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7권 – 제14부 : 정답이 없는 선택 3화
3
칼은 길시언과 샌슨의 생각을 눈치챈 듯했지만 그에 대해 별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저렇게 짐이 많으면 힘이 많이 들겠소.’라고 한마디 했을 뿐이 다. 엑셀핸드의 경우엔 좀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보라구, 젊은 친구들. 자넨 젊은 드워프들보다 더 무모하군. 정말 한판 붙어보고 싶다, 이 말인가? 크라드메서와?”
샌슨은 벌쭉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예기치 못한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니 가져가 보는 겁니다.”
그리고 길시언은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
“준비가 모자라서 패하는 경우는 있어도 준비가 과해서 패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에겐 레니 양이라는 평화적이고도 젖내나는 무기가…………, 레니 양, 미안해요. 이 빌어먹을 자식아! 후우, 후우! 아, 흠. 어쨌든 레니 양이라는 평화적이고도 좋은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무기가 있긴 합니다만, 보다 좋지 않은 결과, 그러니까 크라드메서가 악성 변비일 경우를 대비하여 상당량의 관장약을…………, 그만하겠습니다.”
길시언은 조용히 검집을 풀더니 그대로 위로 들어올려 무릎에 대고 부러뜨릴 자세를 취했다. “우아아아악!” 나와 샌슨이 동시에 달려들어서 간신히 그를 말려놓았다. 운차이는 피식거리더니 롱소드를 꺼내들면서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야, 드워프.”
“뭐냐? 담배?”
“아니. 칼 좀 갈아다오.”
“이놈아! 난 네 녀석의 증조부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칼을 갈았다. 예의범절을 좀 가르쳐줄까!”
“그때부터 칼을 갈았다면 드래곤의 비늘도 벨 수 있을 정도로 갈 수 있겠군. 부탁해.”
엑셀핸드는 씨근거렸지만 운차이에게서 검을 받아들고는 숫돌을 꺼내었다. 그때 운차이가 말했다.
“날만 예리하게 살면 돼. 두번 다시 못 쓰게 되어도 좋으니까.”
“뭐라구?”
“말했잖아. 단 한 번만 정통으로 벨 수 있으면 된다. 검이 너무 약해지더라도 날만 예리할 수 있다면, 완전히 못 쓰게 만들 정도로 갈아놔도 좋아. 내 일이 지나면, 어쨌든 다시는 검을 쥐지 않을 테니까.”
방 안이 고요해졌다. 제레인트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리고 레니는 눈을 깜빡거리며 운차이를 바라보았지만 운차이는 시선을 약간 아래로 깔아 누구 와도 눈길을 마주치지 않았다. 엑셀핸드가 말했다.
“내일이 지나면 다시는 검을 쥐지 않는다고?”
“죽으면 못 쥐고, 살면 안 쥔다.”
어두운 방 안에 제각기 다른 표정들이 떠올랐다. 길시언은 팔짱을 낀 채 희미한 미소를 지었고 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나이델은 조용히 눈을 감았고 네리아는 볼을 쓰다듬으면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 알았다, 요놈아. 하지만 드워프 앞에서 아는 척은 하지 말아라.”
엑셀핸드는 씨익 웃었다.
“제대로 갈 줄 모르는 녀석이 날을 망치는 것이지. 드워프에게 뭐라고 하는 거냐? 떽! 드워프가 갈아놓은 검은 수십 수백 번을 후려쳐도 끄떡이 없어 야 되는 법이다.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거냐? 최고로 갈아놓을 테니 염려하지 마라.”
“믿겠어.”
엑셀핸드는 기운찬 동작으로 숫돌에 물을 끼얹었다. 그러나 곧 엑셀핸드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투덜거려야 했는데, 샌슨과 나도 검을 뽑아들고 차례 를 기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칼 갈 일이 없는 칼은 지도를 펼쳐놓고 바일하프와 의논을 하고 있었다.
“그럼 소요 시간을 대략 다섯 시간 정도로 잡으면 되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지형은 노출되어 있겠지만 접근할 수 있을 때까진 접근해 봐야겠군요. 멀찌감치서 당해 버리면 곤란할 테니까요.”
“가까이 접근하면 뭐가 유리해지나요?”
네리아의 질문에 칼은 레니를 흘긋 보다가 말했다.
“지골레이드의 경우를 기억하십니까?”
“악! 그 벼……락을 뿜는 드래곤!”
“예에. 그는 레니 양을 보았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드래곤에게 숙명으로 지워진 언약이라고. 그 말은, 어쨌든 드래곤은 드래곤 라자를 만났을 경 우 공격에 앞서 라자의 계약 의사를 타진해 보아야 하는 의무 비슷한 것이 있다는 말로 생각되는데요.”
“음. 그런가요?”
“예. 따라서 크라드메서에게 레니 양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일단 안전하게 계약의 단계로 접 어들 수 있겠지요. 그 전, 그러니까 크라드메서가 레니 양의 모습을 확인하기 직전까지가 가장 위험할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그리고 계약의 단계가 끝났을 때가 위험하겠지. 크라드메서가 레니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주장하게 된다면 말이야. 그러나 칼은 그 말은 하지 않았 다. 네리아는 또랑또랑한 눈으로 칼을 바라보며 말했다.
“드래곤은 눈이 좋아요?”
“뭐…………, 하늘을 나는 생물은 대개 눈이 좋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드래곤의 시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퍼시발 군? 자네가 말한 이 지점에 동굴이 있다면 여기쯤으로 생각되는데, 맞는가?”
“예? 아, 예. 그렇습니다. 펠레일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음. 그 외의 땅은 동굴이 있기 어렵겠군요.”
