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권 22화 – 뒷수습

뒷수습

묵향이 교주가 묵고 있는 천마전(天魔殿)에서 나오자 사군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묵향은 그들과 집으로 걸어가며 궁금한 것을 물어봤다.

“죽(竹)은 떠났나?”

그의 질문에 난(蘭)이 대답했다.

“예, 그들이 모르게 호위해 주라고 전했습니다.”

“매(梅), 자네는 비영대 출신이니까 여러 가지 정보 수집에 능할 거다. 너는 난과 국을 데리고 지금 낙양으로 출발해라. 그곳에서 소연이가 어떻게 해서 천지문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알아보게. 그리고 소연이의 어미는 어떻게 지내는지 등 세부 사항을 알아보도록 하게.”

“존명”

“그리고 천지문의 문주가 어떤 사람인지 철저히 조사를 해 봐. 과연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한 달의 시간을 주겠다. 철저히 알아보도록!” “존명!”

묵향은 품속에서 부교주를 나타내는 영패(令牌)를 꺼내 매에게 주며 말했다.

“될 수 있으면 최대한 빨리 알아내라. 그 일을 하는데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상관없다. 내가 연락을 해 둘 테니까 너희들이 낙양에 도착하기 전에 낙양의 비밀 분타 와 천령원의 방 대인이 사람을 풀어 조사를 시작할 거야. 자네들은 그 자료들을 검토해서 정확한 사실을 뽑아내라. 그리고 너희들이 도착하는 대로 그들을 지휘해서 더욱 확실한 정보를 나에게 보내주면 된다. 대략적인 자료는 비영대에 있을 테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비영대도 모르는 정확한 자료가 필요하다. 한 달은 짧은 시간 이지만 죽자고 파헤치면 알아낼 수 있을 거야. 나는 한 달 후에 낙양에 갈 거다. 그때 나에게 그 정보를 알려 주도록!”

“존명”

“그리고 낙양으로 가고 있는 죽(竹)에게 연락해서 임무가 끝나도 본교로 복귀하지 말고 낙양에서 합류해서 자네들의 일을 도우라고 하게. 죽이 실질적인 수장이지 만 이번 일은 정보 수집이니 임시로 매가 수장으로서 모두를 이끌도록 하라.”

“존명.”

“빨리 가 봐라.”

수하들을 보낸 후 묵향은 혁무상 장로를 찾아갔다. 혁무상 장로는 교주가 묵향에게 전권을 위임했기 때문에 묵향의 의도를 물었다.

“교섭을 하러 사람을 언제 보낼까요?”

“교섭이 빠를 필요는 없네. 자네는 천지문의 문주가 누군지 아나?”

“예.”

그러더니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문사) 차림을 한 중년의 사내에게 지시했다.

“천지문의 문주에 대한 자료를 가져와라. 그리고 천지문에 대한 다른 자료도 모두 가져와.”

“예.”

문사 차림의 사내는 곧 한 뭉치의 서류들을 가져왔다. 혁무상은 그중에서 하나의 서류를 골라 묵향 앞에 펼쳤다.

“이자가 천지문의 문주인 대력도패(大力刀覇) 진양(振揚)입니다. 6척 1촌의 장신에 근육질 사내로서 대단히 뛰어난 무인입니다. 현재까지 드러나기로는 대단히 광명정대한 인물입니다. 가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죠. 그런데 마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젭니다.”

“마교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마교의 고수와 싸우다가 치명상을 입고 거의 다섯 달 동안 치료를 받다가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뭐 그냥 흔히 있는 일이죠. 낙양에 저 희들이 세력권을 뿌리내리던 초기에 천지문과 약간의 충돌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그는 마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 증오한 다고 봐야겠죠.”

“흠…, 어쨌든 심지가 굳은 인물이라 그거지.”

“예, 그렇지만 증오는 이성을 잃게 만들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천지문의 제자가 2천 명 정도라고 교주님이 말씀하셨는데, 그중에 쓸 만한 자들은 몇 명인가?”

“예, 5백 명 정도는 꽤 실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번의 충돌로 인해 그중 3분의 1은 본교의 뇌옥 안에 있다고 봐야 하지요. 만약 화해 쪽으로 끌고 나가신다면 그 들도 응해 올 겁니다. 진양 문주도 바보가 아닌 이상 한 번만 더 본교와 충돌하면 멸문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들이 외부 세력을 끌어들일 가능성은?”

“최근의 정보에 의하면 진양은 무림맹에 원조를 청했고, 무림맹의 고수 2백 명이 천지문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원체 잘난 척하며 거드름을 피워서 천지문 의 수하들과 약간씩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도 알아냈습니다. 무림맹의 용천익 당주가 그들을 이끌고 있는데, 그들의 행태에 진양까지도 별로 곱지 못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고 하더군요.”

“꽤 자세히 알고 있군.”

“예. 저야 교내의 모든 정보를 책임지다 보니, 저의 맡은 바 일에 충실할 따름입니다.”

“만약 한 치라도 그 정보가 잘못된 점이 드러난다면?”

“속하의 목을 치시죠.”

“글쎄…….”

