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7권 – 제13부 : 대마법사의 만가 1화

드래곤 라자 7권 – 제13부 : 대마법사의 만가 1화


…따라서 우리 시대의 마법이라는 것은 선학들의 어깨에 올라타는 재주 외엔 아무 재주도 갖추지 못한 불민한 후학의 모습에 지나지 않으니, 마나는 흩어져 갈 길을 모르고 학통은 흩 어져 희미하기만 하다. 마법서는 수없이 출간되어 나오지만 마법사는 드물다. 마법사들은 마법서의 미궁에 빠져 헤매다가(물론 그 안에서 길을 찾아내는 마법사는 극히 드물다) 피로한 눈을 들어 저 영광의 시대,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와 무지개의 솔로처의 시대를 향수에 젖어 바라본다. 대마법사의 이름은 이제 마법사의 이름이라기보다는 마법이 세계를 질타하던 시대의 대명사처 럼 바뀌었다…………….

「품위 있고 고상한 켄턴 시장 말레스 추발렉의 도움으로 출간된, 믿을 수 있는 바이서스의 시민으로서 켄턴 사집관으로 봉사한 현명한 돌로메네 압실링거가 바이서스의 국민들에게 고하는 신비롭고 도 가치 있는 이야기」 돌로메네 지음, 770년. 제34권 330쪽.


1

“쉿! 조용히해!”

“어? 어라, 뭐냐?”

난 샌슨을 옆으로 끌어당겨 내가 숨어 있던 건물 그림자 속으로 데려왔다. 샌슨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래, 후치?”

“저기.”

내가 가리킨 곳을 본 샌슨은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작아졌다.

“응? 하슬러와 에포닌인가?”

“그래. 조용히!”

샌슨은 이제 내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바라크의 그림자 속에 숨어 벽에 등을 단단히 붙이고는 선 채로 죽은 시체의 흉내를 내는 것 말이다. 나와 샌 슨은 그렇게 나란히 나란히 선 채 에포닌과 하슬러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오늘 밤을 유숙하게 된 바라크는 메드라인 1-4…………. 어쩌구 하는 번호를 가지고 있는 장소였지만 나로선 그 번호 못 외우겠다. 어쨌든 그 바 라크는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었고 지금 하슬러와 에포닌은 달빛을 받으며 절벽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부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절 벽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겐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숨어서 그들을 바 라보고 있을 때 샌슨이 다가왔던 것이다.

검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멀리 달빛을 받아 뼈처럼 하얗게 빛나는 산등성이와 봉우리들의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위이이잉. 산 사이로 부는 바람은 절벽 아래를 지나며 흐느끼는 듯한 신음소리를 흘렸다. 쌀쌀하다는 말로는 모자란 감이 많은 겨울 밤의 겨울 산이다. 짙은 구름들은 달빛을 가렸다 드러냈다 하며 떠갔다. 굉장한 바람도 불고…………, 비가 올지도 모르겠는데.

갑자기 하슬러가 팔을 들어올렸다. 아마도 에포닌의 어깨를 감싸안으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에포닌은 흠칫하면서 옆으로 조금 몸을 틀었고 그러자 반쯤 올라가던 하슬러의 팔은 힘없이 도로 떨어졌다. 난 안타까운 심정으로 혀를 차다가 너무 큰 소리를 내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으윽! 혀 깨물 뻔했어.

내 옆에서 그 광경을 함께 보고 있던 샌슨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소곤거렸다.

“야, 저 사람들 언제부터……………, 으아!”

“조, 조용히해! 왜 그래?”

샌슨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가 숨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내 엉덩이에 북슬거리는 것이………….”

“나다. 그러니 어서 내 얼굴 앞에서 이거 치워라.”

샌슨은 기겁하면서 비켜나더니 말했다.

“엑셀핸드? 당신도 숨어 계셨어요?”

엑셀핸드는 잔뜩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뭐라고 투덜거렸다. 그 때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30분 정도.”

운차이의 목소리에 샌슨은 다시 기겁하더니 내 옆을 돌아보았다. 내 옆의 그림자 속에 서 있던 운차이는 입술 사이로 가늘게 새는 웃음을 흘렸다. 샌슨은 기막히다는 투로 말했다.

