사절 수행이라는 엄격한 분위기를 크게 희석시키고 있었다. 아마도 스카일램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자기 혼자서라도 엄하고 강직한 표정을 지어보이려 애쓰는 것이겠지.
하지만 역시 쉽지는 않았다. 지금 스카일램과 더불어 전방에서 말을 걷게 하고 있는 샌슨은 한쪽 손으로만 고삐를 쥔 채 다른 손은 실에 꿰어 목에 걸어둔 반지를 꺼 내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바이서스 임펠에서 산 그 반지다. 그윽하고도 충만한 행복감으로 반지를 바라보는 샌슨의 저 헤벌레한 표정은 스카일램의 표정과 대비를 이루어 스카일램의 기분을 대단히 우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왜 이렇게 나른한 거지?
난 문득 그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호위 대원들 20여 명이 우리를 따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긴장을 완전히 풀어버린다는 것은 이상하다. 왜일까. 왜 이다지도 나
른하고 푸근한, 약간은 지루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칼에게 물어보았다.
“기분이 너무 나른한데요?”
“응? 아, 바닷바람 때문이겠지.”
“그런가요?”
“바다는 영원한 아버지이니까요.”
대답은 이루릴에게서 들려왔다.
뒤에 따라오고 있던 이루릴은 걸음을 조금 빨리해서 우리들 옆에 섰고, 그러자 에보니 나이트호크도 점잖게 따라왔다. 저 거대한 흑마는 확실히 그냥 걸어도 점잖기 그지없다. 위에 네리아가 타고 있지 않으니 확실히 알 수 있는데 그래.
칼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예. 최초의 선원이자 최초로 수장된 그림 오세니아를 말씀하시는가 보군요.”
“그림 오세니아의 혈류가 흐르는 땅은 시무니안의 아들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불러일으키니까요.”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엄격하고 무서운 존재로서 다가오기도 하지요.”
칼과 이루릴의 저 정겨운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뭔 말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시무니안의 아들이 뭐죠?”
“뱃사람을 말한다네, 네드발 군.”
“뱃사람 말인가요?”
“그렇다네. 그렇다고 해서 배를 타는 현실적인 뱃사람을 말하는 것만은 아닐세. 모든 사람들은 인생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뱃사람들이니까. 그런 의미에서의 포괄 적인 뱃사람을 말하는 거지.”
비유는 참 이상한 것이다. 그러나 칼은 계속 말했다.
“뱃사람들은 그들의 어머니 시무니안을 박차고 아버지 그림 오세니안에게 달려가지. 세상의 모든 아들들이 그러하듯이. 하지만 수평선에 해가 떨어지면, 역시 세상 의 모든 아들들이 그러하듯 시무니안에게 돌아온다네. 그들은 엄격하고 무서운 아버지의 바다에서 투쟁하며, 그들의 마음의 고향은 언제나 따스한 대지 시무니안이 라네. 하지만 따스하기 때문에 그들은 대지에 발붙일 수 없지.”
“응?”
“…….가끔은 대화 상대의 나이를 생각해 주세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칼은 빙긋이 웃었다.
“그건 이런 말이네. 세상의 모든 아들은 어머니에게 떼를 쓰며 사랑하고, 아버지를 두려워하며 사랑하지. 어머니의 말은 모조리 반대하며 따르고, 아버지의 모습엔 반발하며 모방하지.”
“전 어머니가 없어서 모르겠어요.”
칼은 흠칫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쓸데없는 위로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빙긋 웃으며 말했을 뿐이다.
“자네는 그래서 스마인타그 양을 자네의 어머니처럼…….”
간신히 ! 간신히 말에서 떨어지지는 않았다. 아니, 이 양반이! 지금 무슨 망발을?
“카, 칼! 도대체 그런 진위판단불가적 망발성농후기담을 들려주는 이유가 뭐죠!”
“한 번 더 말해 보라면………….”
“당연히 못하죠.”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고 칼은 다시 웃었다. 이루릴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 되더니 말했다.
“예. 어쨌든 인간에겐, 아니 대지에 발디딘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뱃사람의 기질이 있고, 그들의 아버지인 바다를 걸으며 무기력한 느낌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무슨 말이야? 난 이루릴에게 고개를 돌렸다.
“잠깐만요. 아버지 옆에서는 무기력해진다고요?”
그 대답은 반대쪽의 칼에게서 들려왔다.
“아버지는 아들이 최초로 만나는 신격 대응물이라서 그러하네.”
“카아아알! 도대체 뭔 말이에요?”
“시간이 자네의 이해를 도울 걸세.”
알았어요, 알았어. 그럼 기다리지. 이루릴은 잠시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영원한 아버지…………. 대지에 발디딘 우리가 영원히 두려워하며 사랑해야 하는 저 바다. 무섭고 두렵고 진저리쳐지는 애정이 함께하는 바다로군요.”
