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5권 – 제9부 :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 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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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라자 5권 – 제9부 :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 9화

9

“아니, 그렇진 않아요.”

“그래? 그럼 어떻게 되었는가?”

“예. 우리들 중엔 엘프가 있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 목소리는 기억에 있는데.

“흐음. 그래서?”

이 목소리는 처음 듣는군, 누구지? 다시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엘프 이루릴이 저에게 간절히 부탁했지요. ‘제발! 진실한 길을 따르는 용맹한 프리스트여, 악의 힘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

이루릴이 저런 목소리는 아니었는데?

“흐음. 그래서?”

“전 품속에서 디바인 마크를 꺼내어들었지요. 우리의 일행은 처절한 공포의 암흑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듯이 절 바라보았습니다. 물론 전 겸허히 테페리의 뜻 을 따랐을 뿐입니다만. 어쨌든 전 외쳤지요. ‘우둔의 권능, 질병의 권능이여! 내 앞에 그 검은 손을 치워라! 난 이런 모욕을 참을 수 없노라!.”

“허허허…………. 대단했겠군.”

“예. 그래서 우리 일행은 저의 보호 아래 생존자의 수색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더 중요한 것은 생존자의 수색이 아니었지요. 샌슨은 강인한 전사답게, 아, 이 강인하다는 의미를 잘 헤아리셔야 되겠군요, 어쨌든 그는 생존자를 수색하자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힘 앞에 평정을 되찾은 엘프 이루릴은 상황을 올바 로 직시할 수 있었지요. 저야 프리스트였으니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 세이크리드 랜드를 해소시킨다면 모든 것이 원래로 돌아갈 것이라는 그 단순한 사실 말입니다.” “오호라! 그랬겠군?”

왠지 슬금슬금 화가 나려고 하는데?

“예. 저는 일행을 이끌어 세이크리드 랜드의 원인, 질병의 권능이 춤추게 만든 그 아티팩트가 묻힌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도시의 시민들은 픽픽 쓰러지 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애끓는 비명을 지르며 저에게 치료를 갈구했습니다.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더군요.”

“음. 이해가 가네.”

“예. 제가 영웅이라고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저는 눈앞의 작은 일에 매달리는 범부는 아니라 자신합니다. 저의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만 슬픔을 삭이 며 생각했지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시겠습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치료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차라리 한시라도 빨리 세이 크리드 랜드를 해소시키는 것이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길이다!”

“음, 그렇지. 눈앞의 일에 발목이 잡히지 않는 자는 진실로 영웅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 말할 수 있겠지.”

“하하하. 과찬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전 슬픔을 가슴에 묻어두고는 우리 일행을 다그쳐………….”

장황한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물론 계속해서 나나 다른 일행들의 이야기는 최소화되거나 건너뛰었고 오로지 한 사람의 업적만이 눈부시게 빛나고 터무니없이 과장 되었다. 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제레인트! 제발! 나 이미 정신차렸는데 다시 기절하겠다고요!”

자리에서 일어서자 주위가 한눈에 들어왔다.

내가 쓰러져 있던 장소는 대리석으로 된 바닥이었고 주위는 물속인 듯했다. 머리 위에서는 밝은 빛이 물살의 일렁거림에 따라 흔들리며 아래로 스며내려오고 있었 다. 주위를 빙글 돌면서 얕은 계단이 세 단 놓여 있고 그 위로 기둥들이 서 있었는데, 기둥 외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물은 거기서 더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 일 행들은 이 얕은 접시처럼 생긴 공간의 가장 아래쪽 바닥에 이리저리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우리 배낭들도 모두 주위에 흩어져 있었다.

주위는 따스했다. 아니, 지금껏 추운 땅굴 속을 돌아다니고 있었기에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이 공간은 지나치게 춥지도, 지나치게 덥지도 않은 그야말로 적당 한 온도였다. 공기 중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약간 떨어진 곳의 계단엔 웬 늙은이 하나가 앉아 있었다. 하얀색 로브를 입고 흰 수염을 늘어뜨린 백발 늙은이였는데 도대체 나이가 얼마나 될지 짐작도 되지 않았 다. 얼굴 가득한 주름살이라든지 가슴을 온통 뒤덮는 수염과 백발로 미루어보아서는 꽤나 나이가 많을 듯했다. 하지만 떡 벌어진 어깨와 훌륭한 체격은 중년의 그것 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늙은이의 옆에는 지금껏 내 복장을 뒤집고 있던 사나이, 제레인트가 계단에 앉아 있었다.

나는 말도 못한 채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쓰러져 있던 샌슨이 몸을 부스스 일으켰다. 그는 멍한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다가 나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난 말이야. 지금껏 아주 고약한 환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제레인트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꿈속이니까 웃거나 말을 꺼내는 그런 일이 안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후치 넌 말을 하네? 이거 환상이 아니야?”

난 그 대답을 아주 이상하게 해버렸다.

“제레인트! 내가 죽었어요, 당신이 살았어요?”

제레인트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테페리의 권능도 필요없는 질문이군. 하하하! 물론 자네는 살아 있지.”

“그럼 당신도 살아 있는 거예요?”

“확실히 그렇다고 말해 줄 수 있지.”

샌슨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럼 당신을 확실히 죽일 수가 있군! 우리 속을 몽땅 뒤집어놓고, 너무 울어서 숨이 막히게 해놓고는 뭣이 어쩌고 어째? 강인하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라고!”

