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8권 – 제14부 : 정답이 없는 선택 8화

드래곤 라자 8권 – 제14부 : 정답이 없는 선택 8화

8

“제, 제발 조심햇! 드래곤은 시력이 좋다구!”

샌슨의 고함소리에 무심코 일어났던 네리아는 기겁하며 웅크리고 앉았다.

“뭐, 뭐가 발 밑에서 꿈틀거렸단 말이야!”

네리아가 가리키는 곳에는 젖은 나뭇가지 하나가 구르고 있었다. 난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젖어서 나뭇가지가 미끄러진 모양이네요. 그런데 드래곤의 청력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샌슨처럼 떠들면 겨울잠 자는 뱀이라도 알아듣겠는데.” “아, 아차! 그래. 모두들 입도 다물자.”

샌슨은 자기 입을 틀어막는 시늉을 하더니 다시 앞으로 나섰다. 나와 샌슨, 그리고 네리아는 정찰조로 크라드메서의 레어를 찾아보기 위해 일행보다 앞서서 달려나왔다. 일행들은 길시언과 함께 뒤에서 천천히 걸어올 것이다. 네리아는 울상이 되어 말했다.

“씨잉. 아프나이델이 있잖아. 그냥 마법으로 팍! 드래곤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면 되는 거 아냐?”

샌슨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야. 핸드레이크가 드래곤 로드를 암살하러 갈 때 마법으로 드래곤 로드를 찾아냈냐?”

“무슨 말이야?”

“크라드메서도 드래곤이니까 결국 마법사라고 보고, 그렇다면 아프나이델과 크라드메서 중에서 누가 더 우수한 마법사겠냐? 아무래도 크라드메서 겠지? 그렇다면 실력이 더 떨어지는 마법사가 고위 마법사를 추적하려고 들면 그 추적 자체에서 역탐지를 당할 빌미를 만들게 된다구.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와? 샌슨 맞아?”

“크아아악!”

“땅 속의 뱀, 땅 속의 뱀!”

“아, 아차!”

일행들이 우리를 못 보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정찰조’냐? 전쟁놀이 하는 어린애들이라도 우리들보다는 더 군사적으로 훌륭하겠 는걸. 어쨌든 우리들은 다시 손이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히고는 풀숲 사이를 조용히 헤치며 나아갔다.

잠시라고 말하기엔 길고, 한참이라기엔 짧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샌슨은 멈추었다.

“절벽이 가까운데.”

우리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눈만 풀 위로 내민 채 절벽을 바라보았다. 이제 절벽과의 거리는 약 500큐빗 정도? 비에 젖은 절벽은 초점을 맞추어보 기 어려울 정도로 시커멓게 보였다. 네리아는 감탄하는 표정으로 절벽을 바라보았다.

“햐. 이거. 꼭 드래곤 로드가 있던 그 절벽 같다?”

흐음. 그러고 보니 정말 대미궁이 있던 영원의 숲의 그 절벽과 비슷한 정도의 크기……… 아냐. 그것보다는 조금 작다. 하지만 낮은 하늘 때문에 정말 거대하게 보였다. 특히 좌우로 뻗은 절벽의 폭은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절벽을 관찰하던 샌슨은 한숨을 쉬었다.

“어디 보자. 쳇. 뭐가 보이냐, 후치?”

“별로. 온통 시커먼 절벽, 그리고 시커먼 하늘밖엔 안 보이는데.”

샌슨은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쳇…………. 만일 내 예상이 틀리면,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결론인데 말이야.”

뭐야? 어라. 그거 정말 그렇네. 이젠 최후의 순간이라서 시간이 없으니 과오를 시정할 수도 없는데. 난 코를 쓱 닦고 말했다.

“괜찮아. 샌슨의 예상이 맞을 거야. 아직까지 단정하진 말자구.”

“뭐가 보여야 확신을 가지지. 이건 온통 시커먼 바위밖엔 안 보이는데.”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네리아가 절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온통 까맣잖아. 동굴이 있어도 잘 안 보이겠는데. 구름도 심하게 끼여 있고.”

“더 접근해 보자.”

샌슨은 다시 허리를 숙인 채 걸어나갔다. 다시 풀 헤치는 단조로운 소리만이 미약하게 들려왔다. 이미 옷은 젖을 대로 젖어서 젖은 풀잎이 오히려 따

스하게 느껴질 정도다. 네리아는 다시 불평했다.

“추워.”

샌슨은 멈칫하더니 다시 나아가며 말했다.

“나도 떨리긴 해. 하지만 추위 때문은 아냐.”

흐음. 난 추위와 크라드메서 양쪽 때문에 두 배로 추운데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떠오르는데, 크라드메서의 음식물에 대한 매너는 어떨까? 인사는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누구요?”

인사로서는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인사다. 목소리 자체도 별 감정이 없이 무색에 가까운 음조였다. 샌슨은 기겁하면서 일어나 칼자루를 움켜쥐었으 나 뽑아들지는 않았다. 나도 손을 어깨로 가져갔다가 다시 내려버렸다. 얼이 빠져 있던 우리들을 대신해서 네리아가 말했다.

“누구냐고 묻는 당신은 누구죠?”

우리 앞 20큐빗 정도의 거리에서 바위 위에 앉아 있던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자는 간단한 가죽 갑옷을 입고 있는 모범적인 전사의 모습이었다. 마치 긴 여행 도중에 잠시 노변에 앉아 쉬고 있는 듯한 피로한 모습이었다. 걸치 고 있는 옷은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흠뻑 젖어 있었고 그 수준에서는 나나 샌슨보다 오히려 더 떨어지는 정도였다. 가죽 갑옷은 어찌나 낡았는지 가죽 이 옷감처럼 보일 정도였다. 바위에 기대놓은 거대한 투 핸드 소드가 잠시 눈을 끌었을 뿐 무장도 그렇게 화려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사를 자세 히 바라보자 곧 놀라움이 다가왔다.

전사는 샌슨과 거의 비슷한 체격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4큐빗은 넘을 듯한 신장. 긴 다리를 마음대로 집어던진 자세로 앉아 있었지만 그 다리라 는 것이 네리아의 허리보다는 확실히 굵은 것이었다. 네리아도 그 사실을 알아채고는 감탄했다.

“세상에! 하늘 아래 저런 인간이 또 있네?”

“무슨 뜻이야?”

