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4권 – 제8부 : 인간의 무기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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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4권 – 제8부 : 인간의 무기 4화

4

나는 칼이 이왕이면 정면을 보고 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 역시도 정면을 보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칼은 우리들을 환영하기 위해 일스 공국의 수도 바란 탄에서 나우르첸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던 환영단에게 자신이 예의 바른 사람이라는 인식을 주지 못했다.

칼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렇게 와주셔서…………. 미거한 소생은………… 에………… 반갑고도 고마운 감정을……… 이루 다… 표현 못함과 동시에………… 보다 성실함과 선의에 입각한… 양국의 내일을…..”

그러나 나우르첸까지 와서 우리들을 기다리던 환영단의 단장은 칼의 무례함을 꾸짖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외면한 채 말하고 있는 칼에게 미소를 지었다. “아름답죠?”

칼은 화들짝 놀라며 다시 정면을 보며 말했다.

“예? 아, 이런, 죄송합니다. 정말 실례했습니다.”

환영단의 단장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일몰을 마저 보고 말씀 나누시죠. 이곳에 사는 우리들도 이렇게 좋은 날씨에 저런 일몰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랍니다.”

그렇게 말하며 단장은 먼저 절벽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칼도 멋쩍게 웃으며 절벽 끝으로 다가갔다. 우리 일행도 칼의 옆쪽으로 주욱 늘어섰고 환영 단원들도 웃으 며 단장의 옆으로 죽 늘어섰다.

지독하게 붉었다.

하늘은 불타오르는 것 같았고 물결은 완전히 황금 실로 짠 융단 같았다. 사람들의 얼굴은 모조리 검붉게 바뀌어 있었고 그들 면면의 음영은 더욱 깊어졌다. 우리는 나우르첸의 하얀 절벽(지금은 불의 절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꼭대기에 일렬로 서서 가라앉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쪽의 나라 일스 공국에서 수평선으로 가라앉 는 일몰을 본다는 것은 희한한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나우르첸의 거대 호수 실키안 레이크의 동쪽 기슭에 서 있는 것이다.

환영단의 단장은 은은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바다에서 떠올라 호수로 가라앉는 해를 본답니다. 물에서 떠올라 물로 떨어지는 해를 보는 것이지요. 다른 지방을 험담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우리는 대륙 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출과 일몰을 가졌다는 데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자부심을 가지셔도 될 만큼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황금의 바다에서 떠올라 황금의 호수로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은 멋진 일이겠지요.”

정말 기막힌걸? 난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뒤쪽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앞쪽으로는 실키안 레이크가 거대한 수평선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서 있는 하 얀 절벽은 바다와 호수 사이의 담장처럼 서 있는 장소였고 호수 쪽 절벽 사면에는 하얀 측백나무들이 밀생하여 있었다. 그리고 바다 쪽 사면에는 백송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정말 멋있어. 왜 하얀 절벽이라 불리는지 알겠는걸.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정말 끔찍해……. 여행을 나오지 않았다면…….”

샌슨 역시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서녘 수평선으로 가라앉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이 온통 붉은색뿐인 세상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네리아의 머릿결은 불길 같 았다. 네리아의 눈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자연스럽게 벌어져 있었고 두 손은 꼭 모아쥐어 있었다.

“후치야? 너무너무 이쁘지?”

“그러네요. 예. 정말 그래요.”

환영단의 단장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서쪽에서 오신 손님들에게 우리 고장의 장관을 보여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자, 이제 들어가도록 하시죠. 해가 완전히 지고나면 몹시 추워진답니다.”

서쪽에서 오신 손님?

갑자기 가슴이 덜컥하는걸. 왜 이러지? 서쪽, 불길 같은 석양. 물까지 지글지글 태워버릴 듯 붉은.

……제기랄.

우리는 안타까운 얼굴로 이제 막 수평선에 절반쯤 내려간 태양을 한 번씩 더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하긴 그렇지 않아도 절벽 위라 그런지 바닷바람과 호수 바람이 한꺼번에 불어닥치고 있었다. 꽤 춥군. 아냐. 엄청나게 추워.

일스 공국에 들러 두 번째로 보는 도시 나우르첸은 여전히 굉장한 바람이 부는 도시였다. 도시의 이마를 삐죽하게 찌른 몇 개의 첨탑들에는 예외 없이 풍향계가 달려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혹은 기다란 장대에 풍향계를 세워둔 가옥도 몇 개 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장대에 세워둔 풍향계가 내 눈엔 아주 이상하게 보였다.

“칼. 저게 뭐죠? 왜 장대 위에 자루를 달아두는 거죠?”

샌슨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야. 저거 혹시 새 잡으려고 매달아 둔 것 아닐까?”

“여기 새들은 대부분 살아가는 재미가 없나 보지? 저런 자루에 몸을 들이박는다고?”

칼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아. 저건 풍향계라네. 바람이 저기로 들어가면 자루가 똑바로 서게 되지. 풍속계도 겸하고 있군. 바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루가 똑바로 설 테니까.”

“그리고 간혹 눈먼 새도 들어가고?”

“하하하.”

하긴 이 사람들은 바람에 신경을 많이 써야겠지. 저녁 무렵이라 이번엔 도시의 사람들이 모조리 몰려나와 있는 일은 없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해질 무렵 저녁 준비를 하는 아낙네들이나 그런 아낙네들에게 귀를 붙잡혀 끌려 들어가는 사내애들 등은 놀란 눈으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은 삽시간에 보랏빛이 되었다가 곧 어두운 남색으로 바뀌어갔다.

