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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칼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냥 자리에 앉아버렸다. 레니는 불안한 얼굴로 우리들을 둘러보고 있었고 그 얼굴은 정말 보고싶지 않았다. 칼은 침착하게 말했다. “조금 전 퍼시발 군이 설명한 것처럼, 지금 우리나라 바이서스는 지골레이드라는 강력한 드래곤을 잃은 상태요. 그래서 자이펀과의 전쟁이 매우 곤란한 상태지. 하 지만 우리 여행이 무사히 끝난다면, 우리는 크라드메서라는 새로운 드래곤을, 게다가 드래곤 라자가 함께하는 드래곤을 만나게 되오.”
레니는 멍한 눈으로 칼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파랗게 질려버리며 말했다.
“지금…………, 그 지골레이드라는 드래곤 대신 크라드메서를 원하시는 거예요? 지골레이드가 달아나버렸으니까, 대신 크라드메서를?”
“그런 셈이오.”
“그럼, 그럼 전 어떻게 되는 건데요? 전 아빠에게 돌아갈 수 없는 거예요?”
칼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크라드메서와 우리 바이서스를 연결해 주어야 되니까…………, 레니 양도 계속 우리 곁에 남아 있어야 되는 거지요.”
“싫어요!”
레니는 벌떡 일어났다. 홀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우리를 쳐다보았지만 레니는 그 시선에도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싫어요! 그런 말씀은 없으셨잖아요!”
“레니 양. 당시에는 지골레이드의 손실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뭐가 어떻게 되었건 약속은 약속이에요! 그 드래곤의 라자만 되어주면, 그러면 난 아빠한테 돌아갈 수 있다고 했잖아요!”
칼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신 우울한 얼굴을 테이블로 고정시킬 뿐이었다. 그러자 레니는 더욱 불안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설마, 설마 절 이대로 잡아두실 거예요? 혼자서는 못 돌아가니까, 데려다주지 않기만 하면 못 돌아가니까, 그러니까…”
“레니 양.”
길시언이 입을 열었다. 그는 엄숙한 얼굴로 레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리에 앉으십시오. 절대로 레니 양의 의사를 반대하거나 레니 양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명예를 걸고 맹세해도 좋습니다.”
그 말보다는 그 엄숙한 태도가 10대의 소녀에게 확실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길시언처럼 원할 때마다 왕자의 위엄을 동원할 수 있으면 참 편리하겠어. 레니는 불안 한 얼굴이었지만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길시언은 잠시 숨을 돌리고는 말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레니 양이 우리나라를 위해 크라드메서와 함께 전쟁에 참가해 준다면 우리는 레니 양의 아버님을 이곳으로 모셔오겠습니다.”
레니는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아빠를………… 여기로요?”
“그리고 아버님껜 바이서스의 왕가가 국가의 은인으로 대우하여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대우를 해드릴 것입니다. 레니 양은 아버님과 함께 이 도시에서 원하시는 만큼 윤택하고 풍족하게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예? 아빠랑 바이서스 임펠에서 살게 된다고요?”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물질적인 것밖에 없습니다만, 만일 토지나 재산을 원하신다면 당연히 제공할 것입니다. 작위를 원하신다 해도 가능 합니다. 국가의 은인이시니 공신으로서의 대우가 가능할 것입니다.”
“에에?”
레니는 길시언의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난 왠지 길시언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길시언은 합리적으로 사리에 맞게 말을 하고 있었고 그 말이 거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항구의 소녀는…………, 젠장.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
“싫어요.”
오, 맙소사! 레니는 아주 당연하다는 얼굴로 거절을 표시했고 길시언의 표정은 급소를 맞은 전사처럼 바뀌었다. 네리아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
“레니야! 뭐하는 거야? 굴러들어 온 복을 차내는 거니?”
레니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싫어요, 네리아 언니. 여긴 언니들의 나라지, 내 나라가 아니에요. 굴러들어 온 복을 차내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지상 어디를 돌아다녀 봐도 내 방 내 침대 만큼 평안한 장소는 없어요. 난 하녀를 부리거나 커다란 저택에서 으리으리한 식기로 식사를 하는 일에는 관심 없어요. 그리고 레이디라 불리면서 콧대를 세우는 일 에도 관심 없어요. 그건 일스식도 아니고, 뱃사람식도 아니에요. 물론 전 뱃사람이 아니지만, 저도 짠내 나는 바람 맞으며 자라난 계집애고, 일스의 여자답게 항구에 서 수평선으로 떠나간 선원들을 기다리는 사람이 될 거예요.”
네리아는 입을 딱 벌리고 레니를 바라보았으며 레니는 얼굴을 붉혔다. 제레인트가 특히 감동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내 얼굴도 그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아무렴! 그리고 그건 헬턴트식도 아니야. 우리나라의 고민은 우리나라에서 해결해야 해. 그리고 레니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야. 그녀는 항구의 소녀라구!
하지만 이거 정말 기뻐해야 될지 슬퍼해야 될지 헷갈리긴 하는데. 지골레이드가 없어서 지금 우리나라는 위급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할슈타일 후작은 우 리나라를 통째로 들어 자이펀에 가져다바칠 태세고. 만일 크라드메서만 있으면 이런 위기쯤, 입김에 꺼지는 촛불만큼이나 가볍게 사라져버릴 수 있을 텐데. 으으음.
길시언은 바로 그 점을 지적했다.
“레니 양……. 우리나라는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레니 양만이 우리나라를 도울 수 있습니다.”
아아! 동정심에 호소하는 것인가? 레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렇게나 위험해요? 이 나라가?”