샌슨의 질문에 네리아는 현기증을 느끼는 모양이다. 하지만 난 다른 것을 보면서 현기증을 느꼈다.

전사의 발치에는 거대한 시체가 누워 있었다.

처음에 전사의 막강한 체구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것은 전사의 발치에 있는 그 거대한 시체 때문이었다. 6큐빗은 되고도 남음이 있는 거대한 체구가 비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주위의 풀들에는 그 몸에서 튄 듯한 핏방울들이 비에 젖어 기괴한 무늬를 그리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거였다. 도대체 뭐로 어떻게 공격하면 저 지경이 되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오거의 허리는 처참하게 뜯겨 나갔는데 자상이라고 보기엔 상처가 너무 거칠다. 투 핸드 소드로 후려치고 다시 그 상처를 모닝스타 같은 걸로 짓이겨놓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머릿속으로 끔찍한 상상이 지나 갔다. 하지만 투 핸드 소드는 있지만 모닝스타는 없는데.

“내가 먼저 질문했으니까 먼저 대답을 듣고 싶소만.”

그런데 그 목소리 정말 신경 쓰이네. 뭐라고 특징을 잡아 설명할 수 없는 희한한 무색의 음색. 네리아는 샌슨을 바라보았다. 비슷한 사람끼리 대화하 라는 듯한 그 시선에 샌슨이 말했다.

“우리는 크라드메서를 만나러 온 사람들입니다만. 그런데…………… 그 오거는 당신 작품입니까?”

남자의 얼굴에 순간 의아한 표정이 지나쳤다. 그는 샌슨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했다.

“크라드메서?”

“예.”

“크라드메서를 만난다고?”

“왜? 이상합니까? 어라? 이, 이런!”

샌슨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크라드메서의 앞마당’이라고 샌슨이 짐작한 곳에서 태평하게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 그렇다면? 나와 네 리아는 실망이 가득한 눈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 여기가 아닌가?”

아이고 맙소사! ‘여기가 아닌가?’라구?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고생을 해가며 죽을 둥 살 둥 찾아왔는데 ‘여기가 아닌가?”라구? 그럼 끝인가? 구름 낀 하늘에 별이 보인다.

“이런, 웃기지도 않는 일이! 그렇게 오랫동안 걸어와서는 마지막에 엉뚱한 곳에 도착했다고?”

“아아, 실망!”

네리아는 주저앉을 듯한 표정이었다. 샌슨은 얼굴을 마구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아닌데…………. 여기 아니면 다른 장소는 불가능한데, 드워프들이 웨이크닝 사운드를 들었다는 걸로 봐선 이보다 더 먼 곳일 수가 없단 말이야. 이상한 데.”

그때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 그런데 크라드메서는 왜? 누구처럼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고 싶어서요?”

“어? 당신 크라드메서가 뭔지 압니까?”

샌슨은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남자는 어설픈 미소 같은 걸 지으며 말했다.

“알지. 그런데 당신은 항상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모양이군.”

“어? 아. 아닌데. 우리는 드래곤 슬레이어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아요. 잠깐,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그렇다면 저 절벽이 크라드메서가 있는 곳 이 맞단 말입니까?”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라드메서가 있었던 곳이지. 당신네들은 정확하게 찾아왔소.”

남자의 대답은 우리들을 크게 당황하게 만들었다. 샌슨은 입을 쩍 벌렸고 네리아의 얼굴은 하얗게 바뀌었다. 설마………… ‘누구처럼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고 싶냐.’고? 샌슨이 내가 꺼내고 싶었지만 차마 꺼내지 못하던 질문을 했다.

“당신이? 크라드메서를?”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당신이 크라드메서를 죽였습니까?”

남자는 다시 피로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저 강건한 모습, 피로해 보이는 얼굴. 그리고 크라드메서가 있는 곳에서 태평하게 바위에 앉아 쉬고 있다 면? 바닥에 쓰러져 있던 오거의 시체가 다시 한번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녕코 우리의 모험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가장 웃기는 결말을 맞이하고 만 것인가? 죽도록 고생해서 도착했더니, 세상에는 모험가들이 많고도 많아서, 그들 중 다른 모험가가 이미 크라드메서를 죽인 후였다. 뭐, 이런? 주 인공이 주인공 노릇을 해야 하는 옛날 이야기에서라면 기가 막혀 나오기 어려운, 하지만 자신이 역사의 주인이 아닌 현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있 는………….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죽이려고 들면 얼마든지 죽일 순 있지만, 그렇게 하진 않았소.”

이 남자 우리들의 정신을 어떻게 만들어버리려고 작정한 것인가? 죽이려고 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고? 난 남자에게 질문했다.

“당신은 크라드메서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구요?”

“물론. 자네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싶진 않지만, 세상에서 나보다 더 쉽게 크라드메서를 죽일 수 있는 자는 없다.”

“아, 아니. 우리들은 드래곤 슬레이어 같은 건 꿈꾸지 않아요. 우리들은 크라드메서와 라자의 계약을 하기 위해 찾아온 것인데요. 당신이 크라드메 서를 죽이지 않았다면, 크라드메서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죠?”

남자는 다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라자의 계약?”

“예. 우리는 크라드메서에게 드래곤 라자를 짝지어 주기 위해 죽을 고생을 하고 찾아왔습니다.”

“누가 라자인데? 내가 보기에 자네들 중에 라자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이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우락부락하게 생긴 전사에 풋내기 전사(실제 정체는 초장이 후보)에 나이트호크가 하나 있지만 라자처럼 보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겠지. 그때 샌슨이 오랜 당황에서 깨어나 고함을 질렀다.

“당신이 크라드메서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고?”

윽. 정말 질문 한번 빠르군. 나와 네리아는 창피스럽다는 표정을 지었고 남자는 혀를 차며 말했다.

“당신은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기로 서원한 전사인가? 그 대답은 이미 했고 내 질문은 이번에도 대답을 얻지 못했는데.”

그러나 샌슨은 남자의 핀잔에는 전혀 신경 쓰지도 않았다. 샌슨은 환호를 외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는다는 얼굴로 외쳤다.

“우리와 동행하지 않겠습니까?”

“동행?”

남자는 이제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난 샌슨의 팔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샌슨이 먼저 내 팔을 붙잡으며 빠르게 말했다.

“야, 야. 후치야.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어. 만일 크라드메서가 레니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크라드메서는 굉장히 위험하잖아? 그런데 저 전사는 크 라드메서를 죽일 자신이 있다잖아? 그렇다면 계약이 성공하지 못했을 경우 저 전사가 크라드메서를 죽이면 되잖아?”

