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7권 – 제13부 : 대마법사의 만가 6화

드래곤 라자 7권 – 제13부 : 대마법사의 만가 6화

6

“정통 드워프식으로 할까?”

엑셀핸드의 목소리. 그리고 네리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드워프식은 어떻게 하는 건데요?”

“양념은 하지 않고 소금으로만 간을 맞추는데, 그대로 굽는 거야. 너무 바삭바삭하게 굽지는 않고 씹히는 맛이 충분히 남아 있도록.”

“좀 불안하네요. 엑셀핸드가 씹히는 맛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거예요?”

탁탁거리는 모닥불의 소리 사이로 아프나이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제가 함께 여행해 봐서 잘 압니다. 거의 날것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지요.”

“휴우. 차라리 내가 할래요. 하필이면 우리들 중 일류 요리사들이 모두 사라졌담.”

“왜 그래? 언니는 왜 난 생각도 하지 않는 거야?”

레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난 입술을 슬그머니 올렸다. 네리아는 자기가 요리를 못하니까 다른 여자도 요리를 못한다고 생각하는 게지. 하하하. “어? 아, 그래! 너 요리할 줄 아니?”

“그럼. 뭐, 우리 아빠는 내가 만든 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말하긴 하지만, 그건 아빠라서 하는 말일 거야. 하지만 우리 집에 온 손님들도 먹어보 고 괴로워하진 않았어.”

“다행이구나. 그럼 레니에게 맡길게.”

음. 나와 제레인트가 없어지면 우리 일행의 최대 문제는 요리사 부재가 되나 보군. 그것 참. 막중한 사명감을 느끼게 하는데? 그때 샌슨이 말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이런 말 하긴 싫지만, 빠져죽은 거 아닐까?”

“샌슨! 그런 소리 하지 마!”

“어, 네리아. 그러니까………….”

“아프나이델이 절대로 호수 안에는 없다고 했잖아! 틀림없이 다레니안이 데리고 있는 거라구. 확실해!”

어라? 이게 무슨 말들이야? 그때 발소리와 함께 길시언의 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샌슨. 난 도저히 못하겠소.”

“길시언.”

“샌슨이 대신 가서 칼 좀 끌고 와주시오.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있어.”

“그런데 말입니다. 내가 간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닐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칼도 은근히 고집이 이만저만이 아니거든요.”

털썩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며 눈을 뜨자 땅바닥에 주저앉은 길시언의 모습이 보였다. 모닥불빛은 그의 얼굴을 검붉게 물들여 놓았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샌슨과 네리아 등이 앉아 있었고 모닥불 주위로 아프나이델과 엑셀핸드의 모습도 보였다.

샌슨이 고개를 돌려 멀리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난 샌슨의 시선을 따라 쳐다보았다. 멀리 레브네인 호수가 보이고, 그리고 호숫가에 앉아 있는 휘 우듬한 그림자가 보였다. 칼인가?

떠오르는 달이 호수 수면을 은색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칼의 어깨에는 달빛이 부서지고 있었지만 칼은 주저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검은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그의 뒷모습뿐이다. 샌슨은 한숨을 쉬다가 아프나이델에게 고개를 돌렸다.

“빠져죽은 것은 확실히 아니죠?”

모닥불 옆에 앉아 있던 아프나이델은 피로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 호수 전체를 관찰해 보았지만 두 사람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호수 안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빠져죽었다면, 설령 죽었다 해도 흔 적은 남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요.”

“혹시 제레인트의 디바인 파워의 경우엔 그가 사망했을 경우 약화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후치의 OPG의 경우는 그의 생존 여부와 상관없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느낌도 전혀 없었습니다. 아, 제가 못 느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전 최선을 다했습니다.”

샌슨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역시 다레니안이 그 둘을 데리고 있다는 결론으로 돌아오게 되는군요. 흐음.”

길시언은 다시 칼의 등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토하듯 말했다.

“그런데 페어리퀸께서는 그들을 얼마나 데리고 있을 생각인지.

“돌려보내 주실까요?”

“알 수 없습니다.”

그때 레니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정의 나라로 붙잡혀 간 사람들은, 저……………, 그러니까………….”

“수십 년 만에 돌아온다는 식의 이야기 말이야? 돌아와 보니까 세상은 바뀌어 있고 자기 자식들은 모두 호호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되어 있고?” “진짜 그래요?”

“내가 잡혀가 봤니. 그걸 알게.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은 모두 ‘옛날 옛적에’, 이런 말로 시작한다구. ‘며칠 전에’가 아니라.”

네리아의 힘없는 대답에 레니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지금 사람을 옆에 놓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난 어처구니가 없어서 샌슨 의 어깨를 잡아당기려 했다. 그런데 내 손은 그의 어깨를 그대로 지나쳐버렸고 난 기절할 만큼 놀라버렸다.

“히익!”

