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7권 – 제13부 : 대마법사의 만가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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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요!”
꽈과광! 굉장한 벼락이 쳤지만, 그래서 네리아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그 소음 속에서도 칼의 경악에 찬 목소리는 정확하게 들려왔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 중 이야기를 하던 하슬러와 착란 상태에 빠져 있던 네리아를 제외하곤 모두들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칼은 테이블 모서리를 꽉 움 켜쥔 채 하슬러를 바라보았다.
“휴리첼, 휴리첼이라구? 핸드레이크의 성이 휴리첼……, 핸드레이크 휴리첼이란 말이오?”
하슬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넥슨 휴리첼의………?”
“가문은 같소. 하지만 핸드레이크는 결혼하지 않았소. 따라서 직계 조상은 아니오. 핸드레이크의 공훈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백작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오. 다만 휴리첼 가문은 개국 공신이었다고만 알고 있을 뿐이오. 당시에도 휴리첼 가는 무골 집안이었고, 그래 서 핸드레이크는 마법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가문을 떠났으니까. 이후론 그는 거의 휴리첼이라는 성을 쓰지 않았소.”
“그렇소? 그런데, 넥슨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소? 아니, 당신은 도대체 그 사실들을 어떻게 알게 된 거요?”
“천천히 듣고 있으면 다 알게 될 거요.”
“아, 알겠습니다. 들려주십시오.”
다레니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작디작은 얼굴이 눈물에 젖어 더욱 애처롭게 보였다. 핸드레이크는 좌절에 찬 표정이 되어 다시 한번 제단을 바라보았다. 그는 짓눌린 음성으로 말했다.
“바이서스 씨의 이야기는 들었소. 하지만, 다레니안. 당신은 왜 그를 도운 거요? 저자의 이야기를 믿게 된 거요? 저자의 화려한 말 뒤에 숨겨진 시커 먼 속셈을 몰랐단 말이오?”
루트에리노는 이 방약무인한 어투에 크게 노했다. 하지만 그는 꾹 참았으며 동시에 차넬과 제로딘에게도 참고 있으라는 눈짓을 보내었다. 핸드레이 크는 그런 눈짓과 세 사람의 행동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에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는 조용히 다레니안을 올려놓은 손바닥을 자신의 얼굴 가까이까 지 들어올렸다.
다레니안은 핸드레이크와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녀는 눈가를 닦아내면서 말했다.
“시커먼 속셈? 난 그런 거 몰라요. 내가 그를 도운 것은………….”
다레니안은 갑자기 핸드레이크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당신 때문이에요.”
핸드레이크는 어차피 어떤 대답을 들을지 짐작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어떤 대답에도 놀라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이런 대답은 정말 기 대할 수 없었다. 핸드레이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멍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 때문에?”
“그래요. 핸.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은 세상 만물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았어요. 당신 자신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고…………, 자신으로서 살지 않 았어요. 그날 밤의 대화를 기억하나요?”
“그날 밤?”
다레니안은 핸드레이크의 반문을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날 밤……, 당신은 모든 것에 당신을 주려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핸드레이크는 입을 다물고 다레니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난 아직도 당신의 말을 단어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해요. 당신은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이 날 사랑하려 한다면, 대왕의 원대한 희망을 함께 수행하 는 핸드레이크, 루트에리노의 인간적인 갈등에 같이 가슴 아파하는 핸드레이크, 바이서스 군의 승리를 위해 목숨을 거는 핸드레이크, 사상 최초로 클 래스 10의 마법을 만들려 애쓰는 핸드레이크, 드래곤 로드를 죽이기 위해 무슨 짓이든 불사하는 핸드레이크, 이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요.”
날개를 잃은 요정의 여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말을 들으며, 핸드레이크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조용히 말했다.
“그래요. 난 그렇게 말했고, 그 말은 나의 신념이오. 그런데 그것이 왜………….”
“난 그렇게 많은 핸을 알지 못해요.”
핸드레이크는 다레니안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작디작은 얼굴에 가득한 슬픔과 동시에 도전적인 자존심, 긍지 등이 어우러져 나타나고 있었다. 다레니안은 그 작은 입술을 조금 떨다가 말했다.
