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8권 – 제14부 : 정답이 없는 선택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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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를 내려놓고 몸을 퉁겨세웠다. 휘익! 머리 바로 옆으로 화살이 지나쳤다. 으악! 난 일어섰던 것만큼 빠르게 다시 앞으로 엎어졌다. 순간적으로 풀밭 저 멀리서 일렬로 선 채 화살을 쏘아대는 몇 명의 전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가 다시 사라졌다.
일행들은? 주위의 풀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왔다. 엎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에는 온통 키 큰 풀밖에 보이지 않았다. 화살이 날아다니고 있어 머리를 들어 확인할 수도 없었다. 일행을 찾아야 하나? 그러나 난 고개를 돌려 풀밭 가운데 누워 있는 레니를 바라보았다. 레니를 옮 겨야 돼.
레니 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니를 어떻게 옮기지?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이 좋겠다.
“레니, 레니야!”
난 레니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으음………….” 레니는 신음을 토할 뿐 눈을 뜨지 않았다. 난 레니를 더 격하게 흔들어댔다.
“레니, 제발 정신 차려!”
그때 아련히 먼 곳에서 칼의 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드발 군! 레니 양을 보호해! 저놈들은 레니 양이 있는데도 화살을 쏜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렇군! 후작은 지금 자신의 딸도 아랑곳하지 않고 화살을 쏘아대고 있다. 이건 무슨 뜻이지? 이런, 제기랄!
슉슉슉! 화살은 쉼없이 머리 위를 지나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움찔거리며 머리를 숙인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레니를 흔들어댄다. 아냐, 큰소리를 내면 안 돼. 난 레니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 말했다.
“레니잇!”
“으음・・・・・・ 크라드메서 님? 후치?”
레니가 눈을 떴다. 그녀는 눈을 찌푸리더니 누워 있는 자신의 위에 엎드린 내 모습을 못 믿겠다는 듯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무슨 짓이야!”
“제발 상황에 안 어울리는 짓 좀 하지 마! 그리고 소리 내지 마!”
그제야 레니도 하늘을 가로지르는 화살을 본 모양이다. 레니는 퍼렇게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고 난 옆으로 기며 속삭였다. “내 뒤를 따라와. 절대로 머리 들지 말고, 알았어?”
레니는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둘은 배를 땅에 붙인 채 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쪽으로 가야 되지?
“크어억!”
너무 놀라서 턱을 땅에 부딪치고 말았다. 바로 앞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눈을 꽉 감자마자 무서운 공포가 다가왔다. 아냐. 누워서 눈 감고 죽기를 기다릴 순 없지. 난 다시 눈을 떴다.
“운차이!”
운차이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롱소드에 찔린 전사의 배를 걷어차고 있었다. 그 옆에선 네리아가 트라이던트를 꼬나든 채 외쳤다.
“일어나! 후치! 놈들은 돌격하고 있다. 화살은 쏘지 않아!”
좋아, 그렇다면! 난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레니! 절대로 떨어지지 말고 있어! 흩어지면 널 보호하지 못해!”
“아, 알았어.”
레니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 함성이 들려왔다.
“와아아아!”
분지 전체가 고함소리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바스타드를 꼬나들고 앞을 바라보자 달려오는 전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풀밭 곳곳에서 일어나 는 동료들의 모습도 보였다. 샌슨은 롱소드를 작대기처럼 휘두르며 일어나서는 무시무시한 욕지거리를 뱉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반대쪽으로 조금 떨 어진 곳에서는 칼이 활을 당기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은 풀 위로 머리와 손만 들어올린 채 외쳤다.
“파이어볼!”
불덩어리가 풀들의 머리를 그슬리며 날았다. 아프나이델은 이상하게도 파이어볼을 대단히 낮게 쏘았다. 그 때문에 파이어볼의 궤적에 놓여 있던 풀 들이 화악 불타올랐다. 전사들이 놀라며 파이어볼을 피한 순간 아프나이델은 다시 캐스트했다.
“거스트 오브 윈드!”
아프나이델이 두 팔을 휘두르자 맹렬한 바람이 달려오는 전사들 쪽으로 불었다. 바람을 만난 불은 거세게 타올랐다. 톱메이지 만세! 당신 불장난은 언제 봐도 최고야! 비에 젖어 있던 풀들은 무서운 연기를 내뿜었고 불 붙은 풀 조각과 연기들이 바람에 휩싸여 달려오던 전사들을 덮쳤다. 불티와 눈 을 아프게 하는 연기 속에서 전사들은 허둥거렸다.
“케엘록! 콜록! 뭐, 뭐야! 연기다! 콜록!”
“으악, 눈! 내 눈!”
운차이는 스르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희한하게도 풀들이 그를 위해 옆으로 비켜주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움직임. 운차이의 앞을 가 로막은 풀들은 전혀 꺾이거나 하지 않았다. 다만 옆으로 미끄러져나갈 뿐. 그리고 저쪽에선 샌슨이 완전히 반대되는 동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아예 분지를 갈아엎어라, 엎어, 샌슨은 풀을 마구 헤치며 달려갔다.
“받아랏!”
느닷없이 연기 속에서 전사 하나가 뛰쳐나오며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운차이는 휘둘러져 오는 검을 받아 아래로 눌렀다. 아니, 누르자마자 다시 롱 소드를 올려쳐 비어버린 전사의 턱을 갈라놓았다. 전사는 얼굴에서 폭포 같은 피를 뿜으며 뒤로 넘어졌다. 내가 그를 따라 달려갈 때 운차이는 그대 로 멈춰 서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후치. 나는 네 살 궁리를 대신 해주지는 않는다.”
“부탁한 적도 없어요!”
“좋아. 알아서 잘 싸워.”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는군요! 이야아아!”
난 운차이의 왼쪽으로 빠져나가며 휘둘러져 오던 롱소드를 후려쳤다. 롱소드는 단숨에 박살이 나며 은빛 칼 조각들이 허공을 갈랐다. 전사의 질린 얼굴. 지체 없이 바스타드를 다시 당겨보지만 전사는 손에 쥔 칼자루를 집어던지며 뒤로 도망친다. 난 도망가는 전사에게 고함을 질렀다.
“갈 테면 가라! 나 싫다고 가는 친구 붙잡진 않아!”
나도 무슨 뜻인지 모를 말을 외치며 다음 상대를 찾았다. 그러나 앞을 보자마자 곧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대여섯 명은 넘는 전사들이 롱소드를 휘 두르며 달려들고 있었다.
“너 이 자식! 꼼짝 마!”
