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8권 – 제15부 :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 4화

드래곤 라자 8권 – 제15부 :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 4화

4

나는 물끄러미 핸드레이크를 바라보았고 핸드레이크는 그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혈기 왕성했던 시절이라구…… 이놈아! 그 눈길은 뭐냐? 너도 참 네 나이에 안 어울리는 꼬마로다. 보통의 꼬마라면 이런 이야기에 신이 나서 비명 을 질러야 정상인데 넌 왜 그런 눈빛이냐?”

“마치 내 눈빛이 보이는 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그리고 난 발에 걸리는 사내애들과는 다르니까. 후치 네드발이거든요. 세상에 후치 네드발은 나 하 나밖에 없지요.”

“그 풋내나는 자신만만함은 또래 녀석들과 비슷한데. 칼이 참 이상하게 교육시킨 모양이군.”

“어쨌든, 그 부끄러운 말을 들은 드래곤 로드는 아마도 크게 웃었을 테지요?”

“이놈이! 난 발에 걸리는 마법사와는 다르다. 핸드레이크라구. 세상에 핸드레이크는 나밖에 없다.”

“윽. 좋은 받아치기였어요. 그러고 보니 당신이 대마법사였다는 것을 잊었군요.”

대마법사의 말은 조용한 어투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상당한 가능성이 담긴 협박이었다. 따라서 할슈타일 공은 질려버렸고 드래곤 로드는 크게 분노 했다.

“네 이놈!”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빠르게 말했다.

“방문 목적은 싸움이 아니오. 만일 원한다면 상대해 드리겠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좋은 대화를 위해 그간의 일은 잠시 접어두고 싶다는 것이 내 요청 입니다.”

드래곤 로드는 아무 말 없이 핸드레이크를 내려다보았다. 할슈타일 공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핸드레이크를 쏘아보았지만 핸드레이크는 드래곤 로드만을 올려다보았다.

“말해 보아라.”

드래곤 로드의 허락이 떨어지자 핸드레이크보다 할슈타일 공이 더 깊은 안도를 느꼈다. 할슈타일 공의 얼굴이 조금 밝아지는 것을 보며 핸드레이크 는 미소지었다.

“루트에리노는 당신에게서 회수한 별들을 파괴했소.”

“알고 있다.”

“알고 계셨습니까? 으음. 한때 그 별들의 소유주셨으니 무슨 방법이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래서 나는 루트에리노와 결별했습니다.”

드래곤 로드는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이하군. 너와 그의 목적은 서로 다른 것이었나?”

“그렇습니다. 루트에리노의 목적은 당신의 패퇴, 그리고 내 목적은 당신에게서 여덟 별을 회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손을 잡은 것인가?”

“그렇습니다.”

“여덟 별을 왜 원하는 것이지? 네 목적이 세상에 대한 지배라면 이렇듯 찾아온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핸드레이크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할슈타일 공이 입을 열었다.

“드래곤 로드. 제가 설명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라.”

“저자가 원하는 것은 별들을 통한 종족의 완성입니다.”

드래곤 로드는 한참 후에야 말했다.

“종족의・・・ 완성?”

“그렇습니다. 여덟 별들은 종족의 창생 사멸을 결정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핸드레이크는 여덟 별을 손에 넣어 대륙의 모든 종족들이 그 스스 로가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는 불합리성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할슈타일 공을 먼저 설득했던 것이군요?”

“그래. 그러니까 할슈타일 공이 대미궁으로 나를 안내해 준 거지. 그렇지 않다면 그가 어떻게 나를 그 안으로 안내해 줄 마음을 먹었겠는가. 내가 드 래곤 로드를 암살하려고 찾아간 것일지도 모르는데.”

음. 일리 있는 말이로군. 난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당신은 할슈타일 공을 통해서 드래곤 로드에게 당신의 뜻을 전한 셈이군요?”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 좀 비약되는 것 같지만…………. 어쨌든 드래곤 로드는 내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들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할슈타일 공의 말 이라면 들어줄 가능성이 있지.”

“역사상 최초의 라자? 하하. 그래서?”

“드래곤 로드는 비웃었네.”

핸드레이크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하마터면 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핸드레이크는 아쉽기 짝이 없다는 듯이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제기랄. 정말 대미궁이 무너져라 웃어젖히더라구. 그리고 그 웃음은 나에게 있어 선물인 셈이었지. 난 그 웃음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었으니 까.”

“뭘 깨달으신 거죠?”

핸드레이크는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하나뿐인 꼬마는 훨씬 간단하게 깨달은 것. 하지만 나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지. 세상에 완전은, 어떤 절대적 의미는 없다는 것 말이야.”

“흐음. 너무 빨리 넘어가서 잘 모르겠어요.”

“어, 간단한 거지. 나나 루트에리노가 덤벼들기 전, 여덟 별은 다 누구의 것이었지?”

“드래곤 로드의 것이었죠?”

“그래. 그렇다면 드래곤 로드처럼 지혜로운 자가……………”

“그거군요!”

의자에서 일어날 뻔했다. 난 당황해서 손을 마구 휘저어대다가 간신히 말을 만들어내었다.

“그거군요! 만일 드래곤 로드가 그걸 원했다면, 드래곤 로드가 만일 당신과 같은 소망을 가졌다면!”

“그렇지. 부끄럽게도 그걸 파악하지 못했어.”

“핫하하하! 핸드레이크여, 핸드레이크여!”

핸드레이크는 무릎이 꺾이는 느낌을 받았다. 휘청거리는 다리에 몸을 얹어두는 것은 지금껏 그가 겪어야 했던 그 어떤 마력 수련보다도 더 어려운 것처럼 느껴졌다. 대미궁이 그의 어깨 위로 전부 무너져내리는 것 같은 착각에 현기증을 느끼며 위를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자네 소원대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내가 왜 여덟 종족을 신으로 이끌지 않았단 말인가! 내가 이 세상이 불합리성의 판테온으로 남겨지길 바라기 라도 했다는 말인가! 핫하하하핫!”

“드, 드, 드래곤 로드여………….”

드래곤 로드는 이제 짓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하는군, 핸드레이크여. 그렇다면 뭔가? 내가 나의 지배를 받는 것들의 영원한 자기 모순을 즐기는 지배자였다는 말인가? 그건 자네들 인간들 에게나 어울리는 말 아닌가? 그러고 보니 내 수집한 책들 중에 그런 말이 있더군. 우민 정치라고 하던가. 하하하. 정말 너무하는군! 기르는 개도 영리 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한 법인데, 내가 왜?”

