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라자 8권 – 제15부 :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 7화

드래곤 라자 8권 – 제15부 : 석양을 향해 나는 드래곤 7화

7

“그럼, 네드발 백작님이로군요.”

“예. 그리고 영주님에게만 알려드리는 겁니다.”

“아직 아무에게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소?”

“아이고, 영주님. 제발 그러지 마세요. 말씀 낮춰주세요.”

의자에 앉은 영주님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웃음 끝에 기침이 뒤따라서 보는 나를 안쓰럽게 만들었다. 감금 생활 동안 초췌해진 영주님의 몸은 아직껏 살이 붙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어 하멜 집사를 좌절하게 만들고 있다고 한다.

“쿨, 쿨럭. 으음…… 그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느냐?”

“예.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앞으로도 계속?”

“예. 비교가 이상하지만, 칼이 그랬던 것처럼 신분을 숨기고 살고 싶습니다.”

“왜지? 네가 백작이 되었으니 네 영지로 아버님을 모시고 가서 더 편하게 모실 수도 있을 텐데. 그러고 보니 국왕께서 하사하신 영지에 대한 책임은 어쩔 테냐?”

“그 영지는…………, 제가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보살피고 있습니다.”

나는 펠레일과 코다슈 씨에 대해 영주님에게 설명드렸다. 영주님은 의자에 편히 기대신 채 즐거운 얼굴로 내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고개를 끄덕이셨 다.

“만일 제가 다스렸다면 그거야말로 국왕 전하와 제 영지의 주민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거겠죠. 열일곱 살짜리 전직 초장이인 영주라니, 우 습잖습니까? 제가 영주가 된다면 주민들이 밤에 쓸 초야 얼마든지 대줄 수 있겠지만.”

영주님은 잔잔하게 웃으셨다.

“훌륭한 영주로고. 자신의 재능의 한계를 잘 알고 있고 그 재능을 넘어서려고 들어 주민들을 괴롭히지도 않으니.”

“과찬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네 아버지에게도 숨길 작정이냐?”

“아버지께서 연로하셔서 제 보살핌을 필요로 하게 될 때까지는…………. 제 생각만 하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아버님께서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더군다나 가장 훌륭한 영주님이 다스리는 영지에 계시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영주님께서는 천천히 탁자를 또각거리시다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에는 눈이 소담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원래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우리 영주님의 집무실이었지만 하멜 집사의 필사적인 노력이 깃들여 꽤나 안온하고 따스한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잠시 벽난로에서 장작 타 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귀를 기울이면 눈이 쌓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고요가 끝나고, 영주님은 무릎에 올려둔 모포를 끌어당기시며 피로한 목소리로 말씀하셨 다.

“글쎄다. 나로서는 알 수가 없구나. 네 행동이 올바른 것인지. 그래서 세월이 너에게 답을 주지 않을까 하는 일반론 외엔 줄 것이 없구나. 일단은 너 를 돕겠다. 정확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지금까지처럼…………, 제가 영지의 주민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신분상 가지게 되는 여러 가지 의무나 권리에 대해 영주님께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너는 우리 영지의 은인이자 나의 은인이니 너를 도와주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영주의 의무를 대신하라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겠구 나. 네가 영지에 대해 갖는 책임은 그 훌륭하다는 청년들에게 맡겨두었으니 문제될 것은 없겠지만, 네가 수도나 국왕에 대해 갖는 책임은 어쩌겠느 냐? 하다못해 곧 있으면 다가올 신년 인사 같은 것도 있는데. 어전에 찾아가 국왕께 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 사소한 일이지만 꼭 해야 하는 일 이기도 하지.”

“예. 그런 것도 있다더군요. 바로 그런 것 때문에 부탁드리는 겁니다만, 저, 영주님도 그때는 수도에 올라가시죠?”

“그렇지.”

“저, 그때 저를 수행원으로 삼아주시지 않겠습니까?”

영주님은 미소를 지으셨다. 감금 생활 동안 더욱 깊어진 그 눈가의 주름살이 굵게 패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구나. 네가 공무상 수도로 가야 할 때마다 내가 너의 위장을 도와줘야 한다는 말이군?”

“예. 죄송한 부탁입니다만………….”

“아니, 괜찮다. 어차피 영주가 수도까지 가야 할 일은 자주 있지 않으니까.”

“그럼,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러지. 그게 네 은혜에 대한 보답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하겠다.”

“감사합니다.”

