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8권 – 제15부 :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 5화

드래곤 라자 8권 – 제15부 :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 5화

5

“무덤이라구요?”

“그래. 아무리 봐도 무덤인데. 이상한 일이군.”

터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래. 정말 이상한걸?

“여기는 인가하고는 무지무지 떨어진 곳인데…………. 누가 무덤을 썼을까요? 모험자들이라도 이 근방은 별로 돌아다니지 않는데.”

“그러니까 이상하다고 했잖아. 그것 참. 끝없는 계곡에서 무덤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뼈다귀라면 이해가 가지만 무덤이라니.”

척후조로서 일행보다 앞서 달려온 나와 터너, 그리고 몇 명의 경비 대원들은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끝없는 계곡 입구를 관찰하다가 눈에 잘 띄는 자 리에 만들어진 무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저게 정말 무덤인가? 너무 멀어서 뭔지 잘 구별도 안 되는데 말이야. 게다가 아침 나절이라 군데군데 서 피어오르는 안개들 때문에 더욱 집중해 보기가 어려웠다.

그때 다른 경비 대원들 중 하나가 말했다.

“어이, 터너. 저기.”

나와 터너는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계곡 안쪽 가득히 피어 있는 안개들의 흐름 사이사이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사람처럼 생긴 모습을 볼 수 있 었다. 꽤 먼 거리임에도 나무들이 모두 헐벗은 계절이라 그 형체는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긴 해도 가득 흐르는 안개 때문에 인간인지 오크인지 구별 하기는 어려웠다. 터너는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이라니? 끝없는 계곡에 무슨 사람?”

하지만 잠시 후 그는 더욱 해괴한 목소리를 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어? 무덤에 참배하려는 것인가? 사람 맞나 보네?”

사람처럼 보이는 그 반점은 분명한 걸음걸이로 무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다지 빠르지 않은 걸음걸이로 느긋하게 걸어가는 것으로 보아…………… “어?”

“왜 그래, 후치?”

“저 걷는 모습이 왠지 익숙한데요.”

터너는 얼떨떨한 얼굴로 날 바라보더니 다시 그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익숙하군. 분명히 왼쪽 다리를 앞으로 내민 다음에는 반드시 오른쪽 다리를 내미는데. 왼쪽 다리를 두 번 내밀거나 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아 걸음마는 확실하게 익힌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겠어.”

“다음부터 농담을 말할 때는 ‘이제부터 농담을 말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나서 할게요. 지금은 농담이 아니라구요.”

“그래? 하지만 뭐 특별히 이상한 걸음걸이도 아닌데…………….”

“어어어!”

다음 순간 나는 우리들이 숨어 있던 바위 무더기 뒤에서 벌떡 일어났다. 경비 대원들은 기겁해서 날 말리려고 들었지만 이미 나는 앞으로 달려나가 고 있었다. 곧 우윳빛 안개가 거침없이 나를 휘감아 돌았다.

무덤까지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지고 무덤 앞에 서 있던 사람의 모습도 순식간에 커졌다. 그리고 그 사람의 눈도 순식간에 커졌다. 그는 믿을 수 없 다는 얼굴로 말했다.

“혹시…….”

난 제자리에 멈춰 선 채 무덤을 가운데 두고서는 얼빠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얼빠진 얼굴로 날 마주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혹시 당신, 나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사람 아닙니까?”

“그러시는 어르신께서는 혹시 저 같이 멋진 사나이를 만들어내어 대륙을 구하신 분 아니십니………, 악! 왜 때려요?”

“대륙을 구해? 제 아버지는 어떻게 구할 생각을 한 모양이군. 그것만으로도 퍽 기특하고 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너무 상심 말거라, 아들아.”

“이건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인데 말이죠. 지금 아버지의 모습에선 어떤 급박한 위기감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 모르세요? 아버 지를 구하기 위해 필설로 형용 못할 고생을 해온 제가 바보가 되는 느낌이라구요.”

“오오, 더욱 자랑스럽구나! 그걸 인정하는 경우는 정말 드문데 말이야.”

“그거?”

“바보가 스스로를 바보라고 인정하는 것.”

“아버지이이!”

나와 아버지가 이런 너무나 감동적으로 해괴망측한 상봉을 하는 동안 터너와 다른 경비 대원들도 안개를 헤치며 우리 가까이로 걸어왔다. 그 동안 나와 아버지는 서로 손을 맞잡고 세상에서 보기 드문 진귀한 춤을 추어대고 있었다.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터너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힘들 게 말했다.

“이, 이, 이거 말씀입니다. 네드발 씨.”

무덤 앞에서 복잡한 스텝을 구사하고 있던 나와 아버지는 그제야 서로 떨어졌다.

“오오, 자네도 왔는가, 터너 군?”

아버지는 정말 품위가 뚝뚝 떨어지는 태도로 말했다. 비록 그 옷차림은 집 떠날 때 입고 계셨던 옷 그대로라 걸레짝이나 다름없었고 좀 야윈 얼굴도 세수를 제대로 못하셨는지 엉망이었지만. 터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예. 아무르타트에게 억류되었던 포로들을 돌려받기 위해 온 것입니다.”

“아, 그래? 그런데 이 녀석은 왜 데리고 왔는가?”

“예? 아, 글쎄요. 엄밀하게 말하자면 저희들이 후치의 뒤를 따라왔다고 해야 할 겁니다. 후치는 영지 바깥으로 달려나가 아무르타트에게 줄 보석을 구했으며 여기까지 우리들을 인도했으니까요.”

아버지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날 바라보셨다. 그러고는 갑자기 두 손으로 내 볼을 움켜쥐며 앞으로 확 끌어당기셨다. 아버지는 내 얼굴을 좌우로 흔드시더니 혀를 차며 말했다.

“왜 터너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부탁한 거냐.”

“아버지. 저 말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정말 눈곱만큼도 들지 않으시는 거예요?”

“정말인 모양이군?”

아버지는 확실히 눈치가 빠르시다. 내가 누구 아들이야? 아버지는 고개를 심하게 가로젓더니 말했다.

“아무르타트가 말한 기막힌 손님이라는 것이 바로 너구나. 정말 기막히군.”

“예?”

아버지는 감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가 선택되었군. 그것 참. 기막힌데.”

“저도 함께 기막혀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아버지.”

다른 경비 대원들도 모두 우리 주위로 늘어서서 아버지의 말씀을 기다렸다. 아버지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흐음. 아무르타트는 여러분들을 마중하라고 날 내려보낸 거요. 여기까지 내려오면서도 왜 내가 선택되었는지 의문스러웠거든? 그런데 이젠 알겠 군.”