제레인트는 멋쩍게 히죽 웃었고 그러자 그 옆의 늙은이는 기분 좋은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샌슨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칼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앞의 상황이 잘 이 해되지 않는 듯 멍청한 얼굴로 우리들을 둘러보았다. 그때 네리아가 외쳤다.

“제레인트! 제레인트! 살아 있었어요?”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군요. 하하하.”

“정말 살아 있는 거예요?”

제레인트는 일어나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네리아는 벌떡 일어서더니 제레인트의 어깨를 붙잡더니 뒤로 휙 돌려버렸다. 제레인트는 난처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 고, 우리들은 그의 등에 아무런 상처도 없는 것을, 정확하게는 로브에 아무런 자국이 없는 것을 발견했다. 네리아는 제레인트의 등을 만지작거리며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 아파요?”

뒤에 생각해 보니 어째 좀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그때는 아무도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제레인트가 얼빠진 웃음을 지었을 뿐이다. 그때 이루릴이 천천 히 일어나며 말했다.

“제레인트. 살아 있었군요.”

이루릴의 그 말은 마치 우리들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마지막 확인처럼 들렸다. 우리는 그제야 웃음을, 혹은 울음을 터뜨리며 제레인트를 껴안았다. 제레인트는 이사 람 저사람에게 끌려다니고 포옹당하고 키스당하며 제정신을 못 차렸다. 샌슨은 그를 아주 과격하게 흔들어댔고 네리아는 열렬히 그의 뺨에 키스해 주었다. 칼은 눈물 을 쏟을 듯한 얼굴로 그를 포옹했고 이루릴은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으며 난 눈을 닦은 다음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야기 아주 멋지던데요? 하지만 살아 있으니 화내진 않겠어요. 하하하!”

제레인트는 계속 뒤통수만 긁어대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까지 우리의 해후 장면을 보면서 미소를 띠고 있던 노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루릴이 먼저 말했다. “제레인트. 여기는 어디죠? 그리고 저분은?”

“아, 그래요. 제레인트! 레니는 어디 있지요? 넥슨은, 다른 녀석들은? 여기는 도대체 어디지요?”

샌슨도 다급하게 물었고 그러자 제레인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 그는 노인에게 목례를 하며 말했다.

“아, 이런 실례가 소개하지요. 저분이 절 치료해 주셨습니다.”

칼은 붉은 눈을 닦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 구덩이에서 어떻게………….”

제레인트는 곧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 예. 구덩이로 정신없이 떨어지는데, 그건 정말 악몽 같은 기억이었습니다. 음. 등에서부터 느껴지는 고통보다는 끝없이 추락하는 것이 더 떨리더군요. 그런 무 한히 계속되는 추락 끝에 마침내 저는………….”

“여기가 어디냐는 것과 저분이 누구시냐는 말은 언제쯤 듣게 되지요, 제레인트?”

내 말에 제레인트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제레인트는 말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여기는 중앙 호수의 아랫부분입니다.”

칼은 놀란 눈으로 말했다.

“호수 아래라구요?”

“예. 그리고 저분은 이곳의 주인이시지요.”

아무래도 칼보다는 내가 더 입이 큰 모양이다. 내가 더 입을 크게 벌렸으니까. 샌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벼락을 맞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칼은 말했다.

“그, 그, 그럼 저, 저분이 바로…….”

“드래곤 로드이십니다.”

“꺄아아아악!”

네리아의 비명소리. 우리는 아무래도 드래곤 로드에게 예의 바르다는 평가는 받지 못하겠는걸.

드래곤 로드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희미한 미소만 띠고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뒤로 물러났다. 샌슨의 손을 보니 불안하게시리 칼자루 근처에서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나처럼 검을 뽑아들 용기는 없는 모양이다. 네리아는 칼의 뒤에 숨어버렸다. 그러나 칼과 이루릴은 꼼짝도 하지 않았 다. 그런데 그 표정은 대조적이었다. 칼은 커다란 감동이 묻어나는 얼굴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루릴은 별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잠시 말이 없어졌다. 우리는 그저 숨을 죽인 채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몰라 주춤거렸다. 그때 이루릴이 목례하면서 말했다.

“이루릴 세레니얼이 영광스러운 드래곤 로드를 뵙습니다.”

드래곤 로드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숲의 딸을 만나게 되어 반갑군.”

그러자 칼도 천천히 말했다.

“칼 헬턴트입니다. 허락없이 대미궁에 들어온 불청객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집을 오래 비워두어 손님맞이가 적절치 못했음을 사과하지.”

샌슨은 침을 꿀꺽꿀꺽 삼키면서 말했다.

“샌슨 퍼시발입니다.”

드래곤 로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깊은 눈이 날 바라보았고 난 덜덜 떨면서 말했다.

“후치, 후치 네드발입니다.”

“반갑군. 후치.”

네리아는 그때까지도 칼의 등 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칼이 고개를 돌려 네리아에게 눈짓을 보내자 네리아는 하얗게 된 얼굴로 말했다.

“네, 네리아에요. 절대로! 절대로 보석 하나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어요! 모두 다 제자리에 두고 한 알도 건드리지 않았어요. 예. 그래요!” 드래곤 로드는 빙긋이 웃었다.

“손님의 예를 아는 자는 좋은 대접을 기대할 수 있을 테지.”

그리고 드래곤 로드는 다시 계단에 앉았다. 우리들은 그 앞에 도열한 채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드래곤 로드는 천천히 말했다.

“앉게나. 좋은 자리는 아니겠지만. 올려다보고 말할 순 없네.”

