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당신의 이름은 당신을 나타내는가? 당신의 이름은 정말 당신의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당신의 이름이라는 것은 타인 속에 있는 당신일 뿐이다.’ 그러자 저 용맹 무비하며 동시에 비할 데 없는 지혜로움을 갖춘 전사이자 현자 샌슨 퍼시발은 엄숙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책임지는 것은 접니다. 그리고 제가 걷는 이 길은 샌슨 퍼시발의 이름을 위해 걷는 길입니다.’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추발렉의 도움으로 출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도 가치 있는 이야기” 돌로메네 지음, 770년. 제12권 11쪽.
1
“은근히 춥구먼 그래. 그런데 넥슨 녀석, 도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지?”
“바위는 차갑구나.’ 하는 정도?”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이지? 나도 그래.”
나 역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다가 등에 덮어쓴 나뭇가지에 목덜미를 찔리고는 좀 투덜거렸다.
우리는 현재 고지에서 버터핑거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샌슨과 나는 등에 나뭇가지를 가득 덮어쓴 채로 땅에 엎드려 계곡쪽에 있는 넥슨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샌슨의 경우에는 나뭇가지가 좀 많이 필요했다.
하슬러는 뭔지 모를 서류 같은 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그 서류를 들여다보다가 때때로 고개를 들어 넥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넥슨은 현재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그저 커다란 바위 위에 앉은 채 생각에 골몰하는 모습이었다. 샌슨은 싸늘하게 말했다.
“엉덩이가 꽤 시리실 텐데.”
“최종 결과물 배출구에 동상이나 걸리길 진심으로 기원하겠어.”
“이하 동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악담을 나누면서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레니의 모습이 보였다. 레니는 세 명 중 누구의 옷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커다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험하게 끌려다닌 모양인지 옷은 지저분 하고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여행 같은 것을 전혀 다녀본 일이 없는 레니가 험한 남자들에게 끌려서 산을 넘고 계곡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옷매무새 같은 것에 신경 쓸 수는 없겠지. 그녀는 무릎을 모으고는 그 위에 얼굴을 묻은 채 슬프게 앉아 있었다.
자크는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레니의 모습을 흘긋 보더니 잠시 넥슨의 눈치를 살핀 다음 모포를 가져다가 레니에게 덮어주었다. 그가 뭐라고 말하는 것 같기는 한데 들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레니는 고개를 들어 뭐라고 감사의 말을 하는 모양이다.
“자크 녀석. 마음에 드는군.”
샌슨의 말이었다. 음. 나도 마찬가지야. 레니가 입고 있는 저 바지는 아무래도 자크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자크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다시 자기 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은 움직일 것 같지 않군.”
“좋아. 돌아가자.”
나와 샌슨은 비비적거리며 누운 채 뒤로 물러났다. 넥슨의 일행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물러난 뒤에 우리는 일어나서 앞자락에 묻은 흙을 털었다. 샌슨은 말했다. “그런데 저 녀석들 어디로 가지도 않고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지?”
“글쎄. 다시 대미궁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는 거 아닐까?”
샌슨은 고개를 돌려 대미궁의 폭포를 바라보았다.
꽤 떨어져 있어서 이제는 폭포의 모습은 꽤 작아져 있었지만 이 거리에서도 거대한 절벽과 폭포의 모습은 장관을 이루었다. 그리고 우르릉거리는 물소리도 꽤 작아 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들려왔다.
대미궁을 나서자 우리들은 곧장 넥슨의 자취를 추적했다. 주의 깊은 추적 끝에 폭포가 쏟아지는 계곡을 따라 좀 내려간 곳에서 야영중인 넥슨의 일행을 발견할 수 있 었다. 사실, 뭐 그들이 피워놓은 불빛을 보고 찾아갔기 때문에 별로 어렵지는 않았다. 절벽 위에서 대충 훑어보자 계곡 아래에 있는 불빛이 바로 보였으니까.
그리고 우리들 역시 그 근처에 숨어서 야영을 했다. 샌슨적 저돌성에 의해 곧장 습격할 생각을 해봤지만, 아무래도 칼적 경계심은 저쪽은 OPG를 낀 남자들이 세 명 이나 있는데다가 꽤나 삼엄하게 경계를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게 되었다. 인질인 레니의 문제도 걱정이 되고 해서 우리들은 일단 그들이 움직이면 따라다니면서 기 회를 노린다는 소극적인 계획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밤이 지나고 나와 샌슨은 그들을 감시하러 이곳에 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 넥슨은 그저 멍청하게 바위 위에 앉아 있을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자크 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도 그렇게 급해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샌슨은 폭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불가능하잖아. 미궁의 입구가 무너져버렸으니까. 혹시 우리들처럼 수로로 들어선다면 또 모르지만.”
“혹시 그 생각을 떠올려 주면 좋겠는데. 녀석들이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때라면 레니를 구출하는 것도 퍽 쉬운 일이 될 거란 말이야.”
내 대답에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다시 말했다.
“하지만 말이야. 드래곤 로드가 말했잖아? 넥슨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한 걸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뭐, 그렇게 말했으니 믿을 수밖에. 그래도 드래곤 로드의 말이잖아.”
“어휴, 나도 모르겠다. 가보자.”
조금 떨어진 숲 속에서는 일행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으슥하고 후미진 곳이라 쉽게 발견되지 않을 위치였다. 우리들이 돌아가자 네리아는 스튜 냄비를 내밀
면서 말했다.