“나…… 때문에요?”

“그런 것 같다. 다른 이유는 생각나지 않는데.”

이거야 원! 그럼 아무르타트는 우리들이 오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 일행이 어떤 사람들인지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잖아? 어떻게 된 거지? 마법 인가?

잠시 후 뒤에 따라오던 일행들도 모두 도착했고 아버지는 우리 인원수를 보고 크게 감탄했다. 그리고 제미니는 우리 아버지를 보자마자 달려오다가 땅에 넘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제미니는 무릎의 상처에도 굴하지 않고 한쪽 다리를 든 채 깡총깡총 달려왔다.

“후치 아버님!”

“어이구, 맙소사! 이게 누구야? 제미니 아냐? 너까지 온 거냐?”

아버지는 두 손을 바지에 닦고는 제미니의 손을 잡아주려 하셨지만 제미니는 눈물이 글썽해져서는 아버지에게 와락 매달렸다.

“와아아! 기뻐요. 무사하신 걸 보니까 정말 기뻐요!”

아버지는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으시며 제미니의 어깨를 토닥이셨다.

“허허, 그래. 고맙구나. 후치가 그 동안 말썽 많이 피우지 않았냐?”

그리고 잠시 후, 제미니가 아버지를 풀어주자마자 하멜 집사가 곧장 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

“네드발 씨! 네드발 씨 아니오! 반갑소. 살아 있었구려!”

“예. 포로로 잡혀 있기는 했지만………….”

아버지는 하멜 집사에게 붙잡혀 휘둘리면서 간신히 말했다. 하멜 집사는 아버지를 풀어주며 불안한 눈으로 말했다.

“그래, 영주님은 어떻게 되셨소? 무사하시오? 혹시 이 무덤이 영주님의…….”

하멜 집사는 불안한 눈으로 무덤을 곁눈질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영주님께서는 무사하십니다. 그리고 사령관 휴리첼 백작도 무사히 잘 계십니다. 뭐 고블린들에게 붙잡혀 있는 생활이 그렇게 유쾌할 것까 지는 없습니다만 육체적으로 심하게 괴롭히지는 않더군요.”

“아아, 다행이군요! 다행입니다! 아…………, 그렇다면 이 무덤은 뭡니까? 그리고 네드발 씨는 이곳에서 뭘 하고 계시는 거죠?”

“이 무덤은…….”

아버지는 다시 무덤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가까이에서 보니 확실히 무덤 맞군. 꽤 작고 볼품없는 무덤이긴 하지만. 아버지는 조용히 말씀하셨 다.

“이건 그 왜 캇셀프라임, 그 화이트 드래곤의 드래곤 라자였던 소년의 무덤입니다.”

아버지는 말씀을 끝내시고는 곧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보셨다. 내가 숨막히는 소리를 내면서 무덤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디트…………리히! 디트리히 할슈타일!”

“어라? 네가 어떻게 그 소년의 이름을 아느냐?”

아버지는 의아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난 착잡한 얼굴로 무덤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타이번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타이번 의 속마음을 짐작해 보는 것이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난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한번에 들으시면 틀림없이 중노동이 되실 긴 이야기가 있어요. 그런데 이게………… 그 디트리히의 무덤이라구요?”

“그래.”

“그러면…………, 그때 아무르타트와 캇셀프라임이 싸우는 도중에 죽은 건가요?”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그 애도 우리와 같이 포로가 되었단다. 하지만 시름시름 앓다가 이렇게 되었지.”

“아. 드래곤이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못 버티고 죽은 것인가 보군요.”

아버지는 이제 경악을 담은 눈으로 날 바라보셨다.

“아, 미안합니다. 내 아들놈과 워낙 닮아서 그만………….”

“저 후치 맞으니까 그만하세요.”

“내가 장 위에 올려놓은 게 뭐냐?”

“유언장 정말 멋지게 쓰셨더군요.”

“그래? 이거 정말 놀랍군. 네가 어떻게 짐작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네 짐작이 맞다. 드래곤과 드래곤 라자 사이에 누군가가 죽게 되면 남아 있는 한 쪽은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고 하더라.”

문득 아버지의 눈에 따스한 눈빛이 지나갔다. 그래. 그건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지.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내가 타격을 입을까 봐 남겨두신 그 유언장 을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

“그런데 아버지는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사령관께서 그렇게 말해 주시더구나. 드래곤이라면 미칠 것이고 사람이라면 못 견디고 죽어버리는 법이라고 설명해 주더군. 그래서 디트리히는 오 래 못 버티고 죽었다. 나와 다른 사람들 몇이서 여기에 묻었지.”

“아. 그랬군요.”

아, 사령관……. 카뮤 휴리첼의 형이자 넥슨의 양아버지인 로넨 휴리첼 백작. 이런! 그러고 보니 난 넥슨 휴리첼의 사망 소식을 그 아버지에게 어떻 게 전해야 될지에 대해 생각해 두지 못했군. 이 일을 어찌한다? 그냥 칼에게 맡겨버릴까?

그때 나와 아버지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계속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하멜 집사가 기어코 고함을 질러버렸다.

“그런데 네드발 씨! 여기서 뭐하고 있었던 거냔 말입니다!”

“예? 예? 아, 예. 하하하. 전 아무르타트의 명령을 받아 여러분들을 마중하러 나왔습니다. 여러분들을 이 안쪽까지 안내할 겁니다.”

“아무르타트에게요?”

내 질문은 아버지를 크게 웃게 만들었다. 그것 참. 아무리 봐도 몇 달 동안 드래곤의 포로로 잡혀 있었던 분으로는 보이지 않는군? 별로 나빠지지 않 은 혈색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아버지에게서는 정신적인 여유 같은 것이 느껴졌다. 미소 띤 얼굴로 나에게 말씀하시는 모습이 확실히 그랬다.

“아들아. 너구리도 자기 굴의 위치는 숨겨두는 법이다. 드래곤이 자기의 레어를 함부로 공개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안내할 곳은 고블린들이 우리를 가두어둔 장소이지 아무르타트의 레어가 아니란다.”

“아, 그렇군요. 그럼 어서 올라가지요.”

아버지에게서 느껴지는 여유는 우리 모두를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우리들은 위험한 장소에서 반가운 길잡이, 아니 그것보다는 든든한 길잡이 를 만난 기분으로 아버지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흐음. 그분이 17년 동안 같은 집에서 나와 함께 살았던 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아버지를 뭔가 전 설적인 길잡이, 선도자로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거 참 기이하군. 그때 제미니가 갑자기 내 귀에 대고 말해서 나는 깜짝 놀랐다.