우리는 환영단을 따라서 나우르첸의 영주님의 성으로 가게 되었다. 샌슨과 나는 약간 물러나서 성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흠. 이봐. 헬턴트 경비 대장. 나우르첸 성을 어떻게 평가해?”

“너도 뭔가를 느낀 모양이군. 육로로는 약한 성이야. 하지만 해군 전술에 대해선 잘 모르겠으니 그쪽은 제외하지.”

“하지만 3면이 바다니까 육로도 하나뿐이잖아? 그러니 육로로도 약하다고 볼 수는 없을 텐데?”

나우르첸 성은 해안 절벽에 달아둔 것처럼 성의 세 부분 성벽은 바닷속까지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한 면이 육지와 맞닿고 있었다. 성문까지 좌악 늘어선 길 양편으 로는 해송들이 정연하게 늘어서 있어 운치가 있었다. 정면 길이 그렇게 좁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육로로 공격한다면 정면뿐이다. 나머지 3면은 바다에서부터 들어 와야 되니까. 하지만 샌슨은 피식거릴 뿐이다.

“정면 하나뿐인데 그 정면이 약해. 왼쪽의 언덕도 문제고…………. 언덕 위에서 화살을 쏴넣으면 정말 골치 아프겠군. 수비측 입장에선 고지대의 이점이라는 것이 없어. 허즐릿은 이상적인 성의 요건을 세 가지로 요약했지. 수직적으로 높을 것, 수평적으로 좁을 것, 그리고 자급 자족이야. 그런데 일단 수직적으로 높다는 것은 빠지지.” “수평적으로 좁다는 말은 뭐야. 성이 좁아야 한다고?”

“아니. 성까지 접근하는 길이 좁아야 한다는 거야. 이건 거의 대로야. 화살거리 밖에서 성 정면까지 달려가는 데 1분도 안 걸리겠는데. 나라면 군사………….”

샌슨의 말이 사그라들었다. 샌슨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나도 놀랐다. 어느새 환영단의 그 단장이 우리 곁으로 다가와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우리들의 수다를 경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군사 얼마만 있으면 정복하실 수 있겠소?”

샌슨은 허둥거리며 대답했다.

“아, 아니, 실례했습니다. 농담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 괜찮소. 대륙 전사의 자존심을 버리시지는 않으시겠지? 전사로서 말씀해 보시오.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않겠소.”

샌슨은 거의 말할 뻔했다. 내가 조금만 느렸다면 어쩔 뻔했을까. 휴우. 나는 정신없이 말했다.

“저희는 세작이나 염탐꾼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평화로운 사절의 임무를 위해 이 영광스러운 나라를 찾은 자들이옵니다. 자칫 선의로 충만한 양국의 관계가 저희 무지한 자들의 허언에 의해 금이 가게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과드립니다. 귀하신 어르신께서는 저희들의 실언을 용서해 주시고 더 이상 죄를 추궁 하여 어리석은 입이 더 큰 죄를 짓게 만들지는 말아주십시오.”

이마에 땀이 날 정도다. 샌슨이 말하기 직전이라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긴 말을 후다닥 해야 되다니. 에휴, 휴. 환영단의 단장은 이채로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 다가 정중히 사과를 받아들이고는 다시 물러났다. 칼은 어디선가 굉장한 속도의 말이 들려오자 고개를 돌리더니 곧 피식 웃으셨다.

“자! 샌슨, 나에게 빚졌으니 호되게 갚을 준비 하라고.”

샌슨은 조금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휴으윽. 정말 뭐든지 요, 요구해도 할말이 없겠군. 허 참. 여긴 다른 나라였지. 야, 임마! 왜성 이야기는 꺼내가지고!”

“꺼낸다고 좋아라 줄줄 읊어댄 사람이 누군데?”

“에잇! 젠장.”

샌슨은 투덜거리며 나우르첸 성으로 들어섰다.

먼저 무구와 말들을 하인들에게 건네준 다음, 옷의 먼지를 털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후 홀로 안내되었다. 홀에는 정장한 기사들과 가신들이 도열해 있었고 성주로 짐 작되는 인물이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뭐, 장엄의 홀을 보고 났더니 이 홀에서 커다란 감명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그런 대로 괜찮은 건물이었다.

난 주로 벽에 걸린 초를 관찰했다. 여기는 바다가 가까우니까 생선 기름을 사용하겠지? 생선 기름은 양초용으로는 저급에 속한다. 물론 최고의 기름은 그 뭐냐, 고래 기름으로 만들어지긴 하지만 그 외에 다른 생선들의 기름은 별볼일 없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벽에 걸린 양초들의 불빛이 상당히 고왔다. 흠. 수입품일 거야, 아마.

우리 일행, 그러니까 칼과 나, 샌슨, 네리아, 이루릴, 스카일램이 들어서자 성주님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무릎을 꿇어야 되나? 아냐, 잠깐. 아무래도 여긴 다른 나라 고 따라서 우리에겐 충성의 의무를 표시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걸. 예상대로 아무도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선 성주는 목례하고는 말했다.

