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5권 – 제9부 :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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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5권 – 제9부 :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 8화

8

그는 환하게 웃으며 칼을 바라보았다.

“좋은 말을 들려줘서 고맙군. 널 죽이겠어.”

칼은 움찔하며 물러났다. 넥슨은 하얗게 웃으며 즐거운 듯이 말했다.

“죽이겠어. 너도, 그 옆의 다른 녀석도. 그래. 하하하! 너희들은 내 과거와 관계된 녀석들이야. 과거의 난 죽었어. 난 과거를 잃었는데, 이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우 주인데, 왜 사라진 과거의 인물들이 나의 지금에까지 영향을 미치려고 들지? 제기랄! 난 없어졌어! 그런데 왜 너희들은 거기 서서 날 바라보냔 말이다!”

“넥슨 휴리첼!”

“그것마저 버리라고! 가진 자의 위선들도 이것보단 덜 뻔뻔하겠군. 그것마저 버리라고! 왜 목숨마저 버리라고 말하지는 않는 거냐!”

갑자기 횃불 빛마저도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그는 울지 않았지만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는 듯했다. 그는 상처 입은 야수처럼 포효했다.

“그것마저 버리라고! 망해 버린 상인에게 말해 보시지? 남겨진 마지막 재산마저 버리라고! 그리고 다시 일어서라고! 전쟁으로 가족을 모두 잃은 여인에게 말해 보시 지? 하나 남은 젖먹이 아들마저 버리라고! 그리고 새로운 가정을 꾸며보라고!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단 하나를! 내가 자살해 버리지 않는 단 하나의 이유를 버리라고? 그리고 완전히 사라져버리라고? 이, 추악한 위선자!”

칼은 음울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넥슨은 갑자기 손을 뻗어 칼을 가리켰다. 칼을 가리키는 그의 손가락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넌 무엇을 버렸어?”

“뭐요?”

“넌 지금의 네가 되기 위해 무엇을 버렸냐고? 무엇을 포기했고, 무엇을 망각했나! 네가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 무엇이냔 말이다! 죽어버린 부모에 대한 기억이 필요없 다고 해서 버렸나? 사랑하던 친구들에 대한 기억이 필요없다고 버렸나? 지금의 네가 있기 위해 도대체 무엇을 버렸느냔 말이다!”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소. 추억은 모두 소중하지.”

넥슨은 불타는 눈으로 칼을 노려보며 발악했다.

“난 그 모든 것을 버렸어! 아니, 뺏겼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빌어먹을 숲이 내게서 빼앗아 갔지! 그런데, 그런데 나에게 남아 있는 하나마저 버리라고? 새로운 내가 되라고? 왜? 그렇다면 왜 넌 새로운 네가 되기 위해 그것들을 버리지 않았느냐! 엉?”

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난 그 추억들을 다룰 수 있고,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소. 당신처럼 추억 때문에 자신을 소진시켜 버리려 들지는 않소. 난 현재를 살아갈 줄 아오.”

“가졌으니까! 넌 과거의 널 모조리 가졌으니까 현재를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가진 과거는 하나뿐이고, 따라서 내가 현재를 살아가는 방법도 오로 지하나뿐이다!”

“당신은 마치 눈먼 말 같은 사람이 되었군. 방향도 모른 채 계속해서 달리거나, 아니면 멈춰 서 죽어버릴 수밖에 없는.”

“이젠 비난하는가? 말문이 막히니 날 비방하는가? 과거를 가지지 못했다고, 반편이 인간이 되었다고 날 비난하는 것이냐!”

칼은 찌푸린 눈으로 넥슨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왜 들어왔소?”

넥슨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지금까지의 분노를 잠시 잃으며 당황했다.

“뭐라구?”

“그게 계속 궁금했지. 당신은 아직까지도 바이서스를 파멸시키겠다는 생각은 그대로 가지고 있을 테니, 대답해 보시오. 당신은 왜 갈색 산맥으로 가서 크라드메서를 만나려 하지 않고 이곳으로 온 거요?”

넥슨은 창백한 얼굴이 되어 눈을 굴렸다. 그는 어지러운 듯이 머리를 휘젓더니 말했다.

“크라드메서? 크라드메서…………… 아, 그렇군. 저 계집애의 드래곤 말인가? 물론 그 드래곤도 만나러 갈 것이다. 그리고 그 드래곤을 이용하여………….”

“그런데 여기는 왜 왔느냐는 거요?”

넥슨은 이상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는 드디어 당황한 어투로 말했다.

“넌 그것을 모르는 거야? 왜 모르지? 모르면서 날 쫓아온 것인가?”

그러자 하슬러가 조용히 말했다.

“저들은 그저 이 계집애를 되찾기 위해 우리들을 쫓아왔을 겁니다.”

넥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내가 설명해 줄 이유는 없군. 모르는 채로 죽도록.”

샌슨은 고함질렀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해봐! 기억을 잃었으니 말해 주지만, 넌 항상 우리들에게서 도망다녔어! 바이서스 임펠에서는 저 이루릴 양 앞에서 도망쳤고 델하파에서는 내 검 앞에서 도망쳤다. 네가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그랬나? 알았어. 복수해 주지.”

넥슨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앞으로 걸어나오려 했다. 그때 하슬러가 넥슨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무익한 일입니다. 저들을 상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놔라, 하슬러! 저놈들을 죽일 거야!”

하슬러는 넥슨을 우울하게 바라보다가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러나라. 저 소녀의 목숨이 아깝다면.”

“개자식!”

샌슨은 고함을 질렀지만 하슬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한 손을 들어올렸으며, 그러자 레니를 붙잡고 있던 자크가 대거를 바싹 당겨대었다. 하슬러는 말했다. “내가 손만 내리면 저 계집애는 죽는다. 무기를 놓고 물러나라.”

