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8권 – 제15부 :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 2화
2
찾아간 날이 좋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라무스 시의 시장님은 며칠 전 자이펀이 사용하는 디바인 웨펀(세이크럴라이즈를 사용하는 파괴 작전을 그렇게 이름 붙였나 보다. 신의 무기라고? 인간의 무기야, 인간의!)을 주의하라는 공문을 받아보고선 분기탱천, 그 즉시 가문의 보검을 어깨에 둘러메고 자원 입대해 버리 셨다는 것이다. 지금쯤은 남쪽으로 가는 지원군에 포함되어 씩씩하게 행군하고 계실 거라는 말에 나는 질문했다.
“시장님의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현재 시장 대리 노릇을 하고 있다는 시청 총무부장은 웃으며 대답했다.
“65세십니다.”
“……대단한 노익장이시군요.”
시장실의 모습도 그 시장 되는 사람의 인격을 미루어 짐작하게 할 만한 모습이었다. 벽에 걸려 있는 방패와 검은 지금 당장 들고 싸우러 나가도 될 만큼 번쩍번쩍 빛나고 있는 것이 절대로 장식용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장실 한쪽 구석에 잘 보이지 않게 치워두었지만 야전 침대임에 분명한 침대의 모습도 보였다. 큼직한 책장 옆에 놓인 나무통에는 서류 두루마리 대신 쿼럴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게 시장실이야, 아니면 레인저들의 바라크야? 우 리나라는 확실히 기사도의 나라야. 아, 실수, 귀족들만 빼고 말이야. 쳇!
난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래, 그 자제 되시는 분들이 말리지도 않았습니까?”
“아버님은 말린다고 들으실 분이 아니라서요.”
땡, 땡!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것 같다. 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시장님이 아버님 되시는군요.”
“아뇨. 괜찮습니다. 네드발 백작님. 자랑스러운 일이긴 합니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군요.”
“이해합니다. 제 아버지도 자원 입대병이시거든요.”
“그렇습니까? 아, 혹시…………, 아닙니다.”
“예?”
“혹시 아버님께서 전사하셔서 그 나이에 백작 지위를 계승하신 것은 아니신지………….”
“예? 하하. 아니에요. 전 신흥 귀족입니다. 제가 네드발 백작가의 초대 백작이지요.”
시장 대리는 고개를 숙이더니 찻잔을 들어올렸다. 아마 당황한 얼굴을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흠. 뭘 그런 거 가지고 놀라시나. 시장 대 리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허허, 믿기 어렵군요. 그 나이에 전쟁에서 공을 세우신 것도 아니실 텐데.”
“공이라면 공이고…………. 뭐 그런 일이 있었지요. 자세한 것은 국가 기밀에 관련되어 자칫 미묘한 사태를 야기시킬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는지라 알려 드릴 수 없군요.”
보라, 헬턴트 주민들이여! 우하하하! 내가 말이야, 헬턴트 초장이 후보인 내가 말이야, 약간 피로해 보이는 듯하면서 동시에 긴장된 얼굴로 ‘국가 기 밀에 관련된 일이라………… 미묘한 사태를………….’ 하는 식으로 말하고 있단 말이야. 그리고 듣고 있는 이라무스 시장 대리께서는 잔뜩 긴장해서 뭐가 뭔지 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단 말이지. 손에 든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냥 허공에 띄워두고서 말이야. 우리 영지의 주 민들을 모조리 여기 불러왔으면 좋겠네.
난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들어올리며 다시 기품 있게 말했다.
“저희 아버님은 드래곤의 포로로 잡혀 있다는 것 이외에는 자세한 것을 알려드릴 수가 없군요.”
시장 대리께서는 이제 완전히 얼어붙어 버리셨다. 이제 난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지평선을 바라보며 드래곤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네드발 백작인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의 불행을 가지고 제가 장난을 치는 거 용서해 주세요. 곧 구해 드릴게요. 예?
시장 대리와의 회견은 그런 대로 적당한 수준에서 품위 있게 마무리지어졌다. 메리안의 삼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미성년자를 보호 하는 국법과 이라무스 시의 시 조례에 따라 시장 대리께서 알아서 처리하도록 했다. 그러고는 시청의 관사에서 유숙하라는 부탁을 정중히 거절하고 메리안에게 돌아왔다.
메리안은 문 밖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호기심 많은 시민들이 몰려서 그녀에게 어젯밤의 사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고 있었다. 메리안은 꽤나 당황스러운 얼굴로 시민들 에게 설명하다가 간신히 날 발견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후…………, 백작님!”
…..아무래도 백작이라는 거 별로 좋지 않아.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까 그렇게 부른다는 거 이해하지만 이게 도대체 뭐람. 메리안과 나 사이에 엄청 난 거리감이 발생해 버리는 것 같잖아? 메리안을 둘러싸고 있던 시민들은 먼저 선더라이더를 보고 놀란 다음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난 별말 없이 선더라이더에서 내려섰다. 메리안은 고개를 숙이더니 다소곳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청에서 오시는 길인가요?”
난 얼굴을 구기면서 메리안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녀의 입매가 조금 올라가 있는 것은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아, 그래? 그렇다면 나라고 질 순 없지.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이름으로 레이디 메리안 만세. 그렇습니다, 레이디. 레이디를 괴롭히던 악덕 영업주는 정의와 국법의 이름에 의해 처단될 것 입니다. 레이디 메리안의 명예 영원하시길.”
메리안은 황당한 시선으로 날 올려다보았고 난 주위에 보이지 않도록 재빨리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아무래도 나나 메리안이나 이 배역에는 별로 어울 리지 않는 것 같아. 앞치마를 두른 채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메리안이 ‘레이디 메리안’에 안 어울리는 거나, 타고 있는 말이 멋진 것 외에는 후줄근한 옷에 새집 같은 머리를 하고 있는 내가 ‘네드발 백작’에 안 어울리는 거나 거의 비슷하단 말이야. 주위의 시민들이 경외스러워하는 이유는 오로지 내 멋들어진 태도와 선더라이더의 멋들어진 태도 때문일 것이다. 아, 어쩌면 후자에 더 큰 비중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메리안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 안으로 드시지요, 백작님.”
“감사합니다.”
나는 메리안을 따라 홀 안으로 들어서서는 곧장 문을 닫아서 바깥의 시민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가로막았다. 그러곤 곧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면 서 메리안을 바라보았다. 메리안은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날 보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어떡하니. 국왕의 기사에게 덤비는 것이 반란이듯, 국왕의 기사에게 적합한 예를 표현하지 않는 것도 왕실 모독이 되는 거 아냐?”
“……아침 먹었어?”