그러자 이루릴은 살포시 웃더니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따라 바닥에 앉았다. 다만 네리아는 조금 떨어져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곧 울상이 되었다. 사방 벽이 모조리 물인데 어디로 달아날 수 있나. 그녀는 체념한 표정으로 칼의 등 뒤에 앉았다.

드래곤 로드는 편안한 자세로 계단에 앉아서는 말했다.

“그래, 이곳엔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는가. 이곳이 나의 집인 것은 알 텐데. 제레인트의 기지 넘치는 이야기는 잘 들었네만 그의 이야기하는 방식은 정보를 전달하는 데 있어선 적합하지 않더군.”

우리는 머뭇거리며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천천히 말했다.

“우리는 납치당한 어떤 소녀를 되찾기 위해서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그 소녀의 납치자가 이곳으로 들어왔기에 어쩔 수 없이 따라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가. 그 대가로 목숨을 잃어도 말인가.”

칼은 움찔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드래곤 로드는 칼을 직시하며 말했다.

“이곳은 나의 집이고 자네들에게 허락된 공간은 아닐세. 난 허락한 기억이 없네.”

칼은 천천히, 그러나 설령 드래곤 로드 앞이라고 해서 칼 헬턴트의 일부분이라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태도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희들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무력한 소녀가 시시각각 저희들로부터 멀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선 지금 밟고 있는 땅이 주인 있는 정원인지 거친 불모 지인지 파악하고 있을 겨를이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질문할 사람도 없고 말입니다. 그러니 달리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닐시언 전하를 접견할 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이유가 뭘까. 고개를 돌려보니 샌슨이 뭐라고 웅얼거리고 있었다. 입모양을 자세히 보니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드래곤 의 저녁 식사.’ 네리아는 쉴새없이 칼의 허리를 찔러대고 있었는데 딴에는 들키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는 뜻이 있어 보였지만 그 동작은 너무 잘 보였다.

드래곤 로드는 빙긋이 웃었다.

“바이서스의 핏줄인가?”

“그렇습니다.”

“자네들은 항상 자신들이 달리는 땅의 주인을 알아보는 데 게으르군.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군.”

칼은 입술을 적시고는 말했다.

“상황이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지?”

“루트에리노 대왕께서는 당신과 대결하여 이 땅에 보다 어울리는 주인을 명확히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당신께서 그 이전에 주인이었을지는 모르지만 당신은 패배 했으며 그 패배에 대한 대가를 부정하셔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자신의 것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드래곤 로드의 눈이 번쩍거렸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온건했다.

“그 간악한 녀석의 지혜를 찬양하고 싶은가?”

“간악한 녀석이라면……………”

“핸드레이크가 날 패퇴시켰음을 나에게 다시 인식시켜 주고 싶은 건가?”

“그럴 마음은 없습니다. 설마 그의 일을 잊으셨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당신의 패배도.”

칼은 차분하게 말했고 샌슨은 이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드래곤의 디저트.” 네리아는 곧장이라도 울 듯한 얼굴이었고 제레인트는 드래곤 로드와 칼을 번갈아 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 로드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칼을 바라보며 말했다.

“잊지 않았네. 나는 잊을 수가 없는 존재지.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축복은 오로지 너희 종족에게만 있을 뿐이지.”

“그렇습니다.”

칼은 별로 자랑하는 기색도 없이, 그러나 겸양하는 기색도 없이 차분하게 말했다. 드래곤 로드는 칼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선택하게.”

칼은 맑은 눈으로 드래곤 로드를 마주보며 말했다.

“무엇을 선택해야 됩니까.”

“난 자네의 말 중 일부를 받아들이겠네. 자네에겐 이 카르엔 드래고니안에 주인이 있는지 물어볼 시간도 없었거니와 알아볼 수도 없었다는 말에 동의하지. 아마 자 넨 이곳이 나의 집이라는 것은 짐작했겠지만 그것에 관해선 말하지 않겠네.”

드래곤 로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평온한 눈으로 우리들을 내려보았지만 우리들은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이제 자넨 이곳의 주인인 내가 여기 있음을 두 눈으로 보았어. 부정할 수 없겠지.”

“그렇습니다.”

드래곤 로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카르엔 드래고니안의 불청객이며, 따라서 나에겐 자네에 대한 정당한 추방 명령이 가능하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겠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명령할 테니 선택하게. 이곳에서 지금 당장 나갈 것을 명하니, 명령을 받아들이겠는가?”

칼은 천천히 일어났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방의 벽에선 빛을 모두 갈라놓는 부드러운 물의 출렁임. 그리고 이 푸르고 밝은 빛들. 대리석들의 하얀 빛은 눈을 시리게 만들 정도였다. 그리고 눈앞엔 3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인간의 앞에 나타난 절대의 드래곤 로드가 엄격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장대한 체구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위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돌덩어리 같았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고 아무런 생명이 느껴지지 않은 채 그곳에 다만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엔 한 인간, 칼이 서 있었다. 그러나 칼은 왜소하지 않았다. 그는 꼿꼿이 선 채로 드래곤 로드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의 체구는 그대로였고 중년의 세월 이 더해진 칼의 어깨는 축 처져 있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굽힐 수 없는 소나무처럼 서서 드래곤 로드를 마주보았다.

“전 따르지 않겠습니다.”

“나의 정당한 권리를 부정하는 것인가?”

“저의 마음이 이끄는 길을 가로막는 이상 당신의 권리를 부정합니다.”

“자네의 마음은 무엇으로 자네를 이끄는가?”

“저희들이 레니라고 부르는 소녀를 구출하여 나가기를 원합니다.”

“그것 때문에 날 부정하겠다는 것인가? 자네들의 두루마리를 단번에 종말지을 수 있는 나에게?”

