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5권 – 제9부 :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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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의 무리들 역시 세 명이나 되는 자신들을 보며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네 번째의 네리아는 그만 기절해 버렸고 네 번째의 샌슨은 눈을 심하게 비볐다. 그러나 네 번째의 이루릴은 역시 침착했다.
오른쪽 소매를 걷은 칼이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들은 소매 둘을 모두 걷어야겠군. 우리들은 현재 그렇게 서로를 구분하고 있소.”
“그래요? 알겠소. 세 명이나 되는 나에게서 명령을 받는 것이니, 따르지 않을 수 없군. 허허.”
네 번째의 칼은 양쪽 소매를 모두 걷어올리며 말했다.
“세레니얼 양이, 그러니까 이쪽의 세레니얼 양이 당신들을 발견하고 우리를 이끌어왔소. 난 처음에 도플갱어인가 생각했지. 하지만 세 무리나 되는 도플갱어라니. 그리고 그 순간, 난 어이없게도 도플갱어가 뭔지 모르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나에게 묻겠으니, 도플갱어가 뭐였지요?”
왼쪽 소매를 걷은 칼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사람을 죽이고 그 모습을 훔치는 몬스터요. 그러곤 그 사람 행세를 하지.”
“아…………, 그랬군.”
양쪽 소매를 모두 걷어붙인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그는 몸을 돌려서 자신의 무리, 그러니까 소매를 모두 걷어붙인 우리들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젠장! 저 광경을 보고 있자니 내가 영혼이라도 되어버린 것 같잖아?
“여보게들. 아무래도 우리 각자의 기억이 쪼개지면서 갈라진 우리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네. 결국 우리는 모두 진짜인 셈이지.”
“예? 뭐라구요? 잠깐, 그럼 저기 있는 저것들이 모두 나란 말입니까?”
양쪽 소매를 걷어붙인 샌슨은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양쪽 소매를 걷어붙인 제레인트는 이루릴과 함께 네리아를 부축해 걸어왔다.
“다 우리들이니, 좀 비켜주시오. 네리아 양이 기절했거든.”
우리들이 비켜주고 나자 네 번째의 제레인트와 네 번째의 이루릴은 네리아를 불가에 눕혔다. 세 명의 네리아들은 기절한 네리아를 내려다보면서 측은한 표정 반, 공 포에 질린 표정 반이 되었다.
소매 두 개를 걷어붙인 칼은 다른 칼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럼 다 나라는 말인데, 나한테 묻자니 참 기이하군요. 어쨌든 여러분들은 서로 이야기를 했을 테니 뭔가 이유라든가 하는 것을 밝혀내셨소?”
“이유는 잘 모르겠소.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질문하는 순간 다른 우리들이 생겨난다는 것만을 알아내었을 뿐이오.”
“질문? 무슨 질문 말이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를 확인하려는 순간 그렇게 되는 것 같소.”
그러자 오른쪽 소매를 걷어붙인 이루릴이 흠칫하면서 말했다.
“바로…………….”
그러자 왼쪽 소매를 걷어붙인 이루릴 역시 흠칫하면서 말했다.
“자신에게…….
그리고 또 다른 이루릴이 말을 이었다.
“의심을…….”
그리고 마지막 이루릴이 말을 맺었다.
“가졌을 때.”
파아앗!
공간이 마구 일그러지면서 난 잠시 몸의 중량을 모두 잃었다. 시간은 멈추어 있었으나 동시에 지독하게 빠르게 흘렀다. 마치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17년이 순식간에 다시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하늘은 낮이었으며 동시에 밤이었고 주위는 허공이었으며 우주였다. 하지만 주위엔 아무것도 없었고 쓸모 없는 것들이 무한 하게 많이 쌓여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제각기의 시간을 흘러갔다. 그러나 아무것도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나였다.
난 오른쪽 소매를 걷어붙인 후치였고, 왼쪽 소매를 걷어붙인 후치를 쏘아보던 소매를 걷지 않은 후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타나서 세 명이나 되는 나를 보던 후 치였다.
나는 조금 전, 샌슨과 함께 걸어오면서 넥슨 패거리들을 습격할 계획을 짜내던 날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명이나 되는 날 보며 놀라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 다. 그리고 난 칼에게 설명을 들으며 세 명이나 되는 날 바라보던 나였다.
그러나 난 하나였다.
모두들 하나였다. 칼도, 샌슨도, 이루릴도, 네리아도, 제레인트도. 그리고 나 역시.
우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샌슨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떠올리며 말했다.
“다, 다 기억나. 난 날 쳐다보았고, 그리고 난 나였고, 젠장! 말을 못하겠어! 어쨌든 그게 전부 다 나였어!” 네리아 역시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난……… 기절했는데. 아냐, 난 기절한 날 내려다보고 있었고……………. 어엉?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루릴은 차분하게 말했다.
“원래의 나로 합쳐졌군요.”
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요. 우리는 다 원래대로 돌아왔소.”
털썩. 옆을 돌아보니 땅에 주저앉은 제레인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상당히 편안할 것이라 추측되는 자세로 땅에 주저앉은 채 넋빠진 얼굴로 말했다.