“대미궁에서 가져온 재료야. 300년 묵은 재료일지도 모르겠지만 변질된 건 없던데.”
잠깐? 이상한데? 네리아는 팔을 걷어붙인 채 머릿수건까지 하고 있는 게 아무래도 요리를 한 모습이었다.
“어라? 네리아가 요리를 했어요?”
네리아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헤헤. 사실은 제레인트가 했어. 난 옆에서 거들기만 했지.”
난 고개를 돌려 샌슨이 이미 스푼을 꺼내어 스튜를 포식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냄비에 달려들었다. 다른 일행들은 이미 식사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 었다.
스튜를 먹는 짬짬이 샌슨은 칼에게 보고를 했다. 기회다!
“쩝, 그러니까 말이죠. 넥슨은 지금은 꼼짝도, 쩝쩝,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꿀꺽, 모양인데요.”
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 그래? 그럼 급할 게 없으니 식사부터 마치고 보고를 듣세나, 퍼시발 군.”
아아! 안 돼! 역시 내 예상대로 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샌슨은 두말 없이 식사에만 열정을 보내었다. 그래서 내 입에 들어온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잠시 후 샌슨은 냄비를 박박 긁다가 침통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난 넌더리를 내면서 식기를 거둬모았다. 물통에 물도 얼마 없는데 계곡 쪽엔 넥 슨이 버티고 있으니 설거지도 못하겠군. 젠장. 난 샌슨의 손과 입에서 냄비와 스푼을 뺏은 다음 식기들을 몽땅 짐보따리 속에 꾸려넣었다. 설거지는 천천히 해야겠군. 커다란 나무 밑동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제레인트가 먼저 물어왔다.
“아,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제레인트. 아침 식사를 마치고 움직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짐도 풀어둔 채 그대로였습니다. 뭐, 움직이려 들면 빠른 시간 안에 움직일 수야 있겠지만 분위기로는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칼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상하군. 오늘은 벌써 11월 20일이네. 어디 보자, 그랜드스톰에서 아인델프 님이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이 한 달 정도 남았다고 말씀하신 것은 10월 말이었지?” 샌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10월 27일이었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이제 3주 정도 지난 셈인가?”
그게 겨우 3주 전의 일인가? 히야. 벌써 몇 년은 된 것 같은데 말이야. 난 새삼 감회에 젖어 그때의 일을 돌이켜보았다. 그러나 칼은 감회에 허비할 시간은 없나 보 다.
“정확하게 한 달이라고 생각한다면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은 11월 27일이겠지. 물론 오차가 며칠 있겠지만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 일주일 정도 남은 셈인 가. 그런데 넥슨은 왜 서둘러 갈색 산맥으로 달려가지 않는 거지? 퍼시발 군. 이곳에서 갈색 산맥까지는 얼마나 걸리겠나?”
샌슨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글쎄요?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습니다만 일주일이라면 빠듯하겠는데요? 이스트 그레이드를 가로질러서 바이서스 임펠까지 돌아가는 데 닷새 정도로 잡고, 그리고 갈색 산맥으로 들어가는 데 역시 이틀 정도 잡는다면 딱 일주일이군요. 그것도 전속력으로 달렸을 경우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허허, 이런. 그렇다면 이제 즉시 출발해야 된다는 말 아닌가.”
“예. 넥슨이 아니라 우리들로서도 이제는 갈색 산맥으로 출발해야 되는 겁니다. 넥슨에게 가서 며칠 남지 않았다고 경고라도 해줘야 할 지경이군요.”
“그런데 넥슨이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고? 도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볼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해요. 넥슨도 급할 텐데 갈색 산맥으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온 거라든지, 지금 서두르지 않는 것이라든지. 혹시 넥슨 녀석은 크라드메서가 언제 깨어 나는지 모르는 거 아닐까요?”
“아냐. 그렇지는 않을 거야. 그는 어쨌든 에델브로이의 재가 프리스트였고 또한 바이서스 임펠의 길드 마스터였지. 설마 그가 그런 정보를 모를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그러면 왜 서두르지 않는 거죠? 아, 그리고 또 이상한 것이 있어요.”
“응? 뭐가 이상한가, 네드발 군?”
“그 뱀파이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죠?”
“시오네 말인가?”
“예. 그 여자는 델하파에서는 분명히 넥슨과 함께 행동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나우르첸에서는 보이지 않았어요. 그리고 대미궁까지 오는 동안 한번도 보이지 않는데 요?”
칼은 잠깐 고민하다가 곧 간단히 대답했다.
“그녀야 간첩이니까…………. 뭐, 상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지 않겠나. 혹시 모르지. 넥슨과 헤어지고는 바이서스의 각 도시를 세이크리드 랜드로 만들 준비를 하고 있 는지도.”
칼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듣는 우리들로서는 소름이 쫙 돋는 말이었다.
“허, 허어, 음…………. 그럼 어떻게 하지요?”
“가정에 대해 대책을 세우자는 말인가? 모르겠네. 트리키 공께서 전하께 그 사실에 대해 경고를 잘하기를, 그리고 닐시언 전하께서 훌륭한 대책을 세워주기를 바라 는 정도밖에는. 우리 손은 두 개고 그 손들로는 지금 넥슨에게서 레니 양을 구출해 내기도 벅차군. 따라서 지금의 우리들로서는 시오네나 자이펀의 공작에 대해서까 지 내밀 손이 없네. 우리 눈앞에 있는 일,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밖에.”