지금 이 순간까지도 하슬러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제기랄. 하지만 이 좁은 동굴에서 무기를 놓아버리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도망갈 곳도 없는데, 얌전히 죽으란 말 인가?

그때 네리아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자크!”

순간 자크는 불안한 눈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말했다.

“넌 아냐.”

자크는 불안한 눈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넥슨은 사납게 고개를 돌려 자크를 노려보았고, 그러자 자크는 움찔거렸다. 하지만 네리아는 계속 말했다.

“넌 아냐. 넌 단순히 깃발 날리고 싶은 욕심밖에 없는 철부지야. 넌 사람들을 좋아했고 나처럼 잘 싸우고 싶었고 우쭐해하고 싶었던 착한 바보 녀석일 뿐이야. 너, 너 정말 그 소녀를 죽일 수 있어? 그 시체더미에 너의 모습은 없었어! 넌 자신을 죽이지 않았던 녀석이야. 그러니까 다시 하나로 합쳐졌겠지. 그런 네가 정말 그 가련한 소녀를 죽일 수 있어?”

자크는 멈칫거렸다. 그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마스터의 명령이라면……………”

“닥쳐! 네가 어린애야? 마스터의 명령이 어째?”

자크는 더욱 우물거렸다. 넥슨과 하슬러는 모두 자크에게 매서운 눈길을 보내었다. 우리들 모두도 손을 축축이 적시는 땀을 느끼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넥슨이 우리들 쪽으로 돌진해 왔기 때문에 넥슨과 하슬러는 자크와 꽤 많이 떨어져 있다. 만일 자크가 레니를 죽이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그들이 자크에게 돌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들을 덮칠 것이다. 반면 자크가 레니를 죽이겠다고 굴면 우리들로서는 속수무책이다. 넥슨과 하슬러를 뚫고서 레니를 구출할 수가 없다. 결국 이 들 두 무리의 운명이 자크의 심중에 따라 결정되게 된 것이다.

자크는 괴로운 표정이 되었다. 그때 레니가 부들거리는 입술을 열었다.

“자크 오빠………….”

자크는 질린 얼굴로 레니를 내려다보았다. 레니는 흐느끼며 말했다.

“살려주세요…………. 제발. 흑, 으흑. 예? 제발 살려주세요………….”

“어………… 이런, 입 닥쳐!”

“제발………, 죽고 싶지 않아요…………. 제발………….”

모두들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호흡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 속으로 레니의 흐느낌이 울려퍼졌다.

“바다가 보고 싶어요…………. 아빠를 만나고 싶어요…………. 아빠가 절 기다리실 거예요. 제발, 제발 자크 오빠…………, 살려주세요.”

“입 닥치란 말이다!”

자크는 고함을 질렀지만 그 목소리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 갑자기 넥슨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크는 멍한 눈으로 넥슨을 바라보았고 레니마저도 숨을 죽였다. 넥슨은 걸어가며 말했다.

“날 배신하려는 거냐?”

자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가, 가까이 오지 마시오!”

넥슨은 멈추어 섰다.

“그래…………. 배신하겠다는 말이로군?”

자크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튀어나갔다.

“멈춰, 넥슨!”

그러나 곧 하슬러의 검이 앞을 가로막았다. 눈앞이 번쩍 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내 바스타드와 하슬러의 롱소드가 공중에서 엇갈렸다. 난 고함을 질렀다. “샌슨! 넥슨을 잡아! 이야아아아!”

고함을 지르며 하슬러를 밀어붙였다. 그러나 하슬러 역시 OPG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교묘히 손목을 뒤틀었으며 그러자 곧 내 바스타드가 미끄러지며 난 앞으로 휘 청거리고 말았다.

“후치!”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며 네리아의 트라이던트가 찔러 들어왔다. 날 노리던 하슬러는 물러났으며 간신히 내 목이 달아나진 않았다. 난 앞으로 휘청거린 김에 아 예 몸을 쓰러뜨리며 하슬러의 다리를 노리고 후려쳤다. 하슬러는 다리를 살짝 들어 피했다.

“거기 서라! 넥슨!”

샌슨이 달려갔다. 그러나 넥슨은 샌슨을 상대하지 않고 그대로 기합을 지르며 자크에게 달려들었다.

“둘 다 죽여버리겠어!”

그때 난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칼의 손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이 좁은 통로에서, 이 많은 사람들 사이로? 칼! 미쳤어요? 쉬우우웃!

달려가던 넥슨은 덜컥 멈춰 서며 온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나, 네리아, 샌슨, 하슬러의 네 명이 난동을 부리는 사이로, 그 작은 틈을 비집고 날아간 화살은 넥슨의 등 을 맞추었다. 네리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외쳤다.

“달아나! 자크, 달아나! 그 소녀에게 아빠를 만나게 해줘!”

자크는 이 모든 광경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멍하니 멈춰 서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OPG를 낀 그의 팔은 레니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찢어질 듯 외쳤다.

“마스터를 건드리지 마!”

모든 사람들의 동작이 멈추었다. 자크는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심지어 화살을 맞고 무릎을 꿇은 넥슨마저도 꼼짝을 하지 못했 다. 마치 어린 꼬마들이 싸움을 벌이다가 어른의 고함소리에 놀라 멈춰 서는 형국이었다. 우리는 초조하고 불안한 눈으로 자크를 바라보았다.

자크는 숨을 고르지도 못하며 힘겹게 말했다.

“젠장! 계집애 하나 때문에! 계집애 하나 때문에 다 포기할 순 없어! 난 자크야! 자크 3대의 마지막 자크라구!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모두 죽었어! 교수대에 목이 매달 렸다구!”

무슨 말이야? 그러나 네리아는 음울하게 말했다.

“반란자의 수하였으니까…….”