“저, 후치야?”

“이크! 아이고 깜짝이야. 그런데 왜?”

“네 아버지, 좀 이상하시다?”

제미니는 턱으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아버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흐음. 그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이 느끼기엔 어떤 것이 이상한지 좀 정 확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난 기대감을 가지고 제미니를 올려다보았다.

“뭐가 이상한데?”

“왠지 자신만만해 보이시고……………, 음. 네 아버님은 원래 그러셨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들에게 조심하라든지 내가 안내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든 지, 뭐 그런 말씀도 안하시네? 여긴 아무런 위험도 없는 곳인 것처럼 행동하셔. 여기는 아무르타트의 집인데도 말이야.”

난 잠시 놀라움을 담은 시선으로 제미니를 바라보았고 그래서 제미니는 발로 날 걷어차려다가 치마를 완전히 뒤집을 뻔하고는 기겁했다. “그 시선 뭐니! 어, 어머, 어머나!” 다행히도 제미니는 급히 치마를 쓸어내려 낯뜨거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난 제미니를 향해 웃어준 다음 다시 앞에 있는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았다.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길시언?

내 앞에서 등을 보여주는 사람이 그렇게 드물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 나는 아버지의 등에서 길시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설마, 아버지가? 말도 안 돼. 아버지는, 어, 물론 내게는 소중한 분이시지만 솔직히 17년 동안이나 함께 살아온 나에게 위대함을 보여주실 수 있는 분은 아니다. 이게 어떻 게 된 거지?

관두자. 그냥 너무 오래간만에 만나서 그런 걸 거야. 난 고개를 가로젓고는 선더라이더의 고삐를 붙잡아 끌고 왔고 아버지는 선더라이더를 보시고는 크게 놀라셨다.

“허어. 이거 굉장한 말이구나?”

나는 웃으며 선더라이더에 오른 다음 아래로 손을 내밀었다.

“제 뒤에 타세요.”

“설마……. 이 말 네 거냐?”

“예. 선물 받았어요.”

아버지는 고개를 흔드시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거야 원. 도저히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군. 도대체 누가 너에게 이런 말을 선물했다는 거냐? 아무래도 네게 들을 이야기가 꽤 많겠구나. 음. 그건 천천히 듣도록 하자.”

아버지는 위태로운 몸짓으로 선더라이더에 오르셨다. 그러고는 곧 쾌활하게 말씀하셨다.

“자, 올라갑시다.”

아버지의 기운찬 말씀은 당연한 명령처럼 일행들의 발걸음을 인도했다. 제미니와 타이번은 다시마차에 올랐고 하멜 집사와 경비 대원들은 말에 올 랐다. 마차 바퀴가 구르고 말과 노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지금 아무르타트의 대리인이며, 또한 우리들의 보호자였다. 하지만 그것만으 로 아버지의 저 이상한 자신감, 아니 안정감을 설명할 수 있을까? 희한하군.

끝없는 계곡에도 길 비슷한 것은 있었다. 아마 고블린이나 오크들이 사용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되는군. 어쨌든 아버지는 익숙한 걸음걸이로 그 길을 걸어 올라가셨다. 아침 안개는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고, 그래서 양편으로 주욱 늘어선 드높은 계곡들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끝없는 계곡은 누군가가 큰마음 먹고 회색 산맥을 완전히 끊어버리려다가 실패한 듯한 모습이었다. 웨스트 그레이드를 가로지르는 회색 산맥은 끝 없는 계곡에 이르러 거의 절단될 뻔하다가 아주 간신히 끊어지지 않고 반대편으로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끝없는 계곡은 땅 아래로도 꽤 깊이 패어 있었다. 그래서 좌우로 이어지는 절벽들은 굉장한 높이였다.

“어라? 이거 어떻게 된 거냐?”

절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등 뒤에서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들려와서 나는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릴 사이도 없이 아버지의 우악스러운 손이 내 머리를 부여잡았다.

“귀! 임마, 귀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거냐?”

눈도 참 밝으시다, 정말. 아들의 등 뒤에 타고 나서야 겨우 발견하신 모양이지? 난 아버지의 손에 부여잡힌 머리를 빼내려고 낑낑거리며 대답했다. “오크들과 싸우다가 베인 거예요.”

“뭐야? 오크?”

“예. 보석을 구하는 모험을 하는 동안……………. 제발 그만 흔드세요! 현기증 나요!”

“이런. 아, 알았다. 이거야 원..”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고도 한참 동안 내 머리를 부여잡고 자세히 관찰하시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난 머리를 옆으로 기울인 채 끝없는 계곡의 전 경을 감상해야 했다.

“도대체 너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을 저지르고 다닌 거냐?”

“간단하게 말하자면 아무르타트에게 줄 보석을 구하러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오크들과 싸우게 된 거예요.”

“그래? 아이고…………, 정말 다행이다! 귀만 베이고 말았으니.”

“조금만 더 흔드시면 가능할 거예요.”

“가능하다니?”

“아들의 목을 뽑아놓는 거요.”

아버지는 그제야 내 머리를 놓으셨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아버지는 한숨을 푹푹 내쉬셨다. 이런 뭔가 말을 돌릴 필요가 있을 거 같군. 난 주위를 둘 러보며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휘유우. 정말 굉장한 높이군요.”

“아…………, 그렇지? 정말 드래곤이라도 하나 살고 있어야 어울릴 듯한 곳이지 않느냐?”

“흐음. 정말 그렇네요. 그런데 아버지, 그 동안 많이 불편하셨지요?”

잠시 후에야 등 뒤에서 아버지의 대답이 들려왔다.

“불편이라. 글쎄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난 불편을 별로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흥분이 더 강했기 때문에 몸의 불편함이라는 것은 별로 신경 쓸 일이 못 되었어.”

“그러셨어요? 흐음. 어떻게 흥분이?”

“드래곤의 보호 아래에 있다는 것 때문이지. 정말 희한한 경험 아니겠냐?”

난 잠시 입을 다문 채 아버지의 말을 곱씹었다. 선더라이더는 기운찬 동작으로 계곡 사이의 길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길옆으로는 계곡을 따라 흐르던 강의 자취가 있었지만 겨울철이라 그런지 강물은 말라 있었다. 난 강바닥에 뒹구는 바위들과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마른 단풍잎들을 바라보 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 조금 전부터 느끼는 건데요.”

“뭐냐? 하고 싶은 말이?”

“아무르타트를 퍽 친숙하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아니, 꼭 친숙하다기보다는…………, 저, 글쎄요. 아무르타트에 대한 증오심은 확실히 없어지신 것 같 은데요.”