난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은 그냥 손이다. 그리고 샌슨의 어깨는 그냥 어깨고. 난 다시 조심스럽게 샌슨의 어깨를 짚으려 했다. 천천히 손을 뻗어, 익숙한 느낌이 올 때까지 손가락을 뻗어보았지만, 손가락 끝에는 아무런 느낌도 오지 않았다.

“이익!”

난 흡사 주먹질을 하듯 손을 쭉 내밀었지만 주먹은 그대로 샌슨의 몸을 지나칠 뿐이었다. 게다가 샌슨은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한 모양이다.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날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선의 초점은 내가 아니었다. 난 그녀에게 후다닥 다가가서는 그녀의 얼 굴 바로 앞에서 고함을 질렀다.

“네리아! 평소에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당신 정말 미인이에요! 내가 평소에 얼마나 거짓말이 하고 싶었는지 잘 알겠죠?”

그러나 네리아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저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뭘 느끼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레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 재료들 을 힘없이 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난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오, 젠장! 아프나이델. 미안하지만 당신이 틀렸어요. 난 죽었나 봐요. 음. 그렇게 나쁘진 않네요. 생사의 갈림길이 뚜렷하다 보니 이야기를 전할 수 야 없지만, 그래도 친구들의 모습은 생전처럼 볼 수가 있군요? 뭐, 이 정도라면 고마워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기뻐하죠, 뭐.”

말을 꺼내놓고 보니 정말 웃기는 상황에 웃기는 말이로군. 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내 넋두리는 나 스스로를 웃겼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사람 하 나도 웃겼던 모양이다.

“파핫하하하! 후치, 왜 오랜 세월에 걸쳐 그 효능이 입증된 믿을 만한 방법을 사용해 보지 않는 거야?”

“볼을 꼬집는 거요?”

말을 하면서 고개를 돌려보자 길시언의 등 뒤에서 배를 잡고 웃는 제레인트가 보였다. 제레인트는 짓궂은 얼굴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대신 해줄까?”

“정중히 사양하지요. 우리 안 죽었어요?”

“내가 알기론, 그래.”

“넌 죽지 않았어. 느끼지 못하겠니?”

제레인트의 말꼬리를 이어 또 다른 말이 들려왔다. 고개를 조금 들어올리자 낮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다레니안의 모습이 보였다.

다레니안은 나뭇가지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날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닥불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나무 위였지만 다레니안의 모습은 똑 똑히 보였다. 난 동료들의 모습을 주욱 돌아보고 나서 다레니안을 바라보았다.

“뭐, 죽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확실히 죽었다는 실감은 오지 않더군요. 그런데 그렇다면 여긴 도대체 어디지요?”

다레니안은 레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 계집아이가 말한 대로 요정의 나라지.”

“요정의 나라? 그런데 이건 현실과 똑같잖아요?”

“똑같다고? 현실의 사람들은 널 느끼지 못하잖아?”

“어, 그렇긴 하네요. 그렇다면 요정의 나라라는 것은 뭐지요?”

다레니안은 웃으며 말했다.

“요정의 나라는 현실의 나라 바로 이웃에 있어. 어쩌면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사실 현실의 거리를 나타내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 면 관념이 이상하게 변질되지. 하지만 너희들의 언어는 모두 너희들의 현실에만 맞도록 되어 있으니 설명해 줄 길이 없구나.”

“그래요?”

“후치야! 이것 봐!”

제레인트의 고함소리가 들려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난 곧 쓰러질 듯이 웃게 되었다.

“푸흐허으우하하핫!”

길시언은 우리들에 대한 걱정으로 근심스럽고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닥불의 이글거리는 붉은 빛이 그의 얼굴을 더욱 고뇌에 찬 무엇으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가슴 부분에서 제레인트의 머리가 불쑥 튀어나와 있는 것이다. 제레인트는 길시언의 가슴으로 머리를 내민 채 나에게 윙크를 해보였고 그 광경은 괴기스럽다기보다는 폭소를 터뜨리게 했다.

내가 정신 없이 웃는 것을 보며 제레인트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길시언의 목소리를 흉내내면서 말했다.

“이게 요정의 나라야. 우리 이웃. 하지만 우리 차원과는 다른 차원이고, 페어리는 우리가 땅을 걷듯이 차원 사이를 걸어다니지. 그랬다고 들었어.” “하하하. 너무 어려워서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어요. 현실 차원은 뭐고 다른 차원은 뭔지. 난 차원이라는 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는데요.”

레니가 재료를 다루는 모습을 보면서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제레인트가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흠흠. 설명해 주길 바라는 거야? 그런데 나도 잘 모르겠는걸.”

난 고개를 돌려 다레니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페어리퀸께서는 어떻게 그 나뭇가지에 앉아 있을 수 있지요?”

“후훗. 인간다운 의문이구나. 설명해 주기가 어렵네.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려 들지 말라는 말밖엔 해줄 말이 없구나.”