“그래 알았어. 그럼 우리는 여기 남서 방면에서부터 접근해 가는 것이 좋겠군. 계곡을 따라 접근하는 거야. 협소한 지형이지만 그만큼 은밀하게 다 가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것 같아.”
날이 어두워져도 바일하프 외에 다른 드워프들은 만나지 못했다. 드워프들은 모두 지하에 집이 있어 일이 끝나도 여기에는 올 일이 없다고 한다. 바 일하프 역시 지하에 집이 있지만 우리들을 돌보기 위해 여기서 묵기로 했다. 드워프들은 호기심이 없나? 우리 영지에 캇셀프라임이 왔을 땐 영지의 주민들이 다 몰려나와서 구경하고 환영을 했는데. 우리들도 그들을 위협하는 크라드메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찾아온 중요 손님인 셈인데 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지?
넓은 마을에서는 우리가 있는 건물에서만 빛이 흘러나왔다. 창밖을 바라보면 기분이 묘해졌다. 산비탈을 따라 제멋대로 쌓여 있는 건물에 달빛이 쏟 아져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모습. 인공적인 빛은 우리들이 있는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촛불 빛 외엔 전혀 없다. 눈을 들어 보면 산으로 둘러싸인 좁은 하늘에 역시 작아 보이는 달이 떠 있다. 고요하고 광막한 분지의 달밤이었다.
분지엔 달빛이 담겨 넘쳐나고 있었다.
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이유가 뭘까? 갑자기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보니 난 침대에 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러는 거지? 옆에서 샌슨의 목 소리가 들려왔다.
“음…………. 뭐냐, 후치냐?”
샌슨은 뒤척거리더니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되는 줄은 알겠지만 자둬라.”
“아.”
이상한 대답을 하고 나서도 난 침대에 눕지 않았다. 잠시 후 샌슨의 숨소리가 느릿해졌다. 다시 방 안은 고요해졌다. 고요하고, 푸르스름한 달빛만 가득한 방. 왜 그런지 모르지만 난 침대에 누울 수가 없었다. 젠장. 드워프들이 침대에 깨진 그릇 조각이라도 넣어뒀나? 그럴 리야 없지. 그런데 왜 눕 고 싶지가 않은 거지?
내일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인가?
아냐. 그렇진 않아. 지금껏 실감하진 못했지만 머릿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살려고 갈색 산맥을 찾아온 것은 아니니까. 뭐 특별히 바뀐 것은 없다.
난 도로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10초도 지나기 전에 난 다시 일어나 앉았다. 샌슨은 이번엔 눈을 뜨지 않았고 그래서 난 홀로 어두운 방 안과 달빛이 흘러 들어오는 창문을 쳐다보았다. 드워프들의 유리창은 아름다웠다. 정신을 사납게 하는 바람소리도 없었다. 춥지도 않았다. 젠장. 너무 고요하고 아무 일도 없다는 것 때 문인가? 웃기는 소리잖아. 제길. 크라드메서 때문인가? 넥슨도, 할슈타일 후작도, 핸드레이크도…………, 잡다한 것들 다 사라져버리고 이제 크라드메서 만 남았기 때문인가? 난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크라드메서 새끼, 사람을 빡돌게 만드는군. 잠도 못 자게시리.”
어라? 내 말투가?
이건……………, 헬턴트 시절로 돌아간 것이군.
내 말투가 헬턴트 초장이 시절로 돌아가 버렸어. 그 동안 우리 마을 사람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귀한 사람들, 우아한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다니 면서 까맣게 잊어먹었던 말투가 다시 되돌아왔잖아. 쳇. 반갑군. 그런데 왜 지금 내 말투가 돌아온 거지? 자다가 일어나서 그런가?
젠장.
난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다가가 밖을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눈이 시리도록 푸른 달빛이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쏟아져내리던 달빛은 침
엽수들의 잎들 속에 잠겨 사라졌다. 허공만이 밝았다.
바스타드를 들어 뽑아보았다. 엑셀핸드가 갈아둔 칼날이 달빛이라도 갈라놓을 것처럼 빛을 뿜었다.
해너 아주머니. 몸 지킬 생각이나 하라구요? 하하하. 어쩌면 말입니다. 난 이 칼로 바이서스를 지키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덕분에 정말 잘 쓰고 있 습니다.
난 검집은 던져두고 바스타드를 든 채 방을 나왔다.
마당으로 나섰다. 달빛에 하얗게 빛나는 마당이 마치 눈밭처럼 보였다. 발을 대기가 부끄러울 정도군. 난 마당이 부서질까 봐 조심스럽게 밟고 나왔 다. 음. 마당은 마당이다. 익숙한 감각이 발로 전해져왔고 난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약간이나마 현실로 돌아왔다. 그러자 싸늘한 추위가 느껴졌다.
입고 있는 옷이라곤 셔츠 한 벌에 바지뿐이다. 바람이 별로 없어서 다행이군. 다만 고지대의 공기가 목 뒤를 얼어붙게 만들 정도였다. 난 목 뒤를 좀 주무르고 바스타드를 위로 세워보았다. 좁은 하늘에 떠 있는 한 조각 달을 겨냥했다.
조이스 씨는 지금 달을 보고 있을까?
그 무뚝뚝한 대장장이는 하루 종일 일하고 지쳐서 달 보고 있을 새는 없겠지. 하지만 그 딱딱한 얼굴 뒤에서 당신의 아들인 샌슨의 걱정을 하고 계시 겠지. 걱정 말아요, 조이스 씨. 샌슨은 지금 잘 자고 있어요. 저 멋진 사나이는 내일 크라드메서를 만나러 가는데도 쿨쿨 잘 자고 있다구요. 하하하. 바스타드를 옆으로 휘두른다.