“나로선 상상도 할 수 없이 많은 핸이에요. 그런데…………, 그런 당신이 여덟 별을 손에 넣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뭐요?”
“당신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세상 만물의 번영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는 당신이? 인간 하나를 위해서도 그렇게 자신을 분열시키는 당신이? 당신 은 아마도 페어리의 핸드레이크, 엘프의 핸드레이크, 드워프의 핸드레이크, 하플링의 핸드레이크……………, 심지어 오크의 핸드레이크가 되겠지요. 수없 이 많은 핸드레이크로 불어나 산산이 흩어져버릴 거예요. 국화의 꽃잎을 뜯어본 적이 있나요? 한 잎 한 잎을 뜯어내고 나면,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 아요.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너무나 분해되고 흩어져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거예요. 죽을 때까지 자신으로서 살 수 없을 거예요.”
핸드레이크는 다레니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동시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잠자코 다레니안의 말 을 기다렸다.
“핸, 누구도, 어떤 종족도 당신에게 자신을 돌봐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어요. 고귀한 엘프도, 자존심 강한 드워프도, 저 추악한 오크도…………. 어떤 종족 도 당신에게 도움을 요구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당신은 자신을 버려가면서 그들을 위해 애쓰려는 거지요? 자기가 있지 않고서는 타인도 없는 거예 요. 그런데 왜 자기로서 살지 않는 거지요?”
핸드레이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은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타인 속에 있을 때 자신도 있다는 것을.”
다레니안은 핸드레이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서글픈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모순이에요. 타인이라는 것 자체가 자기가 있음으로 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당신의 말은 틀렸어요. 그리고.
다레니안은 갑자기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서 말했다.
“나무를 사랑하는 정원사가 가지를 쳐내듯, 우정과 사랑은 상대의 잘못된 것을 파괴할 수도 있는 힘이에요. 아름다운 파괴지요. 그래서 난 여덟 별 을 파괴했어요.”
핸드레이크는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극히 원시적이고도 잔악한 생각이라 자신이 먼저 놀라버리고 말았지만. 핸드레이크는 갑자기 날 개를 잃어 도망가지도 못하는 다레니안을 앉힌 채 ‘손바닥을 붙여버리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핸드레이크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때 다레니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일곱 별이군요. 드래곤의 별은 파괴되지 않았으니까.”
순간 핸드레이크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핸드레이크는 고개를 들어 루트에리노를 바라보았다.
“드래곤의 별은 파괴되지 않았습니까?”
루트에리노는 눈살을 찌푸린 채 핸드레이크를 마주보았다. 핸드레이크는 재촉하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침착하게 말했다.
“드래곤의 별은 파괴되지 않았군요. 그렇지요?”
루트에리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드래곤의 별은 드래곤 로드가 가져갔네. 그날 내가 부상을 입지만 않았어도 그를 물리치고 그것마저 획득할 수 있었을 테지. 하지만 난 그 를 끝장내지 못했고, 그래서 드래곤 로드는 드래곤의 별을 가지고 도망쳤네.”
핸드레이크의 얼굴이 크게 밝아졌다.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 제로딘과 차넬은 당황한 시선으로 그의 등을 쫓았고 루트에리노는 짧고 격하게 말했 다.
“어딜 가려는 건가?”
핸드레이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레니안을 쥐어올린 두 손을 가슴에 꼭 붙인 채 핸드레이크는 지하 제단실을 빠져나갔다. 문을 나서기 직전, 핸드 레이크는 잠깐 멈추어 섰다. 그는 몸을 돌린 채 말했다.
“적어도 한 종족에겐 희망이 남아 있군요.”
“뭐라구? 설마, 자네!”
루트에리노는 제단을 돌아 달려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핸드레이크의 로브 자락이 크게 떠올랐다. 그는 몸을 돌려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로딘과 차넬은 뛰어오려던 동작 그대로 굳어버린 채 핸드레이크의 얼굴을 마주했다.
“당신의 속셈은 능히 짐작할 수 있소. 바이서스 씨.”