영주님은 잔잔히 웃으시며 다시 모포를 끌어올렸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난로로 다가갔다. 벽난로의 장작들을 뒤적거려 불길을 일으키고 있을 때 등뒤에서 영주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궁금하구나. 왜 네가 백작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인지.”

고개를 돌려보니 영주님께서는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고 계셨다. 영주님은 나뭇가지에 쌓이는 눈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쿨, 쿨럭. 으으음…………, 네가 영지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할까 봐 영주가 되지 않겠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구나. 그 훌륭하다는 청년들이 있으니 그들을 네 가신으로라도 받아들이면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그들과 협조하여 네 영지를 보살필 수 있을 테니.”

“그렇긴 합니다만, 저, 창문을 닫을까요?”

“아니. 괜찮다. 바람은 별로 안 부는구나. 조용한 눈이라 보고 있으니 즐겁군.”

“a…….”

“네가 경계하는 것은 영주의 책임이 아니라 영주라는 지위 그 자체인 모양인데, 맞느냐?”

나는 영주님의 백발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영주가 됨으로써 제가 변하게 되는 것이 싫습니다.”

“왜 변하고 싶지 않은 거냐. 지금의 네가 좋기 때문에?”

“물론 저는 지금의 제가 좋습니다. 하지만 만일 제가 영주가 되면, 그때는 영주인 저 자신을 더 좋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는 비교적 낙천적이라 어떤 상황이든 대개 좋아해 버리고 맙니다.”

“너는 영주가 되어도 그 상황을 싫어하지 않을 거라는 게냐?”

“예.”

영주님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셨다. 영주님은 의자 등받이에 관자놀이를 기대며 나를 비스듬하게 올려보셨다.

“그렇다면 네가 영주가 되지 않으려 드는 이유는 갈수록 모호해지는구나. 어떤 상황에 처하든 특별히 두려워하는 것도, 거리낄 것도 없다면 특별히 영주가 되지 않으려 드는 이유는 무엇이냐?”

나는 천천히 걸어가 다시 영주님의 맞은편에 앉았다. 하지만 조금 비스듬히 앉아서 영주님이 아니라 창밖을 바라보는 자세로 앉았다. 마치 꿈꾸듯 떨어지는 하얀 눈송이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영주님에게 질문했다.

“영주님. 먼저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영주님께서는 아무르타트 정벌에 실패하셨습니다. 이제 제 10차 아무르타트 정벌을 계획하고 계십니까?”

영주님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영주님의 얼굴을 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정적의 시간은 꽤나 지루했다. 잠시 후에야 영주님께서는 말했다.

“아니다. 현재로서는 그런 생각은 없다.”

“왜 그런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무르타트 정벌을 또다시 기획했다가는 영지를 도탄에 빠뜨리게 되지 않겠느냐. 국왕께 상주드려 캇셀프라임까지 불러왔건만 성공하지 못했다. 만일 성공하려면 캇셀프라임보다 더 엄청난 준비가 필요할 텐데, 그런 준비를 할 수 있겠느냐.”

“그것뿐입니까?”

“말하고 싶은 바가 있거든 말해 보거라.”

나는 고개를 돌려 영주님의 눈을 마주보았다. 비록 움푹 들어간 눈이지만 영주님의 눈은 맑았다. 칼의 형님이시지. 그래. 비록 배다른 형제라고는 하 지만 영주님은 칼의 형님이야. 아니,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영주님은 한 영지를 평생 다스려온 분이시지.

“저희 아버지도 아무르타트에 대한 맹렬한 복수심을 가지셨던 분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제 그 복수심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도 아무르타트를 증오했습니다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주님께서도 이제 더 이상 아무르타트를 증오하시지 않게 되신 것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만.”

영주님께서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셨다.

“정확하다.”

“그렇습니까.”

“어떻게 들릴지 의심스럽다만, 나는 이기적인 자였다. 겉으로야 이 영지를 위협하는 아무르타트를 없애는 것이 이 영지를 위하는 일이라는 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나 자신을 속였지만……………. 나는 이제 잘 알고 있다. 내가 원한 것은 아무르타트의 파멸이라기보다는 내 복수심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그 복수심만 표현된다면 나로선 아무르타트가 죽든 말든 상관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를 향해 창을 들어 돌진했었다. 그리고 이제 만족감 을 느낀다. 늙은이의 망령이 정도가 지나친 것 같구나.”

“아니오. 그것은 제 아버지도, 그리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아버지는 아무르타트가 절벽이나 강물처럼 느껴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의 면전에서 그를 가리켜 제 어머니의 원수라고 고함질렀습니다. 하지만 그는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변화라구?”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벽난로의 이글거리는 불꽃을 바라보자 눈에 피로가 느껴졌다.

