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7권 – 제13부 : 대마법사의 만가 2화

드래곤 라자 7권 – 제13부 : 대마법사의 만가 2화

2

탁탁탁탁탁.

핸드레이크는 무서운 기세로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순간적으로 계단 따위 집어치우고 단숨에 텔레포트해 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꼈지만 꾹 눌러 참 으면서 두 다리만 사용해서 지하로 내려갔다. 핸드레이크는 상대가 자신을 가로막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 침입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므 로.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저들이 자신, 핸드레이크를 막을지 알아보고 싶기도 하였다.

지하실의 음습한 냉기가 피어올라 그의 입에선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계단을 다 내려온 핸드레이크는 커다란 철문을 응시했다. 그 앞에는 두 명 의 기사, 일스와 허즐릿이 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서라, 누구냐?”

일스와 허즐릿은 대단한 속도로 계단을 내려온 자를 향해 각자의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침입자가 조용히 서 있는 것을 보고서 허즐릿은 바닥에 놓여 있던 램프를 위로 들어올렸다. 램프 불빛에 드러난 핸드레이크의 차가운 얼굴에 허즐릿은 숨막힌 신음을 흘렸다.

“핸드레이크 공? 아니, 여긴 어떻게………….”

핸드레이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스와 허즐릿이 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라면 사태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잔뜩 짓눌린 목소리가 핸드레이크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당신들이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다면, 문 뒤에 있는 것은 뭘까.”

허즐릿은 당황한 표정으로 핸드레이크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일스는 검을 여전히 핸드레이크의 심장으로 겨눈 채 싸늘하게 말했다.

“돌아가시오, 핸드레이크.”

“그래야 할 이유를 세 가지만 대보시오.”

“말장난하고 싶은 기분도, 그럴 상황도 아니오. 당신더러 이곳에 와달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소. 돌아가시오.”

핸드레이크는 거칠게 말했다.

“와달라고 한 사람도 없지만 오지 말라고 한 사람도 없어. 아니, 말을 정정해야 되겠군. 오지 말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없애버리겠어.”

일스의 검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포 때문이 아니다. 그가 마음을 결정함에 따라 교묘하게 흔들리는 검끝으로 상대의 시야를 어지럽히는 고급 기 술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단련된 전사 일스, 그는 지금 ‘핸드레이크를 죽일 심산인 것이다.

사태를 보고 있던 허즐릿이 기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핸드레이크 공! 당신이 불쾌하게 생각할 것은 잘 알지만 우리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대왕의 명령에 따라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오. 대왕께서 당신마저 막을 생각은 아니시겠지만, 우리는 자의로 대왕의 명령을 해석할 수는 없소. 그러니 부디 돌아가 주시오.”

허즐릿은 팔을 좌우로 펼쳐보이면서 간곡하고도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핸드레이크의 싸늘한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조금 전 위대하신 일스 공이 말씀하셨듯, 말장난할 기분도, 그럴 상황도 아니오. 난 안에서 당신네들이 뭘 하고 있는지 봐야겠소. 검을 검집에 꽂은 채 죽겠소, 아니면 손에 들고 죽겠소?”

이 폭언은 허즐릿의 입을 딱 벌리게 만들었고 일스로 하여금 사나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게 만들었다.

“히야압!”

일스의 검이 무서운 속도로 핸드레이크의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일스의 검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중심을 잃은 일스는 무릎을 호되게 땅에 부딪혔다. “큭!” “우아아!” 허즐릿은 비명인지 기합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소리를 지르며 핸드레이크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순간 그의 몸은 허공에서 덜커덩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즐릿은 거꾸로 벽 쪽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아아아!”

콰광! 벽에 부딪힌 허즐릿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저 눈을 찢어져라 부릅뜬 채 앞만 노려보고 있었다. 혀를 깨물어버렸는지 그의 입에선 가느다 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땅에 쓰러져 있던 일스는 욕설을 내뱉으며 대거를 뽑아들어 핸드레이크를 찌르려 했지만, 다음 순간 폐부가 갈라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으아아아! 내, 내 팔! 우아아!”

일스는 팔꿈치까지 시커멓게 타들어간 자신의 팔을 부여잡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 광경을 보던 허즐릿은 피 섞인 함성을 지르며 벽에서 몸을 떼어 내려고 했지만 그의 몸은 벽에 완전히 달라붙어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핸드레이크는 일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기사답게, 주군의 명령을 끝까지 수행하시오. 우정을 맹세한 전우와 함께.”

말을 마친 핸드레이크는 손을 휘저었고 일스는 그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팔을 허우적거리며 날아간 일스는 철문을 사이에 두고 허즐릿의 반대편 벽에 달라붙었다. “크헉!” 두 명의 기사는 마치 문의 좌우에 새겨진 조각처럼 자리잡았다. 허즐릿이 턱턱 막히는 숨소리를 내면서 뭐라고 말하려 했지 만 핸드레이크는 두 기사에겐 관심도 두지 않은 채 문으로 다가섰다. 두 손으로 문을 밀어붙이려던 핸드레이크는 잠시 주춤했다.

“마법이?”

핸드레이크는 고개를 돌려 벽에 붙어 있는 일스를 쏘아보았다. 일스는 팔이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히죽거리며 말했다.

“더, 더러운… 마법이 걸려, 이, 있지. 크흑! 미친 개는, 미친 개로 사, 상대하는 법………….”

