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5권 – 제9부 :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 7화
7
계단은 꽤 높았다. 그리고 계단을 다 올라서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길은 크고 단단한 돌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벽과 천장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횃불에 비치는 거무튀튀한 돌벽에는 장식이라는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이 투박했 다. 트롤이라도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는데도 답답한 느낌이 앞섰다. 붉은 횃불 빛에 물든 회색의 돌은 구릿빛으로 빛났다. 사방의 벽엔 거 미줄이 흉하게 늘어져 있었지만 계절이 계절인지라 이곳에서도 동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러니 퇴락한 기분이 더욱 강하게 들었지만.
“을씨년스럽네.”
네리아는 중얼거린 다음 트라이던트를 앞으로 내밀어 사방을 툭툭 건드리면서 걷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세 갈래 길이 나타났다. 음. 세 갈래 길이라. 이래가지고서야 제레인트에게 물어볼 수도 없잖아? 네리아는 잠시 고민하더니 왼쪽 길을 가리켰다. “무조건 왼쪽으로 꺾어요. 알겠지요?”
그리고 그녀는 대거를 꺼내어 왼쪽 통로의 옆벽을 긁어 동그라미를 그렸다. 칼은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무슨 기술이지?
왼쪽 통로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우리는 어깨를 으쓱인 다음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제레인트는 멀뚱히 우리들을 바라보 았다. 칼은 말했다.
“어느쪽으로 갈까요?”
“모르겠는데요?”
뭐? 모르다니? 우리는 의아한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럼 여기는 완전히 다른 길이로군. 돌아나가세나.”
음. 그런가? 우리는 들어갔던 길을 되짚어서 다시 세 갈래 길로 돌아나왔다. 그러고는 이번엔 다른 길로 들어섰다. 네리아는 또 들어가기 전에 동그라미를 표시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우리는 어디가 어딘지 헷갈리게 되었다.
통로는 오직 통로였을 뿐 무슨 문이나 방으로 연결되는 공간이 없었다. 도대체 이게 뭐람. 두더지도 아니고 왜 쓸모없는 통로들만 여기저기로 뚫어둔 거지? 그야말 로 들어온 사람 길 잃어먹게 만들려는 의도가 뻔뻔스러울 만큼 드러나는 장소였다. 제레인트는 두 갈래 길이 나타나면 왼쪽이다, 오른쪽이다, 모르겠다 등으로 말했 지만 주로 모르겠다는 대답이 많았다. 그리고 세 갈래 길이 나타나면 네리아가 유쾌하게 기호를 새겨대었다. 그녀는 처음 들어갈 때마다 기호를 새겼고, 만일 돌아다 니다가 기호가 있는 갈림길을 만나게 되면 기호가 없는 통로로 들어섰다. 이건 한 번 가본 장소는 다시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인 것 같은데.
그러나 잠시 후 우리는 교차로에서 네 갈래 길에 모두 기호가 새겨진 광경을 보게 되었다. 네리아는 휘파람을 불며 그중 하나에 다시 기호를 더한 다음 들어섰다. 샌 슨은 드디어 못 참고 말했다.
“잠깐, 전부 다 가봤다면 왜 또 들어가는 거야?”
“이 안쪽에 다른 갈림길이 있겠지, 뭐. 걱정 말고 무조건 기호가 가장 적은 곳으로만 다니면 돼. 넌 미로 빠져나가는 기초기술도 모르니?”
“미로 빠져나가는 기술을 내가 왜 배워! 원 참, 머리 아픈 장소도 다 있네. 도대체 이 넓은 공간을 왜 이렇게 낭비하는 거야?”
칼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들어오는 자를 경계하는 거라네, 퍼시발 군. 그리고 과거엔 드워프들이 자신의 건축 기술을 과시하기 위해 이런 미로를 만드는 풍조도 있었지. 인간들도 그런 풍조 를 좀 답습했지만 인간이 만든 그 어떤 미궁도 여기 대미궁의 축소판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가 있다네. 마음을 단단히 먹게나.”
샌슨은 마구 투덜거렸지만 어쨌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갔다.
갑자기 처음 와보는 대단히 긴 통로에 접어들게 되었다. 네리아는 멈칫하더니 말했다.
“길다. 무슨 기관 장치를 하기 적절한 장소야.”
샌슨은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말했다.
“기관?”
“응. 뭐 밟으면 꺼진다든가 화살이 휙휙 날아온다든가 하는 그런 거 있잖아?”
“이거 지금 무슨 난롯가의 옛이야기야!”
“옛이야기라면 옛이야기지. 우리는 300년이 넘은 미궁에 들어와 있다는 거 아직도 실감 못해? 300년짜리 이야기라구.”
샌슨은 입을 다물었다. 네리아는 주의 깊게 주위를 둘러보며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투덜거렸다.
“히잉. 난 나이트호크라구. 자물쇠 기술자가 아니란 말이야.”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철컹, 덜컹! 갑자기 굉음이 울려퍼졌다. 네리아는 질겁하면서 물러났다. 네리아가 트라이던트로 툭 건드리자 바닥이 갑자기 양쪽 벽을 중심축으로 빙글 뒤집혔던 것 이다. 바닥이 한 바퀴 휙 돌면서 잠시 아래의 시커먼 공간이 언뜻 보였다.