선두에 선 자가 괴성을 질렀다. 히야, 그 검광 한번 살벌하네? 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괴물 초장이는 자기보다 못한 자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
난 그렇게 외쳐주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쳤다. 레니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레니! 레니! 나 꼼짝 말라는 저 친구의 명령을 무시했어! 나 냉혹하지? 멋있지?”
그러곤 그대로 몸을 숙여 돌멩이를 주워들었다. 허리를 돌리자마자 마구 집어던진 돌멩이가 요행히도 선두의 전사의 가슴을 맞췄다.
“커허헉!”
전사는 숨 넘어가는 고함을 지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갈빗대 몇 개는 나갔을 거다. 뒤에서 달려오던 나머지 전사들이 기겁하는 모습은 잠시, 그들 은 욕지거리를 뱉으며 쓰러진 전사를 우회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다시 팔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하나 더 있다!”
“으아악!”
전사들은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그 순간 나와 네리아, 그리고 운차이는 머리를 숙인 전사들을 향해 육박해 들어갔다. 전사들은 당황하며 다시 몸을 일으켰으나 선수를 제압당해 근근이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 바스타드를 막은 전사는 박살나는 자신의 검을 보며 외쳤다.
“이새끼 사람이야?”
난 씨익 웃어주려고 했지만 녀석은 부러진 칼을 그대로 집어던졌다. 이런, 제엔장! 황급히 몸을 틀었지만 칼은 왼쪽 어깨를 스쳤고 곧 눈앞에 불이 튀는 아픔이 느껴졌다.
“아아악! 후치!”
레니의 비명소리에 더 놀라면서, 난 오른손으로 바스타드를 쥔 다음 인정사정 없이 휘둘렀다. 바우우웅!
아쉽게도 전사는 뒤로 피했지만 곧 녀석과 그 옆에 있던 다른 전사들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바스타드에서 나는 소리에는 나도 놀랄 지경이었으니 까. 주위의 풀들이 모두 똑같은 높이로 잘린 것을 보며 전사들은 기겁했다. 와? 바스타드로 풀도 자를 수 있네? 네리아는 그대로 굳어버린 전사들을 향해 트라이던트를 두 손으로 쥐고 휘둘렀고 전사들은 가슴과 얼굴 등에 상처를 입으며 비명을 토했다. 그리고 운차이가 그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Peca!”
잠시 전사들의 가운데에서 번갯불이 튀고 나서, 운차이가 반대편으로 빠져나오자 대여섯 명의 전사들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우 리 세 명은 다시 레니를 보호하는 위치로 몰려들었다. 네리아가 내게 외쳤다.
“괜찮아?”
“팔은 안 잃어먹었어요!”
대답은 기운차게 해주었지만 왼쪽 어깨는 불로 지지는 것처럼 아팠다. 몸의 왼쪽 전체가 후들거리며 떨릴 정도였다. 난 이를 악물고 오른손에 쥔 바 스타드를 힘 있게 들어올렸다. 그때였다. 눈앞의 연기 속에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카카각!
반사적으로 들어올린 바스타드는 빛을 막아냈지만 오른팔은 어깨까지 부러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크흐헉! 난 간신히 쓰러지지 않은 채 뒤로 여러 걸음 물러났다. 발뒤축이 뭉개진 것 아냐? 팔은 마치 바위를 친 것처럼 떨려왔다. 이거 사람이야? 왼팔에 이어 오른팔까지 후들거리니 주정뱅이가 따 로 없군. 눈을 깜빡여 눈에 고인 눈물을 짜내자 눈앞에 선 자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밤색 머리, 그리고 드문드문 섞인 새치. 그 아래 딱딱한 얼굴에서는 타오르는 두 눈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거 정말 미치겠군! 난 바스타드를 들 어 상대의 가슴을 겨냥하며 외쳤다.
“어릴 때 눈빛이 나쁜 소년이라는 말 많이 들었겠군요.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앙금이죠? 하하하!”
할슈타일 후작은 입매를 일그러뜨리더니 일그러진 입술 그대로 말을 꺼내었다.
“버릇없는 꼬마놈. 죽음을 재촉하는군.”
후작에게 해줄, 뭔가 더욱 인상적이고 들어서 기분 지저분할 말을 생각하는 사이에, 운차이가 스르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뒤로 물러나.”
내게 말한 거야, 아니면 후작에게 말한 거야? 운차이는 설명하지 않고 롱소드를 들어 후작을 겨냥했다. 후작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부녀 상봉을 막는군………….”
부녀 상봉이라구? 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려 있는 레니의 얼굴이 보였다. 네리아가 레니의 앞을 가로막더니 외쳤다.
“부녀 좋아하시네! 화살을 쏘아대 놓고선 부녀라고?”
후작은 피식 웃었다. 그때 운차이가 그대로 후작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레니를 데리고 뒤로 물러나. 후치, 네리아, 걸리적거린다.”
“우, 운차이?”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물러나.”
네리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레니의 팔을 잡아끌면서 뒤로 물러났다. 나는 물러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일행들이 조금 떨어진 곳에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아프나이델과 칼이 매직 미사일과 화살을 마구 날리고 엑셀핸드와 샌슨이 비록 덩치는 다 르지만 장작 쪼개는 듯한 동작의 유사성에서는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식하게 전사들을 공격해 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제레인트가 기도에 빠 진 채로 주위에 방어막을 만들어 일행을 보호하는 모습도 보였다. 샌슨은 전사 하나를 기세좋게 걷어차며 외쳤다.
“후치! 네리아! 이쪽으로 와!”
네리아는 레니의 손을 잡아끌며 저쪽의 일행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나는 멈칫했다. 어, 운차이 혼자 후작을? 후작은 OPG를 가졌는데?
“이야아압!”
할슈타일 후작의 고함소리에 놀라 고개를 다시 돌렸다. 카캉! 후작의 검을 막아내는 운차이의 모습이 보였다. 잠깐, 후작의 검을 막아냈다고? 운차 이는 후작의 검을 튕겨내고는 칼자루로 후작의 손목을 내리찍었다. 후작은 신음을 토하더니 발을 빼내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달려들었다.
“머리 조심!”
그렇게 외치며 다리를 노리고 베어 들어갔다. 미안, 후작. 그러나 후작은 검을 아래로 내리쳐 내 바스타드를 땅으로 밀어붙였다. 이런! 검이 묶였다! 순간 옆에서 운차이가 괴성을 지르며 롱소드를 찔렀다. 후작은 내 검을 풀어주며 다시 뒤로 물러났다. 나와 운차이는 나란히 서서 후작을 겨냥했다. “걸리적거린다고 했잖아!”
