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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암파린 씨는 젖은 옷도 갈아입고 늦은 저녁이긴 하지만(야식이라고 부르는 편이 낫겠다), 어쨌든 저녁 식사도 마치고선 쭈뼛거리며 운차이와 내가 앉아 있는 테 이블로 다가왔다. 그는 말을 꺼내길 어려워했지만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나자 그런 대로 편하게 말하게 되었다.
“어, 나 타로메슈 암파린은 말이야, 항상 사람들의 인정에 감동하지! 내가 이 생활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도 결국 사람 때문이야. 저 언덕을 넘으면 누가 살고 있을까, 오늘 저녁 여관에서는 어떤 여행객들을 만나게 될까. 그런 생각이 머리에 꽉 들어차서는 내 다리를 가만 두지를 않아요. 하하하!”
암파린 씨는 맥주잔을 기울이느라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나도 뭔가를 해줘야지, 공짜는 싫어. 어이, 퍼시발 씨? 뭐 원하는 거 없소? 행운의 부적 어떤가? 헤게모니아의 무녀의 마을에서 가져온 것이 하나 있는데 말 이오. 붉은 사막에서만 나는 독사의 꼬리도 있지! 이건 기나긴 여행에서 특히 요긴한 것인데, 독사의 꼬리에서 나오는 강한 힘이 괴물들을 쫓아준다네. 그리고 정말 희귀한 오거 털가죽도 있는데 말이야, 자네가 원한다면 내 특별히 염가 봉사…….”
오거 털가죽? 틀림없이 돼지나 양의 털가죽이겠지. 설마 암파린 씨가 무슨 재주가 있다고 오거를 때려잡았을까. 샌슨은 관심이 동한다는 표정이었지만 내가 먼저 끼 어들었다.
“하하……. 샌슨은 그런 것들엔 별로 관심 없으니 대신 내 부탁 하나 들어줄래요?”
“그래? 말만 하게!”
“야! 내가 언제 관심이.. 웁!”
난 샌슨의 입을 틀어막은 채 빠르게 말했다.
“내일 아침 네리아가 일어나거든 당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를 해주겠어요? 그러니까 그 마지막 패가 엄청나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결국 거짓말을 하라는 것 인데, 가능할까요?”
암파린 씨는 코를 후비적거리며 날 바라보더니 곧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오늘 저녁 잠자리만 선물받는 것이 아니라 공부까지 시켜주는군! 자네 말이 맞아.”
“예?”
암파린 씨는 엄숙한 얼굴로 손에 붙은 코딱지를 퉁겨버리며 말했다.
“미래를 본다는 것은 말이야, 결국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안감을 덜어주는 것으로 족해. 맞는가 틀리는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 부끄러운 노 릇이야! 이 나이 되어서까지 어린 후학에게 배워야 되다니! 물론 선현들께선 여든 살이 넘어도 여덟 살짜리 꼬마에게 배울 것이 있다 하셨지만. 음. 알았네. 걱정 말 게.”
“아, 그래주시면 고맙지요. 부탁할게요.”
“전혀 염려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겠네.”
암파린 씨는 그렇게 말하곤 과묵하게 앉아서 나무만 지겹도록 깎고 있는 운차이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아까 퍼시발 씨는 나보고 간첩이 어쩌니 했는데, 당신들이야말로 저 자이펀인과 왜 함께 다니는 건가? 아, 의심한다는 것은 아니고, 저 전사분 때문 에 나처럼 간첩이라는 의혹을 뒤집어쓸지도 모르잖아?”
“아까는 미안했습니다.”
“아냐, 아냐. 사과도 자꾸 하면 값어치가 떨어진다오. 난 그냥 내 경험을 통해 자네 일행도 공연히 그런 오해를 받지 않는가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그래도 할 수 없지요. 운차이는 진짜 자이펀 간첩이니까.”
“아, 역시…………… 뭐야?”
암파린 씨는 고개까지 끄덕이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피식 웃었고 샌슨은 히죽 웃으며 설명했다.
“하하하. 원래 간첩이었지만 전향했습니다. 국왕 전하의 목숨을 구한 공이 있거든요. 또 그의 신병은 국왕의 형님이신 길시언 왕자님이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래 서 괜찮은 거지요.”
암파린 씨는 믿어지지 않는 얼굴로 우리들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난 유쾌한 심정으로 그 표정을 즐겼다. 흐음. 암파린 씨는 이제 우리들을 굉장한 모험가로 보시겠 지? 만일 우리들이 바이서스의 왕자와 드워프들의 노커와 자이펀 간첩에 드래곤 라자가 한 세트를 이룬 일행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암파린 씨의 얼굴은 어떻게 될까? 난 암파린 씨처럼 예언가는 아니지만 그가 대단히 놀라게 될 것이라는 점은 얼마든지 예언할 수 있겠군.
“국왕 전하의 목숨을 구했다고? 아니, 자네들 국왕 전하를 만나보셨는가?”
만나보셨는가? 말이 좀 희한하군. 샌슨은 우쭐한 표정으로, 하지만 겸손한 어투로 말했다.
“예? 아, 예. 간혹 만나지요. 지금도 우리 일행 중 몇 명이 임펠리아에 전하를 뵈러 갔거든요. 그래서 이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아마 비가 와서 천천히 올 모양인가 봐요.”
암파린 씨는 이제 경악을 넘어서 약간 공포까지 가미된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하하하. 그런데 갑자기 암파린 씨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그럼 말이야…………. 아냐. 음………….., 이걸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뭔데요? 말씀해 보세요.”
“허어, 이것 참. 먼저, 절대로 오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겠나? 화를 내지도 말고 말이야.”
샌슨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끼어들면서 말했다.
“오해하지 않도록, 화를 내지도 않도록 말씀하세요. 말씀하시는 것은 암파린 씨 자신이잖아요?
“아, 그렇긴 하지. 웃기는 약속을 하라고 했군. 음, 그러니까 말이야. 일단 난 미래를 보네.”
“예. 그러시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를 보기도 바쁜데, 참 피곤한 직업이실 듯해요. 진심으로 위로를………………
“아냐, 아냐! 제발 나 말 좀 하세.”
“아, 그러세요.”
암파린 씨는 그러고도 한참 동안 맥주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거나 옷소매를 바로잡거나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아까 저녁 의 리테들 씨와의 대화에서도 이미 판명되었듯이 우리들은 웬만한 일에는 놀라기도 힘든 모험을 하고 다닌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군, 그래.
암파린 씨는 결국 입을 열었다.