난 조금 전 네리아가 했던 대답을 되풀이했다.

“샌슨 맞아?”

“무슨 뜻이야?”

“아, 아니. 그거 정말 말은 되는데. 하지만 저 사람 호언장담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다는 거야?”

“어? 어라? 그렇네. 네 말이 맞아!”

샌슨은 고개를 돌리더니 당당하게 외쳤다.

“이봐, 당신! 우리가 그 허황된 말을 믿을 것 같은가!”

으으윽. 정말 창피스럽다. 네리아는 나에게 눈짓을 보내었다. ‘놔두고 떠나자.’ 흐음. 정말 둘만 놔둬도 황당한 대화는 끝없이 잘 이어질 것 같긴 해.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말을 믿고 안 믿고는 당신의 자유야. 하지만 난 세상 어느 누구에 대해서라도, 설령 드래곤 로드의 앞이라 해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세상에 나보다 더 쉽게 크라드메서를 죽일 수 있는 자는 없소.”

샌슨은 다시 반가운 얼굴이 되었다.

“다, 당신이 크라드메서의, 그러니까 무슨 약점 같은 거라도 알고 있단 말입니까?”

남자의 얼굴에 순간 살벌한 미소가 지나쳤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고 싶소?”

그러나 샌슨은 그 살벌한 미소에 전혀 기죽지 않고 외쳤다.

“하하! 당신도 내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했습니다! 이젠 피장파장이지요?”

으윽. 네리아. 어서 놔두고 가지요. 덩치 큰 사람들은 다 저런가? 남자는 얼빠진 표정을 짓더니 이마를 딱 소리나게 쳤다.

“하하하. 이런 미안하게 됐군. 그래…………, 난 그의 약점 같은 것은 모르겠소. 그런데 미안하지만 당신 정체부터 정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당신네 들은 크라드메서와 라자의 계약을 하겠다고 말했는데, 내 식견이 모자라 그런지 몰라도 당신네들 중에 라자로 보이는 사람은 없는걸. 그런데 드래곤 슬레이어는 꿈도 꾸지 않는다고 하고.”

샌슨은 어깨를 으쓱이며 순순히 대답했다.

“아, 라자는 뒤에서 오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정찰을 위해 먼저 온 것입니다.”

남자의 얼굴에 반가움이 떠올랐다.

“그런가? 그럼 좀더 즐거움을 가져도 상관 없겠군.”

“즐거움?”

남자의 얼굴에 겸연쩍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의 웃음은 순진했다. 저 덩치에도 불구하고 그 미소가 순진할 수 있다니. 샌슨이 저렇게 웃는 것을 보면 속이 뒤집히고 말 거라는 생각이 떠올라서 나는 하마터면 폭소를 터뜨릴 뻔했다.

남자는 발치에 있던 오거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다시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오랜 습관이오.”

“오거를 죽이는 거요?”

샌슨, 제발! 나와 네리아가 샌슨에게서 한두 발짝씩 멀어지는 것을 보며 남자는 웃었다.

“아니. 대화 말이오. 원래의 나였다면 당신들을 보자마자 죽여버리는 것이 당연했겠지. 그게 순리이기도 하고.”

이번에는 샌슨도 ‘아, 그러셨군요.’하는 식의 대답은 하지 않았다. 우리 셋은 공포를 느끼면서도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남자는 바위에 앉은 모습을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말했다.

“미묘한 단어의 조합에서 느껴지는 감정, 말할 때 떨리는 눈빛, 상대의 마음속을 알 수 없어서 항상 불안하지만, 그래도 희망이 담겨 있는. 당신들처 럼 정감 있게 말하는 종족은 아무도 없지. 엘프의 대화에선 당신들 같은 불안감이 없어. 물론 지적으로야 가장 즐거운 대화 상대이긴 하지만. 오거? 욕지기나는 놈들이지. 오크나 드워프 따위는 말할 것도 없고.”

엑셀핸드가 여기 있었다면 배틀 액스가 날아갔을 거라는 망상을 하는 동안 남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오랫동안 잊었던 즐거움이지…………. 그가 있을 땐 항상 대화를 나누곤 했었어.”

오랫동안 잊었다고? 그것은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일까? 그리고 ‘그’라는 것은? 몸이 조금 전부터 무시무시하게 떨리고 있다. 난 침을 삼키며 눈앞 의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남자? 아냐. 이젠 다른 대명사를 사용해야 되겠지.

‘그것’은 웃으며 말했다.

“라자가 오고 있다면, 당신들이 라자의 동행이라면 내버려둘 수 있으니 다행이군. 괜찮겠다면 라자가 도착할 때까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샌슨도 드디어 눈치를 챈 모양이다. 그는 덜덜 떨면서, 그러나 아직껏 미심쩍음이 담겨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 당신이 가장 쉽게 크라드메서를 죽일 수 있다는 말은…………….”

‘그것’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자살보다 더 쉬운 살해는 없지. 상대가 도망가거나 반항할 일은 없지 않소.”

네리아가 도저히 더 참지 못하고 외쳤다.

“크, 크라드메서!”

크라드메서는 고개만 조금 움직여서 네리아의 말에 대답했다. 샌슨은 이를 악물었다.

“저, 정말 크라드메서입니까? 당신이? 그렇다면, 그렇다면 지금은 폴리모프한 거란 말입니까?”

그럼 폴리모프한 거지 뭐야? 샌슨의 저 쓸데없는 질문에 대해 크라드메서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아, 저……, 당신은 수면기에 있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혹시 오래전에 깨어났던 것입니까?”

최초의 경악이 사라지고 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충격을 잊기 위해 일부러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난 그냥 바위 위에 앉아 있 는 전사에게 말을 걸듯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사실 눈에 보이는 모습은 확실히 그렇다. 크라드메서도 드래곤이 인간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는 우연히 만난 여행자끼리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말했다.

“일어날 준비는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지. 자네들의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네. 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상태, 그러니까 조 악하지만 비몽사몽이라고 하는 말이 적절하겠군. 그런데 조금 전에 굉음이 들리면서 산맥이 크게 진동하더군. 그 순간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면서 또 하나의 생이 펼쳐지더군.”