“이런…………, 젠장. 기억이 정리가 안 되는데? 하하. 네 명의 제레인트의 기억이 모두 다 나야. 이런, 도대체 앞뒤를 맞출 수가 없는데요.”
“모두들 그런 것 같소. 하긴, 모두들 자신이었으니.”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심했을 때 우리들이 분리되었다는 겁니까?”
“그런 것 같소.”
“그리고, 그리고 이루릴 양이 그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원래대로 합쳐진 것이고?”
“그러하오. 고맙습니다, 세레니얼 양.”
칼은 이루릴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는 곧 날 바라보았다.
“후치.”
“예?”
“확인하고 싶군요. 후치가 불침번이었죠. 혹시 자신을 의심했나요?”
그러자 모두들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뭐야? 내가 날 의심하다니.
“예? 아뇨. 말도 안 되는………….”
순간 나와 네리아는 서로 눈길을 마주쳤다. 네리아는 질린 얼굴로 말했다.
“그거였어!”
우리는 모두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창백한 얼굴에 울 듯한 눈이 되어 말했다.
“그거였어. 나였어요. 나 때문이었어요!”
“네리아 양?”
“난, 난 내가 형편없다고 생각했어요.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리고 이 숲에 들어오기 전에, 그때 말했던 것처럼, 난, 난 지금 당장이라도, 지금 당장이라도 어디서 죽어도, 그래도 아무도 모르는, 신경 쓰지 않는……. 으흐흑!”
샌슨은 눈을 끔뻑거리며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칼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곧 따뜻하게 웃으며 네리아에게 다가가 그 어깨를 짚었다.
“네리아 양.”
갑자기 네리아는 와락 칼에게 안겨들었다.
“우와아아앙!”
칼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네리아의 등을 두드렸다. 네리아는 숨막힐 듯이 울었고, 칼은 차분하게 말했다.
“네리아 양. 우리가 함께 있잖소. 그런데 그런 슬픈 생각이라니.”
“예. 어, 어헉, 흑. 그래요. 그래서, 그래서 여기까지 드, 들어왔어요, 꺽, 꺼억, 여러분들과, 여러분들과 함께라면 사라져도 좋다고, 그건 진심이었어요! 끅, 으흑! 난, 도대체 무엇인지, 내가 무언지, 아무도 사랑해 주지 않고, 아무에게도 사랑 주지 않고, 않고…… 어컥, 끅.”
우리는 모두 조용히 그 둘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뒤통수를 긁적거리기 시작했고, 제레인트는 마치 기도하는 듯한 얼굴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 양. 우리가 있어요. 우리는 네리아 양을 사랑하오.”
“으흑, 흑! 미안해요, 미안해요. 나 때문에. 으아아아! 나, 난 여러분들이 너무 좋아요. 너무, 너무 좋다구요! 그래서, 으헉, 헉. 그래서 난 더 비참했어요. 난, 난 싸구 려 도둑이고, 요리도 못하고, 하는 일이 전혀 없는, 흑, 으흐흑. 그래도 여러분들은, 날 따스하게 대해 주었고, 새, 샌슨은, 그날 아침 날 그렇게도 친절하게, 친절하 게…………, 크으억, 큭.”
“우리는 당신의 재주를 사랑한 것이 아니오. 네리아 양.”
“그래서! 예, 컥, 여러분들은 필요에, 필요에 의해 사람을 고르지 않았, 어헝! 어허허허! 컥! 비참하게, 사람을 비참하게도 필요하냐에 따라………… 으흐흑!”
칼은 조용히 네리아의 등을 쓸었고 네리아는 쉼없이 울었다. 네리아는 그리고도 한참 동안 칼의 품에서 울다가 마침내 지쳐서 잠들었다.
이봐요. 그랑엘베르. 난 ‘내가 그랬잖아요.’ 하는 식의 말투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지금은 그렇게 말해야겠어요. 내가 뭐랬어요? 네리아는 순결한 소녀, 아니, 처 녀라고 그랬지요? 할말 있으면 지금 당장 내 앞에 나타나서 말해 보라구?
난 지금 당장 신께서 현신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가라앉혔지만 다행히 그랑엘베르께서는 현신하지 않았다. 휴우.
칼은 이루릴과 함께 네리아를 눕혔다. 모두들 너무 놀라서 잠이 다 달아나 버렸다. 칼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다.
“네리아 양은 의외로 섬세하고 가냘픈 데가 있군 그래.”
샌슨은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잠든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나도 돌아보았다. 몹시 운 탓에 네리아의 얼굴은 홀쭉해 보였고 머리카락은 마구 엉킨 채 잠들어 있었다. 샌 슨은 말했다.
“쩝. 하아, 그거. 말괄량이처럼 굴더니.”
제레인트는 그 과격한 표현에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나도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난 기억한다. 그날, 바이서스 임펠의 도둑 길드에서 네리아와 함께 갇혔을 때. 그녀가 그 어둠 속에서 상처 입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을. 왜 그걸 지 금껏 잊었던 것일까.
