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8권 – 제14부 : 정답이 없는 선택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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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딱! 뭔 소리야? 고개를 돌려보니 아프나이델과 칼의 이마가 벌겋게 바뀌어 있었다. 두 사람은 이마를 너무 세게 쳤나 보다. 아차! 그런데 길시언 은? 어디 보자. 지금은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전사들을 막아줄 테니 풋내기 칼잡이는 없어도 되겠군.
난 몸을 돌려 우리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일행들은 둥글게 모여서 있었고 그 사이로 들어가자 길시언의 초췌한 모습이 보였다. 길시언은 바닥에 엎드려 있었고 에델린이 그 커다란 손으로 길시언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네리아와 레니는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걱정스러운 눈으로 길 시언의 치료를 바라보고 있었고 엑셀핸드는 눈살을 크게 찌푸린 채 주먹을 쥐었다 놨다 했다. 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어떻죠?”
“안 좋아.”
제길! 길게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다른 사람도 아닌 제레인트가 말이야. 샌슨은 바위 같은 얼굴을 한 채 길시언의 허리를 붙잡고 있었다. 에델 린은 땀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고 그 손에서는 굉장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으음…….”
길시언이 신음을 토했다. 그리고 우리들 중 가장 날쌘 사람과 두 번째로 날쌘 사람이 누군지 드러났다.
“좀 어떤가, 길시언!”
엑셀핸드는 길시언 옆에 팍 엎드리더니 그에게 키스라도 할 듯이 얼굴을 바싹 붙인 채 다급하게 외쳤다. 그리고 네리아는 엎드린 엑셀핸드의 등 위 에 엎드려서 길시언을 내려다보았다. 길시언은 머리를 부들부들 떨면서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의 입이 움직였다.
“……………리는? 쿨럭, 쿨럭!”
무슨 말이지?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레니가 다급하게 외쳤다.
“독수리! 독수리 말이에요?”
뭐, 독수리? 아! 독수리가 어디로 갔지? 일행들은 이제 모두 목을 길게 빼서 하늘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네리아가 외쳤다.
“저기! 저기 돌고 있어!”
네리아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자 대단히 높은 곳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검은 점이 보였다. 네리아는 다시 엑셀핸드의 등에 턱을 찔러대며 길시언 에게 말했다.
“걱정 말아요. 지금 저 위에서 돌고 있어요, 길시언. 독수리는 왕자를 내려다보고 있다구요! 걱정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구요!”
길시언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런가. 쿨럭! 일어나야……………, 아샤스에게…………, 쿨럭!”
난 환한 얼굴로 에델린을 보았다. 그러나 에델린은 무표정하게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가 손을 치우자 드러난 길시언의 등엔 상처가 없었다. 그저 살 결이 약간 푸르스름하게 바뀌어 있을 뿐이었다. 나은 거 아냐? 에델린은 말했다.
“치료는 끝났습니다. 길시언.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길시언은 두 팔을 끌어당겼다. 놀랍게도 그는 땅을 짚으며 일어났다. 샌슨이 그를 부축해서 길시언은 간신히 일어나 앉아서 에델린을 바라볼 수 있 었다.
“쿨럭! …… 이제 괜찮은 거요?”
에델린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할 수 있는 한 치료를 다했고 상처는 이제 괜찮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 당장 어딘가 조용한 곳에서 요양을 취하셔야 합니다. 계속 여행을 할 수 는 없습니다.”
길시언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생각에 잠겼다.
“쿨럭! 크음. 치료가 끝났다면…………, 요양하는 것만큼 빨리 회복되진 않겠지만, 쿨럭! 조심스럽게 움직이면 되겠군요. 그렇잖습니까?”
“앞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일 기회가 있을까요.”
“하긴 그렇군요. 치료하는 손이여. 쿨럭.”
에델린은 고개를 돌려 엑셀핸드를 바라보았다.
“제가 이분을 옮기겠습니다. 이분의 체구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저니까요.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드워프들의 마을이니 그곳까지 엑셀핸드 님께서 안내해 주시면 되겠군요. 여러분들은 이대로 나아가십시오.”
엑셀핸드는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뒤쪽엔 기분 나쁜 녀석들이 있는걸. 이곳은 산 위라서 다른 길을 찾아 돌아간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아, 이런. 후작의 전사들이 있었지. 우리는 불안한 눈으로 산정상을 올려다보았다. 이 위치에서는 칼과 아프나이델, 그리고 운차이의 등 외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백발 프리스트와 후작은 아직도 설전을 나누는 모양이지만 자세한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여기에서 어떻게 길시언을 빼낸다?
길시언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에델린은 놀라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길시언?”
“쿨럭, 쿨럭. 어차피 이곳에서…………, 달아날 수는 없습니다. 휴우. 후우우.”
길시언은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겨우 침착하게 말했다.
“이대로 가야겠습니다. 에델린. 쿨럭, 크라드메서와의 일은 오늘이나 늦어도 내일 중엔 끝날 겁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해결되면 후작의 방해도 없 을 테니, 쿨럭! 여러분 모두와 함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방법이 상책인 것 같습니다.”
길시언은 이제 벗어둔 갑옷을 들어올렸다. 샌슨이 황급히 그의 갑옷을 들어 길시언에게 입혀주는 동안 길시언은 침착하게 말했다.
“괜찮을 겁니다. 늦어도 내일까지니까요. 그리고, 크흠! 어쩐지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독수리가 날 내려다보고 있으니 쓰러질 일은…. 없을 겁니다.”
에델린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원을 그리며 날고 있는 독수리를 보던 에델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샌슨은 길시언의 허리를 안아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길시언은 조용히 샌슨을 밀어내었다.
“괜찮습니다. 다리를 다친 것은 아니니까. 쿨럭, 크허음. 후치? 후작과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어떻게 되었지?”
“보시다시피 계속 말싸움중이죠.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래. 그렇다면……………”
길시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바뀌어 있었고 숨소리에는 물 끓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네리아는 울상이 된 채로 길시언을 바 라보았지만 길시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잠시 후 그의 입이 열렸다.
“좋아. 이대로 출발하지.”
“예?”
길시언은 스피어 하나를 다시 지팡이처럼 들었다.
“이대로 걸어간다. 어차피 우리 목표는 저쪽이니까. 쿨럭. 후치, 저 위의 세 명에게 들키지 않도록 빠져나오라고 전해라. 출발합시다, 여러분.” “아, 아니. 길시언…….”