“어라? 너도 있었냐? 이 그림자 속에 도대체 몇 명이나 숨어 있는 거야?”

“글쎄? 나도 모르겠네. 나도 지금까진 엑셀핸드가 있는 줄은 몰랐거든?”

네리아의 대답에 샌슨은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어라? 네리아도 숨어 있었나? 위를 올려다보니 바라크의 낮은 지붕, 산속의 매서운 바람을 견디기 위해 크고 두툼하고 완만하게 만들어진 지붕 끄트머리에서 앞뒤로 흔들리는 다리 두 개가 보였다. 윽. 저 위에 앉아 있었나?

“여보게들. 좀 조용히들 하세나.”

아이고! 칼의 소곤거리는 목소리다. 옆을 돌아보니 칼은 바라크의 창틀에 팔을 고이고는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날 보더니 입 앞에 손가락까지 세워보였다. 그제야 서로의 확인을 끝낸 여섯 명의 염탐자들은 다시 조용히 두 부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벌컥!

으아아! 기절하는 줄 알았네. 느닷없이 바라크의 문이 열리더니 뭔가 허연 것이 앞으로 휘익 뛰쳐나온 것이다. 그것은 밤바람을 맞으며 나풀거리는

허연 천 같은 것이었는데 아래엔 제레인트의 다리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허연 천은 제레인트의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들 봐요! 날씨가 굉장하군요. 부녀간에 정다운 이야기 도 좋지만 이거라도 덮고 이야기 나누시죠?”

제레인트는 하슬러와 에포닌에게 다가가며 씩씩하게 말했다. 그는 들고 간 시트를 하슬러에게 건네었지만 하슬러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제 레인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에포닌의 어깨에 시트를 덮어주었다.

옆에 있던 샌슨이 숨 넘어가는 숨소리를 내었다. 난 숨을 몰아쉬면서 소곤거렸다.

“샌슨…………, 혹시 발 근처에 뭐 떨어진 거 없어?”

“응?”

“내 심장 말이야.”

“아, 조금 전에 밟아 터뜨린 게 그거였나?”

우리가 이런 몽환적이고 몰가치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에포닌은 제레인트에게 감사의 말을 건넸다.

“고맙습니다. 제레인트.”

“아니, 천만에. 하하하!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겠지요. 하지만 밤이 추우니 빨리 들어오세요.”

제레인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두 팔을 감싸며 몸을 돌렸다. 부르르 떨면서 걸어오던 제레인트는 바라크의 옆 벽에 몸을 붙이고 딱딱하게 굳어 있던 우리들을 발견했다. 제레인트의 눈이 커졌다.

“어라? 여기서 뭣들…?”

그 순간 우리 일행들의 행동은 정말 눈물겨웠다. 샌슨은 입을 뻐끔거리며 미친 듯이 손을 좌우로 흔들었고 엑셀핸드는 두 팔을 하늘 높이 들어올려 마구 휘저었다. 운차이는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시늉을 하면서 끙끙거렸고 칼은 황급히 창문 속으로 들어가다가 뒤로 넘어 진 모양이다. 쿠당! 하는 작은 소리가 들리면서 칼의 신음소리가 났다. 제레인트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더니 대단히 힘겹게 말을 이었다.

“……하는 겁니까? 말씀해 보시오, 산들이여!”

으윽! 염탐자의 수호자 제레인트는 참으로 갸륵한 열정을 담아 외쳤다.

“말해 보시오, 별들이여! 바람이여! 이곳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입니까! 창세기 이후로 그곳에 계속 계셨으니 말없는 그대들은 그 눈으로 많은 것을 보았겠지요. 그러니 이제 말씀해 보시오! 하하하! 에포닌 양! 정말 좋은 밤 아닙니까! 이것이 기도고! 이것이 신앙입니다!”

에포닌은 멍청한 눈으로 제레인트를 돌아보았지만, 그녀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제레인트는 열병 걸린 사람처럼 웃으면서 바라크 안으로 들어갔 다. 우하하! 콰당.

문 닫히는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6인의 염탐자들의 동작도 딱 굳어버렸다. 우리는 한참 동안 숨소리도 내지 않고 서 있었다. 다행히 에포닌과 하 슬러는 별 눈치를 채지 못했는지 다시 아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허어억…………… 기절하는 줄 알았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만 조용히 들어가자.”