핸드레이크는 단번에 일스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그는 주먹을 부르르 떨다가 철문을 쏘아보았다. 그의 입술이 조금 달싹거리고 나자 곧 육중한 철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허즐릿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 철문을 바라보았다. 무게가 수천 파운드는 될 저 철문이 마치 풀피리처럼 부르르 떨리고 있는 것이다. 곧 이어 문에서는 강렬한 폭음이 들려왔다. 꽈과과광!

“맙소사……!”

벽에 붙어 있던 허즐릿은 신음을 흘렸다. 조금 전까지 핸드레이크의 앞을 가로막던 철문은 종잇장처럼 구겨져 나뒹굴고 있었다. 핸드레이크는 거침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저벅저벅.

벽에 띄엄띄엄 걸려 있는 횃불이 으스스한 빛을 던지고 있었다. 핸드레이크는 무서운 눈으로 앞을 쏘아보며 걸어갔다. 그가 걸어감에 따라 그림자가 어지럽게 겹쳐졌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인간의 솜씨다. 주위를 둘러보던 핸드레이크는 확신을 굳혔다. 이것은 드워프의 솜씨가 아니라 인간의 조악한 솜씨이다. 조악하긴 하지만, 그것은 저 드워프의 정교하고 화려한 손에 비추어볼 때 그러하다는 말이며 실제론 굉장한 건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간들이 이토록 거 창한 지하 건축물을 만들 수 있게 되었을까?

잠시 후 핸드레이크의 앞에 세 갈래 길이 나타났다.

정면으로 통하는 길에 한 명의 기사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둘 사이의 거리가 열 발짝쯤으로 좁혀졌을 때, 저편에서 딱딱하면서도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당신이었군. 허즐릿과 일스는?”

질문을 던져온 것은 육중한 핼버드를 지팡이처럼 가볍게 짚고 선 라인버그였다. 핸드레이크가 일으킨 소란은 드워프가 아니라도 충분히 들을 수 있 는 것이었다. 핸드레이크는 대답 없이 계속 걸어갔다. 라인버그 역시 꼼짝도 하지 않고 핼버드를 짚고 선 채 다가오는 핸드레이크를 쏘아보았다. 두 사나이 사이로 숨막히는 정적, 그리고 핸드레이크의 나직한 발소리만이 흘렀다. 그때였다.

“죽어랏!”

화산이 터지는 듯한 괴성과 함께 왼쪽 통로에서 무지막지한 도끼가 날아들었다. 캄드리는 일생 최고의 기세로 도끼를 휘둘렀고 매처럼 날카로운 그 의 겨냥은 정확하게 핸드레이크의 머리를 치고 들어갔다. 휘이익!

그러나 도끼는 허공을 가로질러 벽에 부딪히며 맹렬한 불꽃을 튀겼을 뿐이다. 벽을 후려친 캄드리는 손목이 박살나는 고통을 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핸드레이크의 자취를 쫓으며 라인버그는 핼버드를 들어올렸다. 그의 눈이 빈틈없이 통로를 살폈지만 어디에도 핸드레이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캄드리를 부축하기 위해 왼편에서 모닝스타를 들고 뛰쳐나오던 멜다로가 라인버그를 흘긋 바라보았다. 라인버그는 멜다 로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멜다로는 비명을 질렀다.

“라인버그!”

순간 사태를 알아차린 라인버그는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의미 없는 비명을 던지며 몸을 날렸지만 이미 틀렸다는 생각을, 몸을 던져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죽기 직전엔 일생이 순식간에 지나간다고? 헛소리. 콰당! 부딪히는 감촉도 못 느끼겠지.

그의 기대와 다르게 라인버그는 땅에 쓰러져 뒹굴었다. 땅은 확실히 있었고 부딪힌 몸은 엄청 아팠다. 그러나 라인버그는 재빨리 굴러일어나서는 핼 버드를 낮게 휘둘러 몸의 중심을 잡고 자신이 서 있던 장소를 노려보았다. 그곳엔 핸드레이크가 천천히 몸을 돌리고 있었다.

“서라.”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라인버그는 짧고 강하게 말했다. 핸드레이크는 곧 멈춰 섰다. 그것은 명령을 이해해서였다기보다는 그 철저한 명령형, 아무런 불안도 의심도, 심지어 명령권자의 권위조차도 없는 완벽한 명령에 대한 반사 작용 같은 것이었다.

핸드레이크는 고개를 돌렸고 바로 그 순간 캄드리가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도끼를 집어던졌다. “으라야압!” 그러나 떨리는 팔로 집어던진 도끼는 과 녁과 엄청난 거리를 둔 채 빗나갔고 핸드레이크는 꼼짝도 하지 않고 캄드리를 쏘아보았다. 그의 턱이 스르르 움직이자 모닝스타를 어깨 위로 들어올 리려던 멜다로의 팔이 그대로 굳었다. 멜다로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핸드레이크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때 라인버그가 말했다.

“당신은 이곳저곳을 많이 돌아다니는 사람이니, 야만인의 기술도 배울 기회가 있었겠지. 남쪽 야만인의 눈빛을 다루는 기술 아니오?”

“살기라고 하지요.”

“그렇소? 놀랍군. 전사들만이 그것을 다룰 줄 안다고 들었는데.”

“정신을 단련하는 자들이 다룰 줄 아는 거요. 우리나라의 전사라면 그건 어렵겠지. 그런데, 날 계속 방해할 겁니까?”

“가시오. 우린 당신을 막을 수 없소.”

“뒤를 치지는 않을 거라고 믿어도 되겠습니까?”

라인버그의 얼굴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불쾌감이 떠올랐다. 라인버그는 신음을 토하며 앞으로 달려나가려 드는 캄드리를 말리며 차갑게 말했다. “기사답게 뒤를 치지는 않겠소.”