다레니안은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나뭇가지에 앉은 자세 그대로 허공을 떠오기 시작했다. 날개도 없는데? 아, 여긴 요정의 나라였던가? 잠깐, 그 렇다면?

“나도 날 수 있어요?”

“해보렴.”

“우아아악!”

뭐야! 뭐! 위로 떠오르려고 마음을 먹은 순간 레브네인 호수가 불쑥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난 산봉우리들 사이로 떠올랐다. 산봉우리들 이 내 시야에 있었던 것도 잠시, 난 갈색 산맥의 산봉우리들이 발 아래 까마득하게 사라질 만큼 솟아올라 버렸다. 저건 중부 대로인가? 밤인데도 불구 하고 산맥 사이로 구불구불하게 뻗은 길이 눈에 들어왔다. 몇 군데 횃불이 일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가 이 밤에 중부 대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나 보지? 그리고 잠시 후 미드 그레이드에 무수하게 많은 반딧불을 모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바이서스 임펠이 보였다.

“우와아아아!”

그러나 곧 모든 산맥과 강, 그리고 대지가 모두 평평하게 바뀌고 주위의 하늘은 짙은 보랏빛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하늘 저편으로는 푸른 선이 주욱 그어져 있었고 그 위로 붉은 기운들과 푸른 기운들이 뒤섞이며 일렁거리고 있었다. 저 멀리 동쪽으로는 둥글고 새카만 지평선(지평선이 둥글 어?) 뒤로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태양빛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 눈이 부셨다. 뭐야, 이건! 밤인데 왜 태양이 떠오르는 거야? 위를 보자 별들이 무 시무시한 빛을 내뿜었다. 땅에서 바라보는 그런 별이 아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정색 하늘에서 창백하게 불타오르는 별들이었다. 으아아아! 별 에 부딪히겠다!

“반대로! 거꾸로! 돌아서!”

뚝. 그런 소리가 난 것은 아니지만 상승이 갑자기 멈추자 그런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설마? 서어어얼마아아!”

우아아앗! 올라올 때와 똑같은 속도로 이제 땅이 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제에에에기랄! 굉장한 속도로 떨어지면서 나는 다시 바이서스를, 그 리고 미드 그레이드를, 여전히 횃불 빛이 일렁거리고 있는 중부 대로를, 그리고 레브네인 호수를 보게 되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우리 동료들의 정수리들이 보이고 그 사이에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제레인트의 얼빠진 얼굴이 보인 순간, 난 땅속으로 파고들어갔다.

“우이야아앗!”

내 머리 박살나겠다! 그러나 내 몸은 아무데도 걸리지 않은 채 그대로 물속으로 들어가듯, 아니 그냥 허공에서 떨어지듯 땅속으로 쑥 파고들어갔다. 마치 갑자기 시트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주위가 삽시간에 시커멓게 바뀌었다. 아무런 빛이 없어서 주위는 보이지 않았지만 간혹 뭔가 흙덩어리나 바 위처럼 보이는 윤곽이 눈에 들어올 때도 있었다. 빛 한점도 들어오지 않는 이곳에서 어떻게 저런 것이 보이는 것일까? 그냥 내가 그런 것이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그런 윤곽들을 보면서 내가 무지무지한 속도로 떨어져내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주위가 붉게 변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건 내가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확실히 뭔가 빛이 나고 있는 것이다. 놀라움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보았지만 더 강해진 붉은 빛을 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붉은 빛 속에서, 난 주위에 바위도, 흙도,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 맙소사!”

주위는 온통 용암이었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용암들. 위로 치솟았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그리고 물결치는 용암들이 보였다. 끓는 수프 속에 던져진 야채가 된 기분이었다. 주위는 온통 이글거리는 용암의 수프였다. 그리고 난 벌겋게 녹아 꿈틀거리는 용암 속으로 떨어져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노란색, 붉은색, 그리고 황금빛의 흐름들이 폭발하듯 요동치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 줄기 노란 흐름이 쉬익 지나쳤다. 그리고 황금의 얼룩처럼 보 이는 무늬가 잠시 거대하게 펼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주위는 붉은 색조로 바뀌어버렸다. 눈이 타버리는 것 같은 빛들. 도대체 얼마나 떨어져내 리고 있는 것일까? 작열하는 용암들은 이제 흰색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앗!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떨어질 일이 아니잖아? 난 다시 악을 질렀다. “땅으로! 땅으로 가잔 말이다! 지표로!”

순간 난 지표에 서 있었다.

난 떨어지는 것에 대비하는 자세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무릎을 구부리고 아래로 팔을 휘두르는 자세 그대로 갑자기 땅 위에 서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난 옆에서 들려오는 제레인트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굴러버렸다. 굴렀어? 잠깐. 내가 지금 땅에 빠져 들어간 것이 아니라 구른 거야?

난 얼빠진 얼굴로 위를 올려다 보았고 다레니안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다레니안은 말했다.