쉬익. 분지의 검은 그림자가 순간적으로 갈라지는 느낌. 난 바스타드를 옆으로 휘두른 자세 그대로 멈추었다. 터너, 이 다음에 어떻게 했지요? 뒷발 의 무릎을 구부리며 자세를 낮춘다. 낮아진 바스타드를 허리의 탄력을 이용해 당긴다. 몸은 제멋대로 회전하도록 내버려두고, 이윽고 끌어당긴 바스 타드를 다시 뿌린다. 은빛 섬광이 암흑을 물들인다.
아버지.
지금 회색 산맥에서 달을 보세요? 크라드메서? 흥, 걱정 마세요. 아버지도 드래곤에게 잡히고 자식도 드래곤에게 잡히면 후세 사람들이 네드발 가문 은 드래곤의 저주를 받았다고 할 거예요. 하하하. 우리 가문은 원래 저주나 축복 같은 것들하고는 사이가 안 좋잖아요. 그런 건 거물들에게나 어울리 는 것이고, 초장이 네드발 가문은 헬턴트 영주님께 초나 바치며 살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어쩌다가 부자가 모두 드래곤을 찾아가게 되었죠? 우습잖아 요. 걱정 마세요. 당신의 주정뱅이 아들놈은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헬턴트로 돌아갈 거예요.
옆으로 세 걸음. 도약. 막고 튕겨 솟구쳐오르게 하고. 돌려베기.
끊어치고, 끊어치고, 끊어치고, 끊어치고,
몸을 격하게 움직일 때마다 셔츠가 펄럭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기합은 없다. 발도 가볍게 미끄러진다. 다만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와 셔츠가 펄 럭거리는 소리, 그리고 바스타드가 뿜어내는 파열음뿐이다. 이윽고 다시 바스타드를 내려 허리 앞에 놓고 중단 겨누기.
제미니. 내 꿈 꾸고 있을 거지?
어차피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미안하지만 셔츠 아래의 너, 혹은 치마 아래의 널 상상해 봐도 좋을까? 아마 눈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간 따 귀를 얻어맞겠지. 야, 야! 어차피 너 옷 아래에 뭐 굉장한 거라도 가지고 있어? 나니까 그런 거라도 궁금하게 여겨주는 거 아니야? 윽. 상상의 제미니 에게 발등을 밟히는 기분이 든다. 어쩔 수 없는걸. 좋아. 일단은 셔츠 첫 번째 단추까지만 상상을 전개하면…………, 으윽.
이 계집애는 상상 속에서도 정말 아프게 꼬집네.
“후치?”
“으아악! 잘못했어!”
“응?”
레니는 눈이 동그래져서 날 바라보았다. 와, 정말 놀랐다! 똑같은 붉은 머리, 하필이면 이런 상상을 할 때 나타날 게 뭐야.
“아, 딴 생각 하고 있었어.”
정문으로 나타난 레니는 머리에 숄을 둘러쓰고 어깨엔 외투까지 커다란 것을 입고 있었다. 그러고도 추운지 입 앞에 손을 모으곤 입김을 호호 불고 있었다.
“추워?”
“넌 땀 나니? 음. 그렇게 칼 휘두르니까 땀 날 수도 있겠네.”
“왜 나온 거야?”
“그냥……. 잠이 안 와.”
레니는 내 쪽으로 걸어왔다. 음. 하얀 마당을 밟으며 걸어오는 붉은 머리 소녀. 으으……………, 제미니가 생각난다.
“구경해도 돼?”
“응?”
“구경해도 되냐구. 연습하고 있었잖아. 나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연습은 무슨. 내가 뭐 전사라구. 그냥 잠도 안 오고 해서 땀 빼면 잠이 올까 봐.”
“응응. 계속해 봐.”
레니는 내가 대답할 사이도 없이 그대로 마당 저편, 그러니까 아래로 떨어지는 위치까지 걸어가 섰다. 달빛 속에 그녀는 어둡고 밝다. 작아 보이고 커 보인다. 참 이상하네.
거참. 보고 있으면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지? 에라.
앞으로 뛰고, 좌우로 베고, 다시 뛰어 좌우로 베고, 돌려 위 막고 내려치고, 옆으로 뛰며 다시 사선으로 베고. 구경꾼도 있으니 묘기나 한번. 오래간 만이다. 일자무식 무한대!
“후와아아!”
마당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계속 올려베며 달렸다. 붕붕붕붕붕! 한 스무 번 올려베었나? 아이고, 내 허리! 윽. 머리가 어지럽다. 다시 구경꾼을 의식 해서! 휘청거리는 것이 마치 기술인 것처럼 위장하고, 바스타드를 대각선 위로 올리며 한쪽 무릎을 꿇는다. 아이고, 어지러워. 그러나 눈으로는 그윽 한 눈빛을 뿜어내기 위해 애쓴다(사실 마당이 세 개로 보이니 자연스럽게 그윽한 눈빛이 나올 거야, 음).
짝짝짝. 레니의 작은 손에서 작은 박수소리.
“멋져!”
“어땠어?”
“응? 어………….., 뭐랄까. 후치 주변이 온통 번쩍번쩍했어. 마치 후치에게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보이던데.”
아. 계속 둥글게 올려베었으니 반사광이 꽤나 요란했겠군. 레니는 손을 내밀었다.
“잡아봐도 돼?”
하, 하하! 난 피식피식 웃으며 바스타드를 건네주었다. 레니는 멋모르고 한 손을 내밀었고 난 그 손에 바스타드를 들려주었다. 레니의 팔이 우스꽝스 러운 동작을 취하며 아래로 휘익 처졌다.