그러면서 그는 의식하지 못하는 듯 묵혼의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혁무상 장로의 안색이 미세하게 바뀌고 기가 불안정해졌다. 그가 한껏 긴장했다는 것을 알고 묵향은 내심 만족했다. 그의 마지막 사부인 유백의 말에 따르면 한 번씩 이렇게 겁을 줄 필요가 있다고 했고 묵향은 그걸 실천한 것이다.

묵향의 검술 실력은 마교 내에서도 최강이라는 사실을 수뇌부에 있는 인물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가 뇌전검황을 죽였을 때부터 마교의 수뇌부들은 묵향이 탈마 의 경지에 들어서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그래서 일단 묵향이 해치우고자 마음을 먹는다면 교주도 그의 검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은 안 했지만 모두 알고 있었 다. 그런 이유로 교주도 그에게 교주의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던 것이다.

마교에서는 교주 앞 2장 안으로 검을 차고 접근하는 것은 금지된 사항이었다. 암습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것에 예외가 인정된 최초의 인물이 묵향이다. 묵향은 거리에 상관없이, 그리고 검을 가지고 있건 그렇지 않건 교주의 목숨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묵향은 능청스레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혁무상 장로에게 의아한 듯이 물었다.

“왜 그러는가?”

“예? 예, 갑자기 좀…….”

묵향은 짐짓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척하고는 능청을 떨었다.

“아하, 검을 쓰다듬는 건 오랜 습관이라……. 미안하네, 이거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다네. 만약 자네를 없애려고 한다면 검 따위는 필요도 없 으니까…….”

그 말을 들은 혁무상의 안색이 더욱 시퍼레졌다. 묵향은 이제 화제를 돌릴 때라고 생각했다.

“본좌는 진양에게 서로 불가침 협정을 맺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건 천지문으로서도 지키기 힘듭니다. 무림맹에서 협동하여 본교와 대적한다면 그들만 빠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마교와 연합하는 세력 이라고 오해를 받을 테고 심한 경우 무림의 공적(敵)으로 몰리게 되면 멸문당할 우려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내가 원하는 건 그걸 피해 나가면서 평상시에는 평화적으로 지낼 수 있는 조건이 없느냐 이 말이네.”

“그렇다면 협정 항목에 정파가 연대해서 사파를 공격한다면 그에 동참해도 된다는 게 있어야 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예외적인 사항들을 인정해 줘야 하기 때문에 불가침은 어렵고 조건부 불가침은 가능할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군.”

“…..”

“자네가 먼저 협정서의 초안을 잡아 주게나. 물론 천지문이 그 협정서를 타 문파에게도 공개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 주게. 그렇지 않으면 쓸데없는 의심을 받게 되고 공연히 무림맹의 시선이 낙양 쪽으로 돌아가게 되지. 그러면 여태까지 본교에서 벌여 놓은 여러 가지 일이 들통 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협정서는 언제까지 완성할 수 있겠나.”

“여러 가지로 의논을 해 봐야 하니까 일주일은 걸릴 겁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해도 될까요? 정파와 협정서를 나눈 적은 본교의 역사상 한 번도 없었습 니다.”

“괜찮아. 서로가 그런대로 편안하게 지내면 됐지 왜 쓸데없이 긴장을 고조시켜 피를 흘리나. 일단 피를 흘리면 완전히 뿌리를 뽑아서 더 이상 반항하지 못하게 만 드는 게 좋지만 처음부터 아웅다웅할 필요는 없지.”

10일 후 묵향은 총단에서 출발하여 낙양으로 향했다. 이번 길은 여러 명이 함께 했으므로 제법 숫자가 많았다. 혼자서 다니기 좋아하는 묵향으로서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교주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다. 묵향은 사혈천신(天神) 호계악(胡戒惡) 차석장로와 고루혈마(枯僂血魔) 옥관패(玉冠覇) 외총관, 음희(淫嬉) 설약벽(薛若碧) 우외총관, 묵인겁마(墨刃劫魔) 초진걸(楚眞杰) 좌호법과 그가 거느리는 호법원의 고수 20명이 따라왔다.

묵향은 옥관패 외총관이 눈에 거슬렸다. 고루혈마라는 명호에 어울리게 추하게 생긴 비쩍 마른 곱추였는데, 안 그래도 별로 예쁜 구석이 없는데다 흑시마조(黑屍 魔爪)를 극성까지 익혀 광택이 나는 검푸른 빛 손을 가지고 있어 더욱 혐오감을 느끼게 했다.

흑시마조는 마교가 자랑하는 최강의 조법으로 10성까지 익힌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이걸 익히면 소수마공 계열과는 달리 손의 모양이 갈고리와 같이 비쩍 마르 며 살이 빠지고 검푸른 빛을 띠게 된다. 그 모양이 아주 기괴하기에 파괴력은 좋으나 여자들은 절대로 익히지 않는다. 소수마공처럼 손이 희고 투명해져 너무나도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것도 있는데, 굳이 이런 걸 익힐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흑시마조(黑屍魔爪)를 익힐 때 처음 시작은 소의 뇌에 손을 담그는 것으로 시작하여 2성이 넘으면 그때부터 시체를 이용하여 시독(屍毒)을 흡수하는 방법을 병행 하게 된다. 강철과 같은 손가락에 긁히면 시독에 중독되어 죽고 마는 대단히 악랄한 마공이다.