드래곤 로드의 말에서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위가 말해도 지금의 드래곤 로드보다는 더 생동감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칼은 갑자기 피로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에 나타난 변화는 급격했다. 그는 갑자기 나이를 먹는 것 같았고, 그의 얼굴에 갑자기 급격한 세월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 빠르면서도 급격한 흐름이 멋자 그는 놀랍게도 드래곤 로드와 같은 연배로 보였다. 우리는 숨죽여 그들을 바라보았다. 드래곤과 인간을.

칼의 입이 힘없이 열렸다.

“날 데리고 장난치지 마라. 드래곤.”

네리아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나는 네리아를 안았다. 네리아의 몸은 가벼웠지만 내 팔이 너무 심하게 떨려서 그녀를 놓칠 뻔했다. 제레인트가 황급히 나를 도왔다. 나와 제레인트는 그녀를 부축한 채로 일어났다. 그리고 샌슨과 이루릴도 모두 일어났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난다고 도대체 뭐가 바뀌는가? 우리들이 이렇게 드래곤 로드에게 대항하듯이 주욱 늘어 서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이지? 이건 차라리 저녁 식사 차례를 기다리는 꼴이잖아! 내가 식탁의 주인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맙소사, 아버지. 아버지는 드래곤에게 아내 와 아들 모두를 잃게 되실지 모르겠군요. 젠장!

우리는 숨소리를 낼 소박한 자유마저도 박탈당했다. 그래서 나와 제레인트, 그리고 샌슨은 질식할 듯한 중압감을 느끼며 칼과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드래곤 로 드의 암석 같은 얼굴은 변함이 없었지만 칼은 이제 완연히 늙어버린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니, 그것은 신중히 감춰지고 위장된 그의 본모습이 표면으로 떠오른 것 같 았다.

이루릴은 평온한 얼굴 그대로 약간 물러난 곳에서 두 존재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마저도 드래곤 로드와 마찬가지로 차가운 암석처럼 보였다. 그리고 엘 프와 드래곤 양자의 시선을 받고 있는 인간은 이제 힘없이 팔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칼은 머리를 쓸어넘기더니 그대로 목 뒤에 손을 대었다. 그는 그렇게 머리를 숙인 채로 고개를 이리저리 꺾었다. 방자한 태도였다. 그는 피로에 지친 표정으로 음울 하게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뜨거운 맛이 부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드래곤. 그리고 넌 잊지도 못하니 그것을 망각해서 이러는 것도 아니겠지. 심심했나?”

입 안에 이상한 맛이 느껴진다. 이게 도대체 어떤 미친 녀석이 할 수 있는 말이지? 그러나 그것은 칼 헬턴트의 말이었고 그가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칼은 팔을 늘어뜨 리며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드래곤 로드는 변함없는 얼굴로 칼을 마주보았다. 그의 입이 열릴 기색이 없자 칼은 계속 말했다.

“그래. 너의 눈앞에 흘러가는 300년의 세월, 짐작도 할 수 없다. 그 눈으로 바라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상상도 안 되는걸. 하지만 생각해 보지. 나는 유피넬과 헬카네 스의 축복을 받은 인간이니까 말이야.”

칼은 여전히 방약무인한 태도로 팔짱을 끼더니 턱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무엇이었을까. 몸을 짓씹고 정신을 짓누르는 고독? 아냐. 그런 건 너의 관심사가 아니었겠지. 드래곤은 고독을 모르는 존재니까. 방대한 기억에 짓눌리는 것? 터무 니없어. 잊지 못하는 존재는 기억에 휘둘리지도 않아. 난 모든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오로지 남은 하나의 기억에 매달리는 남자를 보았지.”

그때 칼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의 내부로 빠져들어가는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 로드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칼은 잠시 후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래. 그건 아니야. 그렇다면 뭘까. 역시 내 생각대로 무료함이었나?”

드래곤 로드의 고개가 살짝 움직였다.

그것은 호의적으로 바라보았을 경우 고개를 끄덕였다고 말해 줄 수 있을 정도의 몸짓이었다. 드래곤 로드는 천천히 말했다.

“그랬네.”

“그랬군.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날 장난감 취급하는 것은 좋지 않아.”

“지적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존재로서 300년을 살아온 자를, 자네는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전혀. 300번의 개화, 300번의 낙엽, 전혀 이해할 수 없어. 하지만 솔직히 말하지 그랬나?”

“미안하군.”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지금 드래곤 로드가 칼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나? 난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칼은 전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난 네리아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기절할 자유도 없었다. 샌슨의 얼굴에서 빠져나가는 핏기는 다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제레인트는 벌벌 떨면서 그 광경을 바라보 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드래곤 로드의 얼굴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은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드래곤 로드의 얼굴에 거대한 피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니, 순식간에 발톱 달린 악마가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을 부수며 모든 의미를 무시하는 악마.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자식, 시간이 순식간에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 고, 마침내 드래곤 로드의 바위 같은 얼굴에는 황폐화된 폐허만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은………….. 사막의 모래 틈으로 불쑥 드러난 어떤 몰락한 옛 나라의 석상처럼 보였 다.

드래곤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를 놀리려고 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네. 하지만 사실 난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네. 세계에 대한 자네들의 그 터무니없는 오만 말일세.”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나?”

“그렇다네. 이건 뭐라고 말해야 할까. 자네들의 표현으로는 머리로는 알고 가슴으로는 알지 못한다고 말하던가? 조악하며 사실과는 터무니없이 먼 비유지만 어쩔 수 가 없군.”