그랬던가? 우리들이 바이서스 임펠을 떠나고 나서, 그렇겠군. 궁성 경비대가 총출동하여 반란자 색출에 나섰을 테지? 우리는 질린 표정으로 자크를 바라보았다. 그 러나 네리아는 아직 포기하지 않는 듯했다.

“그건 다 저 녀석 때문이야! 귀족 주제에 길드를 집어삼키고 밤새들을 반란으로 끌어들인 게 누구야! 그리고 이 숲까지 끌고 와서 생존자들마저도 다 죽여버린 게 누 구야! 머리가 있다면 생각해 봐!”

자크는 갑자기 음울한 눈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 당신 입술이 항상 탐났었지.”

네리아는 굳은 얼굴로 자크를 바라보았다. 자크는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참 잘해. 제길. 그렇다면? 우리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럼 밤새들은 떳떳한 바이서스의 국민이라는 말이야? 우리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우리는 떳떳하게 밤일을 할 수 있기라도 하냔 말이야?”

네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크는 무서운 눈으로 우릴 쏘아보며 말했다.

“마스터는 약속했어. 우리들이 목숨을 걸고 평생을 밤일해도 절대로 훔칠 수 없는 거, 떳떳하게 하늘을 바라보며 이름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약속했다구! 제길, 나 도 한 번은 윗대가리에 서서 다른 놈들을 호령하고 싶었어. 목숨을 걸고 쫓겨다니는 밤새가 아니라. 마스터가 그것을 약속했고 자크 가문은 그것을 받아들였어! 그리 고 아버지는 길드장의 자리를 넥슨에게 주었고! 난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어. 따르겠다구!”

“걸리는 놈들을 다 죽여버리고 말이야! 아무곳이나 세이크리드 랜드로 만들고 무고한 사람 다 죽여가면서!”

“제길! 루트에리노 대왕도 걸리는 놈들 다 죽여버리고 대왕이 된 거 아냐? 내가 하면 어때서? 썅! 몇 백 년쯤 지나면 난 휴리첼 대왕의 여덟 별이 될지도 모른다 이거 야. 다들 그렇고 그런 거잖아!”

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꽤나 심하게 설득당했군.”

자크는 무섭게 외쳤다.

“물러나! 난 이 계집애를 죽이고 싶진 않아. 하지만 우릴 귀찮게 군다면 죽이겠어! 하슬러! 마스터를 부축해요.”

하슬러는 고개를 끄덕이며 넥슨을 일으켰다. 넥슨은 신음소리를 뱉으며 일어났다. 하슬러는 나직하게 말했다.

“이를 꽉 깨무십시오.”

그리고 하슬러는 곧장 넥슨의 등에서 화살을 뽑았다. 넥슨은 진저리를 치더니 하슬러의 품속에 쓰러졌다. 하슬러는 화살을 내팽개치고 말했다.

“모두들 그 뒤의 구덩이 너머로 건너가라.”

우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칼이 먼저 체념한 어투로 말했다.

“할 수 없군.”

그리고 칼이 먼저 뒤로 돌아 구덩이를 뛰어넘었다. 네리아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난 태도로 구덩이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이루릴이 차분히 건넜으며 그 다음 내가 뛰어 넘었다. 샌슨은 그때까지도 건너지 않고서 넥슨들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하슬러는 낮게 외쳤다.

“건너가!”

샌슨은 심호흡을 크게 하면서 자신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는 화가 난 것이 명백한 태도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제레인트. 건너십시오.”

제레인트는 아까 빠질 뻔한 구덩이를 내려다보더니 눈을 꽉 감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달려오다가 훌쩍 뛰었다. 아니, 뛰려고 했다.

슈우웃!

“허어억!”

갑자기 제레인트는 숨막히는 비명을 지르며 구덩이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아아악!”

비명소리는 레니의 것이었다. 레니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우리는 모두 굳어버렸다. 제레인트의 공포와 경악에 질린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제레인트는 스 르르 아래로 쓰러졌다. 마치 무슨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제레인트는 아래로 사라졌고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 그의 등에 꽂힌 대 거가 눈에 들어왔다.

“제레인트!”

난 몸을 날렸지만 이미 늦었다. 구덩이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검은 어둠이었다. 제레인트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 샌슨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너 이 자식!”

하슬러는 질린 표정으로 자신이 부축하고 있는 넥슨을 바라보았다. 넥슨은 하슬러의 품에 안긴 채로 대거를 던진 자세 그대로였다. 그는 천천히 팔을 내리며 쇠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갈림길의 수호자가 내 뒤를 따라다니는 것은 곤란해.”

“이 개자식아!”

“너도 건너가. 그러지 않으면 레니는 죽는다.”

샌슨은 죽일 듯한 눈으로 넥슨을 바라보다가 우리 쪽으로 뛰었다. 자크는 벌벌 떨면서 우리들과 넥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넥슨은 하슬러의 팔을 밀어내며 뒤로 물 러나 벽에 기대어 섰다.

“하슬러, 바닥을 부숴라.”

하슬러는 무표정하게 걸어오더니 구덩이 반대편에 섰다. 그리고 그는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훌쩍 뛰어올랐다가 그대로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콰아아앙! 구덩이 저쪽편이 붕괴되고 말았다. 돌들이 무너져 아래로 떨어졌다. 하슬러는 몇 번 더 그 짓을 계속했고 우리들은 아무런 일도 못한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침 내 도저히 건너뛰지 못할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어놓은 하슬러는 뒤로 물러났다.

넥슨은 벽에 기대어선 채 고개만 돌려 우리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기억은 안 나지만 정말 날 많이도 괴롭혔을 듯하군. 쫓아오지 마라. 쫓아오면 이 계집애를 죽여버릴 테다.”

그러곤 넥슨은 하슬러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자크는 아직까지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며 우리들과 넥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넥슨은 말했다.

“그 계집애를 업고 따라와.”

