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6권 – 제12부 : 불길한 예언 6화

드래곤 라자 6권 – 제12부 : 불길한 예언 6화

6

“멋지네요? 아가씨.”

“아, 이젠 그냥 에포닌이라고 불러주세요. 전 할슈타일이 아니에요.”

“그래요? 하하. 알았어. 에포닌.”

“난 어때, 후치야?”

“남자 친구 있어? 없다면 내가 도전해 보고 싶은데.”

레니는 웃으며 주먹을 들어올렸고 난 피하는 척하며 낄낄 웃었다. 에포닌과 레니는 모두 데미 공주님이 준비해 준 옷을 입고 나타났는데, 도대체 데미 공주님은 어떻 게 저런 옷을 가지고 있었을까? 두 사람 모두 여행에 대비해서인지 두꺼운 셔츠에 바지, 그리고 재킷과 외투를 입고 목도리와 장갑까지 갖춘 채 나타났다. 저렇게 차 려입으면 따스하고 좋긴 하겠지만 어째 옷들이 하나같이 공주님이 가지고 있을 옷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길시언이 내 의문을 해결해 주었다.

“이거 말이야? 사실은 내 옷이었어.”

“예?”

“어릴 때 저런 옷을 입고 담을 넘었지. 저건 아홉 살 때 입던 거고, 저건 열네 살 때 입던 거군. 데미가 아직도 저 옷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오, 그렇게 오래된 옷이 저렇게 깨끗해? 데미 공주님의 손길은 정말 신기할 정도로군. 에포닌과 레니는 각자 놀란 눈으로 자신의 옷을 내려보았다. 길시언은 피식 웃 으며 말했다.

“나 입던 옷 물려줘서 미안하오, 아가씨들. 다음에 내가 옷 한 벌씩 선물할 테니 지금은 참고 마차에 올라줘요. 벌써 해가 높으니.”

길시언은 손을 내밀어 레니를 부축하는 시늉을 했고 레니는 방긋 웃으며 길시언의 손을 붙잡으며 마차에 올랐다. 칼은 에포닌에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에포닌 양. 할슈타일 가문으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생각입니까?”

에포닌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럼 좋습니다. 일단 우리와 동행하도록 합시다.”

“정말이요? 고맙습니다!”

에포닌은 곧장 칼에게 달려들어 키스라도 할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아가씨가 마음 편히 지낼 장소를 물색해 보겠습니다. 그 동안만 우리와 동행하는 겁니다.”

에포닌은 뭐라고 대답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가 귀찮아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일은 험한 일입니다. 그리고 아가씨는 우리 목적을 알지도 못하고 거기엔 상관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일이 끝날 때까진 아가씨를 어딘가 안전한 곳에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됩니다.”

“예…………. 거두어주신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여행하는 도중 아가씨의 친부님의 소식도 계속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버님의 소식을 가지고 아가씨를 찾아갈 수도 있겠지요.”

“예? 정말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그러지요.”

“정말…………, 아무런 면식도 없는 저에게…………… 감사합니다.”

칼은 잠시 에포닌을 바라보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동생분을 잊었던 일에 대한 사죄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아뇨, 그건…….”

“더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야기는 긴 편이 좋습니다만 행동은 빠른 것이 나을 때가 많지요. 아가씨가 내 제안에 찬성한다면, 이만 출발하고 싶습니다만.” “아, 예. 저……………, 정말 고맙습니다.”

칼은 빙긋 웃더니 길시언의 흉내를 내어 손을 내밀었다. 에포닌은 활짝 웃으며 칼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마차에 올라탔다.

우리는 그대로 궁내부장 리핏 트왈리전 씨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임펠리아를 빠져나왔다. “아아아! 길시언 왕자님! 식사 준비 끝났단 말입니다! 밥 한 술 뜨지도 않고 떠나는 겁니까! 또 이러실 거라면 다시는 오지 마세요! 늙은 궁내부원 가슴에 더 못질하지 말고! 왕자님이야 편할 때 왔다가 마음대로 떠나면 그만이지만, 귀족 원이나 국왕 전하께서는 절 가만두시질 않는단 말입니다!” 길시언은 따스하게 고함질렀다. “다음엔 궁내부장에게 뭐 선물이라도 하나 사들고 오겠소!”

난 다시마차 지붕 위로 올라갔고 지붕 아래쪽에서는 네리아와 레니, 그리고 에포닌까지 합세해서 뭐라고 웃으며 떠들었다. 주로 네리아가 에포닌의 기분을 달래기 위해서 떠드는 것 같다. 그리고 네리아가 마차 안으로 내려간 대신 칼이 마부석으로 나왔다. 칼은 마부석에 앉은 채 무슨 깊은 생각에 빠져든 모양이다.

난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어쩔 생각이세요, 칼?”

칼은 마부석에서 고개를 돌려 지붕 위의 날 올려다보았다.

“무슨 말인가, 네드발 군?”

“에포닌 말이에요. 어디에 데려다줄 생각이신데요?”

“그랜드스톰을 고려해 보긴 했는데, 글쎄. 수도에 있으니 마땅치는 않군. 후작의 입김이 닿는 장소는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가까워. 수도에서 적당히 떨어진 곳이 좋 겠는데.”

“우리는 지금 갈색 산맥으로 찾아가는 중이잖아요. 크라드메서를 만나기 위해. 그런데 중간에 시간을 지체할 수 있나요?”

“모르겠군. 어려울 거라고 생각되는데.”

“그럼, 크라드메서의 일이 끝날 때까지 에포닌을 계속 데리고 있을 생각인가요?”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길시언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칼은 그에게 조나단 씨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잠시 후 길시언은 허옇게 질려버린 얼굴로 신음하듯 말했다.

“그렇다면 할슈타일 후작은, 디트리히를 빼앗기 위해 그 어머니를 죽이고, 그 아버지는 폐인 비슷하게 만든 셈이군요?”

칼은 마차 뒤를 흘긋 돌아보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길시언은 마치 생명이 없는 무엇이 쓰러지는 듯한 무력한 동작으로 좌석에 등을 기대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자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될지…………. 죄가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받을 벌은 하나도 받지 않았습니다. 난 도저히 이자를 그냥 둘 수 없습니다.”

칼은 길시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엉뚱한 말을 했다.