“내가 말이야…………, 요 며칠 동안은 사우스 그레이드를 주로 돌아다녔지. 거기는 지금 엉망진창이라네.”
“그런가요? 음, 풍문에 듣긴 했습니다만.”
“그래. 하지만 풍문으로 듣는 것 정도로는 모자라지. 가을에 거둬들인 곡식이 가득 쌓인 창고에 불을 지르는 농부들의 모습을 자네가 봤어야 되는데.”
입을 딱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샌슨은 누가 보면 유니콘 인에 광산이 두 개 생겼다고 생각할 정도로 입을 크게 벌렸다가 간신히 말을 만들어내었다.
“불을 질러요? 농부가? 곡식에요?”
이건 진짜 트롤 산수 공부하는 소리다. 드워프가 보석을 때려부순다고 하는 말만큼이나 웃기는 말이잖아? 농부가 곡식에 불을 질러? 운차이마저도 나이프와 나무 토 막을 내려놓고서는 팔짱을 낀 채 암파린 씨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암파린 씨는 손짓발짓을 하면서 말했다.
“전선 지휘관들은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기 시작한 거지. 여차하면 사우스 그레이드는 일격에 점령당할지도 모른다 이 말이지. 그 경우 꽉꽉 들어찬 곡식 창고는 그 대로 자이펀 군의 병참이 되지 않는가? 물론 곡식 창고에 불을 지르는 농부의 심정은 그 자식을 태워죽이는 심정이겠지. 평소 같으면 아무리 전쟁이라도 그건 말도 안 되는 말이야. 하지만 사우스 그레이드의 그 순박한 농부들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거든. 자이펀인들이 불러낸다는 악마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
샌슨의 얼굴이 극도로 일그러졌다. 내 얼굴도 비슷하겠지.
“예. 들어봤어요. 제기랄…………., 그것 때문에 사우스 그레이드의 농부들이 모조리 겁을 집어먹은 겁니까?”
“그렇다구. 그래서 군에서는 어음, 그러니까 손해 배상 증서를 발행해서 농부들의 피난을 독려하고 있지.”
“손해 배상 증서요? 그건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랬나? 흠. 간단한 것이야. 파괴된 전답과 곡식에 대해서는 정부에서 손해 배상할 테니 곧장 사우스 그레이드를 떠나라, 이 말이지. 그 증서라는 것이 정말 걸작인 데, 손해 배상 기간이 무기한으로 되어 있어. 한마디로 언제 갚아줄지 모른단 말이야. 후치 자네가 그 농부들이라면 이 말을 듣고서 웃기지 말라고 그랬겠지? 하지만 정말 눈뜨고 보고 있어도 믿을 수 없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구. 악마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말이야, 농부들은 배상 증서를 받기도 전에 서둘러 집에 불 을 지르고 피난을 준비하는 실정이라네.”
맙소사…………., 지옥이군. 사우스 그레이드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한 공포에 휩싸여 있는 모양이군. 난 혀를 세차게 찼다. 쯧쯧!
그 자이펀의 무기는 질병을 유발시키는 무서운 파괴력에다가 공포라는 더 무서운 부수 효과까지 발휘하는 모양인걸. 난 막연히, 지금쯤 칼 일행은 임펠리아의 고대 왕실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상스러운 욕설을 고래고래 퍼붓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문득 떠올린 생각이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별로 틀린 생각일 것 같지는 않다. 칼 은 아마 닐시언 전하의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싶다는 듯이 손을 떨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겠지. ‘뭐요? 피난이라구? 배상 증서? 웃기는 소리! 질병이 발생해도 아무 문 제가 없단 말입니다! 도시 가운데를 조사해서 디바인 마크만 회수하면 전체 의식이 무효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건강한 사람 몇 명이 하룻밤만 조사하면 돼요! 왜 공 문을 발송하지 않는 겁니까?’
정말 왜 공문을 발송하지 않는 거지? 그게 무서운 무기이긴 하지만 대책이 전혀 없는 무기도 아닌데. 사태를 충분히 설명한 공문을 각 도시와 영지로 발송시켜 이해 시키면…………. 아…., 이런 젠장! 충분히 이해시킬 시간이 없겠군. 사우스 그레이드는 주로 농토로 이루어져 있어 다른 곳에 비해 사람들이 좀 듬성듬성하게 떨어져 살 고 있지! 아마 우리 고향이 있는 웨스트 그레이드만큼이나 사람들이 흩어져 사는 곳이 있다면 사우스 그레이드가 바로 거기일 것이다. 이런 골치 아플 데가 있나!
만일 우리가 겪었던 그것, 일스에서 이루어진 세이크럴라이즈가 실전 배치 직전의 실험이었다면, 어디 보자. 그때가 11월 12일이니까 겨우 2주 전이군. 시간이 너무 촉박했어. 우리는 바이서스와 자이펀의 전쟁의 가장 긴박한 순간을 여행중이었기 때문에 우리 시간 감각과 실제 시간 감각이 혼동되는걸. 젠장. 칼은 나보단 현명하 니까 시간 감각을 혼동하지는 않았겠지. 닐시언 전하의 머리 끄덩이는 전폭적으로 안전하다(장담은 못한다. 칼 대신 길시언이 붙잡고 흔든다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니까.).
순식간에 무수히 많은 생각들을 떠올린 다음, 난 우울한 얼굴로 암파린 씨를 바라보았다.
“사우스 그레이드는 지옥 같겠군요.”
“정확한 표현이야. 후치. 정말 지옥 같지. 그런데 그런 광경을 보고 있으니까 말이야. 도대체 이 나라의 운세가 어떻게 되어먹었는지 궁금해지더라구.”
샌슨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이 나라의 운세라구요?”
“그래. 바이서스의 운세. 그게 궁금해졌어. 그래서 난 바이서스의 운세를 점쳐보았지. 적당한 바위산에 들어가서는 하룻밤 동안 완전히 마음을 비우고는 아침 해가 떠오르는 시점에 점을 쳐보았지.”
“오…………, 나라에 대해서도 점을 칠 수가 있습니까?”
“아니, 아니. 그건 힘들어. 난 그 정도는 안 돼. 그래서 난 바이서스 왕가의 운명에 대해 대충 점을 쳐보았지. 다른 점복술사가 보면 사기라고 말할 만큼 변칙적인 방 법이었지만 나로선 자신을 위해 하는 예언이기 때문에 절대로 속임수를 쓰지는 않았네. 그러고는 말이야, 도저히 바이서스 임펠로 찾아오지 않을 수 없더라구. 여기 와봤자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나, 혹은 내 예언을 도대체 누구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가 싶었지만 그래도 찾아오지 않고는 못 배기겠더라구. 그런데…………, 놀랍게도 전하를 잘 아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군! 그것 참,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야, 지금 미래를 본다는 내가 운명의 기묘함에 놀라고 있다네!”