칼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들 잘 알겠지만, 이 일은 오늘 밤으로 잊어버리십시다. 내일 아침 해가 뜨면 네리아 양은 그대로 네리아 양인 것이오. 지금까지처럼 대합시다. 그녀가 이 사건 으로 특별히 더 상처 입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소.”
“예.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제레인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 역시 코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루릴을 바라보자 이루릴의 얼굴은 수심에 가득차 있었다.
“이루릴?”
“아, 네?”
“아, 별건 아니고, 물어볼 게 좀 있어서요. 아까 이루릴은 전혀 놀라거나 하지 않던데요?”
“네? 저도 놀랐답니다.”
“아, 뭐 놀란다기보다는 무섭다거나 화가 나는, 그런 기분 없었어요?”
“네? 왜 무서워하거나 화를 내는….? 아, 이해하겠어요. 여러분들은 모두 다르지요.”
칼이 끼어들었다.
“여보게, 네드발 군. 엘프는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 아니신가.”
그리고 이루릴도 대답했다.
“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하는 존재를 만날 일이 절대로 없으시겠군요. 저희들은 모두가 조화롭기 때문에 놀랄 만큼, 그러니까 여러 분들의 경우라면 놀랄 만큼 의견이 일치되거나 하는, 그런 존재감의 위협이라는 것을 느낄 일이 없지요.”
존재감의 위협이라. 어렵군.
“음.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은 서로가 다르다는 데서 존재감을 느낀다는 말이죠?”
“예. 개성이라고 하던가요? 정확하게 말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 네. 그렇군요. 이해하겠어요. 그런데 말이죠? 한 가지 더 물을 게 있는데.”
“그게 뭐지요?”
“왜 그렇게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요?”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와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조용히 말했다.
“아……, 전 넥슨의 일행이 걱정됩니다.”
“어엇!”
칼은 비명 같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이루릴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여기 계세요. 아무래도 가보고 와야겠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의심할지 않을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 숲에서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것을 안 이상 가봐야겠습니 다.”
칼은 창백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예. 큰일이군요.”
“뭐가 큰일인데요? 뭐, 기분이 좀 나쁘긴 하겠지만………….”
샌슨은 눈을 굴리며 물었다. 그러자 칼은 혀를 차며 대답했다.
“여보게! 아까 퍼시발 군 자네는 상대쪽 퍼시발 군을 죽이고 싶지 않던가?”
“예? 아……, 그 정도까지는 아닌….. 그렇군요. 예. 사실 그랬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네.”
“칼도요? 아니 아까는 전혀 그런 모습이………….”
“스스로의 언동은 조절할 수 있네! 퍼시발 군! 하지만 나 역시 맹렬한 살의를 느꼈다네. 그렇지 않다면 그게 사람인가?”
살의 살의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를 죽이고 싶어하는 느낌?
솔직히 부인할 수가 없다. 나와 똑같이 생긴 모습, 죽이도록 싫었다. 내가 사라져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난 OPG를 가졌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OPG를 가진 자는 오거를 피해 다녀야 된다. 젠장. 서로의 존재감을 위협하게 되니까! 서로의 자아를 위협하니까! 이제 알 겠다. 이루릴이 말한 존재감의 위협이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았다.
샌슨도 곧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 맞았어. 난 또 다른 날 보면서 지독하게 무서운 기분이 들었고 동시에 녀석들을 다 없애버리고 싶었어. 그런데도 우리가 맹렬 한 싸움부터 벌이지 않은 이유는, 그렇지. 다행히도 우리들 중엔 이루릴과 칼이 있어 그야말로 침착하게 대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넥슨 일행에게도 그런 인물이 있
을까?
이루릴은 곧 몸을 돌렸다.
“다녀오겠습니다.”
남아 있는 우리들은 모두 서로의 불안한 얼굴이 보기 싫어 제각기 하늘을 보거나 모닥불을 바라보거나 했다. 젠장. 20명이나 되는 녀석들이, 만일 우리들과 똑같은 일이 생긴다면 80명으로 늘어날지도 모른다. 그 상태에서라면 무서운 전투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그 와중에서 레니는 어떻게 될까. 이런 빌어먹을!
제레인트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말했다.
“횃불을 들고 가십시다. 만일 아무 일이 없다면 도망오면 됩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다면 레니 양을 구출해야 됩니다. 거친 전사들이 그토록 싸우는 과정에서 레니 양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만일 도망치게 된다면 레니 양을 구출하기는 더욱 어려워질 겁니다. 지금은 우리의 추적이 들키지 않아서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우리의 추적이 들켰을 때는 저들의 경계가 훨씬 심해질 것입니다.”
칼의 신중한 대답에 제레인트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칼은 갑자기 조심스러운 어조로 질문했다.
“잠깐. 혹시 테페리의 지팡이로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레인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저에게 확신이 없군요. 테페리께서 답을 주시지 않는 모양입니다. 전 가고 싶습니다만, 확신이 오지 않습니다. 그건 확실히 구분할 수 있습니다. 테 페리께서는 아무 언질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으음. 그럼 불안하지만, 세레니얼 양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봅시다. 하지만 준비는 해야겠지요. 여보게, 퍼시발 군, 네드발 군.”