“응.”
“점심 먹었어?”
“뭐? 아직 점심 때도 아니잖아?”
“아하, 안 먹었군. 그래서 그렇게 말을 잘하는 거였구나.”
“후치!”
난 피식 웃었다. 역시 저렇게 불러야 내 존재 확인이 된다니까. 우하하.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자 테이블 위에 아침엔 못 보던 보따리가 있는 것이 보였다. 메리안은 내 눈길을 따라가다가 그 보따리를 보고는 생긋 웃었다.
“저건 뭐지?”
“내 짐. 간단하지?”
·알았어. 특별히 만나볼 사람 있어?”
“아니, 없어. 그런데 질문이 있어.”
“훌륭하군. 질문도 있고 그 질문을 들을 사람도 있고, 성직자들보다는 훨씬 나아. 성직자들은 질문을 엄청나게 던지지만 해답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던데 무슨 질문이니?”
“왜 나한테 잘해주니?”
“응?”
메리안은 시선을 내리더니 짐보퉁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짐을 싸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난 너에게 친절을 받아야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아. 후치는 왜 나를 위해 싸우고 내 미래를 보호해 주려고 하는 거 “지?”
시시한 질문이군. 난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했다.
“글쎄. 절벽 가에서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아기를 보고, 들고 있던 계란 바구니를 집어던지고 달려가는 처녀의 이유는 뭘까?”
“응?”
“말해 봐. 계란 바구니 속의 계란을 다 깨버리면서 아기에게 달려가는 이유는?”
“어, 뭐, 계란보다야 아기가 더 소중하니까?”
“그런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뭐 그것도 괜찮네. 맞다, 맞아. 나도 내 수고로움보다는 메리안이 더 소중하니까야. 난 널 돕는 것이 특별히 고 생스럽거나 힘들진 않아. 야, 그런데 내 대답, 내가 들어봐도 좀 몰인정하게 들린다?”
메리안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헤엥. 그럼 무지무지 힘들고 피곤한 일이었다면 날 돕지 않았을 거란 말이네?”
“그런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음. 만일 목숨을 걸어야 되는 일이었다든가, 내 모든 미래가 박살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해야 되는 일이었다든가. 그 럴 경우라면 난 이렇게 생각하는 나 자신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어. ‘메리안과의 우정은 별거 아니야. 내가 더 중요해.’라고 말이야. 그리고 스스로 그 결정에 만족해하겠지.”
“당연히……, 그렇겠지?”
“그래. 난 내 수고를 화려하게 치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할 만하니까 하는 거야. 난 어리석은 폐태자와는 많은 점에서 다른……………, 관두지.”
“응? 무슨 말이니?”
“아냐. 별말 아니야. 설명이 됐다면 그만 나갈까.”
메리안은 아무런 주저도 없이 보따리를 들어올렸다. 흐음, 정말 시원스러운 출발이야. 그녀는 가게를 한번 돌아본다든가 하지도 않고 곧장 문을 나 서려고 했다.
난 당황해서 그녀를 불렀다.
“어, 이봐, 메리안. 종업원 우두머리라든가 누구 없어? 이 가게 그냥 내버려두고 떠날 수는 없잖아. 주인도 없는데………….”
메리안은 문 바로 앞에서 멈춰 서더니 몸을 돌려 날 바라보았다. 그녀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난 이 가게에 별로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데. 넌 느끼나 보지?”
“나야 상관없지만 네가 혹시…………. 네 삼촌이잖아.”
“이까짓 가게 어떻게 되든 말든. 내 가게는 아냐. 뭐 다른 하인들이 알아서 잘할 거야. 어제는 네가 무서워 다 도망갔지만 얼마 안 있으면 다시들 몰 려오겠지. 우리 삼촌만 풀려나면.”
“알았어, 좋아. 그럼 나가지.”
그래. 하인들은 다시 몰려들겠지. 주인에게 권위가 돌아온다면.
“다시 몰려들 거라구요?”
“그래. 그렇게 만들겠네.”
칼은 피로한 머리를 좌우로 흔드느라 잠시 말을 멈췄다. 이윽고 그는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살을 바라보며 느리게 말했다.
“귀족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 거야. 귀족의 뿌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오만과 독선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근거 없는 우월 의식이지. 정녕 우월 한 자는 아무 행동을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존경하게 되네. 하지만 실속 없이 우월의식만 가진 자는 폭력적으로 바뀌게 되지. 그런 폭력은 일견 강력해 보이지만 더 큰 폭력 앞에서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지. 난 핸드레이크가 그러했던 것보다 더 잔인하게 행동할 것이네. 칼 헬턴트의 이름이 공 포의 이름으로, 마주보기 두려울 정도의 후광으로 빛나는 이름이 되게 만들겠네.”
저게 칼 맞나? 난 놀라움에 젖어 칼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자기 오두막에서 책이나 뒤적거리고 있던 그 허허 웃던 독서가의 모습인데? 그러 나 칼은 매서운 눈으로 말했다.
“그들이 국왕에게 매달리게 만들겠네. 귀족? 귀족이라 해도 국왕 앞에서는 다른 국민과 똑같은 국민으로 있게 만들겠어. 그들의 오만과 그들의 위세 를 산산이 박살내어 놓겠네.”
별로 할말도 없었다. 그래서 난 역시 창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길시언이 칼에게 준 빚은 너무 큰가 보군요.”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잔인한 자지. 그 사람은…………, 잔인하도록 위대한 자였지. 위대함은 뛰어난 무용이나 높은 지식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었어. 그냥 위대해야 돼. 그럴 수 있는 자가 위대한 자지. 난 길시언을 보고서야 그것을 알 수 있었네. 사람들이 멋모르고 말했던 것이 진실이었어. 그가 왕이 되었어야 했는 데…………….”
“그럼 후작은 어떻게 처리하실 거죠?”
칼은 내 얼굴을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국의 영웅으로 만들어줘야지.”
“말도 안 됩니다!”
샌슨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와 칼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샌슨을 바라보았고 운차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그게 새로 나온 벌이라도 되는 겁니까? ‘조국의 영웅’이라는 이름의 형벌이 새로 생겼습니까?”
재미있는 추측이네. 샌슨은 너무 흥분해서 침을 튀겨가며 말하고 있었다. 네리아 역시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샌슨이 말하자 자리에 앉 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좋은 사람들이야. 난 이마를 짚으며 웃었고 칼 역시 미소를 지었다.
“아닐세, 퍼시발 군. 난 그 의미 그대로 말한 거야.”
샌슨은 좀더 높은 목소리로 고함을 지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쉬다가 흠칫하며 내 표정을 살폈다. 난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가 로저었다. 그러자 샌슨은 운차이를 바라보았고 운차이는 냉혹하게 말했다.