우리는 모두 잔뜩 굳어버린 채 바닥을 바라보았다. 바닥은 조금 전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어느 불운한 희생자가 이 아래에 빠졌다 하더라도 흔적도 남지 않겠는걸. 네리아는 어깨로 숨을 쉬며 샌슨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샌슨에게 눈을 찡긋했지만 샌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자, 어느 정도의 폭일까?”
네리아는 다시 트라이던트로 바닥을 찔렀다. 그러자 바닥은 휘익 뒤집히며 바람이 훅 일었다. 바닥이 뒤집힐 때의 크기를 보니 뒤집히는 부분은 대충 6큐빗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잠깐 기다려봐요.”
네리아는 대거로 벽에 T라고 새겨두고는 뒤로 물러났다. 네리아는 뒤에서 힘껏 달려오더니 함정 위를 뛰어넘어 정확히 함정이 끝나는 장소에 착지했다. 그녀는 땅에 닿자마자 몸을 굽히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함정 이쪽에서 초조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트라이던트를 내밀어 주위를 찔러보았 다. 벽을 찔러보고 바닥을 주의 깊게 찔러본 그녀는 곧 몸을 일으켰다.
“좋아요. 2차 함정은 없네. 뛰어와요.”
먼저 샌슨이 뒤로 물러나더니 멧돼지처럼 달려와서 뛰어넘었다. 쿠궁. 샌슨이 착지하는 소리에 네리아는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칼이 뛰었으며 이루릴은 가볍게 떠가듯이 넘어갔다. 제레인트는 비참한 얼굴로 날 바라보더니 말했다.
“던져줘.”
샌슨은 제레인트를 잘 받아내었다. 제레인트는 땅에 내려서자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렇다면 여기를 잘 아는 사람도 항상 이렇게 다녀야 되나? 그거 정말 체력 단련에 도움되겠는걸.”
네리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길로는 안 다녔겠지요. 하지만 우린 모든 길을 다 가봐야 되니 어쩔 수 없고.”
다시 지루한 미궁 답사가 계속되었다. 제레인트는 두 갈래 길에서 간혹 조언을 했고, 네리아는 세 갈래 이상의 길에서 계속 표시를 했다.
중간중간에 드디어 통로가 아닌 다른 것들도 나타났다. 간혹 넓은 광장이 나타나는가 하면 계단이 나타나기도 했다. 캄캄한 허공 속에 놓인 다리를 건널 때도 있었는 데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자 저 아래 까마득하게 물결의 일렁임이 보였다. 지하에 있는 중앙 호수인가 보다. 높이 30큐빗쯤 되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할 때도 있었 는데, 사다리는 모든 종족의 다리 길이를 고려한 것인지 단이 매우 조밀했다.
아직 아무도 불평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점점 지루해지고 기분이 나빠진다. 우리는 눈먼 쥐새끼처럼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닥치는 대로 걸어다니고 있는 것 이다. 걷는 것만도 상당히 힘들었다. 지하에 묵은 공기 냄새도 기분 나빴지만 도대체 얼마나 넓은 공간인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는 게 더욱 신경 쓰였다. 네리아에게 물어보자 그녀는 간단히 대답했다.
“으응. 원래 넓기도 한데에, 이리저리 꼬아놓아서 더 긴 거야. 긴 실이라도 꽉꽉 뭉쳐놓으면 작지? 그런 거야. 지하에 여기저기로 길을 뚫어놓아서 길 모르는 사람은 굉장히 많이 걷게 만드는 거지.”
목적지를 모른다는 것 때문에 전체의 여정을 머릿속에 그릴 수가 없었고 그저 한없이 걷기만 해야 되었다. 게다가 언제 함정이 나타날지 몰라 긴장하고 있어야 되니 정신적으로 꽤나 피로했다. 횃불 빛이 일렁임에 따라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우리 그림자들도 대단히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고 있었다.
간혹 함정에 치여버린 시체들을 볼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천장에서 커다란 돌덩이가 떨어져 복도를 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돌 아 래로 무엇인가의 다리뼈가 비죽 나와 있었다. 가운데로 나와 있는 꼬리뼈로 보아 아마 가고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바닥에 뚫린 구멍의 가장자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도 별로 소화에 도움될 듯한 장면은 아니었다. 아래에 삐죽삐죽 나와 있는 쇠꼬챙이들에 걸려 있는 유골 은 아마도 오크인 것 같다. 멍청한 녀석들! 왜냐고? 어떻게 같은 함정에 스물도 넘는 오크들이 빠져 있느냔 말이야.
“오크들은 어깨 위가 허전해서 머리를 얹고 다닌다고 하지?”
제레인트의 농담에 우리는 피식 웃었다.
어쨌든 우리는 서서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영상이 말하던 무시무시하다던 함정들은 별로 우리들에게 위험이 되지는 못했다. 오크들이나 기타 다른 몬스터들이 파손시킨 함정들이 꽤나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두 갈래의 길에서는 제레인트가 대단히 많은 시간을 절약시켜 주었다. 우리는 원래의 최하층에서 꽤나 높이 올라왔 다.
난 걸어가면서 칼에게 질문했다.
“드래곤 로드가 이 대미궁을 차지한 것은 사기극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뜻이죠?”
“응? 아, 그것말인가? 말 그대로네.”
“역시! 내 예상대로 그건 사기극이군요!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이죠?”