핸드레이크는 더 이상 뭐라고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잠시 후 드래곤 로드는 좀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비록 지혜로우나 자네 종족의 시야를 벗어날 정도는 되지 못했네. 아니, 자네가 지혜로워지기 위해 쉼없이 받아들였던 자네 종족의 시각들 이 자네를 그렇게 이끈 것일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자네는 자네 종족의 시각에서 날 바라보는 우를 범했네. 아마도…………, 나를 그런 존재로 보았나 보 군. 모든 종족들을 신으로 이끌 수 있는 별을 자신의 지배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사용한다고. 아마 그랬을 테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이해하네. 자넨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그 간단한 행동을 못한 것에 불과하네. 날 이해하기 위해 핸드레이크 자네를 보았다면 이런 희극은 없었을 테지. 그것은 자네 종족들에게는 항상 어려운 일인 듯하더군. 자네 종족들은 타인 속에 들어가려고만 애쓰더군. 만물을 자기처럼 변화시키면 세상이 이해하기 쉬운 것이 될 거라고 믿는 모양이더군.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야.”

핸드레이크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역시…….”

“부정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하하하.”

털썩. 핸드레이크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드래곤 로드는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핸드레이크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미안하군.”

핸드레이크는 두 손으로 땅을 짚은 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드래곤 로드는 이제 아무런 증오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넨 루트에리노의 배신으로 희망을 걸어볼 기회를 잃었겠지. 하지만 그 희망은 아직껏 자네를 지탱하고 있었을 터. 하지만 이젠 그 희망 자체가 거짓이라는 것을 깨달았군. 안된 일이야.”

“화려한…… 복수셨습니다. 드래곤 로드여.”

“그런 셈이로군. 이것이 어느 정도의 복수인지는 이해할 수 있다네. 어느 정도 자네 종족을 이해하고 있으니.”

“예…………. 당신은 나의 전체를 부정해 버리셨고, 그것을…………, 나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하셨으니까.”

드래곤 로드도, 할슈타일 공도, 그리고 핸드레이크도 모두 입을 다물었다. 대미궁은 무거운 침묵으로 잦아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 사나이의 뼈 저린 좌절이, 한 드래곤의 원하지 않았지만 완성된 복수가, 그리고 또 다른 사나이의 관조가 있었다.

“그랬군요………….”

난 휘둘리는 머리를 붙잡으려는 듯이 이마 양쪽을 붙잡으며 말했다. 조용히 앉아 있던 핸드레이크는 갑자기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조금 더듬거리 더니 곧 부젓가락을 쥐었다.

핸드레이크는 벽난로를 뒤적거려 장작들을 뒤집었다. 불티가 어지러이 날렸지만 핸드레이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부젓가락을 난로 옆에 세워두고는 침착하게 말했다.

“드래곤 로드로서도 여덟 별로부터 그 이상의 힘을 끌어낼 수는 없었던 게야. 그는 그것을 자신의 지배에 사용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네. 그것이 여덟 별의 한계는 아니겠지만, 그 힘을 사용하는 자의 능력이 우리 세계를 무시한 완전을 꿈꿀 수 없는 바에야 어떻게 그 별들로부터 신에게 의 길을 끌어낼 수 있겠는가.”

“예. 그랬던 것이군요. 그래서 당신은 클래스 10의 마법을………….”

핸드레이크의 얼굴이 확 굳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말을 끝까지 내뱉지 못하고 입천장쯤에서 사라지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핸드레이크는 깊은 한숨 을 쉬며 말했다.

“그래…………. 이 세계의 모습 자체가 우리를 신의 길에서 가로막고 있었네. 그래서 나는 다른 세계를 만들어서 내 이해의 폭을 넓혀볼까 생각했지. 자 못 거창하기 짝이 없는 꿈이었지.”

•실패하셨죠?”

“실패했어. 다레니안이 말해 주던가.”

“예.”

“그건 완전성에의 도전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이었네. 그것을 깨닫는 것은 훨씬 간단했어. 시오네가 그것을 알려주었지.”

“시오네가…………?”

핸드레이크의 얼굴이 괴로움에 떨렸다. 그가 시오네의 이름을 말할 때는 300년의 시간을 통해 울려온 메아리가 함께했다.

“그래. 나는 두 번이나 다른 종족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를 범했지. 내 곁에 두고 그 자라나는 모습을, 그 지성이 발달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던 시오네 의 욕망도………… 나는 이해하지 못했어. 그래서 이런 모습이 될 수밖에 없었고, 또한 클래스 10의 마법은 허튼소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네. 세 계 창조? 미치광이의 광언에 지나지 않는! 자기를 볼 줄 모르면서 남을 자기라고 착각하듯이! 이 세계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자아도취의 몽상가!”

300년의 울분, 300년의 좌절이 올올이 펼쳐졌다. 그래서 나는 감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핸드레이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핸드레이크는 턱없 이 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떨어뜨렸다.

“……그럼 드래곤 라자는 무엇입니까?”

핸드레이크는 힘들게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자네의 음험한 추측과는 전혀 다른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일세. 그것은 자네가 알고 있는 목적 그대로의 것일세.”

“인간과 드래곤의 교류요?”

“그래. 난 나의 잘못에서 배울 수 있었지. 현명한 드래곤들은 우리의 거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네. 그리고 드래곤들은 우리를 그들의 거울로 삼 고. 그것은…………… 의지할 데 없이 버려진 고아들이 서로를 부둥켜안으려 한 것에 지나지 않네.”

“신이 되지 않은 드래곤과 신이 되지 못한 인간이? 대지에 버려진 종족들끼리?”

드래곤의 신은 없다. 그리고 인간은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쪽의 보살핌을 받는다. 드래곤과 인간은 극단적인 반대항들이다. 그 거리만큼의 애정이 우 리를 연결지었고 서로가 서로를 애타게 부르게 만들었겠지. 핸드레이크는 이를 사리물면서 인정했다.

“비슷해. 나와 드래곤 로드는 우리 양 종족의 아픔을 뼛속까지 느꼈고 그래서 서로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구축할 수 있었네. 우리들은 둘 다 신이 될 수 없었지. 12인의 다리를 아는가?”