“자리에 앉아서 너보다 똑똑한 사람의 말을 기다려. 가만히 있으면 절반이나 가지.”
샌슨은 머쓱한 표정으로 의자를 주워 똑바로 앉아서 칼을 바라보았다(그런데 왜 네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까?).
“설명해 주시죠.”
“알았네. 그 금발 프리스트가 말하던 것을 기억하는가? 할슈타일 후작만큼의 명문가도 처리될 수 있다면 귀족들은 다음 차례가 자신이 될지도 모른 다는 불안감을 느끼게 될 거라고 한 말 말이야.”
“아, 예. 그런 말이었죠.”
“이 나라의 왕권이라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보여주는 말일세. 사실 하나의 나라 안에 권력이 너무 많아. 종교계는 신성 불가침인 데다가 너 무 많아. 그리고 마법계는 단일 구조이긴 하지만 너무 강력해. 핸드레이크나 솔로처가 좋은 전통을 남겨둬서 아직껏 마법사들은 상아탑의 고상한 학 자로 있는 것을 좋아하니 다행이지만, 드래곤은…………, 드래곤들은 드래곤 라자에 의해 인간과 그런 대로 괜찮은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으니 망정이지, 드래곤들의 힘은 왕가에 치명적 해가 될 수 있는 것이었지. 그리고 엘프와 드워프들도 왕권에 전혀 예속되지 않으면서 자유로이 행동하고 있고, 생각 해 보면 정말 아찔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온 나라이지 않은가?”
샌슨은 얼굴이 노랗게 되어 숨을 몰아쉬었다. 칼은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한때…………, 나도 청운의 꿈을 품었던 적이 있지. 하지만 이 나라는 너무 전망이 없었어.”
“칼?”
칼은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돌렸다.
“어쨌든, 권력 집중이 안 된 나라는 골칫거리야. 한 가정으로 생각해도 간단히 파악할 수 있는 문제지. 한 가정의 가장이 가장으로 섬겨지지 못하면 어떻겠는가? 그 식솔들이 그를 비웃을 수밖에. 이 나라에서는 지금 귀족들이 왕가를 비웃고 있는 셈이지.”
“그런데요?”
“그리고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 이후 300년, 바이서스 왕가는 자이펀 전쟁이라는 최고의 도전을 맞이하게 된 거지. 우리가 보면 어떻게 이 럴 수 있는가 싶을 정도로 우연히 산재한 것이 역사인 것 같지만 그 뒤에는 면밀한 인과 관계가 존재하는 법일세. 자이펀 전쟁, 할슈타일 후작이나 넥 슨 휴리첼의 반란 음모, 크라드메서의 웨이크닝, 라자 혈통의 단절………, 이 모든 것은 간단히 요약되네. 바이서스는 흔들리기 시작한 거지. 대왕과 대 마법사가 쌓아둔 토대는 이제 그 힘이 약화되기 시작했어. 이제 우리 불민한 후손들은 영웅 시대의 유산을 다 탕진한 거지.”
꿀꺽. 침을 삼키는 것이 왠지 중노동처럼 느껴지는군.
“이런 상황에서 할슈타일 후작을 반란죄로 처리하면, 그 진위야 어쨌든지 간에 귀족들은 크게 동요할 거란 말일세. 할 수 없지. 일단은 비위를 맞춰 주는 수밖에. 그래서 할슈타일 후작은 오로지 왕가를 위해 순교하게 해드려야지. 이 점, 중요하네. 할슈타일 후작은 나라와 국왕을 위해 순교해야 하 는 거야. 그럼 다른 귀족들에게도 비슷한 것을 요구할 수 있게 되지. ‘봐라, 할슈타일 후작도 그랬다. 너희들도 국왕께 충성해라.’ 이해되는가?”
“아이고 맙소사…………. 머리가 아픕니다.”
“물론 전면적으로 그렇게 요구할 순 없지만 경향성은 만들어낼 수 있지.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고. 이제 새로운 힘이 바이서스에 도입되어야 해. 절대적으로 비인간적인 힘 말일세. 인간적인 힘, 영웅의 환상은 긴긴 여름날의 백일몽이었고, 이제 곧 혹독한 겨울이 오게 되겠지. 영웅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아. 우리를 키워왔고 자라나게 했고 의식의 지평을 열어주었던 영웅시대의 유산으로부터, 이제 우리는 새로이 도약해야 될 시점에 온 것 이지. 바이서스의 마법의 가을일세.”
칼의 단점 중에 하나야. 듣는 사람을 너무 높게 평가해 주곤 한다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군. 샌슨은 머리를 벅벅 긁다가 간신히 할말을 생각해 냈다.
“그럼…………. 알겠습니다. 할슈타일 후작은 절대로 바이서스 임펠로 돌아오면 안 되는군요?”
“정확하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선 안 돼. 그래서 오늘 급히 모이라고 한 걸세. 지금 당장 그 작자를 추적해야 돼.”
겨울 햇살이 뽀송뽀송하다.
“너무 더워…………. 이거 벗어도 되겠어.”
메리안은 뒤집어쓰고 있던 외투를 벗느라 꿈지럭거렸다. 메리안의 시선이 목 뒤로 따끔따끔하게 느껴지는데. 난 헛기침을 하고서 말했다.
“그래. 허, 흠. 겨울 날씨가 이래서 참 다행이야. 여행하기 좋지?”
“무지무지하게 추울 거라고 겁주더니………….”
모험가의 허풍은 무죄야. 제발 그런 눈으로 쏘아보지 말라구. 난 오만 가지 허풍을 다 동원해서 메리안을 겁줬다. 살을 도려내는 추위 속에서, 며칠 씩 굶어 고픈 배를 부여잡고 잠자리에 들지만, 뒤를 따라오는 몬스터들의 피에 젖은 이빨을 경계하면서 그나마 편하게 잠들지 못하는 공포스러운 밤…………. 그러나 네 곁엔 사상 최대의 모험가가 함께하니 그를 믿고 따르라. (‘존경하는 후치 님, 당신만 믿겠어요.’ 정도의 감정이 담긴 시선을 기대했다는 사실까 지 말해야 할까?)
그런데 이라무스 시를 떠나고도 이틀이 지나는 동안 날씨는 쾌청하기 짝이 없었고 세 때 꼬박꼬박 챙겨먹어 배는 부르고 몬스터는커녕 토끼 새끼 하 나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사상 최대의 모험가는 졸다가 말에서 떨어질 뻔해서 그 뒤에 타고 있는 레이디에게 엄청난 구박을 들은 지 10분도 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도대체 뭐 이래? 졸려 죽겠네. 이때 산적들이라도 우르르 나타나서 ‘가진 것 모조리 다 내놓고 목숨 하나만 가지고 가뿐하 게 여행하세요.’라고 친절하게 권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가진 것 다 내놔!”