“제 여행 동료 중에 제레인트라는 프리스트가 있었습니다. 그가 들려준 재담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은 짝사랑이고 가장 무서운 병은 상사병이라더군요. 그 두 가지는 상대를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 듯하다.”

“사랑은 상대를 변화시키는 것이며 복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복수는 상대를 파멸시키려는 것인 것 같습니다만 사실은 상대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자신의 복수심을 전달시켜서 상대가 현상태에서 파멸 상태로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모든 복수자가 복수 대상을 죽이기 전 에 구차하게 자신의 이유를 설명해 주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하하…………, 그래. 옛이야기에서는 항상 그렇더구나.”

“예. 복수자의 말 중에 흔한 말이 있습니다. 내 손으로 끝내야 한다, 혹은 내 눈으로 직접 녀석의 파멸을 봐야겠다. 다른 사람이 죽이는 것이나 늙어 죽는 것은 못 봐준다. 흔한 이야기죠. 자신에 의한 상대방의 변화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예. 하지만 아무르타트는 변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변하지 않는다고?”

“저희 아버지가 말씀하신 절벽이나 강물처럼, 아무르타트는 인간이 변화시킬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전 그자의 면전에 대고 ‘당신은 살인자다.’라는 식으로 말해 줘봤습니다만 소용없었습니다. 만일 사람 대 사람이었다면 ‘당신은 살인자다.’라고 말해 주면 ‘내가 왜 살인자냐?’는 식으로 반응할 겁니 다.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말하거나 뻔뻔스럽게 반응할 수도 있겠지만 속사정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아무르타트는 ‘그렇다.’는 식으로 반 응했습니다. 마치 제가 ‘하늘이 푸르다.’고 말하자 ‘그렇다.’ 하고 대답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래 가지고서는 짝사랑이나 상사병과 다를 바가 없습 니다. 상대가 변화하지 않으면 복수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마치 수백 년 전에 죽은 사람에게 복수하려는 것과 비슷할까요. 무슨 짓을 해도 수백 년 전 에 죽은 자가 어떻게 변할 리는 없으니까요.”

영주님은 빙그레 웃으셨다.

“내가 내 영지의 17세 꼬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구나. 하하하. 네 생각은 그럴 듯하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언젠가 칼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어떤 말이었지?”

“그는 우리 헬턴트 영지의 주민들은 아무르타트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래. 나도 그 이야기는 들어보았다. 주로 내 복수를 말리고 싶을 때 그가 잘하던 말이었다.”

“그랬군요. 어쨌든…, 용서하시길. 그것은 거만한 말이었습니다.”

“거만하다고?”

“그것은 조화가 아닙니다. 강물이 흐르다가 흙덩이나 바위를 만나면 깨어버리고 흐릅니다. 하지만 도저히 깰 수 없는 어마어마한 바위나, 아니 산이 가로막는다면? 강물은 돌아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강물이 자존심이 있다면 말하겠지요. 나와 산은 조화를 이루었다고. 하지만 산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하하하…….”

나는 불길에 쓰러지는 나무 토막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 칼이 말한 것이 그것입니다. 아무르타트는 변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변화한 것입니다.”

소담스럽게 내리는 눈 사이로 하멜 집사의 외침이 아스라하게 들려왔다. 아마도 안뜰에 쌓이는 눈을 어떻게 치워보려고 경비 대원들과 함께 분투중 인 모양이다. 하지만 눈 오는 날 들려오는 소리가 다 그렇듯이, 하멜 집사의 고함소리도 포근하게만 들려왔다.

“우리가 변화했다고 했느냐.”

“예. 그리고 그것은 전대 미문의 사건입니다. 적어도 인간이 대지 위를 걷게 된 이후로는.”

“뭐라구?”

다시 영주님을 돌아보다가 나는 영주님의 모포가 거의 무릎 아래로 떨어져 내릴 지경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잠시 일어나 영주님의 모포를 다시 끌어올려 드리고 나서 말했다.

우리는 아무르타트처럼 변화해 버린 것일까. 석양에 서 있는 그처럼. 혹시 드래곤 로드와 접촉했던 루트에리노 대왕은 드래곤처럼 변화된 것이 아닐 까?

“루트에리노 대왕처럼………….”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입술이 열리고 말이 흘러나왔다.