운차이가 쉭쉭거렸다. 내가 뭐라고 대답하려 할 때 후작은 운차이의 검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검을 부러뜨리지 않다니, 좋은 솜씨군.”
운차이의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차가운 말투는 변함없었다.
“당신 주의를 끌어본 거야. 할말이 있거든.”
“뭐지?”
운차이와 마찬가지로 후작은 냉담한 얼굴 그대로였다. 둘 다 바이서스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군.
“우리는 이미 라자의 계약을 시도했고, 실패했다.”
후작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는 달려가는 레니의 뒷모습을 흘끔 바라보더니 말했다.
“라자의 계약에 실패했다고?”
“그래. 크라드메서가 받아들이지 않았어.”
“좋은 소식 알려줘서 고맙군. 편안히 죽여주지.”
“아직 들려줄 말이 남았어.”
“말해 봐.”
운차이는 옆을 흘끔 바라보았다. 아차! 다른 전사들! 후작의 전사들은 후작이 혼자 나와 운차이와 대적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저쪽의 우리 일행들을 내버려둔 채 달려오고 있었다. 이, 이거 여기서 계속 후작과 이야기할 분위기가 아닌데?
“크라드메서는 앞으로도 절대로 라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인간과 관련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니 포기하라.”
그리고 나도 옆에서 외쳤다.
“이봐! 당신 희망은 크라드메서뿐이잖아! 돌맨이 크라드메서의 라자가 되지 않으면 당신은 꼼짝달싹할 수 없는 거 아냐? 하지만 그건 글렀어! 그러 니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다구! 나 같으면 기회가 있을 때 꼬리를 말고 도망치겠어!”
내 외침의 절반쯤은 후작에게보다는 달려오고 있는 전사들을 향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전사들은 내 외침소리에 놀라 멈추어 섰다. 그들이 서로를 향 해 불안한 시선을 교환하는 것이 눈에 잘 들어왔다. 후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놈이 라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건방진 드래곤 같으니………….”
“뭐야?”
기가 막히는군, 정말! 할슈타일 후작은 완전히 돌아버린 거 아냐? 그때였다. 달려오던 전사들 가운데서 기겁한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하, 하늘! 하늘에!”
뭐? 하늘? 난 주위를 재빨리 살핀 다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찌푸린 하늘은 그대로였다. 벌판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라 하늘의 모습을 얼마쯤 가 리고 있었다. 그런데 회색 연기가 잠시 갈라지자 그 사이로 하늘을 날고 있는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새? 아냐. 다리가 넷 달린 새도 있나?
그때 운차이가 으르렁거렸다.
“팬텀 스티드, 넥슨!”
뭐야? 넥슨? 아니, 팬텀 스티드라면 시오네의 짓일 텐데 어떻게 대낮에?
구름이다!
하늘은 온통 구름으로 뒤덮여 있어 햇빛 한점 찾아볼 수 없었다. 칼라일 영지에서도 시오네는 대낮에 나왔었지. 아무리 그래도 낮인데! 구름만 갈라 지면 햇빛이 나올 텐데, 시오네! 무슨 도박을 하려는 거지? 모든 사람들이 순간적인 당황에 빠져 하늘만 올려다보는 가운데 팬텀 스티드는 무서운 속 도로 하강했다. 팬텀 스티드가 하강하자 그 위에 타고 있는 넥슨과 시오네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 머리 위를 지나쳐 곧장 날아 갔다. 그 방향은…… 크라드메서? 그때 운차이가 낮게 외쳤다.
“빠져나간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운차이와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가버린 후작과 전사들을 내버려두고 우리 일행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후작과 그때까지 남아 있 던 예닐곱 명의 전사들은 팬텀 스티드를 바라보느라 우리들을 제지하지 못했다.
일행들이 몰려 있던 곳으로 달려들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땅에 쓰러져 있는 에델린의 모습이었다.
“에델린!”
에델린은 땅에 누운 채 가슴을 부여잡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체 곳곳에는 기다란 화살 여러 개가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에델린의 곁에 무릎을 꿇고 화살을 뽑아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제레인트가 반색을 하며 외쳤다.
“후치! 잘됐다. 어서 이것 좀 뽑아! 살이 자꾸 재생이 돼서 내 힘으론 못 뽑겠어!”
난 레니를 내려놓고는 에델린의 곁에 앉았다. 에델린은 내 모습을 보더니 약한 미소를 지었다. 난 턱을 덜덜 떨면서 말했다.
“이를 악물어요, 에델린.”
에델린은 이를 악물고 눈까지 감았다. 난 화살을 부여잡고는 단숨에 뽑아올렸다. 팍! 살이 찢어지면서 선혈이 튀어올라 얼굴과 손을 적셨다. 네리아 의 신음소리. 난 화살을 팽개치고 에델린을 살폈다. 에델린은 신음을 흘렸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옆에 주저앉아 있던 길시언이 젖은 목소리로 말 했다.
“에델린, 에델린! 나 때문에 이런, 쿨럭!”
“괜찮습니다. 길시언. 자, 후치? 계속해요.”
길시언을 안고 달리던 에델린은 길시언을 보호하느라 화살을 이토록 맞은 모양이다. 난 심호흡을 하고서는 곧 다음 화살을 잡아뽑았다. 팍! 다시 에 델린의 살이 찢어지며 속이 뒤집힐 것 같이 피가 튀어올랐다. 내가 하고 있는 짓이지만 정말 치료하는 것인지 아니면 몸을 찢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레니는 아예 몸을 돌려버렸다.
곧 다섯 개나 되는 화살을 모두 뽑았고 에델린의 상체는 너덜너덜해졌다. 옆에선 레니가 펑펑 울고 있었고 네리아 역시 그에 뒤지지 않게 목놓아 울 고 있었다. 제레인트가 기도를 시작하려 했지만 누워 있던 에델린은 손을 가로저었다.
“화살을 제거했으니 이젠 괜찮습니다. 트롤이니까요.”
제레인트는 탄복한 눈으로 에델린을 바라보았다. 과연 에델린의 상처는 빠르게 재생되고 있었다. 에델린은 일어나 앉더니 내게 말했다.
“고마워요, 후치. 그런데, 오늘은 비를 내리게 해서 여러 가지로 고생이 많군요.”
아, 넥슨! 난 다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크라아아드메서어!”