핸드레이크는 찌푸린 눈을 한 채 입으로만 웃었다.

“당신들은 이미 내 뒤를 쳤지 않소. 날 빼돌리고 이런 어두컴컴하고 냄새 나는 쥐구멍에 모여드는 것으로써.”

멜다로의 얼굴이 극도로 일그러졌다. 신성을 경배할 줄 알기에 기사도를 거의 신앙에 가깝게 승화시킨 기사 멜다로에게 이보다 더 큰 치욕은 없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그의 전우는 고개를 쳐들었다. 핸드레이크가 몸을 돌린 순간 캄드리는 더러운 욕설을 뱉으며 라인버그의 팔을 뿌리치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핸드레이…..!”

그러나 채 세 걸음도 딛기 전에 캄드리는 다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말았다. 쿠당탕. 라인버그가 짧은 비명을 질렀지만 핸드레이크는 여전히 등 을 돌린 채 쌀쌀맞게 말했다.

“캄드리는 죽지 않았소. 기사로서의 캄드리로 말하자면 죽은 것보다 더 못하지만.”

핸드레이크는 그대로 통로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캄드리는 바닥을 후려치며 눈물 섞인 고함을 질러댔다. 그 옆에선 라인버그가 침통한 얼굴을 한 채 핸드레이크가 사라진 통로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핸드레이크는 그대로 걸어갔다.

투닥, 투닥, 투닥.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거대한 생물, 그러면서도 민첩하고 부드러운 생물 특유의 가볍고도 육중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 다. 잠시 후 핸드레이크의 앞쪽 허공에 붉은 눈이 나타났다.

붉은 눈은 적어도 5큐빗 높이쯤 되는 곳에서 번뜩이고 있었다. 그 아래로는 가느다란 숨소리가 들려왔다. 지독한 냄새가 풍겨온다. 곧 그 생물은 지 하 통로가 무너질 듯한 괴성을 질렀다.

“캬라라라라라!”

포효는 몇 초 정도였지만 메아리는 한참 동안이나 되울려 지하 통로를 가득 메웠다. 생물은 검은 두 팔을 좌우로 벌렸다. 벌린 두 팔에서 대거 같은 손톱이 불쑥 튀어나왔다. 손톱은 좌우의 벽에 긁혀 귀를 찢는 마찰음과 불꽃을 튀겼다. 까가가각!

“캬라라라라라!”

생물은 곧장 앞으로 달려들었다. 핸드레이크는 그대로 걸어갔다.

파아앗!

통로에는 핸드레이크만이 남았다. 조금 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핸드레이크는 한결같은 속도로 앞을 향해 걸어갔다.

정면에 화려한 장식이 된 아치가 모습을 드러내며 그 아래로 장엄한 문이 나타났다. 핸드레이크는 아치의 장식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 간, 인간. 오로지 인간만이 새겨져 있었다. 검을 들고 포효하는 남자, 남자의 손에 이끌리는 아름다운 숙녀. 드래곤을 밟아죽이는 전사와 신의 진리를 깔아뭉개는 현자들의 모습.

핸드레이크는 거칠게 문을 밀어젖혔다. 실제로든 마법으로든 잠겨 있지 않은 문이었다. 문은 좌우로 퉁겨지며 불길한 충돌음을 길게 울렸다. 밀폐된 지하실이라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핸드레이크는 방 안을 쏘아보았다.

방 안의 광경은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사면을 둘러싼 벽에는 화려한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태피스트리에는 상상할 수도 없이 화려한 그 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땅을 파헤치는 인간, 바다를 정복하는 인간, 성탑 위에서 대지를 굽어보는 인간, 피의 전장을 달리는 인간, 인간을 노래하는 인간, 인간을 찬미하는 인간, 인간, 인간, 인간.

모든 장식과 조각에 반드시 나타나는 엘프, 드워프, 드래곤, 페어리 등의 모습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드래곤은 있었다. 힘줄이 불끈 솟은 전 사의 주먹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축소되어 마치 날개 달린 강아지처럼 보이는 드래곤의 목이 거머쥐어져 있었다. 드래곤은 길게 혀를 빼문 채 늘어 져 있었고 전사는 자신이 쥐고 있는 이 경이로운 전리품에 대해서는 싸늘한 시선 하나 보내지 않은 채 정면을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그리고 아 름다운 숙녀는 그 전사에게 찬탄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핸드레이크는 현기증을 느끼며 방 가운데를 바라보았다.

초록색 제단이 있었다. 푸른색 비단이겠지만 이 횃불 빛 아래에서는 불길한 초록색으로 보였다. 그리고 제단 주위엔 세 명의 인간과 한 명의 페어리 가 있었다.

제단 앞에 서 있던 제로딘과 차넬은 검을 뽑아들고는 문 쪽을 바라본 채 서 있었다. 그리고 제단 뒤편에는 핸드레이크의 꿈의 성취를 지불하기로 하 고 그의 인생을 산 자가 서 있었다. 핸드레이크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루트에리노.”

제로딘과 차넬은 기대한 말이 따라나오지 않자 잠시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분노한 얼굴로 검을 꼬나들었다. 하지만 핸드레이크는 그들의 얼굴은 바라보지도 않은 채 제단 뒤의 남자, 루트에리노 바이서스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려 제단 귀퉁이에 앉아 있는 페어리를 바라보았다.

“다레니안.”

다레니안의 얼굴은 파리했다. 그녀의 뒤를 후광처럼 빛나게 했던 날개가 사라지고 나서 그녀의 얼굴에 미소도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다레니안은 핸 드레이크를 향해 힘들게 미소지어 보였다.