“그렇습니다. 난 지금 단순한 전쟁의 승리를 위해 부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의 승리는 전쟁을 일으킨 자의 책임일 것입니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나 는 이 나라의 존속을 걸고 레니 양에게 부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선량한 백성들과 죄 없는 어린아이들의 이름으로 부탁하는 것입니다.”
저건 틀림없이 프림 블레이드가 불러주는 대사일 것이다. 장난을 잘 치지만 역시 착한 마법검답게 주인을 잘 모시는군. 레니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 되었다. 내가 레니라도 왕자의 부탁, 게다가 저토록 위엄 있으면서도 동시에 간절한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지는 못하겠다. 젠장.
그때 칼이 말했다.
“이 나라의 존속을 건다는 것은 좀 지나친 말이군요.”
길시언의 얼굴이 홱 돌았다. 칼은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지골레이드의 공백이 크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나라의 존속이 위험을 받을 정도는 아닙니다. 길시언. 과장은 삼가도록 하시지요. 레니 양에게 부담을 주지 마십시 오.”
칼 만세! 이제야 제정신을 차리셨군요? 어떤 합리적인 이유를 댈 수는 없지만 난 레니가 그런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싫다. 단순히 어린 계집아이라서 그럴까? 글쎄. 그 럴지도 모르지. 어쩌면 제미니 생각이 나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다. 레니는 델하파의 항구에서 그녀의 아버지와 더불어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 부탁 때문에 그 행복한 집을 박차고 우리를 따라와주었다. 그녀에게 보답은 못할망정 점점 더 큰 부담을 지우는 것은, 기본적인 도리로서 싫다!
길시언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칼…….”
그러나 칼의 얼굴은 단호했다.
“아직은 아닙니다. 우리 바이서스는 가장 우수한 마법의 전통이 이어지는 나라입니다. 빛의 탑은 아직까지 참전하지도 않았습니다.”
“빛의…… 탑이오?”
“그렇습니다. 마법사 길드원들은 전쟁의 소란 속에서도 연구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자신의 처신을 분명히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그리고 왕가 의 이름으로 부탁한다면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를 거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힘이 남아 있는 한 바이서스의 존속 위기를 거론하는 것은, 글쎄요. 마법사들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요?”
칼은 침착하게, 끝에 가서는 미소까지 지으면서 말했다. 길시언은 한숨을 쉬었다.
“듣고 보니 옳은 말입니다. 부끄럽군요. 어린 소녀를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웅변을 토했다니.”
“그 웅변 실력은………, 아닙니다.”
칼은 짓궂은 미소를 지었고 길시언의 얼굴은 붉어졌다. 킥킥. 그래. 그 웅변 실력은 길시언의 것이 아니라 프림 블레이드의 것이겠지. 레니는 의아한 얼굴이 되어 칼 을 바라보았고 칼은 차분하게 말했다.
“레니 양. 쓸데없는 말을 해서 심사를 어지럽게 해 미안합니다. 우리나라가 그토록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레니 양이 원하지 않는 일을, 우리들을 위해 할 필 요는 없습니다. 만일 레니 양이 길시언이 말한 그런 대우를 원한다면 길시언의 부탁을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대우를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부담 가 질 필요가 없으니 거절해도 상관없습니다. 레니 양의 의사대로 하세요. 그리고 어떤 결정을 내려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레니는 조금 질린 표정으로 칼의 말을 듣다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저, 저, 이 나라가 그렇게 위험한 것은 아니라구요? 확실한 거죠?”
“확실합니다. 아프나이델 씨에게 물어볼까요?”
잠자코 듣고만 있던 아프나이델은 기겁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칼은 잔잔한 미소를 띠운 채 말했다.
“빛의 탑은 바이서스가 무너져도 참전하지 않을까요?”
“예? 아, 뭐 그렇지는 않겠지요. 빛의 탑은 바이서스라는 국가에 소속된 공공단체가 아니라 탈국가적 단체이긴 합니다만, 바이서스 정부로부터 상당한 보조금을 받 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에, 뭐라 해도,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핸드레이크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한 빛의 탑이 바이서스를 외면할 리는 없습니다. 그렇게는 생각 하지 않습니다.”
길시언은 그 얼굴에 희망을 떠올렸다.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물어볼까요. 빛의 탑이 참전한다면 지골레이드의 공백을 메울 정도는 될까요?”
아프나이델의 얼굴에서 자존심의 빛이 반짝였다. 그는 어깨를 펴며 당당한 자세로 말했다.
“지골레이드의 공백을 메운다고요? 하하하. 빛의 탑에 가서 그렇게 말씀해 보시지요. 물론 요즘은 대마법사 핸드레이크나 무지개의 솔로처의 시대는 아닙니다. 그리 고 빛의 탑의 고명하신 마스터들은 너무 돌아버렸기 때문에 국가간의 전쟁이나 세상살이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으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골레이드의 자리를 메울 정도가 되냐고 물어본다면 마스터들께서는 크게 진노하실 테지요. 그리고 진노한 마스터들 앞에선, 설령 지골레이드 자신이라 하더라도 언사를 조심해야 할 것 입니다. 이 점만은 지골레이드의 앞에서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칼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일을 책임질 수 있는 성인들에게 그 웅변 실력을 사용하길 권하고 싶습니다만.”
길시언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권고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지만 레니 양.”
“예? 예?”
“내가 제안한 것들에 대해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아니! 천천히 생각해 보아요. 나쁜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해도 레니 양이 직접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드래곤 라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지요. 그러니 레니 양은 전선의 늑대 같은 병사들의 환호….., 미안합니다. 이 녀석아! 에, 어쨌든 레니 양은 안전할 겁니다. 그리고 아버님께도 좋은 일이 될 겁니다.”