넥슨의 처절한 고함소리. 놈들은 어느새 크라드메서가 있던 곳 상공까지 날아가 있었다. 이윽고 그는 온 분지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쳤다. 그가 외 치는 순간 분지에 있던 우리들과 후작 일행들은 모두 아연한 기분에 휩싸였다.
“나는 넥슨 휴리첼! 당신의 라자가 되겠다! 거부 없이 받아들여라!”
라자 넥슨이 칼은 머리카락을 다 뽑아버릴 듯이 머리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후작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하늘을 노 려보는 것이 똑바로 보였다. 그때 어디선가 크라드메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리가 멀어서 가늘게 들리지만 강인한 힘이 담긴 크라드메서의 목소 리였다.
“거부한다.”
좋아! 역시 크라드메서는 라자를 받아들이지 않는군. 일행들은 뭔지도 모를 안도감에 빠져 서로의 얼굴을 보며 히죽 웃었다. 그러나 넥슨은 다시 외 쳤다.
“그렇다면 다시 밝히겠다! 나는 당신의 라자였던 카뮤 휴리첼의 아들 넥슨 휴리첼이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지만 그 죽음은 정당한 죽음이 아니 며, 따라서 당신과 아버지의 계약은 파기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아들로서 그 유산을 이어받는다! 당신은 거부할 수 없다!”
벌판에 붙었던 불은 이제 사그라들어 회색 연기만이 풀풀 피어오르고 있었다.
후작 일행과 우리 일행의 거리는 약 60큐빗 정도. 그러나 우리들은 그 짧은 거리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완전히 무시한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프나이델이 신음했다.
“아버지의 채무는……………, 아들에게 이어지는가.”
채무? 글쎄. 채권이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앉거나, 혹은 멍하니 선 일행들은 하늘만을 쳐다보는 채로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때 네리아가 당혹 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니?”
레니는 멍한 미소를 지은 채 하늘에 떠 있는 넥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의 불과 연기도, 흉흉했던 싸움도 모두 잊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 미소는 희다. 레니는 멍한 미소 그대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녀의 속삭임은 너무 가냘팠다. 레니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내가 다가가도 레니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계속 신비한 미소만 지으며 속삭였다.
“받아들여요………. 받아들여요…………., 크라드메서 님………….”
레니? 난 당황하여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그때 다시 넥슨의 고함소리가 들려와서 난 하늘을 바라보았다.
“크라드메서!”
그의 외침에는 다급함이 담겨 있었다.
“대답해라, 크라드메서! 그대가 우리 아버지에게 충실하기로 맹세했다면, 그 죽음으로 그 맹세를 도외시하지 말라! 당신의 충실함은 아버지의 생존 여부에 관계 없이 항상 같음을 증명하라!”
그때였다.
“……카뮤?”
잔뜩 쉰 듯한 목소리. 실제론 맑고 강한 크라드메서의 목소리 그대로였지만 그 음조는 왠지 잔뜩 쉬어버린 것처럼 들려온다. 무색의 목소리가 아니 다. 그의 목소리엔 생동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혼란에 휩싸인 생동감이었다.
“……카뮤? 카뮤. 네가 어떻게 살아 있지?”
숨막히는 정적. 혼란에 휩싸인 드래곤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주위를 고요하게 만드는 지독한 박력이 있었다. 그러나 넥슨은 외쳤다.
“당신은 내게서 그를 느끼는가! 그렇다! 나는 카뮤 휴리첼의 아들 넥슨 휴리첼이다!”
가슴까지 차오르는 숨 때문에 호흡이 잘 안 된다. 머리가 어지럽다.
“그런가. 카뮤의 핏줄이군. 너에게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다! 나는 당신의 라자였던 자의 아들이다!”
바람조차 멎어버린 분지. 연기만이 조용히 피어오를 뿐 그 어느 것도 움직이지 않은 완전한 정적 상태에서, 후작의 칼날 같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저 녀석을 쏴!”
고개를 돌리자 황망히 활을 들어올리는 전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남아 있던 전사들 중에 활을 가진 자는 세 명. 어, 어라? 어떻게 해야 되지? 후작을 내버려둬야 하나? 아니면 넥슨을 보호해야 하나? 칼이 외쳤다.
“아, 안 돼. 멈춰…………….”
“칼!”
길시언의 무서운 고함소리. 웅웅웅웅! 프림 블레이드의 울음소리가 끔찍스럽게 들려왔다. 검을 들고 있어? 일행들은 모두 믿을 수 없는 눈으로 길시 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뽑아든 채 두 다리로 서 있었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무채색의 얼굴 위로 비오듯이 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꼬나든 채 칼을 노려보고 있었다.
“기, 길시언?”
길시언은 어깨로 숨을 쉬며 힘겹게 외쳤다.
“으컴! 무례를 용서하시오! 쿨, 쿨럭! 넥슨이 라자가 되는 것은 막아야, 막아야 합니다!”
칼이 대답하기도 전에 공기를 찢는 파열음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슝슝슝! 나는 길시언에게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쏘아진 화살들은 모두 팬텀 스티드를 빗나갔다. 후작의 노한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이 병신들! 저것도 못 맞춘단 말이냐! 계속 쏴!” 전사들은 다시 화살을 걸기 시작했다. 그때 길시언이 외쳤다.
“쏘시오, 칼!”
“예?”
“당신은 명중시킬 수…………, 커헉!”
길시언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웅웅웅웅웅! “왕자님!” 레니가 그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길시언은 레니의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더 니 격렬하게 기침을 토했다. “쿠, 쿠울럭! 쿨럭! 커허헉!” 레니의 옷에 핏빛 반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제레인트가 곧 기도에 들어갔다. 길시언은 온 몸을 들썩거리며 기침을 토했다. 갑자기 길시언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의 입가로 붉은 선혈이 한 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칼………, 넥슨을 막아주시…………, 쿨럭! 그는 바이서스의 반역자…………, 당신이 바이서스를 사랑하기를 바라지는 않겠지만………… 그 땅에 사는 만민을 위 해서라도………….”
칼은 굳은 얼굴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고개는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안 됩니……”
“매직 미사일!”
칼의 대답을 지워버리며 아프나이델의 고함소리가 울려퍼졌다. 급하게 몸을 돌렸지만 이미 아프나이델의 손에서는 하얀 빛화살들이 날아가고 있었 다. 그 방향은 허공에 떠 있는 팬텀 스티드였다. 칼이 외쳤다.
“안 돼!”