칼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음. 그러니까 오래 전, 드래곤 로드가 이 북부의 땅과 대륙의 거의 대부분을 지배하던 시절이었지. 잘들 알겠지만 드래곤 로드는 같은 드래곤들마저도 무자비하게 살육하면서 그 철권을 휘둘렀지만 몇몇 자유스러운 종족들, 대표적으로 엘프와 드워프들은 건드리지 못했지. 유피넬의 어린 자식인 엘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드워 프들은 지배당할 바에는 죽어버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니까. 게다가 귀금속을 채취할 수 있는 능력에서 드워프들을 따를 수 있는 종족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드래 곤 로드는 지금의 인간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엘프와 드워프들을 대할 수밖에 없었다네. 믿을 수 없는 맹방이자 견제하지 않는 적.”
“믿을 수 없는 맹방……, 견제하지 않는 적…………. 그럼 뭐, 결국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을 좀 어렵게 한 거뿐이군요?”
“그렇지. 그런데 드래곤 로드는 언젠가 드워프들에게 제의했지. 이 북방의 땅에 아비스의 미궁에 대응하는 미궁을 건설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네.” “아비스의 미궁에?”
“물론 오크들의 노동력에다 드래곤 로드의 재화와 그의 권능을 투입하고 거기에 드워프들의 기술을 더한다면, 신의 손으로 암흑을 봉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저 아비스의 미궁에 상응하는 미궁을 건설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아 보였던 게지. 미궁을 건설하는 것은 드워프들에게는 남다른 긍지를 주는 일이었고, 또한 드래곤 로 드는 그 미궁을 전폭적으로 노커와 드워프들의 것으로 제공하겠다고 말했네. 그는 드워프들에 대한 선의의 선물로서 그것을 제공하며, 그 대가로 자신의 우방이 되어 줄 것을 요구했다네. 그것은 세련된 교섭으로 보였고, 그래서 드워프들의 노커 익시노아 크레벤은 승낙했지.”
또 다른 갈림길을 만나게 되었고 네리아가 기호를 새겼다. 칼은 부드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익시노아 크레벤은 드워프들을 설득하기 위해 퍽 고생했지. 드워프들은 드래곤 로드와 조약을 맺는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하지만 아비스의 미궁에 상응
하는 대미궁이라는 것은 드워프들을 크게 유혹했지. 사실 아비스의 미궁, 그토록 거대한 미궁이 하늘 아래 있다는 것은, 게다가 그것이 드워프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드워프들에게는 끔찍한 치욕이었거든.”
“그게 치욕이에요?”
“자네 정도는 새발의 피로 여기는 초장이를 만나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네드발 군? 눈 감고도 초를 만들어낸다든가 하는 사람 말일세.”
“좋지는 않겠지요. 음. 알았어요. 그래서?”
“결국 드워프들은 그 조건을 수락했네. 하지만 그것은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일종의 교만이지. 미망이라고까지 표현할 수도 있겠지. 지상 최후의 감옥이자 슬픔과 고통만이 새어나오는 저 아비스의 미궁을 흉내낸다는 것은 말이야. 어쨌든 그들은 승낙했고, 정이 바위를 때리며 공사는 시작되었지. 하지만…….”
칼은 갑자기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는 마치 그때의 정과 망치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부지런히 오가는 드워프들, 동굴 곳곳에 굉음이 울려퍼지는 가운 데 웃고, 노래하고, 휘파람을 불었겠지. 칼은 마치 그들 솜씨의 흔적을 찾듯이 천장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들은 오크들과 함께 작업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탐탁지 않게 여겼어. 물론 현실적으로 그 노동력을 거부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서 이 대미궁의 공사는 처음부터 내재된 불안 요소를 가지고 시작되었던 것이야.”
제레인트는 번쩍거리는 눈빛으로 칼의 이야기를 들었다. 샌슨은 퍼뜩퍼뜩 정신을 차리며 주위를 경계하곤 했지만 어느새 칼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오고 있었다. 난 아예 주위에 신경 쓰지 않고 칼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길고, 어려웠지. 결국 완성은 되었지만, 그것은 지하에서 일어난 업적 가운데서도 가장 난해하고도 위대한 업적이 되었다네. 결국 우리가 지금 걷고 있듯이 대미궁 은 완성되었어. 그러고는 예정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배신이 있었지.”
칼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미궁의 공사가 끝나고도 오크들은 나가지 않았네. 그들은 이 넓은 대미궁 곳곳의 으슥하고 후미진 장소에 흩어져 살았지. 사실 완성에 50년이 걸릴 정도였으니 그 동안 여기에 아예 거주하게 되어버리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그래서 오크들은 이곳을 그들의 은신처로 삼았고 그들의 지저분한 재화를 쌓아두는 장소로 활 용했지. 그리고 동료들을, 글쎄, 그것도 동료라 할 수 있을까? 괴물들을 끌어들였지. 그리고 이곳으로 운반되던 드워프들의 보물을 좀도둑질하기도 하고.”
자박자박 발자국 소리. 칼이 말을 멈출 때마다 우리들의 발자국 소리만 울려퍼진다.
“드워프들은 그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게 되었다네. 드워프와 오크들 서로간의 반목은 나날이 심해져 갔고 드워프들은 드래곤 로드에게 항의했지만 드래곤 로드는 그저 퉁명스럽게 말할 뿐이었지. 당신들의 집에 빌붙어 사는 식객에 대해 나에게 따지지 말라는 태도였지. 사실 대미궁의 소유권은 전폭적으로 드워프에게 있는 것이 잖은가. 그러니 드워프들은 자신의 집을 단속하지 못해서 이웃에게 투덜거리는 꼴이 되었다네. 게다가 드래곤 로드로서는 선물을 준 것으로 모자라 뒤처리까지 해주 어야 되냐고 윽박지를 수도 있었지. 그러니 드워프들은 할말이 없었지.”