이것과 유사한 정파의 무공으로는 구음백골조(九陰白骨爪)가 있는데, 그 익히는 방법도 상당히 유사하다. 정파가 자랑하는 구음진경이라는 비급에 이 무공이 실

려 있는데, 구음백골조와 흑시마조는 유사점 때문에 그에 대한 논쟁이 분분했다. 서로가 상대방이 베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정파의 무공으로 보기에 구음백골조 는 익히는 방법이나 또 그 사악함에 있어 타 정파 무공과 차이가 있기에 지금에 이르러서는 구음백골조가 흑시마조를 상당부분 본떠서 만들었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 되어가고 있었다. 흑시마조는 마교에서 끊임없이 전해져 내려왔지만 구음진경의 경우 매우 뛰어난 비급임에도 불구하고 도중에 실전되어 버렸기 때문이기 도 하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쉬엄쉬엄 길을 간 결과 20일 만에 낙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가 길을 재촉하지 않은 이유는 사군자에게 한 달 후 도착할 것이라고 알렸기에 서두르지 않은 데다 음희 설약벽에게서 금(琴)을 배우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기 때문이다.

음희는 처음 음공(功)을 사용해서 사람이 기쁨을 느끼며 죽어 가게 만들 수 있다는 뜻으로 자신이 명호를 음희(音僖)라 지었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와 냉혹 한 성격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금음으로 즐거워하다 죽게 만드는 재간을 보고 모두 음란함을 즐긴다는 음희(淫嬉)로 바꿔 불렀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다 보 니 그녀 자신은 음희(音僖)라고 우겼지만 종내 음희(淫嬉)로 바뀌어 버린 웃지 못할 사연이 있는 여고수다.

낙양분타에 묵향이 도착하자 사군자가 지금까지 조사한 것들을 묵향에게 설명했다. 물론 묵향의 사생활인 소연 모녀에 관계된 자료는 발표하지 않았다. 매는 묵향 에게 두터운 서류 뭉치를 건네며 말했다.

“대력도패 진양은 내공과 외공을 고루 익힌 뛰어난 고수로, 여태까지 약속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는 산적 토벌에 앞장서거나 여러 가 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돈을 아끼지 않고 주변의 주민들을 도와 꽤 인심을 얻고 있습니다. 그는 한 명의 부인과 두 명의 첩을 거느리고 있으며 정부(情婦)도 하나 있습니다. 그 정부는 서른두 살이며,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미색이 출중한 과부인데, 그 때문인지 조심해서 만나고 있으며 정부와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습니다. 시어머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 시어머니가 죽고 나면 정식으로 받아들일 계획인 모양입니다. 그 외에 부인에게 두 명, 두 첩에게서 세 명 합해서 4남 2녀의 자식이 있습니다. 자식들을 아주 사랑하며 부인들과의 사이도 원만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저희들이 일주일간 주야로 감시했는데, 한 가지를 제외하고 소문대로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더 정확한 정보를 원하신다면 하인을 몇 명 납치해서 주리를 틀 수도 있겠지만 부교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의 행 실도 대단히 좋다고 인정받고 있습니다.”

“방금 한 가지를 제외하고라고 했는데 뭔가?”

그러자 매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마교의 인물들은 여색에 있어서 거의 극과 극을 달린다. 일부 여체를 필요로 하는 마공을 익힌 자들은 완전히 호색한으로서 수 많은 여자들과 동침을 하지만 대부분의 마교인들은 마교 내의 빡빡한 훈련과 수련, 그리고 각종 임무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여색을 탐할 시간조차 얻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매도 후자의 경우로 그는 동자공을 익힌 것은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아직도 동정(童貞)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조금 변태적인 성향이 있습니다. 한 번에 두세 명의 부인과 함께 성교를 나눈다든지, 손발을 묶어 놓고 성교를 나누기도 하고…….” 주변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이 킥킥거리자 매의 얼굴이 좀 더 붉어지며 말을 멈췄다.

“뭐, 좀 변태적인 짓을 한다고 해서 그렇게 나쁠 건 없지. 안 그래?”

그러자 호계악 차석장로가 웃으면서 묵향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하하하, 그럼요. 자고로 침실에서까지 성인군자인 친구는 없다고 들었습니다, 하하하”

그의 말을 들은 모든 남자들이 키득거리며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 와중에도 유일한 예외는 음희 설약벽이었다. 그녀는 명호와는 달리 얼굴이 벌게지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그냥 놔두면 음담패설(淫談悖說)이 언제 끝날까 싶어 말문을 막기 위해 묵향에게 질문했다.

“얘기를 들어 보니 진양이란 자는 꽤나 정대한 인물인 모양인데, 부교주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계획대로 그들과 협정을 맺으실 겁니까?”

묵향은 두터운 서류 뭉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걸 살펴보려면 시간이 좀 걸리니까 별일이 없다면 사흘 후에 찾아가기로 하지. 그동안 자네들은 쉬게나.”

“알겠습니다.”

그들이 진양의 침실을 화제로 삼아 히히덕거리며 물러가자 묵향은 매를 조용히 불렀다.

“소연 모녀의 일은 알아봤나?”

“예, 그 안에 적혀 있습니다.”

“이걸 어느 세월에 읽는단 말인가? 무공비급도 아니고 시간 낭비야. 그래 지금 소연의 어미는 어디서 살고 있나? 예전의 그 집인가?”