에델린의 만류에도 길시언은 주위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샌슨과 제레인트는 당황하여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길시언은 고집스럽게 자기 발로 걸어갔다. 제길! 등에 쿼럴을 맞은 사람이 고집은! 네리아와 레니는 눈가를 닦으며 그 뒤를 따랐고 엑셀핸드는 ‘끙!’ 하는 신음 을 뱉으며 걸어갔다. 에델린은 나에게 말했다.
“위의 세 분들에게 조심스럽게 빠져나오라고 전해요. 하지만 후작이나 프리스트들이 쫓아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그들을 지연시킬 무슨 방법 이 없는지를 물어보세요.”
“알았어요, 그럼.”
에델린은 일행들의 뒤를 따라 걸어갔고 난 다시 몸을 돌려 산정상으로 향했다. 정상에선 칼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위 위로 올라서자 칼은 나 직하게 말했다.
“어떻게 됐는가, 네드발 군?”
“길시언은 요양해야 된대요. 하지만 지금은 몸을 빼낼 수가 없으니 일을 끝마쳐 버리고 쉬겠답니다.”
“몸을 빼내…………? 아, 그렇군. 후작이나 프리스트들이 있었지.”
“예. 그래서 저 사람들 싸우는 틈에 이대로 크라드메서를 찾아가기로 했어요. 그런데 저 자들이 따라오지 못하게 할 방법이 없을까요?”
칼은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에선 여전히 프리스트들과 전사들이 대치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서 백발 프리스트와 후작이 험한 말들 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런 헛소리를 계속 들어줄 수 없다. 당장 비켜라!”
“먼저 내 질문에 대답하시오! 당신은 분명 바이서스의 전력을 약화시켜 왔고 조금 전엔 길시언 왕자를 이유 없이 공격하기까지 했소.”
“발칙한 놈! 아미앙스 수도원이 언제부터 왕가의 개가 되었단 말이냐!”
백발 프리스트는 숨을 크게 몰아쉬는 것으로 끝내었지만 주위의 다른 프리스트들은 그대로 검을 들어올렸다. 그들은 검 끝으로 후작을 겨냥하며 사 납게 외쳤다.
“주의하시오, 후작! 레티를 모욕한 자로서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소!”
“언사를 주의하지 않아서 죽게 된 자들의 인명록에 당신 이름을 올리고 싶은가!”
후작이 울컥하면서 대답하려 했을 때 백발 프리스트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흥분해서 날뛰던 프리스트들은 검을 내렸다. 하지만 그들의 무시무 시한 얼굴은 전사들을 오그라들게 만들고 있었다. 백발 프리스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말했다.
“그렇소. 우리들은 한때 당신의 개였지.”
프리스트들은 입을 쩍 벌렸다.
“레티의 입이여!”
“오늘 여러 번 말하게 되는데, 입들 닥쳐랏! 누가 대변인이란 말이더냐!”
프리스트들은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백발 프리스트는 빠르게 말했다.
“이 말로써 난 파문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레티 앞에 떳떳하게 말할 수 있소. 아미앙스 수도원은 후작의 주구였소. 국왕에 대한 범죄자 인 돌맨 할슈타일을 사사로이 보호함으로써 국왕과 대립했소. 그렇소. 난 사사로이라고 말했소. 그것은 레티의 뜻이 아니었으니까.”
돌맨 할슈타일은 아직 프리스트들 사이에 끼여 있었다. 그는 점차 험악해지는 주위의 분위기 속에서 기절하고픈 표정을 지었지만 행동을 취할 엄두 는 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백발 프리스트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주구로 남지 않겠소.”
“그래?”
“그렇소! 난 레티만을 섬기기 위해 레티의 종단에 귀의한 몸이오. 이것은 내 원래 위치로의 귀환이오! 난 지금부터 레티의 뜻에 따라서만 행동할 것 이며, 이런 내 행동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설령 신께서도 이의를 달지 못할 것이오!”
만인과 신, 그리고 온 세계에 대한 백발 프리스트의 선언이 끝나고 나자 후작은 싸늘하게 말했다.
“그 같잖은 레티의 뜻이라는 것이 뭐지?”
“당신을 저지하겠소.”
“어떻게 그게 레티의 뜻임을 알았지?”
“조금 전, 길시언 전하의 머리 위 저 창공에 독수리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난 레티에게서 정의와 불의를 구분할 수 있는 힘을 얻었소.” 할슈타일 후작은 이를 북북 갈면서 낮게 말했다.
“왕가의 후광에 넘어가 어제의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내겠단 말이지?”
“뭣이!”
젊은 프리스트들은 다시 발작 상태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백발 프리스트는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어제의 주인이라는 그 말에 반대하지 않겠소. 조금 전 말했듯이 분명 아미앙스 수도원은 할슈타일 가의 개 노릇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빨의 문제라면, 그것은 분명히 그렇소! 난 이제 전하께 존문하고 당신의 처리 방식을 얻겠소. 당신은 레티에 대한 반역자가 아니라 왕가에 대한 반역자이 니, 왕가의 의사를 존중하여 당신을 처리해 드리지.”
할슈타일 후작의 얼굴은 이제 인간이라기보다는 오크에 가까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찌한다? 백발 프리스트가 존문해야 할 왕자께 서는 이미 꽁무니를 뺀 지 오랜데. 백발 프리스트는 그대로 고개를 돌리며 우리들을 향해 말했다.
“전하께 존문코자 하오. 할슈타일 후작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칼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전하께선…………, 부상 때문에 지금은 일어나실 수 없소.”
“이런! 위중하시오?”
칼은 미간을 조금 찡그리더니 빠르게 말했다.
“등에 화살을 맞은 것이니 좋다고 볼 순 없소. 그리고 레티의 프리스트여. 왕자님께 존문할 필요가 있겠소? 그는 바이서스의 왕자를 공격한 자요.” 칼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뻗어 후작을 가리켰다. 후작은 뭐 씹은 얼굴을 한 채 칼을 노려보았고 백발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오, 헬턴트 공. 그럼 이제 형제들에게 묻겠소.”
백발 프리스트는 다른 프리스트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프리스트들은 굳은 얼굴을 한 채 그 시선을 마주보았다.