샌슨의 말에 난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하슬러가 저대로 에포닌과 달아나면 어떻게 하지?”

“응? 어, 글쎄. 하슬러가 달아나 봐야 어디로 갈까?”

다시 창문으로 슬그머니 머리를 내민 칼은 샌슨의 말에 흥미가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샌슨은 멀리 절벽 끄트머리의 부녀를 바라보더니 이마에 늘어 진 앞머리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냥 달아나버리면 차라리 낫겠는데.”

잠시 밤의 음향만이 바라크 주위를 가득 메웠다. 샌슨은 모든 이들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신의 말에 대한 부연 설명이 필요하 다는 것을 느꼈던 모양이다.

“응. 에포닌은 아버지를 만났으니 됐고, 하슬러는 딸을 찾았으니 됐잖아. 그냥 달아나서 아무도 모르는 데서 둘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 뭐 그렇게 되면 좋겠는데 말이야.”

“샌슨, 샌슨은 말이야. 멋져.”

“나도 그게 고민이야.”

샌슨은 우쭐한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위에서 듣고 있던 네리아는 살포시 웃더니 트라이던트를 아래로 내려 땅에 세우고 그것에 매달려 주루룩 미끄 러져 내렸다. 재주도 좋아. 네리아는 창문 옆에 등을 기대더니 창문으로 머리를 내민 칼의 귀에 대고 말했다.

“그냥 내일 아침에 헤어지면 안 돼요, 칼 아저씨?”

“하슬러 씨와 에포닌 양 말이오?”

“예. 뭐………….., 내가 돈 좀 낼게요. 두 사람 새출발할 자금 정도는 낼 수 있어요. 하슬러는 유명한 칼잡이였으니 어딜 가도 안전할 테고. 두 사람 조용히 보내주면 좋겠네, 좋겠네.”

“글쎄. 네리아 양.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나로선 저 둘이 그걸 원한다면 특별히 강제할 권한은 없잖소? 하슬러가 우리 포로이거나 한 것도 아니 고. 따라서 그건 저 사람들의 자유요. 그리고 네리아 양의 말마따나 도움을 주는 것은 네리아 양의 자유이고.”

칼의 잔잔한 말에 네리아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러고 보니 하슬러의 입장이라는 것이 희한하군. 하슬러는 넥슨이 ‘버리고’ 간 그의 종복이 지. 말하자면 주종 관계에서 풀어줘 버린 것이고 우리에게 그에 대한 체포권 같은 것은 없다. 물론 따지고 들면 하슬러는 국왕의 적이고 따라서 우리 의 공적이긴 하지만……………. 운차이가 바로 그 점을 지적했다.

“반란자이지 않습니까.”

어둠 속에서 들려온 운차이의 말은 그림자 사이로 부는 산바람 같았다. 낮지만 매서운 소리. 칼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도둑을 교수대에 매다는 법은 있어도 도둑질할 때 쓰던 망치나 지렛대 따위를 매다는 법은 없잖소.”

네리아가 갑자기 큭큭거렸다. 교수대에 대롱대롱 매달린 망치를 생각했겠지. 그러나 운차이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하슬러는………… 도구가 아닙니다.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넥슨의 말을 따른 자입니다.”

“그걸 알아봅시다.”

“예?”

바라크 전체는 거대한 한 채의 건물이지만 그 내부는 가운데를 이리저리 가로지르는 벽들로 구분되어 있었다. 우리가 제공받은 방은 여행자들이 쉬 어가곤 하는 방으로 건초가 깔린 침대들과 작은 테이블, 그리고 벽난로 외엔 특별한 가구가 없었다. 그저 벽에 여러 개의 못과 선반이 있어 짐을 걸어 두거나 얹어두게 되어 있는 것이 전부였다.