극히 차가운 말투였다. 루트에리노는 핸드레이크를 안 이후로 처음 보는 그의 얼굴에 당황했다. 핸드레이크의 얼굴은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웠다. “인간의 세상……. 우린 엘프들이나 드워프들처럼 오래 살지도, 놀라운 기예나 근면함을 갖추지도 못했지. 우리가 무엇을 이루기 위해선 겨우 삼사 십 년에 불과한 시간만이 주어져 있지. 그래서 우리는 무서운 생존력과 종족 번식력을 가지고 있어. 우리는 선대의 일을 후대에 넘겨주는 것으로서 엘프나 드워프들의 장수에 대항할 수 있지. 우리야말로 영원 불사의 존재…………. 잘 알 테지. 당신이 자주 한 말이니까.”
루트에리노는 경악했다. 핸드레이크는 차분히 루트에리노 자신도 정확하게는 깨닫지 못했던 그의 속마음을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내 눈엔 다 보이는 듯하군. 엘프의 별이 없는 이상 엘프들은 자신의 조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세상에 함몰되어 버리겠지. 드워프의 별이 없는 이상 드워프들은 자신의 독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탈락해 버리겠지. 페어리들의 여왕은 날개를 잃었으니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고…………,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 버리겠지.”
핸드레이크는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자신의 턱 아래에서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다레니안의 얼굴에서 애써 시선을 떼어내며 핸드 레이크는 말했다.
“하플링들은 자신의 소심함을 감당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잊혀지겠지. 오크들? 어쩌면 우리와 가장 유사한 우리들의 형제인 그들은, 아쉽게도 상상 력을 가지지 못했지. 발전할 수 없는 종족이지. 이제 몇 백 년 내에 대륙은 인간 소굴이 되고 말겠지. 저 태피스트리에서처럼, 세상을 자신의 장난감 으로 다룰 수 있게 되겠지. 우리 후손들이 부르는 인간 만세의 노래가 들리는 듯하군. 하지만.”
핸드레이크는 불길한 예언을 말하는 까마귀처럼 새되고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다른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들의 단점, 우리들의 약점을 시정할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렸어. 당신과 당신의 핏줄에 영원한 저주 있기를! 우리는 영원히 인간으로 남게 되었어! 인간을 넘어서지 못하게 되어버렸어! 더군다나 비교할 만한 다른 종족들이 모조리 대륙에서 사라져버릴 테니, 자신의 오만과 오류를 알아내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게 되겠지. 이 영원한 잘못, 영원한 실패작, 영원한 시행착오의 종족을 만들어낸 그대의 위업에 경배를 드리지, 축하하오, 바이서스 씨!”
루트에리노는 아무런 말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는 다만 입을 벌린 채 핸드레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는 영원히 한자리에 고정된 인간으로서 영원히 높은 곳을 바라보는 인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날개 잃은 요정의 여왕을 가슴에 꼭 붙인 채, 그녀의 흐느 낌을 조용히 달래며, 핸드레이크는 루트에리노를 떠났다.
제레인트의 긴 한숨소리는 300년 전의 세계를 떠돌던 내 정신을 다시 현실로 호출하는 신호였다. 난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메드라인 고개, 그 위 의 바라크 속에 있는 후치 네드발로 돌아왔다.
칼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괸 채 두 손으로 볼을 감싸쥐고 있었다. 마치 눈앞에 놓인 촛불에 모든 정신을 집중시켜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꽈과광! 벼 락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방 안은 하얗게 바뀌더니 기어코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짚을 덮고 그 위에 밧줄을 얽어매고 다시 짚을 덮는 식으로 몇 겹에 걸쳐 두껍게 만들어진 지붕이었기에 굉장히 아늑한 느낌을 주는 방 안이었다. 하 지만 맹렬한 빗방울의 소리와 천둥 소리, 그리고 모진 바람소리 속에서 나는 마치 야외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네리아는 운차이의 무릎 위에서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아무렇게나 던진 채 기절한 것인지 잠든 것인지, 어쨌든 정신 을 잃고 있었다. 운차이는 여전히 서까래가 노출된 지붕만을 쏘아보고 있었지만 그의 오른손은 천천히 네리아의 등을 애무하듯 가볍게 두드리고 있 었다. 그의 손길은 네리아의 호흡과 똑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보고 있자니 나까지 졸릴 지경인걸.