“저는 아무르타트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드래곤 로드를 물리치지 못하고 첫눈을 맞이하신 대왕처럼. 저도 이제 하늘이 땅에 게 던지는 선물 중 가장 포근한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울하군요.”

영주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고개를 돌려보니 영주님은 내리는 눈을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싱긋 웃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벽난로의 불을 보살핀 다음, 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며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영주님, 푹 쉬시길.

성 안뜰로 내려서자 눈싸움에 몹시 심취해 있는 경비 대원들과 그 옆에서 고함을 꽥꽥 질러대고 있는 하멜 집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놈들아! 네녀석들 나이가 몇 살인데 눈싸움을, 으윽!”

경비대원 세로가 집어던진 눈덩이가 하멜 집사의 안면으로 정확하게 날아갔다. 집사님은 얼굴을 감싸며 웅크렸고 세로는 기겁해서 외쳤다. “으아, 집사님! 괜찮으세요?”

“……받아랏!”

이윽고 하멜 집사는 무서운 속력으로 눈덩이를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제3자적 위치에서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멜 집사의 공격에는 매서움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하멜 집사의 넘치는 의욕은 가져가지 못했는지 몰라도 그 팔다리의 힘은 꽤나 가져가 버렸던 모양이고, 경비 대원들은 여유 있게 집사님의 공격을 피해 냈다. 하긴 헬턴트 경비 대원들이 제대로 피하지 못할 정도의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은 대륙 전체를 뒤져봐도 얼마 되 지 않겠지.

나는 그 포근한 정경을 바라보며 가슴 깊숙이 찬바람을 집어넣었다. 몸속이 전부 씻겨나가는 기분이 들면서 머리 뒤까지 시원해졌다. 반드시 봄이 오기 때문에 겨울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야. 새벽이 오기 때문에 밤이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듯이, 그리고 반드시 백작이 될 수 있으니까 후치 네드발 이 잘난 것이 아니듯이. 하하하.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워. 욕구 불만의 종족들이여, 그대들의 주위를 보라. 미래는 아무르타트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야. 현재는, 지금 내 눈앞으로 날아오는 저 눈덩이처럼 아름다운……………? 퍽!

“어라? 저게 누구야? 아, 후치구나?”

“그리고 현재의 감정에 충실해야지. 미래를 위해 감정을 속이면 안 돼.

“받아라아앗!”

아마 오늘자 경비대 일지에는 ‘헬턴트 경비대, 후치 네드발의 공격에 의해 재기 불능의 완패를 당함’이라고 기록될 거다. 나는 경비 대원들을 주축 으로 해서 결여된 예술성과 무시된 상식성을 자랑하는 10큐빗짜리 눈사람을 만들어놓고는 하멜 집사에게 상당한 치하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마구간 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말들이 뛰놀던 운동장에도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그 하얀 눈 위로 말발자국들이 어지럽게 나 있었다. 나는 어지럽게 난 말들의 발자국에 내 발 자국을 보태면서 운동장 옆에 있던 마구간으로 들어섰다.

마구간 건물 안은 컴컴했다. 외풍이 들어오지 않도록 창문을 모두 닫아두어서 사물이 잘 식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그 캄캄한 건물 안에서 한쪽에 피어 있는 모닥불만이 바알갛게 빛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오넬이 앉아 있었다.

“누구냐. 후치?”

“예. 뭐하세요?”

나는 오넬의 곁으로 다가가 모닥불에 손을 쬐었다. 오넬은 모닥불 옆에 앉아서는 손에 두꺼운 헝겊 같은 것을 들고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 니 바느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말 신발을 만드는 거야. 눈이 내리니까.”

“어, 누가 급하게 말을 탈 일이라도 있어요?”

“하하하, 이 녀석아. 말 달릴 때 말 신발이 왜 필요하겠냐. 이건 운동시킬 때 신기는 거야. 말 입는 옷도 저기 있잖냐.”

“이런 날씨에 운동을 시켜요?”

오넬은 주머니칼로 실을 탁 자르더니 그 말 신발이라는 것을 눈앞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말이라는 놈은 말이다. 달리지 않으면 병이 생기는 법이다.”

“아, 그래요?”

“음…………, 됐다. 한번 신겨보자. 이건 선더라이더의 것이야. 다른 말들은 다 자기 신발이 있거든.”

“아, 그랬어요? 고맙습니다.”

“고맙긴, 뭐.”

우리 집에는 선더라이더를 둘 곳이 없어서 선더라이더는 성안의 마구간에 들어와 있었다. 나와 오넬은 함께 일어나 선더라이더를 향했다.