“그러냐?”

“그래요.”

“당연하다. 넌 모르겠지만 네 아버지는 드래곤의 곁에 있어봤던 사람이니까.”

아이고,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은 드래곤 로드와 이야기를 나눠봤고 지골레이드의 앞발을 막아냈으며 크라드메서에겐 스피어도 집어던져 봤답니다. 난 속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드래곤의 곁에 있었다는 것이.., 어떤 건데요?”

“내 복수심이라는 것이 허무한 것이라는 걸 느끼게 되었지.”

“예?”

아버지는 다시 침묵하셨다. 내가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려 했을 때 간신히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후치야. 만일 내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다면 넌 절벽을 증오하겠냐?”

“예?”

“아니, 내가 홍수 때문에 강물에 떠내려가 죽는다면 넌 홍수나 강물에게 복수하려고 들겠냐?”

“어, 그럴 일은 없겠지요.”

“그래. 나도 그걸 깨달았다. 내가 헬턴트 마을에 있을 때, 그러니까 아무르타트와 꽤나 먼 거리를 두고 있을 때는 말이다, 아버지는 아무르타트가 정 말 때려죽이고 싶도록 미웠단다, 후치야. 하지만 그 전투 이후로 긴 시간 동안 아무르타트 곁에 있으면서, 네 어머니의 죽음과 아무르타트를 연결짓 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더구나.”

“아무르타트가 절벽이나 홍수처럼 느껴지신다는 거예요?”

“그런 것 같아. 아무르타트에겐 인간적인 복수심을 적용하기가 힘들어지더라. 아무르타트는…………, 글쎄다. 나 같은 것이 증오하거나 사랑하거나 해봤 자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았어. 네가 듣기엔 퍽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말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느낀다.”

문득 고개를 돌려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눈앞의 길만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의 저런 느낌은? 간단한 대답이 떠올랐다.

아무르타트는 라자가 없으니까 그렇다. 라자가 없는 아무르타트는 인간과의 교류가 불가능하다. 교류라는 것이 단순히 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

라 감정의 전달까지도 포함하는 형이상학적인 거라면…………. 아버지가 말씀하신 예가 도움이 되는군. 절벽이나 홍수 같은 것에 감정을 전달할 수는 없 지. 우리는 절벽이나 홍수 따위와 교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냐. 이건 이상해. 핸드레이크나 드래곤 로드의 경우에서도, 우리들과 크라드메서의 경우에서도 모두 라자가 없는 상태에서 서로의 감 정을 충실하게 주고받았지.

엇? 아냐.

그렇군. 그 드래곤들은 모두 인간들과 꽤 오랫동안 사귄 적이 있는 드래곤들이지. 따라서 인간의 모습이 많이 투영되었던 드래곤들이지. 하지만 아 무르타트는 아직껏 인간과의 교류를 절대로 실행하지 않았던 드래곤이지.

그렇다면?

“케르르르르!”

케르르르, 케르르르르!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리 때문에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계곡 속 어느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이긴 한데 워낙 메아리가 심하게 울려퍼져서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뒤에서 경비 대원들의 단속적인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타이번의 힘찬 외침이 들려왔 다.

“모두들 진정해! 가만히 있어.”

“케르르르르!”

앞서의 외침에 대답하는 듯한 기괴한 외침이 울려퍼졌다. 이번에는 위치를 포착할 수 있었다. 퍽 가까운 곳이다! 두 번째 외침 소리의 산울림이 울려 퍼질 사이도 없이 세 번째 외침이 뒤따랐다.

“케르르르르!”

“케르르르르!”

계곡은 외침소리로 가득 차버렸다. 터너와 경비 대원 몇 명이 앞으로 달려나와 내 옆으로 늘어섰다. 터너의 빠른 지휘에 따라 그들은 모두 포차드를 옆으로 비껴들고 돌진 자세를 갖추었다. 케르르르! 케르르르! 터너는 포차드를 안장 옆으로 늘어뜨린 채 앞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거지 같은 지형이군. 젠장. 그런데 저건 구호인가?”

“그런 것 같군요. 신호를 주고받는 것처럼 들리죠?”

내 추측에 대한 대답은 터너가 아니라 등 뒤에서 날아왔다. 철썩!

“햐! 이놈 제법이다. 어떻게 알았냐?”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말했다.

“아버지. 지금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를 하시고 있는 거라구요. 자신의 지난날에 비추어 그 자식을 이해하려 드는 것 말이에요. 도대체 아버지의 아들이 저 정도 암구호도 이해 못할 거라고 믿으시는 거예요?”

“그러는 너야말로 세상의 모든 아들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를 범하고 있구나. 자신이 아버지의 지나온 나날로서는 이해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똑똑 하게 태어났다고 믿는 것 말이다. 하하하. 그래. 저건 고블린들의 구호다. 가만히 기다려.”

난 아버지의 말씀에 대해 뭐라고 반박하는 대신 양쪽의 절벽을 살피기 시작했다. 케르르르, 케르르르! 귀가 멍멍할 정도의 소란 속에서 이윽고 고블 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양쪽 절벽은 바위 덩어리들이 켜켜이 쌓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회색의 커튼처럼 늘어선 절벽 곳곳에서 고블린들의 회색 빛 몸이 불쑥불쑥 나타났다. 케르르르, 케르륵! 한두 녀석이 아니었다. 삽시간에 절벽 양쪽의 험한 지형들에서 나타난 고블린들은 적게 보아도 백 마 리는 훨씬 넘었다. 이런 젠장! 정말 좋은 위치를 잡고 있군. 고블린들이 나타난 곳은 모조리 높은 절벽의 틈새나 선반처럼 생긴 바위들 위였고, 결국 계곡의 바닥에 있는 우리들로서는 절벽을 기어오르지 않는 이상 어떻게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할 위치였다.

터너는 입술을 굳게 깨물면서 포차드를 늘어뜨렸다. 페가서스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저 위로 돌격할 수 있을까. 그는 잔뜩 굳은 얼굴로 말했다. “할 수 없군. 뒤로 전해. 모두 자리에 대기. 동요하지 말도록.”

“케르르르르!”

계곡을 메워버린 함성 속에서 우리들은 굳은 얼굴을 한 채 한 자리에 서 있었다. 케르르르!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이군. 난 제미니의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갑자기 함성이 멎었다.