칼은 촛불을 바라보며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핸드레이크는 루트에리노 대왕을 떠난 것입니까?”
“그렇소.”
“그러곤?”
“그는 그 길로 북쪽을 향해 떠났소. 아직 기회가 남아 있는 종족을 찾아서.”
하슬러는 잠시 자신의 말을 음미하는 듯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의 종족…………, 모든 종족들이 운명적으로 가지고 있는 부조리에서 유일하게 벗어날 수 있는 단 하나의 종족을 찾아 떠난 것이오.”
“모든 종족의……… 부조리라.”
하슬러는 우울한 얼굴로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과연…………. 그렇소. 엘프는 선량하고 강하고 지혜롭지만 자신의 조화 때문에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존재· 드워프는 인내심 강하고 끈질기고 단 호하지만 자신의 외골수 때문에 세상에 격리될 수밖에 없는, 산속이나 지하에서만 자신들끼리 살아가는 존재…………….”
엑셀핸드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대신 파이프를 꺼내어 담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칼은 여전히 누구에게도 시선 을 보내지 않은 채 자신에게 말하듯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강력한 번식력을 가지고 얼핏 보면 무모할 정도의 상상력을 갖추었지만, 그 번식력과 그 상상력 때문에 모든 것을 우리 자 신으로 만들어버리는 존재. 숲을 걸어 오솔길을 만들고, 하늘을 바라보아 별자리를 만들고, 땅을 굽어봄에 울타리가 생기게 하고, 바다를 헤치면 항 로가 생기게 만드는, 독존적인 존재.”
엑셀핸드는 길게 연기를 뿜었다. 침대 귀퉁이에 앉아 있던 제레인트는 칼의 말을 곱씹으며 웅얼거렸다. 듣기 싫을 정도로 웅얼거리는걸. 아프나이델 은 꼿꼿이 선 채 칼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굳은 얼굴로 뭔가를 말하고 싶은 투였지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칼은 한가롭게까지 들리는 말투로 하슬러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대미궁의 드래곤 로드에게 간 것이군요.”
“그렇소.”
“그리고?”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드래곤 로드 역시 핸드레이크의 제안을 거절했던 것 같소. 핸드레이크는 드래곤의 별을 이용하여 드래곤들을 완전무결한 존재로 만들어줄 수 있다고 말했지만, 자신을 제왕의 자리에서 쫓아낸 남자에게 드래곤의 운명을 판가름할 수 있는 보석을 건네준다는 것은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내 추측이오.”
“이해됩니다.”
“그래요. 이 과정에서 핸드레이크가 재미있는 일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건 불명확하오. 어쨌든 그 이야기에 따르면 핸드레이크는 드래곤의 별을 여러 개로 분열시켜 다른 종족의 별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합니다.”
“영원의 숲!”
또 벼락인가? 아냐. 아프나이델의 비명 같은 고함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침대 귀퉁이에 불안하게 앉아 있던 제레인트가 미끄러지며 바닥에 엉덩이 를 찧었다. 쿠당. 그러나 제레인트는 고통의 소리를 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얼빠진 얼굴로 테이블 위의 하슬러와 아프나이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슬러는 피로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소. 하지만 모든 것은 불명확하고 희미합니다. 과연 핸드레이크가 드래곤의 별을 여러 개로 분열시킬 목적으로 영원의 숲을 만들었는지…………. 글쎄올시다. 나로선 아무것도 확언할 수 없소.”
아프나이델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하슬러는 한결같이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핸드레이크가 대미궁에서 나올 때 드래곤 로드의 공포 때문에 떠나지도 못하고 있던 대미궁의 오크들을 풀어주었다는 이야기 오. 오크들은 그곳에 붙잡힌 채로 드래곤 로드의 가축처럼 살고 있었지만 핸드레이크는 그들 역시 드래곤과 마찬가지로 지성을 가진 존재로 여기고 는 방해와 폭력을 무릅쓰고 그들을 모두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답니다. 그래서 대륙의 오크들이 갑절로 늘어나게 되었다는 말이 있긴 하오.”