선더라이더는 내 얼굴을 보더니 한 번 기운차게 울어젖혔다. 오넬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선더라이더, 퍽 심심했지? 자, 이제 너도 한바퀴 돌아봐야지.”

오넬은 선더라이더의 발을 들게 하고는 그 양말 비슷하게 생긴 신발을 신기려 했다. 그런데 선더라이더는 자꾸 몸을 틀면서 오넬의 손을 피했고 하 마터면 오넬은 선더라이더에게 손을 밟힐 뻔하기도 했다.

결국 오넬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런 자신이 우습다는 듯이 실실 웃어버렸다.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이거 참. 아직 낯이 설어서 그런 모양이다. 네가 해볼래?”

그러나 내가 덤벼들어도 마찬가지였다. 선더라이더는 거북하다는 듯이 자꾸 몸을 틀면서 내 손길을 피했다. 짜증이 난 나머지 녀석을 뒤집어놓고 강 제로 신기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오던 도중 간신히 녀석의 사정을 눈치챘다.

“잠깐, 오넬 씨. 북부 대로는 여기보다 더 춥겠죠?”

“어? 그렇겠지.”

“그럼 이 녀석은 원래 추위에 꽤 강할 거예요. 원래 북부 출신이거든요.”

“그래? 허허, 그럼 이건 없어도 되겠네. 괜한 짓을 했군.”

오넬은 피식 웃으며 선더라이더의 목을 쓸어내렸다.

“알았다, 알았어. 이 녀석아. 그럼 넌 그냥 나가봐도 상관없다는 말이지?”

“아, 그래요. 오넬 씨. 운동시키신다고 그랬지요? 제가 타고 한바퀴 돌아봐도 되겠어요?”

“음…………, 그래라. 너무 과격하게 움직이지는 말고. 몸이 너무 젖으면 아무리 북부산 말이라고 해도 감기에 걸릴 테니까 적당히 달리게 해라.” 가볍게 뛸 생각이라서 안장도 승마용의 가벼운 것을 얹었다. 모험 다닐 때 쓰던 안장은 무시무시한 거였는데. 나는 오넬에게 망토를 하나 빌린 다음 선더라이더를 타고 밖으로 나왔다. 이 녀석아. 너야 추위에 까딱없다지만 난 그렇지 않거든?

눈이 내리는 헬턴트 영지는 고요했다.

며칠째 계속 내리는 눈에도 지겨워할 줄 모르는 것은 어린 꼬마들뿐이었다. 괴성을 지르며 골목길에서 뛰어나왔다가 골목길로 뛰어드는 몇몇 꼬마 들 말고는 대로에 아무도 없었다. 그저 소복이 눈이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꼬마들은 눈발 사이에서 갑자기 나타난 키 큰 그림자를 보고는 크게 놀랐 지만 그것이 선더라이더를 탄 나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크게 감탄했다. 난 아이들에게 몇 마디 던져주고 마을 바깥으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보이는 것은 길뿐이었다.

하얀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과 하얀 눈으로 뒤덮인 땅, 게다가 제 흥에 겨워 흩날리는 눈송이들이 시야를 어지럽히는 바람에 지평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간혹 외로이 서 있던 나무가 눈덩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제 가지를 부러뜨리는 소리만이 울려퍼질 뿐 사위는 고요했다. 눈이 쏟 아지는 날씨에 교외를 어정거리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망토 위로 쌓이는 눈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며칠 동안 퍼부어댄 끝이라 눈은 하늘거리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꽤 오랫동안 걸었던 모양이다.

왠지 모르지만 발걸음이 멈춰지지 않았다. 나는 뚜렷한 이유도 모르면서 선더라이더의 고삐를 놓았지만 선더라이더는 그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나 는 선더라이더가 정확하게 걷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며 안심했다.

문득,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선더라이더의 발 뒤로 마을까지 주욱 이어져 있는 곧은 발자국이 보였다. 사실 마을의 모습은 희미했지만 그 발자국의 끝에는 분명 마을이 있을 것 이다. 좋아. 안심이야. 나는 다시 무작정 떠나려는 것은 아니야. 마을과 선더라이더를 잇고 있는 발자국은 헬턴트 영지와 나를 잇고 있는 끈처럼 보였 다. 저 끈이 있는 이상, 무작정 달려나갈 일은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완전히 선더라이더에게 맡겨둔 다음 느긋하게 앉아서 기다렸다. 나는 안전해. 그러니, 이제부터 겨울의 하얀 들판이, 저 초절 적으로 매력적인 들판이 무엇을 줄지 기다려보자구. 마침내 하얀 배경 속에서 불쑥, 언덕이 나타났다. 지평선의 모습조차 희미하던 참이라 언덕의 등 장은 갑작스러웠다. 나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보다는 머릿속의 지식으로 간신히 눈앞의 언덕이 어디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제미니가 나를 기다리던 언덕이었다.