“내 뜻은 이미 밝힌 바와 같다. 우리 종단의 수치는, 그것이 수치라는 이유로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분명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레티에게만 그 순결 한 몸을 바치고 레티의 적에게만 그 용맹한 검을 겨냥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가장 기본적인 도리를 잊은 채 후작의 주구 노릇을 행하며 그의 아들을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왕자의 일행에게 참람된 검을 겨냥했다. 난 이제 그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고 반성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오를 시정하려 한다.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프리스트들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불안한 정적이 점점 깊어가고 있을 때 금발머리의 프리스트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말했다.
“하이 프리스트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아닐까요? 후작은 하이 프리스트의 인척이 되십니다. 우리가 신을 받들듯이 하이 프리스트를 공경해야 됨은 당연합니다.”
백발 프리스트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설령 하이 프리스트 본인이라 하더라도! 삿된 야망으로 바이서스의 안위를 흔들리게 함은 용서받을 수 없다! 바이서스가 아니라 그 땅에 살고 있는 신의 선민들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금발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레티의 입이여. 당신 뜻이 제 뜻입니다.”
그러자 다른 프리스트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저 사람들 행동하는 것은 정말 빠르군. 군말이 적은걸. 백발 프리스트는 고개를 돌려 후작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전사들에게 무장을 버리도록 명령하시오. 우리는 당신을 체포하여 국왕에게 당신의 신병을 넘기겠소. 국왕께서 길시언 왕자를 공격한 당신 의 죄를 처벌하시겠지.”
후작은 낮게 대답했다.
“다 지껄였느냐?”
“뭐라구?”
“이제 다 지껄였냐고 물었다.”
“……다 지껄였다면?”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개는 아무에게나 짖어도 크게 흉이 되지 않는다. 원래 천성이 그렇게 되어먹었으니까. 하지만 인간이 아무에게나 짖어대는 것은 크게 흉이 될 일이 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백발 프리스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도저히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조심해요!” 아프나이델이 고함을 질렀지만 너무 늦었다. 운차이가 혀를 차는 소리가 끔찍스럽도록 크게 들려왔다. 칼은 앞으로 달려나갈 듯이 움찔거렸다.
“꼼짝 말아요, 프, 프리스트 님.”
이런 제기랄! 어느새 백발 프리스트의 뒤로 다가서 있던 돌맨 할슈타일이었다!
그는 백발 프리스트를 뒤에서 붙잡고는 그 목에 대거를 들이대고 있었다. 왜 저 자식을 생각하지 못했지? 그렇게 부들부들 떨면서 아무 짓도 하지 않던 모습 때문에 저 자식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질 못했어. 젠장. “너 이놈!” 프리스트들이 고함을 지르며 돌맨을 겨냥했지만 돌맨의 겁에 질린 목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퍼졌다.
“우, 움직이지 말아요! 그어버릴 거야!”
이런. 저건 경고도 아닌 발악이야. 하지만 그래서 더욱 무서웠다. 돌맨은 잔뜩 겁에 질린 채 부들부들 떨면서 백발 프리스트를 붙잡고 있었고 흥분해 버린 15세 소년의 손에 대거가 쥐어진 사태를 원활하게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러나, 물러나라구요!”
돌맨의 패악스러운 고함소리에 프리스트들은 모두 잔뜩 긴장한 채 뒤로 한두 발자국씩 물러났다. 그 와중에도 돌맨은 몸이 부서져라 떨면서 계속 소 리소리 지르고 있었다.
“가, 가까이 오지마! 그리고, 그리고 당신들의 권능, 그 권능 나에겐 못 써요! 난 드래곤 라자예요! 드래곤 라자라구! 날 다치게, 다치게 할 순 없어 요! 크라드메서가 있어! 크라드메서에겐 라자가 필요해요! 그러니까 날, 날 다치게 하는 것은, 그런 것은…………….”
“그만. 돌맨.”
후작이 조용히 말하지 않았다면 돌맨은 언제까지라도 떠들고 있었을 것이다. 돌맨은 입을 꾹 다문 채로 벌벌 떨면서 백발 프리스트를 더욱 거세게 부여잡았다. 칫! 인질보다 인질범이 더 떨고 있군. 후작은 싸늘한 표정을 지은 채 걸어왔지만 프리스트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돌맨의 손은 멀리 떨어 진 우리에게까지 보일 정도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백발 프리스트는 얼굴을 온통 찡그린 채 걸어오는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백발 프리스트의 바로 앞까지 걸어오더니 인자한 표정으로 말했다.
“수고했다, 돌맨.”
그리고 그는 곧장 손을 휘둘렀다. 짝! 메아리가 들려올 지경이다. 백발 프리스트의 뺨은 벌겋게 변했다.
“아무에게나 짖어대는 개는 매밖에 얻을 것이 없다. 땡추.”
꽁무니에 불이 붙을 지경인데도 정말 대화는 매끄럽군, 그래. 하필이면 바람은 우리 등 뒤쪽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바람을 만난 산불은 삽시간에 거 세게 타올랐고 불길은 곧장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맙소사, 거짓말 같아! 무슨 산불이 이렇게 빨리 번지는 거야? 아무리 나무를 많이 쌓아두었다 지만! 우리는 숲 사이로 네 마리 사슴처럼 날렵하게 달려갔다. 그러나 사슴처럼 우아하지는 못했다.
“앗뜨뜨뜨거 !”
죽어라고 달려갔음에도 불구하고 목 뒤가 엄청나게 뜨거웠다. 운차이는 숲 속을 나는 매처럼 달려가고 있었고 그 뒤에서 아프나이델은 로브 자락을 양손으로 거머쥔 채 해괴망측한 모습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웃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나와 칼 역시 양 옆으로 다가오는 불길에 기겁하면서 달려가고 있었으니까. 순식간에 눈앞으로 먼저 가던 우리 일행의 모습이 보였다. 일행들의 황당한 표정 사이로 엑셀핸드가 먼저 우렁차게 고함을 질렀다.
“어떻게 된 거야앗!”
“산불입니다!”
“그럼 저게 들불이냐?”