“아닙니다. 지금은 천지문 근처에 있는 작은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수소문을 해 본 결과 진양은 시간이 날 때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재능이 있는 인재를 모 아 들이는데, 우연히 낙양에서 그 아가씨를 만났다고 합니다. 처음에 그녀가 상당한 수준의 무공을 알고 있다는 걸 눈치 채고 몇 가지 시험을 해 보는 중에 내력(內 力)은 상당한 수준인데 약간의 호신술 정도밖에 배우지 않았다는 걸 알고 그녀를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하더군요. 타 문파의 무공을 익혔지만 그녀가 현문의 정통 심법을 익혔다는 걸 알고 진양은 따로 심법을 가르치지 않고 그걸 계속 익히기를 권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지금 열네 살 위인 셋째 제자 장진(張璡)이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장진은 또 진양의 둘째 딸을 좋아해서 아마 결혼은 힘들 거라고 그러더군요.”

“뭐, 그런 거야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장진은 지금 어디에 있나? 뇌옥에 있나?”

“예, 같이 탈출한 모양인데 본교의 추적을 받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다가 다시 붙잡혀 뇌옥으로 끌려갔다고 알고 있습니다.”

“소연 어미는 건강하던가?”

“예, 정정하시더군요. 아주 지조 있고 말수가 적으며 언제나 아름다운 꽃밭을 가꾸는 중년 부인으로 주변에 좋은 인상을 주는 여자였습니다. 몇 번 청혼이 들어왔 었는데 모두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멍청하기는…, 결혼을 하는 것이 좋을 텐데. 자네는 이만 나가 보게나.”

묵향은 이틀 동안 천지문 주위를 배회했다. 소연의 어머니도 볼 수 있었는데, 그녀는 과거에 묵향이 그들과 지내며 마당에 심었던 것과 같은 화초들을 가꾸고 있었다.

묵향은 그녀가 꽃밭에 물주는 모습을 멀리서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다가 소연이가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천지문은 상당히 넓은 문파였고 또 그 주변에서 안을 살펴볼 수도 없어 묵향은 언덕 위에서 그냥 천지문을 내려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언덕에 두 시진 정도 앉아 있는데, 어린 남자 애가 다가왔다. 아마도 열두 살쯤 되었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그 아이는 매우 개구쟁이인 모양으로 옷은 흙투성이에 여기저기 풀잎이 붙어 있었다. 그 애는 묵향에게 다가오더니 나무칼을 묵향에게 겨누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꼼짝 마. 너는 밀정이지.”

묵향은 그 애의 행동을 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아니라면?”

그 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면 왜 여기서 천지문을 바라보고 있느냐?”

꽤 위엄 있는 말투를 쓰려고 노력을 하고 있었고, 그 아이의 의복이 상당히 좋은 걸로 미루어, 아마 아이의 아버지는 천지문에서 꽤 높은 직위를 차지하고 있는 모 양이었다. 묵향은 갑자기 장난이 하고 싶어졌다.

“내가 천지문을 바라보고 있는 건 너를 납치하기 위해서인데, 마침 잘 만났군.”

그러면서 묵향이 천천히 칼을 빼들자 그 애는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무… 무, 무엄하다.”

“무엄하고 자시고…….”

그러면서 묵향은 그 애를 향해서 묵혼검을 찔렀다. 그러자 그 아이는 제법 침착하게 대응했다. 묵향의 검이 그렇게 빠르지 않았기에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자식이 다시 간이 커졌군.’

아이는 초식을 펼쳐 묵향의 검을 비스듬히 쳐 내며 묵향의 허리를 베어 왔다. 제법 격식이 갖추어진 초식이었다. 그 애는 묵향의 허리에 목검이 격중되자 자신만만 한 어조로 외쳤다.

““내가 이겼다!”

하지만 묵향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튕겨진 묵혼검을 다시 돌려 그 애의 목 쪽으로 비스듬히 베어 내렸다. 그 아이는 묵향이 졌다는 내색도 하지 않고 자신의 목 을 향해 베어 오자 놀란 모양이다.

“앗! 비겁하다, 내가 먼저 베었는데…….”

그 아이의 검은 목검이었고 별로 힘도 없어서 묵향에게는 모기가 무는 정도의 타격도 주지 못했지만 묵혼검의 경우는 달랐다. 아무리 살살 베어도 그 애에게 치명 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것이다. 그 애는 놀라서 씨근거리며 묵향을 향해 도술(刀術)을 펼쳤다. 아이를 데리고 노는 것도 꽤 재미가 있었다. 그 아이를 가르친 사람 은 상당한 수준인지 내공의 기초도 제법 잡혀 있었다. 아마도 일곱 살도 되지 않아서 심법을 가르치기 시작했을 거라고 묵향은 생각했다.

아이는 스물네 가지 초식을 쓰더니 밑천이 다 떨어졌는지 더 이상의 초식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응용력은 대단해서 여러 가지 변초(變招)로 묵향을 공격하거나 방어했다. 묵향은 그 아이의 초식만으로도 천지문의 도법이 어느 정도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천지문의 도법은 변화가 다양했고 상당히 많은 변초 를 내포하여 상대의 허점을 찌르는 교묘한 초식이 많았다. 하지만 변화가 너무 심해 어떤 면에서는 가벼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도법이란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아야 한다. 항상 중도를 택해야 하는 것이다.