자크는 잠시 도전적인 눈으로 넥슨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러지는 않았다. 그는 체념한 얼굴로 레니를 업더니 그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네 명의 모습은 갈림길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 일행들은 그때까지도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못한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다 사라지고 나자 우리들은 아무 말도 없이 구덩이 쪽으로 다가섰다. 모두 들 구덩이 주위에 몰려서서 망연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제레인트, 제레인트! 단순히 재미있을 것 같다고 우릴 따라온 낙천적인 프리스트가,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네리아는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오열했다.

“으흐흐흑! 제레인트!”

칼은 눈을 닦으며 외쳤다.

“슬픔은 평화롭게 그를 되새길 시간을 위해 남겨둡시다. 어서들 갑시다. 넥슨 일행을 뒤쫓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힘없이 몸을 돌렸다. 네리아는 펑펑 울면서 이루릴에게 매달려 있었고 이루릴은 그녀의 어깨를 그러고는 고개를 숙인 채 걸었다. 샌슨은 벽을 쥐어박 았다. 젠장!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이라도 저기서 도로 올라올 것 같은데. 당장이라도 투덜거리면서, 혹은 웃으면서 올라올 것 같은데. 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생각이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함정이었다.

테페리의 프리스트는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길을 걸어간다. 그들은 예언자가 아니다. 다만 현재에 존재하는 두 개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어 남보다 빠르다 는 것뿐이다. 사고나 추리가 필요없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처럼 잘못된 선택일 수도 있다. 신의 뜻에 따라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이 우리와는 다 르지만. 그리고 그는 결국 이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그 스스로 선택한 길에 따라. 하지만 이건 말도 안 돼!

“으흐흐흑!”

네리아의 통곡 소리. 우리는 축 처진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목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것 때문에 입안이 몽땅 녹아버릴 것 같다. 머릿속이 웅웅거리고 귀가 떨어 져 나갈 듯이 뜨겁다. 제레인트, 제레인트!

지하라서 밤인지 낮인지 구분이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우리들은 가혹한 정신적 충격에 지쳐버렸다. 그래서 적당히 넓은 공간이 나오자 모두들 말없이 주저앉았다. 나와 샌슨은 힘없는 동작으로 짐에서 장작을 풀어내었다. 연기에 질식해 버리지나 않을지 걱정이 된다. 하지만 불을 피워보니 연기는 그런 대로 잘 빠져나갔다. 우리 들은 모닥불 주위에 조용히 몰려앉았다.

모두들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헤엑, 헥! 하늘 색깔이 원래 저러했던가?

‘간혹 그렇게 바뀌기도 한대요.’

‘응, 그래? 후욱, 후우우. 어느때?”

‘주로 죽을 때가 가까울 때 그렇대요.’

나는 진저리를 쳤다. 죽을 때가 가까울 때, 죽을 때가 가까울 때라고? 기어코 죽고야 말았군. 기쁜가? 후치 네드발? 넌 정확했어. 그래, 기쁜가? 제기랄! 쿠르릉!

멀리서 울려퍼지는 진동음이 들려왔다. 꽤나 먼 거리인지 희미하게 들려왔다. 네리아는 표독스럽게 외쳤다.

“저 개 같은 새끼! 대미궁을 다 부숴버릴 작정인가!”

칼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거리가 많이 떨어졌나 보오. 빨리 따라가야 할 텐데.”

모두들 말이 없었다. 지금은 일어나 움직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칼도 그러했는지 별말을 하지 않았다. 이루릴이 말했다.

“아래로 내려가서 기다리는 것이 어떨까요.”

“예?”

“넥슨이 대미궁의 어디로 향하겠습니까. 아마 최하층이나, 아니면 중간의 그 거주 구역 어디일 것 같습니다. 어떤 목적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미궁 자체에 어떤 볼일이 있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렇겠군요. 하지만 문제는 넥슨 일행이 과연 제대로 찾아올까 하는 것입니다. 저렇게 길을 부순다고 해서 길을 찾을 수 있을지. 또 문제는 아까의 그 거주 구역과 이 미궁 사이에 연결 통로가 또 있을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네리아는 붉어진 눈을 비비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미궁이니까………….., 통로를 여러 개 만들어놓지는 않았겠지요.”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잠시 휴식한 다음 표시를 따라 돌아 내려가서 기다려보십시다.”

그래서 우리들은 선잠에 빠져들었다. 먼저 샌슨이 불침번을 섰다. 난 모포를 몸에 두르고 불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얼핏 잠이 들려고 할 때마다 멀리서 쿠르 릉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네리아의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완전히 다 부수고 싶은 모양이군, 망할 녀석. 동굴이 무너져서 확 깔려버려라!

다시 한번 우르릉거렸고 네리아는 어김없이 투덜거렸다.

“두더지 녀석! 지칠 줄도 모르는군!”

칼은 불편한 신음소리를 좀 내었다.

“큰일이군. 저렇게 부수고 다니면 정말 위험할 텐데. 동굴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어쩌지.”

“콱 깔려버렸으면 좋겠어요.”

“레니 양은 어쩌고?”

네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젠장, 젠장!

웅크리고 앉은 샌슨의 등 뒤로 벽에는 거대한 그림자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거대한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제가 모험을 성공적으로 끝내면 틀림없이 대미궁의 침범자 제레인트, 혹은 아비스의 승리자 제레인트라고 불릴 겁니다.’

예. 당신은 정말 대미궁의 침범자. 하지만 대미궁이 당신의 무덤이 되었군요.

마지막 햇살이 산봉우리를 비추고

테페리의 집에도 밤이 찾아오면

밝은 눈의 현자 제레인트가

눈을 뜬다. 그의 손엔 술병?

샌슨은 음울하게 킥킥거렸다. 칼은 몸을 돌려 누우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난 천장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입술을 놀렸다.