“알겠어요. 곧장 출발할 수 있도록?”
샌슨과 나는 모포를 말고 짐을 챙겼다. 말들 역시 잠들어 있는 것을 깨워 안장을 얹었다. 말들은 모두 푸르릉거리며 항의했지만 지금 말들의 항의를 들어줄 여유가 없다. 말들을 달래가면서 짐을 다 챙기고 출발 준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미끄러지듯 이루릴이 나타났다.
“모두들 일어나세요. 심상치가 않습니다.”
이루릴은 나타나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의 표정은, 뭐랄까, 마치 곧장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한 표정과 공포 에 질린 표정을 적당히 반반씩 섞어둔 듯했다. 희미한 표정이긴 했지만 항상 익숙하던 이루릴의 얼굴은 아니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네리아를 깨운 다음 말에 올랐 다. 네리아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
“음? 뭐지? 밤인데…………….”
샌슨이 당장 대답했다.
“넥슨 쪽이 심상치 않아. 어서 가봐야겠어.”
네리아는 동그란 눈이 되더니 곧 말 위에 올랐다. 모두들 말 위에 올라타자 이루릴은 샌슨과 나에게 검을 뽑아들게 했다. 그리고 그녀는 빠르게 캐스팅했다. “라이트!”
두 번에 걸쳐 라이트 주문이 외워졌고 곧 샌슨의 롱소드와 나의 바스타드는 눈부신 빛을 뿜어내었다. 검에서 나오는 빛의 밝기는 그것으로 숲을 달릴 수 있을 정도였 다. 이루릴과 네리아가 탄 에보니 나이트호크가 앞장을 서고 그 다음에 나와 샌슨이 검을 뽑아든 채 섰다. 그리고 칼과 제레인트가 뒤를 따랐다.
우리들이 달려감에 따라 검에서 뿜어나오는 청백의 빛은 주위의 숲을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리고 그런 무서운 숲 사이로 달려가는 우리 일행은 사람 의 일행 같지가 않았다. 선두엔 빛나는 검을 곤두세운 두 명의 기사. 그리고 그 뒤론 공포스러운 얼굴을 한 남자와 여자. 마치 망령의 질주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소리없이 얼마를 달렸을까.
멀리서 미약한 신음소리 같은 것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신음소리라니? 우리는 더욱 속력을 높였다. 그리고 갑자기 눈앞이 팍 밝아지며 우리는 숲 속의 공터에 들 어서게 되었다.
“우으윽!”
앞에 있던 네리아가 신음을 뱉었다. 우리들은 지독한 참극의 현장 바로 옆에 나란히 서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이 자신들을 죽여버린 현장이었다.
현기증이 일 지경이다. 모닥불은 엉망진창으로 헤쳐져 있었지만 주위의 많은 것들이 불타고 있어서 공터는 환했다. 그중 몇 개의 불은 끔찍하게도 사람을 장작으로 삼아 불타고 있었다. 넓은 공터 가득 뿌려진 피에서는 지독한 피비린내가 풍겨와 숨을 쉬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눈 뜨고 볼 수 없는 것은 똑같이 생긴 수십 구의 시체였다.
그것은 마치 수십 쌍의 쌍둥이들이 싸움을 벌인 것 같은 모습이었다. 똑같이 생긴 자들이 서로의 가슴을 찌른 채 죽어 쓰러져 있었다. 똑같이 생긴 자들이 이곳과 저 곳에 누워 있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하지 못했을 지독한 짓들을 자기 자신에게는 저질러버린 모양이다. 많은 시체들의 얼굴이 엉망이었다.
그래. 눈 뜨고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도 증오스러운 적의 모습을. 하지만 이건 뭐란 말이냐. 어떤 자는 쓰러진 상대의 얼굴 을 난도질하다가 등에 칼을 맞은 모양인지 쓰러진 자의 엉망이 된 얼굴에 키스하듯이 쓰러져 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들이 똑같았다.
네리아는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곧 뒤돌아 달려갔다.
“우웨에에엑!”
이런, 너무 잘 들려! 나도 토할 것 같잖아! 난 간신히 속을 억누르면서 말에서 내렸다. 샌슨은 이미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었다. 샌슨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곧장 쓰러 진 자들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난 샌슨이 시체를 뒤지는 줄 알았다. 구토증이 치밀어오르는 순간, 샌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아 있어! 제레인트!”
제레인트는 창백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그는 샌슨이 가리키는 사람에게 다가가더니 곧 기도를 올렸다. 땀을 뻘뻘 흘리던 그는 말했다.
“이런…………, 수면이 부족해서 정신이 집중되지 않는군요…………. 그리고 너무 위중합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주세요. 제발요.”