진동? 아! 샌슨의 등 뒤에 숨어 있던 네리아가 탄성을 질렀다. 조금 전 제레인트의 활약 때문이었구나. 이런, 크라드메서가 이 일을 알게 되면 혹시 안면 방해로 우리들에게 화를 내진 않을까. 크라드메서는 빙긋 웃으며 자신의 발치에 있는 시체를 바라보았다.

“레어에서 나오는데 이놈이 내 보금자리로 들어오더군. 아마 내가 수면기에 접어든 동안 내 레어를 자기 보금자리로 쓰고 있었던 모양이야. 날 알아 보지도 못하고 공격하더군. 결국, 이번 활동기는 살해와 함께 시작하게 되었지. 좋지 않은 출발이야.”

좋지 않은 출발? 어어, 그거 정말 살벌한 말이다. 대단찮은 내용이지만 크라드메서가 말하니까 살벌하게 들린단 말이야! 샌슨은 턱을 심하게 떨다가 말했다.

“저, 화를 내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전 아직 믿기 어렵습니다.”

“내가 크라드메서라는 사실 말이오?”

“예? 예. 그렇습니다. 당신의 어투도 그렇고…………. 왜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하신 겁니까? 아무도 없는 이런 곳에서? 그래서 그 오거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겠지요?”

어라? 질문의 예리함이 번뜩이는 빛을 발할 정도인데? 크라드메서의 얼굴에 일순 희미한 슬픔 같은 것이 지나쳤다. 와! 진짜 인간이라도 저런 그럴 듯한 표정은 어려울 텐데? 크라드메서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표정을 지었다. 기분이 굉장히 이상한걸.

“그건 나의 추억 때문이오.”

“추억이오?”

“별로 설명하고 싶진 않소.”

크라드메서여. 당신은 알지 못할 테지요? 당신은 별로 설명하고 싶지 않다는 식으로 정중하게 대답해도 듣고 있는 우리들은 무시무시한 공포를 느 낀다는 것 말이야. 크라드메서는 질려서 아무 말도 꺼낼 엄두를 못 내고 있던 우리들을 주욱 훑어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당신들은 어떻게 날 찾아온 것인지? 왕가의 심부름꾼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아, 먼저 그걸 물어봐야 되는군. 올해가 몇 년이오?”

“예? 아, 예. 바이서스력으로 315년입니다.”

“그래? 바이서스력이라면, 바이서스는 아직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는 말이군?”

“예? 아, 예. 바이서스는 그대로입니다. 당신이 자칫 파괴할 뻔…………, 으악! 죄송합니다!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고, 에, 그러니까.”

샌슨은 손을 마구 휘저어댔고 네리아는 샌슨의 갑옷 등에 손톱 자국이 나도록 할퀴어댔다. 크라드메서는 잔잔하게 웃었다.

“그건 사실이었고 내가 한 일이니 부정할 필요는 없소. 그런데 315년이라…………. 그렇다면 겨우 21년인가.”

“예?”

“내 수면기 말이오. 흐음. 그럼, 아직도 바이서스가 왕가란 말이군?”

“예? 아, 예.”

“그래서 저 독수리께서 저렇도록 날고 계셨군.”

독수리? 아. 크라드메서도 독수리를 보고 있었군.

“창공의 제왕께서 지나치게 오랫동안 날아다닌다고 생각했지. 그분의 가피가 함께해야 될 사람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소. 그래서 왕가의 인물, 그것도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 찾아오고 있을 거라고 판단했소. 그런데, 당신네들 중에 누가 왕가의 사람이오?”

“아, 왕자님께서는 뒤에서 라자와 함께 오고 계십니다.”

“그렇소? 왕자라. 왕가에 왕자가 둘 있었지. 길시언과 닐시언이었던가. 길시언은 왕이 되었을 테고, 그렇다면 닐시언인가?”

“아, 아닙니다. 닐시언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셨습니다. 저희들과 함께 계신 분은 길시언 전하입니다.”

샌슨의 대답에 크라드메서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길시언이 왕이 되지 않았다고? 이상하군. 궁정 반란이라도 일어난 거요?”

“아뇨. 그런 일은 없습니다. 길시언께서는 왕위에 관심이 없으셔서 궁성을 나와 야인으로 계시는 겁니다.”

“그렇소? 그것 참. 똑똑한 왕자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왕위를 버리다니. 젊은 날의 치기인가.”

하마터면 ‘그렇습니다!’라고 외칠 뻔했다. 우리의 왕자님께서는 사실 왕위에 있어야 되는 사람이란 말이야. 어울리지도 않게시리 방랑자 흉내를 내 고 있지만, 크라드메서는 화제를 돌렸다.

“그렇다면, 길시언은 왕위에 돌아가기 위해 라자를 데리고 날 찾아온 것이오? 내가 닐시언을 왕위에서 쫓아내어 주길 바라는 것인가?”

“예? 아, 아닙니다. 에…………,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하하하. 그것 참.”

샌슨은 크게 당혹해서 웃어버렸고 크라드메서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이것 참, 어떻게 말해야 하지? ‘당신이 미쳤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라자를 붙 여주어 당신을 묶어두기 위해 왔습니다.’라는 내용의 말을 가장 불쾌함이 적은 방식으로 말하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네리아가 불쌍한 우리들을 구원했다.

“라, 라자가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네리아는 샌슨의 등 뒤에서 그렇게 외쳤고 크라드메서는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이보오, 레이디. 대답은 고맙지만, 그렇게 다른 사람의 등 뒤에서 말하지 말고 앞으로 나와서 말해 주는 것이 레이디다운 행동이 아니겠소?” 네리아는 겁에 잔뜩 질린 얼굴을 하고 걸어나왔다.

“네, 네리아입니다. 좋은 날씨죠?”

으윽! 굉장한 인사로군. 크라드메서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하늘을 보더니 곧 환한 얼굴로 말했다.

“아하! 레이디 네리아께서는 흐린 날씨를 좋아하시는 모양이군.”

네리아의 얼굴은 발개졌다.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당신들 예법에 어두웠군. 인간처럼 보이지만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다들 알고 계시겠지? 그러니 내 허물을 용서해 주시오. 난 크라드메서라 하오.”

“샌슨 퍼시발입니다!”

뺏겼다!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결국 난 드래곤 하나와 인간 세 명이 모인 자리에서 가장 예의에 어두운 사람이 되고 말았다.

“후치 네드발입니다.”