“그냥 평소대로 생각해. 넌 걸어다닐 때 땅이 꺼져들까 봐 주의하면서 걷지는 않겠지?”

“평소대로요?”

“그래. 그냥 그렇게 걸으면 돼. 날려고 들면 날 수 있고, 땅속으로 들어가려 들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으니, 땅을 밟으며 걸으려 들면 걸을 수 있 어. 그러니까 결국 평소대로 행동하면 되는 거지. 테페리의 프리스트는 너처럼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서 있을 수……” “우아아악!”

제레인트는 비명소리만 남겨두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제레인트는 제자리에 서게 되는 데 나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그 동안 질러댄 그의 비명 때문에 고막이 좀 이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 지만 익숙해지고 나자 제레인트는 정말 재미있는 재주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후치야! 이것 봐라!”

“어지러워요. 제레인트, 제발…………, 그러지 말아요……”

그는 지금 허리 아래는 땅속에 묻어둔 채 마치 개울 속을 걷듯이 걸어다니고 있었다. 상상력이 풍부한 모양이야. 나도 그렇게 해보려 했지만 시도할 때마다 땅속으로 대책 없이 파고들거나 기겁한 나머지 하늘로 솟아오르는 일을 반복하게 될 뿐이었다. 난 도대체 ‘땅에 허리를 반쯤 파묻고 뻔뻔스럽 게 걷는다.’는 상상을 정확하게 할 수가 없었다. 말로는 되지만 그 모든 상황을 그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평소대로 행동하기로 했고, 그래서 난 땅 위에 서 있을 수 있었다.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든지 땅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내 몸은 현실 감각을 잃고 그대로 땅속으로 잠겨들곤 했으니까. 그래서 난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마구잡이로 말을 시작했다.

“페어리퀸. 그런데 우리들을 언제 돌려보내 주실 거죠?”

절대로 옆을 보지 않으려 애쓰면서(옆에선 제레인트가 머리를 땅으로 향한 채 거꾸로 떠서는 허공을 밟으며 걸어다니고 있었다. 속이 이상해지는 것 같아.), 난 다레니 안에게 물어보았다. 다레니안은 날 지그시 바라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설명해 줘.”

“설명하라구요?”

“내가 핸을 태워버렸다고? 그런데 핸은 날 사랑했다고? 넌 어떻게 그때 있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거지? 뭔가 이유가 있겠지. 이유를 말해 줘.”

뭐라고 말해야 되지? 난 잠시 대답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난 누운 채로 떠서는 그대로 하늘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제레인트를 보며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까는, 마구 말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건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야.”

“알겠습니다. 예. 난 핸드레이크가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정확하기는 어렵지만 그렇게 하 며 사는 거니까요.”

“그렇게 하며 산다고? 엘프들처럼 되려고?”

“엘프? 예, 우리는 서로간에 약속된 조화를 누리지는 못하니까, 뭐 상대의 의중을 짐작해 보면서 조화를 이루도록 애쓸 수밖에 없지요. ‘내가 욕설을 하면 상대는 기분 나쁠 것이다.’라는 수준 낮은 것부터 시작해서… 더 복잡한 개념과 사상을 나누려고 애쓸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넌 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거니?”

“뭐라고 말씀드려야 될진 모르겠지만, 난 핸드레이크처럼 인간입니다. 따라서 페어리인 당신보다는 그를 이해하기가 쉬울 거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 다. 물론 그와 나 사이엔 300년의 시간이 있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다레니안은 잠자코 날 바라보았다. 난 고개를 돌려 우울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풀이 죽어 있는 모습들을 보자니 가 슴이 아파왔다. 그리고 칼은 일행들이 부르는 소리도 무시하면서 여전히 수면만을 바라본 채 앉아 있었다.

난 칼 쪽으로 걸어갔다.

옆에선 두 팔을 수평으로 든 채 허공에 떠서 빙글빙글 돌고 있던 제레인트가 그대로 빙글빙글 돌면서 따라왔다. 윽. 잠자리 같군. 아니, 뭐라고 말해 야 할지 모르겠군. 빙글빙글 돌면서 날아다니는 생물은 전혀 없으니.

난 칼의 얼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모닥불을 등지고 앉은 칼의 얼굴은 침침한 어둠으로 젖어 있었다. 그는 다리를 감싸안은 채 구부정하게 앉아서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호수를 바라보 고 있었다. 그의 눈은 수면처럼 가늘게 뜨여 있었고 호수에서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은 그의 머릿결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추위 때문에 시퍼렇게 질린 그의 얼굴에서 입술만이 움직이며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제레인트가 내 옆으로 내려왔다. 제레인트는 칼의 입술을 주의 깊게 바라보더니 그 입술 모양을 하나씩 하나씩 따라하기 시작했다.

“오…… 우이오. 아에……안?”

난 착잡한 심정으로 말했다.

“돌려주시오. 다레니안.”

“아, 맞아. 그렇군. 아라이……………이? 부영이 아라이스테이?”