어느 저녁 여느때처럼 해가 질 무렵

서녘으로부터 불어온 알 수 없는 바람

희망 하나를 위해 달리는 나그네들이

그를 부른다. 제레인트는 일어선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갈림길은 없었고

그의 앞을 가로막는 비극도 없었다.

쾌활하게 웃으며 말을 달렸고

언제나 선두로 출발하지만 항상 뒤처졌지.

인생은 그렇게 멋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인생엔 서사시도 없었지.

하지만 흐르는 시간에 던져진 것은

세월을 멈추는 그의 웃음소리.

드래곤 로드로부터 300년, 묵은 그림자

대미궁의 암흑은 무한을 단속한다.

쾌활한 그의 미소 변함이 없건만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은 없다.

최후의 갈림길을 돌아 들어간 그를

땅이 삼키고 암흑이 뒤덮는다.

웃음은 사라진다. 비탄은 한이 없다.

시간은 흘러 그를 덮는다.

주위가 어지러웠다. 깨어 있는 것인지 잠들어 있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잠들어 있는 쪽인 것 같다. 미궁이 빙빙 도는 것을 보니. 마구 회전하던 미 궁은 곧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모든 곳이 통로고 모든 곳이 벽이었다. 우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제레인트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말했다.

“이쪽이야. 걱정마!”

“이렇게 갈림길이 많은데 어떻게 선택하는 거예요?”

“그거? 어렵지 않지. 이건 제레인트의 선택이야. 하하하.”

그리고 제레인트는 구덩이에 빠져버렸다. 추락하는 제레인트를 보며 네리아는 발을 동동 구르며 웃었다.

“까르르르!”

정신없이 떨어지던 제레인트의 로브 자락에서 갑자기 하얀 날개가 돋아났다. 제레인트는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위로 솟아올랐다. 우리는 가벼운 실망을 느끼며 제레 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우리들을 보며 웃더니 계속해서 날갯짓했다. 우리는 불안감을 느꼈다. 제레인트는 이미 충분히 올라왔다. 그런데도 날갯짓을 계속하고 있었다. 네리아가 갑자기 외쳤다.

“제레인트!”

제레인트는 우릴 돌아보며 하얗게 웃었다. 갑자기 동굴 천장이 쫘악 갈라지며 눈부신 빛이 아래로 쏟아졌다. 우리는 모두 눈이 부셔서 위를 바라보지도 못했다. 하지 만 제레인트는 마치 햇살에 이끌리듯 점점 속력을 더해가며 위로 위로 솟아올랐다. 난 고함을 질렀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돌아와요, 제레인트!”

그러나 제레인트는 여전히 맑은 웃음만 흩뿌리며 솟아올랐다. 햇살은 완전히 미쳐버렸다. 점점 강해지는 햇살은 제멋대로 춤을 추었다. 그러나 난 볼 수 있었다. 그 하늘 위, 제레인트의 머리 위에 팬텀 스티드를 탄 수십 명의 넥슨이 기다리는 것을. 제레인트는 아래를 내려다보느라 넥슨들을 보지 못했다.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제레인트!”

그리고 수십 명의 넥슨은 제레인트를 붙잡아 태양 속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제레인트의 날개에 불이 붙었고 그의 로브에 불이 붙었다. 제레인트는 온몸이 불에 휩싸 인 채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마치 유성처럼 기다란 꼬리를 이끌며 제레인트는 떨어졌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드래곤이 입을 쩍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난 고함을 질 렀다.

“제레인트!”

“뭐, 뭐야? 제레인트가 어디 있어?”

정신을 차려보니 난 벽에 기대어앉은 채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불길이 사그라들고 있는지 주위는 컴컴했고 샌슨은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졸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난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코끝이 찡해왔고, 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샌슨은 눈을 비비더니 말했다.

“꿈을 꿨군?”

“으응………, 그래. 꿈이었어.”

샌슨은 기지개를 펴더니 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불길이 확 살아나며 샌슨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벽에는 샌슨의 거대한 그림자가 그려졌다. 나 는 어지러운 눈으로 그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샌슨은 모닥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꿈이었는데?”

“여느때처럼, 말도 안 되는 꿈이지. 뭐.”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불길을 잡으면서 말했다.

“이제 일어나야겠군. 시간이 많이 지났어. 모두들 깨워.”

다시 무거운 걸음을 계속했다. 우리는 표시해 둔 길을 따라 되짚어 걸었다. 표시를 찾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샌슨과 네리아는 말다툼을 일으켰으며 칼

은 깊은 한숨을 토했다. 네리아는 쉴새없이 짜증을 부렸고 샌슨은 쉴새없이 투덜거렸다. 우리는 표시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걸어가다가 몇 번이나 되짚어 돌아와야 했다. 심지어는 표식이 있는데도 표식을 믿지 않고 우리들의 기억에 따라 걸어가려다가 낭패를 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간혹 멀리서, 혹은 어쩌다가 가까이서 동굴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네리아는 반드시 저주의 말들을 외쳤으며 마침내 샌슨은 네리아를 저주하게 되었다. 그러한 일들을 겪으며 걷는 상태인지라 다시 거주 구역으로 내려가는 긴 계단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는 이루릴을 제외한 모두가 지쳐빠진 상태였다.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바닥에 이르자 칼은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는 것이 좋겠지?”

샌슨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음, 저기 복도 옆에 있는 방에서 기다리도록 하지요. 방 안에서 계단을 감시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녀석들이 우리 방 앞을 지나가면 뒤에서 살그머니 나와서 덮치 는 겁니다.”

“그러도록 하세나. 조용히 감시하는 것은 모두들 입을 다무는 데도 도움이 되겠지.”

칼의 말에 네리아와 샌슨은 입을 다물었다.

이 대미궁 안에서는 횃불만 끄면 곧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온다. 이루릴 같은 엘프나 박쥐가 아니라면 아무도 우리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횃불을 끄 고 복도를 감시할 준비를 갖추었다. 모두들 자리를 잡은 다음 마지막으로 내가 횃불을 끌려고 했을 때였다.