“안녕, 핸.”

다레니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내 마법은, 당신 신발의 끈도 잡아당기지 못하는군.”

핸드레이크는 다레니안의 얼굴을 오래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제단 위로 옮겨졌고, 거기엔 파괴된 보석들이 흩어져 있었다.

핸드레이크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차넬이 헛기침을 뱉었다. 점잖은 헤게모니안족답게 협박의 말이나 욕설 등은 입에 답지도 않는 차넬로선 최고의 협박인 셈이다. 핸드레이크가 발걸음을 멈추고 차넬을 쏘아본 순간, 루트에리노의 입이 열렸다.

“검을 치워라. 제로딘, 차넬.”

차넬은 곧 공손한 동작으로 검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제로딘은 주춤거리며 말했다.

“전……”

“치우도록.”

제로딘은 이를 악물었다. 마법사를 상대할 땐 눈 깜빡일 시간도 아쉽다. 그런데 검을 집어넣으라니. 그러나 제로딘은 천천히 검을 집어넣었다. 명예 를 담은 그 얼굴이 자랑스럽다. 핸드레이크는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핸드레이크는 제단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제단 위에는 보석의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본래 휘황한 빛을 내뿜었을 이 보석들은 산산이 조각나 이제는 하찮은 돌멩이보다 못하게 보인다. 핸 드레이크는 천천히 손을 뻗어 파편 하나를 집어들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시선으로 묵묵히 파편을 쳐다보는 핸드레이크를 바라보았다. 차넬은 공손하면서도 종잡을 수 없는 눈으로 핸드레이크 의 동작을 감상하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제로딘은 핸드레이크의 동작 하나하나를 놓칠세라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고 있었으며, 다레니안은 동정심 담 긴 젖은 눈으로 핸드레이크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루트에리노는…..

그는 피로한 음성으로, 하지만 흥분을 지울 수 없어 미미하게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핸드레이크.”

“여덟 별 모두?”

핸드레이크는 여전히 파편을 바라본 채 말했다. 루트에리노는 입을 다물었고, 그러자 핸드레이크는 고개를 들어 루트에리노를 바라보았다. 그는 천 천히 손가락을 구부려 파편을 움켜쥐면서 다시 말했다.

“여덟 별 모두를 파괴했습니까?”

“핸드레이크.”

핸드레이크는 고개를 휙 돌려 다레니안을 바라보았다. 다레니안은 그의 타오르는 눈빛을 담담히 받아내었다.

“당신이?”

다레니안은 젖은 눈으로 핸드레이크를 올려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핸드레이크는 갑자기 광포해지려는 심정을 가다듬으며, 제단 위에 놓인 다레 니안을 움켜쥐어 올리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다시 한번 질문했다.

“당신이 이들을 도운 거요?”

다레니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내가 도와주었어요. 당신에 비하면 풋내기 마법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 역시 마나에 안겨 있어요.”

“어째서요.”

다레니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핸드레이크의 눈썹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핸드레이크는 느닷없이 두 주먹을 들어올렸 다.

“어째서! 으이익!”

쾅! 핸드레이크의 주먹은 다레니안의 바로 앞을 때렸다. 핸드레이크의 고함소리에 놀란 제로딘의 손이 칼자루 쪽으로 움직였다. 제로딘은 칼자루를 움켜쥐었다가 차넬이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 칼자루를 놓았다.

핸드레이크는 제단을 짚고 선 채 머리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앞으로 늘어져 얼굴을 가렸지만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은 모든 사람들, 그리고 페어리의 눈에 잘 들어왔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처절하게 파괴되어 버린 것을 본 사내의 슬픔. 다레니안은 더 이상 날아오를 수 없게 된 자신의 처지를 비통하게 여기며 대신 걸어가서 핸드레이크의 주먹을 쓰다듬었다.

다레니안은 핸드레이크의 주먹 앞에 앉아서는 그 떨리는 주먹 위에 힘없이 상체를 얹었다. 핸드레이크는 자신의 주먹 위에 엎드린 다레니안을 내려 보며 말했다.

“어째서 그런 거요…………..”

다레니안은 작은 얼굴을 들어 핸드레이크의 어두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림자가 진 그의 얼굴은 지독하게 어두웠다. 다레니안은 진저리를 치고 나서 말했다.

“당신이 여덟 별을 원하는 것은 잘 알아요, 핸. 당신이 얼마나……”

“어째서 그랬냐고 물었소.”

더할 수 없이 차가운 질문. 다레니안은 고개를 떨구었다.

“으흐흑!”

다레니안은 갑자기 흐느끼며 다시 핸드레이크의 주먹 위에 엎드렸다.

“미안해요, 핸. 미안해요.”

핸드레이크는 덜덜 떨리는 아래턱을 고정시키려 애쓰면서 두 손으로 다레니안을 감싸올렸다. 핸드레이크는 두 손바닥을 모아 그 위에 다레니안을 앉힌 채 가슴 앞으로 가져왔다. 제로딘과 차넬은 우울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고 루트에리노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자신의 가슴 앞에서 흐느껴 울고 있는 요정의 여왕을 바라보며, 핸드레이크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말했다.

“다레니안. 당신은 페어리의 여왕이오. 페어리족의 운명이 당신의 ……, 손에 달려 있소.”

자칫하면 ‘날개에’라고 말할 뻔했다. 핸드레이크는 이를 악물면서 되도록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다.

“당신은 많은 힘을 잃었소. 당신 한 개인으로서도 불행이지만, 당신 종족 전체로서도 불행이오. 그런데 왜 당신 종족을 번영하게 할 수 있는 힘을 포 기한 거요?”