“…당신이 만드셨죠?”

“그래. 드래곤 라자는 그것과 비슷해. 우리와 드래곤 사이의 교류의 물꼬를 강제로 열어놓은 것이었네. 그리고 드래곤 라자를 만들기 위해 드래곤의 별이 동원되었네.”

“아, 그래서………….”

“자네는 보았겠지. 크라드메서와 넥슨의 계약에서.”

“예.”

“드래곤 로드와 나는 할슈타일 공의 위치에 주목했던 것일세. 그래서 드래곤 라자라는 것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게지. 드래곤의 별을 이용하여 모든 드래곤을 운명에 예속시켰네. 그들이 드래곤 라자를 통해서 반드시 인간과 교류해야 하는 운명에 빠지게 한 거지.”

핸드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 걸세. 이후 나는 이름을 바꾸고 행동하면서 모든 종족들이 서로를 돌아보게끔 하려고 애써왔네. 인간이 신이 될 수야 없겠지만 보다 나 아질 수는 있겠지. 적어도 다른 종족들을 바라볼 줄 알게 되면.”

“당신이 드래곤 로드의 입장이 되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오해했던 것………….”

“맞았어. 나는 다른 인간들이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게 되기를 원했던 걸세. 하이시커? 하하. 나는 높이 추구하는 자였지. 12인의 다리를 만든 것, 시오네를 받아들인 것, 크라드메서와 카뮤의 계약, 모두 마찬가지야. 그 밖에도 자네는 모르는 꽤 많은 일들을 했네. 내 딴에는 타인을 이해해 보 겠답시고 꽤나 여러 가지로 설쳐댔다네. 하지만 이미 말했듯 나는 내 곁의 시오네조차도 이해하지 못했지.”

일생에 걸쳐 좌절만을, 그것도 다른 사람의 몇 배나 되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좌절만을 겪어야 했던 마법사가 내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었 다.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눈앞을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휴리첼 가문은 도대체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그 까마득한 조상인 핸드레이크 휴리첼도, 그리고 카뮤 휴리첼도, 로넨 휴리첼도, 넥슨 휴리첼도. 그리고, 핸드레이크는 그의 마지막 좌절을 아직 듣지 못했다.

“그래서…………, 에델린의 경우에는 겁부터 집어먹었던 거야. 말을 할 수 있게 만든 다음 곧장 그랜드스톰에 맡겨버렸지. 그 애는 차라리 뻔뻔스럽게 신 을 추구하도록 내버려두었지. 아니, 그걸 간절히 바랐다고도 할 수 있겠군. 어버이가 자식을 통해 대리 만족을 느껴보려고 드는 것처럼. 시오네…………, 신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아버지 곁에서 자라난 시오네의 경우가 나를 두렵게 만들었던 것일세. 시오네의 행동은 차라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 아이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었지. 그 애에겐 타인을 자신으로 만들 권능이 있으니까. 시오네, 그 아이는 인간인 핸드레이크를 이 해하려 들지 않고 나를 뱀파이어로 만들어 이해하려고 들었으니까. 하하하.”

“핸드레이크….”

“참으로 기박할 정도로 실패뿐인 인생이란 말일세. 하…………… 하하하…………. 그리고 드래곤 라자마저도…………….”

드래곤 라자마저도! 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드래곤 라자마저도 그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소박한 이해와 상호 발전이었겠지. 모 든 종족을 신으로 이끈다는 거창한 계획에 비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소박한가. 하지만 인간은 드래곤 라자를 드래곤 지배의 도구로 변질시켰다. 아니, 그것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을까. 시오네처럼, 모든 것을 자기화시켜서 이해하는 인간들은 어쩔 수 없이 드래곤마저도 인간화시키는 것일까?

“크라드메서는 어떻게 되었지?”

핸드레이크는 이제 간절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난 입술을 깨문 채 그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후치. 내가 카뮤 휴리첼을 끌고 가서 크라드메서에게 라자의 계약을 강제했네. 크라드메서는 말이야. 지금이나 그때나 항상 자유로운 드래곤으로 남기를 원했지. 하지만 나는 그의 중용과 균형, 그의 자기 절제가 탐났네. 그래서, 그래서 인간들이 그의 중용과 균형, 그의 관 조하는 정신에서 비롯된 그의 선을 배우게 되기를 원했던 거야. 그래서 이그누스 드래곤, 선악의 균형을 지키는 이그누스 드래곤에게 찾아가 억지로 카뮤와 계약을 맺게 했네. 말해 주게. 이그누스 드래곤 크라드메서는 어떻게 된 거지?”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은 이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난 턱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느끼며 꽉 막힌 목을 통해 애써 침을 삼켰다.

“크라드메서는…..”

레니는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러나 레니의 입은 거기서 멈췄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멍하니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조금도 조바심이 담기지 않은 얼 굴로 그녀를 마주보았지만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혀끝이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내가 지골레이드 님을 선택하면……, 크라드메서 님은 확실히 죽는 거죠?”

지골레이드는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간단한 동작이 그에게는 너무나 힘겨운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레니는 지골레이드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크라드메서 님이 원하는 것이에요.”

뭐야? 크라드메서가 원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그러나 레니는 질문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지골레이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전 당신의 라자가 되겠어요.”

“좋아.”

다시 무한의 어둠과 공간 상실, 그리고 기묘한 빛들의 혼란이 있는 후에, 내가 정신을 차리자 지골레이드는 이미 드래곤의 모습으로 바뀌어 분지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고 레니는 극도로 하얀 얼굴로 그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본 채 서 있었다.

제레인트는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날아가는 지골레이드를 향해 기도문을 외쳤다. 제레인트의 손에서 쏘아져 나간 빛은 날아가는 지골레이드를 통째 로 물들였다. 장관이었다. 제레인트의 작은 몸에서 나온 빛이 분지 전체를 뒤덮을 듯 거대하게 날아가는 지골레이드를 뒤쫓고 있었던 것이었다. 제레 인트의 몸은 이제 미친 듯이 경련하고 있었고 그의 관자놀이에는 굵은 혈관이 솟아올랐다.

“이야야야야야야!”

감히 아무도 접근할 수 없었다. 제레인트는 맨손으로 무너지는 탑을 막아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프나이델은 어이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력은 신력을 거부한다는 말이 이토록이나 허황된 말이었던가? 드래곤, 저 마법의 극한을 달리는 자가 어떻게 성직자에게………….”