언덕 위에 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아무런 명령 없이도 선더라이더는 멈췄다. 나는 약간의 멋쩍음을 느끼면서 선더라이더에서 내렸다. 뽀드득. 뽀드득. 땅에 쌓인 눈이 짙은 한숨을 내 쉬는 것을 들으며 나는 언덕으로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하느작거리는 눈송이들 사이로 이루릴은 언덕을 걸어 내려왔다.

어깨엔 언제나처럼 묵직한 배낭이 맞춤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허리 옆으로 달그락거리는 에스터크는 마치 그녀의 허리에 매어둔 방울처럼 보인다. 이제 막 출발한 듯하면서 동시에 기나긴 여정의 끝에 도착한 것 같은, 상쾌하면서 피로하고 가벼우면서 착실한 걸음걸이로 그녀는 걸어왔다.

그녀의 걸음이 멈춰지고 나서야 나는 우리 둘의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일 그녀가 멈추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해서 걸어가 그녀와 부 딪히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 눈이 흩날리는 언덕을 걸어 내려오는 엘프는 순간 속에 비끄러매어진 영원 같았고 도달할 수 없는 환상처럼 보였다. 하 지만 분명히 우리들은 서로의 입매에 매달린 미소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허둥지둥 멈춰 서는 내 모습을 보며 그녀는 살포시 웃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녀의 머리와 어깨에는 아쉬울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 더군다나 재킷이나 바지에는 거의 눈을 찾아볼 수가 없다. 발디딤이 가볍기 때문일까? 나 는 그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벌써 허벅지까지 눈덩이를 덕지덕지 붙이게 되었는데 말이야.

그녀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마주잡았다. 가느다랗기 때문에 추워 보이는 손가락이지만 손안에서는 따스했다. 아니, 내 손이 차가워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 낀 것일까.

“잘 찾아오셨군요. 좋은 여행이셨습니까?”

이루릴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그녀의 머리에 얹혀 있던 눈들이 가볍게 흩뿌려졌다. 붙어 있던 것이 아니다. 얹혀 있던 것이다.

“예. 찾아오는 것은 쉬웠어요. 후치가 흔적을 많이 남겨두어서.”

“예? 아, 하하하.”

“칼라일 영지의 펠레일 씨는 당신께 안부를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그리고……………, 좋지 않은 소식이 있습니다.”

이루릴은 우려를 담은 얼굴로 말했다. 무슨 소식이기에? 설마…………….

“레너스 시의 유스네 양이 당신을 죽여버릴 거라고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만.”

“아, 예. 그, 그럴 테지요. 으윽. 얼굴도 안 보고 지나쳤으니까. 아, 유스네가 한 말은 농담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루릴.”

“농담인가요? 아아, 다행이군요!”

웃지도 못했다. 이루릴의 밝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 또한 죽었다 살아난 것처럼 다행스러운 기분이 들어버렸으니까. 나는 열없는 기분에 망토의 눈을 털어내며 질문했다.

“저, 그런데 레니와 제레인트는 일스에 잘 도착했습니까?”

“예. 두 분 모두 잘 도착했습니다.”

“고마워요. 우리가 할 일인데…………….”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했다.

“친구잖아요?”

“이루릴이 친구여서 고맙고 기뻐요.”

이루릴은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다시 생긋 웃었다.

“저도 고맙고 기쁘네요. 후치.”

정취가 다르다. 그래. 바로 곁에 마법이 걷고 있으니 겨울 들판의 마력은 완연히 수그러들 수밖에 없지. 그래서 주위는 이제 물씬 풍기던 마력 대신 고요함이 약간 지나친 엄숙함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이루릴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둘 다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우리들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선더라이더는 아무 지시도 내리지 않았지만 우리 뒤를 졸졸 따라왔다. 나는 어깨 너머로 그 모습을 보면서 핏 웃어버렸다.

“쳇. 저런 녀석이 명마라니, 믿을 수 있겠어요?”

“예?”

“조금이라도 훈련된 말이라면 기수가 내린 상태에서는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안다는 말입니다.”

“네…………. 그렇게 훈련시키나요?”