후작의 전사들이 쏘아댄 화살을 뒤따라잡으며 빛화살은 무시무시하게 흐린 하늘을 태워 들어갔다. 슈슈슈슝! 그러나 그때 팬텀 스티드에서 날카로 운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파아악! 불꽃이 폭발하며 구름 아래 또 하나의 태양이 뜨는 듯했다. 불꽃이 사방으로 거대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러 나 폭발의 잔재가 사라진 곳에서는 팬텀 스티드가 그대로의 모습으로 떠 있었다.
“이이익! 시오네!”
아프나이델은 이를 갈면서 다시 캐스트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순간 칼이 아프나이델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아프나이델은 허둥지둥 균형을 잡으며 커다란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빠르게 말했다.
“안 돼, 공격해선 안 돼! 크라드메서의 라자였던 자의 아들이오!”
아프나이델은 당황해 버렸다. 칼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갑자기 레니를 바라보았다.
“레니 양! 지금도 크라드메서의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까?”
나는 레니를 돌아보았다. 세상에! 레니의 얼굴은 극도의 괴로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붉게 파도치는 머릿결 아래로 파란 이마가 끔찍한 대비를 이룬 다. 길시언은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레니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네리아가 허둥지둥 레니에게 다가가며 외쳤다.
“레, 레니야?”
갑자기 레니의 눈이 극도로 커졌다. 그녀의 붉게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난 헛바람을 삼켰다. 레니의 입에서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 감히 누굴 쏘는…….”
“멈춰! 사격 중지!”
후작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레니는 말을 멈추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곳에서는 전사들이 놀라며 활을 내리는 모습이 보였 다. 칼은 그 광경을 보며 낮고 빠르게 중얼거렸다.
“후작도 라자였지. 대답이 나왔군. 크라드메서는 넥슨에게서 카뮤의 모습을 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의 앞에서 카뮤를 두 번 죽일 수는 없다. 드 래곤과 드래곤 라자의 관계는 육친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카뮤 휴리첼의 아들인 넥슨은, 동시에 크라드메서의 아들인 것인가? 어쨌든 그의 죽음은 크라드메서의 분노를 불러올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 21년 전처럼………….”
“카, 칼! 오, 맙소사!”
샌슨의 기겁한 목소리. 고개를 한껏 들어올리고 있던 길시언은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레니의 무릎에 머리를 힘없이 떨구었다. 그는 오열했다.
“아샤스여…………. 바이서스는 어떻게 되라는 겁니까! 아샤스여!”
길시언은 레니의 옷을 부여잡으며 온몸을 떨며 통곡했다. 그리고 그 경련은 곧 딱딱하게 굳어 있던 레니에게까지 전해졌다. 레니는 몸을 부르르 떨 더니 길시언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와, 왕자님…………! 으흑!”
기어코 레니도 길시언을 따라 울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지? 넥슨은 바이서스에 대한 철저한 적의를 가지고 있다. 산산이 파괴된 그에게 서 부서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목적 잃은 증오심뿐이다. 그러나, 그러나 그는 크라드메서의 라자였던 자의 아들이다.
크라드메서의 눈앞에서 과연 그를 죽여도 되는가?
“크라드메서의 대답에 달렸군.”
엑셀핸드가 배틀 액스의 도끼날을 만지작거리며 침착하게 중얼거렸다. 침착한 얼굴과 달리 엄지손가락을 너무 세게 눌러서 손에서 피가 나고 있는 데도 모르는 모양이다. 나는 그의 손을 툭 쳤고 엑셀핸드는 찔끔하더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사위가 고요해지면서 모두가 크라드메서의 대답을 기다렸다.
크라드메서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짙은 먹물 같은 고요 속에 길시언과 레니의 숨죽인 울음소리, 그리고 길시언을 치료하는 제레인트의 기도소 리만이 낮게 들려왔다. 너무 긴장한 탓인가?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후작 일행은? 그들 역시 아무런 말없이 허공에 뜬 넥슨만을 바라 보고 있었다. 후작의 얼굴은 굳을 대로 굳어져 귀신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은 분지 위에서 아예 낮잠을 자버리기로 결심했나 보다. 젠장! 크라드메서, 빨리 대답해요! 무슨 대답인지 모르겠지만 빨리나 듣자구요! 당신은 60년이 하루일지 몰라도 우린 평생이라구요!
“드래곤과………….”
크라드메서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관자놀이를 뭐로 찌르는 듯한 저린 감각이 느껴졌다. 크라드메서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는 상호 동의하에 계약한다. 둘 외에 다른 것은 필요 없다. 나는 카뮤 휴리첼과 계약했을 뿐 그 가문과 계약한 것이 아니다. 넥슨. 나는 너의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너는 내게 권리가 없다.”
“좋았어!” 아프나이델이 오른주먹을 딱 소리 나도록 왼손바닥에 치며 나직하게 외쳤다. 그러나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넥슨이 외쳤다.
“나를 보면서 이야기햇!”
“드래곤에게 명령하지 말아라, 넥슨.”
크라드메서의 목소리에는 우리들을 쫓아낼 때와 같은 무한의 힘은 없었다. 반면 넥슨의 목소리에는 점점 강한 힘이 실리고 있었다.
“웃기지 마! 내가 원한다면 유피넬과 헬카네스에게도 명령하겠다! 나를 봐!”
“넥슨, 넌 네가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른 채 그냥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순간 넥슨의 반응은 해괴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의미? 킬킬킬! 계속 웃기는군! 정말 웃겨!”
크라드메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넥슨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킬킬거리더니 말했다.
“의미에 신경 쓰며 사는 사람도 있나? 3대 욕구엔 의미 추구욕이라는 것은 없어. 인간을 설득하기 위한 말로 의미 따위 쓰지 마! 인간은 모두 버러지 야. 먹고 자고 성교하면 만족하는 것이 인간이야!”
넥슨은 미친 듯이 외쳐댔다.
“절식하는 녀석들은 존경받지. 웃기는 짓거리! 대자연을 마구 파헤쳐 산더미처럼 음식을 쌓아놓고 먹지 않겠다는 건 기만이야! 절식하는 동물도 있 나? 잠 안 자고 일하는 놈은 우수하다고 하지. 하하! 잠 안 자고 일해서 뭘 할 건데? 잠 자는 사람들의 것을 빼앗을 생각뿐이잖아? 순결을 맹세하는 개 자식들은 자신이 퍽 고상하다고 생각하지. 순결을 맹세하는 동물도 있나? 그러나 강간하는 동물도 없어! 인간의 모든 예절과 문화와 역사는 3대 욕구 의 절제로 요약돼! 그것도 추잡한 욕구를 감추기 위해 철저히 기만되고 화려하게 포장된, 그것들은 오래전 두 발로 일어서 하늘을 보게 될 때 이미 죽 어버린 한 짐승, 인간이라는 짐승의 장식된 수의(壽衣)야!”