“바이서스의 사절단 여러분을 환영하오. 나 카미엔 나우르첸은 우정과 신뢰로서 여러분들을 맞이하오. 정의가 닿는 그 어느 곳에서라도 피어오르는 장미를.” 칼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곧 우아하게 대답했다.

“성주님의 따스한 환영으로 저 칼 헬턴트는 이미 노정의 여독을 잊었을 뿐만 아니라 귀국과 바이서스의 빛나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느낍니다. 열정의 꽃잎처럼 불타 는 마음을.”

그러자 이번에는 카미엔 영주의 얼굴에 밝은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예상치 않은 타인에게서 우정을 발견한 사람과도 같은 얼굴이었다. 그는 다가와 칼과 악수하며 말했다.

“장미는 붉고, 정의는 만인에 대한 사랑이오. 바이서스의 산천은 지혜의 보고로군요.”

“일스의 바다야말로 심원한 지혜가 나날이 파도치는 곳. 성주님의 무한한 복덕이십니다.”

카미엔 성주는 밝은 얼굴로 칼을 바라보다가 활기차게 말했다.

“자, 바이서스의 여러분들을 만나뵈어 너무나도 즐겁소. 여러분들의 광영된 이름을 듣고 싶구려.”

그래서 우리는 차례대로 자신을 소개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인사할 때마다 카미엔 성주는 적당한 답례를 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소년과 엘프, 그리고 활동적으로 차 려입은 단발머리 아가씨가 사절단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 것인지는 짐작되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별말 하지 않고 친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머나먼 여정을 걸어오시며 쌓인 노독을 치료하십시다. 바이서스에서는 일스의 기괴한 음식물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겠지요? 내가 오늘 소문의 헛됨을 일러드리겠 소. 따라오시오.”

연회장은 다행스럽게도 바이서스식 음식들도 제법 많았다. 세들레스에서 먹었던 완전 일스식 음식을 각오하고 있던 난 즐거운 마음으로 식탁에 다가설 수 있었다. 식사를 하는 틈틈이 카미엔 성주는 칼에게 말했다.

“내일 수도 바란 탄으로 모실까 합니다. 혹 노독이 심하다시다면………….”

“아니오. 아름다운 해변을 따라 걸었던 것이었으니 노독은 없습니다. 내일 출발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십니까.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대공 전하께서는 한시바삐 여러분들을 뵙고저 하십니다.”

“대공 전하께서요?”

“그렇습니다. 귀국과 자이펀국의 전쟁은 너무 길었고, 저희들은 성실한 이웃으로서 양국 모두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군요. 이러한 시기에 바이서스에서 사 절단이 도착하셨으니, 대공께서는 대륙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바람직한 회견이 되실 것으로 기대하고 계십니다.”

칼의 눈빛이 조금 조심스러워졌고 동시에 스카일램의 눈이 조금 번뜩였다. 자, 이게 외교인가? 나로선 도대체 뭐가 중요한 말이고 어떤 속뜻이 있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두 사람의 태도에서 지금 카미엔 성주가 한 말이 뭔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칼은 부드럽게 말했다.

“평화는 값진 것이고 소중한 것입니다. 저 자이펀이 그것을 모르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번엔 카미엔 성주의 눈꼬리가 조금 오르락내리락 했다. 이거야 원. 이 나라에 들어오면서부터 정말 음식 맛 즐기며 식사하기 힘들어졌는걸? 나와 네리아는 불편 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이루릴은 무표정했고 샌슨이야 먹기 바빴다. 카미엔 성주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성실한 조정자가 나타나서 양국의 의견을 조절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예. 평화를 위해서 정의가 희생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조정자는 양자 모두에게 환영받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평화가 희생될 수는 있습니다만, 평화를 위해 정의를 희생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한 평화는 가식과 거짓 위에 실현되는 것으로 사상 누각이나 진배없겠지요.”

“정의라…………. 옳으신 말입니다. 하지만 정의라는 것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 악용되는 도구일 수는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전사자의 어머니의 눈물과 연인의 슬픔과 그 지기의 비탄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내버리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카미엔 성주는 조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은 그 후로 한참 동안 겉으로 보기엔 확실히 온화한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따스한 저녁 시간은 아니었다. 원 참. 소화 안 되네.

스카일램 트리키는 싱긋 웃었다.

“왜 전하께서 야인이나 다름없는 헬턴트 님을 사절로 추천했는지 이제야 알겠군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 동안 제가 모시고 있는 사절은 온화한 사절이긴 하지만 유능한 사절이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긴 그래. 그렇게 봐도 할말 없겠어. 항상 허허거리기만 하고 시간 나면 지금처럼 저렇게 책만 붙들고 사는 중늙은이가 무슨 유능한 외교관일 거라고 생각했겠어? 칼은 여전히 허허거리며 책을 덮고는 대답했다.

“다행이군요. 하지만 유능함이란 당대에 평가하기는 힘든 덕목이겠지요.”

“아닙니다. 오늘 저녁, 카미엔 성주가 은근히 조정 문제를 내비쳤을 때의 대답은 썩 훌륭했습니다. 더군다나 장미와 정의의 오렘의 추종자에게 한 대답으로서는 걸 작이라 하겠습니다.”