반 시진 정도 애를 데리고 놀자 그 아이는 힘이 빠져 헉헉거리기 시작했고 땀을 비오듯 흘렸다. 묵향은 순간적으로 아이의 여섯 군데 혈도를 봉쇄해서 어깨에 메 고 천지문에서 제일 가까운 음식점으로 갔다. 점소이를 불러 음식을 시키고 아이를 의자에 앉혀 다리를 제외하고 모든 혈도를 풀어 주었다.

“지금까지 고생했으니 음식을 먹어라. 너도 방금 내가 점혈하는 데 쓴 초식을 보고 내 실력을 짐작했겠지. 다른 건 몰라도 너 같은 아이는 1백 명이 와도 안 된단 말이야.”

“먹기 싫어.”

묵향은 일부러 인상을 쓰면서 위협조로 말했다.

“안 먹겠다면 끌고 가서 똥을 입속에 퍼 넣겠다.”

그러자 아이는 혀를 빼서 묵향에게 내밀며 비웃듯이 말했다.

“아저씨는 비겁해요.”

“그럼, 나는 아주 비겁하지.”

“그리고 치사해요. 아이를 핍박하다니…….”

“그럼, 아주 치사하지……. 그런데 이왕이면 격조 높게 비열하다고 하거라, 하하하”

아이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면 얼굴이 벌게지며 성을 내는데, 이 양반은 한술 더 뜨기 때문이었다.

“못 할 줄 알아요? 아저씨는 비열해요.”

“그럼, 그럼. 사양 말고 칭찬해.”

아이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욕을 칭찬으로 듣고 있으니 더 떠들어 봐야 입만 아프기 때문이다. 음식이 나왔다. 제법 괜찮은 요리였고, 묵향은 천천

히 술을 마시면서 아이의 얼굴을 노려봤다. 아이는 입속에 똥을 넣겠다는 말도 안 되는 위협에 대해, 절대로 똥은 먹을 수 없다는 듯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허리를 곧게 펴고 천천히 꼭꼭 씹어서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묵향은 꽤 교육을 잘 받은 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맛이 괜찮니?”

그러자 아이의 시큰둥한 목소리.

“아뇨, 맛없어요.”

묵향은 싱긋 웃으며 일부러 소리를 낮춰서 위협하듯 말했다.

“그럼 똥은 어떨까?”

그러자 아이는 잠시 얼어붙는 것 같더니 억지로 웃었다.

“예… 예, 이거 아주 맛있어요.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겠는데요.”

적당히 음식을 먹고 나서 묵향은 아이의 다리 혈도를 풀어 주었다.

“오늘 아주 즐거웠다. 너도 그렇지?”

그러자 혈도가 풀린 아이는 저만큼 도망가더니 소리쳤다.

“이 나쁜 녀석아, 나중에 두고 보자.”

“하하하, 그래, 나중에 보자.”

그 아이는 천지문을 향해서 달려갔다. 묵향도 이곳에 남아서 천지문과 시비를 벌일 만큼 바보는 아니므로 혼자서 키득거리며 분타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담소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다가 모두 천지문으로 갔다. 묵향 일행이 도착하자 천지문의 위병들은 경계의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봤다. 매는 가볍게 말에서 뛰어내려 바짝 긴장하고 있는 위사(衛士)에게 다가가 말했다.

“우리는 천마신교(天魔神敎)에서 왔소. 문주를 뵙고 상의할 일이 있소. 안에 기별해 주시오.”

그러자 위사 중 한 명이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1각 정도 지나자 그 위사는 또 다른 중년인을 데리고 나왔다. 그 중년인은 묵향 일행에게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문주께서는 귀교와는 말할 필요가 없다고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매가 말했다.

“그러면 뇌옥에 갇혀 있는 귀 문하 3백여 명의 목이 떨어져 나가도 상관없소?”

“그대들은 우리에게 협박을 하러 찾아온 겁니까?”

“아니오. 몇 가지 협상을 할 게 있어서 찾아왔소. 먼저 문주를 만나게 해 주시오.”

“기다리십시오.”

2각 정도를 기다리자 그 중년인이 다시 나왔다.

“들어오십시오.”

묵향이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자 나머지도 하는 수 없이 말에서 내렸다. 묵향의 뒤에서 지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은 이곳에 남아 말을 돌보고 있어라.”

묵향 일행은 문 앞에 열 명의 무사들을 남겨 두고 중년인을 따라 들어갔다. 묵향 일행이 기다리는 중에 준비했는지 넓은 마당에는 널찍한 탁자 두 개와 의자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탁자의 너비로 봤을 때 충분히 열 개 이상의 의자를 놓을 수도 있는데도 한쪽에 세 명씩 앉을 수 있도록 의자의 수를 제한해 놓은 것은 상대의 우 두머리가 누군지 알아보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었다.