그때 다시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리아는 발작적으로 ‘윽!’ 하는 소리를 내었지만 투덜거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루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을 끄지 마세요, 후치.”

“예?”

“이 소리, 방향이 이상하군요.”

“방향이 이상해요?”

“네. 아무래도………… 이 층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넥슨은 이미 거주 구역에 내려와 있습니다.”

“뭐요?”

칼은 황급히 일어났다. 우리들은 모두 방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샌슨은 다시 롱소드를 뽑아들었고 나도 횃불을 왼손으로 옮기며 바스타드를 뽑아들었다. 이루릴은 방향을 잡으며 말했다.

“저쪽! 저쪽 방향이었어요. 가지요.”

이루릴은 스르르 움직여나갔다. 칼은 안타까운 소리를 질렀다.

“이런! 벌써 내려오다니, 우릴 앞질렀나?”

달려가며 네리아도 말했다.

“그런 흔적 없었어요! 녀석, 틀림없이 바닥을 부수고 내려온 걸 거예요!”

“맙소사! 그 생각을 못했군.”

다시 우르르릉! 이번엔 나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우리와 같은 층이었다. 동굴을 울리는 충격이 발바닥에 바로 느껴졌다. 우리는 황급히 달 려갔다. 횃불 빛이 어지럽게 흔들렸고 탁탁거리는 우리들의 발자국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복도의 벽을 휙휙 지나치는 우리 그림자가 어지러웠다.

통로는 죽 곧았으며 우리는 어느새 최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까지 돌아와 있었다. 샌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세 갈래 길이며 넥슨이 지하로 내려가려면 이 곳으로 와야 할 것이다. 샌슨은 바로 옆의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모두들 저기로!”

우리는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후치! 불을 꺼!”

급한 나머지 횃불을 바닥에 던지고 밟아버렸다. 삽시간에 무서운 어둠이 다가왔고 망막에 희뿌옇게 남아 있던 다른 사람의 모습이 어지러웠다. 난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떴다. 하지만 내가 도대체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난 손을 옆으로 뻗어 간신히 벽을 짚었다. 어둠 속에서 샌슨의 숨가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조용히! 녀석들이 다가오면 불빛이 보일 겁니다. 녀석이 최하층으로 내려가려면 틀림없이 저 계단을 지나쳐야 할 테니까.”

네리아의 목소리.

“확실히 최하층으로 내려갈까? 혹시 거주 구역에 볼일이 있는 거 아닐까?”

“아니오, 네리아 양. 대충 둘러보았지만 거주 구역은 모두 황폐화되어 있었소. 그러니 그곳엔…….”

칼은 말을 맺지 못했다. 갑자기 발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저벅저벅저벅.

나는 숨을 죽이며 발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에 집중했다. 캄캄한 어둠 속이라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였고 그 상태에서 다른 곳에 정신을 집중하려니 몸이 흔들 려왔다. 그때 눈앞에 미세한 빛이 느껴졌다. 앞쪽에서 사각형의 빛이 조용히 떠오른 것이다. 문 쪽이었다.

샌슨은 희미하게 말했다.

“이쪽으로 오고 있다.”

그 빛이 보이며 간신히 똑바로 설 수는 있었다. 우리는 방문 옆에 몰려섰다. 앞쪽의 빛이 점점 강해지며 발소리도 점점 강해졌다. 우리는 침을 삼키며 앞쪽을 주시했 다.

저벅저벅저벅.

그리고 느닷없이 넥슨의 모습이 나타났다.

넥슨의 옆얼굴은 귀신 같았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무서운 표정을 떠올린 채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칼의 화살에 맞은 것 때문에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는 모양이 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뒤이어 하슬러가 횃불을 든 채 따라왔고 그 뒤로 자크가 레니의 어깨를 붙잡은 채 뒤따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방문 앞을 지나치려 했고 그 동안 우리는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넥슨이 멈춰 서자 나는 기절할 뻔했다.

“계단이로군. 좋아.”

넥슨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본 것이다. 그러자 뒤에 있던 하슬러가 탐탁찮은 어조로 말했다.

“정말 저 아래로 내려가실 생각이십니까?”

“이제 와서야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간다는 것은 말도 안 돼.”

“이 아래엔 드래곤 로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내가 찾는 그것도 있을 거야.”

넥슨의 모습은 반쯤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하슬러의 모습은 잘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서는 자크가 불안한 얼굴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자크의 손에 잡혀 있는 레니는 초췌하고 힘없어 보였다.

갑자기 레니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난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레니는 멍한 얼굴로 우리들이 숨어 있는 방을 쳐다보았다. 우리를 본 것인가? 안 돼! 지금 들키면 구출 계획이고 뭐고 끝이야! 그때 자크가 말했다.

“뭘 보는 거야?”

레니는 별 표정이 없었다. 그녀는 잠시 의아한 얼굴로 방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곧 다시 그녀의 고개가 힘없이 아래로 꺾였다. 가슴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넥슨에게 들릴 것 같았다. 우화, 정신없어! 자크는 의아한 얼굴로 우리들이 숨어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뭘 본 거야, 레니?”

레니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때 넥슨이 말했다.

“과거의 망령이라도 보았겠지. 핸드레이크의 망령인가? 꾸물거릴 시간이 없어. 가자!”

그리고 다시 네 명의 모습은 사라졌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리며 잠시 후 문 쪽은 다시 캄캄해졌다. 나는 암흑 속 곳곳에서 들려오는 긴 한숨소리를 들었다. 이루릴이 조용히 캐스트를 시작했다. 잠시 후 허공에선 윌로위스프가 떠올랐으며 나는 이마의 땀을 닦거나 하는 우리 일행들을 볼 수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찾고 있는 거지?”

칼의 말에 샌슨이 대답했다.