마침내 칼의 이야기에 빠져 있던 제레인트가 발을 헛디디고 휘청거렸다. 그는 겸연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거렸고 칼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그리고 어느날, 밤인지 낮인지도 알 수 없는 이 지하의 어느 곳에서 비명이 들려왔지. 그리고 비명소리는 갈수록 커졌고,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오크들에 의해 살 해당하는 드워프들의 것이었네. 노커인 익시노아 크레벤은 가장 먼저 살해된 드워프들 중의 하나였지. 반란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글쎄. 그것은 손님이 주인을 내 쫓는 격이었지. 폭동, 그게 정확할 듯하군. 드워프들은 어느새 자신들이 지상 최고의 미궁 안에 오크들과 가고일, 트롤, 코볼드, 놀 등과 함께 갇힌 것을 깨닫게 된 것 이지. 음울한 역사일세. 폭동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무려 1년이 걸렸다고 하더군.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드워프를 몰아붙일 때는 빠져나갈 곳을 마련해 두고 밀어붙인 다고 하지. 궁지에 물린 드워프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네. 그들은 이 대미궁의 곳곳을 모르는 곳이 없었고 모든 비밀 통로를 알고 있었으니까.”
칼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소용없는 투쟁이었다네. 결국 드워프들은 대미궁에서 도망쳤네. 아, 물론 살아난 드워프들의 경우이지. 그리고 그 후로 이 대륙의 지하 곳곳에서, 혹은 지상 에서도 드워프들과 오크는 피로 피를 씻는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지. 그리고…………….”
“그리고?”
칼은 야유의 뜻이 분명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오크들은 자신들로서는 이 거대한 대미궁을 감당할 수 없음을 겸허히 시인하고는 그들이 생각하는 합당하고 온당한 주인, 드래곤 로드에게 이곳을 바친 거 지.”
“휴우. 무슨 말인지 대충 알겠군요. 결국 드래곤 로드가 그 모든 것을 배후 조종한 것이군요?”
“그렇다네. 50년에 걸친 사기극이지. 그의 인내심에 경의를 표할까? 글쎄. 그의 50년과 우리의 50년은 많이 다를 테니 우리의 경의는 모욕이 될지도 모르겠군. 어쨌 든 결국 드래곤 로드로서는 이런 대성곽을 소유하게 되었고 껄끄러운 대상이던 드워프들은 매우 약화되었으니까 기분 좋은 결말이었겠지.”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뭔가 자신의 생각에 잠긴 모양이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엄숙한 기분을 느꼈다. 검붉은 횃불 빛에 물든 지하 동굴에서 듣는 낮게 울려퍼지는 칼의 목소리는 옛시대에서 그대로 울려나오는 것 같았다.
네리아는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우리는 또 다른 갈림길에 마주쳤다. 네리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표시 를 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는 놀란 목소리를 내었다.
“이게 뭐야?”
우리는 네리아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벽에 누군가가 숯으로 동그라미를 하나 그려놓은 것이다. 샌슨은 당황한 얼굴로 그것을 보다가 말했다.
“이게 뭐야? 네리아, 너 칼로 긁어놓지 않았어?”
“물론이야! 그리고 난 이렇게 크게 그려놓지 않았다구. 이게 도대체 뭐지?”
칼은 그것을 보더니 곧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됐군! 지금 이 대미궁 안에 들어와 있고, 또 표시를 함으로써 길을 찾으려 애쓰는 사람이라면 누군지 확실하지. 이건 넥슨 일행이로군.” 제레인트는 기운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군요. 어느새 가까이 다가왔나 봅니다. 아,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일찍 들어왔지요?”
“그래요. 아마 위쪽에는 더 많은 미궁이 있었겠지만 그들은 어쨌든 그 사이에 여기까지 온 거요. 이 표시를 따라갑시다.”
우리는 부쩍 기운이 났다. 이제야 넥슨과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숯으로 표시된 통로를 따라 들어갔다.
콰광! 우르르르릉!
갑자기 동굴이 울렸다. 우리는 제각기 벽을 짚으며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지나고 보니 그렇게 큰 충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느닷없는 일이라 놀라버린 것이다. 네리 아가 말했다.
“뭐, 뭐지? 이게 무슨 소리지?”
샌슨은 말했다.
“동굴 어디가 무너지는………… 것 같은데?”
칼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서두릅시다!”
우리는 모두 무기를 뽑아든 다음 빠르게 걸어갔다. 벽에 비치는 우리들의 그림자가 무서운 속도로 뒤로 사라져갔다. 또 하나의 갈림길, 우리들이 잠시 주춤하고 있을 때 제레인트가 먼저 왼쪽으로 접어들었다. 네리아는 급히 대거로 벽을 긁어놓으며 그 뒤를 따랐다.
“서두르지 말아요! 여긴 미궁이라구요!”
네리아의 말에 제레인트가 주춤했다.
“우리들도 길을 잃어버리면………….”
쾅쾅콰광!
다시 육중한 진동음. 이번에는 퍽 가까웠다. 우리는 귀를 막고 벽에 기대어 섰다.