나와 칼도 그 옆으로 다가갔다. 과연 시체들 사이에서 아직도 숨을 쉬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도저히 가망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는 심장을 맞은 모 양인지 아직도 가슴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제레인트의 빛나는 손이 그의 가슴에 닿자 그는 펄쩍 튀어올랐다. 놀라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가 다시 보니 그는 발작 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었다. 제레인트는 절망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 이상 생명의 끈을 붙잡고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샌슨은 곧장 고함을 질렀다.
“이봐! 레니, 레니는 어떻게 되었어? 붉은 머리 소녀 말이야!”
“커허헉!”
남자는 한 차례 무서운 기침을 하더니 눈을 떴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눈의 초점이 전혀 맞지가 않았다. 남자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플…… 갱어가…………… 흐으윽.”
“멍청아! 그건 도플갱어가 아니야! 너희들 자신이었다구! 붉은 머리 소녀, 붉은 머리 소녀는 어떻게 되었어?”
샌슨이 바락바락 고함을 질렀지만 남자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신음을 흘렸다. 샌슨이 입술을 깨무는 순간, 남자는 갑자기 팔을 확 뻗더 니 샌슨의 멱살을 붙잡았다.
“도, 도플갱어! 나, 나가. 이 숲을 나가! 이 숲은 죽음의………….”
남자가 토한 피가 샌슨의 얼굴에 튀었다. 그러나 남자는 말을 끝까지 맺지 못하고는 쓰러져버렸다. 제레인트는 손을 거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기랄!”
샌슨은 주먹으로 땅을 후려쳤다. 그는 다시 재빨리 일어서더니 시체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칼은 크게 숨을 쉬면서 호흡을 고르더니 말했다.
“흩어져 찾아보세. 무슨 흔적이 남아 있는지.”
그리고 칼은 걸어가 버렸다. 이루릴도 조용히 움직였다. 하지만 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자신을 죽여버린 이 거대한 시체의 무리에서 흔적을 찾아보라 니. 제기랄!
샌슨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플갱어 좋아하시네. 멍청한 녀석들! 죽고 나서도 원래 모습 그대로인 도플갱어라니. 그걸 보면서도 끝까지 서로를 죽였단 말이야! 아니, 자기를 죽였단 말이야!” “퍼시발 군. 조용히 못하겠나?”
칼이 낮은 목소리였지만 윽박지르는 의미가 분명하게 말했다. 샌슨은 이를 갈아대었지만 어쨌든 입은 다물었다. 모두들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제기랄 녀석들, 전부 자기 자신을 가장 심하게 공격했………….”
“퍼시발 군!”
돌아버릴 것 같다. 코로 들락거리는 공기 중의 절반은 피인 것 같다. 입 안에서까지 피맛이 느껴진다. 심할 정도로 숨소리를 내며 앞으로 걸어간다. 레니는? 항구의 소녀는?
물컹.
발에 무엇이 밟힌다. 난 어느 남자의 손을 밟고 있었다. 그러나 손 위쪽의 팔은 보이지 않았다.
난 고개를 들었다. 끔찍스러울 정도의 불기운은 밤의 숲을 검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고개를 더 들어올렸다. 날 내리누르고 있는 나뭇잎과 가지들마저도 붉다.
“으아………… 으아아………… 으아아!”
“네드발 군?”
머릿속이 웅웅거린다.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다. 하늘마저도 빙빙 도는 것 같다. 난 머리를 쥐어뜯으며 하늘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
“넥슨의 시체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철저히 난자당해 있더군요.”
“모두 세 구였지?”
“예. 다른 남자들은 최대 다섯 구까지 똑같은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미루어보아 이들은 최소 다섯 번 분열되었던 것 같군요.”
칼은 눈을 비비며 피곤한 음색으로 말했다.
“음. 그렇다면 최소한 두 명의 넥슨은 남아 있다는 말이로군.”
“그런데 기이한 점은 마부의, 예, 그 마부 기억하시죠? 넥슨의 충복 말입니다. 그 녀석의 시체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레니의 시체도 없었습니다.” 칼은 잠시 고개를 돌렸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미 해가 떠올랐다. 숲에는 어제처럼 광선들의 기둥이 곳곳에 서 있었다. 아침녘의 낮은 태양 때문에 햇살의 기둥은 비스듬히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숲 가운데 공터에는 우리가 어젯밤 밤새도록 모아들인 시체 더미가 있었다.
제레인트는 그 옆에 서서 무언가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루릴은 제레인트의 옆에서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제레인트는 기도를 끝내었고,
그러자 이루릴은 캐스팅에 들어갔다.
“파멸을 통해 영생을 구가하는, 파괴하지 못하면 존재할 수 없는 힘이여. 이들의 불운한 몸을 받아들여 그대의 존재 속으로 함께하라.”
부아아악! 마치 지푸라기와 불쏘시개 사이에 있던 불씨가 바람을 만난 것처럼 시체 더미는 갑자기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제레인트는 불기운에 놀라 황급히 물러났고 이루릴은 천천히 물러났다. 매캐한 연기와 살 타는 냄새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칼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저 연기는 주위 어디서든 보이겠군. 할 수 없지. 그래도 야생 동물의 먹이가 되도록 내버려두는 것보다는.”