저쪽의 의자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고 1백여 명의 고수가 검을 허리에 찬 채로 서 있는 것으로 보아 문주는 아직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묵향은 이쪽에 할당된 세 개의 의자 중에 가운데 의자에 털썩 앉아 문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1각 정도 더 기다리자 문주가 나왔고, 그 뒤에는 크고 두꺼운 도(刀)를 가진 젊은이가 뒤따랐다. 과연 보고대로 6척이 넘는 큰 키에 다부진 근육을 가지고 있는 부 리부리한 눈매의 소유자였다. 그는 중간의 의자에 어떻게 보면 문약한 서생같이 그다지 근육이 발달하지도 않은 새파랗게 젊은 인물이 느긋하게 앉아 있는 것을 보 고 약간 놀란 듯했다.

자리에 앉기 전에 묵향 일행을 둘러본 진 문주는 대부분 위사들이 40대 정도의 용모며 상당히 젊어 보이는 사람들이 많고 또 왼편에 앉은 깡마른 곱추의 손이 검푸 른 광택을 내는 것을 보고 점점 더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묵향의 뒤쪽에 서 있는 여자의 손이 투명할 정도로 새하얗고도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을 보고 내색 은 안 했지만 경악했다.

이들은 마교의 최고 정예다. 저 검푸른 광택의 말라비틀어진 손에 말라깽이 곱추라면 마교 서열 13위 외총관 고루혈마 옥관패가 틀림없어. 그리고 저 서생 같은 자 뒤의 사이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계집은 소수마공을 극성까지 익혔고 금음(琴音)으로 사람을 웃으며 죽게 만든다는 음희 설약벽 우외총관이다. 대부분 평생가도 저들 중 한 명의 얼굴 보기가 힘들다고 들었는데, 이 둘이 한꺼번에 나타나다니……. 소문대로라면 저 둘만으로도 본문을 멸문시킬 수 있을 거야.’

이때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이가 나왔다. 아주 깨끗한 고급 옷을 입은 걸로 보아 제법 신분이 높은 것 같았다. 허리 에 찬 패검은 그가 천지문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자는 문주의 오른쪽 비어 있는 의자에 앉더니 거만하게 말했다.

“천마신교에서 여기 무슨 일이오?”

그러자 곱추인 옥관패가 비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은 여기서 입을 열 위치가 못 돼. 우리는 네 녀석이 아니라 문주하고 얘기하기 위해서 총타에서 이곳까지 왔단 말이다.”

거들먹거리던 그 젊은이는 곱추를 째려봤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곱추의 손에 닿자 일순간 말을 잊을 정도였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그가 말했다.

“귀하는 고루혈마 옥관패 어르신이 아니십니까?”

“알면서 왜 묻나?”

“이런 구석진 곳에 어떻게 천마신교 서열 13위의 나으리가 오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

그러자 곱추는 느긋한 어조로 대답했다.

“본좌보다 더 높은 분도 와 계신데 내가 못 올 것도 없지.”

그 말을 들은 그 젊은이는 이제 정신을 차려 마교측 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봤다. 마교의 인물들 중에서 외부에 드러난 고수는 그렇게 많지 않다. 여태까지 고작해야 고루혈마 옥관패 외총관과 그 수하인 좌외총관 천진악과 우외총관 설약벽이 밖으로 드러난 최고의 고수들이다. 그런데 그중 두 명이 이곳에 있고 그나마도 음희 설 약벽은 앉지도 못하고 서 있는 걸 보고 그는 도무지 지금 돌아가는 사태를 짐작할 수 없었다.

“이 정도 고수들이 이 구석진 곳에 왜 왔지? 솔직히 저 뒤쪽에 서 있는 인물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마기로 보아 모두 보통 고수들이 아니야. 앞의 세 명은 빼고 저기 서 있는 자들의 반만 동원해도 이따위 시골 문파쯤 잿더미로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겠군. 맹에서 파견된 우리들까지 포함해서……. 그런데 이해할 수가 없는 건 중간에 앉은 젊은 녀석이군. 도무지 마기를 느낄 수가 없어. 무림인이라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하겠어. 어쩌면 마교의 핵심 인물인 혁무상인가? 혁무상이 마교의 두뇌라고 들었는데…….’

그가 잠시 할 말을 잊은 사이에 설약벽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대력도패 진양 문주님, 이번에 저희들은 귀 문파와 협상을 하기 위해 왔습니다. 본교는 귀 문파와 조건부 불가침 협정을 맺고자 합니다.”

그러자 오른편에 앉은 젊은이가 말했다.

“문주님 속아서는 안 됩니다. 저들은 계략을 통해 이 문파를 통째로 먹으려고 하는 겁니다.”

설약벽은 그 젊은이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이 협정은 천지문과 본교의 일입니다. 협정을 맺을 것인지는 천지문의 문주님이 결정하실 일이지 무림맹의 용천익 당주 따위가 끼어들 일이 아니에요. 문주님, 이 협정이 맺어지면 물론 귀 문파의 잡혀 있는 3백여 명의 포로들을 돌려드릴 겁니다. 이것이 그 협정서입니다.”

밑져 봐야 본전이므로 진양은 그 협정서를 읽기 시작했다.

“일(一), 이 협정서는 상대방이 해제를 원하거나 상대 문파의 수장이 바뀌기 전까지 유효하다. 만약 한쪽의 수장이 바뀌면 다시 협정서를 작성, 협의해야 한다. 이(二), 천마신교와 천지문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아야 하고, 설혹 실수로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면 무력보다는 상호 토의를 통해 원만히 처리함을 원칙으로 한다. 아울러 천마신교는 천지문 문파를 기준으로 20리 안에는 절대로 침범할 수 없다.