“만세!”
내 외침 소리는 산적들과, 메리안과, 그리고 나 자신까지도 당황하게 만들었다. 길 양편에서 우르르 나타난 남자들은 얼굴에 ‘당황’이라고 써붙인 모 습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뭔가 변명을 해야 한다는 참을 수 없는 강박 관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일곱 명밖에 안 돼!”
내 두 번째 외침에는 별로 호소력이 없었고 산적들과 메리안은 보다 깊은 의문 속으로 침잠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내 본질을 오도하는 말을 해 버린 것 같군. 난 선더라이더에서 내려섰다. 안 되겠어. 내 인격을 급부상시켜야겠다.
나는 비장한 시선으로 메리안을 바라보았다.
“메리안, 그대로 타고 있어. 내가 널 지켜주겠어. 만일 내가 죽으면 선더라이더가 널 안전하게…….”
“후치! 이 바보야, 왜 말에서 내려! 같이 도망가야지!”
윽. 메리안, 제발! 내가 이 정도로 몸부림을 치면 뭔가 호응이 될 만한 말을 해줘야지.
“남자애는 이런 순간에 그렇게 말하는 법이라구!”
“그러니까 남자애들은 다 여자애들에게 멍청하다는 말을 듣는 거야! 그리고 네가 한 말과도 다르잖아!”
“내가 한 말?”
“그래! 할 만하니까 한다는 말 말이야!”
“……가끔은 자기 신념과 다른 일도 할 수 있는 법이라구. 그리고 이번에는 내 신념에 틀린 행동은 아니야.”
“무슨 말이니?”
“싸울 만하니까 내려선 거야. 내 말을 그렇게 못 믿어? 난 레티의 프리스트들과도 검을 나눠봤다니까. 이런 유랑민들 일곱 명쯤은 별로 안 무서워!”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와 메리안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설전을 지켜보던 남자들이 ‘유랑민’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난 고개 를 돌리며 외쳤다.
“당신들! 사우스 그레이드에서 여기까지 피난왔다가 먹고 살 일이 아무래도 난감하다 싶으니까 산적 영업을 개시해 보는 거겠지? 그것도 이번이 첫 번째지?”
“어, 어?”
“어떻게 알았냐고?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잖아. 첫 번째인 줄은 어떻게 알았냐고? 긴장감의 수준을 보면 알 수 있지.”
손에 괭이나 삽, 낫 등을 들고 있던 남자들은 이제 숨길 수 없는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자, 잠깐. 뒷걸음질은 원래 숨길 수 없는 것이었나? 어흠!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 싸움입니까?”
남자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 모습들을 보면서 난 측은함을 느껴 검을 늘어뜨렸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늘어선 일곱 사나이들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움푹 들어간 볼엔 땟국물이 흐르고 있고 볼과 턱엔 정리되지 못한 수염들이 덩어리져 있었다. 옷은……, 기울 시간도 여유도 없었는지 찢어진 채로 걸치고 있는, 저것은 옷이라기보다는 누더기라고 부르는 것이 낫겠다. 그리고 허기져 퀭한 눈에는 번들거리는 살기가 느껴졌다. 저 사람 들로서는 이판사판이겠는데.
“제길, 쳐!”
사나이들 중 그래도 꽤나 강단 있어 보이는 남자가 앞장서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사나이들도 악에 받쳐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우아아 아!” 아이고. 레티의 프리스트들은 공격할 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어.
레티의 프리스트들이 내는 소리는 고작해야 ‘흡!’하는 호흡 고르는 소리뿐이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이 작자들은 비명도 안지른다.
“이 자식아, 그렇게 치면 나 죽잖아!”
샌슨은 고함을 지르며 목을 향해 날아오던 롱소드를 튕겨올렸다. 상대는 검을 회수하는 대신 뒤로 뛰어 거리를 만드는 것으로 방어를 삼고 손은 이 미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단하군! 하지만 그 성직자는 운차이의 모습을 놓쳤다. 운차이는 그 옆을 지나가다가 한 대 치고 지나갔고 성직자 는 곧장 허물어졌다.
운차이가 달려든 곳에서는 덩치가 예사롭지 않은 프리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거인 프리스트는 두 개나 되는 롱소드를 부여잡은 채 운차이를 공 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운차이는 날아오는 두 개의 검을 한 번에 튕겨내면서 피식 웃었다.
“쌍검? 그건 우리나라에선 전설 속에서도 이미 사라진 느려터진 기법. 낡은 것에 집착하는 악취미의 대가를 받으시지.”
몸이 검을 인도했다. 운차이의 몸이 상대를 지나치고 검이 그 뒤를 따라 움직였던 것 같다. 내 눈엔 그것밖엔 안 보였다. 그리고 상대는 검을 떨어뜨 리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운차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넋 빼놓고 있지 마! 어느 칼이 네 모가지 가져가는 줄은 알아야 될 거 아냐?”
이크! 난 바스타드를 휘저으며 뒤로 뛰었다. 탱! 오, 이런! 날카로운 떨림이 손목을 지나 어깨까지 흔들리게 만들었다. 상당히 정확하게 친 모양인 데? 숨을 고르고 앞을 보자 검을 꼬나든 채 날 마주보고 있는 금발 프리스트가 서 있었다. 난 무턱대고 외쳤다.
“더 세게 쳐봐!”
금발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 이놈, 나한테 속았다! 타당! 간신히 금발 프리스트의 검을 막아내었다. 그리고 검이 부딪히는 순간 힘을 살짝 뺐다. 그러자 상대는 곧장 앞으로 밀어오기 시작했다. 씩 웃고, 곧장 앞으로 밀어붙였다.
“이야아아아!”
금발 프리스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곧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지만 난 죽어라고 끝까지 밀고 들어갔다. 이 자식아, 네가 검을 빼내면 내가 죽는 데 왜 놔주냐? 삽시간에 금발 프리스트와 나는 열 걸음쯤 밀고 밀리면서 달려갔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열 걸음을 밀리면서 안 넘어져?
“이래도 안 넘어져!”
내 발은 상대의 정강이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금발 프리스트는 다리를 빼면서 피했고 난 허공을 걷어차며 금발 프리스트를 놔주고 말았다. 단 두 걸음. 그러나 금발 프리스트에겐 두 걸음으로 충분했다. 그는 다시 세차게 찔러 들어왔다. 이런 젠장!