“전 한 가지가 궁금합니다.”

“뭐가 말입니까?”

“넥슨과 할슈타일은 왜 반목하는 걸까요?”

“예?”

칼은 천천히 과거를 회상시키는 어투로 말했다.

“그때 기억나십니까? 우리가 할슈타일 후작의 집에서 넥슨의 비밀 서류를 훔치던 때. 할슈타일 후작은 자신이 그 서류를 가지고 있었던 이유를 어떻게 설명했지요? 그는 넥슨에게 반역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막기 위해 서류를 가져가던 사절을 붙잡아 그것을 빼앗았다고 말했습니다.”

“예. 그렇게 말했지요.”

“그게 이상하다는 겁니다. 넥슨은 이리라 할 만한 자입니다만, 그렇다면 할슈타일 후작은 승냥이라고 해야겠지요. 넥슨이 드러내 놓고 반역 의도를 실행한다면 할슈 타일 후작은 은근히 반역의 계책을 세워보며 혼자 히죽 웃는 자입니다. 물론 그 의도의 불순함이나 사악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할슈타 일이 넥슨을 저지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독수리와 들개는 동업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독수리와 들개는 같이 시체를 먹는다. 길시언은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며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요…………. 내 보기엔 두 승냥이 싸움에 바이서스라는 고깃덩이가 너덜너덜해지는 듯합니다.”

“전하.”

길시언은 이제 더 이상 화낼 기운도 없다는 듯이 축 늘어진 채로 웅얼거렸다.

“넥슨의 경우엔 차라리 낫지요. 아직도 그 음흉한 야심으로 크라드메서를 노리고 있긴 하지만 여러분 덕택에 패퇴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여러분들과 나 모두가 현재 까진 그를 억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할슈타일이라는 승냥이는 눈이 넷 달린 놈인 모양입니다. 놈은…… 지골레이드를 풀어줌으로써 바이서스를 약화시키고, 돌맨이 라는 수단을 이용해서 역시 크라드메서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결정적으로 책잡힐 일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작자는 위험 부담을 덮어쓰지 않 으려 드는 소악당 같군요. 진짜 악당보다 더 음험하고 파렴치한 놈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

“뭐?”

운차이의 말이었다. 길시언은 뒤를 돌아보았고 나도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태평한 모습으로 나무를 깎고 있었다. 길시언은 섬뜩한 눈초리로 운차이를 바라 보며 말했다.

“할슈타일이 악당이 아니란 말이냐?”

“아니. 내가 말한 것은 돌맨에 대한 것이다.”

길시언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돌맨?”

“그래. 할슈타일 후작이 크라드메서를 노리고 있긴 하겠지만, 돌맨은 아냐. 돌맨은 불안한 카드지. 그에 비하면 레니는 으뜸패라 하겠고.”

갑자기 웬 도박사 같은 말이냐? 길시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운차이는 여전히 손에 들려 있는 나이프와 나무 토막만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감시하는 자들이 있군. 저쪽 왼쪽 골목 어귀…………. 멍청하게 쳐다보진 않겠지.”

순간 등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목을 간질이는 옷깃의 느낌마저 낯설게 느끼며 나는 조용히 바스타드를 등에서 풀어서 다리 앞에 내려놓았다. 지붕 위에 앉은 채로 바스타드를 뽑기는 어려울 테니까. 그러곤 기지개를 켜는 척하면서 ‘멍청하게도’ 왼쪽 골목 어귀를 바라보았다. 운차이가 혀를 찼지만 이미 늦었다.

젠장! 눈이 마주쳐버렸어!

골목 어귀엔 한 사나이가 무심한 얼굴을 한 채, 그냥 지나가던 인파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소가 섞인 6두 마차를 보는 시선으로는 더할 나 위 없이 적합하고 흠잡을 데라곤 전혀 없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선은 주위에도 많이 있어서 유난스러워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남자의 눈과 내 눈이 마주친 순간 남자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고 그 시선의 회피는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칼은 팔짱을 끼더니 옆 건물의 빗물받이 통에서 아직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후작은 이미 사무엘에게 보고를 받은 모양이군요.”

길시언은 어젯밤에 내린 비 때문에 대로에 만들어진 물자국들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며 역시 무심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나올까요?”

“일단 대로에서 멍청한 짓을 하진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성문 밖에서 우릴 공격할까요?”

“그래줬으면 좋겠습니다. 피를 보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길시언은 짧고 잔혹하게 말했다. 칼은 고개를 조금 숙이는 것으로 당혹감을 표시하며 말했다.

“전하?”

“길시언입니다. 그냥 기분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칼과 길시언의 대화가 끝나자 샌슨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들에게 투덜거리며 고삐를 놀렸다.

“에라, 이 자식들아. 여행은 시작도 않았는데 벌써 게으름을 부리냐?”

샌슨의 말을 마지막으로 마부석의 세 남자는 다시 조용한 침묵 속으로 들어갔고 지붕 위의 운차이도 한결같은 태도로 나무를 깎았다.

오전의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사각, 사각, 운차이의 손놀림에 따라 티끌들이 긁혀나와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젠장. 난 왜 저렇게 침착할 수가 없는 거지? 나도 모르게 다시 그 남자를 바라보다가 난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돌리기 직전, 골목 어귀에 서 있던 남자는 골목 안으로 스르르 사라졌다.

마차는 분주히 바이서스 임펠의 낮을 달려 이윽고 성문에 이르렀다. 임펠 리버 위에 걸려 있는 다리로 나서자 황야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제대로 느껴지기 시작했지 만, 시선을 확 끌어당기는 것이 있어 바람의 차가움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차 창문으로 네리아가 고개를 내밀면서 말했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어머나? 웬 사람들이?”