“그렇긴 하군요.”
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복잡한 건 천천히 생각하고, 지금 우리에게 닥친 일은 넥슨의 손아귀에서 레니 양을 구출하여 일주일 내로 갈색 산맥까지 달려가는 것입니다. 넥슨이 갈색 산맥으 로 향한다면 따라가면서 기회를 노려도 되겠지만 그가 움직일 기미가 없는 바에야 지금 당장이라도 레니 양을 구출해야겠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흠칫하면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아…………, 우리들은 그랜드스톰으로부터 의뢰를 받았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겁니다. 하지만 침버 씨는 그렇지 않지요.”
제레인트는 뚱한 얼굴로 칼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싱글거렸다.
“예. 그래서요?”
칼은 겸연쩍게 말했다.
“침버 씨는…………, 대미궁에서 막대한 보물을 획득하셨는데, 혹시 신전으로 돌아가고 싶으시거나 하지는 않으십니까?”
제레인트는 계속 싱글거리며 말했다.
“어려운 때 함께한 동료를 버리는 짓은 안합니다. 여러분들을 따라오지 않았다면 그런 보물을 얻지는 못했을 테지요. 아, 그리고 저도 크라드메서의 마수로부터 대 륙을 구하는 모험에 동참하고 싶은데요.”
허헛. 제레인트는 대미궁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전혀 바뀐 점이 없군. 칼은 웃으며 그에게 목례했다.
“나머지 분들은 어떠십니까?”
칼은 나머지 분들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흠, 네리아는 그랜드스톰에서 약속한 보상 때문에 이 일에 동참했지. 하지만 그녀는 이제 막대한 보 물을 얻었고 따라서 이 위험한 일을 계속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불안하지는 않았다. 네리아는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나? 칼 아저씨. 왜 저를 바라보는 거지요? 내가 ‘그 동안 즐거웠어요. 이제 안녕!’ 하고 떠날 거라고 생각하신다는 것은 아니죠? 칼 아저씨도 드래곤 로드만큼이 나 음흉한 데가 있네요.”
칼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고 네리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여러분과 함께하겠어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이루릴 역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저 역시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칼은 이루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칼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칼은 저 대답을 들어두고 싶었던 모양이다. 속에 너구리가 열 마리는 들어앉은 양반 같으니라구. 그도 설마 정말로 우리들이 이대로 헤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 을 것이다. 그가 염려한 것은, 음. 아마도 우리들이 대미궁에서 획득한 보물 때문에 고달픈 길을 계속 걸으려는 의지가 약해질 것을 염려했겠지. 그래서 저런 질문을 하고는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굳히는 대답을 하게 한 것이다. 헤헤헷!
칼은 재빨리 말했다.
“자, 그럼 이제 계획을 짭시다. 저쪽에는 우리들도 잘 알다시피 OPG를 가진 남자들이 세 명이나 있소. 게다가 인질도 있으니 정면 대결은 힘들 것 같은데. 하지만 이런 지형에서라면 기습의 요건이 그런 대로 있습니다. 대미궁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해볼까요?”
이루릴이 칼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크와 하슬러를 저격하는 방법 말입니까? 하지만 그럴 경우엔 넥슨이 남지 않습니까. 그때는 주위가 어두워서 상당히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만 이번에는 어려울 텐 데요.”
“그렇군요. 음………….., 우리들 중 저격이 가능한 사람이 두 명인데 저쪽은 모두 세 명이라. 허어, 참. 한 명만 더 있다면 좋겠는데. 음. 퍼시발 군? 자네 활 다룰 줄 모르 “나?”
샌슨은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웬만큼 다룰 줄은 압니다만 명사수라고 자신할 수는 없는데요. 이런 계곡의 바람이 부는 곳에서, 그리고 두 방은 쏠 수 없는 상황에서라면 자신 없습니다.”
그때 제레인트가 말했다.
“아, 저 칼. 제게 그럴듯한, 아, 뭐 들어보시기 전에 판단하실 수는 없으시겠지만 제 생각에는 괜찮을 듯한 계획이 있는데요.”
“듣겠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흠, 허음. 루트에리노 대왕의 이야기에 이런 것이 있지 않습니까?”
“예?”
“루트에리노 대왕이 그덴 산의 거인에게 도전했을 때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약간 각색해서 사용하면 어떨까요?”
칼은 눈썹을 잠깐 곤두세웠다. 그러다가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어, 그런 소설…………, 프리스트나 수련사들에게는 금서에 해당할 텐데, 신전에서 읽게 해줍니까?”
그런 소설? 아, 창칼이 난무하고 살육이 상세히 묘사되는 거. 하긴 그덴 산의 거인과의 싸움…………, 확실히 프리스트나 수련사들이 읽을 만한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제레인트는 담백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금서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읽는 재미가 각별하더군요.”
제레인트의 뻔뻔할 만큼 솔직한 대답에 칼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러셨군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어떻게 각색한다는 말씀입니까?”
제레인트는 진지한 태도로 설명을 시작했다.