저 정도는 봐주지. 이 나라에 대한 걱정에 뼛속이 타들어갈 것 같은 왕자님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니까. 프림 블레이드의 방해 때문에 격조가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크라드메서가 레니의 도움을 통해 바이서스를 지켜준다는 것은 왕자님으로서 당연히 바랄 수 있는 일이겠지. 레니는 고개를 가로저으려 했지만 길시언은 더 빠르게 말했다.
“당장 대답할 필요는 없습니다. 생각해 봐요. 뭣하다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난 후 고향에 돌아가서 아버님과 의논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레니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저, 그래도 돼요?”
“물론이지요.”
“감사합니다. 예. 정말…… 감사합니다!”
인원이 많다 보니 도시락의 부피도 엄청났다. 하지만 마차에 실을 것이니 부피는 전혀 문제가 안 되지. 유니콘 인 밖에는 어느새 주위에 할 일 없는 사람들이 꽤나 몰 려와 있었다. 언젠가 유니콘 인에서 하늘을 나는 공포의 기사들과 싸운 모험가들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쫘악 퍼진 것이다. 우리가 밖으로 나가자 몰려든 인파들은 일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인파 가운데서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여봐요! 당신들 갈색 산맥으로 드래곤 로드를 잡으러 간다며?”
허! 참 기막힌 소문의 위력이로군. 우리 일행은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제레인트가 재빨리 응수했다.
“그래요! 드래곤 로드에게 뭐 전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죽이기 전에 전해 주겠소! 하지만 장담은 못해요! 우린 눈깜빡할 사이에 드래곤 로드를 처치할 작정이거든?” 와아아! 하는 함성 소리와 함께 박수가 터져나왔다. 난 어이가 없는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프리스트가 거짓말해도 돼요?”
“재미있잖아?”
으윽. 할말 없다. 난 머리를 휘저으며 도시락 바구니들을 마차에 실어 올렸다. 큼지막한 바구니를 한 손에 세 개씩 들고 나르는 내 모습을 보면서, 몰려든 인파는 제 레인트의 말을 완전히 믿게 된 모양이다. 그중 어떤 자는 제레인트에게 다가와 드래곤 로드의 비늘 하나를 기념품으로 가져와 달라는 황당한 부탁까지 했던 것이다. 저 사람들은 300년 전 루트에리노 대왕이 드래곤 로드와 싸우던 시절에서 방금 빠져나온 사람들인가? 저런 황당한 말을 믿고 있다니. 아, 프리스트가 하는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이 더 이상한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일반론은 테페리의 프리스트 제레인트 침버에겐 통하지 않는단 말이야. 만약 드래곤 로드가 저 말을 들었다면 대미궁에서 제레인트를 살려준 일을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모르겠군.
제레인트가 우리 일행들에 대한 허무맹랑한 전설을 만들고 있는 동안 출발 채비가 완료되었다. 엑셀핸드는 제레인트의 목을 붙잡아 끌어올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아쉽다는 얼굴을 하더니 대신 그의 로브 자락을 끌어당겼다.
“이것 봐! 출발 안할 거야?”
“아, 예. 출발해야지요. 아만다! 그 동안 잘 있어요! 고트라드 씨, 사미엘 씨도! 하하하! 히드클립 씨! 언더힐 씨!”
허허, 참. 그 짧은 시간에 참 많이도 사귀었군. 제레인트는 그 외에도 꽤 많은 이름을 불렀고 몰려든 사람들은 모두 제레인트에게 열렬한 작별 인사를 보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대한 환송(우리에게라기보다는 제레인트에게 보내는 것이지만)을 받으며 출발했다. 맙소사. 꼬마들은 마차 뒤를 따라 달리며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샌슨은 킬킬 웃으며 말했다.
“일단 시장 쪽으로 가야 되는데, 어느 쪽으로 가면 됩니까?”
갈색 산맥에 도착하자마자 크라드메서가 일어나주면 좋겠지만, 어쩌면 며칠을 계속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혹은 며칠 동안 크라드메서의 레어를 찾아 돌아다녀야 할지도 모르고.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치 식량을 준비해 가기로 했다. 이런 대인원이 일주일을 먹을 식량이니 만만치 않겠지. 길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리 주시지요. 내가 몰고 갈 테니.”
길시언이 고삐를 잡고 곧 마차는 덜커덩 소리를 내고는 출발했다. 나는 오늘도 마차 지붕 위에 앉았다. 왜냐하면 시내 구경이니까. 그리고 네리아와 운차이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지붕 위에 자리를 잡았다. 저렇게 서로 아웅다웅하면서 항상 똑같은 자리에 앉다니. 아웅다웅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나 보지?
그때 유니콘 인에서 아래옷만 입은 남자 하나가 손에 든 윗옷을 마구 휘저으며 달려나왔다.
“여보시오! 이봐요, 잠깐! 잠깐 멈춰요! 원 참, 일찍들도 출발하네!”
아침 햇살이 그 머리에서 눈부시게 반사되는 암파린 선생이었다. 길시언은 황급히 마차를 멈추게 했다. 우리들뿐만 아니라 주위의 인파들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암파린 씨는 마차의 벽을 짚고서 헉헉거렸다. 그러다가 그는 주위에 몰려선 인파들이 그를 손가락질하거나 고개를 돌리며 킥킥거리는 모습을 보고는 기겁하 면서 윗옷을 입었다.
“아니, 이렇게 서두르시다니오. 왜 그러십니까?”
칼은 마차 문을 열면서 당황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암파린 씨는 얼굴뿐만 아니라 그 이마와 정수리 부분까지 벌개져서는 지붕 위를 향해 황급하게 말했다.