나우르첸 성의 한 거실에 모여앉은 채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닥의 양탄자에 다리를 곧게 편 채로 앉아 있던 이루릴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도 나처럼 스카일램과 칼이 무슨 말을 나누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벽난로 바로 앞에 엎드려 누운 채로 다리를 까딱거리던 네리아도 어리둥 절한 표정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난 네리아에게 다리를 더 흔들다간 벽난로에 다리를 집어넣게 될 거라고 주의를 준 다음 말했다.

“칼.”

“응? 왜 그러나, 네드발 군?”

“도대체 아까 저녁 시간의 그 구름잡는 이야기는 다 뭐였어요?”

칼은 웃으며 테이블 위에 있던 찻잔을 들었다.

“차향이 썩 괜찮군. 일스산일까?”

“카아아알.”

“알았네, 알았어. 흠. 그건 별로 대단할 것은 없는 것이었네. 하지만 외교계에서는 그런 대단할 것이 없는 문제가 때론 중대한 문제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 웃기지.” “야! 웃기는 이야기 좋아요. 해보세요.”

“껄껄. 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칼은 테이블 위에 놓아둔 책을 손가락으로 똑똑 두드리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런 걸세. 마을에서 혈기 방장한 두 청년이 싸움을 벌였다네. 청년들은 둘 다 비슷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어서 싸움은 결판이 나질 않아. 처음에 무엇 때문에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오랫동안 싸웠지만, 자존심 때문에라도 먼저 항복할 수는 없게 되었지.”

네리아는 귀를 쫑긋거리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누운 채로 무릎과 팔꿈치만 이용해서 엉금엉금 기어서 칼과 나, 스카일램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다가왔고, 그래서 중간에 있던 이루릴은 웃으며 다리를 움츠렸고 저 근엄한 스카일램 호위 대장께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칼은 계속해서 설명했

다.

“자. 이제 어쩌면 좋지? 더 이상 싸우다간 서로 몇 달은 고생해야 될 정도로, 어쩌면 목숨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상태야. 하지만 서로의 자존심이 있는지라 먼저 항 복할 수는 없어. 어쩌면 좋을까?”

“인덕 있는 누군가가 나서서 두 청년을 말려야죠.”

“그렇지. 그렇게 누군가가 나서서 말려주면 두 청년은 모두 못 이기는 척하며 화해를 받아들일 수 있겠지.”

“좋아요. 알아들었어요. 그렇다면 일스 공국에서는 바이서스와 자이펀의 중간에 서서 인덕 있는 그 누군가가 되겠다는 말이군요?”

“그런 의미였던 것 같네.”

“그럼 왜 그런 화해 조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거죠?”

스카일램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난 그를 무시했다. 그는 낮고 세차게 말했다.

“이런 발칙한…………. 저 간악한 자이펀과 무슨 화해가 있겠는가! 나가서 싸워 이길 따름이다.”

“둘 다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다치더라도 말이죠?”

스카일램은 본격적으로 화를 내었다. 하지만 역시 내게 하는 말이라 타이르는 듯한 어조가 강했다.

“우리는 이길 것이다. 아무리 나이 어리다지만 어떻게 바이서스의 국민으로서 그런 말을 하는 게냐.”

내가 다시 말하려 할 때 칼이 재빨리 말했다.

“네드발 군. 내 설명하지. 잘 듣게나. 몇 가지 이유가 있다네. 그리고 트리키 공도 어린아이의 허물을 나무라시지는 마십시오.”

난 실제로 볼이 부었고 스카일램은 정신적으로 볼이 부은 표정이었다. 칼은 내게 말했다.

“화해를 하게 되면 일단 발등의 불은 끌 수 있겠지. 그리고 전선에 나간 병사들이 그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가족들에게로 돌아올 수도 있고.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나 라는 일스 공국에 대해 일종의 부채를 형성하는 것이 된다네. 일스 공국에서도 그것을 노리고 화해 조정자의 역할을 맡으려 하는 것이고. 일스 공국에서 워낙 사랑과 자비심이 넘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네.”

“글쎄요. 그건 그저 심리적인 부채일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맞는 말일세. 그런데 외교라는 거대한 소꿉놀이에서는 그 심리적인 부채도 참으로 무거운 것이지. 간단히 현실적인 예를 들자면, 아마 전후 혼란스러운 바이서스와 자이펀의 상권 잠식이 그들의 목적이겠지.”

“상권 잠식?”

“그렇지. 전후에는 많은 물자들이 필요하고, 아예 경제권 전체가 새로 성립될지도 몰라. 그런 혼란스러운 와중을 통해 일스 공국에서 양국의 경제권을 잠식하는 거 지. 전쟁을 말려준 나라의 상인을 박대할 수는 없으니까 양국에서도 일스의 상인들에 호의를 베풀 수밖에 없고, 그러한 호의를 업은 일스의 상인들은 대단히 큰 이권 을 챙길 수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과적으로 목이 좀 아팠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요. 그건 그렇게 대단한 이유로 들리지는 않는데요. 상권이야 잠식당하지 않으려고 애쓰면 그만이고, 전선에 나갔던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 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는 일인 것 같은데요.”

스카일램은 다시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칼이 먼저 말했다.

“그렇긴 하네. 하지만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전쟁을 포기한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저 펠레일의 조언을 생각해 보게.”

“음. 하긴 그렇군요.”