우리가 상당한 당황 속에서 이런 몰가치한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불길은 계속해서 다가왔다. 네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고 레니는 발악하 기 시작했다. “어, 언니이이! 같이 가요!” 샌슨은 날렵한 동작으로 길시언에게 등을 돌려대었다. “업히십시오! 전하의 다리가 되겠습니다!” 박력은 있지만 어째 어울리지는 않아. 길시언은 어쩔 줄 몰라하며 다가오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는 격한 기침을 뱉었고 프림 블레이드가 길게 울었 다. 웅웅웅웅!
그때 에델린이 걸어나왔다. 오, 에델린! 에델브로이의 따님이시여! 우리는 눈물이 나올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거대한 몸은 그대로 에델브로이의 축복처럼 보였다. 우리의 간절한 시선 속에 에델린은 다가오는 불길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잠시 후 그녀의 늠름한 목소리가 울려퍼졌 다.
“컨트롤 웨더!”
하늘에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저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것도 구름이라고 할 수 있다면. 구름은 정말 새떼나 된 것처럼 삽시간에 움직였고 하늘 은 컴컴해졌다. 곧이어 천둥소리가 울려퍼졌다. 파르르릉!
“꺄아아아악!”
네리아의 구성진 비명소리가 들리고 나서 곧 이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후두두둑 과정을 건너뛰고 곧장 쏴아아아 과정으로 넘어갔다. 그야말 로 퍼붓는 듯한 소나기가 내렸다. 콰콰콰콰콰! 비는 갈색 산맥을 평지로 만들기로 작정한 듯이 쏟아졌다. 불길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으아아아! 에델브로이에 영광 있으라!”
제레인트는 빗속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샌슨은 자기의 망토를 벗어 길시언에게 덮어주면서 말했다.
“테페리의 프리스트가 그렇게 말하니 좀 이상합니다?”
“핫하하하! 테페리께서는 그렇게 쩨쩨하지 않으십니다!”
제레인트는 비에 젖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통쾌하게 웃더니 곧장 에델린의 옆으로 가서 섰다.
“그리고 이제부터 테페리의 영광을 보여드리죠!”
그리고 제레인트도 곧장 기도에 들어갔다. 우리는 반쯤은 기대하면서, 동시에 반쯤은 불안감을 느끼며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설마 날씨를 도로 맑 아지게 만들지는 않겠지? 제레인트는 외쳤다.
“어스퀘이크!”
어, 어, 어어엇! 갑자기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땅이 진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길시언이 비틀거리자 샌슨은 재빨리 그를 붙잡았다. 천둥 소리에 반쯤 정신이 나가 있던 네리아가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더니 땅 위에서 헤엄치기 시작했고 레니는 황당한 눈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 아는 비가 너무 쏟아지자 여기가 물속이라고 착각해 버린 모양이다. 그런데 갑자기 지진은 왜 일으키는 거지? 그러나 곧 나는 제레인트를 과소평가하 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쿠…… 쿠…… 쿠아아앙!
산이 진동했다. 아프나이델이 마구 파헤친 땅에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거기다가 지진이 더해지자 곧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산이 무너진다!”
절대 움직이지 말아야 할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산이 쪼개졌다.
비에 젖은 흙이 촛농처럼 스르르 움직였다. 비는 사정없이 흙을 쪼개어나갔고 흙이 움직임에 따라 산에는 거대한 금이 좍좍 그어지기 시작했다. 그 리고 나무들과 바위가 천천히 기울어졌다. 이윽고 그것들은 격렬한 충돌을 일으키며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콰앙쾅쾅쾅!
바윗더미와 흙더미가 무서운 힘을 자랑하며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홍수에 떠내려 가는 것처럼 나무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쓸려 내려갔 다. 나무 뿌리는 하늘을 향하고 부러진 나뭇가지들은 불티처럼 흩날렸다. 산 정상과 우리가 있던 숲 사이의 능선이 그대로 함몰되며 좌우로 떨어져 나간 것이다. 흙과 나무들이 마구 뒤섞이며 계곡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갔다. 콰르르릉! 계곡에서 귀가 터질 듯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털썩. 엑셀핸드는 그만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저런, 저 키에 땅에 앉으면 빗물이 무지하게 입에 튈 텐데. 그는 젖은 수염을 힘없이 쓸어내리며 말했다.
“제레인트…………, 자네 우리 광산 근처엔 오지 말게나. 암반 사고는 무서운 거야…………, 아무렴.
그리고 아프나이델은 완전히 얼이 빠진 채 빗물이 입에 들어가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로 제레인트에게 말했다.
“그렇잖아도 톱메이지라는 호칭은 제게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테페리의 복음을 전파할 테니 당신이 산을 가르는 톱메이지가 되시는 것이 어떻 겠습니까?”
제레인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우리들은 제레인트가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에 빗물이 흘러내려 그의 얼굴은 조각처럼 보였다. 설마? 너무 굉장한 힘을 사용해서 어떻게 된 것은? 에델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레인트의 어깨를 건드렸 다.
“제레인트 씨?”
에델린은 턱을 한방 맞을 뻔했다. 제레인트가 느닷없이 하늘을 향해 주먹을 들어올린 것이다. 에델린은 당황하며 비켜났지만 제레인트는 거기엔 신 경 쓰지 않고 얼굴에 빗물을 튕겨가면서 하늘을 향해 외쳤다.
“테페리여! 정말 이러실 겁니까! 우핫하하하! 너무너무 좋아서 죽겠다구요! 난 당신 뜻을 실천하는 것이 몸살나게 좋다구요! 우킬킬킬킬!”
에델린은 가지런한 이빨을 다 드러내놓은 채 당황했다. 쿠르르릉! 어, 혹시 테페리의 진노가 아니었을까? 벼락이 사정없이 쳤지만 제레인트는 펄쩍 펄쩍 뛰면서 젖은 로브를 흩날리고 있었다. 칼만이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혹시 테페리의 프리스트들은 모조리 광신도가 아닐까? 콰광! 으악! 잘못했 어요, 테페리!
“그대를 찬미할 내 입을 열어주소서! 나의 이정표이신 테페리여! 아싸아싸! 그대의 길 잃은 방랑자를 긍휼히 여기사! 마침내 첫 별을 하늘에 떠올리 시니! 우랏차차! 신심은 거룩한 흐름으로 회귀하여!”
제레인트는 펄쩍펄쩍 뛰면서 노래를 불러댔다. 난 칼을 돌아보았고 칼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자도 광대를 공경하거늘……… 찬송가도 무도곡이 될 수 있겠지…….”