다레니안은 대답을 못했다. 흐느껴 우느라 대답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핸드레이크는 참담한 기분을 느끼며 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게 다레니안의 어 깨를 어루만졌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들어 루트에리노를 바라보았다.

“어째서입니까.”

루트에리노는 굳은 얼굴로 핸드레이크를 마주보았다. 핸드레이크는 다시 한번 질문했다.

“어째서입니까. 여덟 별을 파괴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왜 인간들을 포기한 것입니까?”

“난 인간을 포기한 적 없네.”

“그렇다면 왜! 왜 창조와 생성을, 악의 치유와 오롯한 즐거움을, 우리에게 발전과 사랑을 무상으로 영원히 선사할 힘을 파괴했다는 말입니까! 왜 우 리가 신이 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렸단 말입니까!”

“여덟 별은 우리에게 공포와 억압을 줄 수도 있네. 드래곤 로드가 어떻게 우리를 다스렸는지를 자네는 잊었단 말인가?”

핸드레이크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당신은 검을 무서워합니까!”

“무서워하네.”

“뭐라구?”

핸드레이크는 한대 맞은 표정으로 루트에리노를 바라보았다. 루트에리노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넨 검을 쥐어본 적이 없으니 모를 테지. 검사는 검을 무서워하는 법부터 익혀야 하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도 필 요한 행위지. 검을 무서워할 줄 모르는 자는 검사가 아니야. 칼잡이일 뿐이지. 자네에게 묻겠네. 자넨 마나를 무서워할 줄 모르는가?”

핸드레이크는 꼿꼿이 서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무릎을 걷어차인 기분을 느꼈다. 루트에리노. 드래곤의 억압 아래 내일의 의미를 잊은 채 살아가던 인간을 결집시키고 마침내 드래곤 로드를 북방으로 쫓아버린 남자. 그의 청춘을 가져다 쓴 남자. 그 위엄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이를 사려물며 말했다.

“당신의 말은 옳지만 당신 스스로가 당신의 말을 배신하고 있소. 검사는 검을 두려워할 줄 알기에 검을 허리에 찰 수 있는 것이오! 여덟 별이 악용되 는 것이 무서워 파괴하다니, 그것은 검이 무서워 검을 차지 않겠다고 말하는 검사와 뭐가 다르단 말이오?”

루트에리노는 갑자기 몸을 움직였다. 그는 제단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는 편한 자세가 되었다. 한가로운 동작으로 제단 위에 흩어진 파편을 툭툭 건 드리던 루트에리노는 조금 전 핸드레이크가 그랬듯이 그중에서 한 파편을 집어올렸다.

루트에리노는 파편을 눈앞으로 가져와 유심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여덟 별은 너무나 무서운 힘일세.”

핸드레이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의 가슴을 움켜쥔 채 흐느끼고 있는 다레니안의 작은 떨림이 그의 신경을 미치도록 자극했지만 핸드레이크 는 꾹 참으며 루트에리노를 바라보았다.

“왜 우리가 이런 힘을 가져야 되지? 우린 스스로 발전할 수 있네.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내일을 개척할 수 있단 말일세. 내가 드래곤 로드를 물리치

고 인간의 내일을 연 것은 여덟 별의 도움이 아니었네. 그리고 나의 자손들도, 인간의 자손들도 인간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고 열어나가야 하네. 여덟 별의 도움이 아니라 그의 두 손으로………….”

“헛소리!”

루트에리노는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핸드레이크는 뭔가 단단한 것을 토해 놓듯이 말 한마디 한마디를 힘겹게 말했다.

“인간의 손으로? 인간만을 위해? 이 거창한 인간의 신전을 온 세계에 강요할 것이란 말이오?”

핸드레이크는 한 손으로 다레니안을 받쳐올린 채 다른 손을 휘저어 주위를 가리켰다. 루트에리노는 뚫어지게 핸드레이크를 쏘아보았다.

“그토록 작은 머릿속에 세계를 우겨넣고는, 세계를 마치 자신의 장난감처럼 대하겠다는 말이오? 제멋대로 세계의 치수를 재고! 제멋대로 세계의 무 게를 재어! 제멋대로 세계의 가치를 매길 거란 말이오? 당신의 힘? 당신의 손? 웃기지 마시오! 당신은 당신의 손으로 드래곤 로드를 물리치고 인간을 구원했다고 믿고 있는 모양인데, 세상에 그런 지독한 과대망상은 처음 보는군!”

“핸드레이크!”

“입 닥치고 들으시오! 당신에게 말대답하라고 부탁한 적 없어!”

루트에리노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핸드레이크는 미친 듯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당신이 구원하긴 뭘 구원해! 당신은 세계의 가장 최상단에 위치하던 드래곤 로드를 없애버렸을 뿐이오! 정점을 없애버렸을 뿐이지 구조를 바꾸진 않았다구! 그리고 만일 당신이 그 위치에 들어갈 작정이라면 당신은 아무것도 바꾼 것이 없게 돼! 그 오랜 전쟁과 그 피가 모두 쓸모 없는 것으로 바 뀌는 거야!”

핸드레이크는 다시 제단 위에 놓인 파편들을 가리키며 외쳤다.

“당신이 한 소행이 모두 똑같아! 당신은 없애기만 할 뿐이야! 없애고, 죽이고, 지워버리고! 드래곤 로드가 우리를 지배했기에 당신은 드래곤 로드를 쫓아버렸어! 여덟 별은 우리를 무한에 접근시킬 수 있을 테지만 당신은 그것을 파괴해 버렸어! 파괴, 파괴, 파괴! 당신은 생성과 치유를 알지 못해. 없 애버릴 뿐이야! 질식할 것같이 지독한 현실만을 영원히 남겨두기 위해!”