삼(三), 만약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 협정서를 위반해야 할 일이 발생하면, 협정을 해제하기 한 달 전 상대방에게 통보해야 한다. 예외로 천지문은 정파의 모든 문 파가 서로 합동하여 천마신교를 침입할 때 통지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 예외의 경우 타 문파들의 압력에 의한 행동이 되므로 아직 협정서는 유효하게 된 다. 따라서 천마신교는 공격해 들어오는 천지문의 제자들은 공격할 수 있으나 절대 천지문을 공격할 수는 없다.

사(四), 만약 천지문에서 2백 리 내에서 천마신교가 정파 계열의 문파와 충돌했을 때 천지문에서 중재를 요청하면 최대한 무력행사를 자제해야 하며, 중재 요청과 동시에 한 달간 천마신교는 절대로 무력행사를 하지 않는다.

오(五), 천마신교를 위협하는 세력이 천지문 20리 내에 존재할 때, 천마신교는 그들을 임의로 공격할 수 없고 반드시 천지문의 허락을 얻어야 공격이 가능하다. 육(), 천지문은 꼭 천마신교가 타 문파와 충돌을 일으켰을 때 도와 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천마신교는 천지문에서 지원을 요청하면 도와주어야 하고 만약 돕지 못한다면 천마신교에 서신 도착 후 한 달 이내에 돕지 못하는 사유를 적어 천지문에 통보해 주어야 한다.

칠(七), 위의 여섯 가지 내용은 협정서가 유효한 한 지켜져야 한다.”

협정서를 찬찬히 읽은 진양은 왼쪽에 앉은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중년인에게 그 협정서를 넘겨주었다.

“제가 읽어 보니 일방적으로 천마신교에게 불리한 조항들이 많소. 귀하들의 진심을 알고 싶소.”

“우리들의 진심은 그것입니다. 첫째항을 둔 이유는 본교에서 진양 문주님을 믿을 수 있지만 문주님의 후계자까지 믿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건 귀 문파도 마 찬가지일 것입니다. 저희 교주님께서도 20년 안에 소교주님께 모든 권한을 넘기실 겁니다. 귀 문파도 소교주님을 못 믿기는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그렇소.”

“이번에 생긴 일도 서로가 잘 상의해서 넘길 수 있는 일인데도 귀 문파는 수상한 점이 있다고 무턱대고 본교의 비밀 분타를 공격해 왔습니다.”

“그건…, 원체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우리들은 그걸 산적들의 소굴로 판단하고 공격을 했소. 공격해 들어간 제자들은 행방불명이 되었고 일주일 전 에서야 그중 세 명이 돌아왔소. 그 아이들의 말을 듣고는 귀교와 충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소.”

“이번 일은 교주님의 허락 하에 진행되는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본교는 귀 문파와 충돌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만약 이걸 거절하신다면 저희들은 지 금 귀 문파를 멸문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점을 충분히 고려해 주십시오.”

진양은 힐끗 무림맹에서 파견 나온 용천익 당주를 보더니 말했다.

“본인은 이 협정서의 일곱 가지 내용을 수락하오.”

여태까지 말이 없던 묵향이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협정서에 서명하고 인장을 찍었다.

“그렇다면 본교와 천지문은 조건부 불가침 협정을 맺은 것이오. 그 협정서에 인장을 찍어 이리 주시오.”

진양이 서명하고 인장을 찍은 후 그 협정서를 묵향에게 넘겨주자 묵향도 자신이 서명하고 인장을 찍은 협정서를 넘겨줬다. 옆에서 협정서 교환이 끝나자 설약벽이 말했다.

“건네받으신 협정서에 다시 자신의 서명과 인장을 찍어 주십시오. 협정서는 각 문파에 따로 보관되며 협정이 유효한 한은 무한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진양 등은 넘겨받은 협정서에 써 있는 서명을 보고 경악했다. 용천익 당주는 서명을 보더니 얼굴을 들어 묵향을 멍청히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서명은 이렇 게 쓰여 있었다.

「천마신교 교주 대리, 천마신교 부교주 묵향」

‘겨우 이런 문파에 2만의 정예 고수를 가지고 있고, 또 10만 사파를 영도한다는 마교의 부교주가 오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진양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용천익 당주는 약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교에 새로운 부교주가 임명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정보다. 만약 저자가 진짜 부교주라면 최소한 극마의 경지를 넘어선 자야. 빨리 본맹에 연락을 해야겠군.’ 서로가 각기 머리를 굴리는 사이 묵향은 벌써 자신이 보관할 협정서에 서명하고 인장을 찍은 후 그 협정서를 설약벽에게 건넸다. 그러고 나서 느긋하게 주위를 둘 러보던 묵향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묵향이 갑자기 일어서자 모두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이때 묵향이 건물의 오른쪽 얕은 토담을 향해서 외쳤다.

“이봐, 이리 나와. 맛있는 거 사줄게.”

그러자 토담 안에서 한 개구쟁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이젠 안 속아, 이 비열한 녀석아.”