“네리아, 샌슨, 후치라. 그렇게 부르면 되겠지. 반갑소. 그런데 내가 라자를 필요로 할 것 같아서라고? 그건 아마 예의상 하는 말이겠지? 라자가 필 요한 것은 당신네들 인간이 아니오.”

크라드메서는 점잖게 네리아의 거짓말을 질책했고 네리아의 얼굴은 이제 단풍빛이 되었다. 그때 나는 샌슨이 굉장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아. 저 얼굴은 왠지 불안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전 이것을 물어보고 싶습니다. 당신을 만나면 꼭 물어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 도주 준비! 틀림없이 샌슨은 크라드메서를 화나게 만들 테고,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나다가, 결국 힘이 빠져 크라드메서의 브레스를 맞아 사망하게 될 테고, 대륙은 만신창이가 될 테고, 그 와중에 대륙의 모든 팬케이크는 새카맣게 타버릴 것이고, 양초는 모조리 다 녹아버릴 테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어떤 질문이오?”

“제 동료 중에 견식이 넓은 프리스트가 한 분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웨이크닝을 알게 되었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크라드메서가 어떤 드래 곤인데 벌써 활동기에 들어간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드래곤 라자의 존재를 느끼고 깨어나는 것일 것이다.”

“어머나?”

네리아는 기막힌 눈으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자기 말에 고개를 끄덕여가며 말했다.

“전 그 말이 사실인지 알고 싶습니다.”

허허? 놀랍다! 제레인트가 했던 말이야. 그래. 델하파로 가던 도중에 그가 했던 말이지. 샌슨. 사람 놀라게 만드는데? 크라드메서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샌슨은 그의 안색을 살피면서 계속 말했다.

“솔직히 너무 빠르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당신은 조금 전 당신이 수면기에 들어간 것은 겨우 21년 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드래곤의 일반적인 수면 기간은 대충 어떻게 되는 건지……?”

“나이에 따라 다르지만, 대충 활동기의 3분의 1 정도 되오.”

“그렇습니까? 그럼 크라드메서께서는 앞으로 얼마나 활동하게 되실지?”

“설명하지 않았소? 수면기는 활동기의 3분의 1 정도라구. 그러니까 앞으로 60여 년 정도 되겠지.”

샌슨은 당황해 버렸다. 크라드메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당신들처럼 수면 기간과 활동 기간이 일정하진 않소. 수면한 것만큼 활동한다고 생각하면 되겠군. 더 오랫동안 수면했다면 더 오랫동안 활동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의 내 생은 60여년 정도일 것 같소. 그리고 당신의 질문에 대해서는, 일단 긍정하겠소.”

긍정한다고? 샌슨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겨우 21년이라면 내 나이 정도의 드래곤으로서는 짧은 기간이지. 이렇듯 빠르게 의식이 돌아온 다른 이유는 모르겠소. 조금 전의 괴상한 진동은 내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하고 나서도 한참 후의 일이니 이유가 될 순 없고. 결국 내가 유피넬의 법칙에 따라 라자의 존재를 느낀 것이겠지. 다른 이유는 댈 수 없으니 그 이유를 받아들여야 할 듯하오.”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난 당신들과 함께 있다는 그 드래곤 라자가 유피넬이 정한 내 짝이라는 상상을 해볼 수 있겠군. 그 라자는 어떤 사람이오?”

샌슨은 웃으며 말했다. 흐음. 이젠 웃을 기분도 드는데?

“16, 7세 가량의 소녀입니다. 이름은 레니라고 합니다. 저희들이 대륙을 샅샅이 뒤져 간신히 찾아내었습니다.”

그렇게 우쭐한 얼굴로 말하면 꼭 진짜 같잖아, 샌슨. 샅샅이 뒤지기는 뭘. 이루릴이 알려줘서 간단히 찾아내었지.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러고 보니 300년의 기한이 다 지났군. 요즘은 라자의 혈통이 많이 부족하겠구려?”

“예.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이건 내가 지금껏 상상하고 있던 것과는 너무 다른데. 이렇게 평화로운 대화라니. 목숨을 걸고 찾아온 셈인데, 이렇게 허허거리며 반겨주 는 드래곤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단 말이야.

허허거리는 드래곤은 말했다.

“인간 여러분들의 심려가 크시겠소.”

으윽! 갈수록. 그리고 샌슨도 정말 심려가 크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라자의 혈통이 단절된 사태 때문에 참으로 불쾌한 사태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라자의 희귀성 때문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괴 이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요.”

크라드메서는 거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이해할 듯하오. 귀한 것은 탐욕을 부르고 탐욕은 재앙을 부르는 법이지. 보석의 희귀성 때문에 드워프와 드래곤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는 가 하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소.”

아아. 아무르타트도 저랬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가오는 여행자들을 따스하게 맞아주고 이렇게 우리들의 일에 신경을 써준다면! 네리아는 이제 불안 을 거의 잊은 얼굴로 크라드메서를 바라보았다.

“저, 크라드메서 님. 저번 라자가 죽은 일에 대해서는, 이제 화를 내시지 않으시는 건가요?”

아이고! 아무리 분위기가 평화스럽다고 해도 그런 질문을 하다니! 샌슨은 펄쩍 뛸 만큼 놀랐다. 난 네리아의 시선을 붙잡기 위해 온갖 눈짓을 다했지 만 네리아는 날 보지 않았다. 크라드메서는 네리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요, 레이디? 당신의 육친이 죽었다면 당신의 기분은 어떻겠소?”

“어머! 죄송합니다!”

네리아는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크라드메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네들은 모르겠지만, 그건 말이오. 육친의 죽음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일이오. 라자는, 바로 나요. 라자가 죽는 것은 내가 죽는 것과 마찬가지 요. 드래곤은 죽음에 대해 잘 몰라. 하지만, 하지만 라자가 죽을 때, 드래곤은 죽음을 경험해. 당신네들은 모르지.”

크라드메서의 음성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이마에 땀이 맺히는 것이 느껴진다. 이 날씨에 땀이라구? 크라드메서는 바위에서 일어났다. 맙소사, 미치 겠어! 저 덩치가 일어나는 모습은 무슨 산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샌슨이 움직일 때는 그런 느낌은 별로 없었는데? 아아! 크라드메서의 움직임은, 그 원래 정체의 중량감을 담고 있었다! 크라드메서는 똑바로 일어서더니 팔짱을 끼고 턱을 괴었다. 그는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그래. 절대로 모를 거야. 카뮤는 그러더군. 인간은 죽음을 알기 때문에 죽음을 잊고 산다고. 내일 죽을지도 모르면서 10년 앞을 내다본다던가? 그 래. 그러므로 당신들은 그걸 모를 거야. 자기의 한 부분이 완전히 죽어버리는 감각. 파괴되는 자신을 바라보는 감각 말이야. 알 리가 없지.”