“아, 저, 아가씨? 빨강머리 아가씨!”
네리아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기에 내가 말해 주어야 했다. “옷 다 입었으니 고개 돌려요.” 네리아는 그제야 고개를 돌리고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떠나기 전에 꼭 해줄 말이 있었소. 어제 아가씨가 뽑은 그 패 말이오.”
“예? 아, 그거요?”
“그래요! 그거 최고의 운이오. 저분 말마따나 천기를 누설하게 되는 일이지만, 도저히 말하지 않을 수 없소. 젠장, 아가씨처럼 미녀라면 난 천기누설죄로 벼락 맞아 도 좋아. 아가씨는 말이오, 앞으로 상상도 못할 행운을 가지게 될 거요!”
아이고……………, 세상에. 난 네리아를 외면하면서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운차이는 그런 내 얼굴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네리아는 놀람 반 기쁨반의, 어쨌든 희한한 목소 리로 말했다.
“아, 예? 아, 그래요? 그렇다구요? 아, 고마워요! 그런데 이렇게 급하게 나오시다니, 아, 정말 고마워요!”
“천만에! 와하하! 길을 떠나시는 거요? 그럼 그건 행운을 찾아가는 길일 거요! 가슴을 활짝 열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시오! 가장 큰 행운을 실은 바람이 아가씨에게 불 거요! 복된 길 되실 거요!”
길시언은 싱긋 웃고는 다시 고삐를 잡아챘다.
“이랴!”
마차는 다시 출발했다. 네리아는 계속해서 뒤를 향해 손을 저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암파린 씨! 암파린 씨도 항상 즐거운 여행 되세요!”
“핫하하! 즐거운 여행을!”
난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똑바로 앉은 네리아는 무릎을 모아 감싸쥐더니 킥킥 웃기 시작했다. 흠. 그래도 부탁해 두길 잘했군. 운차이는 내게 재미있는 의 미가 담긴 것 같은 미소를 짓더니 나무 토막을 깎아대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이후로도 계속 혼자서 킥킥 웃기를 계속했다.
잠시 후 마차는 유니콘 인을 멀리 남겨두고는 시내 중심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음. 확실히 시내라서 볼거리가 많군 그래. 지붕 위에 앉기를 잘했어.
아무리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불길한 전선 소식과 헛소문이 돌아다니고 있다 하더라도 역시 바이서스 임펠은 300년 동안 굳건히 영화를 지켜온 바이서스의 수도다 웠다. 쌀쌀한 초겨울 날씨였지만 거리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주로 아침과 오전 업무에 바쁜 사람들이었다. 우유 수레를 몰고 다니며 고함을 지르는 우유 장 수의 방울 소리가 딸랑딸랑 울렸다. 아침 옷 배달을 위해 커다란 빨래 바구니를 옆에 끼고 부지런히 걸어가는 처녀들의 모습도 보였다. 겨드랑이에 커다란 책을 낀 채 어딘가의 학교 또는 사숙으로 걸어가는 젊은 학생들의 바쁜 걸음. 그런 학생들의 얼굴 중엔 불콰하게 취한 얼굴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아마 군대와 학교 양쪽을 두고 고민하느라 술을 가까이 하게 되는 거겠지. 옆구리에 연장이나 도시락 등을 낀 채 일터로 나가는 노무자들의 걸음은 유쾌했고 길거리에 늘어선 빵장수들은 소리 높여 그런 노무자들을 유혹했다. 거의 건장한 어른 팔뚝만한 빵을 휘두르며 악다구니를 지르는 아낙네의 빨간 얼굴에선 전쟁의 암울한 분위기 같은 것은 느껴볼 수가 없었다.
“꿀빵이오! 꿀빵! 한입만 먹으면 하루종일 든든한 꿀빵이오!”
“여봐요, 학생! 달콤한 살구 빵이 있어요! 당근 빵 하나 먹으면 추위도 십 리 밖으로 달아난다오!”
음. 아무래도 전통과 관습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빵장수들의 유혹도 엄정한 법도에 따라 시행되는 모양이다. 덩치로 밀어붙이는 계통의 거대한 빵들은 주로 노무자 를 그 고객으로 삼았고 입에서 사르르 녹을 것 같은 맛을 무기로 삼은 계통의 아기자기한 빵들은 수염이 조금씩 나기 시작했지만 아직 어린 티가 줄줄 흐르는 학생들 을 주요 고객으로 삼는 것 같았다.
낄낄거리며 그 광경을 구경하는 내 눈에 파란 머릿수건을 쓴 조그만 소녀 하나가 들어왔다. 소녀도 아마 빵을 팔려고 나온 모양인지 팔에는 커다란 바구니를 걸고 있 었다. 하지만 수줍은 탓인지 앞으로 나서지도, 고함을 질러 손님들을 부르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결심을 굳힌 듯이 입을 조금 열었다가 곧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다행히 그때 앞에서 다른 마차들이 몇 대 굴러와서 정체를 일으켜 우리 마차는 천천히 굴러가게 되었고, 난 재빨리 지붕 옆으로 몸을 내밀면서 외쳤다.
“아가씨! 거기 머릿수건 두른 아가씨! 빵 파는 겁니까!”
소녀는 이 뜻밖의 행운에 놀라 잠시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되어 날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날 부른 거예요? 난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빵 주고 내 돈 사가지 않을래요?”
“예? 아, 예? 쿠키…………, 드시겠어요?”