“예. 아마 제멋대로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큰 이유겠지요. 물론 기수가 말 찾을 때 편하려는 이유도 있겠지만.”

“아아. 알겠어요.”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름답군요. 웨스트 그레이드에는 항상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나요?”

“예. 회색 산맥 때문인 것 같아요.”

“언딘은…….”

“예?”

이루릴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손이 빠르게, 하지만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거지? 처음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손짓으 로만 보였다. 하지만 잠시 후, 나는 그녀가 눈송이의 궤적을 따라 손을 움직이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윽고 눈송이 하나가 땅에 떨어지지 못한 채 그 녀의 손놀림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이루릴의 손이 느리게 움직이며 작은 눈송이를 따라간다. 그러나 눈송이가 이루릴의 허리쯤까지 내려왔을 때 이루릴의 손은 잽싸게 움직여 그 눈송 이의 아래를 스치고 지나가 다시 올라간다. 마치 빠르게 물을 떠올리는 것처럼. 그러자 그 손이 지나치면서 일으킨 세찬 바람을 따라 눈송이가 다시 위로 솟구친다.

잠시 눈송이가 거꾸로 이루릴의 손을 따라 올라간다. 그 순간 이루릴의 손은 다시 느려졌고 눈송이는 바람의 구속에서 벗어나 다시 유유히 비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루릴의 손가락은 마치 피리를 연주하는 바드의 손가락을 연상하게 만드는 유연한 움직임으로 눈송이를 뒤따른다.

그러나 이루릴의 손은 단 한 차례도 눈송이를 건드리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눈송이는 녹아버렸거나 부서졌을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눈송이로 하 여금 손가락 사이를 비행하게 만들었다. 나무들 사이를 지나치는 새처럼 눈송이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손가락들을 피해 비행했다. 그것은 마법이 아 니라 오로지 이루릴의 정교하고 날렵한 손놀림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루릴은 호흡하는 일처럼 여상스럽게 그런 일을 하며 내게 말했다.

“실프의 가장 기승스러운 노여움이 있을 때는 샐러맨더도, 놈도 숨을 죽입니다. 하지만 언딘만은 저 포근함으로 실프를 달래지요. 고요하군요.”

그래.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날씨다. 내가 실프라도 눈송이가 애처로워 바람을 불지는 못하겠다. 이루릴은 갑자기 손을 뒤집었으며 그녀의 손 주위 로 비행하던 눈송이는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이루릴의 중지와 검지 사이로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무의식중에 입이 열렸다.

“당신은 핸드레이크를 찾아서 클래스 10의 마법을 익히려는 것이 목적이었지요?”

“아시다시피 그렇습니다.”

“그거 포기하세요.”

“알겠습니다.”

긴장이 풀려서 하마터면 뒤로 나동그라질 뻔했다. 이루릴은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을 보며 조금 놀라는 듯했지만 난 그녀를 안심시킬 여유를 갖지 못 했다.

“이, 이루릴, 저, 알려줄 게 있는데 말이죠.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옳다고 믿는 말을 건넬 때에도 상대의 거부 반응을 예상해서 거기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준비를 하는 것이 보통이라구요.”

“그렇습니까.”

“왜 질문하지 않지요?”

“질・・・・・・문이오?”

“왜 클래스 10의 스펠을 찾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이냐고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루릴은 잠시 미안한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애써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후치. 왜 클래스 10의 스펠을 찾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인가요?”

“……아니, 관두지요. 저 때문에 궁금하지도 않은 것 일부러 질문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런데 내가 좀 궁금한데요. 왜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 거죠?” 고아한 성품을 가진 이루릴은 당연한 것을 질문하는 바보를 바라보는 식으로 나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후치와 함께 보낸 저의 시간은 후치의 말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예?”

“저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당신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나요?”

“어, 저, 아니죠. 그렇지는 않아요.”

“제가 당신 속에 있나요? 눈에 보이지 않아도?”

“예.”

“그럼, 당신은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요. 당신과 함께하면서 보아온 당신의 모습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다른 것이 필요할까요. 묻겠어요, 후치. 자신의 행동을 자신에게 설명해야 됩니까?”

“………예. 우리는 그래요. 일생을 함께 보내온 부모의 말이라도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 되죠. 자신의 말이나 행동도 마찬가지예요. 스스로에게 설명 해야 합니다.”

“그런가요.”

“우리는 불안하니까…………. 쓸데없는 질문을 했군요.”

“아니오. 당신은 나에게 당신들에 대한 이해의 새로운 방식을 선물했어요. 고마워요.”