네리아는 다시 샌슨의 등 뒤로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는 모양이다. 크라드메서는 우울한 눈으로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상상할 수 있겠소?”

네리아는 그만 굳어버렸다. 크라드메서는 왼손을 허리에 얹고 오른손을 얼굴 앞에 들어 손가락 하나를 펴보였다.

“당신들은 죽기 직전, 단 한 번밖에 느껴볼 수 없는 감각이야. 하지만 난 살아서 느꼈지.”

크라드메서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지기 시작하는 것은 대단히 불길한 어떤 사건의 조짐처럼 느껴진다.

“당신들도 느끼게 해줬으면 좋겠군.”

어, 어? 설마 바지를 적신 것은 아니겠지? 기어코 샌슨의 손이 칼자루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신들의 말로는 뭐라고 하던가…………, 끝내 준다고 하나? 정말 끝내 주는 감각이야. 하하하.”

웃었다! 크라드메서는 웃고 있었다. 샌슨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크라드메서를 바라보았다.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권장할 감각은 못 돼. 그 사건에 대해선 그만 말했으면 좋겠군.”

털썩. 크라드메서는 다시 바위에 앉았다. 비는 그쳤지만 내 몸에선 김이 풀풀 피어날 정도로 더운 땀이 흐르고 있었다. 크라드메서는 심드렁하게 말 했다.

“당신 일행들이 퍽 늦는군.”

“제가 보고 올게요!”

네리아는 고함소리만 남겨두고는 곧장 달아났다. 다행히도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네리아는 풀을 마구 헤치며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달려갔 다. 와사사사삭! 샌슨은 어이없는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크라드메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크라드메서는 입가를 일그러뜨리더니 곧 웃기 시 작했다. 그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허허허. 이런. 좋아. 그럼 함께 가도록 하지.”

“예?”

“당신 일행을 마중하러 가자는 말이오. 샌슨. 꼭 여기서 기다려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크라드메서는 바위에 기대어둔 투 핸드 소드를 들어올리더니 어깨에 턱 걸쳤다. 그러곤 성큼성큼 걸어서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샌슨과 나는 동시에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고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식으로 일행에게까지 걸어가려면 힘들지 않겠소?”

맞아. 뒤로 걸어갈 수야 없지. 샌슨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맞이해 주시겠다니.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그러시오.”

샌슨과 난 동시에 몸을 돌렸다. 순간 뒤통수가 선뜩해지면서 무작정 앞으로 달려가고 싶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욕구가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 고 싶다, 정말! 샌슨은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그럼, 갑니다.”

샌슨은 그렇게 말하고는 곧 걷기 시작했다. 음. 거창한 출발이다. 곧 나와 샌슨은 목 뒤의 털을 모조리 곤두세우고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여차 하면 앞으로 달려갈 듯한 자세로………… 볼품없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아아아, 이거 정말! 뒤에서 들려오는 둔중한 발자국 소리 때문에 머리끝이 모두 곤두설 것 같군. 분명 평화로웠는데 말이야. 네리아가 엉 뚱한 질문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참 따사로웠는데 이젠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시무시하군.

응?

따사로웠다. 따사로웠다? 이상하군. 언젠가 제미니에게 한 말이 있지. 드래곤 라자가 없는 드래곤은 인간과 아무런 의사를 나누려 하지 않고 보는 족족 죽여버리는 법이라구. 그런데 크라드메서는 왜 우리를 정겹게 맞아준 것일까? 그건 전혀 드래곤답지 않은 행동인데.

그것은…………!

머릿속이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미친 듯이 달려가고 싶은 느낌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도저히 발걸음을 떼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리에서 힘이 죽 빠져나가며 마치 쥐가 난 듯한 아픔이 느껴진다. 난 절망적인 눈으로 옆을 걷고 있던 샌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샌슨은 앞만 보면서 걸어가고 있었 다. 이 오거, 제발! 난 지금 엄청난 것을 알아차렸단 말이야! 제발 내 눈을 보라구! 하지만 샌슨은 뒤에서 걸어오는 크라드메서 때문에 고개를 돌릴 엄 두를 내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건 알려줘야 되는데, 이건!

크라드메서는 미쳤어!

그래. 크라드메서는 완전히 돌아버린 거야. 21년 동안 잠들었다지만 21년 전의 광증은 그대로 남아 있었어. 그래서, 그래서 인간을 마치 드래곤처 럼 대하고 있어. 어처구니가 없지. 저 완전한 종족이, 불완전한 우리들과 대화를 즐긴다고? 라자가 없으면 서로 대화도 안 되는 것이 우리 두 종족의 관계잖아? 그런데 조금 전 우리들은 라자도 없는 크라드메서와 대화를 나눴어! 그리고 네리아의 질문 때문에 일어났던 그 괴상한 감정의 변화, 그건 정신 질환의 증거야. 오, 맙소사! 우리는 미친 드래곤의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거라구!

안 돼. 이건 도저히 안 돼! 미친 드래곤을 우리 일행이 있는 곳으로 데려갈 수는 없어. 혹시 발작이라도 일으키면 어떻게 해? 멈춰야 돼. 하지만 어떻 게? 머리에서 김이 오르는 것 같다. 이루릴, 주전자와 머리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요?

몸을 돌리며 바스타드를 뽑고, 그리고 동시에 외쳤다.

“크라드메서!”

모든 것이 멈췄다.

순간적으로 분지 전체가 침묵으로 잦아드는 가운데 내 목소리만이 산울림이 되어 메아리쳤다. 난 초장이야. 하지만 초장이라도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샌슨은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고 싶은 동료를 둔 불행한 상황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후, 후치?”

난 바스타드를 크라드메서의 가슴에 겨냥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손이 너무 떨려서 칼끝이 고정되지 않았다. 크라드메서는 멈춰 서서 의아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았다.

“왜 이러는 거지, 후치?”

“난, 난 끔찍한 상상을 별로 좋아하진 않아요. 하지만 끔찍한 상상도 때론 도움이 될 때가, 그럴 때가 있지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 상상을 믿어봐 야 될 때가 있어요.”