“핸드레이크, 자넨 너무 흥분해서………….”

핸드레이크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지만 호흡을 고르지도 않고 곧장 루트에리노의 말을 잘라 들어갔다.

“유피넬은 저울을 들고 있지 검을 들고 있지 않아. 유피넬은 보다 큰 악에 대해 보다 큰 선을 베풀지, 악을 없애버리지는 않는단 말이야. 그러나 당 신은 없애버릴 뿐이야. 악의 가치도 모르는 머저리!”

“핸드레이크, 자네!”

“천하에 둘도 없는 바보 같으니! 당신은 여덟 별을 파괴함으로써 불쌍한 여덟 종족을 영원히 위험에서 구출했다고 믿고 있겠지? 여덟 별이 다시 드 래곤 로드 같은 자에게 들어가 그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바뀔지도 모르는 위험에서 말이야. 따라서 당신은 자신이 여덟 종족으로부터 영원히 칭송받 을 만하다고 믿고 있겠지? 그 둔해빠진 머리로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군!”

“핸드레이크! 더 이상 그 따위로 말한다면 나도 더 참을 수 없네!”

“계속 이 따위로 말할 테니까 잘 듣고 참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해! 하지만 경고하겠는데, 참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거야. 당신이 드래곤 로드에 게 한 짓을 그대로 나 또한 당신에게 할 수 있어. 아니, 더 쉽지! 당신은 드래곤 로드가 아니니까.”

루트에리노의 얼굴은 그저 굳어진 정도였지만 제로딘의 얼굴은 창백하게 바뀌어버렸다. 루트에리노 대왕은 핸드레이크의 도움이 있어서 간신히 드 래곤 로드를 북녘으로 쫓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핸드레이크라면 손가락만 움직여서도 루트에리노 대왕을 없애버리고 이 나라를 차지할 수 있을 것 이다. 제로딘은 다시 한번 서서히 손을 칼자루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흥분해서 떠드는 마법사라면, 제아무리 대마법사라 하더라도 전사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제로딘은 우울한 결과에 대해 예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련된 손길은 그의 고뇌에도 상관없이 지하의 어둠 속에서 뱀처럼 움직여 칼자루를 쥐었다.

핸드레이크는 외쳤다.

“왜! 왜 날 배신한 거요!”

루트에리노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제단에 한 손을 짚고 다른 손으론 이마를 감싸면서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넬 배신한 것이 아니야. 우정은 친구의 잘못을 시정해 주는 것이고, 그것을 내버려두는 것이 바로 배신이야. 자넨 헛된 망상을 품고 있었어.” “그래?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럼 왜 진작 내 잘못이라는 것을 시정해 주시지 않았지? 왜 드래곤 로드가 쓰러지고 바이서스가 건국될 때까지 날 내버 려두고서는 이제야 내 잘못이라는 것을 시정해 주시겠다는 거지? 그 동안은 날 이용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그 우정이라는 것 정말 유용하군. 필요에 따라 표현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우정이군?”

루트에리노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뭐라 해도 그가 핸드레이크를 이용했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었던 것이다.

드래곤 로드의 신비스러운 지배를 연구하던 젊은 마법사 핸드레이크는 신이 지상을 떠나기 전, 지상에 남겨진 종족을 위해 베푼 마지막 선물인 여덟 별에 대해 밝혀냈다. 그것은 순전히 미약한 증거와 그의 사고의 도약 속에서 만들어진 가설이긴 했지만 핸드레이크는 젊은이 특유의 무모함으로 자 신의 가설을 신뢰했다. 바로 이 여덟 별이 드래곤 로드의 지배의 근간이었다. 드래곤 로드는 막강한 힘과 공포는 가지고 있었지만 지상의 모든 것에 대한 오롯한 지배는 그 개인의 힘과 공포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덟 별이야말로 그의 지배의 신비였던 것이다.

젊은 이상주의자 핸드레이크는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이 여덟 별이 신의 마지막 선물, 남겨진 종족들이 신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임을 깨달은 것

이다. 만일 여덟 별만 손에 넣는다면 모든 종족은 상상할 수도 없는 번영과 행복, 상호 이해를 구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여덟 별을 손에 넣으면 엘 프와 드워프도 더 이상 반목하지 않게 될지도 몰랐다. 심지어 오크도 인간의 친구가 될지 모른다! 여덟 별은 모든 것을 약속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 종족의 가치관과 내일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힘만으로 드래곤 로드에게서 이 여덟 별을 강탈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이때, 그는 중부 대로의 원정에서 저 유명한 만 남, 즉 하루 동안 세 번에 걸쳐 루트에리노와 만나게 되는 일을 겪는다. 당시 루트에리노는 훗날 여덟 별로 불려질 기사들 중 우타크와 차넬을 만나기 위해 중부 대로를 왕복하고 있었다. 세 번째 만났을 때, 루트에리노는 핸드레이크에게 흉금을 털어놓게 되었다.

핸드레이크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로 개념이 없었다. 핸드레이크는 그보다는 다른 종족들로 하여금 서로를 이해하고 반목 없는 번 영을 구가하게 할 수도 있는 힘을 자신의 지배를 위해 사용한다는 이유로 드래곤 로드를 증오했다. 그리고 루트에리노는 인간을 지배했기 때문에 드 래곤 로드를 증오했다.