“내가 더 길어!”
트라이던트가 번쩍이는 순간 금발 프리스트는 찔러 들어오던 검을 옆으로 뿌렸다. 트라이던트의 창날과 롱소드가 부딪혔고 난 뒤로 넘어지면서 그 대로 뒤로 굴러일어났다.
“네리아! 사랑해요!”
“난 항상 그게 문제야! 너무 사랑스럽다니까! 하하하!”
네리아는 그렇게 내 정신을 완전히 빼놓고는 트라이던트를 찔러대기 시작했다. 금발 프리스트는 이를 사리물면서 찔러 들어오는 트라이던트를 내려 쳤다. 각! 트라이던트가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또 다른 성직자가 달려들어 트라이던트를 밟았다. 네리아는 트라이던트를 놓치고서 뒤로 물러났다. 젠장! 상대가 너무 많아! 샌슨은 세 명의 상대를 붙잡고 고군분투하고 있었고 운차이는 포위되지 않기 위해 움직이는 것으로 자기 실력을 다 소모하 고 있었다. 그래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기주해 둔 마법을 다 쓴 아프나이델은 몸으로 싸우겠답시고 땅에 떨어진 스피어를 주워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공격은 드워프들의 노커를 기겁하게 만들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
“이 자식아, 똑바로 쳐! 누구 눈알을 뽑으려는 거야?”
“이, 이크! 죄송합니다. 아, 이거 생각 외로 무거워…………. 엑셀핸드!”
“응?”
엑셀핸드는 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레티의 검이 그의 어깨를 지나쳤고 엑셀핸드는 몸을 돌리다가 그대로 균형을 잃으며 핑그르르 돌면 서 넘어졌다. 아프나이델은 발악하며 스피어를 휘둘렀지만 상대는 가볍게 아프나이델의 스피어를 잘라버리고는 아프나이델을 걷어찼다. 아프나이델 은 엑셀핸드의 옆에 쓰러졌다.
“크흑! 엑셀핸드 님, 죄송합니다………….”
엑셀핸드는 뭐라고 말하려는 듯 고개를 들어올렸지만 레티의 성직자는 그의 가슴을 밟았다. 젠장! 트라이던트를 놓친 네리아는 괴성을 지르며 엑셀 핸드에게로 달려갔다. 달려가던 네리아의 팔이 빙글 움직이면서 대거들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엑셀핸드를 밟은 채 롱소드를 들어올리던 성직자는 황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칼이 날린 화살까지는 피하지 못하고는 가슴에 화살을 맞은 채 뒤로 넘어졌다. 좋아, 저기는 일단 칼과 네리아에게 맡겨 두자! 난 다시 고개를 돌려 금발 프리스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죽을 땐 후치 네드발이라고 외치며 죽어라! 그가 널 죽인다!”
금발 프리스트는 매섭게 웃으며 베어들어왔다. 날아오던 검을 튕겨내었지만 금발 프리스트의 롱소드는 회초리처럼 튕겨지며 다시 날아왔다. “크으윽!”
허벅지가 꿰뚫리는 아픔을 느끼면서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원래 무릎이 없었던 것처럼 무릎이 제멋대로 꺾였다. 난 무릎을 꿇으면 서도 바스타드를 휘저었지만 금발 프리스트는 손목만 조금 움직여서 내 검을 옆으로 날려버렸다. 난 이를 갈면서 검을 들어올리는 금발 프리스트를 올려다보았다. 그 검이 정상으로 올라간 순간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젠 끝장이군.
그러나 검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대신 아주 이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이상한 발걸음소리는 내 옆을 지나쳐 내 앞에서 멈췄다. 난 눈을 떴다. “길시언?”
길시언이 힘들게 다리를 움직여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길시언의 등을 올려다보는 순간 몸이 얼어붙는 기분이 들면서 난 아무 말도 못했다. 저 멀리서 네리아가 발악하듯 외쳤다.
“미쳤어! 어서 비켜요!”
길시언은 들은 체 만 체하며 프림 블레이드를 들어올렸다. 우우웅! 금발 프리스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좋은 죽음이오.”
길시언은 내 앞을 가로막은 채 천천히 말했다.
“좋은 죽음 따위는…………, 없어. 멍청아. 좋은 삶이 있을 뿐이지.”
“그렇소?”
“이 순간……, 나는 살아 있다.”
길시언이 웃고 있는 모양인지 그 어깨가 들썩거렸다. 금발 프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당신은 이 순간을 영원처럼 살아가고 있군. 이 순간이 그대에게 행복했으면 좋겠소.”
그리고 금발 프리스트는 서서히 앞으로 미끄러져오기 시작했다. 다른 프리스트들은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길시언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의 어깨는 무섭게 긴장되기 시작했다. 안 돼. 앞으로 나서야 되나? 길시언을 밀어내야 하나? 그러나 난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나의 왕의 등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가가가!
뭔가 번쩍이는 것이 급속하게 하늘로 쏘아져 올라갔다. 난 망연히 그 빛을 따라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허공에서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는 검은 점이 보였다. 그 동그라미를 향해 쏘아져 올라가며 번쩍이는 것은…………, 프림 블레이드?
“삐이이이익!”
독수리의 울음 소리는 처절했다. 귀가 멍멍해지는 느낌 속에서 터져나갈 듯이 쿵쿵거리는 내 심장 소리를 들으며 시선을 내렸다.
금발 프리스트의 검은 길시언의 복부를 꿰뚫고 있었다.
“클, 쿨럭.”
길시언은 기침을 토했을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난 주위의 싸움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그 모습만을 바라보았다. 금발 프리스트는 낮게 말했다. “용서하시오. 왕이 되셨어야 했던 분이여.”
금발 프리스트의 검이 뽑혔고 길시언은 무릎을 꿇었다. 팍. 허공으로 튕겨 올라갔던 프림 블레이드가 길시언의 옆에 꽂혔다. 우우우웅! 프림 블레이 드는 그대로 땅에서 뽑혀나올 듯이 웅웅거렸다.
길시언은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려나? 그러나 길시언은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왼손으로 무릎을 짚고 떨 리는 오른손은 프림 블레이드를 향해 뻗었다. 금발 프리스트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아직은….., 살아 있어.”
숨결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하며,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쥐었다. 그는 프림 블레이드를 지팡이 삼아 일어나려고 했다. 금발 프리스트는 고개 를 가로젓더니 서서히 롱소드를 들어올렸다.
“이 자식아, 멈춰!”