“어머!”
레니는 발등을 찍을 뻔하고는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곧 새침하게 말했다.
“후치 땀이 묻어서, 미끄러워.”
아, 그래? 하하하. 레니는 바스타드를 들더니 상단 겨누기의 자세를 취했다. 말이 좋아서 상단 겨누기씩이나 되지 엉덩이는 뒤로 툭 튀어나와 있고 다리는 모으고 서 있어 눈 뜨고 못 봐줄 장면이다.
“나 어때?”
“그럴듯해.”
그랑엘베르여. 유피넬은 아마도 내 따끈따끈한 거짓말을 주워 잘 식힌 다음 그의 저울에 올릴 테니까 당신이 어떻게 좀 잘 말해 줘요. 내가 여기서 ‘눈 뜨고 못 봐주겠어.’라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잖아요.
레니는 생긋 웃더니 ‘얍!’ 하면서 바스타드를 앞으로 내밀어 찌르기를 시도했다. 다리는 여전히 모은 채이고 허리는 뒤로 쭉 뺀 자세로 상체만 앞으 로 숙이며 검을 흔들거리는 것도 찌르기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뭘 찌른 거야?”
“응? 응………….., 몰라. 그냥 찔렀어.”
“그래? 그럼 말해 주겠는데, 상대의 경우 가벼운 찰과상을 입힐 수 있었다면 퍽 다행이고 너의 경우엔 빈틈을 노출시킨 대가로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되었어. 도둑 키스에서부터 가슴에 구멍이 나는 일까지 아무 거나 당할 수 있게 되었는걸.”
난 역시 진실과 사이가 좋단 말이야. 레니는 혀를 날름거리더니 바스타드를 돌려줬다.
“흐음. 칼싸움 잘하는 거 자랑 아니야.”
난 바스타드를 돌려받아 빙글빙글 돌리면서 말했다.
“맞아. 자랑거리에는 초를 잘 만든다거나 음식을 잘 만든다거나 하는 것이 포함되지. 아아! 난 자랑거리가 너무 많아서 고민이야. 심지어 난 애인도 너무 예쁘…………, 들었냐?”
“들었어. 히히히.”
“할 수 없군. 사실대로 고백하지. 내 칼은 사실 프림 블레이드처럼 마법검이었어.”
“헤에. 못 믿겠는데?”
레니는 헤죽거리더니 다시 마당 끝으로 물러났다. 응? 뭐지? 레니는 날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더 안할 거니?”
“아아. 됐어.”
난 레니 옆으로 걸어가서는 바스타드를 마당에 꽂아두고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앉았다. 레니는 잠시 주저하더니 머리에 덮어썼던 숄을 내리며 말했다.
“이거라도 어깨에 둘러. 춥잖아.”
“하하. 아냐. 괜찮아. 땀 흘린 뒤라서 춥지 않아.”
그러나 레니는 끝끝내 내 어깨에 숄을 둘러주고는 목 앞에서 묶어버렸다. 으으윽. 아버지. 당신 아들내미가 지금 계집아이 숄을 어깨에 두르고 드워 프들의 마당에 앉아서 달을 보고 있답니다. 뭐, 나쁘진 않네요.
레니는 내 옆에 주저앉더니 말했다.
“어, 저. 후치야?”
“응?”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모두들 기분이 무거운 거 같아서 묻지 못했거든.”
“나에게 물어봐.”
“나…………, 말이지. 내일 크라드메서를 만나고, 어, 그러니까 드래곤 라자의 계약을 하고 나면 어떻게 되는 거니?”
난 레니를 돌아보았다. 레니는 파란 볼을 한 채 분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고개를 들어 달을 보면서 말했다.
“어떻게 되다니? 몇 번이나 이야기를 했던 거 아냐? 넌 아무 일도 하지 않아.”
“아무 일도 하지 않아?”
“응. 드래곤 라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 그건 상징일 뿐이야. 그런데 그 상징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거지.”
“그럼 나 정말 아무 일도 안 해도 되는 거지? 그냥 찾아가서 만나기만 하면 되는 거지? 그렇지?”
“응. 그래.”
“그렇지 않아.”
대답한 것은 레니가 아니었다.
난 후다닥 일어나면서 동시에 땅에 꽂아둔 바스타드를 뽑아들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고선 인상을 찌푸렸다. 레니는 놀라서 일어 났고 난 그녀를 가리고 섰다. 레니의 손톱이 내 셔츠를 파고드는 것이 느껴진다.
시오네였다.
팬텀 스티드를 탄 채 분지 위 허공에 떠 있었다. 우리들이 산비탈 위의 건물에 서 있어서 얼굴 높이는 비슷했지만 어떻게 뛰어서 노려볼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제길.
“시오네.”
재빨리 시오네의 양옆을 살폈지만 넥슨이나 자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혼자 온 것인가? 난 바스타드를 시오네에게 겨냥했다. 하지만 시오네는 자신을 향한 검 끝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은 채 말했다.
“어제는 고마웠다, 후치.”
“빨리도 왔군요.”
“날아오니까.”
어째 대화가 상당히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군. 난 코를 쓱 닦고는 말했다.
“당신, 우릴 공격할 건가요?”
“아니. 지금으로선 그럴 생각이 없어.”
“고맙군요.”
“고마워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고마워해. 잠시 후 그럴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르지만.”
“고맙지 않군요.”
등 뒤를 부여잡는 레니의 손길이 더욱 강해졌다. 윽, 레니. 옷 좀 그만 잡아당겨. 목이 졸려오잖아. 시오네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더니 말했다. “크라드메서는 어디에 있지?”