저장된 건초들(겨울 동안 바라크에서 키우는 말들의 식량으로 쓰기 위해 저장되어 있던 것들)이 풍부한 모양인지, 레인저 대원들은 우리들을 위해 침대에 새 건 초를 깔아주었다. 길시언은 왕자라고 해서 특별히 대우할 필요는 없다고 점잖게 말했지만 레인저들의 대장은 겨울 여행에 나선 모든 여행객들은 응 당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길시언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어쨌든 레니와 에포닌은 길시언을 무안하게 만들었던 그 건초 위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녀들은 벽난로에서 가장 가까운 침대 하나를 차지하고는 서로 바짝 붙은 채 지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네리아는 벽난로 바로 앞에 오도카니 앉아서는 두 소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하슬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하슬러는 피로한 시선으로 잠든 에포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테이블 맞은편에는 칼이 앉아서 하슬러와 에포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레인 저 대장에게 중부 대로를 지나는 피난민들의 동향에 대해 물어보러 간 길시언 이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침대에 걸터앉거나 벽에 기대어선 채 테이 블에 앉은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칼이 입을 열었다.

“하슬러 씨. 따님과는 이야기가 잘되었습니까?”

하슬러는 무안하게도 입을 다물고 있었고 칼은 잠시 턱을 긁적거렸다. 조금 후 칼은 다시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조금 전 두 분이 들어오던 모양을 보니 퍽 정겨워 보입디다만…..”

조금 전 하슬러는 에포닌의 어깨에 손을 짚고 에포닌은 하슬러의 다리에 바짝 붙은 채 바라크 안으로 들어섰다. 그 모습은 칼의 말마따나 정겹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에포닌은 바라크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대에 몸을 눕혔고 하슬러 역시 그런 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 냥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고 나서 두 부녀는 지금까지 저 자세를 고집하고 있었다. 그게 정겹냐? 하슬러는 이번에도 입이 굳었다는 시늉을 했고 칼은 당혹스러워했다. 아프나이델이 갑자기 미소를 지어 고개를 돌려보니 제레인트가 칼에게 응원을 보내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제레인트는 두 팔을 휘두르며 입모양만으로 외치고 있었다. ‘과묵하다고 해서 어려워할 필요 없어요! 칼! 저 사람은 도움을 필요로 할 겁니다! 밀어붙이는 겁니다!’ 그 흥 분된 얼굴을 보다가 난 급하게 입을 틀어막음으로써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막았다.

제레인트의 응원에 고무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말할 구실이 생각난 것인지 칼은 입을 열었다.

“그래, 앞으로 어쩔 생각입니까, 하슬러 씨? 당신의 상사이자 친구였던 조나단 아프나이델 경비 대장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길………

“대장님은 잘 계시오?”

하슬러의 퉁겨나는 듯한 질문에 칼은 잠시 당황했다.

“예? 아, 잘 있습니다. 당신과 따님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만. 어쨌든 그분은, 당신과 에포닌 양이 어딘가 평화롭고 조용한 땅을 골라 정착하길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불행은 하나같이 당신 책임 밖의 일이었고, 당신은 너무 오래 미뤄두었던 행복을 되찾아야 한 다고 하시더군요.”

하슬러는 고개를 숙이더니 좌우로 흔들었다. 느릿하고 작은 동작이었지만 절망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무거운 동작이었다.

하슬러는 한참 후에야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사람이 옛이야기처럼 살 수는 없소.”

“글쎄요. ‘그리고 모두 행복했답니다…………., 그건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의 결말이고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만.”

“내 딸에게 도망자의 생활을 선물하란 말입니까.”

“……물론 당신은 반란자였고 남은 여생 동안 법망을 피해다니며 살아야 할지도 모르지요. 아니, 아마 그게 확실할 거라고 생각되오. 하지만 당신은 뛰어난 전사고 대륙의 서부는 아직도 미개척지나 마찬가지요. 황혼의 고향으로 달아난다면 추적의 손길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는데.”

“내 딸의 장래는?”

“따님은 그 아버님을 필요로 합니다. 지금으로선 에포닌 양에게 그것보다 더 큰 선물을 줄 수는 없다고 봅니다. 에포닌 양의 장래는 그녀의 책임입 니다. 그리고 장래를 걱정할 정도가 될 때면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을 겁니다. 시간이 베푸는 망각의 선물은 만인에게 평등합니다. 하슬러 씨의 일은 잊혀지겠지요.”

칼은 그 짧은 몇 마디를 꺼내놓느라 힘을 다 소진한 것처럼 다시 입을 다물었다. 칼은 잠시 테이블에 팔을 기댄 채 하슬러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는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그럼 어쩔 생각입니까? 하슬러 씨.”