임펠 리버에 걸려 있는 다리는 소규모의 병목 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사방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모두 바이서스 임펠에 들어가려고 들었고 그래서 지금 다리 입구 에서는 작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초소 경비 대원들이 모조리 몰려나와 바이서스 임펠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인원이 모자란 것인지 조 사는 빠르게 진행되지 못했다. 그 동안에 늘어서버린 인파들 가운데서는 고함소리와 거친 명령, 간혹 욕설들이 들려왔다. 그 불안스러운 소음들 사이로 어디선가 아 이의 울음소리도, 그리고 우는 아기를 달래기 위해 애쓰는 어머니의 숨죽인 목소리도 애처롭게 들려왔다. 그리고 지평선 쪽으로도 어제 밤새도록 걸어온 것이 분명한 사람들의 모습들이 점점이 이어지고 있었다. 모두들 가족들이나 친지들인지 네댓 명, 혹은 일고여덟 명 등으로 무리를 이루어 걸어오고 있었는데, 소달구지에 가족들 을 태운 채 걸어오는 사람들의 모습도 있었지만 무거운 짐을 지고 인 채 두 발로 힘겹게 걸어오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이런…………. 피난민들이군.”

칼은 맥이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길시언은 그만 목이 꽉 막힌 표정을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소처럼 눈을 껌벅거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비대원들은 들어오려는 사람들만 해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어서인지 나가려는 사람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경비대원 하나가 우리를 담당했지만 그 대 원은 두어 마디도 묻지 않았다. 6두 마차가 통과하는 동안 다리는 잠시 통행 금지가 되었고 그래서 피난민들은 옆으로 물러난 채 조용히, 추위에 벌벌 떨면서 기다렸 다. 샌슨은 황급히 마차를 다리에서 빼내었고 추위에 지친 피난민들은 느릿한 걸음걸이로 다시 경비 대원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잠시 찾아왔던 고요는 흔적없이 사라 지고 다시 다리 입구에서는 거친 소음만이 끝나지 않을 듯이 계속되었다.

길시언은 간신히 입을 열어 샌슨에게 말했다.

“잠시…….마차를 세우시오.”

“알겠습니다.”

샌슨은 다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길 옆으로 마차를 빼내어 정지시켰다. 그러자 길시언은 마부석에서 뛰어내리더니 다리에서 소란을 부리는 사람들을 바라보았 다. 지붕 위에 앉아 있는 내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의 뒷모습뿐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난 그의 등에서 시선을 돌려 지금도 계속 불어나고 있는 피난민들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행렬이라고 표현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 한 무리 한 무 리가 대인원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경비 대원들은 신경이 곤두선 채 피난민들을 조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었다.

길시언은 갑자기 앞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지? 난 마차에서 뛰어내려 그의 뒤를 따랐다. 내 뒤를 이어 운차이도 뛰어내렸고 마부석에 앉아 있던 칼도 따라내렸다. 그러나 길시언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걸어갔다. 그는 다리에 멈춰 서서는 경비 대원들을 주욱 둘러보더니 한 경비 대원을 붙잡고 말했다.

“누가 지휘자요?”

경비대원은 잠시 이상한 눈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역시 몰려드는 피난민 한 가족을 조사하던 참이라 별말 하지 않고 손가락을 뒤로 젖혀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마에 주름살이 깊이 패인 중년 병사 하나가 역시 다른 무리 하나를 맡아선 조사를 하고 있었다. “어디서 왔소? 총인원은? 영주의 증명서는 물론 있겠지요? 없다고? 젠장! 이름과 성별, 나이를 모두 말하시오. 특징도. 무기를 소지한 자는 없소? 이걸 왜 하냐고? 좋은 질문이군, 그래! 나도 그게 궁금하던 참이니 까! 이런 제기랄. 누군 당신네들 추운 데 세워놓는 것이 재미있어서 이러는 줄 아시오? 탈영병이나 간첩이 숨어들지도 모른다는 거 아니오! 나도 죽을 맛이오!”

길시언은 그 말을 듣자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뒤로 돌아서 우거지상을 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칼이 근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길시언?”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 조사를 간략화할 수 없냐고 물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추운 데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자니. 하지만 물어볼 필요가 없을 듯하군요. 저 병 사 역시 이 일이 좋아서 하는 것은 아니군요.”

칼은 몰려든 인파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추위와 피로에 찌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일상적인 여행자들과 달리 저 피난민에는 어린애나 노약자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힘든 피난길에 지쳐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심지어 어떤 남자는 길 옆에 만삭이 된 부인을 눕혀놓고는 부인을 위로하고 있었다. 부인 은 진통이라도 느끼는 것인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입을 꽉 다문 아낙네와 칭얼거리는 딸의 모습이 보였는데 그 아낙네는 딸의 칭얼거림에도 상관하지 않고 산모에게 다가가서는 남자와 함께 산모를 돌보기 시작했다. 딸은 어머니가 떠나자 곧 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고 그 울음소리에 다른 꼬마들도 울기 시작했다. 더 참지 못한 몇몇 남자들이 고함을 버럭 질러대기 시작했고 어머니들은 황급하게 울음을 터뜨리는 자녀들을 부둥켜안았다. 그중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국왕의 이름을 저주하는 아낙네의 모습도 있었다. 길시언의 얼굴은 갈수록 참혹해졌다.

칼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조사를 간략화할 수 없다면. 그럼 대신 다른 것을 좀 물어봐주시겠습니까?”

“예?”

잠시 후 초소 경비 대장의 반신반의하는 표정 속에 허락이 떨어졌고 우리들은 즉각 주위를 돌아다니며 잡풀과 나뭇가지들을 주워 모아 작은 개미집 정도로 보이는 장작더미를 만들어내었다. 네리아가 자신의 단검을 이용해서 그 장작 더미에 불을 붙이자 미약한 연기와 함께 작은 불길이 일어났다.

피난민들은 저 작자들이 도대체 무슨 불장난을 하고 싶어서 저러는 거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바로 그 순간, 아프나이델은 몰려든 모든 피난민들의 주의를 완전히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저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손을 휘젓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 아무리 추운 날씨 때문에 심사가 사나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겠지. 그리고 아프나이델의 캐스팅이 끝나자 찻주전자 하나 끓이기에도 모자라 보이던 불길이 삽시간에 10큐빗 정도까지 솟아올랐다. 게다가 어찌나 뜨거 운지 10큐빗 이내로는 접근도 못할 정도였다. 피난민들은 놀란 얼굴로 불길을 바라보았고 우리 일행 중에서도 레니와 에포닌은 입을 딱 벌리고는 다물 줄을 몰랐다. 어쨌든 피난민들은 곧 그 불길 주위로 몰려들어 추위를 녹이기 시작했다.

아프나이델은 손을 탁탁 털더니 이마를 닦으면서 말했다.