일렁거리는 촛불을 잠시 바라보았다. 나는 왠지 질문을 꺼내기가 두려워져서 암파린 씨를 바라보지 않았다. 샌슨 역시 얼떨떨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질문을 하고 말았다.
“바이서스 왕가는 어떻게 됩니까?”
“이봐, 이 사실이 알려지면 난 불충죄로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그러니 입조심해 주게.”
“알았어요. 어떻게 됩니까?”
“정말 함부로 말하지 않을 거지?”
“말하지 않겠어요. 어떻게 됩니까?”
암파린 씨는 그러고도 한참 동안 머뭇거렸다. 더 참지 못하겠다 싶을 무렵, 암파린 씨는 입을 열었다.
“가문으로서의 바이서스는 끝나게 되네.”
다시 촛불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자정도 넘은 시각. 밖에서는 빗방울들이 조금씩 가늘어지고 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빗방울을 맞으면 오히려 따스한 느낌이 든다 더군.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런 느낌이 있다고 하지. 물론 내 느낌은 아니야. 세상에 둘도 없이 해괴한 감각을 가진 제미니의 느낌이지. 어린 시절 제미니는 비만 오면 좋아 어쩔 줄을 몰라했다. 왜 그렇게 비를 맞고 있냐고 물어보면 한다는 말이 ‘따스하니까.. 에구. 그런 바보가 어디 있어. 비를 그토록 맞고 난 다음날은 틀림없이 감 기에 걸려 콧물을 줄줄 흘리는 주제에 비가 따스하다니.
길시언, 설마 동생의 머리 끄덩이를 붙잡고 흔들고 있지는 않겠지요?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만 제외하면 점잖은 사람이니까 그러지는 않겠지. 아무래도 닐시언 전 하의 머리끄덩이는 여전히 안전한 것 같다. 아, 이런 한 사람을 생각 못했군. 제레인트? 천만에.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닐시언 전하 자신이다. 닐시언 전하가 자 신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화를 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형님! 이 우제를 꾸짖어주십시오! 가련한 백성들이, 저 가련한 백성들이…! 으아아아!’ 가능성이 있군.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구.
가문으로서의 바이서스는 끝난다고?
나라로서의 바이서스가 아니라, 가문으로서의 바이서스. 가문으로서의 바이서스라면, 그건 바이서스 왕가를 말하는 것이지. 왕가가 끝장난다고?
농담이 심한걸. 샌슨은 붉으락 푸르락한 얼굴로 암파린 씨를 노려보고 있었다.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네요.”
내 대답은 암파린 씨를 실망시켰으리라. 암파린 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당황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어느새 다시 나무 토막과 나이프를 들고 있었다. 사각 사각. 그리고 난 빈 맥주잔의 바닥에 엉겨붙은 거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더 마실까? 아냐. 관두지. 내일도 말을 달려야 되는걸. 이제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은 이틀도 안 남았을 것이다. 아프나이델은 대략 한 달쯤이라고 말했으니 정확히 이틀 후라고는 볼 수 없긴 하지. 어쩌면 일주일쯤 후에 일어날지도 모르고 벌써 깨어나 있을지도 모르지. 아, 아직 깨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 저녁에 느껴본 소문의 위력으로 보건대 크라드메서가 깨어났다면 벌써 바이서스 임펠은 폭동이 일어날 정도로 어수선해야 되겠지.
안 마시는 것이 좋겠군. 부지런히 달려가야지. 칼 일행은 아마도 바이서스 임펠에서 자고 올 모양이다.
“이것 봐. 못 믿겠다는 거야?”
암파린 씨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난 태평하게 대답했다.
“아뇨. 믿어요. 한 천 년이나 만 년쯤 지나면, 아냐, 백 년도 못 갈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언젠가는 바이서스 가문도 끝이 나겠지요.”
샌슨은 내 말에 킥킥 웃었고 암파린 씨는 역정을 내었다.
“그런 당연한 말을 예언이라고 하지는 않네!”
“그래요? 지금까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으세요?”
암파린 씨의 입이 딱 굳어버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난 내 머리에서 나오는 말인지, 내 뱃속에서 나오는 것인지(내 뱃속이라면 그건 술기운에 나오는 말이다) 확신할 수 없는 태도로 말했다.
“이거 보세요. 암파린 씨. 아까도 이 주제에 대해 잠깐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은데, 예언이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덜어주고 다가오는 미래를 대처할 수 있는 희망을 주면 된다고 보는데요. 암파린 씨가 말한 그런 식의 예언은 아무 쓸모가 없어요.”
“쓸모가…… 없다고?”
“그래요. 하등 쓸모가 없어요. 뭐, 내 생각이긴 하지만, 그게 예언이라는 것의 갈등 소지인 것 같은데요.”
“무슨 말이야?”
그래. 나도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하는 말은 아니야. 하지만 틀린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군. 내가 겪은 일, 내 곁에 다가오고 떠나갔던 사람들의 모습은 그 저 지나간 일상사는 아니었지. 샌슨의 눈빛이 묘하다.
“예언은 미래에 대해 말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는 시점은 현재예요. 아무리 미래에 대해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엄밀히 따지면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에 속 한 것이라구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한마디로 믿으면 그만이고 믿지 못하면 안 믿으면 그만이라는 말이지요. 미안한 말이지만, 좋은 일이라면 믿겠어요. 만족감은 있을 테니까. 만족감 하나 때문에 믿 겠어요. 하지만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예언은 믿지 않겠어요. 뭐라 해도, 현재를 사는 것이니까.”
“훌륭해.”
그 대답은 나무를 깎고 있던 운차이에게서도,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암파린 씨에게서도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대답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길시언에게서 나온 것이었 다.
길시언의 등 뒤론 제레인트와 칼의 모습도 보였다. 모두들 비에 젖어서 후줄근한 모습이었다. 길시언의 허리에서는 프림 블레이드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
고 있었고 그 광경을 보면서 암파린 씨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길시언은 얼굴에 착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면서 다른 손으론 칼자루를 쥐고 피곤한 음성으로 말했 다.
“조용히해. 내가 말할 테니.”
프림 블레이드의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길시언은 안으로 들어섰고 암파린 씨는 의자에 못박힌 듯이 딱딱한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주위를 둘러보다 가 옷걸이에 걸린 수건을 발견해서는 머리를 닦기 시작했고 칼은 침착하게 테이블에 앉았다. 길시언은 시선을 암파린 씨에게 똑바로 고정시킨 채 말했다.