길시언은 잠시 뒤를 돌아보더니 곧 마차를 서행시키기 시작했다. 왕자님. 복 받으시지요. 그런데 빵이 아니라 쿠키인가? 그것도 좋지! 조금 전 아침 식사를 든든히 한 참이니. 소녀는 마차 옆을 따라 황급히 걷기 시작했고 난 한 손으로는 마차 지붕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지붕 가장자리를 단단히 붙들고 다른 손으론 주머니를 뒤적 거리면서 고함질렀다.
“그 바구니째로 팔아요! 어차피 긴 여행이 될 테니까! 얼마면 되겠어요?”
소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난 그녀의 옷이 먼지와 흙 등에 엉망인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 아침인데 왜 저렇게 옷이 지저분한 것이지? 게다가 아무리 보아도 여행복처 럼 보이는 옷이다. 두꺼운 외투에 나막신까지. 소녀는 바쁜 걸음으로 마차를 따라 걸으면서 숨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바, 바구니째로요? 아, 이, 이거 하나 1퍼셀인데··
“바구니까지 2셀이면 되겠어요?”
“예? 아, 그건 너무 마, 많은데요?”
“모자란 것은 아니죠? 그럼 됐어요! 치마 잡아 올려요!”
“예? 치마……요?”
소녀는 당황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간신히 내 말을 이해했다. 난 동전 두 개를 아래로 떨어뜨려 주었고 소녀는 치마를 들어올려 그 동전들을 받아냈다. 좋았어! 그리고 소녀는 바구니를 두 손으로 들어 위로 올려주었고 난 간단히 그 바구니를 낚아올렸다. 주위를 걸어가던 사람들이 모두 멈춰 서서 구경하다가 미소를 짓거나 박수를 쳤다. 소녀는 제자리에 서서는 숨을 쌕쌕 몰아쉬며 동전들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크게 외쳤다.
“고마워요! 정말 고맙습니다!”
“추우니 빨리 들어가 봐요!”
난 낄낄 웃으며 다시 지붕 위에 똑바로 앉았다. 네리아는 피식 웃더니 바구니에 손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마음이 움직인 거니? 확실히 여자에 약하네.”
“관둬요. 피난민이에요.”
“응?”
난 다시 한번 그 소녀를 돌아보려 했지만 이미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피난민들이 몰려들긴 하는 모양이네요. 옷도 남루한 여행복이고, 아직 장사에도 서툴러요. 아마 바이서스 임펠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래 서 저런 장사를 시작해 본 거겠지요.”
“그런 거니? 음…………… 그래도 너무 많이 줬어. 저 애가 매일 그런 행운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면 어쩔래?”
“그런 걸 기대할 정도로 멍청하다면? 순결한 소녀와 엘프를 돌보시는 그랑엘베르께서 저 소녀에게 매일같이 나 같은 행운의 소년을 보내주시겠지요. 그 멍청함에 대 한 보답으로.”
나무토막을 깎고 있던 운차이는 내 말에 피식 웃었다. 하지만 네리아가 쿠키 하나를 꺼내어 들고는 위로 던졌다가 입으로 받아내는 모습을 보더니 운차이는 뭐라고 중얼거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네리아는 그 얼굴을 보더니 볼을 크게 부풀렸다. 뭐라고 말은 하고 싶은데 입에 쿠키가 가득 들어차서 말을 못하는 모양이다. 난 킬킬 웃으며 바구니를 마부석 쪽으로 보냈다.
“샌슨? 먹을래?”
“쿠키? 별 생각 없어.”
“아니, 쿠키 말고 바구니 말이야.”
“크악!”
바구니가 지붕 위와 마부석을 돈 다음, 난 창문을 통해 마차 안의 사람들에게 바구니를 건네주었다. 마차 안에서는 제레인트의 환호 소리가 들려왔지만 잠시 후 제레 인트는 기막힌 목소리로 외쳤다. “엑셀핸드! 그렇게 많이 집어가면 어떻게 해요!”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시장에 도착했다.
시장의 분위기도 확실히 수도의 시장다운 분위기였다. 이곳에 없는 물건이 있다면 그건 아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일 거야. 온갖 과일과 음식들이 즐비하게 늘 어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 군침이 돌았다. 웬 사내는 자신이 오늘 완전히 망하기로 결심했다고 외치면서 저렴한 가격으로 손님들의 발길을 유혹했다. 확신할 순 없지 만 저 사내는 아마 내일도, 모레도 계속 망할 생각이겠지. 하하하. 그 옆에선 다른 사내 하나가 한술 더 떠서는 자신은 오늘 물건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참이라고 떠벌리고 있었다. 저 남자는 아마 틀림없이 고향이 바이서스 임펠일 거야. 운차이는 그리움에 사무치는 얼굴로 어느 포목 장수가 휘두르는 포목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칙칙한 표정을 지어요?”
“칙칙한……, 젠장. 저건 무명이다.”
“무명? 목화에서 만들어낸다는 천 말이에요?”
“아는 게 많구나. 목화는 뜨거운 태양빛을 받으며 자라나는 식물이지. 저걸 이 북부의 땅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아하.”
운차이는 은은한 눈빛으로 그 무명을 바라보며 마치 졸린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새해가 오면 저걸로 Guavrawn을 만들어 입었지…………. 자이펀 처녀들은 모두 정숙해서 집 밖으론 그 얼굴을 절대 내보이지 않아. 그렇지만 사람들은 Guavrawn에 새겨진 수예를 보고 처녀의 솜씨와 인품을 짐작할 수 있지. 어느 집 처녀의 바느질은 성급하다, 혹은 어느 집 처녀의 바느질은 따스하다, 이런 식으로 말이야.” “바느질이………… 따스해요?”
“그런 게 있나 보더라. 난 잘 모르지만.”