“저 불길은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할 겁니다만.”

“상관없습니다. 해가 좀더 높아지면 온기도 되살아날 테니까요.”

그러자 아프나이델은 히죽 웃고는, 경비 대원들에게 계속해서 마른 풀과 나뭇가지를 던져넣으라고 말한 다음 감사의 인사를 보내는 피난민들에게서 도망쳐 마차 쪽 으로 달려가 버렸다. 길시언도 보다 밝은 얼굴로 마차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때까지 산모를 돌보고 있던 제레인트와 네리아가 마지막으로 마차에 오른 다음 우리는 그 신나는 불길을 뒤로 한 채 달려가기 시작했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움직 이기 시작하자 깎고 있던 나무 토막을 던져둔 채 파이프를 피우고 있던 (조금 전 불길을 일으킬 때 불을 붙여둔 파이프였다.) 운차이는 담배 연기를 하늘로 날려보내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웃기는 점을 발견했다.”

“예?”

운차이는 다시 파이프 부리를 물고는 조금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이 일행은 멈춰 서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군.”

“예? 아…… 하하하.”

운차이는 파이프를 손에 들고는 그 부리를 앞니에 딱딱 부딪히면서 하나씩 열거하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로, 너희 일행은 칼라일 영지에서도 제멋대로 멈춰 섰고(딱), 칸 아디움에서도 그대로 멈춰 섰다(딱). 오늘 아침엔 에포닌 때문에 미적거렸고(딱), 방금 전에 는 피난민들 때문에 멈춰 서는군(딱).”

“그렇게 주욱 열거했으니, 이젠 결론을 말해 봐요.”

“글쎄. ‘엉덩이가 무거운 편이다.’라는 결론이 어떨까.”

칼은 주의를 환기시키듯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낮고 빠르게 말했다.

“중요한 점을 지적해 줘서 고맙소, 운차이 씨. 어쨌든 급한 것은 급한 것입니다. 오늘은 11월 26일……. 바로 한 달 전, 10월 27일에 우리는 그랜드스톰에서 그 말을 들었습니다.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이 한 달 가량 남았다는 말 말입니다.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예상일을 굳이 말하자면 바로 내일입니다. 퍼시발 군? 우 리가 갈색 산맥에서 바이서스 임펠까지 오는 데 이틀이 걸렸던 것 같은데. 맞는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크라드메서가 갈색 산맥에 있다는 것만 알지 정확하게 어디 있는지는 모르잖아요.”

내가 끼어들면서 말했다. 칼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그렇지. 하지만 그건 천천히 걱정할 문제고, 지금 당장 걱정해야 될 문제는 세 가지야.”

길시언과 내가 바라보는 가운데 칼은 잠시 고개를 들어 쉼없이 다가오는, 하지만 영원히 다가오지 않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첫째,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 이전에 그를 발견할 수 있는가. 둘째, 사라졌던 넥슨 일행은 우리가 바이서스 임펠을 나서면 다시 덮쳐오겠지. 그들의 방해를 어떻게 따돌리는가. 셋째, 이제 할슈타일 후작도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 확실하니, 그의 방해를 어떻게 따돌릴 것인가.”

“그걸로 끝이에요?”

“끝이냐고? 네드발 군, 장난 치지 말게. 이건 단기적인 문제야. 중장기 문제로 넘어가면 더 골치 아파. 할슈타일 후작의 음모 때문에 약화된 바이서스의 국방력 문제, 자이펀에서 사용하는 질병의 무기에 대한 대책. 일단은 두 가지뿐이지만 보통 큰 문제들이 아니군.”

“그걸로 끝이에요?”

“응? 뭐, 그 외에도 많지. 오늘 아침에 생겨난 에포닌 양의 문제만 해도………….”

“또?”

칼은 그제야 눈치를 채었다. 그는 히죽 웃더니 말했다.

“올해 말까지 웨스트 그레이드, 우리의 고향으로 돌아가 끝없는 계곡에서 아무르타트를 만나야 되지.”

난 헤헤 웃고 말았다. 이왕이면 아무르타트의 일을 이 모든 일에 대한 우선 순위라고 말해 주었으면 더 좋겠는데. 하지만 그건 너무 큰 희망이고 입 밖으로 내긴 좀 뭣한 소망이라서 난 그 정도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러나 길시언은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여행 목적이었지요?”

“그렇습니다.”

“그럼…………, 칼께서는 다른 모든 일이 미완되었을 경우에라도 연말이 다가오면 웨스트 그레이드로 출발하실 생각입니까?”

칼은 길시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제 손 닿는 일, 제 손을 필요로 하는 일, 제 손에 맡겨진 일을 해야 되니까요.”

길시언은 잠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칼처럼 영원히 다가오지만 절대로 도달할 수는 없는 지평선을 바라보다가 짧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난 말입니다, 레니 양에게 했던 부탁을 그대로 칼에게도 하고 싶군요.”

칼은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길시언. 당신의 마음은 알겠습니다만, 난 헬턴트 마을의 독서가입니다. 그리고 마차 위의 이 소년은 헬턴트 마을의 초장이 후보이며, 지금 우리 모두를 태운 마차의 고삐를 쥔 저 청년은 헬턴트 마을의 경비 대장입니다.”

“나라가 없어지면 헬턴트도 없어질 겁니다.”

“설령 헬턴트가 없어진다 해도 나는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반면, 내가 없어지면 헬턴트도 없는 것입니다. 헬턴트는 나의 헬턴트이고, 바이서스는 나의 바이서스이 니까요.”

“……나에게 희망을 줄 수 없습니까?”

“글쎄요. 제 말에서 희망을 찾아보십시오.”

이건…………, 정말 무슨 문답이 이 모양이지? 난 길시언이 대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길시언은 어두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우. 헬턴트의 칼 대신, 바이서스의 칼을 믿어보지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대화가 멈추었다. 헤엣? 괴상한 대화로군.

마차는 지평선을 향해 완전한 직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섯 마리의 말과 한 마리의 황소는 거칠 것 없는 평야를 만나 마음껏 다리를 놀려대고 있었다. 한 달 전 우리 는 이 길을 거꾸로 달려오고 있었지. 두 개의 달이 동시에 떠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아! 그럼 오늘은 한 개의 보름달과 한 개의 반달이 떠오르겠군?