“미안하지만 밖에서 듣고 있었소. 좋은 예법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우리 가문이 끝난다는 말을 들으니 어쩔 수가 없더군요.”
“우리………… 가문?”
“길시언 바이서스라고 합니다. 이분들의 일행이며, 바이서스의 왕자입니다. 왕자라고 해봤자 궁성에서 나온 지 오래 되었으니 대단할 것도 없소만.”
와라락! 암파린 씨는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퍽! 소리가 나도록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길시언은 제레인트가 건네주는 수건을 받아 머리에 덮어쓰면서 의자에 앉 았다.
“일어나요, 선생. 이렇게 추운 날에 바닥에 무릎을 꿇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니.”
“저, 전하. 소인의 불, 불충을 부디 용서해 주시길…”
“불충? 그런 거 없어요.”
“예?”
“일어나시오. 난 조금 전 여기 있는 후치가 말한 바대로 따를 생각입니다. 당신 말을 믿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내가 나 스스로 믿지 않는 말에 대해서 화를 낼 수야 없는 노릇이지요.”
길시언은 더할 나위 없이 침착하게 말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에다 머리엔 수건을 덮어쓴 채 난폭하게 머리카락을 닦아내고 있긴 하지만, 최소한 조금 전 자기 가문 이 홀라당 망한다는 말을 들은 사람치곤 저렇게 태도가 고상할 수가 없다. 칼은 빙긋이 웃었고 제레인트 역시 미소를 지은 채 테이블에 앉았다.
“거기 계속 꿇어앉아 있을 필요는 없소. 일어나 앉던가, 아니면 올라가서 잠을 청하시오. 늦은 시간이니까.”
암파린 씨는 얼떨떨한 얼굴로 길시언을 올려다보았지만 길시언은 이미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머리와 팔을 닦고 있었다. 암파린 씨는 머뭇거리며 일어나더니, 아 마 밤인사가 아닐까 생각되긴 하지만 정확히 뭐라고 말한 건지 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고는 황급히 올라가 버렸다.
암파린 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발걸음이 급해서 그렇겠지. 오늘 밤 잠은 제대로 잘 수 있을까? 이런 여관에 들어오다니 내가 미치지 않았나 하 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까? 하하하. 칼은 암파린 씨가 사라진 계단 쪽을 바라보다가 길시언에게 고개를 돌렸다.
“괜찮으십니까?”
“뭐, 상관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네드발 군? 다른 사람들은 전부 자나 보지?”
난 칼의 질문을 듣고서 더 이상 암파린 씨의 예언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기로 하는 분위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난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고 는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어땠어요? 생각만큼 멋지던가요?”
제레인트는 어느 새 맥주잔 세 개를 채워와서는 칼과 길시언에게 돌리면서 말했다.
“말로 표현을 못하겠어! 하, 그것 참. 퍽이나 웃기는 말이지만 말이야, 굳이 임펠리아에 대한 감상을 말하자면 난 드래곤 로드의 대미궁과 비교하겠어.”
“대미궁과? 헤에. 그 말은 엑셀핸드 듣는 곳에선 하지 않는 것이 좋겠군요. 하지만 대미궁에 비교한다는 것은 좀 어이가 없는데요? 임펠리아가 멋진 성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대미궁에………….”
“멋진 성? 지금 그냥 멋진 성이라고 했나? 천만에! 그 궁성은 신을 찬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 꽃이라니! 후치 넌 대미궁 어디에서 살아 숨쉬며 피어나 자라나는 아름다움을 본 적이 있냐?”
“아……, 없지요.”
제레인트는 힘찬 동작으로 맥주잔을 기울이고서는 그중 상당량을 옷 앞섶에 흘리고 나서 턱을 쓰윽 닦았다.
“커어! 그 화단 위로 밤비가 내리는 광경은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거야. 후우. 이건 테페리의 가호야. 내가 임펠리아에 찾아가는 시점에 밤비를 내려주시다니. 그야말 로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행운이 아닌가!”
“하하. 축하하지요.”
내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야, 제레인트는 비가 오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날씨를 맑게 해주신 테페리에게 감사했을 거야. 흐음. 난 성직자의 모범적인 표본 같은 성직자 에게서 고개를 돌려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피곤한 모양인지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로 눈 사이를 꽉 누르고 있었다.
“전하를 만나보셨어요, 칼?”
칼은 그대로 눈을 문지르면서 대답했다.
“음? 어, 만나보았네. 참 좋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네.”
“누가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아, 아니에요. 말이 헛나왔어요.”
칼은 황당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윽. 아무래도 암파린 씨와 이야기를 하면서 맥주를 너무 많이 마신 모양이군. 칼은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사우스 그레이드 쪽은 지금 거의 공황에 가까운 사태가 일어나는 모양이야.”
샌슨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문은 이미 들었어요. 아까 그 점쟁이는 사우스 그레이드에서 올라온 모양입니다.”
“그래? 흐음. 그쪽은 농가가 많지. 바이서스 식량 생산량의 절반 이상이 그곳에서 나오니까 바이서스의 식량 창고라고 할 수도 있는 곳이거든. 닐시언 전하는 그야말 로 자고 일어나자 곳간을 털린 것을 본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계시더군.”
곳간을 털린 사람이라. 음.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면 머리끄덩이는 확실히 안전…………, 내가 자꾸 왜 이러지? 칼은 피로한 얼굴로 말했다.
“다행히 지금은 11월 하순이지. 조세 마차는 이미 수송을 마친 시점이라 정부 보유 곡식은 그런 대로 충분하다고 하시더군. 하지만 보리 농사는 포기해야겠지. 잔혹 한 겨울이 될 것 같군. 어쩌면 잔혹한 봄이 이어질지도 모르고. 세이크럴라이즈에 관한 헛소문 때문에 민심은 흉흉하기 짝이 없고…………. 비밀 이야기지만 닐시언 전하 는 반란의 위험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계시는 것 같더군.”
“반란? 제기. 하긴 모두 어려울 때 협동하자는 것은 어디까지나 말뿐이지요. 반란이나 폭동은 왜 모두가 어려울 때 일어나야 되는 건지.”
“좋은 비평이야. 퍼시발 군. 해답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 어쨌든 닐시언 전하에게 있어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지골레이드를 대체할 전력이더군. 모든 사태가 거기서 비롯되었어. 물론 세이크럴라이즈의 문제가 남긴 하지만 그건 저쪽에서 시도한 것이니 당할 수밖에 없지. 하지만 지골레이드의 공백은 심각해. 그건 우리 쪽의 문제 니까.”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할슈타일 가문을 저주하고 있으시지 않던가요?”