스카일램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화, 확실히 이긴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아. 그는 그 이야기를 모를 테지. 그야 우리들의 호위 대장일 뿐이고, 그 펠레일의 항로 봉쇄 작전은 아마 최고 기밀일 테니까. 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이 전쟁에서의 확실한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작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 그 작전 때문에 일스 공국에 사절로 온 것이오. 이 작전에서는 일스 공국의 조력 이 필요하거든. 물론 기밀 사항이니 말씀드릴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하시겠지요?”

스카일램은 환희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제가 어떤 사절단을 모시고 있는 것인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목숨을 바쳐 헬턴트 님을 호위하겠습니다.”

“아 됐소. 괜찮아요. 이제 내일이면 바란 탄에 들어갈 테니 안심하셔도 될 거요.”

“예. 그러나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겠습니다.”

“지나치게 그러실 것은 없어요. 지금까지처럼 평범하게 하셔도 되오. 그런데, 그렇다면 트리키 공은 지금껏 제가 무슨 임무를 가지고 있는지 대충이라도 듣지 않았 단 말이오?”

“예.”

그렇게 짧게 대답하고는, 스카일램은 좀더 덧붙여야 되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군에서는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임무를 받으면 수행할 뿐입니다.”

“예. 그래야 될 테지요. 그러니 지금까지처럼 임무만 수행하시면 됩니다.”

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스카일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난 다리에 뭔가가 닿는 느낌을 받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느새 슬금슬금 기어온 네리아가 내 다리 를 툭툭 찌르고 있었다.

“후우웃치야아아아?”

“그만해요! 뭐 들었어요? 기밀, 기밀이라고요!”

“흐음. 그게 전에 그랜드스톰 앞에서 말한 그거구나. 이잉. 궁금한데.”

“당신 궁금한 것은 이해해요. 그러니 당신은 말 못해 주는 날 이해해 줘야 돼요.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네리아는 누운 채로 옆으로 빙글 돌아 똑바로 눕더니 날 올려다보았다.

“이해할게.”

“좋네요. 그리고 애들도 아니고 왜 그렇게 굴러다녀요?”

“무슨 소리. 애들은 굴러다니면 어른한테 야단 맞아. 난 애가 아니니까 마음대로 굴러다니는 거야.”

난 네리아에게 혀를 날름거려 주고는 재빨리 훌쩍 뛰었다. 네리아가 내 발목을 잡아채려 했으니까. 네리아와 나의 좀 과격하다면 과격하달 수 있는 장난을 보며 스카 일램 대장은 헛기침을 하고 나갔다.

“야심한 시각이군요. 퍼시발 씨를 찾아보겠습니다.”

“아, 저 찾아볼 필요가 없는데………….”

내가 말하는 것을 듣지도 않고 스카일램은 나갔다. 찾긴 뭘 찾아. 샌슨은 아마 지금 이 시간까지 나우르첸 성의 주방장을 즐겁게 하고 있거나 술 저장고의 책임자를 협박하거나, 뭐 그런 짓을 하고 있을 텐데. 그때 네리아가 누운 채로 다리를 당겨 핸드스프링으로 일어났다. 테이블을 걷어찰 뻔했고 칼을 질겁하게 만들었다.

“후치야, 후치야. 우리도 샌슨이나 찾아볼까?”

“찾기는 뭘 찾아요. 어디 위험한 데라도 갔을까 봐? 샌슨이?”

네리아는 고개를 양쪽으로 까딱거리며 말했다.

“아니아니, 샌슨이 다른 누구에게 위험해질까 봐.”

“빨리 가죠!”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우리는 사절단인데 외국의 성에서 소란을 부릴 수는 없다. 허억. 그러고 보니 오늘 낮의 환영단 단장과의 그 살벌했던 대화도 기억난다. 이런, 빨리 그 작자를 찾아야겠군. 칼은 다시 독서 삼매에 들어가 있었고, 이루릴에게 함께 갈 것인지 물어보려다가 난 그만두어 버렸다. 이루릴은 대단히 깊은 생각에 빠져버린………… 완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아마 조금 전 우리들의 대화를 골똘히 생각해 보는 모양이다. 엘프는 외교라는 거대한 소꿉놀이 를 이해할까?

네리아와 난 각자 가죽 갑옷 위에 망토를 두르고 나섰다. 벌써 계절이 계절인지라 날씨가 꽤 험하게 추웠다. 벽난로가 있던 방에서 나오자마자 목 뒤가 뻣뻣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네리아는 입김을 호호 불더니 망토를 턱까지 끌어올렸다.

“어디 있을까?”

“첫째, 주방의 점거 및 농성. 둘째, 술저장고로의 기습 감행.”

“좀 폼나게 나우르첸 성주의 무남독녀 방 창문 아래에서의 세레나데, 그런 건 안 돼?”

“누구에게 뭘 바라죠?”

11월의 이 날씨에 세레나데라. 음. 샌슨은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은 다 한다고 해도, 샌슨은 그런 짓은 안 하겠지. 샌슨이 목에 걸어둔 반지는 아마 지금쯤 손때가 시커멓게 묻었을지도 모른다. 난 킬킬거리며 주방 쪽으로 향했다.

역시 나의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는군. 그런데 조금 기이한 방식으로 벗어나는데?

“죄, 죄수를 본관의 허락 없이 호송 마차에서 풀어주, 줄 수는 없소!”

“글쎄요. 야, 운차이. 너 달아날 거야?”