오늘 밤에 무슨 달이 떠오르는가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살아서 달을 볼 수 있기만 하다면야 반달이 뜨는 보름달이 뜨든, 쥐 파먹은 팬케이크처럼 생긴 달 이 뜨든 무조건 감사하게 여겨야 되겠다.

“매직 미사…… 어쿠!”

아프나이델은 또다시 캐스팅을 끝내지 못하고 옆으로 넘어졌다. 떨어진다! 제길, 안 돼!

“아프나이델!”

난 아프나이델의 팔을 부여잡고는 힘껏 당겼다. 급하게 당기느라 힘이 너무 들어갔다. 마차 옆으로 떨어지던 아프나이델은 잠시 허공에 뜬 모양이 되었다. 그러곤 그 대로 허공을 반 바퀴 돌아 다시 마차 위에 내려꽂히고 말았다. 쩍! 아프나이델은 여름날 돌 맞은 개구리처럼 지붕 위에 네 활개를 펼치고 엎어졌다. 난 그가 그대로 데 굴데굴 굴러가지 않도록 무릎으로 그의 등을 찍어누르며 외쳤다.

“고맙다고 말하지 않아도 돼요!”

말하면서도 그가 고마워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과연 그는 전혀 다른 말을 외쳤다.

“으아아아! 후치, 왼쪽!”

아프나이델은 짓눌린 목소리로 외쳤다. 왼쪽? 황급히 옆을 돌아보았다. 맹렬하게 달리는 마차 옆으로 나란히 달리는 말이 보였다. 두두두두두! 말의 갈기가 정신없 이 흩날린다. 그리고 그 안장 위에 올라탄 복면 전사는 마차 창문으로 손을 집어넣으려 애쓰고 있다. 지붕 아래에서는 레니의 비명소리가 요란했다.

“꺄아아! 저리 치워! 이거 놔! 으아아악! 아빠앗!”

난 바스타드를 위로 들어올렸다. 검집째로 후려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팔을 들어올린 순간 몸의 균형을 잃었다.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지붕을 짚어야 했다. 다음 순간 마차 문이 벌컥 열려버렸다. “으아아아!” 마차에 매달리려던 복면 쓴 남자는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낙마한 남자는 삽시간에 뒤쪽으로 멀어져갔다. 덜컹덜컹! 마차 문은 요란하게 흔들렸고 문을 걷어찬 엑셀핸드는 다시 문을 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다른 남자 하나가 맹렬하게 말을 몰면서 달려왔 다. 남자는 검을 어깨 위로 들어올렸다.

“후치잇! 나 잡아!”

네리아는 지붕 위로 몸을 던졌다. 주루루룩! 그녀가 그대로 미끄러져 떨어지기 직전 그녀의 허리띠 뒤쪽을 부여잡았다. 그녀는 지붕 위로 어깨를 내밀더니 두 손으로 쥔 트라이던트를 옆으로 크게 휘둘렀다. 부우우웅! 접근해서 엑셀핸드를 공격하려던 전사는 네리아의 트라이던트를 피해 다시 멀어졌다. 난 몸을 휙 돌려 아프나이델 에게 엉금엉금 기어가며 외쳤다.

“아프나이델! 어서 캐스팅해요! 어서!”

부탁은 했지만 이건 말도 안 된다. 최고 속도로 달리고 있어서 마차 지붕은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위아래 이가 부딪혀 모조리 뽑혀 나갈 지경이다.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데 캐스팅을 하라구?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해, 불가능, 우와아!”

콰광! 무엇에 걸린 것인지 마차가 위로 떠올랐다. “우오우, 제에에기랄!” 충격으로 몸이 떠오르면서 지붕 위에서 튕겨져나갈 뻔했다. 아무렇게나 허우적거리던 손에 밧줄이 잡혔다. 지붕 위에 짐을 매어둔 밧줄이다. 밧줄을 잡아채는 순간 팔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을 느끼며 위로 떠오르는 아프나이델의 어 깨를 왈칵 잡아당겼다. 아프나이델은 다시 호되게 마차 지붕에 부딪혔다. “으윽!” 그때 운차이의 힘겨운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이이익!”

“맙소사, 운차이!”

운차이의 머리가 지붕 오른쪽 가장자리 옆으로 올라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지붕 가장자리에 팔목을 걸친 채 마차 옆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마차는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고 운차이는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다. 마차 안에서 제레인트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으아악! 운차이 씨! 잠깐, 문을 열어………….”

“안 돼! 문 열지 마!”

지금 문을 열면 운차이는 그대로 문에 밀려 떨어져나갈 것이다. 난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을 구부렸다. 밧줄에 발목을 걸고 그대로 몸을 날린다. 퍽! 배가 지붕에 부딪 히며 숨이 막혔다. 하지만 내뻗은 손에 운차이의 손등이 만져졌다. “됐어! 잡았어!” 그때였다. 운차이의 등 뒤로 마차 옆에 붙어선 전사 하나가 보였다. 전사는 한 손으 로 고삐를 몰아쥐더니 다른 손으로 등 뒤의 검을 뽑기 시작했다. 그대로 마차에 매달린 운차이를 베어버릴 태세다.

“안 돼!”

인정사정 없이 운차이를 끌어올린다. 파아악! 그 순간 운차이는 발을 굴러 마차 옆면을 걷어차며 솟아올랐다. 운차이는 지붕 위로 떨어졌고 전사가 휘두른 검은 마차 벽을 뚫어버린다. “꺄아아악!” 마차 안에서 에포닌의 찢어지는 비명소리. 그러나 검이 마차 벽을 뚫으면서 탁 걸려버리자 전사의 손목이 뒤로 거세게 젖혀진다. “크아 악!” 전사는 검을 놓치고는 다시 옆으로 멀어졌다. 검은 그대로 마차 옆 벽에 꽂혀 덜렁거렸다. “꽉 잡아!” 이번엔 샌슨의 경고가 있었다. 쿠쾅쾅! 마차 바퀴가 부서져 나가는 줄 알았다. 다리가 부웅 떠올랐지만 제각기 손으로 뭘 붙들고 있었던지라 나가떨어지지는 않았다. 마차는 옆으로 쓰러질 듯 쓰러질 듯하다가 용케 균형을 잡 고 달려간다. 힝힝힝힝!