“우타크와 차넬이 그덴 산의 거인을 속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들도 위장 항복을 하는 겁니다. 우리들 중에 누군가가 그들에게 찾아가서는 합류하고 싶다고 속이 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 무리 중에서 내분이 일어난 것처럼 위장하면 될 것입니다. 음, 이게 좋겠군요. 대미궁에서 가지고 나온 보물 때문에 우리들이 서로 싸움을 일으키게 되었고, 그래서 그 와중에 도망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넥슨을 따르겠다고 속이는 겁니다. 그러고는 적당한 틈을 봐서 안팎에서 호응하여 레니 양을 구출하 는 겁니다. 위장 항복을 한 사람이 레니 양을 데리고 도망칠 때 밖에서 도와주면 될 것입니다.”
나와 샌슨은 제레인트에게 우리들의 입 크기를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하게 되었다. 그러자 제레인트는 점잖게 말했다.
“아, 그렇게 놀랄 것들 없어요. 간단한 각색인데요.”
윽. 제레인트는 우리가 그 말도 안 되는 계획에 감탄한 줄 아는 모양이다. 샌슨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 이상합니까?”
나도 기가 막혀서 말했다.
“넥슨이 비록 인간 같잖은 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크도 믿지 않을 그런 이야기를 믿을 거 같지는 않은데요?”
제레인트는 내 표현에 언짢은 얼굴이 되었다.
“오크도 믿지 않을 거라구?”
“예.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쫓아다니다가 이제야 항복이라구요? 게다가 우리 쪽이 훨씬 인원이 많은데 왜 인원이 더 적은 편에 서겠다는 거냐고 물어오면 어떻게 대 답하지요?”
제레인트는 눈을 크게 뜨더니 잠시 머뭇거렸다. 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덴 산의 거인이야 우둔한데다가 자만심이 강해서 그 말에 속아넘어간 것이겠지요. 하지만 넥슨은 거인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아, 그야 기억을 많이 잃었다지만 하슬러나 자크가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우리들 중에 누가 찾아가면 믿어주겠습니까? 세레니얼 양이 찾아가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아마 폭소를 터뜨리겠지요. 프리스 트이신 침버 씨도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리고 퍼시발 군이야 침버 씨가 말씀하신 대로 강인한 전사이므로………….”
“칼!”
샌슨은 콧김을 뿜어대었고 그러자 칼은 미안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하하. 예. 저쪽 사람들이라 해도 퍼시발 군이 태도를 바꿀 사람으로 보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곧은 성격의 전사이고 그건 척보면 알 수 있는 거니까.”
그러자 샌슨은 곧 자랑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음. 그게 칭찬인 줄 아나 보지? 뭐, 칭찬이라면 칭찬일 수도 있겠군. 칼은 이제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네드발 군? 아마 절대로 믿지 않을 겁니다. 17세의 소년이 일행을 버리고 어제까지 싸우던 자들에게 찾아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맞아맞아. 난 고결한 성품의 소유자거든. 칼은 네리아를 돌아보더니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리아 양도 물론 안 됩니다. 저쪽엔 자크가 있으니까. 네리아 양. 당신이 그런 식으로 전향하겠다고 말한다면 자크라는 그 청년이 과연 믿어줄까요?”
네리아는 어깨를 움츠렸다.
“잘 모르겠네요. 음. 자크가 날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난 나이트호크이고, 밤의 신사들의 죽음에 대해 화난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니까 힘들겠지 요.”
그러자 칼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밖에 없군요. 내가 찾아가서 그렇게 말해 볼까요?”
난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칼. 칼은 대미궁에서 넥슨의 속을 완전히 뒤집어놓았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어려울 거예요.”
제레인트는 입술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하, 하하. 그러고 보니 정말 갈 사람이 없군요. 음. 그 의견은 취소입니다.”
“전 그 의견이 마음에 드는데요.”
이루릴의 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눈을 크게 뜬 채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세, 세레니얼 양?”
칼은 말도 제대로 못했다. 그리고 네리아는 기막힌 표정으로 말했다.
“맙소사, 이루릴! 가서 뭐라고 말할 건데요? ‘제기랄, 망할 인간 녀석들이 내 보물까지 뺏어 갔어. 그놈들이 싫어졌어. 그러니 너와 손잡고 싶은데.’ 뭐 이렇게 말할 거예요?”
네리아의 목소리 흉내는 그럴 듯했다. 그러자 이루릴은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렇게 말하면 될까요?”
이루릴의 대답에 우리는 기어코 할말을 잃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우리들을 돌아보더니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건 안 되나요?”
네리아는 숨가쁜 표정으로 말했다.
“하, 하아. 미안해요, 이루릴. 그건 안 되겠는데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제 생각을 말씀드리지요. 제레인트 씨의 말대로 우리들 중 누군가가 찾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레니 양을 구출하여 나오면 되겠지요.” 칼은 놀라서 되물었다.
“예? 우리들 중에 저들이 믿을 사람이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이루릴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들 중엔 없지요.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잊혀지는 법이라던가요.”
“예?”
“우리들 중 누군가가 인비저빌리티의 마법을 사용하여 접근하면 되지 않을까요? 전 오늘 아침에 그 생각을 하고서는 인비저빌리티를 몇 개 기주해 두었는데요.” 우리는 조금 전과는 다른 경악에 휩싸인 채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이 내놓은 계획은 그러니까 이러하다. 먼저 우리 일행들 중에 하나를 이루릴의 마법을 사용해 보이지 않도록 한다. 그러곤 보무도 당당하게 저쪽으로 걸어가 는 것이다. 투명화된 상태이므로 레니에게 접근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곤?”