운차이는 묵묵히 자신의 발목을 가리키며 뭐 씹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스카일램은 칭칭 동여맨 그 밧줄을 보고서는 조금 안심하는 얼굴이 되었고 샌슨은 헤벌레 웃 었다.

나우르첸 성의 식당엔 성의 하인들과 하녀들, 그리고 견습 기사로 보이는 사람들 몇 명이 모여 샌슨과 운차이와 함께 술판을 벌이고 있었고 그 한 옆에서 스카일램이 대로한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스카일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보시오, 샌슨 퍼시발! 아무리 밧줄을 묶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권한에의 침범이오.”

입에 대고 있던 술병을 내려놓은 샌슨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다가 말했다.

“에, 어디 보자. 트리키 공은 호위 대장이죠?”

“무슨 말이오?”

“호위 대장이라는 것은 결국 사절인 우리들을 호위한다는 말이잖아요. 그리고 운차이도 일종의 사절 아닐까요? 운차이는 우리 바이서스의 전쟁 포로니까, 결국 지금 그의 신병은 바이서스에 속하지요. 일스 공국에 넘겨주려고 데리고 가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은 일스 공국 내에서는 운차이에 대해서도 호위 책임을 가진 다고 말할 수도 있지요?”

스카일램은 잠시 눈을 커다랗게 뜨며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스스로가 기특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씩 웃으며 말했다.

“뭐 간단하게 말해서, 사나이들끼리 술 한잔 할 때는 왕도 간섭 못한다고 했잖아요. 루트에리노 대왕도 우타크와 차넬을 만나러 갔다가 둘이 술 마시고 있는 것을 보 고 하루 종일 기다렸다고 했잖아요. 내가 사과할 테니, 거기서 그렇게 서 있지 말고 함께 술이나 마십시다. 당신이 여기 있다면 운차이가 어떻게 달아나겠소?”

스카일램은 조금 고집스런 표정으로 샌슨을 노려보았지만 바로 그때 네리아가 그에게 살짝 다가서서 팔짱을 끼며 끌어당겼다.

“그렇게 하세요, 대장님.”

스카일램은 놀라 팔을 뺐다가 겸연쩍게 웃고는 결국 테이블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나우르첸 성의 하인, 하녀, 견습 기사들은 환호로써 스카일램을 맞이해 주었 다. 샌슨은 기분 좋게 웃다가 말했다.

“여, 너희들도 왔구나? 이리 와서 앉아.”

난 머리를 가로저으며 테이블로 다가갔다.

이게 한결 낫군. 그 으리으리하면서도 숨이 턱턱 막히는 카미엔 성주의 연회보다는 이렇게 아랫사람들이 밤에 펼치는 연회가 훨씬 마음에 드는데. 거대한 테이블 주 위에는 테이블에 발을 올리고 술잔을 들이키는 샌슨, 샌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께 다리를 올린 운차이, 아예 의자를 걷어차고 테이블에 올라앉아 볼이 발갛게 된 채 두 손으로 술잔을 꼭 쥐고 마시는 하녀. 그 하녀에게 박수를 보내는 하인들과 견습 기사들로 가득했다. 네리아는 까르륵거리며 웃었고 스카일램 자작은 근엄한 표 정으로 그 하녀에게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자리에서 예의가 어쩌니, 예법이 어쩌니 하는 말을 꺼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나는 운차이의 옆으로 다가가 술잔 하나를 건네받았다.

“운차이. 샌슨에게 끌려나온 겁니까?”

“그런 셈이다. 망할 놈. 마시고 싶다면 혼자 마실 것이지.”

당장 샌슨은 팔꿈치로 운차이의 허리를 찔렀고 운차이는 신음소리를 내었다.

“자식아, 잘도 마시면서 헛소리하지 마라. 여기까지 끌고 와줬으면………….”

“알았다, 알았어! 젠장. 고맙다. 됐냐?”

“좋군.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지.”

샌슨은 희희낙락했고 운차이는 얼굴 근육 전체를 사용해서 찌푸린 얼굴을 만들며 술을 마셨다. 네리아는 스카일램에게 건배를 요청했다. 난 아마도 아까 연회에서 사용되었다가 다시 담겨져 나온 듯한 음식 부스러기들(그래도 몹시 푸짐하게 담겨 있었다)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런데 마차 감시병들이 문 열어줘?”

스카일램 대장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그렇군. 그놈들이 마차 문을 열어주었습니까?”

샌슨은 능글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예. 술 한 병씩 안겨주고 밧줄로 묶는 것까지 확인시켜 주니까 별말은 안하더군요.”

“내 이놈들을!”

스카일램 대장은 곧장 밖으로 달려나가 버렸고 우리는 그 뒷모습을 좀 감상하다가 치도곤을 당할 호위병들에 대해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정말이야?”

“거짓말이야. 감시병들이 잠깐 자리를 비운 새에 빼내왔지.”

“사악하군……….. 불쌍한 감시병들.”

샌슨은 그야말로 오거처럼 사악하게 웃었고 네리아는 배를 잡고 웃었다. 운차이는 피식거리며 술병을 기울여 잔에 따르면서 말했다.

“나 스스로가 나의 감시병이다. 내가 달아날 마음이 없으니 절대로 달아날 리가 없지.”

“다른 사람들이 그걸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렵겠지요.”

“그렇겠지.”