꾸르릉! 천둥소리는 하늘을 찢고, 콰가가각! 지진 소리는 땅을 갈랐다. 그리고 네리아의 비명소리는 내 고막을 박살낼 지경이었다.
“꺄아아악! 꺄아아악! 꺄아아악!”
네리아는 이제 땅에 누운 채 팔다리를 버둥거리고 있었고 레니는 기겁하며 그녀를 일으켜세우려 애쓰고 있었다. 운차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 로 그 광경을 보면서 말했다.
“웬 까마귀야.”
“이렇게 예쁜 까마귀를 봤냐! 꺄아아악!”
운차이는 고개를 심하게 가로젓더니 레니를 도와 쓰러진 네리아를 험하게 일으켜세웠다. 네리아는 일으켜세워지자마자 두 팔 두 다리 다 사용해서 운차이에게 감겨들었다. 운차이는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으며 외쳤다.
“이거 놔!”
“꺄아아악!”
스피어에 기댄 것으로 모자라 샌슨의 팔에 안겨 있던 길시언이 신음을 흘렸다.
“쿨럭! 크르르. 이건……… 맙소사. 내가 그덴 산에 와 있었………… 쿨럭!”
“핫하하하! 예, 길시언! 저와 에델린, 그리고 아프나이델이 힘을 합하면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의 위업을 꿈꿔 보는 것도 헛된 희망은 아닐 것입니다!” 한 손을 들어올린 채 멋진 스핀을 하고 있던 제레인트가 신나게 외쳤지만 에델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길시언에게 다가갔다.
“이런, 잘못했군요. 비를 내리게 하다니.”
아차, 환자! 제레인트는 날뛰던 동작을 멈추고는 다급하게 길시언에게 다가왔다.
“아, 이런! 괜찮으십니까?”
샌슨의 것이라 엄청나게 큰 망토를 둘러쓴 길시언은 파랗게 질린 얼굴이었지만 힘들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아, 괜, 괜찮습니다. 쿨럭! 어, 어쨌든 저 지경이 되었으니 후작의 졸개들은…………, 쫓아오기 힘들겠군요. 다행, 커허험! 쿨럭쿨럭! 다행입니다. 그럼 어서 출발하지요.”
그리고 길시언은 망토를 벗으며 샌슨의 팔을 밀어냈다.
“난 괜찮으니까…………, 어서 갑시다, 샌………….”
샌? 그거 애칭인가? 그게 아니었다. 길시언은 뒷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무릎을 꿇어버렸다. 철퍼덕. 레니가 비명을 질렀다.
“기, 길시언 왕자니임!”
“이런, 길시언!”
맙소사! 길시언은 무릎을 꿇은 채 헉헉거리더니 곧 숨이 끊어질 듯한 기침을 해대었다. 쿠울럭, 쿨럭 어커허허험! 그의 입에서 핏방울이 튀기 시작했 다. 땅을 적시는 빗물 위로 핏방울은 불길하게 번져나갔다. 제레인트와 샌슨이 황급히 그를 일으켜세웠지만 길시언은 다리가 풀려버렸는지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칼은 에델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부상이 완치되신 것이 아닙니까?”
에델린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샌슨은 길시언을 안았고 제레인트는 급히 두 손을 모으더니 길시언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에서 하얀 빛이 떠 올랐고 길시언의 젖은 옷에서는 하얀 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길시언은 기침을 멈추었지만 샌슨의 품 안에서 맥없이 늘어져 있었다.
에델린은 낮게 말했다.
“사실 그렇습니다. 상처는 치료되었지만 폐 안에 혈액이 남아 있을 겁니다. 그래서 기침을 저렇게 하시는 겁니다. 울혈 때문에 폐수종 증세가 일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심장이 점점 압박될 겁니다. 그래서 요양을 말했던 것입니다.”
에델린의 침착한 설명은 듣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을 파랗게 질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칼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 폐수종 때문에 다리가 풀린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에델린은 얼굴을 찌푸리더니 손을 로브 자락 속으로 집어넣었다. 다시 나온 그녀의 손에는 쿼럴이 들려 있었다. 으응? 길시언을 저격했던 그 쿼럴인 가? 그런데 쿼럴을 보고 있던 칼의 얼굴이 허옇게 변했다.
“설마? 그 화살을 보관하고 있으셨다면………….”
“예. 해독제를 만드는 데 쓰려고 보관하고 있었지요.”
“이런! 독화살이었군요!”
히익? 독이라구? 샌슨은 놀라서 길시언을 놓칠 뻔했다. 네리아를 매달고 있던 운차이는 눈살을 꿈틀거리더니 휘적휘적 걸어왔다. 그는 네리아를 번 쩍 들어 떼어내서 옆에 세워놓으며 말했다.
“이제 천둥 안 친다. 벼락도 안 친다. 비만 온다. 알았지?”
“아, 아, 알았어. 훌쩍, 비만……, 온다. 크응.”
네리아는 벌벌 떨었지만 간신히 두 다리로 섰다. 하지만 그녀는 불안하게 좌우를 돌아보았고, 결국 자기 가슴까지나 올까말까한 엑셀핸드에게 답삭 안겼다. 엑셀핸드가 뒤로 넘어가는 모습을 못 본 체하며 운차이는 에델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쿼럴 좀 보여주겠습니까.”
에델린이 쿼럴을 건네자 운차이는 빗물을 피해 조심스럽게 쿼럴을 관찰했다. 그는 쿼럴을 코 끝에 대고는 냄새를 맡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는 혀를 내밀더니 쿼럴 끝을 핥았다. 엑셀핸드를 깔아뭉개고 있던 네리아는 그 광경에 기절하려고 들었고 칼은 숨막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운차이 씨?”
“퉤!”
운차이는 재빨리 침을 뱉더니 얼굴 근육을 경련시켰다. 그는 화살을 다시 에델린에게 돌려주면서 좀 불명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싸구려군. 혀가 얼어붙으려 하는데.”
“운차이 씨, 괜찮은 겁니까?”
“교육받을 때 항독 처치도 받았으니까. 난 여러 가지 독에 대해 면역이오.”
“아, 예. 그런데 싸구려라는 것은 무슨 뜻인지?”
운차이는 칼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얼굴을 찌푸리더니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그는 말했다.