넥슨은 인류의 모든 것을 깡그리 무시해 버린 다음 측은하다는 투로 크라드메서에게 말했다.
“위대한 드래곤이여, 위대한 드래곤이여! 버러지를 설득하기 위해 의미 같은 너무 고귀한 도구를 선택하지 마. 의미? 그건 배부를 때 소화시키기 위 해 해보는 몽상에 불과해. 배부르고 더 이상의 욕구가 없어지고 아무것도 추구할 것이 없으니까 왜 이다지도 할 게 없는 건가 궁금하게 여기는 것이, 그것이 존재 의미의 추구라는 최후의 질문의 케케묵은 정체야! 그러니………….”
넥슨은 숨가쁘게 말을 맺고는 잠시 숨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단숨에 외쳤다.
“위대한 크라드메서! 이 벌레, 그중에서도 산산이 박살난 벌레가 명령한다. 날 봐!”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들어 넥슨을 보는 걸까? 이 위치에서는 크라드메서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후작과 레니가 느낀 것이 정확하다 면, 그렇다면 크라드메서는 카뮤의 아들 넥슨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커다란 감정을 가지고 있겠지.
“그것이 네가 발견한, 혹은 발명한 너의 종족의 정체인 모양이군.”
따스함? 크라드메서의 목소리에는 따스함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어떤 설명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없는 따스함이었지만 왠지 적절했다.
“그렇다면, 그 허무에 되울려 오는 너의 말의 메아리는 무엇일까. 넥슨. 너는 왜 거기서 그렇게 고함지르고 있는 것이지?”
아아, 헬턴트 마을이 그립다. 단순히 우릴 괴롭히던 아무르타트. 이해하기 편해 사랑스러운 그 순수한 악의 이름이 그립다! 아무르타트는 나의 것. 나의 고통이고, 나의 괴로움이고, 나의 증오다. 하지만 크라드메서는, 그리고 넥슨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내 이해를 넘어서는 곳에서 대립하고 있 었다.
넥슨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크라드메서 역시 대답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너의 비뚤어진 애정까지도 그의 것을 닮았군.”
“애정이라구?”
“네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나에게서 구하지 말아라, 넥슨. 그것은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의 대화 방식이 아니다.”
크라드메서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고 그 절대의 부드러움 속에서 동시에 무력감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분지 전체로 번져가는 그 무력감 은 강한 전염력이 있었다. 그 영향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찾아보라면 넥슨과, 할슈타일 후작?
할슈타일 후작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지만 그 눈은 사납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분노? 아니다. 저것은 분노의 눈빛은 아냐. 멍청이 후치야. 지금 후작은 뭔가를 노리고 있어. 그런데 그는 뭘 노리고 있는 것일까? 갑작스럽게 후작은 외쳤다.
“당신의 뜻을 밝혀라, 크라드메서!”
일행들은 당황해서 모두들 후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크라드메서의 반문이 들려왔다.
“할슈타일 후작이오?”
“그렇다!”
“여기까지 찾아온 자들이 꽤나 많군. 그런데, 나의 뜻?”
“그렇다! 말장난은 그만하고 당신의 뜻을 밝혀랏! 저들의 말을 듣자니 당신은 다시는 라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잖은가?”
“닥쳐, 후작!” “그렇다.”
넥슨의 외침과 크라드메서의 대답이 동시에 들려왔다. 후작은 곧장 말했다.
“들었나, 넥슨! 크라드메서는 절대로 라자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포기하고 내려와라, 이 멍청한 녀석!”
이상한걸. 정말 이상해! 후작이 왜 저렇게 말하는 걸까? 저놈은 돌맨을 크라드메서의 라자로 만들지 못하게 되니까, 아예 누구도 크라드메서의 라자 가 되지 못하게 하려고 저러는 것인가? 하지만, 하지만 후작은 크라드메서가 없으면 곧장 바이서스 왕가의 반역자인데? 반역자가 힘을 가지지 못하 면 어쩌겠다는 거지?
그때 넥슨이 외쳤다.
“할슈타일 후작! 끼어들지 마! 크라드메서, 날 똑바로 보고 내 질문에 대답햇!”
후작은 눈을 들어 넥슨을 쏘아보았다. 넥슨이 다시 뭐라고 말하려 할 때 크라드메서는 대답했다.
“아니, 난 물어봐야 되겠다.”
“뭐야?”
버서석, 버석. 풀잎을 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공중에선 넥슨이 외쳤다.
“크라드메서! 어딜 가는 것이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크라드메서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인가.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풀잎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위로 크라 드메서의 가슴이 나타났다. 지친 얼굴. 땀 때문에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들이 얼굴을 조각조각 구분하고 있었다. 그래서 크라드메서의 얼굴은 서 로 다른 얼굴의 조각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 얼굴이 점점 커졌다. 크라드메서는 우리들에게 걸어오면서 말했다.
“이 사태는 몹시 이상하군. 후작이 바이서스의 왕자를 공격하는가 싶더니, 곧 이어 내 라자였던 자의 아들이 나타나서는 바이서스의 왕가에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나의 라자가 되려 하는군. 그런데 드래곤 라자의 가문의 수장이었던 자는 그를 저지하려고 들고 있고.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당신네들은 서로 각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크라드메서는 멈춰 섰다.
우리 일행과 후작의 무리들은 모두 멈춰 선 채 눈앞까지 다가온 크라드메서를 바라보았다. 크라드메서와 우리와 후작 일행은 삼각형을 그리고 있었 다. 그 사이로 풀들이 파도치고 있었고 뿌연 연기는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고 있었다. 넥슨은…………, 넥슨과 시오네, 그리고 팬텀 스티드는 그 삼각형에 포함되지 못한 채 허공에 떠 있었다. 왠지 이 위치가 많은 것을 시사한다는 기분이 드는데.
다른 사람들은 무슨 기분인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난 꼭 그런 기분이 들어. 어린애들끼리 금지된 장난을 치는 장소에 느닷없이 어른이 나타나서 눈 썹을 약간 들어올린 채 ‘너희들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라고 물어보는 것 말이야. 다른 사람들도 그런 느낌인 것일까? 그래서 아무도 크라드메서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않는 것일까?
“인간의 일에 관여하지 마랏!”