하슬러는 대답하지 않았고 네리아의 눈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벽난로 앞에 깔린 털가죽에 앉은 채 두 다리를 무릎 밑에 모은 자세로 말했 다.

“이봐요, 당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혹시나 넥슨을 끝까지 도와서 반란을 성공시켜 출세해 보겠다는, 그래서 에포닌을 레이디로 만들 겠다는,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면 관두시라고 말하겠어요.”

하슬러는 우울한 눈빛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다시 다리를 좌우로 내리더니 무릎에 손을 짚고는 말했다.

“당신 말고는 다 잘 아는 사실인데, 넥슨은 이제 글렀어요. 그 멍청이 자크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잖아요.”

자크의 이름을 말할 때 네리아의 목소리에서 희미한 떨림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나타났던 것만큼이나 희미하게 사라졌고 네리아는 계 속해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에포닌은 레이디엔 관심없었어요. 그대로 할슈타일 가에 눌러앉아 있었으면, 흠, 기분이야 좀 나빴겠지만 그래도 할슈타일 가문의 영애로 서 좋은 가문에 시집도 가고 장차 레이디라고도 불렸을 거예요. 하지만 에포닌은 거기서 나왔잖아요? 당신이 아빠라면 딸의 마음은 이해해야 되잖아 요?”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칼의 점잖은 입으로는 나오지 않았을 시원시원한 말들이 날 상쾌하게 만들었다. 하슬러는 변함없는 표정으로 네리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조금씩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네리아는 갑자기 발딱 일어서더니 침대로 다가갔다. 네리아는 한 손을 펼쳐 누워 있는 에포닌을 가리켰고 하슬러의 얼굴에선 마치 메두사의 얼굴이 라도 보는 듯한 딱딱한 공포가 나타났다. 네리아는 잠든 에포닌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 딸이에요. 시대의 풍운아나 위대한 반란자 같은 아버지는 관심없는, 그저 아빠라 부를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아버지를 원하는 딸이라구요. 내 말 이해 못하겠어요?”

하슬러의 머리가 조금 좌우로 흔들렸다. 이해하오. 그러자 네리아는 두 손을 허리에 얹고서는 말했다.

“그럼 뭐가 어려워요? 얼굴 좀 뜯어고쳤지만 에포닌은 아빠를 알아보아요. 아까 당신이 입을 열자마자 에포닌이 당신을 알아본 것 기억하지요? 그 럼 그것도 문제가 안 돼요. 조용한 곳에 숨어서 머리를 식히면서 당신의 책임을 다하라구요. 에포닌의 아빠로서의 책! 임!”

네리아의 입에서 나온 책임이라는 말은 형체를 가지고 허공을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하는 침묵의 시간이 지나갔 다.

하슬러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난 이미 아버지이기를 포기한 자요. 협박에 몸을 사렸고, 더러운 욕망에 내 자식들을 내어준 자요.”

“그럼 시정해요!”

네리아의 대답은 눈깜짝할 사이에 나왔다. 그러나 하슬러의 대답은 더욱 느려졌다.

“무슨 말인지 잘 아오…………. 하지만 주인님을 포기할 순 없소.”

“넥슨 휴리첼 말입니까?”

제레인트가 갑자기 끼어들자 고함을 빽 지르려던 네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하슬러는 피로한 눈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고 제레인트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말했다.

“글쎄요? 당신은 지금 자신을 300년 전의 할슈타일 공과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주인이 어떤 지경이든 끝까지 주인으로 모신다는…………. 그런 말입니까?”

“그 기사 멍청이와는 비교하지 마시오!”

하슬러를 알게 된 이후로 이토록 분노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제레인트의 입을 단숨에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처절했 다. 제레인트는 입을 벌린 채 하슬러를 바라보았고 하슬러는 찡그린 표정으로 테이블을 노려보았다.

잠시 후 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의 주인은 당신이 떠나기를 원한 걸로 알고 있소만.”

“압니다. 하지만 충성은 나의 것이고 복종도 나의 것이오.”

칼은 하슬러의 찌푸린 이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를 그토록 따르려는 겁니까. 그가 이루어주기로 약속했던 당신의 소망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슬러가 고개를 홱 들어올렸을 때 나는 그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고 숨을 들이마셔야 했다. 그는 짓씹어 뱉듯이 말했다.