이런, 이루릴마저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네. 난 잠시 볼이 부었다가 말했다.
“이루릴.”
“예?”
“델하파의 항구에 아버지로서의 바다를 보러 간 거였어요?”
이루릴은 내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오. 말씀드렸을 텐데요?”
“아. 누굴 만나보러 간다고 그랬지요. 그리고 엊그제는 누구의 흔적을 찾으러 간다고 하셨지요?”
“예. 누군가의 흔적을 찾기 위해 누굴 만나보러 갔었어요.”
“예. 그게 바로 아버지 바다였어요? 도대체 누굴 찾으시는데요?”
이루릴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난 무안해진 나머지 사과하려고 했다. 내가 입을 막 열려는 순간에 이루릴이 말했다.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입니다.”
나와 칼만이 그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나와 칼만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칼이 말했다.
“핸드레이크의 자취를 추적하시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칼은 눈살을 조금 찌푸리다가 대답했다.
“핸드레이크를…………. 300년 전의 인물의 자취를 왜 추적하시는 것인지 몹시 궁금하군요. 들려주실 수 없는 이야기입니까?”
이루릴은 잠시 칼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우리들의 말과 네 번째 말인 에보니 나이트호크는 300년의 역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그들의 역사를 걸어가고 있었지만, 말 위의 우리들은 잠시 현실을 벗어나 300년의 바다에 뛰어들어가고 있었다.
“핸드레이크가 어떤 인물인지는 잘 아실 겁니다.”
이루릴은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칼은 그래서 이루릴의 볼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지금껏 대륙에 나타났던 마법사들 중 전무후무한 클래스 9 마스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클래스 9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던 마법사들은 여럿 있었습니다만, 클래스 9를 마스터한 마법사는 없습니다.”
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100명의 데스나이트를 물리쳤다는 저 무지개의 솔로처도 클래스 9 마법을 사용하기는 했습니다만 한 번도 자신이 클래스 9의 마스터라고 말하지는 않았지요. 자신이 클래스 9를 마스터했다고 말한 마법사는 핸드레이크뿐입니다.”
이루릴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예. 그리고 하나의 클래스를 마스터한 자는 다음 클래스의 마법을 개척할 수 있습니다.”
“개척………… 한다고요?”
“지금은 인간들 중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아니, 알더라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해야 정확하겠네요. 왜냐하면 핸드레이크 이후로는 아무도 클래스 9를 마 스터한 자가 없었고, 그래서 마법사들은 선학들에 의해 이미 개척된 것들만 익힐 뿐 새로운 것을 개척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칼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계단 꼭대기에 오른 자만이 새로운 계단을 만들 수 있는 것이군요?”
“예. 좋은 비유세요. 지금의 마법사들은 그저 같은 클래스의 마법을 조금 개조하거나 손질하기만 할 뿐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물론 그러한 연 구는 활발합니다. 많은 새로운 마법들이 계속 연구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새로운 마법이라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마법들을 가공한 것일 따름입니다. 완전히 새 로운 마법이 나타난 것은 이미 너무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까………..”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핸드레이크가 클래스 10의 마법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
“예. 그가 클래스 10의 마법을 창조하려 노력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창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없지요.”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그에 대한 기록의 양이 참으로 적으므로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군요.”
“예. 정확하게 조사해 보기 전에는 그가 클래스 10의 마법을 창조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습니다.”
칼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 되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세레니얼 양은 핸드레이크의 자취를 추적하여 그가 클래스 10의 마법을 창조했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다는 것입니까?”
“예.”
“왜……, 왜 그 마법이 창조되었는지 확인하고 싶으신 겁니까? 호기심이나 학문적인 요구입니까?”
“아니오. 전 그 클래스 10의 마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예?”
칼이 되물었지만 이루릴은 대답하지 않았다. 클래스 10의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칼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푸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프가 하는 일에 의미를 묻지 말라고 했지요.”
이루릴은 방긋 웃었다. 칼 역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클래스 10의 마법이 필요한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뭐, 마법사들에게 새로운 마법이란 소중한 것이라고 하던가요. 이해할 듯합니다. 아, 물론 클래스 10의 마법이 있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사용하실 수는 있겠군요?”
“예. 새로 만들어내는 것은 마스터가 아니면 안 되지만 이미 존재하는 마법은 배워 사용할 수 있겠지요.”
이루릴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나 칼은 의구심 담긴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클래스 10의 마법이 필요하시다면…………. 이상하군요.”
이루릴은 흥미 있는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뭐가 이상하십니까?”