어디서 무슨 신호라도 내린 걸까? 주위를 휙휙 둘러보던 내 눈이 왼쪽 절벽으로 향했을 때 하늘을 찌르듯이 솟아오른 파이크의 모습이 보였다. 왼쪽 절벽의 꼭대기에서 웬 고블린 하나가 파이크를 곧게 세워들고 서 있는 것이었다. 워낙 높은 곳이라 고블린의 모습은 간신히 식별할 정도의 크기였다. 저 녀석이 지휘자인가? 계곡이 무너져라 함성을 내지르던 고블린들은 이제 입을 다문 채 제자리에 우뚝 섰다.

왼쪽 절벽의 꼭대기에 있던 그 고블린은 들고 있던 파이크를 내려 우리를 겨냥했다.

“케라, 케륵! 보석을 가져왔느냐?”

고블린의 목소리는 끝없는 계곡을 쩌렁쩌렁 울리게 만들었다. 터너는 입을 쩍 벌렸고 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어라? 저 녀석 말을 꽤나 잘하네? 아버지?”

“응? 아, 그래. 아마 아무르타트가 어떻게 손을 쓴 거겠지. 아무르타트는 별의별 희한한 마법을 다 쓰더라.”

“아, 그런가? 음………, 터너?”

터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로 돌았다. 뒤에서는 하멜 집사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절벽 위에 늘어선 고블린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터너는 입을 다문 채 몇 번 손짓으로 하멜 집사를 부르다가 결국 포기했다.

“하멜 집사님?”

“응? 어, 응. 알았네. ・자네가 하게.”

“예? 예, 알겠습니다.”

터너는 포차드를 옆에 있던 경비 대원에게 넘겨주고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우리 모두와 절벽 위에 늘어선 고블린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터너는 롱소드를 뽑아들고 우리 앞으로 걸어갔다. 검을 뽑아들고는 있지만 위에서 공 격이라도 시작하면 터너는 꼼짝없이 죽은목숨이다. 난 슬며시 고개를 돌려 타이번을 바라보았다. 타이번은 묵묵히 마차 위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제미니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타이번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흐음. 제미니가 타이번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고 있나 보군? 그때 앞으로 걸어나간 터너가 고함을 질렀다.

“그렇다! 아무르타트가 요구한 보석을 가져왔다. 그러니 포로들을 내놓아라!”

“케라, 켁켁! 이후우!”

지휘자 고블린은 이상한 함성을 지르면서 들고 있던 파이크를 휘둘렀다. 그것이 무슨 신호였던 모양인지 갑자기 양쪽 절벽에서 몇 마리의 고블린들 이 뛰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놈들은 민첩한 동작으로 계곡 바닥에 뛰어내리더니 파이크를 꼬나든 채 우리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갑자기 터너는 롱소드를 위로 쳐들었다. 뭐지? 나야 알 도리가 없어 가만히 서 있었지만 다른 경비 대원들은 재빨리 반응했다. 경비 대원들은 모두 들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나가 터너의 뒤쪽에 주욱 늘어섰다. 그러자 다가오던 고블린들이 멈춰 섰다.

터너는 위를 향해 고함질렀다.

“이건 뭐냐!”

절벽 위의 지휘자 고블린은 잔뜩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케, 케! 멍청한 놈! 우케르, 보석들을 그들에게 건네라!”

“웃기는 수작 하지 마. 포로가 먼저다! 포로들의 모습을 보지 않으면 보석을 내놓을 수 없다!”

“이놈잇! 케르륵! 네놈들을 모두 죽이고, 케르, 켁! 보석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럴 수 있을 거 같아? 말해 두겠는데, 만일 너희들이 우리들을 공격하면 아무르타트는 보석 구경도 못하게 된다. 그럼 아무르타트가 너희들을 가 만 내버려둘까?”

터너는 참으로 뻔뻔스럽게 저런 거짓말을 했다. 뭐 그 보석들은 모두 내가 가지고 있지만 고블린들이 공격을 시작하면 아무리 선더라이더를 탄 나라 고 해도 여기서 빠져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고블린들의 지휘자는 잠시 주저하면서 우리들을 내려다보았다.

“케리, 켁! 보석을 가져오지 않았단 말이냐?”

“가져왔어. 하지만 우리들을 죽이면 보석은 사라진다!”

“어째서!”

터너는 잠시 말이 막힌 모양이었다. 갑작스러운 거짓말의 단점은 바로 이거지. 할 수 없군. 난 재빨리 선더라이더에서 뛰어내렸다.

“어라, 후치야?”

“아버지. 그 위에 가만히 계세요. 이거 잡으시고. 하지만 절대로 고삐를 움직이지는 마세요. 무서운 일이 일어나게 되요.”

아버지는 당황해서 내가 건네주는 고삐를 붙잡았다. 난 그렇게 아버지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어드린 다음 앞으로 걸어나갔다. 터너가 날 돌아보았 지만 난 그에게 미소만 지어주고는 경비 대원들의 앞으로 걸어나갔다.

눈앞에는 황량한 계곡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지만 별로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좌우의 절벽에 빽빽하게 들어찬 고블린들이 험상궂은 얼굴로 내려 다보는 가운데 걸어가자니 그런 게 눈에 들어올 리가 있나. 난 고블린들이 날 확실히 볼 수 있는 위치에 선 다음 고함을 질렀다.

“이봐! 이거 보이냐?”

난 눈앞에 있는 바위 하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고블린들은 아무 대답이 없었고 난 어깨를 으쓱인 다음 천천히 오른손을 뒤로 당겼다. 그러곤 곧장 바 위를 후려갈겼다.

“케륵! 케르르륵!”

케르르륵! 케르르륵! 계곡 곳곳에서 고블린들의 비명이 터져나오자 곧 산사태라도 난 듯한 산울림이 뒤를 이었다. 우와,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군. 물론 바위는 산산조각 나서 자갈이 된 후였고 나는 되도록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으윽. 그래도 역시 손이 아파. 난 일 그러진 얼굴이 고통 때문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얼굴을 더욱 무시무시하게 찡그리며 음산하게 말했다.

“너희들이 우릴 공격하면 그 보석들도 모두 이렇게 박살내어…………….”

“후치야! 손 괜찮냐?”

“꺄아악! 후치야! 손, 손!”

“…………박살내어 버릴테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이 산산조각난 바위가 보인다면…

“이놈아! 고삐 이거 놔도 되는 거 아냐? 젠장, 손 괜찮냐니까!”

“집사님! 하멜 집사님! 붕대, 붕대랑 약이랑 어디에 두었어요? 예?”

“…………그러니까 이 산산조각 난 바위처럼 내 손은 괜찮으니까 제발 그만 하는 보석도 박살나지만 내 손은 박살이 안 난다! 으아악! 머리가 박살날 것 같아!”