“이게 도대체 뭐야? 여기 드래곤이 들어오기라도 했…………, 허어억?”
샌슨은 자신의 말에 숨을 삼켰다. 그리고 우리들은 질린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샌슨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설마, 아니겠지? 드래곤 로드가………….”
“빨리!”
칼의 재촉이었다. 우리들은 황급히 앞으로 걸어갔다. 설마 우리가 들어온 것을 깨닫고 드래곤 로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인가? 그래서 동굴이 이렇게. 르릉!
꽈르
우리는 쓰러질 듯 흔들리며 힘겹게 앞으로 나갔다. 다시 세 갈래 길. 우리는 황망하게 좌우를 둘러보았고, 네리아는 손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
네리아가 가리킨 곳에는 역시 숯으로 그려진 동그라미가 있었다. 우리는 그쪽으로 접어들었다. 횃불을 든 채 달리려니 불티가 얼굴로 튀었다. 미치겠는걸. 탁탁탁탁 탁! 우리들이 모두 빠르게 달려가자 제레인트는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앞에 푹 꺼진 구덩이가 보였다. 네리아는 달려가던 자세 그대로 뛰어넘었다. 또 망가진 함정인 가? 우리들 모두 그 위를 휙휙 뛰어넘었다. 내가 뛰어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레인트가 뛰어넘었을 때였다. 쾅쾅!
난 뒤를 돌아보았다. 흔들림 때문에 제레인트는 발을 헛딛고 말았다. 그의 몸이 뒤로 젖혀지는 순간, 난 있는 힘껏 그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덕분에 나와 제레인트는 통로에 뒹굴어버렸다.
“헉, 허억! 고마워, 후치.”
“아, 다행이에요. 휴우.”
제레인트에게 깔린 채로 나는 히죽 웃었다. 그때 고개를 들어올린 제레인트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가각!”
뭐지? 난 재빨리 누운 채로 몸을 뒤집어서 정면을 바라보았다.
정면의 갈림길에서 벽이 무너져 있었다. 조금 전의 충격은 저 벽이 무너진 것 때문일 것이다. 커다란 벽돌들이 힘없이 무너지며 자욱한 먼지가 흩날렸다. 그리고 그 무너진 구덩이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먼지 때문에 숨도 못 쉴 정도였지만, 우리는 복면을 끌어내리고 구멍으로 걸어나온 사람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만나리라고 예상한 자였기 때문일까? 제레인트와는 달리 난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샌슨은 이를 갈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넥슨!”
구멍으로 걸어나온 것은 넥슨 휴리첼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마부 녀석과 그 녀석에게 붙잡힌 레니의 모습이 보였다. 레니는 우리들을 보더니 곧 비명 같은 울음을 터뜨렸다.
“후치! 후치!”
마부는 사나운 동작으로 레니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레니의 목에는 롱소드가 겨누어졌다. 레니는 파랗게 질려버렸다. 그리고 그 뒤 로 다시 한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우리들을 보자 놀라며 대거를 뽑아들었는데 우리가 아는 얼굴이었다. 바이서스 임펠의 길드에서 보았던 청년 자크였다. 그는 네리아를 보고는 놀랐다.
“어라? 누님?”
그러나 그는 곧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넥슨은 우리들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리아는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외쳤다.
“멍청한 새끼! 그 잘난 OPG로 미궁을 부수고 다녔군! 두더지 같은 놈! 네놈 때문에 수많은 밤의 신사들이 이 별빛마저 낯선 곳에서 개죽음을 당했어! 그리고 너 자 크! 이런 놈을 끝까지 따라다녔단 말이야!”
자크는 창백한 얼굴로 발하듯이 말했다.
“마스터니까. 그리고 난 길드원이고, 어쩔 수 없잖아.”
“잘한다, 잘해! 그래서 이런 녀석을 끝까지 따라다녔단 말이지? 길드원들을 모조리 사지로 끌고 온 이런 녀석을? 길드 일 때문도 아니고, 시커먼 자기 뱃속 때문에 너희들을 끌고 다니는 거라는 것을 몰라!”
청년 자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네리아는 목소리를 죽이며 으르렁거렸다.
“동그라미는 네가 그렸지?”
“응.”
“그런데 갑자기 왜 벽을 부수고 난리지?”
“마스터께서………… 길 찾기 귀찮으시다고.”
저 녀석도 상황 판단을 못하는 축인가 보군. 넥슨이 바이서스의 배반자든 쫓기는 입장이든 신경 쓰지 않고 한 번 마스터면 끝까지 마스터로 모신다는, 마스터의 성격 이 어떠냐 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고 권위에 복종하는 그런 성격인 모양이군. 도둑들은 약삭빠른 줄 알았는데.
그렇다면 넥슨 일행 중에서 살아남은 것은 역시 세 명이었나 보군. 없어진 OPG는 두 벌. 나는 얼른 마부와 자크의 손을 보았다. 역시 그 두 명이 OPG를 끼고 있었 다. 아무리 오거라도 이런 돌벽은 부수지 못하겠지. 하지만 세 명이나 되니까 돌벽도 부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젠장. 만만치 않겠는걸. 샌슨과 나, 네리아는 완전히 긴장한 채로 앞을 쏘아보았다.
넥슨은 서늘하게 웃으며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넥슨은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내 적인가?”
“그럼 우리가 네 친구냐!”