길시언은 쓴 웃음을 지었고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는군, 네드발 군.”
“할슈타일 가문에서는 뭐라고 그런데요?”
“그게 말이지, 이 모든 사태 중에서 최고로 웃기는 국면인데 할슈타일 후작은 돌맨 할슈타일과 공식적으로 의절(義絶)했다네.”
“의절? 가문에서 쫓아내었다고요?”
“그래. 지골레이드의 계약 해제는 돌맨의 단독 소행이라는 것이야. 드래곤과 라자의 관계에 대해선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국면이 많긴 하지. 돌맨은 오로지 지골레이드가 불쌍해서, 그러니까 전선에서 싸우면서 동시에 웜링도 키우는 그 모습이 불쌍해서 계약을 해제해 버렸다는 거야.”
아무리 많이 마셨다지만 지금은 한 잔 더 마셔야 되겠다. 난 맥주잔을 채워와서는 테이블 위에 탕! 내려놓으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네요?”
“말해 보게. 나에게 지도자의 기쁨을 선사해 주게.”
길시언과 샌슨, 그리고 제레인트도 호기심 동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더욱이 운차이는 나무를 깎는 동작을 멈춤으로써 나에게 경의를 표현했다. 진지하게 듣겠다는 말이지. 난 호흡을 조절하고 나서 말했다.
“만족하실 거예요. 첫째. 돌맨 할슈타일은 천하에 다시 없는 멍청이다. 그런데, 몇 살이죠?”
“열다섯 살.”
“그럼 멍청이로군요. 지골레이드를 풀어주면 당장 바이서스 군이 죽어나갈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면서 단지 불쌍해서 풀어줬다면, 그건 멍청이지요.” “두 번째는?”
“할슈타일 후작의 지시를 받고 행동한 것이지요. 운차이의 가정이 맞았다는 것입니다.”
“좋아. 훌륭해. 그럼 그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려면?”
“그건 간단하지요. 하나만 알면 충분해요. 현재 돌맨의 신병은 어디에 소속되어 있지요?”
칼은 기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공식적으로는………… 무슨 수도원이더라? 아, 아미앙스 수도원일 거야. 검과 파괴의 레티를 섬기는 수도원인데 사우스 그레이드에 있다더군. 그 수도원에서 보호 상태 지. 돌맨 할슈타일은 지골레이드를 풀어준 다음 전선에서 달아나다가 거기로 들어갔다더군. 그런데 말이야, 이 레티의 수도원의 원장이 할슈타일 후작의 아내의 동 생, 그러니까 처남이 되지.”
“그럼 돌맨 할슈타일은 할슈타일 후작의 손아귀에 있는 셈이로군요?”
“그렇지.”
“국왕은 수도원장에게 그 신병 인도를 요구하지 않았구요?”
“수도원……, 신전이란 참으로 간섭하기 골치 아픈 공간이지. 언젠가 후작이 말하지 않았던가? 전통적으로 통치권은 신권의 경계를 존중하는 법이라고. 물론 그 반 대도 마찬가지지. 성직자들은 신을 섬기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는 국왕의 통치권에 대한 복종의 의무가 없지만, 자존심의 범위 내에서 존경과 사랑을 표하기는 하는 법이지.”
제레인트는 칼의 말에 동의하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어려워요. 간단히 말해서 둘 다 서로를 지나치게 간섭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상대방을 견제하긴 하지만 자존심을 건드리지는 않을 정도로?”
“복종 대상이 다르니까.”
샌슨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중요 범죄자라고 할 수 있으니까 신병을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바로 그게 안 된다니까, 퍼시발 군. 그 꼬마는 신전의 보호를 요구하며 들어온 상태거든. 이 상황에서 수도원으로서는, 자신이 복종하지도 않는 지상의 군주의 명령 에 따라 신의 보호를 요구하며 들어온 꼬마를 내어주지 않을 수 있단 말이야.”
“허……, 그것 참.”
“그리고 국왕으로서도 함부로 그런 신권의 경계를 건드릴 수는 없거든. 그런 식으로 신권이 침해당하게 된다면 모든 신전들이 가만히 좌시하고 있을 리가 없지. 다 른 신전에서 격렬하게 들고 일어날 거란 말이야. 그 상황 전체는 ‘신의 품을 찾아든 어린 소년을 지상의 군주에게 빼앗긴 것이 된단 말이야. 평소라면 어느 정도 원활
한 막후 교섭 방법이 있겠지만 현재는 전시란 말일세. 신전들과 대립함으로써 불안한 민심을 더 자극할 수는 없는 법일세.”
묵묵히 듣고 있던 길시언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제에엔장! 그 할슈타일 후작, 속에 능구렁이가 열 마리는 들어앉은 그 노인네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바지를 벗겨 채찍으로 후려치고 촛농을…………. 죄송 합니다. 임마! 제발 레이디답게 품위 있게 말하라구!”
운차이는 쓰게 웃은 다음 칼을 바라보며 말했다.
“할슈타일 후작은 크라드메서를 몹시 탐내고 있단 말이군요. 국왕의 비위를 건드려가면서까지 돌맨을 빼돌릴 정도로.”
“그렇소. 운차이 씨의 가정이 틀렸다면 얼마나 좋았겠소? 하지만 당신의 가정이 정확했던 모양이오.”
샌슨은 곰곰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
“에, 그러니까 말입니다. 제가 정리해 볼 테니까 맞는지 좀 말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할슈타일 후작은 지골레이드를 놓아줌으로써 자이펀으로 하여금 바이서스를 집 어삼키게 하고, 그 다음 자유로워진 돌맨 할슈타일은 크라드메서와 계약을 맺게 한다? 그렇게 되면 드래곤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니만큼 자이펀에게 이 나라가 넘어가 도 그 가문의 영화는 계속될 테니까…………. 게다가 자이펀으로서는 지골레이드를 빼냄으로써 도와준 할슈타일 후작을 홀대하지는 못할 테고. 일석이조를 노린다는 말입 “니까?”
“정확하네. 퍼시발 군.”
“내 이 늙은 여우를!”
샌슨은 그대로 입에 롱소드를 물고 할슈타일 후작 저택으로 찾아갈 듯한 태세였다. 나는 샌슨 같으면 입에 롱소드를 물어도 어울릴 거라는 망상을 조금 하다가 칼에 게 말했다.
“후작이 레니를 찾으면 안 되는 이유가 그것이었군요?”