운차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리아는 쿠키를 집어 윗입술과 코 사이에 끼웠다가 입 속으로 쏙 집어넣는다든지, 비스킷을 던져서 받아먹는다든지 하면서 음식 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운차이의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 달아날 마음이 없어?”

운차이는 고개를 기울여 네리아를 흘깃 바라보다가 나에게 말했다.

“후치. 달아나봐야 얻을 것이 없다고 전해 줘.”

내가 말하기도 전에 네리아가 먼저 말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친지들도 만날 테고, 혹시 애인이나 부인은 어때?”

운차이의 마음속에 있는 깊은 괴로움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하지만 운차이는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돌아간다면 그들에게 더 폐가 될 것이라고 전해 줘, 후치.”

이번에도 내가 말하기 전에 네리아가 먼저 말했다.

“이봐! 그만 둬. 어차피 고국을 버렸다면 고국의 관습도 버려야지? 나에게 직접 말하라고.”

운차이는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숨을 쉬고는, 헛기침을 하고, 손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얼굴이 확 붉어진 다음, 다시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관습은 좀 천천히 고쳐야 되겠다고 전해 줘.”

샌슨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난 전해 줄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네리아는 깡총깡총 뛰어오더니 곧 운차이의 바로 앞쪽에 허리를 굽히고 섰다. 운차이는 황급히 고개 를 돌렸지만 네리아는 운차이의 얼굴 가는 방향으로 계속 몸을 돌려 그의 정면을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몇 번 고개를 돌려 네리아의 시선을 피하다가 결국 고개를 아 래로 숙이고는 말했다.

“후치! 이 여자에게 왜 이러냐고 좀 전해 줘!”

“날 보며 말해라, 날 보며 말해라, 날 보며 말해라.”

네리아는 무슨 캐스팅을 하듯이 그렇게 중얼거렸고 운차이는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그는 화난 얼굴로 일어나려고 했지만 샌슨은 테이블에서 다리를 내려주지 않았다. 어느새 주위가 고요해져서 둘러보니 주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네리아와 운차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운차이는 그야말로 귓불까지 빨개졌다. 그는 다급하게 말했다.

“후치. 이 여자를 치워주면 너에게 뭐든 하겠다.”

“나에게 말해라. 나에게 말해라. 나에게 말해라.”

“난 별로 가지고 싶은 게 없는데………….”

나도 그러고 보면 꽤 사악해. 그러자 운차이는 샌슨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 살기를 다루고 싶다고 그랬지? 가르쳐주마. 이 여자 좀 치워줘.”

순간 샌슨의 눈이 반짝거렸다. 네리아는 화들짝 놀라더니 곧 샌슨을 야멸치게 쏘아보았다. 샌슨의 입가가 스르르 올라갔다.

“그거 이상한데.”

“뭐가 말이냐?”

“그 살기로 네리아를 쫓아버리지는 못하는 거야?”

운차이는 손가락을 따악 튕겼다. 그리고 그는 곧 네리아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해죽 웃으며 운차이를 마주보았다.

흠. 괴상한 장면이다. 운차이는 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 무시무시한 눈으로 네리아를 노려보고 있었고 네리아는 무릎을 짚은 채 방긋거리며 운차이를 마주보는 것이 다. 두 사람의 표정은 전혀 달랐지만 그들의 코는 서로 1큐빗도 떨어지지 않았고 아무런 말 없이 서로를 숨막히도록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콰당.

결국 네리아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면서 황급히 내 등 뒤로 숨어버렸다. 운차이는 의기양양하게 웃었고 주방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놀란 얼 굴이 되었다. 등 뒤에서 네리아의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 무서워 죽을 뻔했어………….., 잉.”

“운차이도 수십 년 동안 지켜온 관습을 깨긴 어려울 거예요. 너무 괴롭히진 말아요.”

“그, 그래도. 너무, 너무 무서웠어. 허헉.”

네리아는 의자에 앉아서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손이 계속 떨려서 술잔도 들어올리지 못하고 양손을 꼭 마주잡았다.

“이런…………. 너무 오래 버텼나 보군요.”

“으, 으응. 무서워도, 꾸, 꾹 참고…………”

“괜한 고집이었어요. 와이번도 졸도시키고 헬브라이드도 도망치게 만든 눈을, 그래 버틴다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자꾸 그러지 마. 그, 그렇잖아도 떨려 죽, 죽겠다고.”

나우르첸 성의 사람들은 한결 놀라는 표정이 되더니 운차이를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게 되었다. 운차이는 피식 웃고는 술잔을 들며 말했다.

“후치. 미안하다고 전해 줘. 하지만 고집 부린 것이 잘못이라고도 전해 줘.”

“들었지요?”

“이…………, 미워! 저작자.”

운차이는 한결 깊은 눈매로 미소를 지었다. 주위는 고요했고, 그래서 술맛이 별로였다.

“네리아를 위해.”

“날 위해? 뭐?”

“노래 하나 하지요. 아이야 이켈리나의 구두장이 믹 더 빅.”

“이야히호!”

잠시 후 테이블 위로 술병이 구르고 의자는 제멋대로 뒹굴었다.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목청껏 노래부르고 다른 사람 머리에 술을 부어주었다. 그중 한 견습 기사와 하녀는 테이블 위에 올라가 접시를 걷어차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광란이 끝나고 사람들의 옷들도 술에 푹 젖어버려 이제 술잔도 천천히 비우게 되었을 무렵 나우르첸 성의 견습 기사 하나가 어디서 류트를 하나 들고 왔다. 나우르첸 성의 사람들은 모두 정중한 환호를 보내주었고 우리들도 기분좋게 웃으며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 견습 기사는 미소를 지으며 점잖게 말했다.