“살금살금 뒤를 따라가지요. 그리고 붙잡아서 레니 양도 구출하고 칼의 의문도 풀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릴 텐데. 좀더 기다리세. 놈들이 아래의 중앙 폭포 근처까지 내려가면 우리 발소리를 못 들을 거야.”

칼의 신중론이었다.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인질이 있으니………….

이루릴이 말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슬리프를 사용해 보겠습니다.”

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안 됩니다. 세레니얼 양이 안 계실 때 아프나이델이 저들과 싸운 적이 있습니다. 슬리프 주문은 거의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요. 음. 칼과 제가 각자 한 명씩을 저격할 수 있을 텐데요. 칼, 하슬러를 저격하실 수 있겠지요?”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루릴은 말했다.

“네. 그러면 제가 매직 미사일로 자크라는 그 청년을 저격하겠습니다. 자크를 완전히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때 나머지 분들이 달려가서 레니 양을 구출하며 동시에 넥슨을 저지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는 조금 전 상처를 입었으니 동작이 빠르지는 못할 겁니다.”

“위태로운 작전이지만 할 수 없군요. 갑시다!”

우리는 방을 나왔다. 이미 그들은 중앙 폭포 부근까지는 내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선 할 수 없이 윌로위스프의 빛이 필요했다. 제레인트의 복수다. 넥슨.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난 바스타드를 힘 있게 쥐었다.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아. 난 네 녀석을 죽이지는 않 겠어. 제레인트가 그것을 원할 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네 녀석의 입에서 제레인트에 대한 사과의 말을 들어내고야 말겠다! 그의 죽음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게 만들 겠어!

중앙 폭포의 물소리가 다시 거세지자 이루릴은 윌로위스프를 돌려보냈다. 우리는 벽을 짚은 채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캄캄한 어둠 속이라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옆 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는 몸을 통째로 집어삼킬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를 걷어차거나 하면서 힘겹게 내려갔다.

마지막 계단을 돌아내려오자 우리 눈앞에 빛나는 물살이 보였다. 콰콰콰콰콰.

넥슨! 여기 있구나! 넥슨 일행에게서 나오는 불빛인 모양이다. 그리고 그 불빛 때문에 폭포의 물살은 빛의 장막처럼 보였다. 우리는 조용히 폭포 뒤에서 고개를 내밀 었다. 하슬러, 우리들을 끈질기고 지독한 녀석들이라고 말했던가? 그래. 우리는 다시 여기까지 쫓아왔어. 잠시만 기다려라!

멀리서 움직이는 횃불이 보였다. 이 넓은 공간에는 장애물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넥슨 일행은 우리들이 들어온 방향의 반 대쪽, 그러니까 지금 우리들이 보았을 때 오른쪽 반원 지대에 가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오른쪽 첫 번째 통로에서 나오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몸을 가릴 마땅한 장소 가 없어 폭포 뒤에 몸을 숨겼다. 휘우듬하게 굽은 호수 옆의 길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모습은 간신히 보였다. 그때 이루릴이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문이야?”

우리는 놀라서 이루릴을 바라보다가 곧 그녀가 넥슨 일행의 말을 전달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단하군! 이루릴은 폭포 바로 뒤의 이곳에서 저쪽에 있는 넥슨 일행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이루릴은 계속 말했다.

“부술 수도 없고 열 수도 없어!’ ‘젠장, 이건 또 뭐야? 파괴? 파괴할 수도 없는 문인데 뭐가 파괴란 말이야?”.”

칼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저 방은 검과 파괴의 레티의 방인 모양이군.”

폭포 소리 때문에 칼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이루릴은 계속해서 말했다.

“파괴라는 것이 약속어가 아닐까요..”

““그래? 음. 다시 들어가 보자..”

그리고 그들은 다시 통로로 들어갔다. 칼은 활을 꺼내었다.

“좋아. 됐어. 세레니얼 양. 녀석들이 나와서 두 번째 통로로 걸어갈 때 쏘도록 합시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달려갈 준비를 하시오.”

“알겠습니다.”

나와 샌슨, 그리고 네리아는 앞쪽에 일렬로 서서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대기했다. 네리아의 이를 가는 소리가 폭포 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복수야! 바이서스 임펠의 그 아이와, 그날 밤의 시민들, 그리고 델하파에서 죽은 자들, 밤의 신사들과, 젠장! 너무 많아서 이름도 다 못 대겠어.” “그리고 제레인트의 복수다.”

샌슨 역시 사납게 말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바스타드를 세게 쥐었다. 손잡이에 감아둔 가죽끈이 손바닥에 달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캄캄한 허공 속 에서 앞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에선 칼과 이루릴이 서서 준비를 했다. 칼이 활에 화살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루릴은 아마도 캐스트를 준비하는 것인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잠시 후 다시 불빛이 보이며 녀석들이 걸어나왔다. 이루릴이 말을 전해 주지 않아서 알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빨리 나온 것이라든지 횃불 빛에 비친 그들의 모습을 보자 문을 열지 못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넥슨은 뭔가 분명히 불평을 토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옆엔 하슬러가 묵묵히 서 있었고 자크와 레니는 조금 떨어진 위치에 서서 둘을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었 다. 넥슨이 몸을 휙 돌렸고 그러자 나머지들도 그 뒤를 따랐다. 그때 칼이 고함을 질렀다. 저들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폭포 소리를 뚫고 우리들에게는 들릴 정도로.

“지금이다!”

태앵! 화살은 급격히 튀어나와 불빛을 향해 야수처럼 날아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네 개의 빛화살이 튀어나갔다. 물 위를 날아가는 화살들의 광포한 비행이 횃불 빛 에 번뜩거렸다. 이루릴이 쏜 매직 미사일은 검은 허공에 긴 선을 그어대었다. 쾅쾅쾅! 자크가 매직 미사일에 맞아 나가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꺄아악!”