칼의 질문에 네리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
“간단해요! 레니에게 귓속말을 하는 거지요. 볼일이 있다고 말하라고 시키면 될 거예요!”
칼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아무리 막 나가는 저 녀석들이라고 해도 탁 트인 장소에서 그렇게 하라고는 말 못할 것이다. 혹 감시가 따라붙을지 모르지 만 그때는 투명화된 사람이 뒤통수라도 후려치면 그만이다. 혹 들키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다른 일행들이 남아 있는다. 그러고는 뒤에서 넥슨 일행을 공격하여 레니 와 그 침입자가 순조롭게 빠져나오도록 돕는다. 그러고 나서 레니 양의 안전을, 크라드메서의 안정을, 대륙의 평화를, 오, 빛나는 내일을 향해 희망의 발걸음을……………. 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상당히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만, 확실히 절대로 보이지 않습니까?”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 움직이다가 돌멩이를 걷어차거나 하면 소리는 날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의를 기울이면 되겠지요. 그 외엔 특별히 들킬 일이 없습니다. 저들은 모두 인 간이고 특별한 마법을 익힌 사람은 보이지 않더군요.”
“넥슨 휴리첼은 에델브로이의 재가 프리스트 아닙니까? 프리스트의 권능으로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글쎄요. 특별히 경계한다면 다른 기운을 느낄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과연 누군가 투명술을 사용하여 접근할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경계하고 있을까요?”
제레인트는 머리를 벅벅 긁더니 말했다.
“으흠. 그거 말이 됩니다. 그것도 상당히 되는데요. 실행해 볼 만합니다.”
네리아는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괜찮은데요? 하지만 들키면 위험하다는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요.”
“그때는 남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달려들든가 하면 될 겁니다. 우선 저쪽도 잠깐 동안은 당황 때문에 대응이 느려질 테니까요.”
샌슨의 말에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흠. 위험하지만 시간도 없으니, 어쩔 수 없군. 에, 누가 투명술을…
칼은 말꼬리를 흐렸다. 칼의 시선을 보다가 난 가슴이 덜커덩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어, 어? 뭐……, 어쩔 수가 없는 일이긴 하군. 그래, 당연하지. 다른 사람은 안 되는 일이야. 그러니까 내가 해야 하는 일이지.
하지만 나도 이건 싫어! 왜 변장이라고 하면 항상 나냐구!
“왜! 이라무스에서도 내가 변장했어요. 할슈타일 저택에 찾아갔을 때도, 어어억! 내가 여자로 변장했다고요. 그런데 왜 또 나냐구! 이번엔 좀 바꿔볼 때라고 생각하 지 않아요?”
칼은 진지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는 척하더니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면서 말했다.
“첫째, 마력과 신력은 어울리기 힘든 법이다. 여기서 침버 씨가 제외되네. 제 말이 맞습니까, 침버 씨?”
“아, 예. 마법을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실제로 해본 적은 없지만……………. 한번 해볼까요?”
제레인트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었지만 칼은 꿈쩍도 하지 않고 손가락만 꼽아대었다.
“둘째, 유사시 레니 양을 업고서 뛸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도주는 상당히 위험하고 급박할 거 같으니까. 여기서 네리아 양이 제외되지. 셋째, 저격을 할 수 있 는 사람은 남아 있어야 한다. 여기서 나와 세레니얼 양이 제외되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샌슨과 자네인데.”
“내가 가야겠군요.”
샌슨은 내 목을 졸라대더니 곧 자신도 거짓말과 사기와 변장 등의 악덕에 대해 남다른 조예가 있으므로 그까짓 투명화된 상태로 접근하는 일 따위는 식은 죽 먹기라 는 식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약간만 신경을 쓰면 여자로 변장하는 것도 어려울 것이 전혀 없다는 식의 망발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루릴 외엔 아무도 그 말을 귀기울여 듣지 않았지만.
이루릴은 샌슨의 의견을 듣다가 말했다.
“그럼, 샌슨 씨에게도 인비저빌리티를 사용할까요?”
칼은 잠시 더 고민에 휩싸였다. 아마 틀림없이 샌슨을 어떻게 말리느냐 하는 고민이죠, 칼?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어억, 안 돼!
이루릴은 먼저 숲을 향해 말했다.
“친구들이여. 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해 줘요.”
잠시 후 숲을 헤치는 우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풀숲을 헤치고 가장 먼저 튀어나온 것은 에보니 나이트호크의 거체였 다. 그리고 그 뒤로 슈팅스타의 모습도 보였다. 트레일은 역시 발을 좀 끌면서 나왔고 래셔널 셀렉션은 그 뒤에서 점잖게 걸어나왔다. 말들은 각자의 주인들에게 반갑 게 달려갔다. 네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에보니 나이트호크의 목을 끌어안고 그 풍성한 갈기에 볼을 비벼대었다.
“오래간만이야! 그 동안 더 예뻐졌네?”
음. 말에게 하는 인사로는 좀 그렇군. 샌슨은 슈팅스타의 콧등을 쓸면서 히죽 웃었다.
“자식아! 나 보고 싶었지?”