“오늘 저 먼 서녘의 땅에서 이곳 해뜨는 나라 일스의 아름다운 성 나우르첸을 찾아주신 손님들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기쁨을……’

“우! 우!”

“하하하. 좋습니다. 시작합니다.”

견습 기사는 가볍게 류트의 현을 튕기다가 곧 노래를 시작했다.

낡은 대지 위에 새로운 바람이 분다.

바람에 날리는 풀씨 같은 인생에도

한 번은 찾아오는 신비로운 바람.

마법의 가을이여.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의 가을은 짧았고

페어리퀸 다레니안의 가을은 끝이 없었다.

나는 술잔을 꽉 붙잡았다. 급히 손을 움직이다가 술잔을 테이블 아래로 떨어뜨릴 뻔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노래지? 핸드레이크와 다레니안이라고? 난 좀더 집중 해서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바람마저 길을 잃는 세미나스 평원에

떨어지는 별 하나. 솟아오르는 별 둘.

그러나 노래하는 가인의 추억에는

희미해진 별 하나.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의 시선은 드높았고

페어리퀸 다레니안의 발걸음은 사라져갔다.

페어리의 노래, 더 이상 들리지 않고

그들의 날개에 빛나는 섬광, 잊혀졌다.

파도치는 호수, 수면 아래의 성. 추억은 아름답다.

앞으로 걸어가는 인간의 뒷그림자.

그림자에 서서 멈추어버린 페어리.

도대체 무슨 말이야. 이야기를 하라고! 난 잔뜩 긴장한 채로 기다렸지만 견습 기사는 계속 뜻모를 이야기만 할 뿐이다. 떨어지는 별 하나? 이건 아무래도 드래곤 로 드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솟아오르는 별 둘은 틀림없이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를 말하는 것이지? 그렇다면 희미해진 별이란 페어리퀸을 말하는 것인가? 그녀가 왜 희미해진 별이지?

날개 잃은 여왕은 광휘 또한 잃게 되니

광휘 잃은 여왕은 사랑의 사슬도 무겁다.

돌아보지 않는 시선은 가슴의 온기마저

잃게 한다.

세월이 나무에 나이테를 덧매기고

잊혀진 이름은 차가워만 가는데.

차가운 가을 바람 나뭇잎을 훑어내리고

대지에 떨어진 메마른 낙엽들 속에

희미하게 움트는 기운을 느낀다.

팽개쳐진 사랑을.

핸드레이크는 몸을 굽혀 대미궁을 바라보나

드래곤 로드의 칼날은 검붉기만 하다.

갑자기 주방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뭔지 모를 숙연하고도 비장한, 그러면서도 공포스러운 분위기였다. 하녀 하나는 질린 표정으로 귀를 막고 싶어하는 듯했고 다른 하인 하나는 갑자기 헛기침을 했다가 자신의 기침 소리에 자신이 놀랐다. 드래곤 로드의 칼날이 검붉기만 하다고?

그때 갑자기 류트 소리가 멎었다. 견습 기사는 씨익 웃으며 겸연쩍게 말했다.

“다음이 기억 안 나네요.”

“푸하! 이런!”

모두들 폭발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견습 기사는 멋쩍게 웃었고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그에게 조롱이나 핀잔을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래가 끝난 것을 아쉽 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다. 도대체 뭐지?

나는 그 견습 기사에게 이야기나 걸어볼까 하는 생각에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때 갑자기 주방 문으로 시커먼 것이 휘익! 뛰어들었다. 그 시커먼 것은 스카일램 대 장이었다. 스카일램은 들어서자마자 우리들을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눈이 있다면 봐라! 이 멍청이들아!”

곧 그 뒤를 따라서 운차이의 마차를 경비하던 병사 두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자신들에게서 탈주한 죄수가 성의 주방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광경을 보고는 어처구 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난감함은 표현될 기회가 없었다. 스카일램이 매섭게 말했기 때문이다.

“나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자. 즉각 죄수를 원위치로 보내고 마차 앞에 모든 호위병들을 집합시켜라!”

“예!”

호위병들은 경례까지 붙이며 말했고 그래서 주방의 사람들은 모두 얼떨떨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았다. 운차이는 한숨을 쉬고는 다리의 밧줄을 풀었다. 샌슨 역시 입 맛을 쩝쩝 다시며 운차이를 호위병들에게 보내주었다. 호위병들이 운차이를 데리고 사라지자 스카일램은 샌슨에게 다가왔다.

“듣기로, 당신은 저 호위병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죄수를 빼내왔다고 하더군요?”

“흠. 뭐, 그렇습니다.”

스카일램은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샌슨을 바라보더니 무겁게 말했다.

“다시는 이런 행동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주의하죠.”

샌슨이 간단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스카일램은 더 이상 다그치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샌슨은 한숨을 쉬고는, 주방에 몰려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 사과를 보 내었다.

“자. 이런 미안합니다! 저희들 일로 괜히 이곳 분위기만 흐려버렸군요. 전 이만 가볼 테니 계속들 즐기세요. 덕분에 퍽 즐거운 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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