“응?”
“할슈타일 후작에게 그런 반역의 기미가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랜드스톰의 하이 프리스트는 할슈타일 후작이 지나치게 강한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지요? 그래서 후작이 아니라 우리가 레니를 찾게 한 것이고……………. 이후의 결과는 뻔하겠군요?”
칼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난 맥주잔에서 터지는 거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레니는 크라드메서와 함께 전선으로 가게 되겠군요? 지골레이드 대신에.”
칼은 묵묵히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고 길시언과 샌슨은 입을 딱 벌린 채 내 얼굴과 칼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운차이는 그 모든 사람들과 독립된 자세로 하늘을 바라보며 고민에 잠긴 얼굴이었다. 아니, 하늘이 아니라 천장이다. 그리고 제레인트는 반대로 고개를 숙이고는 뭔가 기도에 잠긴 듯한 얼굴이었다.
칼은 맥주 한 모금을 느리게 느리게 마시더니 말했다.
“반역의 기미는………… 있었지. 아니, 간단히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지. 300년의 기간이 지났고, 할슈타일 가문은 바이서스 왕가에게 유용성을 잃어가고 있었으니까. 주인을 바꿔버리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지.”
나는 잠자코 칼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은 칼이 말을 해야 되는 시점이다.
“아마 후작 자신으로서도 그것은 최후의 계획이었을 거야. 그의 첫 번째 계획은 우리들도 잘 알고 있는 그것, 드래곤 라자의 혈통을 재창조해서 계속 가문의 영화를 이어나가자는 것이었겠지. 드래곤 라자만 계속 배출된다면 할슈타일 가문의 영화는 영원할 테니까. 하지만 그건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니지. 역시 드래곤 로드가 정한 것을 거스르기는 어려운 일이었을 테니까.”
칼은 다시 한숨을 쉬었고 그 시간 동안 샌슨과 길시언은 다섯 번 이상 숨을 들이쉬었다. 술 때문인지 벽에 있는 촛불의 빛이 일렁거리는 것 같군. 난 조용히 칼의 말 을 기다렸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는 주인을 늑대에게 넘겨주고 그 공에 대한 선물로 주인의 뼈다귀를 기대하는 사냥개가 되는 것…………. 추악한 일이지만 생각 해 볼 수는 있는 일이지.”
길시언의 이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는 저 입 속에서는 불꽃이 튀는 것인지 아닌지 확실하진 않지만 그 눈에서는 확실히 불꽃 이 튀고 있다. 지금 운차이에게 물어보면 ‘길시언은 할슈타일 후작에 대한 살기를 마구 뿜어내고 있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칼은 결심을 굳힌 얼굴로 말했다.
“그렇네. 네드발 군. 그날 하이 프리스트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지. ‘후작이 붉은 머리 소녀를 찾으면 그 소녀의 신방은 자이펀에서 차려질 것이다.’라고.”
빠박! 누구의 이빨이지? 어쨌든 누구 것인진 모르겠지만 분명히 누군가의 이가 부스러졌을 것이다. 길시언과 샌슨, 둘 중의 하나일 텐데. 길시언은 어이가 없는 얼굴 로 말했다.
“레니를 자이펀에 선물로 넘긴다는 말씀입니까? 자신의 딸을?”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하지요.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할슈타일 후작가는 자이펀 왕가와 연결되는 것이니까. 거기서는 왕이라고 하진 않지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 지. 그리고….. 이 전대 미문의 신부의 지참금은 놀랍게도 바이서스라는 나라가 되는 것이고.”
“오, 이런, 맙소사!”
“글쎄・・・ 좋은 의미로 볼 수 있을까? 할슈타일 후작은 자신의 딸에게 한 나라의 왕을 신랑으로 맺어주는 셈이지. 아냐, 두 나라의 왕이 되겠군. 자이펀과 바이서스 두 나라. 물론 이런 신부를 거부할 사람은 없지. 드래곤 라자이기 때문에 크라드메서라는 무시무시한 드래곤이 따라가게 되고, 그 지참금은 나라 하나. 꽤나 비싼 신 부인 셈이지. 신부의 아버지가 목에 힘을 줄 수 있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겠군.”
칼은 마치 동네 처녀가 시집가는 것인 양 가볍게 이야기했다.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길시언은 기어코 고함을 질러버렸다.
“이런 괘씸한! 할슈타일 후작을 체포해야 됩니다! 지골레이드도 없는 이상, 더 이상 후작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습니다! 반란입니다!”
“증거가 있소?”
“증거요? 증거가 필요합니까? 알았습니다. 목부터 잘라내고 나서 증거를 찾도록 하지요!”
“길시언…….”
“제길, 이렇게 추악한 이야기는 듣다듣다 처음 들어봅니다! 이 나라가 그 가문에게 베푼 은혜가 얼마입니까! 무려 300년에 걸친 은혜입니다! 그런데 주인을 배신하 는 사냥개가 된다고요? 그러곤 십수 년 만에 찾아낸 딸은 얼굴도 모르는 저 사막의 왕에게 시집보내 버린다고요?”
“이 모든 것은 가정일 뿐이오. 물론 하이 프리스트는 많은 정황과 현상에 의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긴 하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소. 함부로 단정을 지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에이익!”
길시언은 포효하듯이 외치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맥주잔이 잠시 요동을 쳤고 촛불이 크게 흔들렸다. 난 묵묵히 그것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칼.”
“응? 네드발 군?”
“그런 일 대신 칼은 레니에게 무슨 일을 해줄 거지요?”
“뭐라구?”
“할슈타일 후작의 계획 대신에… 칼은 레니에게 어떤 일을 해줄 거지요? 이건 내 생각과 다르게 진행되는데요. 난 레니가 크라드메서를 진정시킨 다음 델하파의 항구로, 진짜 아빠에게로 돌아가게 되기를 기대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될 수 있어요?”
샌슨은 당혹한 얼굴이 되었다. 칼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전선에서 지골레이드의 공백이 크니까………….”
난 칼의 어눌한 말도 싫어. 난 그의 말을 잘라 들어가면서 물었다.
“그렇다고 레니가 크라드메서와 함께 전선으로 가야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칼은 대답하지 않았다. 촛불 빛마저 줄어드는 지독한 침묵의 시간이 다가왔다. 난 이 침묵이 싫어.
“약간 취한 김에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난 레니의 의지에 반하는 일에는 절대 찬성하지 않겠어요. 레니는 이 모든 이야기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와 함께 떠나왔어요. 레니는 그저 자신이 믿는 아빠가 대륙이 위험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가라고 말했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온 거예요. 하하하. 역시 취하면 누 구나 잘 아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군요.”