후작의 고함소리. 크라드메서는 흠칫 하면서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저 위대한 이그누스 드래곤에 대해서도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일까?
“넌 라자가 없다! 인간의 일에 알려고 들어선 안 돼!”
크라드메서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정말 어른스러운 미소였다. 갑자기 후작의 모습이 ‘우리 노는데 끼어들지 말아요!’라고 외치는 꼬마처 럼 보인단 말이야.
“그렇소? 하지만 한 가지만 묻고 싶은데.”
“넌 물을 수 없어!”
“허락해 달라고 한 적 없소.”
크라드메서는 우아하게 말했지만 그 말은 후작의 입이 콱 막혀버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후작은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크라드메서를 쏘아보았다. 크라드메서는 우리 모두를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지난 300년 동안 이 질문은 던져질 필요도 없었소. 바이서스 왕가가 인간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며 동시에 만인으로부터 그 사실을 인정받았기 때문 에, 드래곤들이 바이서스 왕가를 보살피는 것이 곧 인간을 보살피는 것이었소. 루트에리노 대왕은 드래곤 로드의 인간에 대한 지배권을 이어받았고 그것은 인간들 모두가 인정했던 바요. 비록 근자에 들어와 자이펀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양국이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지만.” 운차이가 크라드메서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우리는 드래곤 로드의 지배를 받은 바 없소. 그러니 대왕이 그를 몰아내고 대륙의 새로운 주인으로 행세했다 한들 우리가 알 바 아니오.”
“그 말은 맞소. 하지만 그것은 당신들이 지배당할 정도의 세력도 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잖소. 드래곤 로드께서는 열사의 사막에서 생존 자체를 힘겹게 유지시키는 당신들을 지배하려들 필요를 느끼지 못하셨소. 그리고 당신네들이 뭐라고 말하든, 바이서스에서 새로운 질서가 생김으로써 발생 하게 된 유민들이 당신 나라로 유입되면서 당신들이 국가로서의 면모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거요.”
운차이는 이를 드러낼 뿐 대답하지 않았다. 크라드메서는 말했다.
“그런데…………, 이제 묻겠소. 루트에리노 대왕 이후 3세기인 바로 이 시점에서, 대륙에는 새로운 질서가 생기려 드는 것이오? 바이서스 왕가는 도전받 고 있는 것이오?”
“물론이지!” “닥쳐엇!” “그렇다!”
후작의 대답과 길시언의 노호성, 그리고 넥슨의 고함소리가 잇달아 터져나왔다. 후작은 무서운 눈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고 길시언은 일어나 후작 에게 달려들려고 들었다. 샌슨이 재빨리 그의 겨드랑이를 껴안지 않았다면 길시언은 그대로 달려가다가 앞으로 고꾸라져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넥슨 은 그 양쪽을 모두 쏘아보고 있었다.
그때 크라드메서가 말했다.
“이제야 나는 확신할 수 있구려.”
뭘? 크라드메서. 뭘 확신하십니까? 그때였다. 갑자기 레니가 신음소리를 내었다. “허억…….” 황급히 몸을 돌리자 허공에 뜬 넥슨을 바라본 채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레니의 모습이 보였다. 레니, 왜? 그때 레니는 천천히 옆으로 쓰러지기 시작했고 네리아는 당황하며 레니를 받아안았다. “레니, 레니 “야?”
그때 다시 크라드메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넥슨 휴리첼. 네가 바로 잔혹한 저울대의 주인께서 정한 나의 짝이었군. 바로 이 시점에, 루트에리노 대왕 이후 3세기가 되는 이 시점에 말이야. 내 가 틀렸던 것이군. 지금 나는 인간에게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는군.”
“뭐라고!”
후작은 찢어지는 고함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고함소리는 울림이 되기도 전에 넥슨의 웃음소리에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
“크하하핫! 정확한 선택이다, 크라드메서!”
잔혹한 저울대의 주인, 오, 유피넬! 정녕 유피넬 당신은 크라드메서의 저울 반대쪽에 넥슨을 두셨습니까!
“에델브로이여.”
에델린의 짓눌린 신음소리가 더할 수 없는 음산함으로 다가왔다. 네리아의 무릎에 누운 레니의 입에서 가녀린 신음이 들려왔다.
“그럼 아, 안 돼요…………, 제가 틀렸어요. 크라드메서 님…………, 제발!”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녕 나의 라자가 되고 싶은가, 카뮤의 아들 넥슨 휴리첼?”
“그렇다!”
“그래. 이것은 드래곤에게 숙명으로 지워진 언약이며 나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네가 불러일으키는 이 지독한 애정 앞에 무릎을 꿇는 나를 인정 한다.”
크라드메서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일행들은 레니 곁으로 몰려들었다. 레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 있는 볼에는 솜털이 모두 곤두서 있다. 네리아는 황망히 레니를 추슬러올리려 했으나 레니는 자꾸 힘없이 미끄러져내렸다. 그때 칼이 손을 들어 네리아를 제지하더니 레니의 얼굴에 얼굴을 바싹 가져가며 다급하게 말했다.
“레니 양? 레니 양!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그러나 레니는 칼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머리를 힘없이 좌우로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안 돼!” 비명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이 갑자기 올라왔을 때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난 덜덜 떨리는 턱을 부여잡았다. 레니는 마치 보이지 않는 무엇으로부터 자 신을 지키겠다는 듯이 손을 휘젓고 있었다.
“안 돼, 안 돼요! 받아들여서는 안 돼요……………. 이 참을 수 없는…………… 파멸…………! 비명과 붉은 피………… 불공평한, 이유 없는, 목적 없는……. 아아아……, 보 고 싶지 않아요, 싫어요! 싫어! 끔찍해요. 제발, 제발 그래선 안 돼요………! 무서워요………….”
그때 단숨에 내어지르는 듯한 크라드메서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는 그대를 받아들이겠다.”
암흑.
갑자기 위도 아래도 없는 암흑 속에 서게 되었다. 여긴 어디지? 내가 지금 서 있는 거야, 물구나무서 있는 거야? 중량감이라는 것은 세계 최고의 거 짓말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중량이라니, 그게 뭔데? 빛은 고색 창연한 전설 속에서나 등장했던 엉터리 같은 이름. 빛이라구? 아아, 그런 것. 들어본 기억이 나는군. 소리라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리기 위해선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노력? 관둬. 소리 따위.
있어야 할 위치에서 보석이 번득였다.