희한한 우연으로, 마치 파리라도 쫓는 것처럼 슈팅스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갈기를 흩날렸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낄낄거렸고 샌슨은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칼은 점잖게 트레일의 볼을 쓰다듬었지만 별말은 건네지 않았다. 그리고 이루릴은 래셔널 셀렉션의 갈기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 동안 잘 지냈니?”
래셔널 셀렉션은 점잖고 품위 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라? 그런데 제미니는?
잠시 후 제미니는 입에 뭔가를 우물거리며 천천히 걸어왔다. 윽! 저 괘씸한 말 같으니라구. 뭔가를 먹느라고 늑장을 부렸군. 어째 사람이나 말이나 똑같냐!
“임마! 부르면 빨리빨리 와야지!”
제미니는 멀뚱히 날 바라보더니 이를 드러내며 푸르릉거렸다. 마치 비웃는 것 같잖아? 저 괘씸 무쌍한 말 같으니라구!
“오늘 저녁은 말고기를 시식해 볼까?”
내 의견은 다른 사람들의 반대로 실천되지는 못했다.
두 번째 단계. 우리는 말들을 조심스럽게 이끌면서 넥슨 일행이 있는 계곡 아래쪽으로 조심하며 접근해 갔다. 사람들은 모두 입을 꽉 다물었고 말들도 침묵을 지켰 다. 간혹 제미니가 푸르릉거리려 할 때마다 내가 질겁하면서 녀석의 입을 틀어막은 일 외에는 조용히 접근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세 번째 단계. 마지막 얼마를 남겨두고 우리는 말들을 세워두고는 가만히 있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나와 샌슨은 이루릴 앞에 섰으며 이루릴은 나에게 캐스팅을 시작 했다. 이루릴의 조용한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동안 나는 눈을 부릅뜨고 긴장해 있었다. 뭐, 대단한 일이 있으려고? 설마 아프거나 하지는 않겠지.
“인비저빌리티.”
역시 고통 같은 것은 없었다. 난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응? 그대로인데?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루릴 뒤에 있던 칼과 제레인트, 네리 아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리아가 숨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 후치야?”
그런데 네리아는 완전히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면서 내 모습을 찾고 있었다. 어라? 내가 정말 안 보이나 보지? 난 살금살금 움 직여보았다.
역시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는 모양인데. 난 살그머니 네리아의 옆으로 접근했다. 그런데도 네리아는 완전히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며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난 네리 아의 귀에 대고 말했다.
“에비.”
네리아는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난 장난을 친 대가로 턱을 얻어맞고 말았다. 네리아가 보이지도 않는 곳을 향해 마구 팔을 휘젓다가 내 턱을 깨끗이 명중시킨 것 이다. 네리아는 자신의 손을 붙잡고 끙끙거렸으며 난 턱을 붙잡고 끙끙거렸다.
“좋아. 훌륭하군. 전혀 보이지 않는데, 네드발 군.”
칼은 점잖게 말하고 있었지만 엉뚱한 방향을 보고 말하고 있는지라 그 모습이 우스웠다. 이루릴은 생긋 웃더니 곧 샌슨에게도 마법을 걸었다.
팟!
와! 우와! 샌슨이 사라졌다. 경사났네! 이제 그 성밖 물레방앗간의 가련한 아가씨는 오거의 마수로부터 벗어나…………. 아닌가?
“샌슨? 어디 있지?”
“여기야. 그런데 넌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
윽. 이거 문제군. 나와 샌슨도 서로 보이지가 않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들은 허공에서 들려오는 나와 샌슨의 대화에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비틀거린 끝에 나와 샌슨은 간신히 서로의 손을 쥘 수가 있게 되었다. 그 동안 우리 일행들은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간신히 칼이 먼저 정신을 차려서 우리 는 마지막 단계로 들어섰다.
모습이 보이는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들 그야말로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다가섰다. 눈앞을 가린 관목을 치우자 계곡의 바위들 틈에 앉아 있는 넥슨 일 행의 모습이 보였다.
자크와 하슬러는 각자 손에 그릇을 들고는 뭔가를 먹고 있었다. 하지만 평화로워 보이는 식사 장면은 아니었다.
자크는 자주 그릇 위로 불안한 시선을 들어 넥슨을 바라보며 흠칫거리곤 했다. 그러곤 짜증난 태도로 사납게 스푼을 놀려댔다. 그리고 하슬러 역시 맛없는 태도로 그
냥 입 안에 음식을 우겨넣고 있었다. 그도 때때로 입 안에 든 음식물을 우물거리며 넥슨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바위 위에 정좌해 앉은 넥슨의 옆에는 그릇이 보였다. 아마 그에게 먹으라고 권하다가 듣지도 않자 그냥 거기 내버려둔 모양이다. 넥슨은 그릇에는 일별도 보내지 않 고 그저 허공을 쏘아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은자 흉내를 내는 건가?”
그러고 보니 정말 산에 틀어박혀서 수도하는 프리스트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 넥슨은 원래 재가 프리스트였지? 어쩌면 저 짓은 익숙한 짓일지도 모르겠군. 그러나 제레인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상한데요?”
“뭐가 이상합니까?”
“아, 저작자 에델브로이의 재가 프리스트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 그런데요?”
“에델브로이의 프리스트들은 묵상 자세가 저렇지 않습니다. 게다가 다른 어느 교단에도 저런 자세는 없습니다. 저렇게 방만한 자세를 취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 교단 의 묵상 자세 정도일까…………. 저희 교단에서는 묵상 자세를 그렇게 까다롭게 지정하지 않거든요.”