난 고함을 지르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다리가 제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난 땅에 호되게 볼을 부딪치며 나동그라졌다. 볼이 그대로 벗 겨지는 아픔 때문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난 허겁지겁 눈을 비비며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은 우울한 눈으로 금발 프리스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금발 프리스트의 검은 천천히, 하지만 걷잡을 수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마침내 그 검은 정상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길시언은 눈을 감지 않았고 그때까지도 일어나려고 애쓰고 있었다. 금발 프리스트는 고개를 살짝 가로저 으며 말했다.
“잘 쉬시오.”
레티의 프리스트들의 뒤쪽에서 무서운 비명이 터져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금발 프리스트는 비명 소리에 기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정말 제아무리 검의 달인인 레티의 프리스트들이라도 고개를 돌려 확인하게끔 만 드는 비명 소리였다. 그리고 비명 소리에 고개를 돌린 성직자들은 이제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 때문에 눈을 돌릴 수 없게 되었다.
모래가 날리면 모래 폭풍이지. 그럼 저건 뭐라고 불러야 되는 거야?
“사람 폭풍?”
성직자들이 폭풍우치고 있었다. 말이 꽤나 이상하지만 달리 표현할 말도 없었다. 성직자들은 제멋대로 날려올라가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어디 선가 운차이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운차이는 강맹한 동작으로 금발 프리스트를 쫓아내고는 길시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그제야 잠시 멈추며 사 람 폭풍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즐거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외쳤다.
“칼! 당신을 존경해도 되겠소?”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활에 화살을 먹인 채 서 있던 칼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외쳤다.
“핫소드 그란과 자크요! 당신이 세 아름 소나무 아래에 숨긴 게 뭔지 알겠군요!”
“OPG라구?”
“응. 하슬러를 체포했을 때 그의 OPG도 빼앗았거든? 그런데 칼은 그란에게서 빼앗은 그 OPG를 거기 숨겨두었던 거야. 뒤에 무기는 숨겨두지 않았 다고 하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칼은 태연하게 대답하더라구. OPG는 무기가 아니지 않냐고.”
“헤에…………. 하긴 그 하슬러라는 분, 딸까지 데리고 맨손으로 레인저들한테서 도망갈 수야 없었겠지.”
“그렇긴 해.”
메리안은 미소를 지으며 선더라이더의 고삐를 쥔 내 손을 바라보았다. 난 선더라이더의 고삐를 쥔 채 휘파람을 불며 걸어갔다. 이 정도면 괜찮은 광 경이지. 말의 고삐를 쥔 채 걷고 있는 미남 전사. 그리고 그 말 위에 앉은 아리따운 레이디. 그리고 그 뒤로 졸졸 따라오고 있는 유랑민들의 무리. 우리를 습격했던 남자들은 모두 퍼렇게 된 눈이나 절뚝거리는 다리를 한 채 부인이나 다른 가족들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좀 심하게 쥐 어박았나? 남자들의 가족들도 모두 초라한 모습이었다. 나와 남자들의 싸움이 끝날 때쯤해서 우르르 몰려나온 그 가족들은 남자들을 죽이지 말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내 뒤를 따라오고는 있지만 몹시나 불안한 눈들을 하고 있는 그 사람들을 향해, 난 짐짓 쾌활하게 외쳤다.
“자, 이제 다 왔습니다. 밭들이 보이지요?”
남자들과 그 가족들은 길 주위로 나타나기 시작한 밭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따라서 밭을 둘러보았다. 추수가 끝난 밭에는 밀 짚단과 그루 터기들이 어지럽게 나 있었다. 그때 밭을 둘러보던 내 눈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저 멀리 좀 떨어진 곳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은 대략 스무 명 정도 되어보였다. 그들은 커다란 나무에 밧줄을 묶어 당기고 있었다. 나무를 뽑아내 려는 것인가? 난 선더라이더를 끌고 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유랑민들은 잠시 주저하다가 곧 내 뒤를 따라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도 점점 크게 들려왔다. 영차! 영차! 흐음. 확실히 나무를 뽑아내려는 모양이군. 아마 밭이라도 개간하는 모 양이지? 꽤나 많은 사람들이 밧줄에 매달려 나무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제 막 수염이 나기 시작한 소년에서부터 실팍한 어깨에서 중년의 아름다움 을 느낄 수 있는 아주머니까지. 주위로는 소년 소녀들이 둘러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람들도 다가가는 우리들을 보았는지 일손을 멈추었다. 그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들 중 하나가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후치 군?”
어라? 저게 누구더라? 목소리는 기억나는데. 땀에 절은 셔츠를 입고 이마를 닦으며 걸어오고 있는 시커먼 얼굴의 사람은………….
“펠레일?”
“야아! 이게 누굽니까. 후치 군이군요! 반갑습니다.”
펠레일은 거의 뛰듯이 달려와서는 내 손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난 펠레일이 내 손을 흔들도록 내버려둔 채 당황한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 았다.
“아니…………… 아, 반갑습니다, 펠레일.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바뀌었습니까?”
“노동의 흔적이지요. 하하하!”
소매를 척척 걷어붙인 펠레일의 팔은 시커멓게 그슬린데다가 힘줄이 멋지게 솟아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목이나 가슴도 좀 두꺼워진 것 같다. 하지 만 무엇보다도 까무잡잡하게 바뀐 그 얼굴 때문에 인상이 꽤나 낯설었다. 난 겨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 하하……. 요즘은 어디 가서 마법사라고 말하면 아무도 안 믿죠?”
“하하, 무슨 소리를! 전 이 근방에서 꽤나 유명해졌습니다. 칼라일의 펠로메이지 펠레일.”
칼라일의 펠로메이지 펠레일? 그렇다면 스네어트레일의 다크 메이지 리치몬드도 스네어트레일의 땅을 갈고 있던 농부 아니었을까?
어쨌든 내가 데리고 간 유랑민들은 펠레일과 칼라일 영지의 주민들에게 환영받았다. 그날 저녁, 유랑민들은 굉장한 식사 매너로써 나로 하여금 엑셀 핸드의 추억에 잠겨들게 만들었다. 식사가 끝나고 유랑민들을 임시 거처에 재우는 일까지 마치고 나서 난 펠레일의 집으로 초대되었다.
나와 메리안이 자리에 앉자 펠레일은 기분좋게 웃으면서 낯선 남자를 하나 데리고 왔다.
“이분, 기억 나십니까?”
난 잠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새로 나타난 남자를 바라보았다. 누구더라? 남자는 무뚝뚝한 얼굴로 날 가만히 바라보다가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벽난로 에 나무를 집어던졌다. 난 멍청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팔짱을 꼈을 뿐 별말이 없었다. 펠레일은 킥킥 웃으면서 말했다.