왜 저 위치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것은 거기에 있었고 다른 장소에 있었다. 아니, 없었다. 있었다. 있으니까 없었다. 아름다웠다.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는 상대를,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유혹할 수 없다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천 방울의 이슬을 모아야 돼. 그것은 조각상의 마음 에도 불길을 일으킬 수 있는 마법의 묘약. 그런데 말이야, 문제는 천 방울은커녕 백 방울도 모으기 전에 태양은 이슬을 태워버리고 바람은 이슬을 훑 어버린다는 거지. 하지만 다른 사람과 합심해서 모으는 것은 마법에 관계된 것들이 대개 그렇듯이 소용이 없어.
좌절한 사랑의 주인공에게 남겨진 최후의 희망이 있지. 정녕 그의 짝사랑의 상대가 유피넬이 정한 그의 짝이라면, 하늘은 어느 날의 다음날이거나 혹은 어느 날의 전날임에 분명한 어느 날, 천 방울의 이슬을 다 모을 때까지 태양도 뜨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는 아침을 만들어주신다는 거야.
저기 백만 방울의 이슬이 모여 만들어진 보석이 빛을 뿜고 있었다.
“드래곤의 별인가?”
어디서 들려온 것이지?
“칼? 어디 있어요?”
주위를 돌아보아도 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들 어디로 간 거지? 이슬 모으러 갔나?
“후치? 임마! 후치야! 어디 갔어? 대답해!”
샌슨의 절절한 고함소리. 그런데 부르는 사람은 어디로 간 거야?
“아름답다……………, 정말!”
엑셀핸드. 그래요. 아름답죠? 당신은 저런 보석을 캐내고 다듬어본 적이 있나요?
“다들 어디 있어요? 제발…………, 얼굴을 보여줘요! 어디로 간 거예요? 등 뒤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지 말아요!”
“네리아, 네리아!”
“후치? 후치! 어디 있어? 이리 나와!”
‘여기예요!’라고 고함지르려다가 무척 웃기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어딘데?
“내가 죽었나? 이게 죽음인가?”
아프나이델의 말에 곧 길시언이 대답했다.
“쿨, 쿨럭. 걱정 말아요. 안심하시오. 모두들 안심해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길시언? 길시언.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에델린. 아무 걱정 말고, 쿨럭.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말아요. 내가, 내가……………, 쿨럭!”
나의 왕께서는 보이지 않는 동료들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환자가 다른 사람 걱정하고 있는 겁니까?
“여! 다들 괜찮은 거군요? 헤이, 운차이 씨?”
“살아 있어. …… 난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 시끄럽게 부르지 마, 제레인트.”
“아, 나와 같은 생각이시군요. 좋습니다. 어, 그런데 레니 양?”
“레니? 레니야?”
“레니 양! 어디 있는 겁니까? 대답해요!”
암흑.
“안 돼…………. 늦었어…………….”
“레니 양? 쿨럭!”
“늦었어요……, 왕자님. 크라드메서는………… 드래곤의 별이 바라보는 가운데………….” “드래곤의 별! 저것이 드래곤의 별이 맞습니까? 그런데 왜 여기에?”
“알 수 있어요……. 난 알겠어요. 드래곤의 별은…… 라자의 계약의 볼모…………….’
“볼모? 인질이라는 겁니까?”
“증거…………, 인질…………. 무의미한 것들이 의미를 가질 때까지 모여서……………, 아냐. 모인다고 의미가 생기는 것일까…………. 무의미와 불가지의 차이는 뭘 까…………. 인간에겐 같지 않을까….”
“레, 레니 양?”
그때 크라드메서의 목소리가 길게 울렸다.
“시간은 우리의 언약의 현을 연주할 것이다. 비비고 할퀴고 뜯을 것이다. 바람. 뜨거운 바람이 차가운 나뭇가지를 스칠 때 들려오는 소리만 빼고, 모 든 바람은 자유롭게 태어난다. 바람의 자유의 대가는 무엇인가. 그것은 죽을 때까지 언약의 공증인이자 전달자 노릇을 해야 된다는 것. 바람은 너의 말을 전한다. 바람은 나의 말을 전한다. 그래서 바람은 자유롭다. 질시 어린 양심으로부터도, 그리고 언약의 파괴자에게서도.”
크라드메서의 말이 끝나자 곧 넥슨의 말이 이어졌다.
“시주할 것은 고 언괴나뭇가 들은 간은 약의 현을 연자유롭게 태어바람. 의 대가는 무엇인가. 그것지 언약의 공릇을 해야 된다지를 스칠 때는 것. 을 전한다. 바약의 파람은 나의 말을 전한은 죽을 때까다. 그래우리의 언서 바람려오는 소리만 빼고, 모람증인이자 전달자 노바람은 너의 말은 자유롭 다. 든 바질시어린 양심으이다. 비비고 할뜨거운 바람이 차가로부터도, 그리자에게서도 난다. 바람의 자유퀴고 뜯을 것이다.”
잠시 후 크라드메서는 노래를 시작했다.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둠 빛 어 둠 빛 어둠 빛 어둠
그리고 그에 대답하듯, 넥슨의 노래도 시작되었다.
계란색 겨울 아침의 서릿빛 물빛 여인의 입술색 눈을 감을 때 보이는 색 황금색 100년 묵은 저택의 창문에 쌓인 먼지색 아기의 볼빛 긴밤을 지새우고 맞이하는 아 침 햇살이 속눈썹에 부서지는 색 땀에 젖은 옷 겨드랑이의 반달 모양 땀무늬의 거무튀튀한 색 석양의 하늘에 쏘아진 화살끝의 은적색 마침내 찾아온 봄의 첫 번째 꽃잎을 뜯어먹는 뱀의 눈동자색
크라드메서의 노래와 넥슨의 노래가 점점 조화를 이루어가기 시작했다. 서둘러 응결되기도 하고 주춤거리며 서로를 밀어낼 듯하다가 끝끝내 서로를 포옹하며 둘의 노래는 회색으로 물들어갔다. 날카롭게 찢어지는 회색들이 돋아오른다. 번져가는 회색의 물방울들은 빛도, 어둠도, 모든 것을 물들인 다. 그러나 번져가는 회색은 그 절대의 정복의 끝에서 단말마를 내뱉으며 다시 회귀한다. 모든 것은 색깔의 영토가 지배한다. 색깔의 바글거림에선 톡 쏘는 듯한 맛이 난다. 소리 없는 음악을 배경으로 멈춰진 춤이 펼쳐진다. 너무 긴 순간을 태워가며 나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크라드메서의 지쳐버린 목소리가 공허하게 퍼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