“내가 먼저 묻지요. 아까 끼어들 때 그렇지 않다고 말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죠?”
“그걸 알려주면 크라드메서의 위치를 말할 텐가.”
시오네는 팬텀 스티드의 고삐를 던져놓고는 말했다. 흐음. 그거 재미있는 조건이네. 하지만 문제는 내가 크라드메서의 위치를 모른다는 데 있지. “난 크라드메서의 위치를 몰라요.”
시오네는 잠시 날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다른 자들에게 물어봐야겠군.”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본다고? 이런, 안 돼!
난 곧장 뒤로 돌아 레니를 끌어안았다. “꺄아아악!” 난 레니와 함께 나동그라졌고 우리들이 서 있던 위치에서 뭔가가 팍! 튀는 소리가 들려왔다. 땅 에 쓰러진 채 고개를 돌려보니 검은 밧줄이 마당에 떨어져 있었다. 밧줄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건 아프나이델이 쓰던 그 마 법이군!
“빠르군.”
시오네의 평이었다. 헹! 우릴 인질로 삼아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겠다고? 웃기시는군. 난 레니를 재빨리 일으키며 말했다.
“건물 안으로 도망…. 아니, 내 등 뒤에 있어!”
다시 고개를 돌려 시오네를 바라보자 그녀는 그대로 팬텀 스티드 위에 탄 채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바스타드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저 여자가 우리 일행을 좌절시키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레니를 해치는 것이겠지. 그래서 난 레니를 가로막고 섰다. 난 시오네를 노려보며 외쳤다.
“당신, 크라드메서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거지? 도대체 당신의 목적은 뭐야?”
“너와 함께할 목적이 아니다.”
“그래? 그렇다고? 하지만 당신은 핸드레이크의 전인이잖아! 도대체 이 나라에 대해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그러는지 알아야겠어!”
시오네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검고 풍성한 머리로 거의 가려져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표정을 알아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녀의 입매만이 겨우 보 일 정도였으니까. 시오네는 말했다.
“핸드레이크의 전인이라. 넌 누구의 전인인가?”
“뭐라구?”
시오네는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바꿔 빠르게 말했다.
“넌, 아니 너희 일행들은 크라드메서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나에게 드래곤 라자를 넘겨라. 내가 그녀를 데리고 가서 라자의 계약을 실행하겠다. 후 치, 넌 어제 너의 목적은 크라드메서를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대신 해주겠다는 거야.”
뭐라구? 이게 무슨 말이지? 그러나 내 대답은 바로 튀어나갔다.
“일어나!”
우리 일행들에게 외친 소리였다. 곧 건물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며 불빛이 비쳐나오는 것도 느껴졌지만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아랫입술 이 아파오는 것으로써 내가 입술을 깨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오네는 공중에 뜬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말했다.
“고약한 꼬마놈…………. 그 소녀는 죽이지 않는다. 걱정 마라.”
“뭐라구?”
“그러니 안심하고 죽어라, 꼬마야.”
시오네가 손을 휙 쳐들었다. 이런, 빌어먹을!
“내가 어제 당신 도와줬잖아!”
“그래서?”
시오네는 그렇게 말하더니 곧 캐스트를 시작했다. 이런, 우라질! 내가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에 시오네는 빠르게 캐스트를 마치고 손을 내렸다. 그녀 는 내게 똑바로 손을 겨냥했고 난 그 손가락만 바라보면서 몸이 굳어버렸다. 이런, 피해야 되는데, 피해야 되는데! 레니가 등 뒤에 있어! 어떻게 하지? 시오네는 외쳤다.
“파워 워드 킬!”
빌어먹을, 죽었다! 아, 아니, 죽을 것이다. 언젠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네? 난 눈을 껌벅거리며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머리 끝이 쭈뼛 서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벌써 죽었나? 난 이미 죽었 다는 것도 모른 채 이렇게 영혼으로 서서 시오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시오네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으며 내가 아직 살아 있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구냐!”
“나, 난 후치 네드발인데…
대답하면서도 이건 아무래도 합당한 대답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내 이름이 궁금한 것은 아닐 텐데? 그때 나는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푸르스름한 막을 볼 수 있었다. 어두컴컴해서 잘 보지 못했던 것이 이제야 보이는 것이다. 이게 뭐지? 그때 등 뒤에서 제레인트의 헐떡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기절할 정도로 멋진 타이밍을 보여준 나의 이름은 제레인트!”
“옷이나 입고 나와야죠!”
네리아의 비명소리. 곧 이은 제레인트의 유쾌한 대답.
“옷 입고 나왔으면 후치 못 구했습니다! 하하하!”
우하, 허, 하! 살았다. 제레인트가 날 구했구나! 그러나 시오네는 잠시 주저하지도 않고 곧장 캐스트에 들어섰다. 그녀는 그대로 내게 손을 뻗으며 외
쳤다.
“클라우드킬!”
“후치, 숨을 멈춰!”
아프나이델의 찢어지는 고함소리. 시오네의 내뻗은 손에서 달빛 아래 회색에 가깝게 보이는 연두색 구름이 퍼져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뒤로 물러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레니는 내 등 뒤에 매달려 있었고 난 움직일 수 없었다. 숨을 멈춰야 해! 연두색 구름은 순식간에 내 눈앞까지 다가 왔다. 아, 안 돼! 왜 하필이면 지금 재채기가 나오려고 하는 거야! 에, 에, 에…………
“에취!”