이래 가지고서야 내가 고블린들에게 무시무시하게 보일 수 있을지 정말 의심스럽군. 머리를 감싸쥐고 괴로워하는 내가 보기 안쓰러웠던지, 아니면 내 외침소리를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고블린들이 안쓰러웠던 것인지 터너가 나 대신 고함을 질렀다.

“그래! 우릴 공격하면 보석은 모두 파괴된다! 그럼 아무르타트는 너희들을 가만 놔둘까? 어림 없지! 그러니 순순히 포로들을 먼저 내놔! 그러면 보석 을 내주겠다!”

계곡 바닥으로 내려왔던 고블린들이 당황한 몸짓으로 절벽 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절벽 곳곳에 서 있던 고블린들은 모두 절벽 위에 있던 고블린만을 바라보았다. 지휘자 고블린은 정말 머리끝까지 화가 난 모양인지 두 손으로 파이크를 들어올린 채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면서 고 래고래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키기이이익! 키켁, 케륵! 케르륵! 키기이이익!”

지휘자의 흥분은 곧 다른 고블린들에게도 전염된 모양이었다. 다른 고블린들도 얼굴을 무시무시하게 찡그리며 파이크를 휘저어댔다. 놈들은 흥분한 동작으로 우리들을 향해 고함을 질러댔고 파이크를 집어던질 듯이 흔들어댔으며 심지어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기까지 했다.

“케르라, 키, 키, 크큭!”

“키리리리리! 키리리리리!”

한 녀석이라도 흥분을 감당하지 못해 파이크를 던지면 곧 모든 녀석들이 공격을 시작할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고블린들이 괴성을 지를 때마다 뒤 통수가 선뜻선뜻했다. 뒤를 돌아보니 제미니는 이제 타이번의 로브 속으로 기어들어 가려고 들어 타이번을 당황하게 만드는 중이었다. 타이번은 제 미니를 간신히 뿌리치면서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려왔다.

“주위가 꽤나 시끄럽군.”

타이번은 그렇게 말하더니 지팡이를 앞으로 뻗어 조심조심 앞으로 걸어나왔다. 나는 재빨리 타이번에게 다가가 팔을 부축했다.

“고마워.”

타이번은 보이지도 않는 눈을 찡긋해 보였다. 갑자기 떠오르는 미소를 감당할 수 없어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흐음. 이 미소는 보이지 않겠지. 타이 번은 걸음을 멈추더니 내 팔을 놓고는 자신의 로브 자락을 거머쥐었다.

타이번은 느긋한 동작으로 로브 앞자락을 부여잡아 허리 뒤로 돌려 허리띠에 꽂아넣었다. 그리고 펑퍼짐한 소맷자락은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그러 자 두 팔에 가득한 문신이 잘 드러났다. 타이번은 팔을 몇 번 돌리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이, 안색이 나쁜 친구들.”

자! 이제 너희들 퍽 바쁘게 되었다. 하하하. 난 고블린들을 향해 미소지어 주었다.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지금 너희들 앞에 나선 인물은 바로 대마법 사핸드레이크란 말이다. 너희들로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겠지?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면서 자기 팔을 잡아봅을 듯이 설치던 고블린 지휘자는 고개를 홱 돌려 타이번을 노려보았다. 타이번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 리면서 계속 말했다.

“좀 조용히들 해주겠나? 내가 말을 해도 이렇게 떠들면 자네들이 내 말을 들을 수 없을 것 아닌가.”

타이번의 침착한 목소리는 명령도 아니고 권유도 아니었다. 담담한 사실의 토로였다. 사람들이 몰려서 떠들어대고 있는 곳, 그러니까 격렬한 토론이 벌어지는 회의장이나 시장 바닥이나 제미니가 울음을 터뜨린 장소 같은 곳에서 저렇게 말했다가는 조용히 묻혀버리기 딱 적합한 말투다.

하지만 고블린들은 조용해졌다.

우리 일행은 당황해서 사방의 절벽을 둘러보았다. 놀랍게도 절벽에 늘어선 고블린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않은 채 서 있었다. 그래서 회색빛 절벽 위에 늘어선 회색 고블린의 모습은 무수히 많은 조각들처럼 보였다. 고블린들보다는 차라리 매섭게 몰아치는 계곡의 거친 바람이 훨씬 더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난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을 걷어올리며 다시 타이번을 바라보았다.

타이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군. 잠시만 그렇게 있어주면 내가 한결 편하게 말할 수 있을 거야. 자네들도 편하게 들을 수 있을 테고.”

타이번은 이죽거리는 기색 하나 없이 저렇게 말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여보게, 자네들에게는 포로 따위 별로 필요없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는 보석을 건네주려고 작정하고 온 거야. 서로 얼굴 붉히거나 화낼 일은 전혀 없어. 먼저 내놓느니 나중에 내놓느니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 중요한 것은, 어차피 모든 일이 끝나면 자네들은 보석을, 그리고 우리는

포로를 돌려 받을 수 있다는 것일세. 그러면 자네들은 아무르타트에게 보석을 가져다줄 수 있으니 좋고, 우리들은 가족들을 고향으로 데려갈 수 있으 니 좋은 거야.”

‘그렇잖은가?” 나는 타이번이 그런 말을 뒤에 붙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이번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타이번은 이제 고개를 조금 숙이며 말 했다.

“자네들은 우리보다 훨씬 숫자도 많고 그래서 우리보다 힘도 세지. 그러니까 우리는 약속을 어길 수 없어. 자네들이 우리를 가만 내버려두겠나? 하 지만 자네들이 약속을 어긴다면 우리로서는 그냥 당하는 수밖에 없겠지. 자네들은 너무나 강하니까.”

“켁!”

지휘하던 고블린이 못마땅하다는 듯한 고함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다른 고블린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지휘자 고블린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보이더니 타이번을 향해 짖어댔다.

“케르륵, 키켁! 뭐, 우리가 강한 것은 사실이다! 키키, 킥!”

“그래. 그러니까 자네들이 먼저 포로들을 내주면 좋겠네. 우린 약속을 어길 수가 없으니까 약속을 지킬 거야. 하지만 자네들은 약속을 어길 수 있으 면서도 약속을 지킨다는 것을 보여주게나.”

“우리는! 케르, 켈켈! 약속을 지킨다.”

“그것이 자네들의 영광에도, 그리고 아무르타트의 명예에도 도움이 되는 일일 걸세. 부탁할까?”