“이봐, 길시언. 내 말에 대답해. 시야가 흐려지거나 하지는 않아? 호흡은 어떤가?”
근심스러운 시선 속에서 길시언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올리면서 말했다.
“시야는 괜찮아………. 호흡은…………, 가슴이 아픈걸. 쿨럭!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는 것이…………, 안타까운데.”
웅웅웅웅웅! 프림 블레이드가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운차이는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가슴 아픈 건 폐를 맞아서 그런 거니까 괜찮아. 다리가 풀리는 것은 독 때문에 생긴 일시적인 마비일 것이다. 네가 맞은 건 싸구려 화학독이 다. 후작이 암살자나 간첩이 아닌 바에야 생물독 같은 건 못 구하지. 걱정 마. 시야도 괜찮다면, 죽지 않아. 그런 독에 숨 넘어가면 가만두지 않겠어.” 어째 앞뒤가 맞지 않는 듯한 협박에 길시언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고맙군.”
운차이는 길시언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건강한 몸이니까 어떻게 버틸 거요. 일단 이 비를 어떻게 하지. 에델린?”
에델린은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아, 다시 바꾸는 것은………….”
운차이는 시간 낭비할 필요 없다는 듯이 빠르게 말했다.
“알겠소. 기주가 문제겠지. 그럼 옮깁시다. 후치? 네가 길시언을 업고 가운데 서라. 나와 샌슨은 뒤를 경계한다. 저 지경으로 만들어놨으니 후작 패 거리들이 따라붙으려면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네리아와 엑셀핸드, 칼이 앞을 맡고. 비가 없는 곳에 가서 길시언을 눕혀놓고 생각하지.”
“알았어요.”
샌슨이 길시언의 갑옷을 벗기고는 조심스럽게 내 등에 업혀주었다. 길시언은 맥없이 내 등에 뺨을 붙였다.
“수고하는군, 후치. 쿨럭!”
“하하! 수고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OPG가 있는데요, 뭘. 아주 가벼워요. 걱정 마세요!”
길시언은 쿨럭거렸을 뿐 대답은 없었다. 정말 내 말이 기운차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확실히 별로 무겁진 않았지만 체구가 좋은 사람이라 업고 균형 잡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난 기운차게 그를 추슬러올리며 말했다.
“자, 출발하지요!”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비에 젖은 산비탈은 걸어다니기 곤란했지만 모두들 망토나 후드 등을 머리에 눌러쓰고 조급하게 걸어갔다. 흙탕물이 철벅거리는 소리, 거친 호흡소리, 때때로 발이 미끄러지면서 들려오는 짧은 비명소리.
그리고 길시언의 호흡소리.
싸르르르. 얼굴에 와서 감겨드는 빗방울 소리는 미세한 은가루를 철판에 떨어뜨리는 듯하다. 그 사이로 들려오는 가냘픈 호흡소리. 시이익, 시이익. 길시언은 젖은 얼굴을 내 목 뒤에 기대고 있었고 그래서 난 그의 호흡을 그대로 전달받을 수 있었다. 가냘팠다. 고요한 달밤, 가장 약한 바람이 가장 가녀린 갈대를 간지럽힌다면 이런 소리가 들려올까.
프림 블레이드의 울음소리. 웅웅웅웅웅. 길시언이 꿈틀거렸다.
“그래…………… 괜찮아. 이 녀석아. 네 울음소리는, 쿨럭! 이렇게 오랫동안 들었는데도 왜 정이 안 드는지. 쿨럭, 쿨럭! 응? 아………….., 뭐 그렇게까지야. 하하 하. 손? 손이 없는 대신 멋진 칼날이 있잖아………, 괜찮아. 안 죽어.”
길시언이 한 손을 내리는 바람에 균형이 흐트러져 자칫하면 미끄러질 뻔했다. 다시 발을 골라딛으며 빠르게 걸어간다. 옆에선 레니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길시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버린다. 나는 앞쪽에서 부산하게 걷고 있던 엑셀핸드의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크라드메서는, 많이 남았어요?”
엑셀핸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며 말했다.
“이 속도라면 약 30분 정도.”
“좋아요.”
입술에 부딪히는 빗방울 때문에 숨이 가쁘다. 후우욱. 하지만 쾌활하게 말한다.
“길시언! 들었죠? 이제 30분이래요. 30분만 있으면 돼요. 불편하지 않아요?”
“업혀가는 중이잖냐. 쿨럭, 나야 편하지. 킥킥킥. 어째 우습다는 생각이, 어쿠르, 어허허흠!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우스워요? 뭐가요?”
“이 나이에…………, 내 나이 반쯤 되는 꼬마에게 업혀다니는 것.”
“하하하! 미리 경험해 보는 것도 좋죠. 길시언.”
“미리 경험해?”
빗물이 눈에 들어갔어. 칫. 눈물이 나오잖아.
“예. 길시언이 이 다음에 결혼을 하고, 그래서 아들도 얻고……………, 그리고 많은 세월이 지나면, 그땐 말이죠. 장성한 손자들이 거동이 불편한 길시언을 업어주겠지요?”
“하, 하, 하하하.”
길시언의 몸이 들썩거렸다. 비에 젖은 그의 몸이 묵직하게 내게 달라붙었다.
“그러니까 미리 경험해 보는 거죠.”
“장성한 손자가…………, 쿨럭. 날 업어주려면, 도대체 몇 살까지 살란 말이냐.”
“50년만 기다리면 충분할 듯한데요? 어라, 많이 남지도 않았네요?”
“그래그래. 하하, 하. 얼마, 클, 크르, 얼마 안 남았구나. 조만간, 조만간 너 같은 손자녀석 하나 가질 수 있겠구나.”
“나 같은 손자? 그렇다면 늘그막에 찾아온 행복인 거죠.”
샌슨은 갑자기 속이 거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가 이상해? 누누이 강조하지만 내 입은 진실을 단속하는 데 있어 취약하단 말씀이야.
비에 젖은 앞머리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또르르. 발에 부딪힌 돌멩이가 굴러가다가 고인 물을 튀긴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 때문에 산들의 장 엄한 머리들은 비의 장막 속으로 사라졌다. 주위는 온통 회색. 그리고 발 아래로 운무가 널리널리 퍼져 있다. 마치 하늘 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제부턴 내리막길이야. 조심들 하게. 구름이 꽉 끼여 있으니 앞 사람 잘 보고 따라오라구.”