“코다슈 씨입니다. 왜 그때 운차이와 함께 있던 간첩들 기억 안 납니까?”
“아! 에델린이 말하던 그분이군요. 여기 남았다던……………”
남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저건 아마 인사인가 보군. 허허. 운차이보다 더한 사람일세. 메리안이 그에게 인사했지만 코다슈 씨는 깨끗이 무시했 다. 메리안은 얼굴이 발갛게 되었고 난 고개를 가로저었으며 펠레일은 다시 킥킥거렸다.
펠레일은 술병과 간단한 음식들을 가져와서 테이블에 내놓고는 자리에 앉았다.
“자, 이거 환영식으로는 조촐하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예. 갑자기 쳐들어와서 폐가 많았지요?”
“아뇨. 사람들이 오는 것은 퍽이나 반가운 일입니다. 후치 군도 알다시피 이 영지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자라지 않습니까?”
펠레일은 말끝을 조금 흐리며 코다슈 씨의 눈치를 살폈지만 코다슈 씨는 팔짱을 낀 채 벽난로만 쏘아보고 있었다. 난 웃으며 말했다.
“예. 저도 아마 그럴 거라고 믿고 저 사람들을 여기로 데려왔습니다. 괜찮다면 이곳에 정착하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만.”
펠레일은 두 팔을 벌리며 환영한다는 몸짓을 했다.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집도 얼마든지 있고 밭도 많습니다.”
“다행이군요. 내일 말해 주면 좋아하겠군요.”
“예. 그런데 지금까진 좀 경황이 없어 말을 제대로 나누지 못했군요. 다른 일행분들은 어떻게 되신 겁니까? 여기 코다슈 씨는 특히 운차이 씨의 안부 를 궁금하게 여기셔서 모셔왔습니다.”
“아, 예. 궁금하시겠지요. 이야기가 퍽 길어요.”
“좋군요. 겨울밤은 길고, 장작은 충분합니다. 피로에 젖은 몸을 의자에 누이고 눈보라를 피해 마을에 찾아든 모험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겨울밤의 즐거움이라고 핸드레이크는 말했지요.”
“핸드레이크…………, 그 사람의 이야기도 나오게 되겠군요.”
“예?”
겨울밤은 길고 어두운 통로 같다.
밀폐된 느낌. 맑고 상쾌한 여름밤에 비해 볼 때 겨울밤은 답답한 느낌이 들 정도다. 벽난로의 장작들이 허물어지며 불티를 날렸다. 긴 시간 동안 이 야기를 하며 그 어둡고 긴 통로를 여행해 왔지만 겨울밤의 끝은 아직도 요원하다.
난 벽난로에서 날리는 불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나무 말인데요.”
“예?”
“아까 그 밭의 나무. 이상하더군요. 왜 밭 가운데 나무가 있었죠?”
“아, 그 밭은 새로 개간하는 밭이었습니다.”
“그런가요.”
“예. 후치 군 덕분에 그 나무를 뽑아낼 수 있어서 정말 고맙군요. 남자들이 너무 적어서 말입니다. 마법으로 뽑아낼까 고민하고 있었지요. 사실 요즘 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하기 때문에 기주할 새도 없습니다만.”
“도움이 돼서 다행이군요. 그런데 사람도 적은데 왜 밭을 새로 만드는 거죠?”
“그래야 외부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겠습니까. 유효 경지가 많다면 말입니다. 요즘 여기저기서 유민들이 많이 생깁니다.”
“세이크럴라이즈 때문에요?”
“예. 다행히 우리 영지는 그 일을 먼저 겪어서 공문이 오기 전부터 대처 방식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근방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대마법사 펠레일 이 수호하는 땅이라구요.”
난 빙긋 웃었다.
“그리고…………, 실제 이유는?”
펠레일은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핏 웃었다.
“긴 겨울철, 영지의 주민들이 일도 없이 앉아 있으면 청승맞으니까요. 뭔가 합심해서 일할 것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밭 개간하는 것은 디그 어스 스 펠을 몇 번 쓰면 간단한 일이죠. 하지만 보십시오. 어린 꼬마들까지 달려들어 돌멩이를 주워내고 아녀자들도 치마폭에 돌멩이를 주워담아 나르면서 모두가 밭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나무에도 마법을 쓰는 것을 자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거라고 짐작했죠. 내가 나서서 뽑아버려 오히려 안됐군요.”
“아뇨. 후치 군은 이 영지의 은인 중에 한 사람 아닙니까. 주민들은 즐거워할 겁니다. 돌아온 영웅의 멋진 행적, 겨울철 내도록 이야깃거리가 되겠 죠.”
“으악!”
“대충 짐작이 갑니다. 지금껏 본 것 중에 가장 거대한 말을 타고 돌아온 후치 네드발은, 칼라일 영지에 이르자마자 밭을 일구기 위해 고생하는 주민 들을 위해 숲을 뭉개버렸다……………는 식으로.”
“나무 하나인데요?”
“영웅담은 대개 그렇게 발전하게 된다는 거 알지 않습니까?”
“제발…………. 앞장서서 막아주세요. 그런 이야기.”
펠레일은 큭큭 웃더니 노동 때문에 노곤해진 몸을 주욱 펴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후치 군이 타고 온 말……………, 선더라이더입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펠레일은 잔잔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럴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은빛 갈기의 흑마니까. 길시언 전하께서는 돌아가신 겁니까?”
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길시언은 샌슨에게 프림 블레이드를, 그리고 내게는 선더라이더를 남겨줬어요. 펠레일이 말한 영웅담의 발전 양상에 따르자면, 뭐 수십 년 후 쯤 이런 전설이 만들어지겠군요? 바이서스의 왕자이자 위대한 모험가 길시언 바이서스, 그가 최후의 순간에 남긴 두 개의 보물은 그와 생사고락을 같 이했던 동료들이 각자 하나씩 가져갔다. 만일 그 두 개의 보물을 다시 되찾을 수 있다면 열국을 질타하고 백세를 호령하리라.”
펠레일은 이번엔 소리를 크게 내어 웃었고 코다슈 씨도 미소를 지었다. 난 씁쓸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의 촛불은 가녀린 연기 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가는 연기.
길시언은 가슴을 그러쥔 채 곧 끊어질 듯한 호흡을 힘들게 유지했다.
네리아는 그를 부둥켜 안은 채 오열하고 있었고 칼은 마치 프리스트나 된 것처럼 모든 신을 향해 기도하고 있었다. 칼이 외치는 기도는 내용상 저주 가 없다뿐이지 거의 저주하는 듯한 어조였다. 그는 지금 모든 신들을 향해 길시언을 살려내라고 강짜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제길! 왜 하필이면 에델 린도 제레인트도 모두 여기에 없는 거지? 왜 하필이면 지금!