지휘자 고블린은 대답하는 대신 다시 파이크를 들어올려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러자 계곡 바닥에 있던 고블린들은 재빠른 동작으로 다시 좌우로 올 라갔다. 난 녀석들이 올라갈 때 무슨 길이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고블린들의 동작이 워낙 민첩한데다가 위장이 잘 되어 있어 그들이 어떤 길로 절벽을 오르내리는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참 신경 쓰이는 일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난 타이번이 핸드레이크, 즉 클래스 9의 마스터이며 300년 이상 마법을 갈고 닦 은 대마법사라는 것을 알고 있지. 하지만 타이번은 고블린들을 몰살시키거나 무서운 마법으로 위협하는 대신 은근히 그들을 추켜세워 주며 협상을 했다.

저건…… 젠장.

복잡해지는 머리 때문에 나는 찌푸린 눈으로 타이번의 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설마 핸드레이크가 눈이 보이더라도 등뒤에 있는 나의 시선을 알아 챌 리야 없겠지. 바보짓 그만두자.

고블린들이 다시 절벽을 올라가자 지휘자 고블린은 파이크를 돌리면서 외쳤다.

“켈, 켈, 케르카, 켁!”

경비대원들은 완전한 긴장 상태로 주위를 응시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것이지?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아 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른쪽의 세모꼴로 생긴 커다란 바위를 봐라, 후치야.”

오른쪽 절벽에는 계곡을 향해 커다랗게 돌출해 있는 바위가 있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위로 올라갈수록 급격하게 뾰족해지는 세모꼴의 바위였는데 높이가 칠팔십 큐빗은 될 것 같은 커다란 바위였다. 저게 왜?

바위 뒤에서 사람들이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영주님!”

하멜 집사는 곧장 계곡의 험한 바위 위를 마치 한 마리 산양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터너는 기겁한 목소리로 외쳤다.

“집사님, 멈추십시오! 섣불리 움직이면 고블린들을 흥분시킬지 모릅니다!”

계곡을 달려가던 산양은 이제 고슴도치가 되어버렸다. 으윽. 하멜 집사는 완전한 고슴도치 자세로 바위 위에 팍 웅크렸다. 채신머리없다고 욕할 수 도 없는 것이, 절벽 위에서 돌덩어리처럼 굳어 있던 고블린들이 험악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위 뒤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처럼 낡고 후줄근한 옷을 입은데다가 땟국물이 질질 흐르고 수염이나 머리 등은 엉망진창을 하고 있었 다. 그들 중 몇몇, 머리카락이나 수염이 그런 대로 온전한 사람들 중에서 영주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영주님은 반가운 얼굴로 걸어왔다. 바위 위에 완전히 엎드려 있던 하멜 집사는 고개만 좀 들어올려 영주님을 바라보았다.

“여, 영주님!”

“하멜, 하멜인가! 고맙군, 반갑네! ·그런데 자네 뭘 흘렸나?”

“영주님!”

하멜 집사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는 듯이 고함을 빽 질렀다. 영주님은 웃으며 하멜 집사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하멜 집사를 일으킨 영주님은 곧 그를 포옹했다.

“아, 하하하. 반가워서 그러는 거야. 반가워서. 정말 고마워.”

영주님의 백발은 멋지게 흩날리고 있었다. 단정한 하멜 집사의 모습과 지저분한 영주님의 모습은 정말 방랑하는 왕과 그를 기다리던 충신의 모습으 로 보이기에 모자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 뒤를 이어 다른 포로들도 모두 웃으며 걸어왔다.

“어이구! 이게 누구야. 터너 아냐?”

“세로! 살아 있었구나, 세로!”

“그래, 임마. 네 여동생 시집도 못 간 과부로 만들지는 않………….”

“죽어랏!”

포로들과 우리 일행들의 상봉은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이루어졌지만 그중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만남을 말해 보라면 역시 경비 대원 세로와 터너의 상봉일 것이다. 엉망진창인 모습과는 달리 포로들에게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놀랍게도 포로들은 나나 제미니의 모습에 놀라는 여유까지도 보여주었 다.

“어라? 이게 누구냐. 너 초장이 네드발 씨의 아들인 …………….”

“예. 후치 네드발이에요.”

“네가 여기 웬일이냐? 어라? 저건 또 뭐야. 숲지기 딸 아냐?”

“제미? 제미구나. 아니, 네가 여기 왜 온 거냐?”

“후치 감시하려고요.”

“후치가 고블린 미녀에게 한눈이라도 팔까 봐?”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죠?”

제미니가 저렇듯 능글스럽게 내 인격을 깔아뭉개고 있는 동안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시 후 약간 떨어진 곳에 몰려 서 있는 사람들과 그 중앙에 서 있는 키 큰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수도에서 온 병사들과 로넨 휴리첼 백작이었다. 그들은 푸근한 눈으로 우리 마을 사람들의 재회 장면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의 소외된 위치를 감수하 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서 있는 로넨 휴리첼 백작은 절벽에 늘어선 고블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포로들과 마을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상봉을 즐거워하는 사이를 빠져나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수도에서 온 병사들은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내 길을 막거나 하지는 않았다. 난 그들을 살짝 비켜 로넨 백작에게 다가갔다. 로넨 백작은 더 벅머리 꼬마애가 다가오는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에게 용무가 있는가, 소년?”

난 잠시 로넨 백작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군. 나는 넥슨과 닮은 점을 발견해 보려다가 포기하고선 낮게 말했 다.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로넨 백작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귀를 들이댔다. 주위의 병사들은 이제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와 로넨 백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난 로넨 백작의 귀에 대고 말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이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끝까지 조용히 들어주십시오. 저는 수도에서 로넨 백작에게 전할 말을 가지고 온 사람입니 다.”

로넨 백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는 허튼소리 하지 말라는 식으로 벌컥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증거를 원하실까 봐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넥슨 휴리첼과 당신, 그리고 카뮤 휴리첼과 아멘가드 휴리첼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습니다. 놀라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백작님이 포로로 억류당하신 동안 아드님이신 넥슨 휴리첼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크흠!”

로넨 백작은 갑작스런 기침소리를 내었다. 놀란 표정을 감추기 위한 것일까? 그는 주위의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주위를 비워다오. 이 소년과 나눌 중요한 말이 있으니.”

병사들은 별말 없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나와 백작 주위에서 멀어졌다. 우리 일행 쪽을 흘긋 바라보니 그들은 아직도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중이었 다. 잘됐군. 백작은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그런 대로 정리가 된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태연하게 말했다.

“넥슨은?”