“그럼 명상에 잠긴 것도 아니고, 지금 뭘 하는 거지?”
샌슨이 갑자기 말했다. 뭐 특별히 갑자기랄 것은 없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깜짝스러웠다.
“옛이야기에 나오는 대로, 그가 입은 손실과 그의 레이디를 생각하며 고뇌에 잠긴 것 아닐까요?”
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나로선 넥슨이 그런 낭만적인 나이트 흉내를 낼 시간도, 여유도, 성품도 가지고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군.”
나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레니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행복한 식사 장면은 아니었다. 음식을 떠올리는 손길은 자주 멈추었고 목에서 무엇이 북받치는지 제대 로 삼키지도 못했다. 공포와 서러움 때문에 음식을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굶을 수도 없어 간신히 먹고 있다는 것을 당장 알 수 있었다.
칼은 여전히 엉뚱한 방향을 향해 속삭였다.
“좋네. 퍼시발 군, 네드발 군. 시작하세.”
그러자 샌슨의 목소리도 허공에서 나직하게 들려왔다.
“후치, 손을 잡고 움직일 수는 없으니까 놓는다. 넌 레니에게 접근해서 말해라. 그리고 난 다른 놈들을 경계할 테니까. 알았지?”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그래봐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난 나직하게 대답했다.
“좋아, 가자구.”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바스타드를 뽑아들고 나서, 나는 되도록 수풀들을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 깊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계곡의 안쪽은 모두들 커다란 바위들뿐이었고 관목이나 나무 등은 더 이상 없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나는 마침내 완전히 노출되었다.
넥슨은 아직도 허공을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자크나 하슬러의 경우엔 고개를 약간 돌리기만 해도 내가 있는 곳을 보게 될 것이다. 난 쿵쾅거리는 가슴을 내리누르 며 앞으로 걸어갔다.
갑자기 하슬러가 고개를 들자 난 기겁할 뻔했다. 그러나 하슬러는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음에도 그 얼굴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그는 그저 이상하다는 얼굴로 내 쪽 을 바라보았다. 난 꼼짝도 못하고 그 시선을 마주보았다. 그때 자크가 말했다.
“왜 그래요?”
“……아냐.”
하슬러는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맛없는 식사를 계속했다. 보이지 않아! 난 확실히 보이지 않는 것이다. 좋아. 난 놀랄 정도로 침착을 되찾았다.
아무리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계곡에 있는 작은 돌들이 내 발에 밟혀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면 저들은 기겁할 것이다. 난 커다란 바위들만 골라 밟으며 조심스럽게 하슬러와 자크가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레니가 있는 곳으로 향하려면 어쨌든 그들 옆을 지나야 했다.
내가 바로 옆으로 다가갈 때까지도 하슬러와 자크는 아무 느낌도 받지 못한 모양이다. 난 장난기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작자들 면전에서 손이라도 한번 흔 들어봐? 아니면 이 작자들의 밥그릇에 돌멩이라도 한 개 떨어뜨려 음식물이 얼굴에 튀도록…………. 그런 욕망이 뭉게뭉게 부풀어올랐지만 난 간신히 참아내고는 조심스 럽게 그들 옆을 지났다.
레니는 여전히 음식보다는 눈물을 더 많이 삼키는 듯한 얼굴을 한 채 앉아 있었다.
“흑.”
갑자기 그녀는 도저히 더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듯이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다시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자크가 이쪽을 한번 쳐다보았지만 별말은 하지 않 았다.
좋아, 됐군. 난 최대한 주의 깊게 레니에게 다가갔다.
소리없이 크게 한숨을 쉰 다음, 난 레니의 머리를 붙잡으면서 동시에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고개 들지 말고 내 말 들어.”
레니의 머리를 붙잡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레니는 고개를 불쑥 쳐들고 고함을 지를 뻔했다. 거세게 머리를 들어올리려는 레니의 움직임이 잘 느껴졌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참이라 난 레니의 머리를 그대로 고정시켜 둘 수 있었다. 레니가 난동을 부리기 전에 난 빠르게 말했다.
“나야, 후치. 들키면 안 되니까 꼼짝도 하지 말고 그대로 들어.”
레니의 몸이 굳었다. 그녀도 눈치를 챈 모양이다. 난 레니의 머리에서 손을 치우며 말했다.
“자, 함부로 굴어서 미안해.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하지만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거니까 너무 놀라지는 마.”
레니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최소한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엔 갑옷 입은 기사가 고개를 드는 꼬락서니였지만. 미리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 녀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자 크게 놀란 모양이다. 가까스로 비명을 억누르는 그 표정이 잘 보였다.
“마법이야. 마법. 마법을 써서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한 거야. 고개 끄덕이지 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내 말 듣기만 해.”
레니는 꼼짝도 하지 않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상하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고 조금씩 벌어지는 입술에선 하얀 입김이 술술 나오고 있 었다. 그녀의 턱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며 난 혀를 찼다.
“많이 기다렸지?”
곧 레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최소한 떨지는 않으니 다행이군. 난 레니의 손을 붙잡았고 그러자 레니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난 빠르게 말했다.