그 성격은 달랐지만 루트에리노와 핸드레이크는 증오의 대상이 같았고, 그들은 손을 잡을 수 있었다. 루트에리노는 핸드레이크에게 여덟 별의 소유 권을 약속했고 핸드레이크는 대신 클래스 9의 마스터인 자신을 통째로 루트에리노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거짓이었다. 루트에리노는 핸 드레이크로부터 그 여덟 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그것을 파괴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렇다. 이것은 우정에 대한 배신이고 신뢰를 도구로 이용한 것이다. 루트에리노는 가슴 아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여덟 기사들에게 여덟 별의 추구자라는 이름까지 붙여서 핸드레이크를 믿게 만들었다. 철저한 기만.

그리고…………, 긴 시간, 그 수많은 유혈과 고통의 세월. 무수한 영웅의 승리와 무수한 영웅의 몰락. 비극과 더 지독한 비극들을 지나서, 마침내 루트에 리노는 드래곤 로드를 몰아내고 인간의 속박을 풀어주었다. 실로 수백 년 만에 인간은 드래곤 로드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인간으로서 대지를 밟고 설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왜 모른단 말인가!

루트에리노는 슬픈 눈으로 핸드레이크를 바라보았다.

“자넬 이용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겠네. 내 생각과 자네의 생각이 달랐지만 난 그것을 말하지 않았지. 하지만 난 다시 한번 그 이름으로 부르겠네, 친구여!”

핸드레이크는 루트에리노의 부름에 대한 대답으로 죽일 듯한 시선을 보내었을 뿐이다. 루트에리노는 흠칫했다. 문득 루트에리노는 저 황량한 암흑 의 들판에서 드래곤 로드와 맞서 싸우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이와 같은 공포를 느꼈다. ‘아냐.’ 루트에리노는 이를 악물었다. ‘그때보다 더한 공포 다.’

“친구여, 제발. 난 인간이 세상의 왕노릇하기를 바란 적은 없네. 단지 우리들 모두가 스스로의 손으로 일어서길 바랐을 뿐이야. 드래곤 로드의 지배 하에서도 평화는 있었네. 마법은 발달했고, 삶에 불편은 없었어. 하지만 그것은 드래곤 로드라는 엄격한 교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짓된 평화였 어. 우리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성인이 되어야 해.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야 해. 그래서 난 우리를 지배하는 드래곤 로드를 물리치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서게 만든 것이네. 그리고 보게!”

루트에리노는 격정을 담아 외쳤다.

“이제 영원토록 우리는 우리의 두 손으로 우리의 앞날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네. 엘프와 드워프, 오크들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해. 그리고 우리도 그 들을 지배하지 못하고, 드래곤 로드처럼 너무나 강대한 적은 이제 더 이상 남지 않았네. 우리 모두는 이제 영원한 성인이 되었단 말일세! 하지만 단 하나의 적이 남아 있었네. 그것이 바로 여덟 별이란 말이야!”

루트에리노는 제단 위에 놓인 파편을 가리키며 외쳤다.

“왜 우리가 저런 힘의 지배를 받아야 되는가! 왜 우리가 어린애들처럼 수상쩍고도 무시무시한 힘에 의해 앞날을 지배받아야 된단 말인가! 우리는 스 스로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설 수 있네. 왜 우리가 저런 화려한 목발을 쥔 채 서야 된단 말인가!”

루트에리노는 가슴을 크게 벌렁거리며 흥분을 가라앉힌 다음 다시 날카롭게 말했다.

“저것은 드래곤 로드보다 더 무서운 적이었네. 드래곤 로드는 단순히 지배하기만 했지만, 저것은 우리를 무엇으로든 만들어버릴 수 있단 말일세! 우 리 자체를 바꿔버릴 수 있단 말일세! 우리가 영원히 세상의 아이로 남게 만들 수 있단 말일세! 나는 그것을 구원했단 말이야!”

핸드레이크는 그만 숨이 막혀버리는 기분을 느꼈다.

이것이 마법사와 전사의 차이인가? 자신의 손으로 운명을 개척하고, 자신의 다리로 걷는 인간? 어처구니없는 환상. 말도 안 되는 환상이지. 저것이 무시무시한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와 검을 다루는 전사의 차이였단 말인가? 멍청한! 마법사는 마나를, 외부의 강력한 힘을 다루기 때문에 저런 어처구 니없는 생각은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전사는 자신이 쥔 검 한 자루로 자신을 이끈다고 믿지. 그래서 검을 자신의 힘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지. 기가 막 히도록 유아독존적인 환상.

검이라는 것은 광부에 의해 캐내어져 수레꾼에 의해 운반된 광석이 대장장이에 의해 검으로 만들어지고 상인에 의해 팔려서 전사에게 쥐어지는 것 이다. 세상에 자기 손으로라는 것은 없다! 어처구니없는 환상이다. 가증스러울 정도의 자기애, 타인을 이해할 줄 모르고 타인의 존재 가치를 이해하 지 못하는 자의 망상이다. 자신의 힘? 그렇다면 그대를 위해 피를 흘려준 저 숱한 바이서스의 병사들의 목숨은 어떻게 된단 말이지?

그리고 그 지독한 망상으로, 모든 존재들의 내일을 약속할 수 있는 문을 제멋대로 닫아버린, 자신의 판단 하나만을 믿고 모든 피조물의 희망을 뭉개 버린 남자가 자신의 앞에서 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느냐고 말하고 있다.

핸드레이크는 더 이상 말도 하기 싫은 느낌을 받았다.

칼의 눈에서 벼락이 친 걸까? 아니었다. 굉음과 함께 창 밖에 번개가 친 것이다. 콰르르릉!