샌슨은 감탄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레니도 없고 그 마부도 없었으니, 그들은 아마 분리되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아니네, 퍼시발 군. 우리도 어제 경험했지만, 일행 중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의심하면 일행 전체가 그런 현상을 겪게 되지 않았던가?”
칼은 그렇게 말하며 내 무릎을 베고 누운 네리아를 흘끔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어제 밤새도록 실성한 것처럼 울고 구토하고 비명을 지르다가 지금은 실신한 상태다. 난 그녀의 볼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말했다.
“예. 그리고 일행 중 한 사람이라도 그 이유를 알아차리면, 우리는 이루릴이었지요? 예. 그러니까 원상태로 돌아갔어요.”
“그렇지.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해 보아야 할까. 레니와 그 마부 역시 분리되었지만,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 이유를 알아차렸고, 그래서 원상태로 돌아 갔다?”
“그럴듯합니다. 그래서 싸움을 멈추게 되었던 것이군요.”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씁쓸한 얼굴로 손에 낀 OPG를 내려다보았다. 넥슨의 시체에서 회수한 것이다. 넥슨의 시체는 모두 세 구였고 그중 두 구의 손에서는 장 갑이 벗겨져 있었지만 나머지 한 구에는 남아 있었다. 그 한 구의 시체는 공터 가장자리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등에 화살을 맞은 채 쓰러져 있었다. 아마도 그래서 손 에 OPG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도저히 낄 마음이 들지 않았지만………………
난 OPG를 낀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두 명의 넥슨에게서는 OPG가 벗겨져 있었어요. 무슨 의미일까요?”
그때 이쪽으로 걸어오던 이루릴이 말했다.
“생존자들이 가져갔을 테지요. 아마 세 명이 아닐까요?”
우리는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별로 피곤한 기색을 찾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여느 때와 같은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우리 옆의 바위에 앉으며 말했다. “전투가 거의 종결되던 시점에서 누군가 사태를 파악했을 듯합니다. 어쩌면 샌슨의 말대로 죽어도 모습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고는 도플갱어가 아니라 그들 자신인 것을 깨달았을 수도 있지요.”
“일리 있는 말씀이군요.”
“네. 그렇게 사태를 파악함에 따라 더 이상의 분리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아마 다시 하나가 되었을 테지요. 하지만 이미 죽은 자들은 그렇게 되지 못했고. 우리가 올 때까지 살아 있었던 남자를 기억하십니까? 그 남자는 하나였습니다.”
칼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루릴은 차분하게 말했다.
“아마 그 상황에서 생존자가 넥슨 이외에 세 명 더 있었던 것 아닐까요? 전 레니 양의 시체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먼저 레니 양이 살아 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리 고 그 마부의 시체 역시 보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두 명. 그런데 OPG는 두 개가 없어진 상태입니다. 포로인 레니 양에게 OPG를 주지는 않았을 테니 마부와 또 한 명의 누군가에게 OPG가 건네졌을 듯합니다. 넥슨은 원래 가지고 있었을 테고.”
“예. 하지만 생존자가 더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왜 OPG 하나를 남겨두었을까요?”
“그 마지막 시체는 으슥한 곳에 있었습니다.”
“음……. 찾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예. 아마도 이 진저리쳐지는 광경에서 한시라도 빨리 달아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지요. 차분히 뒷정리를 할 기분은 아니었을 겁니다.”
“아. 그렇겠군요.”
칼과 이루릴의 대화를 듣고 있자면 세상에 어려운 일이란 아무것도 없을 듯하다. 그냥 차분히 이야기만 나누면 모든 사건이 해결되고 모든 의문이 해소되는 것 같다. 아니, 결과야 어쨌든 일단 마음이 그럴 수 없이 차분해지는걸.
샌슨은 코를 벌름거리다가 말했다.
“음. 어쨌든 이들은 꽤 많은 숫자가 줄어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쪽에 승산이 있습니다. 빨리 그들을 추격하여 레니 양을 구출하는 것이 어떨까요.”
“옳은 말이네. 그런데 난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하나의 의문이 있다네.”
“예? 그게 뭔데요?”
“넥슨은 왜 갈색 산맥으로 가지 않고 이 영원의 숲으로 들어온 것일까?”
“약간 동물적이지만 그래서 간단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붙잡아서 두들겨놓고 물어보지요?”
“허헛. 참. 알겠네. 퍼시발 군.”
우리는 시체 더미에서 수거한 무기들을 한곳에 쌓아두었다. 모두들 자신의 무기가 있어 무기는 별로 챙기지 않았고 돈과 식량 등을 좀 챙겼다. 기운 없이 일어난 네 리아는 대거와 나이프 몇 자루를 가졌다. 그녀는 단검들을 들여다보며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그 사람들 길드원 맞아요. 아는 얼굴들이 있었어요.”
“그렇습니까.”
“예. 이 대거들도 기억이 나네요. 후우. 이 먼 땅까지 와서 밤의 신사들이 떼죽음을 당하다니. 그것도 자기 자신에게.”
네리아는 갑자기 사나운 얼굴로 말했다.