샌슨은 마주 고함을 질렀다. 넥슨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적인가 보군. 그런데 이곳까지 날 따라온 것을 보니 대단한 친구들인가 본데. 아니면 나에 대한 원한이 엄청난 것일지도.”
그럼, 그럼 우리가 네놈에게 원한 말고 무슨 감정을 가질 수 있단 말이야! 난 입이 떨려서 말이 나오지 않았고 그래서 대신 넥슨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러나 넥슨 은 여전히 침착하게 말했다.
“내가 저 아가씨의 애인이라도 죽였나 보군. 애인이 밤의 신사였나?”
우리는 모두들 한꺼번에 뒤통수를 두드려맞는 기분을 느꼈다. 이게 무슨 말이야? 넥슨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 틀림없이 쓸 만한 녀석이었겠지. 난 멍청한 녀석은 적이라도 죽이지 않아.”
넥슨의 옆에 있던 마부는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넥슨에게 안타까운 표정을 보내었다. 넥슨은 이마를 짚으며 피곤한 음색으로 말했다. 그는 마치 백치처럼 멍청한 표 정을 짓고 있었다.
“잠깐……, 미안해. 과거를 돌이키면 머리가 아파.”
그는 괴로운 표정으로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희다…………. 이런 기분, 너희들은 알 수 있을까? 달도 별도 없는 하얀 밤하늘을 보는 기분이야.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그래, 어떤 녀석이었지? 그 밤의 신사라 는 작자는?”
“뭐라구?”
네리아는 그야말로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넥슨을 바라보다가 자크를 바라보았다. 자크는 침울한 얼굴이었다. 넥슨은 키들키들 웃더니 야유의 의미가 분명한 제스처 로 허리를 숙여 보이며 공손하게 말했다.
“소개하지. 내 이름은 넥슨 휴리첼. 당신들의 이름을 알려주겠어?”
저 자식이 지금 우리를 놀리는 건가? 그때 칼이 낮게 말했다.
“침버 씨의 추측이 맞았군. 당신, 자신을 죽여버림으로써 기억을 잃었구려?”
넥슨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 가련한 자. 또 다른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모조리 죽여버렸군. 그러곤 그 대가로 인생의 많은 부분을 잃으셨군.”
“너…………, 넌 누구냐! 어떻게 알고 있지! 넌 나의 뭐였어!”
“나 말이오? 난 아무도 아니오. 당신이 나에 대한 기억을 잃은 순간 난 당신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소. 하지만 굳이 알고 싶다면 말해 드리지. 난 칼 헬턴트. 거기 있는 붉은 머리 소녀를 쫓아 당신을 추격하던 사람이외다.”
넥슨의 눈이 더욱 번질거렸다. 그는 사납게 롱소드를 뽑아들며 말했다.
“그렇군. 네놈들은 할슈타일의 개로군. 아니, 바이서스 왕가의 개인가?”
넥슨은 앞으로 척척 걸어나왔다.
“누구라도 상관없어. 나에게 방해된다면 죽일 뿐이고, 그렇다면 너희들에 대해 알 필요가 없지. 죽어랏!”
넥슨은 걸어나오던 그대로 선두에 섰던 네리아를 후려쳤다. 무슨 기법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그냥 걸어와 후려치고 있었다. 그래서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들어올리 지 못했다. 채챙!
내가 그의 검을 막았다. 샌슨, 제자를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아.
“까불지 마!”
난 그의 눈을 쏘아보며 힘껏 밀어붙였다. 넥슨은 뒤로 휘청거리며 물러나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된 거지? 넌 뭐냐, 어떻게 내 검을 막았…, 그거! 내 장갑!”
“내 장갑? 웃기고 있군. 이 자식아! 네가 내게서 뺏어간 것이잖아!”
넥슨은 다시 백치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는 얼떨떨하게 날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분통을 터뜨리며 말했다.
“교활한 꼬마 같으니라구!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날 속이려드는 거냐?”
그때 마부가 황급히 그를 잡아당겼다. 마부는 어느새 레니를 자크에게 넘기고 다가왔던 것이다. 넥슨은 주춤거리며 물러났고 우리들도 뒤로 물러났다.
“왜 그래, 하슬러?”
맙소사. 정말 이름이 하슬러였나? 그럼 우리는 지금껏 저 친구의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고 있었군. 하슬러는 넥슨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저 꼬마의 말이 맞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로군. 차갑고 고저가 없는 저음이었다. 넥슨은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어 하슬러를 바라보았다.
“뭐야…………, 내가 저런 꼬맹이의 물건을 뺏었다고? 내가 그런 녀석이었어?”
“저놈들은 모두 끈질기고 지독한 녀석들입니다.”
우리는 이 평가에 대해 심히 불쾌했지만 아무 말 없이 넥슨을 바라보았다. 넥슨은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하슬러를 바라보다가 다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심하게 가로저으며 하슬러에게 외쳤다.
“빌어먹을, 저건 엘프잖아! 난, 난 엘프의 적이었나?”
“그렇습니다.”
“모르겠어……. 제기랄! 그럼 저 프리스트는 또 뭐야? 난 프리스트에게도 쫓기는 작자였던가?”
제레인트는 자신을 지적하는 넥슨의 손가락에 움찔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슬러는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넥슨은 악에 받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구! 기억나지 않아! 제기랄, 난 뭐였어? 내가 내 소망을 이루기 위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녔던 건가!”