칼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다르지.”

“그래. 너무 달라.”

“어쩔 텐가?”

칼의 질문에 드래곤 로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칼도 그 시선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았으며 나도 부지불식간에 위를 바라보았다.

왠지 빛이 줄어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위의 물들은 보다 짙은 군청색을 띠기 시작했고 위에서 영롱하게 내리비치던 빛들도 그 위세가 약해지고 있었다. 드래 곤 로드는 말했다.

“내가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무엇을 말인가?”

드래곤 로드는 칼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아름다운 눈이 제레인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답다?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지? 조금 전, 드래곤 로드의 표정이 변하고부터다. 이제 그는 한 자리에 300년 동안 서 있는 바위에서는 느낄 수 없는 느 낌을 주고 있었다. 바위는, 그저 서 있을 뿐. 그러나 드래곤 로드는 바위처럼 선 채 사색했을 것이다. 그는 바라보며,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바위라면 폭포 속에 서 있 는 바위일 것이다. 수백 년의 물살을 맞으면서도 깎여나갈 줄 모르는 자존심 강하고 고집센 바위일 것이다. 깎여나간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그 스스로가 원해서 물살 에 실어 흘려보낸 것뿐이다.

그는 말했다.

“제레인트 침버. 인간의 아들이며 테페리의 지팡이여.”

“예? 아, 예?”

제레인트는 크게 당황하며 대답했다. 칼은 잠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더니 그대로 뒷걸음질쳐 물러났다. 그래서 드래곤 로드는 제레인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상황은 제레인트의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레인트는 식은땀을 좍좍 흘리면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예? 아, 저 말씀이십니까?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거요?”

“물론 그렇다네.”

“아, 저, 그것은 테페리의 뜻입니다.”

“테페리의 뜻?”

제레인트는 당황하고 있었지만 지금 하고 있는 말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는 태도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말했다.

“예. 저는 테페리에게 저의 몸을 던진 자이며 그의 뜻에 따라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권능을 수여받았습니다. 제가 걷는 모든 길에 그분의 은총이 함께합니다.

 “목숨보다도?”

“대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입니다.”

드래곤 로드의 질문도 빨랐고 제레인트의 대답도 빨랐다. 칼은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대담하게시리 콧방귀를 뀌어대고 있었다. 왜 저러시지? 드래곤 로드는 칼을 돌 아보며 미소를 지었다가 다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좋네. 제레인트. 자네는 갈림길의 신 테페리의 지팡이일세. 그러니 선택하게. 난 자네들의 무리를 둘로 나누겠네. 자네와 그 외의 다른 자들로, 그리고 둘 중 하나만 살아날 기회를 주겠네.”

그 음성은 평온했다. 비록 그가 사람 정도는 간단하게 잡아먹고 나서는 이빨 사이에 끼인다고 불평할 진면목을 숨기고 있다지만 음성만은 고요하고 안정되어 있었 다. 그래서 공포는 조금 늦게 찾아왔다.

제레인트는 굳어버렸다.

“예?”

“이해가 어려운가? 다시 말해 주지. 자네가 죽는다면 다른 모든 사람은 살려 보내주겠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이 죽는다면 자네는 살려주겠네. 살 것인지 죽을 것 인지를 선택하게.”

제레인트는 멍한 얼굴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지만 드래곤 로드는 자기가 내뱉은 무시무시한 말에 아무런 자극도 받지 않은 듯이 태연하게 제레인트를 바라보았 다.

제레인트는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나와 샌슨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뭣 때문에 기뻐하고 있는 것일까? 다른 모든 반응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웃는다니? 혹시 충격 으로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 아닐까?

그때 제레인트는 박수를 딱 치더니 말했다.

“큭크크큭. 우힛히! 그거 너무 쉽습니다. 내가 죽지요. 하하하하.”

“쉽다고?”

“하핫! 예! 정말 간단한 질문이군요. 아니, 도대체? 어떻게 300년이나 살아오신 드래곤 로드께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아하! 그렇군요. 이제야 칼이 장난 어쩌고 한 말이 이해되는군요. 하하하!”

제레인트는 너무 웃어서 흘린 눈물을 닦아내더니 배를 잡고 말했다.

“드래곤 로드, 위대한 드래곤이여. 하하하. 당신은 인간을 아실 겁니다. 인간이란 그런 질문에 대해서 항상 똑같이 대답할 겁니다. 테페리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어 요. 내가 죽습니다. 친구들을 내보내 주세요.”

나와 샌슨은 넋을 잃고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샌슨의 얼굴에 흘러넘치는 저 감동은 형언하기가 힘들다.

과연 인간이라면 모두 그렇게 대답할까?

아니다. 난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레인트 당신이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을 믿는 당신이니 그런 얼빠진 대답을 하겠지. 그러나 왠지 나의 생각엔 확신이 없었다. 제레인트는 이제 유쾌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아니 왜 그런 한심한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드래곤 로드는 제레인트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테페리의 대답은 무엇이었지?”

드래곤 로드는 그렇게 물었고 그러자 제레인트는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그는 입술을 깨물면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말했다.

“뻔한 거 좀 그만 물어요. 젠장. 저 사람들은 테페리의 뜻을 실천하지 않고, 난 테페리의 뜻을 실천해요. 당신이 나를 죽이겠다는 것은 테페리를 죽이겠다는 것과 같 아요. 테페리는 나보고 살라고 하겠지요.”