“넥슨이라는 녀석. 죽이고 싶어요!”
별로 대답할 말은 없었다. 네리아 역시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은 듯 우울하게 말에 올랐다.
“이루릴. 내가 뒤에 탈게요. 말 달릴 힘이 없어요.”
“알았어요.”
그래서 이루릴이 고삐를 잡고 네리아가 뒤에 탔다. 우리들 모두 말에 오른 다음 아직껏 불타오르고 있는 시체 더미를 뒤로 하고 천천히 흩어져 흔적을 찾기 시작했 다.
“이쪽이군요.”
이루릴은 부러진 나뭇가지와 칼로 베어버린 듯한 관목들을 가리켰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그쪽 방향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이루릴은 가끔 멈춰 서서 말에서 몸을 옆으로 늘어뜨려 땅을 바라보았다. 참 멋진 재주다. 이루릴은 상체를 거의 전부 내밀다시피한 채로 땅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예. 작은 발자국은 확실히 레니일 듯하군요. 말에 타지 않았나 봐요.”
“발로 달려갔다는 말이군요.”
“예. 그리고 서로 다른 몇 개의 발자국이 보이는군요. 레니는 몇 명의 남자들에게 끌려간 상태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음. 우리가 시체를 수거하느라 걸린 시간이 있지만, 그래도 저쪽이 발로 걸어가고 있다면 따라잡는 것은 어렵지 않겠군요. 모두들 힘들겠지만 기운냅시다.” 모두들 앞으로 달려갔다.
난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숲의 나무들 위로 뭉게뭉게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가 보였다. 오크와 복수의 화렌차여. 자기 자신에게 죽음당한 자들의 복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명복이나 빌어주지요. 슬픈 죽음에 대해.
추적하는 동안 내내 제레인트는 나로 하여금 신경을 쓰이게 만들었다. 제레인트는 한참 동안이나 ‘난 지금 대단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다가 마침내 말했다.
“생각난 것이 있는데요.”
칼은 계속 말을 걷게 하면서 말했다.
“말씀해 보십시오.”
“예. 저, 분리되는 것 말입니다. 어제 우리에게 일어났고 저 불쌍한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거요.”
“예. 그런데요?”
“에, 그러니까, 아, 분명히 기억들이 분리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개로 분리되면서 각자 자신의 기억들의 일부만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랬습니다.”
제레인트는 말을 걷게 하면서 말하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그는 앞을 주의 깊게 바라보느라 칼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렇다면 넥슨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무슨 말씀인지?”
“그, 왜, 세 명의 넥슨은 죽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남은 넥슨은 그 세 명의 넥슨에 해당하는 기억은 영원히 잃게 된 것일까요?”
칼은 눈을 흠칫 치켜떴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음. 일리 있는 말씀이오. 최소 다섯 번 분리되었을 테니, 그가 생존해 있다면, 어쩌면 그는 자신의 생의 5분의 3의 기억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겠군요.”
“예. 그런 상태에서 그가 과연 정상인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요.”
“어렵겠지요.”
“음. 아무래도 빨리 추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슴을 노리는 레인저처럼, 꾀꼬리를 노리는 매처럼.”
제레인트는 그렇게 말하며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참, 참. 저 사람은. 하핫.
꼿꼿하게 곤두선 빛살에서 오후임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그 빛살들 사이로 달려갔다. 이루릴은 완전히 확신하는 모양이다. 그녀는 두 번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달려갔다.
“이 방향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이루릴은 거의 날아갈 듯 말을 달렸다. 그녀의 뒤에 앉은 네리아가 숨을 몰아쉬는 것이 보였다. 샌슨과 나 역시 씩씩거리며 달려갔지만 사슴을 노리는 레인저 처럼 달려가는 제레인트야말로 정말 장관이었다. 펑퍼짐한 로브를 펄럭거리며 극명한 명암 사이로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감동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의 창백하 게 질린 얼굴에 대해서는 생각지 말기로 한다면.
“이, 이런. 왜 난 모험이 시작부터, 어, 어려운 거야. 세이크리드 랜드로 시작하더니, 영원의 숲이고, 기마는 숲에서부터 시작해.”
그의 불평도 일리는 있었다. 숲을 달린다는 것은 지독하게 힘든 일이었다. 특히 제미니는 꽤나 고생하게 되었는데, OPG를 되찾은 내가 다시 힘에 익숙해지지도 못 한 상태에서 고삐를 잡아당겨 대었기 때문이다.
아름드리 나무들은 거대한 장애물이었고 땅의 기복도 고르지 않았다. 말들은 콧김 소리를 거칠게 내면서 달려갔다. 에보니 나이트호크는 날씬한 아가씨 두 명 정도 는 별로 부담이 되지도 않는 모양이다. 아니, 엘프가 타서 그런가? 저 흑마는 다른 말들을 인도하면서도 오히려 여유가 있어 보인다.
휙휙 지나치는 아름드리 나무들과 번쩍거리며 나타났다 사라지는 햇살들 사이로 달려간다.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아우성을 지르고 있었고 가슴을 떠미는 바람은 살갗을 죄어들게 만든다. 그런 굉장한 속도로 한참 동안 달려갔을 때였다.