“후치! 무슨 횡설수설을 하는 거야앗!”

샌슨은 날 잡아먹을 듯이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크라드메서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 크라드메서는 미쳤어. 나의 이 정신 사나운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니.

“무슨 상상을 한 거지, 후치?”

“굉장히 끔찍한 상상이죠. 난 당신의 정신이 이상할지도 모른다고 상상했어요.”

“불쾌한 말이군. 하지만 끔찍한 상상이라고 말했으니 용서하겠네. 그렇게 의심하는 이유는?”

침을 삼키려고 아무리 애써도 침이 고이질 않았다. 입 안은 바싹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왜 하필이면 비가 멈춘 거야! 지금 심정으로는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빗물이라도 받아마시고 싶은데!

“일단, 21년 전 당신이 광증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한 파괴 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어요.”

“그건 확실해.”

크라드메서는 순순히 시인했다. 입안은 말라가는데도 턱 아래로는 땀이 흐른다.

“그리고, 두 번째로 조금 전 당신과 우리들이 나눈 대화를 지적하겠어요.”

“그 대화의 내용 중 특별히 이상한 거라도 있었나?”

“아뇨. 대화 자체! 당신은 지금 라자가 없는 드래곤이에요! 그런데 우리 인간들과 당신이 ‘대화’를 나누었어요. 이건 도저히 설명할 수 없어요! 단 한 가지, 당신이 미친 거라는 설명 외에는!”

“으으읍!”

샌슨은 괴상한 숨소리를 내더니 뒤로 물러나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는 롱소드를 뽑아들고는 내 옆에 섰다. 크라드메서는 우울한 시선으로 샌슨을 바라보았고 샌슨은 날 향해 말했다.

“이거 너무 끔찍한 경우다만 어쩔 수가 없군. 네녀석이 꺼낸 말이니 네녀석이 끝까지 책임을 져라. 네 주장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든지, 아니면 틀리 다는 거라도 확실하게 증명해. 난 말 같은 거 잘 못하는 거 알지? 네게 맡기지. 하지만 네가 벅차할 경우엔 내가 도울 것이다.”

“알았어.”

난 크라드메서를 쏘아보며 말했다(솔직히 너무 힘든 일이었다. 구두장이 믹 더 빅이라면 또 몰라도, 초장이 후보 후치 네드발이 드래곤을 쏘아본다는 것은 바드들의 상 상력으로도 도저히 꿈꿀 수 없는 장면 아니야?).

“자, 내 주장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분명히 한 번 미쳤었고, 그리고 조금 전에는 정신 질환이라는 설명 외에는 설명이 안 되는 괴상한 행동도 보여줬 어요. 이제 묻겠어요. 당신은 정상입니까?”

크라드메서는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지금 이 순간에는 절대로 그의 얼굴에 떠올라서는 안 되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 다. 크라드메서는 기분 좋게 웃었다.

“하하하! 후치 질문이 잘못됐군. 내가 미쳤다면 미쳤다고 대답하겠나?”

“그, 그런가?”

샌슨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샌슨은 발악하듯이 낮게 외쳤다(샌슨은 그게 된다. 발악하듯이 낮게 외치는 거. 정말 존경스럽다).

“그런가라구? 야, 이 자식아! 그런가라구?”

“조, 좀 기다려봐! 날 믿고! 에, 그렇다면, 크라드메서. 당신 행동을 설명해 보겠어요?”

샌슨은 ‘널 믿을 바엔 낮에 나온 박쥐가 겨울 수박을 파먹는다는 이야기를 믿겠다!’ 등등으로 낮게 외치고 있었지만 나와 크라드메서는 한마음 한뜻 으로 샌슨을 무시했다. 크라드메서는 차분하게 말했다.

“이미 설명했는데. 오랜 습관이라고.”

“말이 안 되잖아요!”

“왜 말이 안 되지?”

크라드메서는 전혀 화를 내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좋아. 그럼 말을 이어나갈 분위기는 된다, 이거지?

“당신은 드래곤 아닙니까? 드래곤이 왜 우리들 같은 불완전한 종족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한다는 거지요? 당신은 그래도 어느 정도 완전에 가까운 종족이잖아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크라드메서는 조금 전부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표정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대답만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내가 미쳐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크라드

메서는 말했다.

“자네가 말하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왜 내가 자네들과 대화를 나누면 안 된다는 거지? 자네는 프리스트라는 사람을 알 테지. 프 리스트는 신과도 대화를 나누지 않는가. 그런데 드래곤이 인간과 대화를 나누면 안 될 까닭은 없을 것 같은데.”

어라? 왠지 칼이 말하는 거 같다? 정신 바짝 차리자.

“아니, 당신 말은 온당하지 못해요. 프리스트들은 신의 뜻을 펴기 위해 선택된 사람들이죠. 결과적으로 프리스트들은 갓 라자인 셈이지요. 우리 인 간들과 신을 이어주는 사람들이니까.”

크라드메서는 미소를 지었다.

“갓 라자? 그럴듯한 말이군. 후치.”

“그렇다면 다시 묻겠어요. 당신 행동을 설명할 수 있나요?”

“있을 것 같다.”

“그럼 해보세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야. 나 후치 네드발, 헬턴트 마을의 초장이 후보가 화염의 창, 이그누스 드래곤 크라드메서에게 검을 겨눈 채 할말 있으면 해보라는 식으로 윽박지를 수 있었다는 것. 바드들은 다 뭐하고 있는 거야? 지금 이 장면을 봐야 할 거 아냐? 크라드메서는 어깨에 걸쳐두었던 투 핸 드 소드를 내리더니 지팡이처럼 땅에 짚었다.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크라드메서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샌슨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끔찍하게 크게 들렸다.

“했던 대답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군. 습관이다.”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해 주겠어요?”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묻고 싶은 것?”

“자네들은 인간이야.”

‘고맙군요, 17년 만에 처음 알았어요, 내가 인간이었다니!’ 등으로 빈정거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크라드메서는 띄엄띄엄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난 드래곤이지.”

크라드메서는 고개를 조금 숙이면서 말했다.

“어쩔 생각이지?”

“예?”

“자네가 말한 대로 내가 미쳐버렸고, 21년 전처럼 모든 것을 파괴시키길 바란다면, 자넨 어쩔 거지? 자넨 인간이고 난 드래곤이다. 날 죽일 수는 없 을 텐데. 죽어서라도 날 막을 텐가? 결국 날 막지는 못할 테고 공연히 죽기밖에 더하겠나. 내가 정상이 아니라면, 어쩌겠다는 말이지?”