“할슈타일의 패망. 그 피의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는 완전한 파멸!”

칼은 다시 입을 열기 위해서 꽤나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하슬러의 지독한 분노의 여파는 저 두려움 모르는 드워프의 노커 엑셀핸드마저도 아 연실색하게 만들었으며, 엑셀핸드는 창백한 표정으로 하슬러를 훔쳐보고 있었다. 칼은 말했다.

“내가……, 당신의 분노를 이해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겠지요.”

하슬러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눈길을 회피하면서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프나이델 공에게……………, 당신의 아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신이 할슈타일에 대해 증오하는 것은 당연한, 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하다라. 당신은 당신 입으로 말한 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당신은 내 분노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말했는데.”

“……그렇습니다.”

“내가 어떤 기분인지 말해 드리리까?”

하슬러는 갑자기 침대를 쏘아보았다. 어라? 갑자기 에포닌과 레니는 왜 저렇게 쏘아보는…………, 레니? 하슬러는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레니를 가리키 며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계집애는 할슈타일의 딸일 거요. 맞소?”

순간 네리아의 얼굴이 파랗게 바뀌었다. 네리아는 재빨리 침대 옆으로 달려가 에포닌과 레니를 가로막았다. 하슬러는 네리아를 쏘아보다가 앞으로 한 발 내딛었고 그러자 네리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하슬러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더니 두 팔을 좌우로 벌렸고 하슬러의 눈에 서 불꽃이 튀었다. 그때였다.

“멈춰.”

벽에 기대어 꼼짝않고 서 있던 운차이의 몸에서 그 입만 살아 있는 것처럼 말소리가 들려왔다. 운차이는 기대선 자세를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무 표정한 얼굴로 하슬러를 노려보며 말했다.

“허튼 짓 할 생각 마라.”

하슬러는 희한한 것을 본다는 듯이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내가 하려 들 때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러나 운차이의 무표정한 얼굴은 여전했다. 여전히 그의 얼굴에선 입술만이 외롭게 움직였다.

“‘핫소드 그란’이라고 불렸다더군.”

순간 운차이의 입술에서 사납고도 냉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북부의 미련한 곰들 사이에서 그렇게 불렸다는 것, 나한텐 안 통해.”

하슬러는 피식 웃었다. 그는 테이블에 앉으며 운차이는 바라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네 과대망상은 타이밍을 잘 맞췄다. 난 지금 아무 짓도 할 생각이 없으니까.”

누가 한숨을 쉰 것일까? 아프나이델 아니면 그 옆에 앉아 있던 샌슨일 텐데. 내 한숨소리가 너무 커서 다른 사람의 한숨까지 들을 수가 없잖아. 하슬 러는 테이블에 앉으면서 칼에게 말했다.

“난 지금 저 계집애가 내 딸과 함께 누워 있다는 것조차도 참을 수 없는 기분이오.”

“레, 레니 양에겐 아무런 잘못도………….”

질려 있던 칼의 입에서 힘들게 말 비슷한 뭐가 새어나왔다. 하슬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칼은 입술을 깨물고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인간이 뿜어낸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혔다가 간신히 풀려난 네리아는 훌쩍거리기 시작했고 운차이는 그런 네리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프나이델이 서툴게 그녀를 위로하기 시작했을 때 하슬러는 말했다.

“그렇소. 난 할슈타일의 이름이 붙은 핏줄은 한 명도 남김 없이 죽여버리고 싶소. 그가 내 가족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나도 그 가족에 대해 증오를 느낀다는 것,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당신의 증오가 망칠 수 있는 것은 당신의 몸뿐일 거요. 당신이 아무리 발버둥치더라도 후작을 어떻게 할 수는 없을 텐데. 그리고 넥슨이라 하더라도 지금 상황에선 후작을 어떻게 할 수 없소. 현실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현실을 생각했다면 반란에 끼어들지도 않았소!”

칼의 입이 굳어버렸다. 하슬러는 불길을 토하듯 말했다.

“할슈타일은 내 발 앞에 비굴한 생명을 던지게 될 것이오. 그렇게 만들겠소.”

“그를 용서할 수 없습니까.”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서툰 동작으로 네리아를 위로하던 아프나이델이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여전히 네리아만을 바라 보고 있었지만 그가 말한 것이 틀림없다. 하슬러는 말했다.