엑셀핸드가 그렇게 말하며 산허리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행들은 희뿌연 안개 속을 걸어갔다.
안개는 산 아래에서 피어올라 주위를 온통 뒤덮었다. 보이지 않던 곳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검은 나무들, 그리고 미끄러운 풀잎. 바로 앞을 걸어가는 아프나이델의 모습은 명확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 앞을 걸어가는 네리아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이미 흠뻑 젖어서 빗물은 머리 속으 로 스며들지도 않은 채 그냥 흘러내렸고 하얗게 꿈틀거리는 주위의 풍경은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꿈속의 인물들처럼 보였다. 에델린의 거대한 체구는 안개 속에서 더욱 거대하게 보였지만 엑셀핸드의 모습은 더 작아 보였다. 희한하네.
“축축, 답답, 찝찝.”
네리아의 투덜거림이 이상한 울림과 함께 들려왔다. 안개 속이라서 그런 건가?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안개가 갑자기 사라졌다.
우리들은 넓은 분지의 초입에 들어와 있었다. 엑셀핸드의 턱까지 올라올 정도로 높이 자란 풀들은 겨울이라 노랗게 말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젖어서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다. 빛나는 시체…………. 갑자기 말도 안 되는 말이 떠오른다.
머리 위로 내려온 구름 때문에 분지는 한없이 넓어 보였다. 좌우론 갈색 산맥의 험준한 봉우리들이 있을 것이 뻔하지만 지금 그 봉우리들은 모두 구 름 속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반대쪽으로 아스라하게 먼 곳에 커튼처럼 늘어선 절벽의 모습이 보였다. 회색의 하늘 아래 거뭇한 환상처럼 보였다.
누가 뭐라 말하지 않았어도 일행의 발걸음이 모두 멈춰졌다. 샌슨이 입을 열었다.
“저기. 저 절벽이야. 동굴이 있다면, 그러니까 커다란 동굴이 있으려면 저기 저 절벽이지. 그리고 충분히 넓은 평지. 좋은 조건이지.”
“그, 그럼 여기, 이 분지가, 분지가…………….”
네리아가 더듬거리며 차마 꺼내지 못하던 말을 운차이가 매듭지었다.
“크라드메서의 앞마당.”
운차이의 말을 끝으로 모두들 일렬로 늘어선 채 눈앞에 펼쳐진 평야와 거뭇한 절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찌푸린 하늘에선 이제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른 풀잎에 빗방울이 튀어 투명한 물가루들이 뽀얗게 튀어오른다. 젖을 대로 젖은 머리카락은 관자 놀이에 달라붙어 미끄러지고 있다.
“내려다오.”
“길시언?”
“괜찮으니……, 내려다오.”
“난, 난 괜찮은데요. 무겁지 않아요.”
“내려.”
길시언을 내려놓았다. 샌슨과 제레인트가 그를 부축하려고 다가갔으나 길시언은 손을 들었다. 그는 다시 고집스럽게 스피어를 잡아 짚고는 꼿꼿하 게 섰다. 이마를 타고 내리는 빗물이 창백한 그의 입술을 적신다. 길시언은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말했다.
“어커험…………. 마침내 왔군요.”
칼이 그에게 다가갔으나 길시언은 그를 보지도 않았다. 그는 아스라한 절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칼이 그를 불렀다.
“길시언.”
칼의 부름에 길시언은 퍼뜩 정신을 차리는 표정이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쉬더니 잔기침을 했다. 일행들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가슴 을 펴며 말했다.
“레니 양.”
“예, 예? 왕자님?”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쿨럭, 큭. 힘든, 힘든 여정이었을 겁니다.”
“예? 아…………, 저, 그런데요. 전, 에, 저로선 그러니까, 모르겠어요. 제 나이 정도의 계집애가 이런 대모험을 한다는 것은 드문 일일 거잖아요? 데려다 주시고, 에, 그리고 보호해 주신 여러분들이 고마워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이젠 더 도와줄 수 없습니다.”
“예?”
레니는 동그란 눈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스피어를 목발처럼 짚은 채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려 애쓰며 말했다.
“우리들 중 아무도, 쿨럭, 아무도 라자는 아닙니다. 사실상 우리들은 드래곤과 라자의 계, 어흠! 계약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저, 저도 모르는데요?”
“예. 하지만 크라드메서가 알 겁니다. 그러니 방식이나 절차를 모른다고 거, 걱정할 일은 없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쿨럭. 레니 양의 마음가
“짐입니다.”
“마음가짐………….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무슨 일이 일어나든, 레니 양이 주체라고 생각하십시오. 크라드메서는 사, 쿨럭, 사실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볼일이 없습니다. 크라드메서가 과, 관 심 있어 할 사람은 오직 레니 양뿐입니다.”
“예…….”
대답하는 레니의 눈은 불안함으로 가득했다. 길시언은 힘들게 숨을 고르며 더 말하려 했지만 칼이 재빨리 말했다.
“길시언이 말하고자 하는 뜻은 이렇습니다, 레니 양. 크라드메서라고 해도 라자의 계약을 함부로 무시하지는 못할 겁니다. 저 지골레이드의 일을 기 억할 테지요?”
“예? 아, 예.”
“지골레이드도, 웜링을 잃었던 그 슬픔 속에서도 레니 양을 존중했습니다. 인간이라면 그것은 어렵겠지요? 자식이 죽었는데 계약 같은 것을 하고 있 을 경황은 없겠지요. 하지만 드래곤은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 절대로 겁을 먹거나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감을 가져요. 크라드메서는 레니 양을 존 중할 겁니다.”
칼의 말이 끝나자 길시언은 파리하게 미소지었다.
“아, 내, 내가 하고 싶은 말 그대로입니다.”
레니는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왕자님.”
길시언의 미소가 더 밝아졌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길시언입니다. 레니 양.”
레니는 갑자기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하? 다부진 표정이 갑자기 저렇게 바뀌니 그거 귀엽네. 그녀는 검지손가락을 깨문 채 길시언을 올려다보 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저, 버릇없다고 하지 마세요. 왕자님이라고 부르고 싶은데요.”
길시언은 고개를 갸웃했으나 칼이 먼저 끼어들었다.
“왜지요, 레니 양?”
“독수리가………….”