“샌슨! 마차가 팬케이크냐! 뒤집지 마!”

마부석에 있던 샌슨은 채찍을 벼락처럼 휘두르며 응수했다.

“그 말은 저 자식들에게 해! 팬케이크에 개미새끼 몰려들 듯이 달려들잖아!”

몇 명이 떨어져나갔지만 그래도 상당수의 전사들이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다행히도 기사(騎射)에 능한 작자는 없는지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전사들은 전 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고 간신히 벌려놓은 거리는 무정하게도 좁혀졌다. 운차이가 갑자기 몸을 날리더니 아프나이델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무릎을 꿇고 밧줄을 부 여잡고 있던 아프나이델은 거칠게 멱살이 잡혀올려지자 당황한 눈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신기할 정도로 차갑게 말했다.

“아프나이델, 이 병신아! 지금 마법사가 필요하단 말이야!”

젠장, 원할 것을 원해야지! 이 지경에 어떻게 캐스팅을 하라는 거야? 아프나이델은 망연하게 운차이를 바라보았고 운차이는 이를 갈았다. 운차이를 말리려 들 때 달 려오던 전사들은 다시 우리 옆으로 붙어섰다. 네리아가 기합을 질렀다.

“이야아아! 꺼져, 이 자식들아!”

트라이던트가 무섭게 휘둘러졌지만 전사들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나란히 달렸다. 그래서 트라이던트는 헛되이 허공을 가르게 되었고 네리아는 자칫 그대로 마차 옆 으로 굴러 떨어질 뻔했다. 달려오던 놈들은 곧 우리 앞쪽으로 튀어나갔다. 그러다가 놈들은 흘긋 옆을 보며 거리를 재었다. 마부석으로 뛰어들 작정이야!

“너, 이름이 사무엘이었나!”

길시언은 방패는 포기한 채 한 손으로 마차 모서리를 잡고 일어났다. 다가오던 전사는 흠칫하더니 역시 한 손으로 고삐를 몰아쥐면서 다른 손으론 복면을 확 끌어내 렸다. 드러난 얼굴은 과연 사무엘이라는 이름의 그 전사였다. 그는 복면을 집어던지더니 롱소드를 뽑아들면서 맞받아 외쳤다.

“그렇다! 길시언, 이름만큼의 솜씨인지 두고 보지!”

“유언이 조악해!”

길시언은 마차 옆으로 뛰쳐나가려는 것이 아닌가 싶은 매서운 기세로 프림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카카캉! 사무엘이 휘두른 검과 프림 블레이드가 부딪히면서 바위에 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불꽃을 튀기면서 다가오던 사무엘은 팔을 떨면서 다시 멀어졌다. 하지만 길시언 역시 균형을 잃으며 다시 마부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때 드디어 간절히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왔다.

“파이어볼!”

푸화화각! 마차 뒤로 불꽃의 공이 쏘아져나갔다. 달려오던 전사들은 날아오던 화염의 공을 피하려다가 균형을 잃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파이어볼이 꽂혔다. 콰아 앙! 맹렬한 불의 폭풍이 일어났고 말들은 다리를 부러뜨리며 뒹굴었다. “푸르힝힝!” 말 위의 전사들은 몸에 불이 붙은 채 마치 불새처럼 날아올랐다. 불새의 비약은 짧 았고 잠시 후 전사들은 그대로 땅에 얼굴을 박으며 나가떨어졌다. “으아아아!” 그들은 땅에 부딪힌 충격도 잊어버린 채 불을 끄기 위해 뒹굴어야 했다.

“우와아아! 톱메이지!”

고개를 돌려보니 아프나이델은 다리를 짐더미 속에 박은 채 몸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운차이가 등으로 그의 상체를 받쳐주고 있었다. “하면 되잖아?” 운차이 는 씩 웃으면서 말했고 아프나이델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옆을 돌아보니 사무엘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아프나이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손을 돌 려 사무엘을 겨냥했고 그러자 사무엘은 기겁하면서 멀어졌다.

그러나 달려오는 복면 전사들은 도대체 끝이 없는 것 같다. 지금까지 물리친 녀석이 적어도 예닐곱 명은 되는 거 같은데 아직도 그 두 배는 되는 인원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경장을 한 전사들에다가 말들도 모두 우수한 놈들이었는지 무서운 속도를 내고 있었다. 죽죽 달려온 전사들은 다시 마차 옆으로 다가섰다. 이제 지겨워! 그리 고 사무엘 녀석도 다시 악에 받친 표정을 짓더니 마차 옆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놈은 지붕 위로 뛰어들거나 마부석으로 뛰어드는 대신 이번엔 마차 바퀴를 노려 치기 시작했다. 챙캉! 검이 마차 바퀴에 부딪히면서 마치 회전 숫돌에 검을 들이댄 것처럼 검이 진동한다. 파바바밧!

“이런, 안 돼!”

네리아는 기겁하면서 트라이던트를 찔렀다. 사무엘은 다시 멀어졌지만 곧 다시 다가서며 뒷바퀴를 후려치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자 다른 복면 전사들도 반대쪽으로 돌면서 그쪽 바퀴를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만일 저 자식들이 바퀴살 있는 곳에 검이라도 찔러넣으면 끝장이다! 그때 아프나이델이 고함을 질렀다.

“후치! 밀가루!”

뭐? 밀가루? 아, 그래! 난 지붕 위에 있던 짐더미에 무지막지하게 손을 밀어넣어 밀가루 부대를 끄집어냈다. 한 자루에 얼마였더라? 지금은 우리 목숨 값이다! 난 그 대로 밀가루 부대를 높이 들어올렸고 그와 동시에 운차이의 손이 번개처럼 스쳐지나갔다. 파아악! 부대가 쩍 갈라지면서 삽시간에 밀가루 부대가 가벼워졌다. 그리고 마차 뒤쪽으로는 밀가루 구름이 만들어졌다.

“으아아아!”