맙소사! 내가 재채기를 하자 무서운 바람이 일어났다. 쏴아아아! 내게로 밀려들어오던 연두색 구름들이 그대로 시오네 쪽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내 가 이렇게 강인한 콧바람을 가졌었나? 정녕 OPG의 숨겨진 비밀은 코의 힘을 강력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었는가! 내가 이런 타당성 전무한 상상을 하는 동안 연두색 구름은 시오네를 덮쳤고 시오네는 황급히 위로 떠올랐다. 독구름은 팬텀 스티드의 발 아래로 아슬아슬하게 지나쳤다. 뒤에서 샌슨 의 기막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프나이델! 대단합니다!”
“아, 아니……. 제가 아닌데요?”
“예?”
무슨 말이야? 그러나 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뒤로 돌아 레니를 들어올렸다. 레니는 질겁했지만 난 그대로 레니를 허리에 낀 채 죽어라고 달 려서 건물로 돌아갔다. 건물에서는 길시언과 샌슨이 손에 손에 검을 든 채 달려나오고 있었다. 난 레니를 내려놓으며 그대로 몸을 돌렸다. 레니는 황 급히 건물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시오네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팬텀 스티드를 천천히 몰아서 우리들의 머리 위로 다가왔다. 길시언이 고함을 질렀다.
“너! 도대체 무엇을 노리는 거냐!”
“드래곤 라자.”
“내어줄 수 없다!”
“네 의사는 상관없어. 난 데려갈 테니까.”
길시언은 눈에서 불똥을 튀겼지만 시오네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캐스트를 시작했다. 이런 젠장! 또 마법이야? 그때 칼이 뛰쳐나왔다. 칼은 땅에 한쪽 무릎을 꿇더니 그대로 상체를 뒤로 젖혔다. 그의 손엔 롱 보가 걸려 있었고 시위는 한껏 아래로 당겨져 있었다. 칼은 외쳤다.
“멈춰!”
그러나 다음 순간 팬텀 스티드를 탄 시오네가 네 개로 불어났다. 히이익! 밤 하늘에 네 명의 시오네가 네 마리의 팬텀 스티드를 탄 채로 우릴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이 고함을 질렀다.
“미러 이미지!”
칼은 당황해서 일어나더니 롱 보는 그대로 위로 겨냥한 채 등 뒤의 아프나이델에게 물었다.
“어느 게 진짜요?”
“모릅니다. 저건 알 수가………….”
그때 네 명의 시오네가 동시에 말했다. 맙소사, 진짜 네 명이 말하는 것 같잖아!
“드래곤 라자를 내놓아라.”
“허튼소리!”
어느새 달려나온 엑셀핸드가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칼은 그대로 롱 보를 하늘로 들어올린 채 고함을 질렀다.
“왜! 왜 레니 양을 원하는 거요?”
네 명의 시오네가 동시에 대답했다.
“알 바가 아니다. 내놓지 않으면 함께 죽이면 그만이다.”
그러더니 네 명의 시오네는 동시에 캐스트를 시작했다. 잠시 후 네 명의 시오네는 동시에 오른손을 들어올렸고 그 손들 위에는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 공이 떠올라 있었다. 제길, 또 저거야! 칼은 황급히 외쳤다.
“모두들 안으로……………!”
“안으로 도망가 봐야 소용없다. 이 마을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잖아도 도망갈 엄두를 내지 못하던 우리들은 시오네의 말에 완전히 굳어버렸다. 시오네들은 손에 불 공을 띄워둔 채 말했다.
“다시 말한다. 드래곤 라자를 내놓아라. 다음번은 없다. 거절할 경우 그대로 던지겠다.”
이, 이런! 칼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들어올린 롱 보의 시위가 부르르 떨렸다. 설마, 도박을? 칼은 넷 중 아무거나 노려 서 쏘아버릴 생각인가? 그러나 칼은 그러지 못했다. 그의 활이 천천히 내려오는 순간.
“가장 오른쪽!”
고함소리가 들려온 순간 칼은 그대로 활을 들어올려 시위를 놓았다. 탱!
“아아악!”
가장 오른쪽에 있던 시오네의 팔에 화살이 맞은 순간 다른 세 명의 환상도 그대로 손을 들어올리며 비명을 질렀다. 네 명의 시오네의 손 위에 만들어 졌던 네 개의 화염구는 모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누구지? 누가 우리를 도운 거지? 네 명의 시오네가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앙칼지게 외쳤다.
“이…………, 잡스런 신의 지팡이!”
제레인트가 놀란 눈을 했다. 자, 잠깐. 그건 제레인트의 목소리가 아니었는데? 그때 저편 어둠 속에서 조금 전에 들려왔던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 다.
“흉측한 짓을 그만둬요. 뱀파이어.”
이윽고 마당 저편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것은 키가 6피트에 가까운 거대한 그림자였다. 커다란 로브가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 어깨는 샌슨과 길 시언의 어깨를 합쳐놓은 것 비슷하게 보였다. 제레인트는 기막힌 표정을 지었지만 난 반가움에 고함을 질렀다.
“에델린!”
이윽고 에델린은 마당에 올라섰다…………고 생각되었지만 그러고도 한참 동안 올라왔다. 키가 너무 커. 감각이 잠시 혼동을 일으킨 사이에 에델린은 우 리 쪽으로 걸어왔다. 거대한 그 몸은 전에 헤어졌을 때보다도 더 커진 느낌이 들었다. “가만 있어!” 시오네는 팬텀 스티드의 고삐를 거칠게 잡아당겼 다. 이차원에서 소환된 저 유령마가 에델린에게 겁을 집어먹는 것인가? 팬텀 스티드는 뒤로 물러설 듯한 동작을 보여주었다. 다리 부분이 희미했지만 도망친다는 느낌은 곧바로 다가왔다.
“에델린!”
샌슨의 고함소리에 이어 칼도 외쳤다. “에델린 양!”