어라? 그러고 보니 그러네? 드래곤은 분명히 마나를 다루는 존재니까 신력에 대해서는 거부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거 아냐? 그때 제레인트의 옆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에델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아프나이델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절 보세요.”

“예?”

“전 마법에 의해 말을 하게 된 트롤입니다. 그리고 전 지금 신의 지팡이 노릇을 하고 있지요.”

아이고 맙소사!

그러고 보니 에델린은 마력과 신력을 한몸에 가지고 있었잖아! 우리들은 모두 어이없는 얼굴로 에델린을 바라보았고 아프나이델은 이를 악물면서 물어보았다.

“그럼, 마력은 신력을 거부하지 않는 겁니까!”

“아니오. 인간의 경우엔…………, 그 양자를 하나로 모을 수 없습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예?”

“신력은 높이 올라 귀의하고 마력은 넓게 퍼져 지배하니까요.”

에델린의 모호한 대답을 들으며 아프나이델은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애타는 얼굴로 뭔가를 질문하려 했지만 그때 지골레이드의 포효 가 들려왔다.

“캬아아아아!”

그리고 그때 크라드메서는 마지막 환영을 물어뜯고 있었다. 크라드메서는 그 와중에서도 침착했다. 그는 물어뜯고 있던 환영을 통째로 휘둘러 날아 오는 지골레이드를 향해 집어던졌다. 산덩어리만 한 환영은 허공에서 물방울로 바뀌어 비산했으며 지골레이드는 순간 몸의 균형을 잃고 공격 목표를 놓쳤다. 그 짧은 틈을 타서 크라드메서는 날아올랐다.

“크라라라라!”

크라드메서의 비상은 날아오른다기보다는 강하게 쏘아져 올라가는 듯했다. 맙소사, 저렇게 날아서 날개 부러지지 않나? 크라드메서는 그대로 물방 울들을 뚫으면서 지골레이드를 향해 뛰어올랐다. 그러나 지골레이드는 아슬아슬하게 크라드메서의 공격을 피하면서 더 높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지골레이드와 제레인트를 잇던 빛의 강은 끊어졌고 제레인트는 마치 말에게 걷어차인 사람마냥 뒤로 나가떨어졌다.

“으오우우웃!”

“제레인트!”

우리는 비명을 지르며 제레인트에게 달려갔지만 그의 외침 소리가 들려온 순간 우리들은 제레인트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기로 묵시적으로 약속해 버 렸다.

“와우, 여러분이 증인입니다! 꼭 말해 줘야 돼요! 내가 드래곤을 치료했다고!”

크라드메서는 허공에서 지골레이드를 놓치고는 비틀거렸다. 그는 그대로 분지 주변의 산봉우리들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면서 위로 치솟아올랐다. 곧 지골레이드와 크라드메서는 다시 구름 위로 사라져버렸다. 그 광경을 보던 샌슨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말했다.

“약해졌어, 확실히! 환영들과의 싸움 때문에 많이 지친 거야!”

“그래? 그런가?”

“예, 칼. 확실히 몸짓이 다릅니다! 이제 잘만 하면…………, 후치! 길시언의 스피어들을 받아!”

“뭐야? 오, 맙소사, 그 말 취소해 줘!”

내 고함소리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길시언은 등에 지고 있던 스피어 뭉치를 풀어 내 앞에 집어던졌다. 그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그 눈 매를 본 순간 난 고개를 끄덕이며 스피어들을 받아들었다. 샌슨은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던 스피어들을 풀어헤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정말 이런 짓까지 하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할 수 없지. 지골레이드를 돕는다! 알았지, 후치?”

난 악에 받쳐서 외쳤다.

“여러분들이 증인입니다. 꼭 말해 줘야 해요! 내가 드래곤에게 창질을 했다고! 오, 맙소사. 내가 미쳤다는 것이 이렇게 들키게 되기를 원하지는 않았 “어!”

“이 자식아. 그럼 나도 미쳤다는 말이잖아.”

운차이는 피식거리며 스피어를 들어올렸다.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옆으로 물러난 가운데 나와 샌슨, 그리고 운차이는 땅에 스피어를 꽂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들은 스피어를 하나씩 든 채 구름을 겨냥하여 섰다.

세명다 나란히 스피어를 든 오른팔을 뒤로 당기고 왼팔을 앞으로 들어올려 균형을 잡고 서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무서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 리고 우리 옆에서는 이루릴과 아프나이델이 캐스팅을 시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흘긋 돌아보자 입술을 꾹 다문 채 허공을 쏘아보고 있는 샌슨의 굳은 얼굴이 보였다. 그의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이 잠시 내 눈을 사로잡았을 때 운차이가 외쳤다.

“내려온다! 방향은 오른쪽! 날 따라 던져!”

“이야아아아!”

“하아아아아!”

운차이가 집어던진 스피어의 뒤를 따라 나와 샌슨의 스피어가, 그리고 무시무시한 스펠들이 그 뒤를 따랐다. 오른쪽 하늘에서 느닷없이 구름을 뚫고 나타난 크라드메서는 무수한 공격을 받으며 허공에 멈춰 비틀거렸다. 스피어를 집어던진 우리들은 명중 여부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재빨리 주위에 꽂아두었던 다른 스피어들을 뽑아들어 마구잡이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그 중간중간에 이루릴과 아프나이델은 마법을 쏟아부었다. 허공에 뜬 크라드 메서의 모습이 마치 바람에 의해 찢어질 듯 나부끼는 깃발처럼 느껴지는 순간, 구름을 뚫고 지골레이드가 그 위를 덮쳤다.

“캬아아아아!”

그 순간, 나는 크라드메서의 눈을 보았다. 그 눈에서는 조금의 광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골레이드가 크라드메서의 목을 물어뜯을 때도, 샌슨의 기 괴한 함성이 울려퍼졌을 때도, 그리고 레니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비명을 지를 때도 나는 그 눈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크라드메서 니이이임!”

난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며 말했다.

“……죽었어요. 자살이죠.”

“자……살?”

“예. 칼은…………, 그리고 다른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자살이에요. 크, 크극. 아마 그로서는……………, 자 신이 자살한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한 채 한 행동임에 분명하지만………..”

“으…… 으허허헉!”