레니의 비명소리. 그 순간 우리 셋은 앞으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각오해라! 넥슨!”

“죽인다!”

하슬러가 펄쩍 뛰는 것이 보였다. 칼의 화살에 맞은 모양이다. 하슬러가 쓰러지면서 그가 들고 있던 횃불이 물 속에 떨어져버렸다. 삽시간에 주위는 다시 어두워졌 다. 으악! 제기랄! 이걸 생각 못했잖아!

우리들은 욕지거리를 뱉으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나는 벽을 짚은 다음 한 손을 벽에 댄 채 달려갔다. 그러나 곧 앞에서 달려가던 샌슨과 엉켜버리고 말았다. 빌어먹 을! 샌슨과 나는 조금만 몸을 잘못 놀리면 곧 호수에 빠진다는 것을 알았기에 몸부림을 치지도 못했다. 퍼억! 윽. 네리아가 우리들에게 걸린 모양이다. 네리아는 헐떡 거리며 고함을 질렀다.

“멍청이들! 어디서 뒹굴고 있는 거야!”

“그 입을 조심하지 않으면 너부터, 크억! 어딜 밟아!”

“제발, 제발 먼저 일어나고 싸워! 머리가 비었어!”

우리 세 명은 쓰러진 채 버둥거리며 서로들과 자신을 향해 동시에 욕을 퍼부어댔다. 그리고 곧 뒤에선 이루릴이 외쳤다. 윌로위스프의 빛이 호수 위에 떠올랐다. 다시 주위가 밝아지면서 우리는 간신히 일어났다. 젠장! 작전 실패다. 불빛을 생각하지 못하다니. 그리고 다시 시야가 밝아지자 넥슨은 비틀거렸다. 하지만 곧 그는 험악한 얼굴로 레니를 붙잡으려 들었다.

“안 돼!”

“달아나, 레니!”

“꺄아아아아!”

레니는 비명을 지르며 앉은 채로 뒤로 물러났다. 넥슨은 그녀를 덮치려고 했지만 레니는 아슬아슬하게 피한 다음 다시 일어나서 비명을 지르며 우리들에게로 달려왔 다. 그리고 우리들도 허겁지겁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난 넥슨이 롱소드를 뒤로 당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 자식! 던지려고!

“레니! 엎드려!”

샌슨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공포에 질려버린 레니는 샌슨의 말을 듣고는 오히려 멈춰 서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멍청하게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제기랄, 안 돼! 넥슨은 발악 같은 고함을 질렀다.

“이 지독한 놈들! 너희들에게 넘겨주진 않는다!”

펑펑펑펑펑!

갑자기 대미궁 전체가 진동했다. 우리들은 제대로 서지 못하고는 황급히 주저앉았다. 자칫하다간 저 검은 호수에 빠져들 지경이었다. 그때 칼이 비명을 질렀다. “호수가!”

호수에서 물이 솟구쳐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곧 호수 중심부의 물이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곧 호수 전체는 거대한 소용돌이로 바뀌고 말았다. 우리는 시야를 어지럽 히는 빛에 눈을 들어올렸다.

사방의 거대한 벽에 쌓여 있는 무수한 종유석들이 제각기의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깊은 바위틈으로부터 청록색, 푸른색, 그리고 밝은 갈색의 빛이 뿜어나왔다. 어 지러웠다. 종유석들은 마치 거대한 쇳조각들을 가득 달아맨 것처럼 빛을 뿜었다. 그리고 역시 바람에 서로 부딪히는 쇳조각들의 소리처럼 맑고 경쾌한 소리가 울렸 다. 딸그랑그랑. 동굴 전체가 기이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 얼굴 모두가 형형색색으로 물들었다.

종유석들에서 빛이 튀어나왔다. 마치 바람에 휩쓸리는 낙엽처럼 동굴 전체엔 빛들이 무리지어 춤을 추었다. 중앙의 호수는 매섭게 회전하며 거대한 물소리를 만들어 내었고 그 위론 종유석들이 수천 개의 방울들처럼 딸랑거리고 있었다. 그 울림소리가 깊어짐에 따라 점점 많은 빛발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가을의 낙엽들처럼, 여름날의 소나기처럼 무수한 빛의 포말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노란색, 하얀색, 청백색의 빛방울들. 그리고 소용돌이를 만들어낸 바람이 허 공의 빛무리들을 춤추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바람도 불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보았다.

그 빛의 포말들 속으로 과거의 얼굴들이 지나가는 것을. 힘센 전사의 당당한 어깨가 보였다. 즐거워 노래 부르는 청년의 모습, 그리고 고뇌에 잠긴 노인의 모습, 울부 짖으며 전장을 달려가는 전사의 피묻은 검이 번득였다.

긴 밤을 지새우고 마침내 떠오른 태양을 바라보는 자의 피로한 얼굴이 보였다. 형제의 주검 앞에 오열하는 자의 모습이 보였다. 고귀한 얼굴, 슬픔에 잠긴 얼굴, 교활 한 얼굴, 비통한 얼굴, 기쁨에 날뛰는 얼굴, 비장한 얼굴들이 있었다. 어떤 것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도 있었다. 희미한 과거의 음영. 단지 과거로부터 여기에 투영 되는 그림자들처럼.

그리고 그곳엔 울음소리, 전장의 말발굽 소리, 달리는 전차의 소리,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겨울 아침 창가에 맺힌 서리를 닦아내는 소리, 여름날 대지를 두드리 는 소나기 소리. 봄을 찬미하는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왔고 쓸쓸한 가을 벌판의 쟁기질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난 그것을 정확히 보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본 것은 그저 허공에 마구 반사되는 빛무리뿐이었을지도. 내가 들은 것은 거세게 소용돌이치는 물소리였 을지도.

그리고 주위가 하얗게, 혹은 완전히 검게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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