“오래간만이군요, 여러분.”
에델린은 고개를 조금 숙여보이며 인사했다. 우리 셋 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떨리는 아래턱을 가누느라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난 반가 움에 그녀에게 다가서려고 했으나 에델린은 팔을 들어올려 날 제지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저쪽과 얘기를 마무리짓도록 해야겠습니다. 후치.”
“예! 예. 예?”
발음은 똑같지만 의미는 전혀 다른 세 가지 종류의 말을 해버렸다. 좀더 길게 말할 수 있는 침착성과 심적 여유를 가졌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겠지. ‘물론 당신의 요구에 따라 기다린다는 것은 저의 기쁨입니다! 하시던 이야기는 마무리짓는 것이 당연합니다. 잠깐만, 시오네와 할말이 있으시다구 요?’ 그러나 에델린은 그 무지막지한 스태프를 짚으며 마당 저편으로 걸어갔다. 샌슨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으로 나섰다.
“샌슨?”
“엄호한다.”
“좋아.”
나와 샌슨이 왼쪽으로, 그리고 길시언과 운차이가 오른쪽으로. 그리고 그 가운데로 다른 사람들의 머리쯤 되는 곳에 가슴이 오는 에델브로이의 프리 스티스가 기둥만한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가는 것이다. 하하하! 웬만한 녀석들이라면 벌써 달아났어야 하는 상황에서 시오네는 달아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웬만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시오네는 손을 들어 에델린을 겨냥하면서 말했다.
“치료하는 손?”
“그렇습니다.”
“칼라일에서 봤었지. 오랜만이군.”
“그렇군요.”
“나타난 목적은?”
“당신과 여기 이분들 모두에게 용건이 있어요.”
“나에 대한 용건은?”
이런, 왠지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트롤과 뱀파이어는 마치 서로에게 따분한 책을 읽어주는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둘 다 인간이 아니 긴 하지. 어쨌든 에델브로이의 딸이라는 의미의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트롤 프리스티스가 말했다.
“당신에 대해서는 전언입니다.”
“전언? 누구?”
“핸드레이크께서 당신에게 전할 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헉! 뭐야?
지금 에델린이 뭐라고 말했지? 뒤에서 숨죽인 비명소리들이 들려왔다. 제레인트의 목소리가 가장 높았다. “아프나이델! 당신도 들었소?” 시오네 역 시 크게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시오네는 입술 양끝을 들어올렸다. 그것은 미소를 짓는 것은 아니었다. 비로소 나는 시오네의 송곳니 를 볼 수 있었다. 멋진데? 기능적인 스타일이야.
“핸드레이크는 죽었어.”
뭐야? 뭐라구? 시오네의 말은 우리를 다시 놀라게 만들었다. 이 상황에서 뭔가 말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과연 다음에 입을 연 것은 에델린이었다(에델린은 사람이 아니라 트롤이다. 하하하!).
“아뇨. 죽지 않았습니다.”
“거짓말! 핸드레이크는 죽었어!”
“그는 당신에게 전하라고 말했습니다.”
“닥쳐! 핸드레이크는 죽었어! 내가 죽였다! 내가 죽였어! 내가 그를 죽였어!”
맙소사! 가면 갈수록 사람 어지럽게 만드는군.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들이지? 에델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당신 때문에 극심한 상처를 입긴 했습니다만 살아났고 아직 살아 있지요. 어쨌든 그의 말을 듣지 않으실 겁니까.”
“……짖어봐!”
“알겠습니다. 그는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했습니다.”
시오네의 얼굴이 달빛보다 더 하얗게 변했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마치 밀랍 같았다. 그녀는 핏기 없는 입술을 벌려 말했다. “뭐라구?”
“그는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을 이해하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당신에게 어울리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고도 말했습니다.”
“무슨 뜻이냐!”
“그대로 전해 드리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델린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높낮이도, 음색도, 트롤 특유의 거친 음색도 거의 느껴지질 않았다. 마치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일 뿐, 혹시라도 에델린 자신의 말로 착각하게 되면 곤란하므로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말하겠다는, 그런 식의 어투였다.
““내 딸아..”
기절할 뻔했다. 아슬아슬했어. 거의 기절할 뻔했다니까. 샌슨을 보니 꼿꼿이 선 채로 눈을 뜨고 기절해 있었다. 확실해!
“철이 들면서 아버지를 괴롭히는 것이 딸들의 숙명이라지만, 이건 심하지 않으냐? 좀 봐다오. 네가 다른 집의 딸들처럼 남자 친구 문제 같은, 어찌 보면 퍽 즐거운 문제로 아버지를 괴롭히게 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겠다. 혹은 죽어도 시집가지 않고 아빠랑 살겠다는 말로 아비의 복장을 즐겁게 뒤 집어주길 바라지도 않는다. 그건 너무 과욕이겠지. 너와 나 사이는 그렇게까지 즐겁고 유쾌하기만 한 부녀 관계는 아니었지. 그러나 네게만 잘못이 있다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겠다. 내게 아버지의 자질이 부족한 것이 더 큰 문제일 것이니라..”
길시언은 기어코 딸꾹질을 시작했다. 히꾹! 히꾹! 아이고, 맙소사! 에델린은 웃지도, 음색을 좀 낮추지도 않은 채 저 말을 그대로 했다! 뒤에선 엑셀 핸드의 기막혀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허, 허허, 허? 허.”
그러나 시오네는 웃지 않았다. 그녀의 밀랍 같은 얼굴엔 억지로 표정을 가져다붙여도 곧 떨어져버릴 것 같은 딱딱함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에델린은 한가롭게 계속 말했다.