핸드레이크는 죽음 같은 신음을 흘렸다. 그는 그대로 무릎에 얼굴을 박고서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나오는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핸드레이크의 비명소리와 더불어 바깥의 바람소리가 더욱 거세어졌다. 난 계속해서 흐느끼며 말했다.

“나는………… 단수가 아니다…………… 예. 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불사의 존재지만, 또 다른 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친지의 죽음 도, 애인의 죽음도…………. 드래곤은………… 드래곤은 그럴 수 없었어요. 넥슨을…… 그 파괴된 넥슨을 자신의 라자로………… 자신의… 라자………로.”

난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한참 호흡을 고르고 나서야 남은 말을 다 뱉어낼 수 있었다.

“세 번에 걸쳐 죽었던 넥슨을 자신의 라자로 받아들였을 때부터, 크라드메서의 죽음은 이미 정해진 일이었겠지요. 카뮤의 죽음과 넥슨의 죽음을 통 해 두 번 죽었던 크라드메서, 아니, 영원의 숲에서 세 번이나 죽었던 넥슨을 받아들였으니 크라드메서는 다섯 번이나 죽었던 것일까요?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드래곤은 그걸 견딜 수 없었을 거예요.”

“크라아아드……메서! 으크흐흑!”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쥔 채 오열하는 핸드레이크를 보면서도 난 아무런 동정심을 느끼지 못했다. 눈을 너무 거칠게 비벼서 눈 언저리가 화끈거린 다. 벽난로에서 뿜어져 오는 열기가 뜨거운 얼굴을 더욱 뜨겁게 만든다. 난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나는 단수가 아니다. 예. 그래요. 하지만 드래곤은 아니에요! 우리의 반대쪽 극단인 드래곤은 아니었다구요! 그들은 단수예요. 그들에게 드래곤 라 자를 맨 것은, 결국 그들의 독자성을 파괴한 것이었어요! 우리는 드래곤에게까지 우리들을 투영해 버린 거죠! 배워? 우리가 드래곤에게 배워요? 하하 하! 그래요. 드래곤은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우리는 드래곤의 제자가 될 수 없었어요!”

“크라드메서…………, 크라드메서엇! 으크흐흑!”

핸드레이크의 오열. 인간을 신으로 이끌 수도, 인간을 세계로 이끌 수도 없었던 마법사의 오열이 날카로운 쇠붙이의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우스스. 벽난로 장작은 거센 불길에 쓰러졌다. 그리고 핸드레이크의 어깨는 인간이라는 불길에 의해 무너져내렸다.

머리가 깨지는 것처럼 아프군. 그런데 누가 내 눈앞에 초를 켠 거야? 아니, 낮이 밝은 것이구나. 난 눈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이런. 내가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군. 아이고, 삭신이야. 몸을 일으키려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여기가 어디지? 어라, 어디서 많이 보던 천장이

다? 그리고 주위의 가구들도 왠지 눈에 익숙한 것들이로군? 여기가 어느 여관이기에……………, 윽. 우리 집이다.

아이고 머리야. 그런데 핸드레이크는? 바닥에 앉은 채 몸을 돌리다가 나는 굳어버리고 말았다.

핸드레이크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머리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겨울의 낮은 햇살이 그의 은빛 머리를 비추고 있었다. 그의 주 위 전체에 빛이 어려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핸드레이크의 얼굴은 그림자로 물들어 어두웠다.

설마 밤새도록 저렇게 하고 있었던 것인가?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다리를 힘들게 움직여 일어났다. 똑바로 서는 순간 머리가 울려 자신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그때 핸드레이크는 말했다. “일어났느냐.”

핸드레이크는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말했다. 난 간신히 의자를 짚고 똑바로 섰다.

“어, 자고 계신 줄 알았어요. 설마 밤새도록 그렇게 앉아 계셨어요?”

핸드레이크는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손을 옆으로 움직였다. 마치 손만 살아 있는 것 같군. 이윽고 핸드레이크는 지팡이를 쥐고 일어났다. “시내로 나가보자꾸나. 후치. 난 줄곧 산트렐라의 노래에서 아침을 먹었지. 같이 가서 식사하자구.”

“아, 예. 먼저 좀 씻고…………….”

“그래.”

핸드레이크는 내가 세수를 마치고 옷을 입는 동안 마당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누가 보면 우리집 마당에 사람처럼 생긴 나무가 났다고 여겼을 것이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장을 뒤지다가 문득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몇 달 전의 기억이군.

아버지가 떠나시기 며칠 전 밤이었지. 아버지는 뭘 쓰시다가 장 위에 올려놓으셨지? 난 장 위를 더듬어보았다. 잠시 후 나는 장 위에서 먼지를 뽀얗 게 뒤집어쓴 종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후치 보아라.

네가 발견한 이 문서는 내 유언장이다. 유언이랍시고 쓰기는 쓰는데 별로 할말도 없군. 네가 어른이 될 때까지 제대로 돌봐주지도 못한 채 이렇게 떠난 아버지를 용서해라. 그리고 네까짓 게 용서 안하면 어쩔 거냐? 난 이미 죽었단 말이다.

앞이 막막하고 워낙 어처구니가 없겠지만 그건 대수롭잖은 것이다. 별로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다. 그저 보고 싶을 때 내 얼굴을 못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 나누지 못한다는 것뿐이지, 내가 널 사랑하는 마음은 그대로다(짜식아. 죽은 사람이 뭐 특별히 마음 바뀔 일이 있겠냐? 하하하..

하지만 부탁이니 넌 빨리 날 잊어다오.

네 가슴속에 남겨지고 싶지는 않다. 나는 죽은 자가 산 자의 인생에 너무 간섭하는 거, 좋지 않게 생각한다. 그리고 산 자가 죽은 자를 죽지 못하게 하는 것도 마찬 가지다. 날 조용히 잊혀지게 해다오. 네가 내 추억을 부여잡고 있어 봐야 네 감정만 피곤한 일이다. 어차피 죽는다. 조용히 받아들여라. 이왕이면 웃으며 날 질투해 줬으면 더 좋겠구나. 이제야 모든 고통과 번민에서 영원히 자유로워진 네 아버지를 말이다. 하하하.

네가 즐거우면 나도 즐겁다. 그 사실은 내가 죽었다고 해서 특별히 바뀔 것도 없다. 그러니 즐겁게 살아라. 그러면 나 역시 죽어서도 즐거워할 테니까.

안녕.