마차 바퀴를 노리던 사무엘은 밀가루를 뒤집어쓰고는 팔을 휘젓다가 그대로 낙마해 버렸다. 데구르르! 사무엘은 마치 튀김옷을 입힌 튀김거리 같은 모양이 되어서는 땅에 나뒹굴었다. 난 밀가루 부대의 끄트머리를 잡고 좌우로 미친 듯이 휘저었다. 달리는 마차에서 뿌려진 밀가루는 거센 안개의 흐름이 되어 복면 전사들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달려오던 말들은 비명을 지르며 속도를 급하게 줄였으며 전사들은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난 안타까움에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으아아아! 후추 없었 나? 겨자는?” 네리아는 목이 터져라 웃었다. “꺄하하하!” 전사들은 할 수 없이 밀가루 구름을 피해 옆으로 우회했다. 다시 거리는 우스우리만큼 벌어졌다. 그러자 아 프나이델은 한결 느긋하게 캐스팅할 수 있었다.

“이힝힝힝!”

가장 가까이 달려오던 말 하나가 갑자기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마치 야생마처럼 날뛰는 말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 기수는 그대로 떨어져버렸다. 기수가 떨어진 후에도 말은 계속 앞다리를 들었다 뒷다리를 걷어찼다 하면서 날뛰었다. 재갈을 문 입에서는 거품이 비어져 나왔다. 뒤를 따라오던 다른 전사들도 그 말의 발광에 방 해를 받게 되었다. 전사들은 말의 발광에 당황하여 옆으로 피하려 했지만 그중 하나는 발광하는 말의 뒷다리에 걷어차이고 말았다. 곧이어 이중 삼중으로 말들이 부 딪혔고 전사들은 허공을 허우적거리며 날아가야 했다. 으아아아!

“어? 저 말이 왜 저래요?”

내 놀란 질문에 아프나이델은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안장 아래가 미치도록 가려울 거야.”

네리아는 이제 지붕 위에서 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웃고 있었다. “까하, 이하하하하!” 전사들이 잠시 속도를 늦춘 사이에도 샌슨은 말들의 가죽을 발라낼 것처럼 채찍질을 해대었다. 황소와 말들은 질풍처럼 달렸고 전사들의 모습은 이제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이윽고 전사들은 추적을 단념하며 멈춰 섰다. 부상자가 너무 많은 것이다. 네리아는 지붕 위에 무릎을 꿇은 채 두 팔로 트라이던트를 머리 높이 들어올리며 고함을 질렀다.

“이야야야야야야!”

“Uoz-Halishmaaaaa!”

동시에 운차이도 롱소드를 머리 위로 휘두르며 괴성을 질렀다. 아프나이델은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두 사람도 서로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난 피식 웃고는 뒤를 향해 외쳤다.

“가서 후작에게 물어봐! 실패한 부하는 무슨 벌을 받는지!”

“후작의 부하들이었다고요?”

에포닌은 숨막히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난 에포닌을 돌아보려다가 자칫 손에서 힘을 뺄 뻔했다.

“야, 야! 이 자식들아! 누굴 죽이려고!”

“임마! 후치이! 힘 빼지 마! 어, 어어!”

엑셀핸드의 공포에 질린 고함소리와 샌슨의 비명소리에 놀라 나는 다시 마차를 들어올렸다. 끄으으응! 마차는 다시 올라갔고 옆에서 나와 함께 마차를 들어올리고 있던 길시언과 샌슨은 입을 쩍 벌린 채 수명이 상당히 짧아졌다는 식의 투덜거림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헤헤. 투덜거릴 정도면 아직 기운이 남아 있나 보군, 그래?

엑셀핸드는 지금 마차 아래로 기어들어가서는 끙끙거리며 뒷바퀴의 차축과 굴대를 조사하고 있었다. 조금 전 우리를 추적하던 할슈타일 후작의 전사 중 하나가 마차 뒷바퀴를 공격한 것이 아무래도 탈이 난 모양이다. 달려오는 동안 계속해서 마차 바퀴가 덜컹거리는 데다가 마차가 똑바로 가질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점심 식사도 할 겸 마차도 손볼 겸해서 잠시 멈추어섰다.

앞바퀴가 굴러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한 다음 나와 길시언, 샌슨, 운차이가 마차 뒤에 달라붙었다. 달라붙을 자리가 그것밖엔 안 되었으니까. 아프나이델이 마차에 마법을 걸어 조금 가볍게 만든 다음 네 명이 마차 뒤쪽을 들어올렸고 엑셀핸드는 카리스 누멘에게 가호를 빈 다음 마차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그러곤 버팀대가 되어 멍청하게 서 있어야 되는 것이다.

사방이 모조리 지평선인 평야 가운데라서 도대체가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는 장소였다. 바람도 한번 불어젖히려면 상당한 각오를 하고 나야 불 수 있을 것 같은 장소 였다. 갈색 산맥은 이제 우리 앞으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희미한 얼룩처럼 지평선 위로 떠올라 있었고 게다가 그 위로 솟아오른 기막힐 만큼 거대한 뭉게구름 때문에 산맥은 짓눌린 것처럼 보였다. 이런 황량한 평야 가운데서 마차를 세워놓은 다음, 드워프의 노커가 아래로 기어들어가 마차축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마차를 들어올리고 가만히 서 있어야 한다면, 주위가 산만해지는 것은 당연하잖아?

“설마? 전 믿을 수, 믿을 수 없어요. 후작님이 저, 절 되찾기 위해 전사들을 보냈다고요? 말도 안 돼요!”

에포닌의 당황한 목소리에 이어 칼의 낮은 대답이 이어졌다.

“아니오. 에포닌 양에게는 미안하지만 후작은 우리 일행을 노리는 겁니다. 에포닌 양은 도움보다는 해가 많은 사람들을 만났군요.”

“예? 아니……, 여러분들이 왜 후작에게………….”

잠시 에포닌의 말이 멈춰졌다. 그러다가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 들려왔다.

“레니 언니가?”

에포닌의 당황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난 뺨을 마차에 갖다붙인 채 마차를 들어올리고 있어야 했다. 에구, 궁금해라. 다행히도 에포닌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레니 언니가? 아니면, 네리아 언니예요? 이런! 후작님이 찾고 있던 그 붉은 머리 소녀가?”

“레니 양입니다.”

“그랬군요! 그래서 후작님의 부하들이 쫓아오는 것이군요!”