“이제 가자, 레니. 저 작자들과 너무 오래 있었지. 내가 널 구출해 줄게. 하지만 너도 날 도와주어야 해.”
레니는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하다가 간신히 참았다.
그때 자크가 갑자기 이곳을 바라보았기에 나와 레니 모두 기겁해서 굳어버렸다. 레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그녀의 눈이 자크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을 보고는 난 급하게 말했다.
“그냥 다시 고개를 숙여. 그게 낫겠어.”
레니는 힘없이 고개를 숙여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자크는 안쓰러운 표정을 짓더니 그릇을 내려놓고는 몸을 일으켰다. 이런! 젠장!
자크는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난 다급하게 바스타드를 들어올렸다. 저 친구가 날 눈치챈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그저 레니가 걱정되어 오는 것일까? 만일 후자 라면 괜히 소동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그런데 샌슨은 어디 있을까? 만일 샌슨이 소란을 일으키면 어떻게 하지?
샌슨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 도대체 아무런 짐작을 못하겠다. 하지만 자크가 지금 걸어오는 모습은 태연했다. 난 이를 악물었다. 좋아. 할 수 없지. 만일 잘못된다면 자크의 다리를 베어버리고는 곧장 레니를 들고 튀는 거야. 하지만 일단은 잠자코 있자.
자크는 이제 내 앞 3큐빗도 안 되는 위치에 섰다. 팔만 휘두르면 그대로 자크를 베어버릴 수 있는 위치였다. 팔만 휘두르면 돼. 그리고 레니를 들고 튀면 되는 거야. 그러면 이 떨리는 상황도 끝이라구. 제기, 엄청난 유혹이 느껴지는데? 참아야 돼, 참아! 억눌러라, 후치!
자크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레니에게 말했다.
“이봐, 레니, 입맛이 없어? 반도 먹지 않았잖아.”
난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저 차분한 음성은, 정말 여동생을 걱정하는 오빠의 목소리 같다. 하지만 난 레니가 근심스러워졌다.
예상대로 레니는 얼굴을 무릎에 묻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녀의 귀가 벌겋게 변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런, 안 돼! 그 귀 좀 어떻게 할 수 없어? 윽. 사람은 귀의 색깔을 마음대로 못 바꾸던가? 레니, 레니! 제발 지금은 그렇게 흥분하지 말란 말이야.
다행히 자크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는 그저 걱정스럽게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레니의 어깨를 짚으려 했다. 오, 맙소사. 이젠 끝장이야! 난 바스타드를 들어올렸다. 당장 후려친다. 어쩔 수 없어. 자크가 레니의 몸에 손을 대면 레니는 아마도 비명을 질러버릴 거다. 난 바스타드를 뒤로 힘껏 당겼다.
“레니…….”
“신경 쓰지 말아요!”
레니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올리더니 자크를 표독스럽게 쏘아보았다. 자크는 얼떨떨한 얼굴로 레니를 바라보았고 난 하마터면 엉덩방 아를 찧을 뻔했다.
레니의 눈이 발갛게 불타는 것 같았다. 레니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고함을 질렀다.
“내가 굶어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내가 힘이 없으면 달아나기도 더 어려울 거 아니야!”
자크는 어이없는 얼굴로 레니를 바라보더니 곧 얼굴을 찌푸렸다.
“어, 이봐, 레니.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그런 의미고 저런 의미고 내가 알 게 뭐야! 어차피 이렇게 끌고 다니기도 귀찮을 거 아니야! 지금이라도 만일 나에게 아무런 필요가 없어지면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거 아니야!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수 있으면서 걱정하는 척, 위하는 척하지 말아요!”
자크의 얼굴에 마침내 분노가 떠올랐다.
“야!”
“으아아아아!”
레니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고개를 숙여버렸다. 자크는 분노 어린 표정으로 레니를 내려다보더니 그대로 몸을 휙 돌려서 걸어갔다. 난 입을 쩍 벌렸다.
난 레니의 귀로 입을 가져갔다.
“진짜 울어?”
“으, 으어어어어……………. 천만에.”
레니의 대답을 들으며 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허허, 이거 여성 동지들에 대한 무서운 공포감이 느껴지는 순간이군, 그래. 항구의 소녀라서 그런가? 음,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만일 제미니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능청스러운 짓은 못할 거라는……………, 잠깐. 정말 그럴까? 제미니도 혹시 급박한 순간이
면 연극도 하고 가짜 울음도 터뜨릴까? 으허! 무서워라!
난 순수한 의도로 접근했다가 모욕을 당하고 돌아선 자크의 등을 향해 같은 남자로서 잠시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준 다음, 거짓 울음을 계속하고 있는 레니의 귀에 대 고 말했다.
“좋아. 계획은 이래.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나서 소변 볼 일이 급하다고 말해. 알았지? 그러고는 저기 왼쪽으로 보이는 후미진 덤불 속으로 들어가.”
레니는 울음을 억누르는 꺽꺽거리는 소리까지 내었다. 난 다시 한번 혀를 내두르고는 말했다.
“설마 저 녀석들도 따라오겠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겠지만 굳이 따라오겠다고 해도 거절하지는 마. 알겠지? 그냥 순전히 볼일이 급하다는 식으로 행동해. 따라오는 녀석은 내가 처리하면 되니까.”
레니는 고개를 들어 눈을 닦아대었다. 역시 그 눈에는 눈물 자국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난 씩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좋아.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