샌슨의 얼굴은 다시 파랗게 변했다. 하지만 드래곤 로드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 자넨 테페리의 뜻을 어기겠다는 것인가? 자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제레인트는 말문이 막힌다는 표정으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드래곤 로드는 제레인트를 냉정하게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제레인트는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잠시 후 그의 목소리가 명확해졌다.

“물론입니다. 난 테페리가 아니라 제레인트니까.”

“자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테페리입니다.”

“제레인트가 아니라?”

제레인트는 콧등을 긁적거리다가 말했다.

“헤헷. 어쩔 수 없어요. 내가 없다면 테페리를 섬길 수 없어요. 헤트로이처가 쓴 『신에게로의 사색적 산책』 한번 읽어보시죠. 여기도 있던데.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면 신앙도 없어지게 되지요. 더 간단히 말할까요? 테페리께서는 그를 섬기는 노예를 원하시지 않아요. 노예를 원하셨다면 인간 같은 것은 자격 미달이겠지요. 노예는 생 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드래곤 로드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느릿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뭐……………, 이런 거죠. 내가 없으면 테페리를 향한 나의 신앙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있어야 한다. 따라서 난 테페리를 섬기기 위해서는 테페리와 구분되 는 제레인트로 남아야 하며, 그런 제레인트로서 당신의 질문에 대해 죽겠다고 대답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테페리의 뜻을 어기면서도?”

“내 삶은 테페리에게 바쳤으니, 내 죽음 정도는 제레인트를 위해 쓰지요. 테페리께서도 화내시지는 않을 겁니다.”

제레인트는 장난스러운 어투로 말했고 드래곤 로드는 미소를 지었다.

“테페리라는 교사는 학생 제레인트에게 낙제점을 줄 듯하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하하하.”

“자네 대답은 잘 들었네. 고맙군. 그럼………….”

드래곤 로드는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는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움찔해 버렸으나 동시에 적개심을 담은 눈으로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또 칼자루 근 처로 움직이는 것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샌슨의 어깨는 무섭도록 경직되어 있었다. 간단히 말해 수틀리면 치고들겠다는 뜻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드래곤 로드 역시 그것을 보았을 텐데도 아무 변함없이 말했다.

“샌슨 퍼시발.”

샌슨은 불안한 눈으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더니 마침내 잔뜩 볼멘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말씀하십시오.”

그 목소리에 정말 모든 상황을 잊어버리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샌슨은 자기 손에 든 장난감을 빼앗으려 드는 어른에게 말하는 듯한 어투로 말해 버린 것이다. 불 안과 적개심도 이렇게 표현되니 차라리 희극이다. 칼은 고개를 돌리고는 배를 떨고 있었고 제레인트는 갑자기 하늘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기절한 네리아와 이루릴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만. 드래곤 로드는 말했다.

“자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저요? 에. 저 말씀이십니까?”

드래곤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모든 불안감을 잊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우리들 모두는 샌슨이 무슨 대답을 할지 기대한다는 시선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멋쩍게 뒤통수를 긁더니 곧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고민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내부에 빠져들어갔다. 드래곤 로드와 우리들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전사 샌슨. 헬턴트의 땅이 그의 유년을 형성했고 그의 성장 은 피 묻은 검과 함께였을 것이다. 그가 그 생사의 틈에서 바라본 인생은 무엇이었는가. 그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자리잡은 것은 무엇인가.

마침내 깊은 성찰과 사색을 끝내고 헬턴트의 경비 대장 샌슨 퍼시발은 위대한 드래곤 로드의 질문에 대답했다.

“에이, 씨. 너무 어려워요. 한두 개라야지.”

“파하하핫하!”

제레인트는 칼에게 매달려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칼은 위엄을 지키려 애쓰는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입술이 실룩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제레인트의 맹렬 한 웃음소리에 네리아가 눈을 떴다. 그녀는 어지러운 듯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모든 사람들이 웃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자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덩달아서 빙긋 이 웃었다. 그 얼굴을 보다가 나는 기어코 웃음을 터뜨렸다.

“푸히흐으흐어아하핫하!”

네리아는 웃는 내 모습을 보더니 다시 히죽이 웃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자기가 어디 있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그녀는 움찔하더니 몸을 돌려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 다.

드래곤 로드마저도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다시 점잖게 샌슨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한두 개가 아닌가?”

“예. 제 고향도 중요하고, 조국도 중요하고, 우리 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또…………… 에, 어떻게 생각하실진 모르겠습니다만 고향에서 기다리는 여자도 있는데요.” “성밖 물레방앗간에……”

“그거 하지 마!”

샌슨은 내 목을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칼은 샌슨의 대답에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리고 드래곤 로드는 다시 칼을 바라보며 빙긋 웃더니 샌슨에게 말했다.

“고향, 조국, 가족, 여자 이 모든 것 앞에 붙는 것이 있지 않은가?”

“예?”

“그 모든 것들 앞에는 ‘나의’라는 말이 붙어야 되는 거 아닌가? 자넨 다른 사람의 고향이나 다른 사람의 조국을 말하는 것은 아닐 텐데.”

“어? 아, 예. 그렇군요.”

“그러므로 자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샌슨은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아, 뭐. 그렇게 말한다면 저겠지요. 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지만 자네의 고향이나 조국, 또는 가족, 여자는 자네가 없어도 아무 일이 없겠지? 가족이나 여자라면 자네가 없어 슬퍼할 수 있겠지만, 그들에게 슬픔 외에 다른 해가 돌아가지는 않겠지? 자네가 없어도 그들은 그대로 존재할 수 있을 테지. 맞는가?”