하지만 난 잘 모르지 않는단 말이야. 우리 집에서 바늘을 붙잡고 손가락을 찔리는 사람은 바로 나라구. 그래봐야 바느질 하지 않으면 도저히 걸치고 다니기 어려울 정도일 때만 마지못해 하는 바느질이긴 하지만, 그래도 바느질이 따스해? 허, 그것 참.
“따라서 자이펀 처녀들은 Guavrawn 수예를 가지고 자신을 과시하기 때문에 연말이면 그런 난리도 드물지. 고운 색실은 모조리 동이 나고 바느질 솜씨가 좋은 부인 네들은 극진히 대접받으며 집집마다 모셔져 간다.”
“아하? 대단하겠네요? 아니, 잠깐! 그럼 처녀들 대신 부인네들이 바느질을 한다는 건가요?”
운차이는 의아한 얼굴로 날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남자들은 규방의 일에 간섭할 수 없어. 그래서 처녀가 바느질을 하는 것인지 불려간 부인네가 바느질을 한 것인지는 두 사람만 아는 비밀이지.”
“에엣?”
“하지만 대개의 경우 부인네는 지도를 하고 처녀가 손수 바느질을 한다고 알고 있다. 부인네들을 초청할 때도 이렇게 하지. ‘미욱한 여식의 손길이 둔하니 부인의 민 활하신 손길을 견식하여 그 우둔함을 깨우칠 수 있도록, 부인께서 저희 누옥에 잠시 왕림해 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 정 짓지 마. 바이서스어잖아. 어쨌든 그것은 처녀의 자존심 문제이고, 설령 바느질이 누구의 솜씨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다시 없이 무례한 행위지. Guavrawn 수예에 관련된 재미있는 옛 이야기도 많다. 헤어진 애인을 수예 솜씨로 다시 찾는 이야기라든지 손을 다친 처녀를 위해 거미가 수예를 대 신해 준 이야기라든지.”
“우와! 해줘요!”
“별로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다. 그리고 일이 있잖아.”
일? 장 보는 일? 쳇. 그때 네리아가 말했다.
“헤에…………. 얼굴도 못 본 채, 진짜인지 의심스러운 그까짓 수예 솜씨 하나만 가지고 여자를 골라야 되다니, 자이펀 남자들도 불쌍해.”
그러자 운차이의 눈에서 시퍼런 불길이 쏟아지는 듯했다. 하도 격렬한 변화라서 나도 네리아도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못한 채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네리
아를 씹어 삼킬 듯이 바라보더니 곧 고개를 돌리며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수예는 처녀의 고귀한 덕목이라고 전해 줘, 후치. 아름다운 용모나 눈을 어지럽히는 몸매 따위보다는 훨씬 고귀한 것이라고.”
“라는데요?”
“헤? 그게 뭐 덕목씩이나 된다는 거야?”
“자기가 할 줄 모른다고 해서 그 일을 비난하는 것은 다시 없는 바보라고 전해 줘, 후치.”
이번에는 전해 줄 새도 없었다. 네리아가 날카롭게 말한 것이다.
“뭐야? 누가 못한다는 거야! 그까짓, 바늘에 실 꿰서 천이나 집적거리는 거 누가 못해!”
운차이의 외면한 옆 얼굴에서 미소가 떠올랐다. 상당히 경멸 섞인 미소였다. 운차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음흉한 미소만으로도 수십 마디의 말을 한 셈 이나 다름없었다. 네리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바뀌었다.
“너 지금 난 죽었다 깨도 수예는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죽었다 깨면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죽을 필요는 없다고 전해 줘.”
운차이의 대답은 평온했지만 네리아의 눈썹은 더욱 곤두섰다.
“그래? 정말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어디 두고 봐!”
뭘 두고 보란 말이지? 네리아는 갑자기 마차 위에 묶었던 짐더미 중에서 말들을 마차에 매어두느라 필요가 없어진 안장들을 뒤적거리면서 말했다.
“후치야! 바늘이랑 실 어디 있어?”
“윽. 설마 이 위에서? 그리고 뭘 바느질할 생각인데요?”
그러자 네리아는 고개를 돌리더니 날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슬그머니 올라감과 동시에 난 싸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안 돼요!”
“안 되긴 뭐가 안 돼. 소매 하나만 찢어. 내가 감쪽같이 기워줄게.”
“안 돼요! 다가오지 마세요! 꺄아악! 이거 놔줘요.”
윽. 좀 이상한 상황이다. 하지만 저건 내가 한 말이 아냐. 나와 네리아는 얼빠진 얼굴로 동시에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고 그곳엔 웬 소녀 하나가 건장한 남자들에게 손 목이 잡힌 채 끌려가는 것이 보였다. 소녀를 끌고 가려는 남자들은 모두 세 명인데 하나같이 건장한 체구에 검을 지니고 있었다. 소녀는 반항하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 고 주위의 상인들이나 시장 손님들은 놀라면서 물러났을 뿐 소녀를 도와줄 기색은 없어보였다. 난 즉시 마차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쿵! 아이고, 발바닥이야! 뒤에선 네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소녀들을 위한 행운의 소년, 또 한 번 나가…… 벌써 갔네?”
검을 빼들지는 말자. 일단 무슨 일인지 알아본 후에 행동하는 거야. 함부로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되겠지. 난 재빠른 걸음걸이로 남자들에게 다가가서는 정중하게 말했다.
“이거 봐요. 당신들 연애 한 번도 못 해봤지요?”
이 정도면 퍽 정중하잖아? 소녀를 붙잡고 있던 남자는 돌아볼 여유가 없었지만 다른 두 남자들은 어이없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중 나에게 가장 가까이 있던 털 북숭이 남자가 말했다.
“뭐라구?”