“용서하라고?”

아프나이델은 네리아의 어깨를 조금 쓸어주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조용히 몸을 돌려 하슬러를 바라보았다. 하슬러의 타오르는 눈빛에 맞 서,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왜 그래야 되지?”

“저 또한 용서를 받은 자일 뿐 누굴 용서해 본 적은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만…………, 유피넬의 저울대가 곧다고 말하는 이유가 뭐 겠습니까?”

아프나이델의 조용한 어투는 하슬러로 하여금 원래의 침묵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아프나이델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제레인트를 가리키 며 말했다.

“제레인트 씨에게 물어볼까요.”

“예? 예? 저요?”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그에게 쏠리자 제레인트는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언짢은 기억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넥슨 휴리첼 씨는 언젠가 제레인트 씨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기억합니까?”

어, 어? 그렇군. 대미궁에서 제레인트는 넥슨에게 죽음을 당할 뻔했다. 드래곤 로드가 아니었다면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제레인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말했다.

“아니, 그거야…………, 당연히 기억하지요. 독특한, 겪기 어려운 경험이니까요. 하하.”

“그럴 테지요. 그런데 오늘 저녁, 당신은 그에게 아무런 분노도 표현하지 않더군요.”

조금 전과 다른 눈빛이 제레인트에게 집중되었다. 제레인트는 뒷머리를 긁기 시작했고 아프나이델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그를 용서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예…………. 굳이 말하라면, 뭐 그런 거겠지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당신을 죽이려고 했던 자를 말입니다.”

“내가 워낙 고매하고 자비로운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이봐요, 엑셀핸드. 다른 사람이 말할 때 그런 식으로 웃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구요. 좀 그 쳐주시겠습니까? 아, 고맙습니다. 뭐, 에, 특별히 증오를 느낄 필요가 없었다고 말하면 설명이 될까요?”

“설명해 주십시오, 프리스트.”

아프나이델은 정중하게 말했고 제레인트는 크게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제레인트는 다시 뒷머리를 마구 긁어대더니 말했다.

“뭐, 그의 변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변한 모습이오?”

“예. 신이 우리를 굽어살피시긴 합니다만, 우리 자신이 신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이고 그래서 실수를 하고 죄를 짓습니다. 하지만 우린 우리 들이 달라질 것을 알지 않습니까? 우리 수명이 짧다면 짧지만, 사실 굉장히 오래 사는 거라고 보는데요, 엑셀핸드! 그런 식으로 웃지 말라니까요! 어, 그 긴 시간 동안 변화가 일어날 시간은 충분하고, 그러니 우리는 서로를 용서하는 법입니다. 그게 신과 인간의 가장 큰 차이인걸요.”

“가장 큰 차이라구요?”

“예. 신은 변화할 수 없지만 인간은 변화할 수 있지요.”

잔잔한 감동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죽을 수 없는 신은 우리를 부러워할까. 변화할 수 없는 신은 우리를 동경할까.

“신은 무한하고 따라서 불변한 존재입니다. 변화하면 신이 아니시죠. 그러나 인간은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인간을 대할 때 상대 가 변화할 줄 아는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뭐, 그런 정도면 설명이 될지요.”

“물론 설명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프리스트.”

아프나이델은 여전히 정중하게 말했고 제레인트는 크게 당혹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프나이델은 다시 하슬러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슬러는 침중한 표정을 한 채 테이블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할슈타일이 개심하기를 바라란 말이오?”

“어렵습니까?”

하슬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운차이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그의 형형한 눈빛에 고개 를 돌리고야 말았다.

하슬러는 두 손을 들어 천천히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더니 물에 빠진 개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 주인도 당신들을 용서했지.”

하슬러는 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내 주인도 바이서스와 할슈타일은 용서하지 못했소.”

칼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주인이…………, 왜 그리 바이서스와 할슈타일을 증오하는지, 당신은 말해 줄 수 있소? 그것은 당신 주인이 말하던 그 여덟 별이라는 것과 무슨 관 련이 있는 거요?”

“관련? 모든 것은 여덟 별과 루트에리노의 마법의 가을에서 비롯되었소.”

하슬러는 냉정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들은 하나둘 그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넥스트벳 바로가기!
넥스트벳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