그는 넥슨을 사랑했던 것일까? 넥슨의 말을 생각해 보면 백작은 동생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넥슨을 잘 보살폈다고 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넥슨에 대 한 일을 먼저 물어오고 있다. 난 고개를 조금 숙이며 전하고 싶지 않았던 소식을 말했다.

“죽었습니다.”

로넨 휴리첼 백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넥슨 휴리첼은 반란죄로 사형당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군요.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그는 반란을 위해 삼촌의 드래곤 과 라자의 계약을 맺으려다 사고를 만나 살해당했습니다.”

“그런・・・・・・가.”

“이제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당신은 수도로 돌아오면 안 됩니다. 하지만 당신이 살아날 길도 수도에만 있습니다. 내 말을 이해하시겠지

요? 당신의 모습과 당신의 이름을 사용하며 수도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수도로 숨어들어 가십시오. 지인들이 있다 하더라도 도움을 요청할 생각은 않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믿기 어려우시 겠지만 수도에서 당신이 도움을 바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입니다. 칼 헬턴트 씨를 찾아가십시오.”

“칼 헬턴트?”

“모르시는 이름일 겁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칼 헬턴트 씨가 자세한 전후 사정을 들려주고 당신을 도와줄 겁니다. 그랜드스톰으로 찾아가서 하이 프리스트에게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럼 하이 프리스트가 칼 헬턴트 씨를 만나게 도와줄 것입니다. 야박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헬턴트 마을에도 들르지 않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정이 복잡해지니까요.”

백작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재빨리 윗옷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그의 손에 건네었다. 내 손에서 그의 손으로 보석과 금화가 든 주머니가 옮 겨진 것은 아무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백작은 눈으로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잘 들으십시오. ‘네리아가 무서워하는 것은 벼락이고 오크가 무서워하는 것은 괴물 초장이’입니다. 암호를 물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대답 하시면 됩니다.”

백작이 웃음을 터뜨리거나 하기에는 나의 분위기가 너무 엄숙했다. 그래서 백작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리아가 무서워하는 것은 초장이고 괴물이 무서워하는 것은 벼락 오크라구?”

“………바뀌셨습니다. 네리아가 무서워하는 것은 벼락이고 오크가 무서워하는 것은 괴물 초장이입니다.”

·암호 좀 쉬운 걸로 정하지 그랬나. 음. 기억했네.”

“다행이군요. 그럼 용무는 끝났습니다.”

“고맙네.”

“천만에요. 좋은 소식을 들려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나는 백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때 백작은 빠르게 말했다.

“그런데 말일세. 자네는 왜 날 돕는 거지?”

난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백작의 눈을 들여다보고 싶지가 않았다.

“휴리첼 가문의 비극은 이제 그칠 때도 되었다고 생각하니까요.”

난 그대로 몸을 일으키며 백작의 이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했다.

“저희 영지를 도와주신 분이 어떤 분인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일러주신 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커서 백작님처럼 훌륭한 무인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하지만 어림없겠지요?”

백작은 어설프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빠르게 굳어가고 있었다. 그는 굳은 얼굴에 힘들게 미소를 담으며 말했다.

“세상엔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긴 하네. 원하지 않는 비극은 베개 머리맡까지 찾아왔을 때에야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법이고. 하지만 내 충고는 별로 필요 없는 것일세. 자네에겐 두 다리가 있으니 자네의 길을 걸어갈 수 있고, 자네에겐 두 팔이 있으니 적을 위한 검과 레이디를 위한 꽃을 들 수 있겠지. 전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미 자네가 다 가지고 있다네. 그러니 걱정 말게.”

난 빙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헬턴트 영지의 주민들은 아직까지도 주위의 고블린들에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채 재회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난 절벽 위의 그 지휘자 고블린 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파이크를 짚고 서 있었다. 문득 그덴 산의 거인이 루트에리노 대왕을 바라보고 있을 때 저러하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덴 산의 거인은 우타크와 차넬에게 속아넘어간 미련한 존재로 알려져 있지. 하지만 루트에리노 대왕은, 그덴 산 정상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거인을 바라보았을 때 정말 조금도 떨리지 않았을까? 속아넘어간 것 때문에 미칠 듯 분노하고 있는 거인이 내려다보고 있을 때?

관두자

한참 요란하게 떠들고 있던 하멜 집사는 그제야 영주님을 풀어주었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어 눈가를 닦아대면서 내게 손짓을 했다. 난 그에게 고개 를 끄덕여준 다음 절벽 위를 바라보았다.

“이봐! 보석은 내가 가지고 있다. 내가 여기 있을 테니 다른 사람들은 계곡을 빠져나가도록 해다오!”

“케르, 켁! 무슨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안전하게 나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 보석을 건네주겠다는 말이야. 알았냐?”

가까이 있던 로넨 백작뿐만 아니라 영주님도 크게 놀랐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아버지였다.

“아, 이, 이 녀석아! 보석 어디 있냐? 내가 남아서 건네줄 테니까…”

“아버지, 저보다 말 잘 타세요?”

“뭐야?”

“제가 아버지보다 말은 잘 타요. 만일 사고가 나도 저라면 몸을 빼내기가 쉽다구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이 녀석아. 그래도 그러는 게 아니다. 내게 보석을 넘기고…………….”

“그만하자구요. 우리가 더 지체하면 고블린들이 화를 낼 거예요. 아들을 한번만 믿어보세요. 여기까지 오면서 집사님과 터너, 모든 사람들과 의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에요.”

“내 아들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한 사람 있죠.”

“그게 누군데?”

“저요.”

“……젠장.”

아버지는 하실 말씀이 없으신 모양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투덜거리시기를 멈추지 않았다. 풀려난 포로들도 모두 떠드는 것을 멈춘 다음 불안 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영주님은 다급하게 집사님에게 질문했다.

“정말인가, 하멜? 후치가 남게 되기로 약속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하멜 집사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영주님은 고개를 심하게 갸웃거렸다. 그때 타이번은 주위 모든 방향을 향해 말했다.

“나도 여기 남을 것이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길. 이곳은 마법사가 필요한 곳 아니겠소?”

그러자 주위의 안색들이 한결 밝아졌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아마 저 사람들은 내가 타이번의 기수 노릇을 하느라 남 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하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터너는 일행들의 소란을 재빨리 진정시키기 위해 외쳤다.

“자! 풀려나신 분들은 마차 위에 오르십시오. 여기를 빨리 빠져나가도록 하십시다. 후치는 안전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위의 사람들은 그래도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지 쉽게 마차에 오르지 못했다. 난 씁쓸하게 웃으며 그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내 눈이 제미니에게 멈 추었을 때 난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줄 알았다.

제미니는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