“꺄아아악!”

네리아는 곧장 옆에 있던 운차이에게 매달렸다. 정신없이 하슬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운차이는 네리아의 습격에 대비하지 못하고는 그대로 엉덩 방아를 찧고 말았다. “뭐, 뭐냐? 이거 놔!” 그러나 네리아는 죽기 전엔 떼어놓기 어려울 정도로 달려들었고 운차이는 노호성을 지르며 팔을 들어올렸 다. “이, 이걸!” 그는 그대로 네리아의 뒤통수를 내려칠 기세였다.

“어, 어?”

아프나이델은 뜻 모를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운차이는 팔을 들어올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팔을 부르르 떨었다. 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운차 이의 팔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손은 계속해서 운차이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운차이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리고 네리아는 운차이의 무 릎 위에 엎드린 채 서로를 그렇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조금 전에 듣던 이야기 속의 핸드레이크와 다레니안이 떠오르는데.

운차이는 가슴에 매달린 네리아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꽈광! 다시 벼락이 치자 네리아는 비명을 지르고서는 멈추었던 눈물을 다시 터 뜨렸다. 운차이는 눈을 최대한 찡그리며 날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난처한 목소리가 나왔다.

“젠장. 이 여자, 벼락을 무서워하는 거냐?”

샌슨은 그만 고개를 돌리며 킥킥 웃었다. 난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무지무지하게 무서워해요. 그런데, 때릴 거 아니죠?”

“젠장! 여자를? 부탁이니 좀 떼어내 다오!”

글쎄. 그게 가능할까? 과연 운차이로부터 네리아를 떼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벼락은 점점 잦아들고 있었고 네리아는 미친 듯이 매달렸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다 큰 처녀를 사내 다루듯이 마구 다룰 수도 없는 노릇이잖은가. 제레인트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달라붙었지만 도저히 될 일이 아 니었다. 난 그만 두 손을 들고 항복해 버렸다.

“운차이. 어쩔 수 없어요.”

“이, 이것 봐!”

“조언밖엔 줄 게 없네요. 여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불쌍하게도 공포에 질린 한 인간이라고 생각해 버려요.”

“제기랄…………. 이봐, 아프나이델! 이 여자 어떻게 재워버릴 수 없냐!”

아프나이델은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기주한 마법은 아까 낮의 싸움에 다 써버렸는걸요. 그리고 내 생각에도 후치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불쌍한 자에겐 도움을 주는 것이 인지 상정이지 않겠습니까.”

운차이는 그만 기운 빠진 얼굴을 하고선 벽에 등을 기대었다. 운차이가 몸에 힘을 빼자 네리아는 더욱 바싹 달라붙었고 운차이는 고개를 들어 천장 을 바라보았다. 그 꼴을 보고 있던 엑셀핸드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등에 손이라도 얹어주게. 불쌍하게 떨고 있잖은가.”

“………닥쳐, 이 드워프야. 상관하지 마.”

그러나 운차이는 흠칫거리며 손을 네리아의 등에 얹었다. 벌컥 화를 내려던 엑셀핸드는 그 광경을 보고선 그만 웃어버렸고 천장을 바라보던 운차이 의 얼굴은 발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칼은 예의를 담아 그 광경을 못 본 척하면서 창문을 바라보았다.

“폭풍인가…… 이 계절에는 드문 일인데. 어쨌든, 이야기를 계속해 주시겠습니까, 하슬러 씨.”

하슬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레이크는 자신의 가슴에 붙은 다레니안의 흐느낌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을 느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스스로의 손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미래를 개척한다고? 그렇게 확신한다는 말입니까?”

루트에리노는 순간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확신에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네, 핸드레이크. 확신하네. 인간은 드래곤 로드의 지배도, 여덟 별의 도움도 필요 없네.”

“그것이 과연 마법사의 도움으로 왕좌를 차지한 자의 입에서 나올 말인지 의심스럽군요.”

핸드레이크의 말투는 조용하고 평온했지만 루트에리노의 낯색은 흙빛이 되었다. 그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핸드레이크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어투 로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난 당신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오. 우리는 서로를 돕는 법이오. 존재하는 것은 모두 다른 존재에 자신을 투영하고 자신을 만들 어나가는 것이오. 세상에 오직 하나, 미련한 전사들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그래서 자신의 다리로 걷고 자신의 손으로 성취한다고 믿 는 모양이지만, 그것은 틀렸소. 나는 단수가 아니오. 그 단순한 사실도 모르는 병신 같은 작자야.”

조용한 말투 때문에 마지막에 붙은 욕설은 좀 늦게 영향력을 나타냈다. 제로딘도, 차넬도, 루트에리노도 너무 늦게 그 욕설을 깨닫게 되어 적절하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여덟 별의 존재 하나도 수용할 수 없는,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당신을 건네고 동시에 그것을 건네받을 줄도 몰라서 그것을 파괴해 버린 당신이, 다른 인간들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지극히 의문이오.”

루트에리노는 잠시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하느라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그에겐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는 루트에리노의 시선 을 무시하면서 자신의 손에 얹힌 다레니안에게 말했다.

“다레니안. 당신이 저것을 파괴했을 테지요. 남부의 야만인들의 말로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이 있소. 당신이 저것을 다시 복구할 수는 없습니까?” “핸드레이크!”

루트에리노는 무서운 음성으로 말했지만 핸드레이크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루트에리노를 향해 콧방귀를 뀌어보이면서 냉정하게 말 했다.

“우정은 사라졌소, 바이서스 씨. 날 그렇게 부르지 마시오. 휴리첼 씨라고 불러주길 바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