“에스코트 솜씨가 별로인 것을 보고 알았지요.”
주위의 구경꾼들 사이에서 실소가 터져나왔다. 털북숭이 남자는 기막힌 표정으로 날 보더니 히죽 웃었다.
“재미있는 놈이군. 꼬마가 상관할 일이 아니니 꺼져라.”
난 다시 뭐라고 한마디 해주려 했다. 그때 털북숭이 남자 뒷편으로 끌려가던 소녀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어라? 저 얼굴은 어디서 한번 본 적이 있는데? 어디더라? 그때 내 뒤쪽에서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면, 난 어떻습니까?”
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샌슨을 보면서 휘둥그레진 털북숭이 남자의 눈을 보면서 즐거워하기 위해서였다. 털북숭이 남자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공연한 일에 끼어들지 마! 나설 데가 있고 나서지 않을 데가 있다.”
그러자 다시 다른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아, 하지만 저 목소리는 나서면 안 되는데!
“난 지금껏 나서는 데 있어 허락을 받은 적이 없소. 왜냐하면 싸가지가 없기 때문에….. 야, 이 자식아!”
역시. 주위의 구경꾼들이 폭소를 터뜨리는 것을 보면서 난 길시언과 일행이 아닌 것처럼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될지를 잠시 고민했다. 털북숭이 남자는 화를 내야 할 지 웃음을 터뜨려야 할지를 고민하는 얼굴이었고 그 와중에 샌슨과 길시언은 각자 내 좌우에 섰다. 음. 그래. 후치와 두 별이다. 크하하! 그때 세 번째 별이 다가오면 서 말했다.
“어라? 저 소녀는………… 에포닌 할슈타일?”
칼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나도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맞았어! 에포닌 아가씨. 디트리히 할슈타일의 누나였지? 언젠가 유니콘 인으로 우리들을 찾아왔던. 그런데 저 소녀가 여기서 뭐하는 거지?
털북숭이 남자는 당황한 얼굴이 되더니 말했다.
“아니, 네 녀석들이 어떻게 아가씨를 알고 있는 거냐?”
아가씨 길시언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너희들, 할슈타일 가의 종복인가?”
이 말에 털북숭이 남자뿐만 아니라 다른 남자들 모두가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털북숭이 남자는 신중한 성격인 모양이다. 남자는 길시언의 얼굴을 보다가 고 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만, 그쪽은 뉘신지요?”
이 친구들 할슈타일 가문의 아랫사람들인가 보군. 길시언은 팔짱을 끼더니 털북숭이 남자의 얼굴을 비스듬히 쳐다보았다. 길시언이 팔짱을 끼자 프림 블레이드는 심 심해졌는지 갑자기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 소리를 들은 털북숭이 남자는 얼굴 색깔을 바꾸는 신묘한 재주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털북숭이 남자가 창백 한 얼굴로 목에 걸린 어떤 말을 꺼내놓으려 애쓸 때 길시언의 입이 먼저 열렸다.
“난 길시언 바이서스라고 하는데.”
“전하!”
세 명의 남자들은 일사불란하게 무릎을 꿇었다. 퍼버버벅! 누가 보면 꽤나 연습한 동작이라고 생각하기 적당한 모습이었다. 주위의 구경꾼들은 시장의 소란 때문에 길시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는지 의아한 얼굴로 무릎을 꿇은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남자들이 무릎을 꿇자 길시언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에포닌은 남자들이 무릎을 꿇느라 자유로워졌지만 잠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한 채 길시언을 바라보았 다.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모두 일어나시오.”
“부, 불충을…….”
“일어나라고 했잖소.”
길시언의 위압이 담긴 목소리에 남자들은 모두 벌떡 일어났다. 칼이 앞으로 나서더니 말했다.
“당신들이 할슈타일 가문의 사람들이라면, 왜 이런 시장 바닥에서 에포닌 아가씨를 끌고 다니는 거요? 이해되지가 않는데.”
그때 에포닌이 앞으로 달려나왔다. 남자들은 에포닌을 붙잡으려 했지만 의외의 상황이라 손을 쓰지 못했다. 에포닌은 길시언의 앞에 쓰러지듯 무릎을 꿇으며 길시언 의 다리를 붙잡았다. 길시언이 당황한 얼굴로 내려보는 가운데 에포닌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왕자님이시죠? 궁성을 떠나 방랑하신다는 길시언 왕자님이시죠? 그리고, 당신은 그 영지의, 디트리히가 갔던 그 영지의 전권 대리인이시죠?”
길시언과 칼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포닌은 말했다.
“절 좀 구해 주세요! 저 사람들이 절 데려가지 못하게 해주세요! 제발, 왕자님!”
왕자님이라는 말에 주위의 구경꾼들은 눈이 튀어나오도록 놀랐다. 하지만 나는 에포닌의 말에 더 놀랐다. 자기 집의 하인들에게서 도망가려는 아가씨라구? 털북숭 이 남자의 눈에 순간 번뜩이는 빛이 지나간 것 같다.
“전하. 저는 할슈타일 가문에 봉사하는 사무엘 드라이첵이라고 합니다만. 이건 할슈타일 집안의 일이니 전하께선 상관하실 바가 아닙니다.”
길시언은 아직까지도 당황한 얼굴로 에포닌을 내려다보다가 사무엘 씨를 바라보았다를 반복했다. 에포닌은 길시언의 다리를 마구 잡아당기며 외쳤다.
“전 싫어요! 절대로 그 집엔 돌아가지 않겠어요! 전 할슈타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뭐가 할슈타일 집안의 일이라는 거예요? 말도 안 돼요!”
“아가씨!”