“네드발 군. 그건 잘 아네.”
“잘 안다고요? 그럼 걱정하지 않겠어요. 저어언혀! 걱정하지 않아요.”
“이봐, 네드발 군…….”
와라락! 의자에서 일어나는 내 동작이 좀 거칠었던 모양이다. 의자는 뒤로 굴러가다가 테이블에 부딪혔고 칼은 입을 다물었다. 주위의 사람들이 날 저렇게 바라보는 것은 정말 싫어.
“미안하지만 너무 졸려서 더 못 듣겠어요. 취기도 오르고. 좋은 밤 되길 바라요.”
그리고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실까지 뛰어 올라왔다. 쾅쾅쾅쾅! 계단을 어떻게 뛰어올랐는지도 모르겠지만 난 어느새 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문득 왼쪽의 방을 본다.
저 방 안에 레니와 네리아가 잠들어 있다. 난 잠시 레니의 얼굴을 떠올려본 다음, 웨일즈 본야드, 그 고래뼈로 장식된 멋진 펍을 떠올렸다.
난 방문을 열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순간 짜릿한 취기가 올랐다. 음………….., 자다가 일어나서 마신 술은 더 빨리 취하는 모양이지.
밤새도록 비가 내렸고 내 꿈 속에까지 비가 내렸다.
“왜 비를 맞고 있어?”
“빗속에 있으면 따스하거든.”
몸은 다 커버린 제미니. 하지만 얼굴은 일곱이나 여덟 살쯤의 제미니다. 뭐 특별히 괴상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17세의 몸이 일곱 살 때처럼 껑충껑충 뛰어다니고 있 으니 얼굴이라도 저래야 어울리지.
“비에 젖으면 춥지 않아?”
“응응, 비에 맞은 다음 비 안 오는 곳으로 가면 춥겠지. 하지만 지금은 따스해.”
“운차이는 그런 경우를 가리켜 해파리라고 말하던데.”
“먹는 거야?”
“몰라. 먹기도 하는지 물어보진 않았어.”
사방은 운차이의 사막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빗방울 색깔이 자줏빛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낙타와 전갈이 불만족스러운 소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 데 방울뱀은 어디 있는 거지?
촤르르르…………. 방울 소리가 들렸다.
“제미니! 방울뱀이 근처에 있어!”
“소리뿐이라면 상관없지.”
어쩌자고 저렇게 이쁜 소리만 할까. 괘씸한 것. 난 몽롱한 걸음걸이로 제미니에게 다가갔다. 제미니는 깡총깡총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내 느긋한 걸음걸이로도 충분 히 따라갈 수 있었다.
푸석, 푸석.
아래를 내려다보니 말라붙은 모래가 내 발길에 따라 흩어져 날아갔다. 사방에 자줏빛 비가 내리고 있었다.
“레니는 사막의 여왕이 되겠지?”
제미니의 질문. 어느새 그 얼굴은 네리아가 되어 있었다. 빨강머리는 똑같았지만 그 얼굴은 네리아의 얼굴이었다. 흠. 이제야 그런 대로 몸과 어울리는 얼굴이로군.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항구의 소녀가 사막으로 시집가면………… 말라죽어 버리겠지요. 이 굉장한 모래는 항구의 소녀의 몸에서 물기란 물기는 다 짜내어버릴 거예요. 소녀는 울 수는 있겠지 만, 그 눈물도 모두 모래 속으로 사라져버리겠지요.”
네리아의 얼굴은 이제 레니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여전히 빨강머리는 똑같았지만.
레니는 처연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바다 안개가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갈매기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하늘은 짙은 회색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녀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가요. 알았어요. 같이 떠나겠어요. 하지만 절대로 아버지와 날 떼어놓을 수는 없어요. 난 반드시 여기로 돌아오겠어요.”
“당신의 의사를 존중하겠습니다.”
내가 한 말은 아닌데. 하지만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니까.
크라드메서는 브레스를 내뿜었다.
안개와 갈매기 울음소리, 그리고 회색빛 하늘이 오그라들었다. 남은 것은 말라붙은 잿더미와 모래뿐이었다. 그리고 지글거리며 타오르는 붉은색 태양. 자줏빛의 빗 방울들은 사라져버렸고, 크라드메서의 머리에는 할슈타일 후작의 얼굴이 달려 있었다.
“아빠 말을 들어야지.”
“난 반드시 여기로 돌아오겠어요.”
“아빠 말을 들어야지.”
“난 반드시 여기로 돌아오겠어요.”
“엄마 말을 들어야지.”
뭐라구? 잠깐. 지금 뭐라고 했지?
“엄마 말을 들어야지! 어서 일어나, 후치!”
“도대체! 네리아는 아리따운 처녀로서의 야망도 없어요? 엄마라니! 이렇게 징그러운 아들을 그렇게 원한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문제라고 여겨지지 않아요?” “저 녀석은 일어날 때 항상 시끄럽군!”
엑셀핸드의 불평 소리와 함께 새날이 밝았다(카리스 누멘이여!). 난 침대에서 충분히 일어났다고 생각하고는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리려다가 내가 반쯤밖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리를 하늘로 차올리며 다시 침대 위에 나동그라졌다. 네리아는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어서 일어나! 이 조숙한 술주정뱅이야. 어서 출발해야지! 갈색 산맥이 너에게 찾아와 줄 때까지 기다릴 거야? 어서 일어나지 않으면 물을 끼얹어버릴 거야!” “침대가 젖을 텐데?”
“무슨 상관이람. 이대로 떠날 테니 침대 다시 사용할 일도 없잖아?”
리테들 씨가 저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아우우웅!
기지개를 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창문으로는 겨울 아침의 낮은 태양이 겨우겨우 떠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창문으로부터 반대쪽 벽을 향해 밝은 광선이 그려지고 있었다. 내 옆에 있는 네리아의 얼굴과 다리는 잘 보이지 않고 그 가슴과 팔만 보였다. 물론 그 뒤쪽으로 엑셀핸드의 얼굴은 잘 보였다. 괴상한 구도다! 난 진저리를 치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반쯤 졸면서 걸어가다가 벽을 들이박고는 주위의 시선을 무마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으로 벽에 키스해 버렸다.
“잘 잤어, 벽아?”
아무래도 주위의 시선이 더 괴상해진 것 같은데? 으음. 난 별 일 없었던 것처럼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일어났어요?”