“살아 있지? 분명히 살아 있을 테지?”

난 목이 메어오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 칼이 다시 입을 열었고 제레인트가 그것을 따라했다.

“이…………여아. 으으으…… 오여여?”

……………목이 메이는 기분이 싹 사라지려고 했다. 못 말리겠군, 정말, 제레인트는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도 칼이 ‘이년아, 그들을 돌려줘!’라고 독백했던 것은 죽을 때까지 그와 나 둘만의 비밀이야.

그때 머리 위쪽으로 다레니안이 천천히 날아왔다. 난 갑자기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당신은 모르시겠어요?”

“뭐라구?”

“지금 칼의 말, 그의 마음, 짐작할 수 없냐구요!”

다레니안은 여전히 허공에 뜬 채 칼의 얼굴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는 너희들을 그리워하고, 또 너희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 같구나.”

“그래요! 왜 그럴까요?”

다레니안은 다시 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와 제레인트, 그리고 요정의 여왕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칼은 전혀 느끼지 못한 채 대답 없는 수면을 향해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을 날려보내고만 있었다. 다레니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너희들을 사랑하니까?”

“잘 아시는군요. 당신도 짐작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그렇잖아요?”

“그래. 그렇구나. 그런데?”

“어떤 변화가 느껴지지 않아요?”

“변화?”

“우스운 말이지만, 칼에 대한 동정심이, 그리고 우릴 돌려보내 주어야 되겠다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느냐고요?”

다레니안의 얼굴을 본 순간 난 그만 고함을 지르고 싶어졌다. 다레니안은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은 것이다. 그래. 이게 페어리다. 이젠 확실해지는군.

“너의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구나. 그는 허공을 향해 말하고 있는데, 내가 왜 그런 마음을 느껴야 되는 거지?”

이거였어. 난 대답하지 않고 다만 속으로 외쳤다. 바로 이거였어. 그래. 그녀는 핸드레이크의 정열에 동참하지 못해서 그를 이해하지 못했지. 아니, 이건 이해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야. 단지 그 뜨거운 마음을 느끼고 함께 마음이 뜨거워지는, 그런 사소한 공명을 그녀는 하지 못한 거야. 오로지 머리 로써만 핸드레이크를 이해하려고 했고, 그래서 끝끝내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방해한 것이겠지.

“그래도 핸드레이크는………… 이해해 주려고 애쓰는 모습만으로 당신을 사랑했겠지요.”

제레인트가 무의식적으로 꺼낸 말은 다레니안으로 하여금 한참 동안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고, 제레인트는 허공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오른 손등으로 턱을 받친 채 말했다.

“아냐. 그는 원래 만물을 사랑했고, 당신 또한 사랑했겠지. 큰 사랑이었을 거야.”

“뭐라구?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맞아. 스스로를 단수로 생각할 수 없는 남자였지. 소유욕과 별 차이 없는 그런 사랑은 하지 않았겠지. 후, 후후, 하하하! 이건 정말 웃기는 일입니 다, 다레니안! 그는 누구도 줄 수 없는 그런 사랑을 당신에게 주었는데, 당신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제레인트는 즐거운 얼굴로 다레니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핸드레이크가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한 적이 있습니까?”

“뭐?”

“핸드레이크가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한 적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간곡하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까? 혹은 당신에게 무엇이 되 라고 요구한 적이 있습니까? 당신이 변화될 것을 요구한 적이 있습니까?”

다레니안은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 번도 없었겠지요. 우리들이 보통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종의 파괴입니다. 상대에 대한 적극적 파괴 행위지요. 그 점에선 당신의 말이 맞습 니다. 우린 불길일지도 몰라요.”

“파괴라구?”

“그래요. 상대를 원래의 모습으로 있게 두지를 못하지요. 어떻게든 상대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하려 애씁니다. 상대가 스스로 의 즐거움, 스스로의 기쁨을 누리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있음으로써 즐겁고, 나와 함께함으로써 기쁘기를 바랍니다. 상대가 알고 있 는 그만의 즐거움을 이해해 주지 못하고. 이 점에선 사랑과 증오는 거의 같아요. 어쨌든, 상대를 변화시키려고 애쓰는 것이니까요.”

“난, 난 네 말을…………….”

제레인트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이 뭔지 아십니까?”

“뭐?”

제레인트는 엄숙하게 말했다.

“짝사랑이지요.”

윽.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제레인트는 여전히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인간들 사이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 뭔지 아십니까?”

“난, 난…….”

“상사병이올시다.”

도저히 못 참겠다. 난 맹렬하게 입을 틀어막으며 몸을 돌렸다. 내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을 찔끔거리는 동안에도 제레인트는 계속 웃지도 않 은채 말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짝사랑과 상사병은 상대를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슬프고 아프지요. 참 글러먹은 문제입니다. 짝사랑을 하면 그냥 그 사랑을 소중히 여기면 될 문제인데 말입니다. 상대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꼭 그것 때문에 슬퍼하고 아파해야 된단 말입니 다. 상대도 날 봐주었으면, 날 생각해 주었으면, 날 사랑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고,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고장이 나버리지요. 고약하다 면 고약한 것이고, 동정하려고 들면 정말 동정받을 일이라고 생각되는군요.”