““그래서 난 너에게 간섭을 하지 않으려고 했느니라. 넌 똑똑한 아이고 자기 앞가림을 충분히 한다고 믿었거든. 하지만 요새 듣자니 네가 요즘 참 이 상한 일을 벌이고 있는 것 같구나. 네가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난 널 잘 안다고 믿고 있어요. 그리고 네가 깨닫지 못하는 네 속마음도 어느 정 도 짐작할 수 있단다. 넌 믿을 수 없다고 말하겠지만 그게 바로 아버지란다.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좋겠다는 것이 아비의 의견이다..”
허어, 허어!
““날 믿는다면 나에게 찾아와 다오. 그리고 내 말이 틀리다고 생각되면 내게 찾아와서 날 이해시켜 다오. 오랫동안 보지 못해서 네가 많이 그립구나. 네 동생에게 말을 전하니, 동생과 함께 날 찾아오도록 해라. 그럼, 언제나 널 사랑하는 아빠가..”
운차이마저도 다 죽어가는 소리를 냈다. “으으으음………….” 에델린은 말을 마치고 시오네를 똑바로 쳐다보며 정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 전했어요, 언니.”
그게 결정타였다. 뒤에서 끔찍한 신음소리와 함께 뭐가 주저앉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네리아의 황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프나이델! 괜찮아요? 에그! 눈을 그렇게 뒤집으면 이상해 보이잖아요.” 그리고 제레인트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앗! 카아알? 진작 말씀하셨어야지요. 간질 증상이 있으셨 군요? 잠시 치료를 위해 팔을 좀 묶어야…….”
“침버 씨!”
바람이 불고, 달빛은 교교하고, 주위는 고즈넉하여, 초겨울밤을 미화할 모든 종류의 수식어가 허락될 듯한 멋진 밤인데, 사람들은 당황해 버렸다. 이 넓고 공활한 장소, 많은 사람들과 여러 종족 중에서 시오네와 에델린만이 침착해 보였다.
시오네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너와 나 사이에 그런 우스꽝스러운 관계가 성립되지?”
에델린은 따사롭게 으르렁거렸다.
“아버지가 같으니까요.”
“뱀파이어와 트롤 자매라구?”
“예.”
뱀파이어와 트롤 자매? 아아, 그래? 그럼 그 아버지는 대마귀 같은 사람이어야 될 거야. 발러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세 명이 나란히 서 있으면 누 구라도 정겨운 한가족이라고 말해 줄…………, 수 있을까? 으으윽.
시오네는 여전히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긴. 핸드레이크가 아니라면 이런 천치 같은 말을 전하게 했을 리가 없겠지. 그렇다면 네 말대로 아직 살아 있는 것이었군.”
“예. 언니.”
시오네는 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양쪽에 풍성한 머릿결이 있어 한 손바닥으로 완전히 가려진다. 시오네는 손바닥 뒤에서 말했다.
“그는 원래 희귀한 것, 이색적인 것을 좋아했지. 그래, 너 따위 괴물도 딸이랍시고 거두어들였다는 것, 다른 사람도 아닌 그니까 믿어야 되겠군. 그 자는 뱀파이어를 딸이라고 생각하는 천치니까……어디에 있지?”
“저와 함께 가시면 됩니다.”
에델린은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지만 시오네는 거칠게 대답했다. “너 따위와는 1분도 함께 있고 싶은 생각이 없다. 어디에 있지?”
에델린은 구슬픈 표정으로 송곳니를 번뜩였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알려줄 이유가 있는가?”
“아버지니까요.”
“죽여버리겠어.”
시오네는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어투로 말했고 에델린은 아연한 얼굴로 시오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이 자매의 웃기는 점은, 아니 대부분의 자매 가 그렇던가? 동생이 언니를 억누를 가능성이 무지무지 높다는 점이다. 동생은 프리스티스니까 뱀파이어 언니쯤 간단히 터닝할 수 있을 테고 힘으로 싸워봐도 트롤이니까 간단히 박살내 버릴 수 있겠지. 아아! 말을 하면서 점점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다아앗!
“제 아버님이시지만 언니의 아버님이시기도 합니다.”
“시제를 똑바로 사용해. 아버지였지. 한때 그렇게 믿었지.”
에델린의 큼지막한 들창코가 슬픈 듯이 벌렁거렸다.
“아버지는 아직도 언니를 딸로서 사랑하고 계십니다. 비록 언니가 아버지에게 그런 짓을 하긴 했지만 아버지는 개의치 않으십니다. 조금 전 제가 전 해 드린 말을 들어보았으니 알 수 있지 않으세요? 거기 어디에 자신을 해코지했던 딸에 대한 원망 같은 것이 있던가요?”
내 정신의 강인함이여! 이 황당 무쌍한 대화 속에서도 아직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니. 시오네는 자기 동생의 우람한 송곳니에 비하면 훨씬 작은, 하 지만 더 날카로워 보이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쉭쉭거렸다.
“해코지라고? 웃기는 소리! 그가 어떻게 지금껏 그 썩어빠진 입을 놀릴 수 있는데! 어떻게 아직껏 할딱거리며 살아 숨쉴 수 있는데!”
뭐야! 귀밑머리가 모두 곤두서는 느낌이 든다. 지금 시오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가 그에게 영생을 주었다. 불멸을 주었다! 어떻게 그것이 해코지라는 말이냐!”
영생을 주었다고? 시오네가, 핸드레이크에게 영생을 주었어? 뱀파이어인 시오네가…………. 샌슨은 내가 하고 싶었던, 그렇지만 차마 입이 벌어지지 않 아서 못 꺼내었던 말을 간략하게 정리해 주었다.
“물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