좋아. 에포닌. 잘 알아차렸군. 할슈타일 후작은 레니를 빼앗아가기 위해 우리를 쫓아오는 것이지. 그때 레니의 당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저……, 제…………, 그러니까, 저의…….”

“아버님이시죠. 아, 그러니까 친부님입니다.”

“그래요? 으음…… 그런데 왜 점잖게 찾아오시질 않고…… 아, 저, 왜 저렇게 칼잡이들을 보내서…? 절 강제로 데려가시려고……………, 그러시는 건가요?”

레니의 목소리는 그녀의 당황스러움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칼의 얼굴이 보고 싶군. 그 친부에게서 딸을 데리고 달아나야 하는 독서가의 얼굴 말이야. 으으. 나도 취 미가 좋지 못하군. 놀랍게도 칼은 명쾌하게 대답했다.

“할슈타일 후작도 드래곤 라자를 필요로 하니까요.”

“예에? 그럼…………, 여러분들과 같은 건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목적은 좀 다르지요. 우리는 레니 양이 크라드메서를 진정시켜 주기만을 바랍니다. 그 다음엔 레니 양의 뜻대로 델하파의 항구로 돌아가게 해 드릴 겁니다. 하지만 후작은 아마 아버지로서 양육권을 주장하겠지요. 그래서 레니 양과 함께 크라드메서도 수중에 넣으려는 겁니다.”

맙소사! 저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다니. 갑자기 길시언과 샌슨이 힘을 빼는 바람에 마차가 조금 내려갔다. 나와 엑셀핸드가 바락바락 악을 쓴 다음에야 길시언과 샌슨 은 다시 마차를 들어올렸다. 가가가각. 마차가 들려올라가면서 앞바퀴 쪽에서 신음 소리 같은 불길한 소음이 들려왔다. 마차의 무게가 모조리 앞바퀴에 실리고 있으 니 그렇겠지.

“정말이에요? 어, 아버지라면서요?”

레니의 기막힌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에포닌이 대신했다.

“후작님은 나쁜 사람이에요.”

“에포닌?”

“아, 언니는, 저, 후작님의 딸이지만, 저…………, 미안하지만 말할 것은 말해야겠어요. 후작님은 디트리히나 돌맨 말고 다른 아이들과는 식사도 같이 하지 않았어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자기 방이나 사무실 같은 곳에 다가가면 무섭게 화를 냈어요. 후작님보다는 하인들이나 가정 교사가 오히려 우리들을 더 따뜻하게 대해 줬 어요. 할슈타일 후작님은 내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어요. 우리한테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거예요.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나, 나 정말 떨려요. 하지 만, 미안하지만 후작님은 딸이라서 언니를 찾는 것은 아닐 거예요. 칼 아저씨의 말이 맞을 거예요.”

“딸이라서 찾는 것이………… 아니라고? 정말 그런 거예요, 칼 아저씨?”

칼의 대답은 한참 후에 들려왔다.

“딸로서 찾는 것이라면 그렇게 칼잡이들을 보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달아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아………….”

레니의 신음소리가 짧게 끝나고 나서 더 이상 다른 말은 들리지 않았다. 다만 한쪽에서 식사 준비중인 제레인트와 네리아의 소곤거림이 들려왔을 뿐이다. 레니는 어 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때 밑에서 엑셀핸드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음. 아프나이델! 들어와서 이것 좀 봐주게! 큰 수리 안 하고 끝낼 수 있겠어.”

아프나이델은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더니 마차를 들고 있는 네 명에게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평소 저한테 감정 가지신 분 있습니까?”

다행히 고장은 크지 않았다. 차축과 바퀴 연결 부분이 조금 헐거워진 것이었는데 엑셀핸드의 손재주와 아프나이델의 마법이 잠깐 작용하자 곧 수리가 끝났다. 우리 는 엑셀핸드가 안전하다고 말하자 완전히 믿기로 했다. 엑셀핸드 자신이 탈 마차인데 얼마나 꼼꼼하게 보았을까.

“들고 있느라 수고했습니다. 식사들 하세요.”

제레인트의 활기찬 고함소리에 버팀대 역할을 하던 네 명은 땀을 닦으며 음식에 다가갔다. 겨울 날씨에 땀 흘렸다가 식으니 선뜻선뜻하군. 칼은 미안한 얼굴로 말했 다.

“아, 미안하지만 서둘러 식사를 끝내어 주시오들. 아까 따라오던 그자들이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예. 알겠습니다.”

입에 빵을 우겨넣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사방은 막막한 지평선, 바람이 불 때마다 듬성듬성 남아 있던 겨울 잡초들이 휘파람을 분다. 말라붙었지만 아직 뽑히지는 않은 풀들이 바람을 거스르며 기이한 소리 를 낸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시선이 마차에 닿자 마부석에 앉아 있는 레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식사를 하느라 땅에 앉아 있었고, 그런 자세로 바라보자니 마차는………… 마치 지평선 위에 얹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다란 지평선과 그 위에 얹혀진 작은 마차, 그리 고 그 위에 앉아 있는 작은 레니, 그녀의 머리 위론 끝없이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소화 안 되는 모습이군. 레니의 옆에선 네리아가 마차 옆 벽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네리아는 발치를 내려다보면서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레니에게 이야기를 거는 모양이었다. 레니는 조용히 앞만 바라보다가 가끔 입을 열어 네리아의 이야기에 대답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목소리 모두가 작아서 내겐 전혀 들리지 않았다. 당신도 샌슨이나 엑셀핸드 옆에서 식사를 해보라. 뭐 들리는 것이 있는지. 더군다나 난 지금 그 둘 사이에 끼여 식사를 하고 있단 말이야.

운차이는 어느새 식사를 깔끔하게 마치고선 일어나서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칼이 불안한 목소리로 질문할 때까지 한참 동안 동쪽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추적자들이 보입니까, 운차이?”

“반 시간 정도 거리…………, 달려오고 있습니다.”

반 시간 거리라면, 맙소사. 4, 5펜큐빗은 될 텐데. 운차이는 눈을 반쯤 감고는 동쪽 지평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으키는 먼지 구름의 크기로 봐선 부상자들이 다시 합류한 것이거나, 아니면 인원이 충원된 듯하군요. 거의 20명 남짓?”

칼은 굳은 얼굴로 일어나며 말했다.

“서두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