“도, 도대체 무슨 말을………….”

제레인트는 갑자기 고개를 옆으로 조금 꺾더니 다레니안을 삐딱하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당신도 그 점에선 우리와 마찬가지입니다.”

“뭐라구?”

“사랑은 어쩌면 모든 종족에게 있어서 마찬가지의 불길일지도 모르겠군요. 당신은 그가 변화하기를 바랐을 겁니다. 맞습니까?”

“변화……?”

“만물을 사랑하는 핸드레이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사는 핸드레이크가 되기를 바랐을 겁니다. 당신은 세계를 사랑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겁니다. 사실 누가 그런 자를 감당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당신은 제멋대로 그가 변화하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가 그 의 모습으로 있게 허락하지 않고, 그를 파괴해서 재조립하려고 했을 겁니다. 맞습니까?”

다레니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창백한 얼굴로 제레인트를 마주볼 뿐이었다.

“당신은 그의 모습에 맞추어 당신의 사랑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에 맞추어 그를 변화시키려고 했습니다. 적어도, 내가 들은 바로는 그 렇습니다.”

다레니안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럼, 그럼 네가 말하고 싶은, 진정한, 진정한 사랑은 뭐지?”

“상대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건 무관심하고 뭐가 다르다는 거지? 상대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라면, 그건 무관심하고 뭐가 다르단 말이야!”

다레니안의 작은 몸 전체가 분노로 떨고 있었다. 하지만 제레인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 두 가지는 구별하기 어렵겠지요. 나로선 확신은 없습니다. 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에게 무관심한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겠지요. 그래서 나는 핸드레이크가 당신에게 무관심했는지, 아니면 자신을 마구 변화시키려 드는 당신의 모습마저도 포용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레인트는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볼까요. 핸드레이크는 드래곤 로드마저도 북방으로 쫓아버릴 정도의 남자였습니다. 그건 잘 아실 테지요. 직접 보셨으니까. 그런 자가 왜 시시콜콜 자신을 방해하는 당신은 그대로 내버려두었을까요?”

“뭐야?”

이번에는 다레니안의 몸 전체가 경직되었다. 제레인트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는 간단하고도 불쾌하지 않은 방법으로 당신을 제어할 수 있을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왜 당신을 그대로 내버려두 었을까요? 그런 실수 때문에 결과적으로 핸드레이크는 일생의 목표를 파괴당하게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뼈저린 실수일까요? 그러나 여덟 별이 파괴 되던 날, 그는 당신을 소중히 가슴에 안은 채 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다레니안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제레인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지만 하던 말은 중단하지 않았다.

“그날, 핸드레이크는 당신을 포옹한 채 루트에리노의 곁을 떠났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그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입니 까?”

다레니안은 제대로 서 있지를 못했다. 그녀는 갑자기 땅으로 떨어지려고 했다. 난 재빨리 앞으로 나서서 추락하는 그녀를 두 손으로 받아내었다. 받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하려고 들면 할 수 있는 세상이니까. 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으로 다레니안을 받쳐들었다.

다레니안은 내 손바닥 위에 쓰러져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핸…….”

귀가 빨개지는 것 같군. 내가 핸드레이크가 된 것 같잖아? 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려 했지만 그때 제레인트가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 말 하지 마.’

다레니안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작은 눈물이 엄청나게 뜨거워 나는 놀라고 말았다. 다레니안은 울먹이며 말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지요?”

난 잠자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난 걷고 있었다.

좌우는 돌벽이었고, 간혹 매달려 있는 횃불이 돌벽과 바닥에 타원형의 빛을 뿌리고 있었다. 횃불 빛이 비치고 있는데도 굉장히 어둡다는 느낌이 들 었다. 싸늘한 기분이 드는걸.

저벅저벅. 바닥도 돌인가 보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라? 내 신발이 어떻게 된 거야? 그리고 내 옷은 또 왜 이래? 난 기다란 로브를 입고 손에 다 레니안을 든 채 돌로 된 통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다레니안은 이제 내 손바닥 위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입고 있는 옷이 달라져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려 한 순간 그녀는 내 턱을 올려 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화를 내는 건가요? 실망했어요?”

저벅저벅. 발소리만 텅 빈 통로에 울려퍼졌다. 다레니안의 가느다란 목소리는 통로의 공허가 흔적도 없이 삼켜버리는 것 같았다. 난 계속해서 걷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 해요!”

다레니안은 앙칼지게 말했다. 그때 비로소 내 입이 열렸다.

“성에 돌아가거든……”

어라라? 이건 내 목소리가 아니잖아? 그리고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그러나 내 입은 계속해서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 그렇지만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를 만들어내었다.