사무엘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때 길시언이 손을 들어 사무엘의 말을 막더니 에포닌을 부축하여 일으켰다. 에포닌은 흐느끼며 일어났고 길시언은 잠시 뭐라고 말 하려 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네리아. 에포닌 양을 좀 부탁할까요?”
네리아는 이미 마차에서 내려와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나서서 에포닌을 끌어당겨 안았고 길시언은 그 앞을 막아섰다. 사무엘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전하!”
“누가 주인이냐?”
“예?”
“네가 주인이냐, 아니면 이 어린 아가씨가 주인이냐? 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강제하는 법도는 듣지 못했다. 전후 사정은 네 말마따나 할슈타일 집안의 일일 테니 내 알 바 아니지만, 난 이런 하극상은 보아넘길 수 없다. 나라 안의 모든 예법을 감독할 책임이 있는 왕가의 사람으로서도, 한 자루 검을 쥐어 약자를 보호할 책임이 있는 기사로서도.”
사무엘의 얼굴에 난색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다른 두 남자가 굳은 얼굴을 한 채 앞으로 나섰고, 나와 샌슨도 길시언의 옆으로 바싹 붙었다. 하지만 길시언은 두 팔 을 벌려 나와 샌슨을 밀어내듯이 하면서 앞으로 나섰다.
“말해라! 누가 주인이냐?”
“전하. 물론 전 에포닌 아가씨의 아랫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전 후작님으로부터 아가씨를 모셔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제 의지는 곧 후작님의 의지입니 다. 설마 전하께선 어버이가 그 딸의 아랫사람이라고는 하지 않으시겠지요?”
이번엔 길시언의 입이 막히고 말았다. 이런, 이런 안 되겠군. 그때 칼이 재빨리 치고 나섰다.
“이것 봐요. 내가 한마디 할까요?”
사무엘은 눈자위를 희번덕거리며 칼을 쏘아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칼은 그를 마주 쏘아보며 말했다.
“길시언 전하께선 할슈타일 후작 가문의 가정 내 문제에 대해 간섭하시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한당 같은 남자 세 명이 스스로를 후작의 하인 이라 말하면서 에포닌 아가씨를 강제로 끌고 가려는 장면을 보아넘기실 수는 없지요. 섣불리 이 말 저 말을 다 믿을 수야 없지 않겠소? 따라서 전하께선 후작님께 직 접에포닌 아가씨를 넘겨드려야 안심할 수 있으실 겁니다. 그것이 평소 후작님에 대해 신뢰와 애정을 지녀오신 전하께서 취하실 당연한 행동이지요.”
크핫! 멋져! 사무엘은 입을 딱 벌린 채 칼을 바라보았지만 칼은 쉴 새 없이 말했다.
“따라서 전하께선 에포닌 아가씨를 보호하실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일정이 바쁜 관계로 후작님을 직접 찾아뵙고 아가씨를 보내드릴 수는 없겠군요. 미안하지만 가서 후작님께 전해 주십시오. 바이서스의 왕자 길시언 바이서스 전하께서 에포닌 아가씨를 보호하고 있겠다고. 물론 할슈타일 후작님은 바이서스의 왕가에 대한 깊은 신 뢰와 존경을 가지신 분이니, 길시언 전하께서 어버이인 자신만큼이나 극진한 애정으로 에포닌 아가씨를 돌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실 거요. 아, 당연한 말이지만 우 리들의 바쁜 일정이 끝나는 대로 에포닌 아가씨는 후작가에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에포닌 아가씨께서 원하신다면 그보다 빨리 돌아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오직 아가씨의 뜻이지요. 후작이 여기 계시지 않는 이상 전하께선 아가씨의 의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실 겁니다. 후작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처사에 대해서는 당연 하다고 말씀하실 거요.”
사무엘은 완전히 입이 막혀버린 듯했다. 그가 더듬거리며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칼은 잠시의 시간도 지체하지 않았다.
“그럼, 수고들 해주기 바라오.”
칼은 그렇게 말하면서 재빨리 네리아에게 눈짓을 보내었다. 네리아는 방긋 웃으며 그대로 에포닌을 감싸안은 채 마차로 걸어갔다.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납치극이 었고 사무엘은 아무 말도 못한 채 그 광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네리아가 마차의 문을 열었을 때에서야 사무엘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자, 잠깐! 이건 도대체…………, 응?”
사무엘의 말이 뚝 끊어지면서 그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가 다시 가늘어졌다. 무슨 일이야? 뒤를 돌아보니 마차에선 레니가 고개를 조금 내밀고 있었다. 레니를 보고 놀라다니? 으악! 이런, 빌어먹을!
“제기랄!”
“왜 그래, 후치?”
샌슨이 물어왔지만 대답해 줄 틈도 없었다. 사무엘은? 과연, 사무엘은 길시언에게 후다닥 인사를 하고 있었다.
“전하의 말씀, 지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에포닌 아가씨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무엘은 그렇게 예법이고 뭐고 완전히 무시하면서 말한 다음 길시언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뒤로 물러났다. 그는 그대로 나머지 남자들을 인솔해서 바삐 걸어갔 고 길시언과 칼은 멍한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에포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투였다. 젠장! 저 친구는 지금 당장 할슈타일 후작에게 달려가 레 니의 일을 말하려는 거겠지.
“뭐야, 저 친구? 포기가 빠른데?”
길시언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아. 그게 아니지요. 왕자님.
후작은 이제 레니가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겠군. 레니라는 이름이야 모르겠지만, 최소한 우리가 붉은 머리 10대 소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알게 될 테고, 그러니 레니가 바로 자신의 딸이라는 것쯤은 간단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행동으로 나오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