“예? 아, 아, 그렇겠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곳을 나서서 자네의 조국을 모두 파멸시키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다면 자네의 고향도, 가족도, 그리고 그 여인도 틀림없이 죽게 될 테지.” 샌슨은 입을 딱 벌린 채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더니 그는 앞으로 한발 내디뎠다. 말릴 새도 없었다. 그는 맹렬하게 땅을 밟으며 칼 자루를 불끈 쥐었다.

“목숨을 걸고 막겠습니다!”

샌슨의 얼굴엔 이제 불안이라든가 하는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순수하게 정리된 분노만이 드래곤 로드에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드래곤 로드는 꼼짝도 하지 않고

샌슨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잠시 후 드래곤 로드는 서서히 팔을 들어올렸다.

“나를 막겠다고? 나를? 드래곤 로드를?”

그리고 그의 음성은 천둥이 되었다. 그는 온세상이 울리도록 외쳤다.

“감히 나를 막겠다고!”

그의 고함소리에 귀가 터져나가는 듯했다.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는 울림. 드래곤 로드는 온세상을 덮어버릴 정도로 거대해졌다. 하늘도 보이지 않았고 주위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없이 거대한 드래곤 로드가 있을 뿐이다. 주위는 모조리 암흑밖에 없었고 내 발로 딛고 있는 땅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한없는 미친 바람이 불 어 세계가 모조리 휘날려가 버렸다. 그리고 우리와 드래곤 로드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구름 위에서 외치듯이 말했다.

“네가! 나를! 막겠다고!”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이건 말도 안 돼. 젠장! 젠장! 세상이 없어져버렸어. 아무것도 없다구! 드래곤 로드, 드래곤 로드만이 남아 있었다. 고개 돌려보니 제레인트 역 시 무릎에 힘이 풀리며 주저앉아 버렸고 네리아는 땅에 무릎을 꿇고는 팔 사이에 머리를 묻은 채 떨면서 흐느끼고 있었다. 칼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바뀌었다. 나는 주저앉은 채 샌슨을 보았다.

샌슨은 떨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문 채 뒤로 물러나려는 발걸음을 붙잡고 있었다. 그는 커다란 숨소리를 내며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검을 뽑아들었다. 온 몸을 찢어버릴 듯이 불어닥치는 바람 속에 그는 검을 들어올렸다.

그는 가슴 앞에 검을 세우며 안간힘을 다해 외쳤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소!”

그러자 곧 온세상이 붕괴되는 굉음이 들려왔다.

“죽어도 좋은가!”

멍청이! 틀림없이 죽게 돼! 난 샌슨을 바라보며 소리없이 악을 질렀다. 이 멍청한 작자야! 드래곤 로드가 당신의 조각 하나도 남겨두지 않을 거야! 부서진 몸의 가장 작은 조각마저도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떨게 될 것이 분명해! 아니, 그 영혼까지도 공포에 질려 영원히 울부짖게 될 거야!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모르겠다. 말을 했는지 안했는지도 분명치 않았다. 하지만 난 짓눌릴 것 같은 공포 속에서 헐떡이며 샌슨을 바라보았다. 폭풍은 세상을 그대로 조각낼 태세였지만 그 조각날 세상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샌슨이 말했다. 이 폭풍을 뚫고 그의 악 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어도 좋아! 하지만 이 자식아, 내 의지는 꺾지 못해!”

순간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드래곤 로드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물 속의 건물에 서 있었다. 나는 손을 내려다보다가 장갑을 벗었다. 아아, 젠장. 손톱이 부러졌 어. OPG를 낀 채로 바닥을 심하게 긁어서 그랬는지 손톱이 몇 개 부러져 있었다. 난 후들거리는 손을 붙잡았다.

네리아는 눈물로 범벅이 되다시피한 얼굴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그녀는 덜덜 떨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상이 그대로인 것을 확인한 그녀는 훌쩍거리며 드래 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칼은 커다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희한한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만족감? 슬픔? 모르겠다. 그 양쪽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 같 다.

제레인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뭔가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어깨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루릴은 조용히 샌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샌슨의 얼굴은 말할 수 없이 창백했다. 그는 어깨로 숨을 쉬고 있었고 검을 쥔 팔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한 점 흐림이 없었다. 여전히 불타오르는 분노로 드래곤 로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드래곤 로드는 말했다.

“자네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아.”

그 평온한 어조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지만 마치 우리들을 쓰다듬는 듯했다. 난 헐떡거림을 멈추려 애쓰면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너무 뛰고 있었고 손 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자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네야. 자네가 있음으로 해서 자네의 조국, 자네의 고향, 자네의 가족, 자네의 여인이라는 것들이 이해될 수 있지. 그런데 자네 자신을 던지겠다는 말인가? 자네라는 한 개인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것들을 위해?”

“아무런…………,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그래. 자네의 가족과 자네의 여인을 볼까. 그 사이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네. 자네를 뺀다면 말이야. 세상의 모든 것들은 모두가 아무런 관계도 없는 타인들이지. 자네의 조국을 볼까. 자네의 조국과 저 헤게모니아는 똑같은 나라이며 서로 특별히 다를 것은 없어. 하지만 자네라는 존재가 있음으로서 바이서스는 자네의 조국이며 자네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지 않는가. 세상 모든 것들은 기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대한 쓰레기들이지. 하지만 자네가 있음으로서 거기엔 의미가 생기고 관 계가 생기고 사랑이 생기지 않는가.”

샌슨은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드래곤 로드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런데, 자네라는 존재가 사라지면 곧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그런 것들을 위해 자네를 희생하겠다는 것인가?”