하슬러는 대답하지 않았다. 넥슨의 눈 주위의 근육들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외쳤다.
“말해라, 하슬러! 저놈들은 내 방해물인가?”
“그렇습니다.”
넥슨은 다시 우리를 노려보았다. 그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좋아, 그럼 아무 상관 없어. 엘프든 뭐든, 그래. 하! 유피넬의 어린 자식? 웃기는군. 진실과 선과 미덕은 글쟁이의 펜 끝에만 있는 것, 그렇다면 내가 글쟁이를 고용 하면 돼! 그럼 내가 진실이며 내가 선이며 내가 미덕이 되는 거지. 프리스트? 잘난 제단에 경배를 표하지. 엘프든 뭐든 다 덤벼! 다들 죽여버리겠다. 그럼 되는 거지!” 그러면서 넥슨은 사납게 검을 휘둘렀다. 제레인트는 움찔하면서 물러났지만 샌슨은 기죽은 태도도 없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식아, 너 혹시 다리에 상처 없냐?”
넥슨은 멈칫하더니 곧 무서운 눈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네놈의 소행이냐?”
“그렇지. 너 그때 내게 죽을 뻔한 거 기억 안 나나 보군.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내주지.”
그러면서 샌슨은 롱소드를 넥슨의 가슴으로 겨냥했다. 넥슨은 흠칫거리며 다시 고개를 돌려 하슬러를 바라보았다.
“저……… 저 녀석들, 그렇게도 강한가?”
“말씀드린 대로 무섭고 끈질긴 녀석들입니다.”
넥슨은 머리를 움켜쥐며 신음을 흘렸다.
“제기랄………….., 제기랄! 그런데도 생각이 안 나! 생각이! 텅 비었어! 머릿속이고 뭐고 모조리 비었어! 너무 희다. 너무 하얗단 말이다! 제길, 제길, 제길! 도대체 내가 뭐 야! 내가 뭐냔 말이야!”
머리를 움켜쥐며 괴로워하던 넥슨은 갑자기 광기 어린 눈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 흘러넘치는 빛에 온몸이 오싹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칼은 차분히 말 했다.
“우리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당신과 관계된 인물이오. 우리를 죽이고 싶소? 그래서 떠오르지 않는 과거를 그냥 묻어버리고 싶은 거요? 당신이 알지 못하는 당신과 만나게 될 가능성을 없애버리고 싶은 것이오?”
넥슨은 움찔하더니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 하핫하하! 당신에 대해선 기억나지 않지만, 틀림없이 날 여러 번 화나게 했을 거 같군. 이름이 칼이라고 했던가?”
“그렇소.”
“죽어랏, 칼!”
넥슨은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의 검은 이번에도 내 검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네리아가 사납게 트라이던트를 찔러왔다. 넥슨은 다시 후다닥 뒤로 물 러났다.
물러나는 동작들이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이상하군, 조금 전의 공격들이 계속 막히는 것도 그렇고, 또 네리아의 공격을 피하는 저 동작도 그렇고. 우리 둘은 그대로 앞으로 돌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레니를 붙잡고 있던 자크가 사나운 고함을 질러 우리들을 멈추게 만들었다.
“서툰 짓 하지 말아요, 누님!”
네리아는 이를 갈면서 말했다.
“잘하는 짓이다! 네 녀석이 그러고도 밤의 신사야? 아무런 무장도 없는 젖내 나는 계집애를 붙잡고 날 협박해? 엉?”
자크는 어깨를 크게 들썩거리며 심호흡을 하더니 말했다.
“제기, 나도 좋은 기분은 아니야. 계속 내 신경을 건드리지 마.”
네리아는 가만히 선 채로 자크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나는 넥슨을 쏘아보았고,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완전히 초보는 아니고, 대충 알겠군.”
넥슨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말이냐?”
“너, 검술도 잊었군?”
넥슨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 자식!”
“그렇군. 분열된 넥슨들 중에서 검술을 기억하던 넥슨은 죽은 모양이군. 아니, 지금 칼 쥐는 것이나 흔드는 것을 보니 그중 일부를 잊어먹었군. 하지만 검술이라는 것이 일부만 기억해서 되는 게 아니지. 다리 놀리는 것은 완전히 잊어먹었군? 가장 중요한 것인데 말이야.”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고 넥슨은 그런 샌슨을 시선으로 꿰뚫어 죽여버릴 태세였다. 샌슨은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꽤나 여러 번 분열되었나 보지? 하긴 그렇게 많은 인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상한데? 검술 중 가장 중요한 부분들, 그 요체를 기억하는 넥슨이 살아날 가능성이 높 은 거 아닌가? 왜 너처럼 모자라는 녀석이 살아남았지?”
놀라워! 샌슨이 저렇게 날카롭게 지적하다니. 우리는 모두 입을 벌린 채 넥슨을 바라보았다.
넥슨은 갑자기 움찔거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하슬러를 바라보았고, 그러자 칼은 재빨리 말했다.
“하슬러, 저자가 그 넥슨들을 죽였군?”
넥슨은 마치 몰리는 짐승처럼 칼을 바라보았다 하슬러를 바라보았다를 반복했다. 그의 초조하고 불안한 얼굴에는 어느새 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하슬러는 침착한 표정이었다.