콰콰콰콰콰.
굉장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땅이 흔들리는 느낌도 전해졌다. 마치 하늘이 땅을 북으로 삼아 최악의 불협화음을 연습하는 듯했다.
이루릴이 멈추어 섰다. 그리고 그 뒤로 나머지 네 명이 차례대로 멈추어 섰다.
우리들은 숲의 끝부분, 높은 절벽 위에 서 있었다. 절벽 아래부터 시작해서 지평선까지 뻗어나간 숲은 푸른 융단을 깔아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로 흐르는 강 의 모습이 보였다.
절벽 위로 부는 바람이 포효했다. 쏴아아아아!
일종의 계곡이었다. 아래에서는 그제의 비 때문에 불어난 것인지 거세게 흐르는 강물의 모습이 보였다. 음? 이상하군. 그제의 비가 아직까지도? 아, 아니다. 이런 엄 청난 숲이라면 굉장한 양의 물을 품고 있었겠지. 아니면 원래 세차게 흐르는 강일까? 강 또한 웅장한 소리를 퍼뜨리고 있었다. 콰콰콰콰콰.
그러나 우리는 끝없이 펼쳐진 숲의 전경도, 세차게 흐르는 강의 모습도 바라보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바로 왼쪽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왼쪽은 우리들이 서 있는 절벽보다 훨씬 높은 절벽이었다. 그 절벽은 왼쪽에서 저 앞쪽까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넓은 절벽 중간에 난 동굴 에서 폭포가 시작되고 있었다.
폭포는 엄청나게 컸다. 하지만 너무도 넓은 절벽 때문에 폭포의 크기가 작아 보였다. 마치 거대한 성벽의 배수로에서 가냘프게 흘러내리는 빗물처럼 보일 지경이었 다. 하지만 실제론 엄청난 폭포였다.
폭은 적게 잡아도 수십 큐빗, 높이는 수백 큐빗은 되어 보였다. 저 아래 까마득한 연못으로 떨어져내리는 물은 대지를 두드려 부술 것 같았다. 아래에서 자욱하게 피 어오르는 물안개 때문에 우리 발 아래는 완전히 농무에 휩싸여 있었고 그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연못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연못에서 강이 시작되어 흐르고 있 었다.
동굴은 자연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입구는 분명 사람의 손이 더해졌던 모양이다. 양쪽으로 서 있는 거대한 돌기둥과 입구 위쪽으로 대들보처럼 쌓여져 있는 석재 들을 보며 기막힌 기분을 느꼈다. 저런 가파른 절벽에서 어떻게 공사를 했던 것일까. 게다가 저런 폭포가 쏟아지는 곳에서.
칼은 고함을 질렀다.
“……!”
“예? 뭐라구요?”
“……!”
분명히 칼은 아까보다 더 크게 고함을 지른 모양이다. 하지만 폭포 소리 때문에 칼의 말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루릴은 칼을 바라보더니 잠시 고개를 숙이고 캐스 팅을 시작했다. 이루릴의 캐스트하는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후 갑자기 폭포 소리가 확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때 칼이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고함을 질렀다.
“폭포가 참 크다고오옷!”
고함을 지른 칼은 자기 목소리에 놀라서 흠칫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깔깔거리기 시작했고 이루릴은 싱긋 웃더니 말했 다.
“실프의 도움으로 소리를 좀 줄였습니다.”
칼은 얼굴이 벌겋게 된 채로 말했다.
“아,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느쪽으로 가야 하지요?”
이루릴은 잠시 양옆을 바라보더니 곧 폭포의 옆으로 올라가는 길을 가리켰다.
“이쪽이군요. 저기 돌이 구른 것이 보이시죠? 원래의 위치에서 빠져나와 아래에 흙이 묻어 있는.”
보이지도 않는 것을 보면서 아는 척을 해야 하니 죽겠군. 어느 돌멩이 말이지?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그도 아마 틀림없이 어느 돌멩이인지 모르는 것이 리라. 그렇지 않다면 왜 이루릴의 손가락과 전혀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칼은 말했다.
“예. 그럼 위로 올라가십시다.”
그러자 이루릴은 실프를 돌려보냈고 곧 가만히 서 있어도 몸이 울리는 폭포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귀가 이상해질 것 같아.
절벽 옆의 길은 꽤 가파르고 돌멩이가 많아서 말들이 걸어 올라가기 힘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말에서 내려 말들을 끌고 올라갔다. 간혹 돌멩이가 구르고 말들이 발을 헛짚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폭포 쪽으로 굴러 떨어진 돌멩이는 그대로 짙은 안개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만일 내가 저기 떨어진다면? 아래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어버릴 것 같아.
말들을 끌어당기듯이 하면서 간신히 정상까지 올라가자 우리는 기진맥진하고 말았다. 하지만 난 OPG를 되찾았다는 실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저 멍청한 제미니 녀석 은 아예 나만 믿겠다는 듯이 거의 자기 힘을 쓰지 않았다. 고약한 말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