샌슨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난 입술을 적셨다. 드래곤 로드의 말은 틀린 데가 없는 거 같다. 미칠 것같이 두근거리는 심장과 지독하게 뜨거운 머리 때문 에 생각을 정리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저 말은 맞는 거 같은데. 하지만 이상해. 뭔가 맞지 않는 말이야. 그게 뭘까? 샌슨은 말했다.

“제기…………, 난 그런 거 몰라! 어려운 거 묻지 마. 하지만 내가 어떻게 대답할지는 잘 알고 있어! 잘 돌아가는 입술이 없어서 설명은 못해. 하지만 난 죽어도 막겠어!”

그러자 드래곤 로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네. 성실한 인간이여.”

성실한 인간 샌슨이 뭐가 성실했지? 설명도 제대로 못했거니와 말도 마구 했는데? 샌슨은 어안이 벙벙해져서는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드래곤 로드는 이미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드래곤 로드는 네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칼은 눈살을 찌푸렸다.

“네리아.”

“하지 마세요!”

네리아는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소리가 어찌나 패악스러운지 우리는 질겁하고 말았다. 하지만 드래곤 로드는 그저 고개를 갸웃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발 악하듯이 말했다.

“그, 그런 거 하지 마세요! 세상을 다 없애버리고, 시커멓게 만들고, 마구 마구 바람을 불게 하고! 어, 어, 그런 거, 그런 거 하지 마세요! 난 못 견딜 거예요. 제발! 난 한번 더 그런 것을 당하면 죽어버릴 거예요!”

“하지 않겠으니, 안심하게.”

“아아! 제발, 제발 하지 마세요! 죽는 줄 알았어요. 어, 어흑! 난, 난 이런 것은 상상도 못했어. 제발, 그런 거 다시는 하지 마세요!”

“하지 않겠다.”

네리아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이루릴이 조용히 걸어가서 네리아를 부축하자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힘겹게 일어났다. 이루릴은 차 분히 웃으면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멍한 얼굴로 이루릴을 바라보다가 눈물을 닦았다.

드래곤 로드는 말했다.

“묻겠으니 성실히 대답해 다오.”

네리아는 훌쩍거리며 대답했다.

“저, 저에게 가장 소중한 거요?”

“아니. 자네가 가장 증오하는 것에 대해 묻겠네.”

“예?”

네리아는 입을 딱 벌리며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드래곤 로드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대답을 얻었으니 더 물을 필요가 없군. 난 자네에게 가장 증오하는 것에 대해 묻고 싶다네.”

네리아는 당황한 얼굴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거요?”

드래곤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리아는 눈을 깜빡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우리 일행의 얼굴 하나하나를 다 들여다보고 나더니 다시 드래곤 로드를 바 라보았다. 그러곤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에 얹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네리아는 말끝을 흐렸다. 드래곤 로드는 차분하게 기다렸다. 대화를 나누는 당사자들보다 우리가 더 초조해졌다.

“내가, 내가 싫어하는 건…….”

난 침을 삼키며 네리아를 보다가 드래곤 로드를 보았다. 드래곤 로드는 전혀 초조한 기색이 없었다. 네리아가 자꾸만 머뭇거리는데도 그는 태평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아, 그래.

후치 네드발. 그걸 알아야 했어. 멍청이. 드래곤 로드는 우리와 달라. 그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지. 대미궁 하나를 위해 50년쯤 간단히 기다릴 수도 있는 존재 였지. 따라서 그는 초조하다는 것을 모르겠지. 그러나 초조해할 줄 모른다는 것은……

나는 순간 칼을 바라보았다.

이제 알았다. 칼의 말이 무엇인지, 아까의 그 태도가 무엇인지 알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결 평온한 마음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가 입을 열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등 뒤에서 말하는 사람이오.”

드래곤 로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의미지?”

네리아는 자신의 말에 당황한 눈치였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냥 그거예요. 예. 뒤에서 말하는 사람이 시, 싫어요.”

“의미가 있을 듯한데. 설명해 주겠나?”

네리아는 갑자기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녀는 고함을 질렀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 사람이 싫어요!”

그녀의 눈이 불타오르는 듯했다.

“도망다니고, 피해다니는 것이 싫어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 싫어요! 따뜻한 창 안쪽에 앉아 웃는 사람들이 싫어요. 자기들끼리 행복한 눈길을 보내면서 나에겐 냉담한 사람들이 싫어요!”

네리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쉬지 않고 외쳤다.

“그걸 바라보다가 고개 돌려 걸어가야 되는 것이 싫어요! 그때 내 등 뒤에서 욕설을 던지는 것이 싫어요! 넘치는 행복은 조금도, 조금도 나눠주지 않고 자기들끼리

독식하고, 자기들끼리만, 자기들끼리만! 그리고 욕설과 무표정은, 차가운 말은 모두 내 등에 던지는 사람들이 싫어요! 그런 사람들이 싫어서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곤 두세우는 제가 싫어요. 담장 위와 어둠 속만 찾아다니게 된 제가 싫어요!”

네리아는 두 손을 올려 얼굴을 가리면서 말했다.

“만족하세요? 예? 이제 만족하세요? 다 설명드렸어요. 더 원하시는 것이 있어요? 그래요. 전 지저분한 도둑고양이 같은 계집애예요. 한 치의 어둠이라도 있으면 뛰 어들어 달아나 버리고, 몰리면 쉭쉭거릴 줄밖에 모르고, 그래요. 그게 나예요.”

우리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때 드래곤 로드가 말했다.

“그건 사실이 아니군.”

네리아는 고개를 들어 처연한 표정으로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드래곤 로드는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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