“물론이지. 다른 사람들은 이미 일어나서, 씻고, 옷 입고, 짐 챙겼어. 아직 하지 않은 일은 아침 식사와 벽에 굿모닝 키스하는 것뿐인데.. 그거 꼭 해야 되는 거야?”
“정신 건강과 피부 미용에 좋대요.”
네리아는 벽에 키스했고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은 배를 잡고 웃었다. 엑셀핸드가 별 미친 것들을 다보겠다는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냥 히죽 웃으면서 짐을 챙겼다.
짐 다 챙기고 아래로 내려오니 우리 일행들은 이미 테이블을 잡고 모여앉아 있었다. 샌슨은 아침부터 매우 바빠 보였는데 어제 샌슨의 은혜로 이 여관에서 투숙하게 된 피난민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샌슨은 잠시 그 인사에 대답하다가, 결국 고개를 뒤흔들고는, 한손에 롱소드를 쥐고 다른 손엔 길시언을 쥐고 뒤뜰 로 달려가버렸다. 그래서 유니콘 인의 아침은 살벌한 기합 소리와 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평화롭게 시작되었다. 아름다운 아침이야.
식당에 주저앉아서 주방에서 풍겨나오는 구수한 냄새에 넋을 빼앗긴 채 난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눈 밑이 움푹 들어가 있었지만 그런 대로 평온한 얼굴이었다. 자, 어젯밤에 내가 뿌린 씨는 오늘 아침 어떤 꽃이 되어 피어날까?
칼은 네리아와 함께 들어온 레니를 바라보았다.
“아, 레니 양. 잘 잤어요?”
따스한 인사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도 괜찮은 경험이야. 난 운차이를 바라보았지만 운차이는 태평한 얼굴로 잡지를 읽고 있었다. 저건 어디서 가져온 거지? 아, 홀 에서 가져왔나 보군. 제레인트는 멍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니는 우리들을 발견하고는 상냥하게 인사했다.
“네. 모두들 좋은 밤 되셨어요? 어, 샌슨 오빠랑 길시언 씨, 아프나이델 씨는요?”
음? 그러고 보니 아프나이델은 어디로 갔지? 제레인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의 두 사람은 지금 대무를 빙자한 난동을 부리고 있는 중이고, 마지막 사람은 기주 중입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군요.”
그러자 엑셀핸드가 제레인트에게 말했다.
“그런데 자넨 아침 기도를 안 하는 건가?”
“예? 하하! 살아가는 모습이 곧 기도입니다. 제가 기쁜 마음으로 아침밥을 먹고, 그 은혜가 신께서 내린 것임을 알며, 그에 대해 감사하게 여길 줄 알면, 그게 기도지 요.”
“편리한 논리군. 하하하!”
그때 아프나이델이 조금 피로한, 하지만 밝은 얼굴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침 식사도 날라져왔다.
난동을 부리고 있던 두 사람을 불러들여 식사를 마치고 나서, 우리들은 리테들 씨에게 도시락을 부탁한 다음 홀로 몰려나와 식후의 휴식을 즐기기로 했다. 곧 바쁜 길을 떠날 것이니 잠시의 시간이라도 느긋하게 보내는 것이 낫겠지.
칼은 커피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레니 양. 그리고 침버 씨. 수도에 들리자마자 바로 떠나게 되어 안쓰럽게 생각합니다만.”
늦은 아침 기도를 드리던 제레인트는(아침 기도를 빼먹을 수는 없어서 식후에 대충 하고 때워버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밝은 얼굴로 말했다.
“아뇨, 하하하.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바쁜 일이 있을 땐 모든 것에 욕심낼 수는 없지요.”
레니도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저, 갈색 산맥으로 가서 그 드래곤을 만나고 나서 말이죠, 다시 돌아올 때도 이 길로 올 거지요? 그리고 그때는 시간이 많겠지요?”
덜커덩 하는 소리는 내 가슴에서 났다. 하지만 칼의 가슴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났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칼은 커피잔을 들어올리며(즉, 효과적으로 얼굴을 가린 다음)말했다.
“예. 시간이 많겠지요.”
“음…………, 그러면 그때는 좀 차분하게 구경할 수 없을까요? 지금은 그 드래곤이 일어나기 전에 가야 하는 거니까 급한 거겠지만, 돌아올 때는 천천히 구경 좀 해보고 싶어요. 제레인트 씨는 궁성도 구경했다고요?”
“아, 굉장한 밤이었습니다!”
“저도 깨워서 데리고 가시지. 음, 음. 돌아올 때 궁성도 구경할 수 있을까요, 칼 아저씨?”
“아, 예. 물론이죠. 그럴 수 있겠지요.”
칼은 커피잔을 높이 들어올리며 말했다. 난 좀 잔인한 계산을 깔면서 말했다.
“그때는 내가 책임지고 수도 구경시켜 줄게. 레니.”
“그래? 부탁해!”
레니는 활짝 웃으며 말했고 동시에 칼은 커피잔 속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길시언은 벽도제의 질감과 색깔에 대한 고찰을 시작했다. 흐음. 왜들 그렇게 눈길을 돌리 시는 거지? 그때 샌슨이 입을 열었다.
“저, 레니.”
“왜 그래요, 샌슨 오빠?”
아! 난 한 사람을 잊고 있었다. 가장 막강한 추진력과 그 추진력을 더욱 빛나게 하는 무모함을 골고루 갖춘 전사의 표상이여! .젠장.
“레니도 기억하겠지? 그 블루드래곤 지골레이드 말이야.”
“예? 예. 물론 기억하지요. 그런데요?”
샌슨은 내 원망스러운 눈길을 무시하면서 헛기침을 좀 한 다음 계속 말했다.
“그 블루 드래곤은 원래 우리나라의 전선에서 싸우는 드래곤이었거든.”
“예. 그랬었지요.”
“그런데 그 드래곤이 달아나버려서 바이서스는 현재 위험한 상태거든. 너도 오늘 아침 주방에서 피난민들을 보았지? 지금 전선에서 크게 밀리고 있기 때문에 남쪽에 서는 계속해서 피난민들이 발생하고 있어.”
“네…………, 안 좋은 모양이네요.”
레니는 안쓰럽다는 듯이, 하지만 자신에게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샌슨은 머리를 벅벅 긁어대며 칼을 흘긋 바라보았고 그러자 칼은 포기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나라를 도와주겠소?”
“칼!”
레니는 내 고함소리에 놀라 물컵을 엎지를 뻔했다. 칼은 날 향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잠자코 듣고 있게. 난 레니 양의 의사를 확인하고 싶을 뿐이네. 설마 레니 양의 아무런 의사 표현도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 네드발 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