“성에 돌아가거든, 당신이 만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어벽을 구축하시오.”

다레니안은 입을 쩍 벌리더니 힘들게 말했다.

“뭐라구요?”

이런! 난, 난 열일곱 살짜리 더벅머리의 초장이가 아니었다. 기다란 로브를 입고, 우수에 젖은 눈으로 다레니안을 내려다보는 나는, 인간의 몸에 담 긴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한없는 힘을 가진 나는, 나는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였다!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그 어떤 것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방어벽을 만드시오.”

“무슨 의미인지……?”

난 느낄 수 있었다. 지독한 좌절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허탈감, 그리고 배신감. 어떻게 나는 쓰러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우정은 금이 갔고 일생의 노력은 무의미해졌다. 그런데도 내가 쓰러지지 않은 것은 계속 걷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멈춰 서서 목놓아 울고 싶지만, 주저앉아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싶지만, 나는 그저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후치 네드발이었다면 이렇게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핸드레이크였다. 그래서 나는 걸어갔다.

“이번엔 당신을 고이 보내주겠소.”

“이번엔?”

“하지만 다음번에 당신을 만나면 죽여버리겠소.”

다레니안은 창백한 얼굴로 날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난 핸드레이크의 살의도 느낄 수 있었다. 느끼고 있는 내가 못 견딜 정도의, 미쳐버릴 것 같은 살의였다. 게다가 성취될 수 없어서 더욱 안타까운 살의였다. 죽일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살의와 또 다른 감정, 두 가지 감정이 뒤섞여 머릿속 이 그대로 터져버리는 듯했다.

“뭐라고……………?”

“그러니, 살고 싶다면 당신은 날 막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방어벽을, 미친 드래곤이라도 돌파할 수 없는 그런 방어벽을 만드시오. 일러두겠 는데, 난 미친 드래곤보다 더 무서워질 수 있소. 적어도 지금의 내 느낌으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소.”

내 메마른 목소리는 통로의 공기를 울리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말의 조각, 던져진 파편 같았다. 하지만 다레니안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갑자기 다레니안은 고개를 똑바로 들고 외쳤다.

“지금 죽여요!”

난 고개를 내려 내 모든 희망을 꺾어버린, 그러나 미워할 수 없는 페어리퀸을 내려다보았다. 내 손바닥 위에 앉은 다레니안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올리면서 외쳤다.

“지금 죽여요! 그렇게도 내가 밉다면, 그렇게도 내가 싫다면, 죽여버려요! 왜 놔두겠다는 거예요!”

난 눈앞이 뿌옇게 바뀌는 것을 느끼면서 황급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바보 같은 요정의 여왕이여. 내가 당신을 죽인다고? 내가 당신을 미워한다고? “왜! 왜 살려두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다음번엔 죽여버린다고요? 그냥 지금, 당신의 손에 죽게 해줘요! 당신의 사랑 속에 죽지 못하니, 당신의 증오 속에 죽겠어요. 당신 손으로 날 죽여줘요!”

“아니, 지금은 당신을 죽이지 않겠소.”

“왜죠? 내가 죽이고 싶도록 밉다면서요!”

“그럴 수 없소. 지금의 나는 당신을 죽일 수 없소.”

갑자기 다레니안이 조용해졌다. 난 조금 더 걸어가다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이건 살기? 어떻게 된 일이지? 난 고개를 내렸고, 순간 무시무시한 것 을 보고 말았다.

다레니안의 얼굴은 허옇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조그마한 입술은 퍼렇게 바뀐 채 그녀의 이에 짓눌려 있었다. 다레니안은 천천히 떨리는 손을 들더 니 날 겨냥했다. 그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지만 난 그 동안 아무런 말도 못했다. 다레니안의 입이 힘들게 열렸다.

“페어리들 때문이지요?”

뭐라구? 당신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가 죽으면, 페어리퀸인 내가 죽으면 페어리들에게 치명적인 해가, 치명적인 해가 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날 죽이지 않겠다는 거지요? 그것 때 문이지요?”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다레니안의 몸 때문에 내 손바닥마저도 떨렸다. 난 침을 삼키고 나서야 간신히 말할 수 있었다.

“그 말도 맞소. 다레니안. 하지만………….”

“페어리 따위 집어치워요!”

뭐라구? 그게 당신이 한 말인가? 그게 페어리퀸인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인가? 그게 모든 차원을 자신의 마당처럼 누비고 다니는, 신의 차원까지 마음대로 거니는 페어리퀸이 하는 말인가?

다레니안은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녀의 물빛 머리카락이 험하게 흩날렸다. 그녀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외쳤다.

“페어리 따위, 집어치워요! 당신 뜻대로 해요! 날 죽이고 싶나요? 당신 마음대로 하라구요! 그들과 날 단절시키겠어요. 페어리들은 내가 없어도 살아 갈 수 있도록 하겠어요. 이제 안심하나요? 아무런 걱정이 없을 테지요? 그렇다면 마음 놓고 날 죽여요!”