아이고, 아버지……. 난 아버지의 유언장을 부여잡고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시 후 내 손에 잡힌 유언장은 부옇게 보이기 시작했다. 대충 준비를 마친 나는 핸드레이크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내가 말을 건네기도 전에 핸드레이크는 발걸음을 뗐다. 결국 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그의 뒤를 따랐다.

핸드레이크는 나보다도 더 익숙한 걸음걸이로 숲 사이를 걸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핸드레이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무장은 왜 한 거냐?”

“예?”

“갑옷 소리에 검이 덜그럭거리는 소리까지 요란하구나. 고향에 돌아와서 밥 먹으러 가는 길이지 않느냐?”

윽. 그러고 보니 난 모험 다닐 동안 입었던 가죽 갑옷에 바스타드 소드까지 그대로 걸치고 있었다. 게다가 손에는 OPG까지 끼고 있군. 난 멋쩍은 어 조로 말했다.

“아, 그렇군요. 그냥 버릇이 돼서 그래요. 여행 다니는 동안 무장을 옆에서 떼어놓지 않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이제는 없으면 허전하네요.”

핸드레이크는 빙긋 웃었다. 저 웃음은 뭐지?

“애정은 속박인 게냐?”

“머리 꼬리가 남아 있어야 소고기인지 말고기인지 알죠.”

“별말 아니다. 어서 가자꾸나.”

그것 참. 별말 아니라고 하니까 더욱 무슨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말이 되는데 그래. 핸드레이크는 그저 웃을 뿐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기색은 없었

다. 그렇다면 이건 내게 건네어진 과제인가 본데.

아무래도 어제의 핸드레이크가 아니다. 그렇다면 타이번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는데. 300년의 좌절의 아픔은 핸드레이크가 가져가고 이제 내 눈 앞에서 걸어가는 것은 타이번일 뿐인가?

희한한 일인걸.

산트렐라의 노래에서는 주당 처리 작업이 한창이었다. 해너 아주머니는 익숙한 동작으로 주정뱅이들을 일으켜세우거나 물을 끼얹거나 더 독한 술을 건네거나 하면서 홀 가득 널브러진 주정뱅이들이 겨울 아침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하고 있었다. 그 분주한 작업 속에서도 해 너 아주머니는 홀로 들어서는 나와 타이번을 향해 쾌활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아, 오늘은 후치도 함께 식사하는 건가요?”

타이번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꽤나 분주한 모양이군.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준비하게나. 아직 이른 시간이니까.”

타이번은 홀 한구석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고 나는 해너 아주머니를 도와서 주정뱅이 처리 작업을 수행하게 되었다. 어젯밤의 그 광란스러운 파티 의 잔해들을 피해 다니며 주정뱅이들을 일으키는 동안 나는 틈틈이 타이번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타이번의 얼굴은 평범할 뿐이었다. 정말 술집 한구석에서 조용히 아침 식사를 기다리는 노인네의 얼굴, 그러니까 평생 동안 계속해 온 아침 식사라는 습관에 대한 약간의 지루함이 포함된 고요한 행복감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타이번이 앉은 테이블에는 겨울 아침의 낮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고 그래서 그의 주위를 떠도는 금빛 먼지들은 그의 평화스러운 모습을 더욱 희미하고 따스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내 이야기를 전해 들은 타이번의 반응이 어떨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상상해 보았지만 무반응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 했는데. 그래서 나는 약간의 배신감을 느끼면서 그의 평화스러운 모습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산트렐라의 노래에서 아침 식사를 끝내고 나서 나와 타이번은 다시 성으로 들어갔다. 성내는 이미 분주했다. 아무르타트에게 가져다줄 보석이 도착 했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아무르타트가 있는 끝없는 계곡으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내를 뛰어다니는 경비 대원들의 모습이라든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는 하멜 집사의 모습은 활기차 보였다. 굴러다니는 마차들의 수레바퀴 소리, 겨울철이라 마구간으로 옮겨졌다가 방금 끌려나와 기 운이 넘치는 말들의 모습, 모두들 신나 보이는군.

타이번은 여기저기로 뛰어다니는 하멜 집사를 간신히 붙잡았다.

“여, 집사님. 준비는 잘 되어갑니까?”

“아, 예. 경비 대원들의 차출은 이미 끝났고 성을 비우는 동안의 업무도 정리해 두었습니다. 겨울철이라 별 업무가 없어서 다행입니다. 하하. 차출된 경비 대원들은 아무르타트 정벌군에 포함되었던 인원들을 주축으로 편성했지요. 경험이 충분한 사람들이니만큼………….”

흥분한 하멜 집사는 끝도 없이 말을 계속하려 들었다. 타이번은 싱글거리며 그의 설명을 들었고 나는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아주며 성의 안뜰, 즉 연병장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황량한 성이었나? 허, 이거 참. 내 눈이 높아진 모양이군.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면서 별의별 신기한 것을 다 봤더니 우리 성이 너무 황량하게 보이는데. 헬턴트 성의 모습은 익숙함이 가져다주는 친근함만으로는 충분히 가릴 수 없는 옹색함이 있었다. 하긴, 영주 부재의 성이니 뭐 그리 좋은 모습으로 있을 수 있을까.

응?

어라, 이상한 기분이 드는데, 뭔가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는 느낌이 드는걸? 그런데 그게 뭐지? 난 눈을 멍하니 뜬 채 다시 성의 곳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번 지나간 생각은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짜증나네, 이거.

에이. 중요한 생각이면 다시 떠오르겠지, 뭐. 난 포기하고는 경비 대원들을 도와 짐 꾸리는 일을 거들었다. 아무르타트가 설마 포로들의 편의까지 봐 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만큼 그 포로들을 이곳까지 데리고 오려면 꽤 꼼꼼한 준비가 필요하겠지.

“나도 간다니까아아!”

“안 돼.”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해!”

“안 돼.”

“와, 우화, 후아. 정말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말할 줄은 몰랐어………..”

제미니는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입을 짝 벌렸다. 그러나 제미니가 그 정도로 포기했다면 내가 더 놀랐을 것이다. 제미니는 입술 을 꼭 깨물면서 말했다.

“모험인지 뭔지 떠나더니 귀까지 잘라먹고! 이번엔 모가지라도 잘라먹고 돌아올지 어떻게 알아? 안 돼, 안 돼. 절대로 혼자서는 못 보내!”