“다행이군요. 휴우. 쩝, 그럼 이루릴. 이제 클래스 10의 스펠을 찾지 못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할 생각이죠? 계속 이 땅에 남아 있을 건가요?”

이루릴은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녀의 머릿결 위에 얹히는 눈송이들이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여서 나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가로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말씀드렸지만 저는 지위가 낮은 엘프입니다. 제 수탐이 실패했음을 보고하는 것으로써 제 소임은 끝날 것 같습니다. 제 수탐 의 과정과 그 결과를 심사하고 대안을 생각하는 의무는 제게 있지 않습니다.”

“지위…………. 엘프들은 조화로운데 왜 지위가 있는 거죠?”

“세계는 조화롭지만 동서남북은 있지요. 후치. 짐작해 보자면……, 바이서스 임펠은 동쪽에 있나요? 하지만 제레인트 씨라면 바이서스 임펠은 서쪽 에 있다고 말하겠지요. 그런 차이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루릴은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런 짐작도 되지 않습니다.”

“알겠어요. 그런데 나는 기쁜데요? 당신들이 세상을 떠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 말이에요.”

이루릴은 빙긋 웃었다.

“저도 기쁘군요.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돌아가신다고요?”

어느새 이루릴의 걸음은 멈춰져 있었다. 그래서 당황한 내가 반문했을 때 나와 그녀의 거리는 대여섯 발자국 이상 떨어져 있었다.

“아니, 저, 좀 지내시다가 가지 않고………….”

말해 놓고 나서 나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이런 멍청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다행히도 이루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손님으로 받아들여준다는 것은 감사합니다만 처지가 마땅치 못하군요. 저는 여기서 체재할 시간이 없습니다.”

“아……………. 바쁜 일이 있는가 보네요.”

“그렇습니다. 레브네인 호수가 얼기 전에 페어리퀸에게 돌아가 봐야 됩니다. 그녀를 만나야 할 일이 있어서요.”

“음? 얼음이 문제가 될 줄은 몰랐군요. 그거, 이루릴의 마법으로 그냥 부숴버리면 되지 않나요?”

이루릴의 얼굴을 보고서는 내가 과연 말을 잘한 것인지 잘못 한 것인지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이루릴은 잠시 후 별로 달라지지도 않은 어조로 말했 다.

“후치. 친구의 집 대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손님은 없을 것 같아요. 페어리들은 당신들이 말하는 어투로 ‘물’이라든가 ‘얼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요.”

・죄송합니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루릴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잠시 후에야 그녀가 내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황급하게 말했다.

“그럼, 저, 이루릴. 귓가에 햇살을……………”

이를 악물고 그야말로 간신히 말했다. 그래서 내 목소리는 작별 인사라기보다는 결투 신청으로 들리는 목소리였다. 지금까지의 시간도 이미 너무 길 었다. 그녀를 더 붙잡아서는 안 된다.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려 그녀의 모습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루릴의 모습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마법을 쓰는 건가? 나는 일렁거리는 이루릴의 모습을 보며 힘들게 말을 짜내었다.

“햇살을…………, 귓가에 햇살을 받으며………….”

고개를 갸웃하던 이루릴이 살짝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자신의 가슴 위로 소담스럽게 늘어진 머릿결을 움켜쥐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내 눈가를 조심 스럽게 닦았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수도 없이 많은 머리카락들이 눈가를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매끄럽고 가는 머리카락들이 수없이 눈 주위를 훑어내리는 느낌을. 터무니없이 난폭해지고 싶고, 동시에 터무니없이 차분해지는 그 시간은 가장 짧은 영원이었고 가장 긴 순간이었다.

“웃으며 떠나게 해주겠지요?”

난 눈을 질끈 감아서 마지막 눈물을 짜낸 다음 눈을 떴다. 이루릴의 하얀 얼굴에 어리는 미소, 그리고 그 하얀 얼굴 앞으로 스쳐 떨어져 구분이 잘 안 되는 눈송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난 웃어요. 웃겠어요.”

“고마워요.”

이루릴은 그렇게 말하며 뒤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제멋대로 움직이는 얼굴 근육을 힘들게 움직이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천천히 멀어지던 이루릴은 살짝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웃으며 떠나갔던 것처럼 미소를 띠고 돌아와 마침내 행복하기를.”

웃으며 떠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미소를 띠고 돌아올 수는 없을 거야. 가슴속에 복받치는 것을 간신히 끌어내리느라 웃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웃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침내 하얀 눈발 사이로 빛나던 이루릴의 검은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사라진 자리 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