다레니안은 이제 내 손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는 두 팔을 좌우로 벌려 가슴을 펴고는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녀는 턱을 도도하게 치켜들고 있었다. 가 느다랗게 떨리는 입술에서 이제 한결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여줘요.”

젖은, 그리고 잔뜩 쉰 목소리. 요정의 여왕이여. 다레니안이여. 당신은 나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군요.

“그럴 수 없소.”

다레니안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난 뭐라고 말하려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레니안은 눈을 뜨더니 말했다.

“왜죠? 왜 날 죽이지 않겠다는 거지요? 난 당신의 소망을 파괴했어요. 난 당신을 파괴한 것이나 다름없어요. 죽이고 싶도록 밉잖아요!”

내가 왜 당신에게 가장 강한 방어벽을 만들라고 하는지 모른단 말인가? 내가, 혹시라도 내가, 내 손에 당신의 피를 묻히는 일이 생길 것을 두려워한 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으흑, 흑. 잔인해. 날, 날 당신에게 사랑을 구걸하게 하더니, 이제 그 손으로 죽여달라는 소망도 들어주지 않는 건가요? 왜 그래요! 왜!”

“난 그럴 수 없소. 왜냐하면………….”

난 다시 한번 침을 삼켰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너무 오랫동안 억눌려 있었던 뜨거움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난 더운 김을 뿜어내며 말했다. “왜냐하면……, 난…………, 내가………….”

난 갑자기 입이 굳는 것을 느꼈다.

뭐지? 도대체 뭐지? 이 소름 끼치는 느낌은? 살기다! 이런 젠장! 어디지? 그 순간 왁자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일스, 멈춰! 어억!”

“핸드레이이이크!”

고함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그리고 눈앞으로 돌진해 들어오는 일스의 모습, 그리고 그 뒤에서 뒤로 넘어지는 라인버그의 모습이 보였다. 라인버그 는 허즐릿의 손에 부축되면서도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일스를 잡아! 붙잡아!”

“이 마법쟁이! 오늘에야말로 죽이겠다!”

일스는 검끝을 똑바로 겨냥한 채 달려오고 있었다. 뒤에 있던 기사들은 저마다 당황해하며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그들이 잡기엔 너무 늦었다. 난 다레니안을 공중으로 띄워올렸다. 일렁이는 횃불이 눈앞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제기랄! 지금 다레니안을 보내고 나면 일스의 검을 막을 시간 이 없다. 하지만 고민과 상관없이 내 입은 내 심정을 충실하게 대변했다.

“요정의 성으로!”

“헨!”

다레니안은 비명을 남기고 사라져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일스는 무시무시한 웃음을 띠었다. 그의 검이 횃불 빛을 받아 번뜩이는 모습이 눈앞을 가 득 채웠다. 이런 젠장!

‘사랑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을 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내 모든 것을 사랑하십시오.’

‘여기 있는 이 핸만 사랑해요.’

‘내가 그를 도운 것은…… 당신 때문이에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지요?’

‘죽여줘요.’

‘왜냐하면……………, 난…………, 내가………..?

난 호숫가의 풀밭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철썩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믿을 수 있겠어? 산속에서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손바닥 위의 다레니안은 이제 몸을 절반쯤 일으킨 채로 울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옆에 서 있는 제레인트는 아무것도 모르 는 모양이다. 그는 그저 그곳에 서 있었다. 하지만 조용히 웃고 있었다.

다레니안은 어깨를 부들부들 떨면서 머리를 늘어뜨린 채 흐느끼며 말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지요?”

다레니안은 몹시 흐느꼈다. 난 목이 메이는 느낌을 받으며 다레니안을 내려다보았다. 다레니안은 여전히 어깨를 떨면서 말했다.

“차라리・・ 죽여줘요. 당신이…….’

난 타들어가는 듯한 입술을 힘들게 열었다.

“난 그럴 수 없소. 왜냐하면………….”

주위는 고요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나와 다레니안뿐이었다. 다레니안은 흠칫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가냘픈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낸 다레니안은 내 얼굴을 똑똑히 들여다보기 위해 애썼다. 입술은 타들어가는 것처 럼 뜨거웠다. 다레니안의 눈은 어느새 다시 눈물이 글썽해졌지만 그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내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헬턴트 마을의 열일곱 살짜리 초장이 후보를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난 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난…………, 내가……….”

제레인트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날 내려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레니안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날 올려다보았다. 난 요정의 나라에 무릎을 꿇은 채, 300년 전에 다른 사람이 꺼내려다가 끝끝내 꺼내지 못했던 말을, 그러나 반드시 했어야 했던 말을, 감히 내가 전할 수 없는 말이지만 나 외엔 전할 사람이 없는 말을, 조용한 확신을 담아 말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