길시언은 힘들게 말했다.
“칼……. 죽은 자의 부탁은…………… 평생의 빚이 되지요…… 난 간교한 자…………, 그래서 당신에게 평생 벗어나지 못한 짐을………… 부여하고자 하오..” “길시언! 길시언!”
“부탁이오……………. 바이서스를………… 지…………켜…………, 허어억………….”
길시언은 피리소리를 내며 호흡을 들이켰다. 칼은 피에 젖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외쳤다.
“안 돼, 안 되오! 이렇게 죽을 순 없어엇!”
“이기이익!”
길시언은 이를 악물면서 두 눈을 부릅떴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는 듯한 몸부림. 그의 가쁜 호흡이 조금 평온해졌다. 그는 칼에게 말했다. “부……탁하…….”
“알겠소! 알았단 말이야! 일어나시오, 일어나!”
길시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난 무릎 위에 떨어져 바지에 젖은 자국을 만들어내는 내 눈물을 바라보았다. 그때 길시언의 손가락이 힘들게 움 직였다.
“ㅍ……”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자신의 허리였다. 프림 블레이드? 난 떨리는 손으로 힘들게 프림 블레이드를 뽑아들었다. 순간 머릿속으로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흑, 흐윽.”
프림 블레이드는 숨죽여 울듯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난 자꾸만 미끄러지는 길시언의 손을 잡아 프림 블레이드를 쥐어주고는 그 손을 꼭 붙들었 다.
“프.. ・림.”
프림 블레이드는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
“……죽는 거야?”
길시언은 힘없이 턱을 끄덕였다. 프림 블레이드는 애써 고통을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힘들면 말하지 마. 아. 그, 그러니까 말이야. 난 많은 주인의 죽음을 봐왔어. 칼을 쥔 사람은 꼭 죽게 마련이더라? 응. 그러니까 이건 익숙해. 익숙하 단 말이야.”
“다…………행이………..”
“다행이지! 그럼. 난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아무렇지도……………, 이 바보야!”
길시언은 잠시 말을 멈추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묘…… 묘…….”
“묘? 무슨, 아, 묘비에 그렇게 새기라구? 바보, 여기 잠들다? 물론이야! 너 같은 바보 자식은 죽어서도 망신을 당해야 해! 이 멍청한 자식! 죽어, 죽어 랏! 나쁜 놈, 이 나쁜 놈아! 우아아아앙!”
프림 블레이드는 목을 놓아 울어젖혔다. 길시언은 힘들게 말을 이어나갔다.
“새, 샌슨……… 프림을………… 프림을 부, 부탁………….”
“길시언!”
샌슨은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철푸덕 무릎을 꿇었다. 길시언의 눈동자가 이번엔 나에게 향했다.
“후, 후………… 서, 선더라………… 너………….”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는 일 외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길시언은 안심하는 얼굴이 되었다.
“세, 세………… 힘을 합………… 만족…….”
그리고 길시언은 숨을 거두었다. 네리아는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길시어어언!”
“무슨 의미일까요, 후치 군?”
“예? 아. 예. 저도 여기까지 오면서 줄곧 생각해 봤던 질문이네요. 대충 짐작은 해요.”
펠레일은 푸근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눈을 가늘게 뜬 채 촛불을 바라보았다.
“칼에겐 그의 남은 평생을 지배하고 말 부탁을, 그리고 샌슨에겐 프림 블레이드를, 그리고 나에겐 선더라이더를 줬지요. 그는 우리 세 명에게 그의 일부분을 남겨두고 싶었던 것이겠죠. 아마도 우리 세 명이 서로 힘을 합쳐 이 나라를 돌보라는 뜻일 거예요. 나와 샌슨은 칼의 보좌로 선택된 것이겠 “죠.”
“그렇군요.”
펠레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손가락을 꺾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음. 거기엔 죽는 순간에 나온 길시언의 유머 감각도 포함되어 있는 것일 거예요. 샌슨은 이제 프림 블레이드 덕분에 꽤나 지혜롭고 말 잘하 는 기사로 알려지겠죠?”
“하하하…… 그럼 후치 군의 경우는?”
“마찬가지죠. 샌슨을 태우게 하려니 선더라이더가 너무 불쌍하다는 의미일 거예요. 물론 제가 말을 잃었던 것도 이유는 되겠죠.”
“그렇군요.”
짜작, 자작. 벽난로에서 불타던 나무가 다시 쓰러졌다. 코다슈 씨는 묵묵히 불쏘시개를 들어 벽난로를 헤집었다. 불티가 조금 튀어올라 코다슈 씨 는 눈살을 찌푸렸다.
코다슈 씨는 음식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는 묵묵히 술잔만 비우고 있었고 펠레일은 마치 칼처럼 마셨다. 나 역시 잔을 천천히 비우고 있었 고, 마지막 사람은 조금 전부터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메리안은 장거리 여행에 익숙하지 않아서 꽤나 피곤해했다. 어쨌든 그래서 우리 세 사람이 앉은 테이블은 고요했다. 마치 길시언을 애도하는 분위기처럼 되어버렸군.
휘우우웅. 창밖을 지나는 겨울 바람 소리는 야만적일 정도로 거칠었다. 다시 테이블 위의 술잔을 붙잡던 코다슈 씨는 지나가는 것처럼 말을 꺼냈다. “그래서, 운차이는?”
난 술잔을 내려놓고는 이마를 딱! 소리 나도록 쳤다.
“하하! 그거 아세요? 지금 세 시간 만에 처음 나온 말이라는 거?”
코다슈 씨는 볼에 까슬까슬하게 난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펠레일은 빙긋 웃으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그래도 많이 나아진 겁니다. 처음엔 하루에 한두 마디 듣기도 어려웠지요.”
“짐작이 가요. 운차이도 그랬거든요. 그런데 코다슈 씨는 여자에게 말 걸게 되기까지 얼마나 걸렸어요?”
“여자? 무슨. 남자에게도 아직 말을 잘 안 겁니다.”
“휘유우. 더 심하군요.”
펠레일과 내가 그를 혀 위에 올려놓고 가로세로로 마구 자르는 동안 코다슈 씨는 천천히 술잔 가장자리만 만지작거렸다. 이윽고 그는 털털한 목소리 로 말했다.
“운차이는 어떻게 됐지?”
난 두 팔을 들어올려 항복했다는 시늉을 했다. 펠레일은 빙긋 웃더니 테이블에 팔을 괴고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갖췄다.
난 팔짱을 끼고는 벽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할슈타일 후작을 쫓아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