레니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고 칼은 미소를 지으며 길시언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길시언은 하얀 웃음을 지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그에 따라 우리들도 모두 하늘을 바라보았다.
회색 하늘을 검게 재단하는 독수리가 보였다. 길시언은 깊은 눈길로 독수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역시…….”
“예?”
“쿨럭, 역시, 난 엉터리 방랑자인 모양입니다. 레니 양마저도…………, 알아보는군요. 하지만 이 일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쿨럭, 길시언으로 남고 싶습니다.”
그래. 당신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왕. 우핫하하! 난 너무너무 눈이 정확해. 일행은 모두 미소를 지었고 길시언은 말했다.
“난 길시언으로 여러분을 만났고, 최소한 이 모험의 마지막까지는, 크험! 여러분의 길시언이고 싶습니다.”
칼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길시언의 뜻을 존중하지요. 사실, 그건 제 뜻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차이는 피식 웃어버렸고 덕택에 샌슨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던 것은 나 외엔 아무도 못 봤다. 으으윽. 샌슨에게 설명이라도 해줘야겠군. 난 길시언에게 심술궂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길시언?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어요?”
길시언은 의아한 표정으로 날 보더니 말했다.
“화낼 일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그래?”
난 대답 대신 노래를 시작했다.
방에 못질을 하고 떠났던 왕자.
못질은 왜 했지? 왜 했을까?
돌아가야 되는 왕자.
방랑자의 먼지는, 어울리지 않았던 선택.
길시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아프나이델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긍휼한 사람들에 눈시울을 적셨지.
눈물은 왜 흘리지? 왜 흘릴까?
이바지해야 되는 왕자.
버리고 떠나도, 가슴은 그대로 남겨두었으니.
바이서스의 적에게 가장 뜨거운 분노.
검날은 곧다. 시리도록 푸르게
꺾일 줄 몰랐던 왕자.
방랑자의 신발엔, 그를 담지 못하네.
창공에서 들려오는 독수리의 소환에
잊혀졌던 모습이 떠오르네.
돌아오라, 돌아오라!
용기로 검을 쥐고 지혜로 방패 들어
왕자여, 돌아오라!
그대 마음 깃든 그곳으로!
아프나이델은 얼굴을 온통 찡그리며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었지만 제레인트는 그냥 웃었다. 길시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쿨럭. 제목이 뭐냐?”
“황소와 마법검의 왕자를 위해.. 부제로는 ‘바이서스 왕가 300년의 역사에서 가장 웃기는 가출을 했던 한 왕자를 그리며.’정도로 할까 하는데, 어 떻게 생각하세요?”
“……차라리 돌아온 탕아라고 붙이지 그러, 쿨럭! 그러냐.”
제레인트가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는 눈을 닦으며 말했다.
“하아, 하. 그럼, 그럼 이 일이 끝나시면?”
“돌아가서, 크르…………, 닐시언 전하를 도와볼까 생각합니다.”
제레인트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방랑자였을 때 멋있었던 것만큼 궁성에서도 멋있으실 겁니다.”
“고맙군요. 그런데 제레인트는 어쩔 생각이신지.”
“저요? 뭐, 평생 쓸 돈도 있겠다. 지금 당장으로서는 죽을 때까지 유람이나 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순간 일행들은 모두 의심스러운 눈으로 제레인트를 곁눈질했고 제레인트는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잠시 후 그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자신의 말 을 정정했다.
“유람을 빙자한 포교 생활.”
모두의 얼굴에 만족감이 떠올랐다. 하! 하! 아프나이델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헬턴트 분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실 거죠?”
칼이 ‘헬턴트 분(어흠!)’을 대표해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럼 전 이 일이 끝나면 제레인트 씨를 따라다녀야겠군요. 마법 수행을 계속하고 싶으니까.”
다른 사람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제레인트가 먼저 외쳤다.
“좋습니다! 우리, 핸드레이크처럼 300년쯤 후에 수많은 일화로써 후대인들을 헷갈리게 만들 팀을 만들어봅시다! ‘잠에서 깨어난 미친 드래곤을 진 정시키며 그들의 첫 번째 모험이 시작되었다………….., 어떻습니까?”
“하하하…….”
아프나이델은 난처한 웃음을 지었지만 제레인트는 두 번째 모험으로는 발러를 때려잡으러 아비스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을 꺼내어 아프나이 델로 하여금 제레인트와 팀을 결성하는 데 의구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샌슨은 고개를 돌려, 항상 그렇듯이 일행에게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묵묵히 서 있던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야, 괴물 눈알? 넌 어쩔 생각이냐?”
운차이는 콧김을 팅 뿜어내더니 낮게 말했다.
“눈앞의 일이나 끝내고 이야기하지.”
“녀석은, 정 떨어지게시리. 말하는 데 시간 얼마나 걸린다고.”
운차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두들,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려고 미적거리는 거, 이해는 하지만 어리석다.”
일행은 불편한 눈으로 남부의 전사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정말 더 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해. 후작은 입에 거품을 물고 쫓아오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길시언은 빨리 일을 끝내고 치료를 받아야 한 다. 어서들 움직이지.”
엑셀핸드가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운차이의 말에 대답했다.
“네놈 혀엔 독이 묻어 있지만 지금 말은 마음에 드는군. 어서들 움직이지, 인간 친구들. 아, 트롤 성직자분도.”
에델린은 미소를 지었고 길시언은 말했다.
“갑시다.”
일행은 출발했다. 엑셀핸드를 위해 나와 샌슨이 앞으로 나서서 긴 풀을 밟아 쓰러뜨리며 길을 냈다.
잠시 와삭거리는 소리와 물방울 튀는 소리, 풀숲 속에 생겨나 있던 물웅덩이에서 들려오는 첨벙거리는 소리만이 고요한 주위에 습기 어린 색채를 더 했다. 그렇게 얼마쯤 걸어갔을까.
“이 일이 끝나면, 너희 북부 놈들처럼 연애나 한번 해볼까…………….”
갑자기 들려온 운차이의 중얼거림에 칼은 기절할 듯한 표정을 지었고 나와 샌슨은 풀밭을 뒹굴며 웃었다.
“우힛히히힛!”
“우켈켈켈켈!”
그런데 왜 운차이가 아니라 네리아가 웃고 있는 우리들을 죽일 듯이 쏘아보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