“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주인님. 당신은 내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며 나에게 살려달라고 말했고, 다른 넥슨을 모두 죽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랬군. 하지만 그거야 저 넥슨이 하슬러에 관계된 기억을 가졌다는 단순한 우연 때문이지. 그런데 하슬러 저 작자는 그 작은 이유만으로 주인과 똑같은, 아니 또 다 른 주인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단 말인가? 무서운 작자로군.
하슬러의 말을 들으며 넥슨은 벌벌 떨었다. 그는 그의 일부, 아니 그 자신을 죽인 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의 충성스러운 종복이 그를 죽였던 것이다. 그는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그러자 하슬러는 그를 부축했다. 그러나 넥슨은 하슬러의 손을 뿌리쳤다.
“이거 놔!”
“주인님.”
“제기랄…………. 그래, 하슬러………….”
넥슨은 흐느끼듯 말했다. 하슬러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고 넥슨은 이를 악물어가며 말했다.
“제길, 그래. 이왕 이렇게 되어버렸어. 이젠 돌이킬 수도 없어. 내게 남겨진 것은 나의 조각뿐이야. 그래, 가는 거야. 그것 이외엔 없어. 내게 남겨진 가장 작은 조각, 그걸 실현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수밖에 없어. 난 바이서스를 멸망시킬 거야.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어!”
“가장 고약한 부분이 살아남았군…….”
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러나 넥슨은 칼의 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런, 아무런 의미도 없어. 이건 벌레만도 못해. 먹이를 향해 나아가는 것, 적을 피하는 것밖에 모르는 벌레야. 그래? 그렇다면 난 벌레가 되겠어. 그렇다면 벌레 의 가치관에 따라, 벌레의 철학에 따라 움직이겠어! 충실한 벌레가 되겠어! 바이서스라는 먹이를 먹어치우겠어!”
칼은 음울한 눈으로 넥슨을 바라보았다.
“왜지요? 왜 바이서스를 파멸시키겠다는 거요?”
“그것 외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니까. 이유를 묻지 마! 고귀하신 인간께서 벌레에게 무슨 이유를 묻는 거냔 말이다!”
“불쌍하기 짝이 없는 천치로군!”
칼은 씹듯이 말했다. 넥슨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잊혀진 것은 과거일 뿐이오. 당신은 현재를 살고 있고, 그리고 미래는 오지 않았소. 많은 것을 잃었지만 동시에 앞으로 가질 수 있는 많은 것들이 남아 있단 말이오. 왜 그걸 못 보는 거요!”
넥슨은 목울대를 울렁거리며 칼을 노려보았다. 칼은 차분하지만 강하게 말했다.
“검을 버리시오, 넥슨 휴리첼! 차라리 잘된 일이오.”
“뭐야?”
“과거를 잊음으로써 이제 과거는 당신과는 별개의 것이 되었소. 당신은 바이서스에 대한 증오만 기억할 뿐 그 이유는 잊었단 말이오. 그렇다면 이유 없는 증오를 버 리시오. 그것 외엔 아무것도 없다고? 그렇다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시오. 다시 자신을 만들면 되오. 이해할 수 없소? 우리들도 당신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과거를 추 궁하지는 않겠소. 그건 없어진 것이오. 우리는 이제부터의, 지금부터의 당신만을 받아들이겠소.”
넥슨의 눈이 움푹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그는 고개를 약간 떨군 채 칼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슬쩍 올라갔다.
“남의 일이라고 쉽게도 말하는군.”
“그래, 남의 일이지. 하지만 당신의 그 이유 없는 증오, 그걸 폭발시켜 버리고 나면 당신에겐 뭐가 남겠소? 당신은 이유도 모른 채 맹목적으로 바이서스를 파멸시키 고 나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거 같소? 어림없지! 적어도 그것은 짐작할 수 있어. 그러고 나서 무엇을 할 생각이오?”
넥슨의 얼굴 근육이 일제히 풀어져버렸다. 그는 얼빠진 얼굴로 칼을 바라보며 힘없이 말했다.
“무엇을 하냐고? 그러고 나서……….. 무엇을?”
“그렇소. 당신 스스로도 이해를 못하는 그 증오를 불태우고 난 다음엔, 그 다음에 당신은 뭐란 말이오? 당신은 조금 전 조각이라고 말했소. 바이서스를 증오하는 넥 슨의 조각, 그 조각의 사명을 완수하고 난다면 당신은 뭐냔 말이오?”
넥슨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칼을 향해 있었지만 시선의 초점은 전혀 맞지가 않았다.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흐느끼듯 말했다. “조각의 사명을 완수하고 나면? 그럼 아무것도 없지.”
“그렇소! 당신은 다시 넥슨이 되어야 하오. 완전한 넥슨이 되어야 한단 말이오. 비뚤어진 증오심 외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넥슨으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거냔 말이오? 그것마저 버리시오! 그것은 당신 아닌 다른 넥슨, 과거의 넥슨의 파편일 뿐이오! 이제 당신은 새로운 넥슨이 되어야 하오. 과거의 파편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파편을 계속 가지고 있을 수는 없소! 그건 당신의 몸에 박힌 과거의 가시 같은 것이오, 빼서 던져버리시오!”
넥슨은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는 초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슬러는 아무 말도 없이 그의 주인의 등을 쳐다보았고 그 뒤의 자크는 불안한 시선으로 여기저기 를 쳐다보았다. 자크에게 붙잡혀 있는 레니는 과도한 흥분에 까무러칠 듯한 표정으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넥슨은 얼굴을 들었다. 갑자기 그는 환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