꽈광! 이번엔 진짜 벼락이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도 마찬가지로 벼락이 쳤다. 번갯빛의 하얀 잔광 속으로 어떤 영상이 떠올랐다.
‘왜 통로에 죽어 있지? 통로라는 것은 죽어 있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지. 그건 둘째 치더라도, 이 통로를 지나다니던 다른 오크들에게 걸리적거렸을 텐데 왜 그대로 놔두었지?’
‘어? 그렇네요. 음. 뭔가 난투가 일어난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내분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상하군. 드래곤 로드가 그런 것을 용납할 리가 없는데.’
대미궁 곳곳에 흩어져 있던 오크의 뼈다귀들. 뭔가 커다란 싸움이 일어났던 것 같은 흔적. 핸드레이크가 오크들을 데리고 나오려 할 때 찬성하는 쪽 과 반대하는 쪽이 갈렸겠지. 그리고 싸움이 벌어졌을 테고. 지하에서 일어난 무시무시한 싸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번개가 쳐 세상이 하얗게 변했을 때 눈앞에 칸 아디움의 황야에서 검은 투구의 오크 아그쉬가 외치던 장면이 떠올랐다.
‘취잇취이이익! 화렌차와! 오크의 친구인 성자 핸드레이크가 나를 돌보신다!’
그랬던 것이군. 그래서 대미궁에는 오크라고는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군. 원래 드래곤 로드의 공포 때문에 잡혀 있던 오크들은 핸드레이크의 도움으로 모조리 도망쳤고, 그 이후로 다시는 그 무서운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였군. 그래서 아그쉬 녀석은 핸드레이크를 성자 라고, 오크의 친구라고 불렀던 것이었군.
하슬러는 다시 고개를 돌려 에포닌을 바라보았다. 그는 에포닌에게 짙은 우수가 담긴 시선을 보내면서 말했다.
“어쨌든, 일곱 종족은 자신의 별을 잃었고,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는 법을, 서로와 교류하는 방법을 익혀야 되었소. 인간이 가장 빨랐고, 하플 링, 드워프의 순서로 서로가 다른 종족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소.”
“엘프는?”
하슬러는 말을 이으려다가 칼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말해 보시오.”
칼은 우울한 얼굴로 하슬러를 마주보았다. 그는 한숨을 쉬듯 말했다.
“엘프는 원래 조화롭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기 어려웠겠지요. 그들은 조화 때문에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기 어려웠을 거요. 그래서 상대에 게 마음을 연다는 것, 서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극히 어려웠겠지요.”
“정확하오.”
“그리고 오크…………, 오크들은 폭력과 증오로서 다른 종족들과 관계지어지게 된 것이오?”
“그렇소. 그것은 오히려 강렬하고 빠른 관계라 할 수 있지요. 역시 핸드레이크의 말마따나 오크는 인간들의 형제인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렇습니까.”
하슬러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목소리로 단정짓듯 말했다.
“그러나 드래곤은 유일하게 자신의 별을 가진 종족으로 남게 되었소. 다른 종족들은 모두 별을 잃어 자신의 부조리를 안게 되었지만, 그래서 서로에 게 자신을 열어보이고 상대를 위해 자신의 자유의 얼마씩을 희생해야 되었지만, 드래곤만은 자신의 별을 지켰기 때문에 어느 정도 완전에 가까운 종 족으로서 남게 되었소. 오로지 드래곤만이 다른 종족의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불완전한 다른 종족과 교류하지 않는 종족으로 남게 되었소.” 칼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낮게 질문했다.
“그래서 드래곤 라자가?”
하슬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주인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드워프 라자도, 오크 라자도 없지만 드래곤 라자는 있소. 왜냐하면 드래곤만이 자신의 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들 불완전한 인간들이 완전에 가까운 저 드래곤과 교류하기 위해선 드래곤 라자가 필요한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