모가지가 어쨌다고? 계집애, 말버릇 하고는. 난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서 선더라이더에 재갈을 물리기 시작했다. 원, 녀석. 키도 크다. 머리 낮춰, 임마. 선더라이더는 어깨가 높아서 재갈 물리는 것뿐만 아니라 안장 올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이거야 원. 뱃대끈 맬 때 편한 점은 있지 만. 임마. 너도 낙타처럼 무릎을 턱 꿇을 줄 알면 편할 텐데. 하하하…. 하…….

…..불안하다!

왜 이렇게 고요한 거지? 난 입술을 꽉 깨물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너무너무 불안하다.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선더라이더의 푸 르릉거리는 소리뿐이다. 왠지 그 소리마저도 괴기스럽게 들리는데? 눈을 질끈 감고 버텨보려고 애썼지만 주위를 엄습하는 공포는 예사로운 것이 아 니었다. 결국 도저히 더 참지 못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제미…………….”

“키야아아아!”

“우와아아악!”

기괴 무쌍한 포효(?)에 이어 눈앞으로 제미니의 무시무시한 얼굴이 돌격해 오는 순간 나는 엉겁결에 몸을 숙이고 말았다. 그리고 곧이어 무엇인가가 내 어깨를 짚으며 뛰어오르는 느낌. 당황해서 몸을 일으켰을 때 이미 제미니는 선더라이더에 올라타 있었고 놀란 선더라이더는 투레질을 하면서 달 려가고 있었다.

“이힝힝힝!”

“엄마야아아아!”

제미니는 자지러지면서 선더라이더의 목에 매달렸지만 그것은 선더라이더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선더라이더는 버둥거리면서 갈팡질팡 뛰기 시작했고 나는 그 뒤를 따라 달리며 고함을 질렀다.

“내려! 제미니, 내리라우! 이런, 아, 아냐! 멈춰! 내리지 말고 멈춰! 으아아, 엉덩이를 들지 마!”

“살려줘! 후치야, 살려줘! 꺄아아악!”

“고삐! 고삐를 잡아! 고삐를 잡으라구! 이 망할 계집애야, 그건 갈기잖아! 그건 귀야! 고삐라고, 고삐이이! 제기랄, 아무 거나 꽉 붙잡아! 선더라이더 이 자식! 제미니를 떨어뜨리면 스테이크로 만들어버릴 거야아아아!”

“이힝힝힝힝!”

그리하여 아무르타트 교섭단 일행에는 헬턴트 영지 숲지기의 딸 제미니 스마인타그 양이 포함되게 되었다.

아무르타트 교섭단이 출발한 것은 12월 20일, 화창한 겨울 아침이었다. 그리고 끝없는 계곡까지의 여정은 현재로서는 10일. 내가 선더라이더를 타 고 달리면 훨씬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 거리지만 나 혼자서 그 많은 포로들을 인솔해서 돌아올 수야 없으므로 꽤 많은 인원들이 함께 출발하게 되었 다. 그래서 여정을 단축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쩐지 시간이 빡빡하군. 아무르타트가 이틀이나 사흘 정도 기다려줄 아량이 있다면 좋을 텐데. 아니, 기 한이 다 될 때까지 기다려줄 참을성만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감지덕지해야 되나? 제길.

게다가 나에겐 시간에 대한 걱정뿐만 아니라 다른 걱정거리도 있었다.

“아, 참새다.”

“뭐라구? 에이이익! 받아라, 일자무시이익!”

우리 일행 앞으로 멋모르고 날아 내려온 참새는 내 고함소리에 기겁하며 포로롱 날아올랐다. 바스타드를 들고 헉헉대는 나를 향해 타이번은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참새가 그토록이나 위험한 생물이었는지는 몰랐는데.”

“호, 혹시 식인 참새 아닐까요?”

“……후치. 제발 좀 진정해라. 제미니는 침착한데 네가 왜 그리 긴장해 있는 거냐.”

“우힛히히히!”

터너의 괴이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난 바스타드를 다시 꽂아넣었다. 제미니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무정하게도 까르르 웃어댔다. 으윽.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건데. 하긴………… 그래. 타이번의 말이 맞아. 아무리 제미니가 우리 일행에 섞여 있다지만 내가 왜 이렇게 바보처럼 긴장해 있는 거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말이야. 타이번도 있고 터너가 인솔하는 경비 대원들도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위험한 상황은 없을 거야. “아, 토끼다.”

“우아아아! 제미니, 내 뒤로 숨어! 기름 젓기 이이!”

경비 대원들은 이제 쓰러질 듯한 모습이었고 터너는 제대로 웃지도 못했다. 너무 웃어서 현기증을 느끼는 모양인지 터너는 마차 위에 뛰어올라 짐더 미 위에 누워버렸다. “우킬킬킬! 그럼 저건 식인 토끼인가 보지?” 난 맥빠진 동작으로 바스타드 소드를 다시 꽂아넣으며 도망치는 토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차 위의 제미니는 깔깔거리며 달아나는 토끼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하얀색이네. 겨울이라 털갈이를 마친 모양이야. 예뻐라.”

아, 그렇군. 그러고 보니 토끼든 뇌조든 털갈이를 마칠 시기인데. 하지만 아직 눈은 내리지 않아서 잿빛 땅 위로 달려가는 토끼의 모습은 선명하게 보였다. 하멜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첫눈이 늦는데.”

“다행이죠. 억류되었던 사람들을 데리고 올 때 편할 테니까.”

“으음. 그러고 보니 그것은 참 다행이로구나. 난 겨울 날씨 치고는 너무 따스해서 내년 농사 걱정하고 있었는데. 하하하.”

하멜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정말, 정말 감개가 무량하구나.”

“예?”

하멜 집사는 주위의 산과 들판을 바라보면서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치야. 난 평생 이 영지 내에서만 살아왔단다. 철들면서부터 아버님을 도와서 성의 일을 돌보았고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성내의 일뿐만 아니 라 영지의 모든 사무를 관장하느라 눈코뜰 새가 없었단다. 하하. 네가 보기엔 우습겠지만 나로선 이건 일생 일대의 모험이란다. 어쩐지 짜릿한 휴가 라도 받은 듯한 기분이구나. 물론 휴가 치고는 별로 좋은 내용의 여정이 못 되지만 말이야.”