칼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혼잣말을 하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핸드레이크는 항상 자신의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고 애쓴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적은 정보, 게다가 300년의 모진 풍상이 흘러가면서 그에 대한 어떤 기록이 남 아 있을까요? 과연 그가 클래스 10의 마법을 만들었는지 확인할 만한 정보가 남아 있을까요?”
“가능성이 적겠지요.”
“게다가……………, 그가 클래스 10의 마법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르치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세레니얼 양이 말씀하시길, 창조는 불가능해도 배워 익히는 것은 가능하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따라서 그보다 능력이 좀 떨어지는 다른 누군가에게라도 가르치려고 들었다면 얼마든지 가르칠 수는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만일 그가 누군가에게 그 마법을 가르쳤다면 그 마법은 지금 남아 있을 텐데요.”
“물론 그럴 겁니다. 하지만 클래스 10의 마법은 남아 있지 않지요.”
“예. 따라서 그는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설령 그 마법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결국 실전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 셈이죠.”
“그렇다면 그가 클래스 10의 마법을 창조했는지 확인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그가 창조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그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가 창조했다 하더라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전되었으니 역시 그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레니얼 양께서는 클래스 10의 마법의 존재 유무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법 자체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배우실 생각이십니까?”
아, 그게 그렇게 되나? 이루릴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신 지적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지금껏 어떤 마법사도 핸드레이크의 클래스 10 마법에 대해 주의하지 않았던 것이겠죠. 그가 만들었든 만들지 않았든, 배 울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그가 달린 황야와 오늘의 우리가 달리는 황야 사이엔 300년의 강이 흐르고 있으니까요.”
“예. 그렇다면 그가 클래스 10의 마법, 그 신비의 마법을 창조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의미는 있겠지만 실제적인 의미는…………….”
“하지만 그 마법이 실제로 창조되었다면, 그가 아무에게도 가르치지 않았다 해도 배울 수는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가르치지 않았다 해도? 그 마법의 룬어가 남아 있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이루릴이 대답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말했다.
“그건 아니시겠지요.”
내가 갑자기 끼어들자 칼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이루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루릴은 언젠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룬어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마법이 운용되는, 거, 뭐냐, 복잡 무쌍한 뭐, 어쨌든 더 가르칠 것이 많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계속 말했다.
“그렇다면 룬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겠지요. 만일 아무에게도 가르치지 않았다면, 뭔가 꼼꼼하게 적어둔 사용 방법 같은 것이 있어야 이루릴이 배울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기록물이 남아 있다면 벌써 누군가가 그 마법을 배웠겠지요. 하지만 그 마법은 없다고 했으니까 그런 기록물도 없을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배우시겠다는 거죠?”
“그 마법을 만든 본인에게서요.”
칼은 부릅뜬 눈으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잠깐, 뭐라고? 그 마법을 만든 본인에게서 배운다고? 핸드레이크에게 배운다는 말인가? 난 어이가 없어서 웃으며 말했다. “저, 저, 이루릴. 하, 하하하. 엘프의 관점으로 말고 인간의 관점으로 생각해야죠. 인간은 그렇게 오래 살지 않아요.”
이루릴은 빙긋이 웃었지만 칼은 여전히 경악한 얼굴이었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리치………, 핸드레이크가 리치라는 말씀입니까?”
“히에엑?”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리치라고? 이루릴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조용히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칼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말했다.
“물론 그는 클래스 9의 마법을 마스터한 자, 원한다면 리치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살아간 방식, 그가 한 말들을 통해 볼 때…………… 아, 물론 인간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면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핸드레이크가 리치가 되었을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소. 그가 자신의 인간성을 버려버릴 사람이었다고 말씀하시 는 겁니까?”
이루릴은 그 말에는 대답했다.
“그가 자신의 인간성을 간직했기를 바랍니다.”
“예?”
“그래야만…….”
이루릴은 말끝을 흐리며 잠시 자신이 타고 있는 래셔널 셀렉션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나와 칼은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나 이루릴은 한참 동안 말하지 않았다. 말할 생각이 없는 것인가? 그러다가 이루릴은 빠르게 말했다.
“그가 끝까지 인간이었기를,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지켜지지 못한 약속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푸른 산 속에 검은 호수가 생긴 이유를 기억하고, 무 너진 탑에 이끼가 덮이는 이유를 기억하고, 드래곤 라자의 맹약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삽시간에 너무 많은 말을 해버렸지만 이루릴은 숨찬 기색도 없이 말을 마무리지었다.
“그가 핸드레이크이기를 바랍니다.”
칼은 깊은 의문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난 마음속에 묻고 싶은 것들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것을 느끼며 목구멍이 간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도대체 무슨 말이지? 그 러나 이루릴의 말에는 더 이상의 질문을 거절하는 분위기가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결국, 목이 가려워 기침을 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