고개를 숙여버렸기 때문에 크라드메서의 눈을 볼 수가 없었다. 크라드메서가 정상이 아니라면? 난 크라드메서를 바라본 채 샌슨에게 말했다.

“샌슨이 살아나면, 제미니에게 미안하다고 전해 줘.”

잠시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시간이 흘러갔다. 바람은 풀을 간질여 기이한 소리가 나게 만들었다. 후우우웅. 히이이잉. 이윽고 샌슨은 딱딱한 목소리 로 대답했다.

“이하동문이다.”

“아니? 샌슨? 제미니에게 관심이 있었어?”

“그게 아니란 것 잘 알잖아!”

“하하하하!”

꼭 크라드메서 앞에서 이런 수준 미달의 대화를 나눠야 되나? 하지만 이게 헬턴트식이라구. 우린 별로 고상하지도, 고귀하지도 않아. 하지만 죽음을 비웃어줄 순 있지. 킥킥킥. 샌슨과 나는 시선을 교환했다.

우리 둘은 동시에 검을 세워들었다. 크라드메서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그 기나긴 여정 끝에, 결국 이렇게 둘이 서게 되는군. 레브네인 호수는 아름다웠고, 바이서스 임펠은 화려했지. 델하파의 항구의 바람은 우울했고, 영원의 숲은 신비로웠다. 대미궁은 외롭고 쓸쓸했지. 그리고, 그리고 우리 둘은 결국 여기까지 와서 이 시대 최고의 드래곤을 겨냥한 채로 서 있게 되 는군. 헬턴트 경비 대장과 헬턴트 초장이 후보는 동시에 말했다.

“그래도 막겠습니다!”

적막 속에 바람 한 올이 분다.

풀잎의 정수리들을 스치던 바람은 크라드메서의 주위로 다가와 잠시 지체하는 듯했다. 바람은 크라드메서를 존중하여 조용히 멈추었다. 다시 적막.

크라드메서는 말했다.

“왜지?”

샌슨은 빙긋 웃었다.

“우리 죽음으로 동료들의 도주 시간은 버니까요.”

그래. 어차피 살 수 없다면, 우린 앞을 가로막고 뒤를 생각할 도리밖에. 언제 어디서나 헬턴트 사나이들의 최후의 방식은 한결같지. 크라드메서는 고 개를 가로저었다.

“잘못 생각했소. 당신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너무 집착하는군.”

무슨 말이지? 그리고 다음 순간 폭풍이 몰아쳤다. 과과과과아 “으아악!”

쩡! 고막이 찢어지는 파열음. 쩡! 쩡! 그리고 눈을 뜰 수 없는 맹렬한 바람이 불어왔다. 벽에 부딪히는 느낌의 바람 때문에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내 엉덩이! 그 와중에도 파열음은 소름끼치게 들려왔다. 쩌엉! 풀잎들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올랐다. 위위위위윙! 풀조각들의 회오리가 피어올라 산 채로 난도질당하는 기분이 든다.

“이런!”

풀잎의 회오리는 상공 수백 큐빗까지 솟아올랐다. 분지 전체가 하늘을 그리며 날아오르려 드는 것 같다. 풀잎과 흙덩어리가 기둥을 이루었다. 거세 게 회전하는 회오리 기둥. 그리고 그 회오리의 중심에는 크라드메서가 원래의 모습을 드러낸 채 서 있었다.

“맙소사!”

크라드메서는 구름 사이에서 머리를 내린 채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늘에서, 그래. 하늘에서 우릴 내려다보고 있다. 크라드메서의 얼굴을 보려다가 그대로 뒤로 누울 뻔했다. 타오르는 선홍색의 몸, 그리고 머리에서 목을 따라 흐르는 검은색의 복잡한 띠무늬. 그리고 발끝도 검어 석탄처럼 보였다. 전체적인 모습은 작열하며 불타오르는 석탄처럼 보인다. 이건 언젠 가 한 번 당했던 일이지만, 왜 드래곤이라는 친구들은 도통 익숙해지기 어려운 거지? 사교성이 떨어지는 친구들이야. 풀과 흙덩이들은 이제 멀리멀리 날아가고 깨끗해진 하늘에서 크라드메서가 우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지골레이드보다 더 크네?”

샌슨은 간단히 소감을 말했다. 샌슨, 사랑해! 어떻게 아직 주저앉지 않은 거지? 난 재빨리 일어나앉았다. 그때 크라드메서가 말했다.

“당신들의 죽음으로 동료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소?”

이를 너무 깨물어서 잇몸이 뭉개지는 것 같았다. 크라드메서의 목소리는 1년 동안 몰아칠 폭풍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것 같았다. 크라드메서는 다시 말했다.

“이제 내 모습을 똑똑히 보고 말해 보게나. 과연 자네들의 그 목숨을 던진다고, 동료들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소? 화려한 자살은 이제 불가능하오. 좀 덜 화려한 자살이라도 좋은가? 무의미한 자살이라도 좋은가?”

“화려한….. 자살?”

“물론입니다! 벌써 구했어요!”

내 반문을 지워버리며 샌슨이 외쳤다. 샌슨은 롱소드를 위로 휘두르며 외쳤다.

“이제 우리 동료들은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그럴테지. 운차이가 아니라도 저 모습은 모두의 눈에 들어올 거야. 샌슨은 외쳤다.

“이제 당신이 우리들을 공격한다면………….”

갑자기 샌슨의 말이 안 이어진다.

“당신이…… 우릴 공격하면………그 광경은 우리 동료에게………….”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동료들이 과연 달아날까? 크라드메서의 공격은 분명히 그들의 눈에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달아날까? 왠지 그 사람들은 ‘급히 레니를 데리고 달려와 계약을 맺음으로써 우리들을 구한다.’는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크라드메서는 비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볼 수 있겠지? 우리 일행들을 볼 수 있겠지?

“내가 당신들을 공격한다면? 그들은 그 광경을 보고 위험을 피해 달아날 거란 말이오?”

그 대답은 샌슨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뒤에서 풀을 헤치는 소리가 거세게 들려오면서 크라드메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들려왔다. 

“퍼시발구우우운! 네드발구우우운!”

웃자, 웃어. 어허, 어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