음. 그렇기도 하겠네. 하긴, 내가 별난 거지. 이 정도 나이의 꼬마가 그토록이나 많은 모험을 치러냈다는 것이 말이야. 거기에 비하면 다른 사람들 은…………. 난 뒤를 주욱 둘아보았다.

터너가 지휘하는 경비 대원들이 30여 명, 그리고 말과 노새들이 잔뜩이다. 포로들을 태울 동물들이다. 그리고 다시 그 뒤로 열 대의 마차가 있었다. 마차들은 모두 보급 마차로서 아무르타트에게 붙잡혀 있던 포로들을 수송하기 위한 보급 물자가 가득 실려 있었다. 돌아올 때쯤이면 마차가 비기 시 작할 테니 포로들을 실을 수도 있겠지. 첫 번째 마차의 짐더미 위에는 타이번과 제미니가 걸터앉아 있었으며 그 옆에는 웃다가 지친 터너가 드러누워 있었다. 단출한 일행이야. 어차피 이 이상 인원들을 차출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 영지의 사정이긴 하지만.

끝없는 계곡으로 향하는 동안 타이번의 모습은 나의 주된 관심사였다.

아니, 제미니가 관심 밖일 경우에 한해서만 나의 주된 관심사였다고 말해야 정확하겠군. 어쨌든 제미니가 더없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동안 나 는 타이번의 모습을 조용히 관찰했고 타이번은 그런 내 시선을 느끼는 것인지,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구별할 수 없는 모호한 태도로 있었다.

떠가는 구름을 보며 흥얼거리는 타이번의 모습이라든지 옆을 걸어가는 경비 대원들과 농담을 주고받는 그의 모습들에서는 이상한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블랙 드래곤을 찾아가는 일행의 일원이라고 보기엔 너무 태평해 보인다는 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300년 동안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위 명을 쌓았던 마법사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점도 나에게는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다른 경비 대원들이라든지 하멜 집사, 그리고 제미니의 경우에는 그의 대범함을 존경하는 정도로 그의 태평함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석양이 내릴 때, 혹은 아침에 일어나 짙은 안개 속을 걸을 때 타이번의 모습은 나에게 기괴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서쪽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에 타이번은 항상 불같이 타오르는 석양을 정면으로 받게 되었고 그럴 때의 그의 얼굴은 퇴락한 건물, 거미줄마저도 옹색 하게 걸려 있는 퇴락한 신전의 쓸쓸한 전경처럼 보여 나를 안쓰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차들의 덜그럭거리는 바퀴소리만이 울려퍼지는 몽환적인 아 침 안개 속에서 희끗희끗하게 보이는 타이번을 바라볼 때, 나는 감당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그의 얼굴을 외면해야 했다.

타이번은 자신을 바라보고,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도, 우리들은 별다른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오가는 말이라고는 일상적인 말뿐이었다. 모닥불을 켜 놓고 모여드는 밤의 모임에서도 타이번이 먼저 잠들거나 내가 먼저 잠드는 일은 있어도 우리 둘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드물었다.

“타이번 씨는?”

“잠드셨어요.”

“아, 그래?”

하지만 일행 중 최연장자와 최연소자 사이에 오가는 이 기이한 침묵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기에는 그 색깔이 너무 희미했다. 주위는 온통 짙은 색뿐이었으니까. 웃고 떠들지만 천천히 바라보면 느낄 수 있는 일행들의 불안함, 짙어만 가는 겨울의 향취 때문에 황량함이 물씬 배어나오는 주위의 정경, 모두 짙은 빛깔이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짙게 우리들을 물들이고 있는 것은 아무르타트의 공포의 색깔이었다.

“아무르타트의 별명 중에 석양의 감시자라는 말이 있지요.”

“그게 무슨 뜻일까요?”

하멜 집사의 질문에 타이번은 지나가는 말처럼 대답했다.

“아마도 모든 것에는 멸망이 있음을 증명하는 자라는 뜻이겠지요. 공정함도, 친절도, 사랑도, 관심도 질릴 때가 있는 법이지. 하지만 불균형, 불평 등, 증오, 오해도………… 역시 끝은 있는 법 아니겠소. 아무르타트의 이름 앞에서는 그 누구도 영원을 맹세할 수 없겠지. 영원한 사랑, 영원한 충성…………. 모든 것은 부질없다고 말해 버릴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아무르타트겠지요.”

“우울하군요.”

새로운 아침마다 더욱 매서워지는 겨울의 추위는 일행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하멜 집사는 성 안에 있을 때의 그의 모습을 잊어버릴 정 도로 쾌활했으며 그 점에서는 제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 둘은…………, 나이도 많이 다르고 사고도 많이 다르지만 공통점은 있었다. 이 여정의 불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점에서 둘은 서로 닮았던 것이다. 하멜 집사의 경우에는 비로소 영주님을 구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과, 평생 처음으로 영지의 바깥에 나가는 데서 오는 흥분 때문에 아직 불안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미니는 여행의 위험이라든지 영지 바깥의 공포 등에 대해 서는 모호한 의식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미니의 곁에 있는 경비 대원들의 모습이라든지 나의 모습 같은 것들은 그녀에게 모호한 공포보다는 훨씬 강 력한 친숙함, 그리고 안도감을 주는 모양이다. 그래서 제미니도 불안을 몰랐다.

“꺄아아악! 저리 가! 저리 가!”

“뭐, 뭐야? 이런! 제미니? 아, 알았어.”

얼굴이 벌겋게 된 내가 중얼거리며 물러나자 숲 속에서 옷을 갈아입던 제미니는 더욱 뾰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가지 마! 무섭단 말이야아아!”

경비대원들의 요란한 웃음소리. 저건 불안이 아니라 투정이지. 으으윽.

어쨌든 일행 중에 쾌활한 사람이 둘이나 있다 보니 전체 일행들의 발걸음도 퍽 가벼웠다. 몬스터나 여행자 하나도 만나지 못하는 겨울 여행은 그렇 게 계속되어 마침내 아흐레째의 하루도 지나갔다. 하지만 아무르타트는 그때까지도 아무런 움직임, 어떤 기별도 보내오지 않았다. 일행들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지만 아흐레 동안 계속된 지루함 때문에 그 긴장감도 그다지 강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어코 도착했다는 안도감 때문에 차라리 즐겁게 아흐레째의 야영에 들어가게 되었다.

내일은 드디어 끝없는 계곡에 들어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