그러자 갑자기 진양과 진양의 왼편에 앉은 40대 초반 사내의 얼굴이 동시에 홍당무가 되었고, 주변에 있던 천지문의 고수들은 웃음을 참느라고 곤욕스런 표정이 었다. 모두의 우려와는 달리 묵향은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어제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있다고 해 놓고는…….”

“헛소리하지 마! 우리 할아버지한테 일러서 네 녀석을 죽여 버릴 거야.”

“어제는 두고 보자고 하더니, 고작 한다는 짓이 할아버지를 찾는 거냐, 꼬맹아?” “난 꼬맹이가 아니야. 그럼, 그럼… 나중에 내가 직접 너를 죽여 버릴 거야.” 그 말을 듣고 묵향은 비웃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흥! 나중에? 나중에 언제?”

아이는 한참 망설이는 것 같았다.

“10년 후에 두고 보자.”

“하! 10년 후라.”

그와 동시에 약간 묵향의 신형이 움직이는 것 같더니 그 순간 묵향은 제자리에 서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소년을 잡고 있다는 점뿐이었다. 주변의 인물들은 묵향의 신법이 빠름에 경악했다. 거의 찰나의 시간에 5장 거리에 있는 아이를 잡고는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묵향은 아이한테 짐짓 화났다는 태도로 말했다. “할아버지 잘못했어요 하고 빌어라.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그렇게는 못 해! 놔, 이 자식아.”

그러자 묵향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묵향의 말투는 상대를 한껏 깔보는 게 확연했다.

“흥! 그럼 내가 말을 하도록 만들어 주마! 좋게 말할 때 빌어!”

아이는 고집스런 얼굴로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안 해! 못 해! 놔, 이 자식아!”

“못된 녀석! 네 녀석이 비명을 지르고 잘못했다고 벌벌 떨게 만들어 주지.”

“흥! 내가 그럴 줄 알고.”

아이가 고집스레 입을 다물자 묵향은 짐짓 화가 났다는 듯 순간적으로 아이의 혈도 64곳을 점했다. 그리고 아이의 몸 곳곳을 만지자 뼈가 부서지는지 우두득거리 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애와 장난을 치는 줄 알고 모두 재미있어 했지만 사태가 진전될수록 진양과 그 왼쪽에 앉은 사내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급기야 제지하고 나섰다.

“이럴 수가 있소?”

그런데 언제 다가왔는지 설약벽이 진양의 손을 잡고 말렸다. 진양은 그 손길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입술이 터지도록 입 을 꽉 다물고 신음하고 있는 손자를 보고 괴성을 지르며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그의 괴성은 나오지 못했고 몸은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는 이 순간 요사스런 아 름다움을 풍기는 미녀가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하기조차 힘든 경지에까지 올라선 고수임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협정을 맺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린애를 저렇게 괴롭히다니……. 세상에, 어린애한테 분근착골(粉筋鑿骨)의 고문을 행하다니 저 자식은 사람도 아니다.’

그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쏟아졌다. 그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수하들도 문주와 부문주 그리고 부문주의 아들이 사로잡혀 있기에 칼을 빼들고 달려들지 못 하고 숨을 죽여 사태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림맹에서 파견된 용천익 당주도 자신의 1장 앞에서 노려보고 있는 고루혈마 옥관패의 위세에 질려 식은땀 을 흘리며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수하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빨리 비명을 질러 이 자식아. 비명을 지르지 않으면 이번에는 뼈다귀를 부숴 버릴 거야.”

묵향은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그 아이를 위협했고, 그 아이는 그에 질 수 없다는 듯이 입 한 번 열지 않고 묵향의 고문을 견뎠다. 2각이 지나자 아이는 차츰 혈색이 돌아왔다. 아이의 몸속에서 들려오던 우드득거리는 소리는 멈춘 지 오래였다. 또다시 1각 여가 지나자 아이는 정신을 차렸다. 이제 모든 고통이 끝난 것이다. 그러 자 묵향이 이번에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직이 말했다.

“내가 진기를 유도할 테니 운기조식을 해라.”

묵향은 아이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운기조식을 도왔다. 좌중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방식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이상하군. 운기조식을 돕는다면 등에 장심을 붙이고 진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인데 저 녀석은 왜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있는 거지.’

시간이 지나자 아이의 얼굴은 더욱 평안해졌다. 운기조식을 시작한 지 2각 정도가 지나자 묵향은 손을 떼고는 아이를 일으켜 주었다.

“정말 용감하게 견뎠다. 내가 협정서가 조인된 기념으로 너에게 준 선물이다. 방금 네가 익힌 심법은 현문의 태허무령심법이다. 이미 정파에서는 실전된 무공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며, 모든 사마(邪魔)가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준다. 너는 매일 한 시진씩 이 심법을 행해야 하고 그 어떤 다른 심법도 익히면 안 돼. 진기가 정순하지 못하면 태허무령심법으로 쌓은 내력은 별로 힘을 쓰지 못해. 이것은 내력이 쌓이는 속도는 느리지만 일단 경지에 이르면 대단한 진전을 보이는 것 이 장점이지. 내가 임의로 너의 근골의 형태를 바꿔 환골탈태한 것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하면 더욱 빨리 무공을 익힐 수 있지.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진짜를 맛볼 거다. 이 방법은 대단한 효과가 있지만 그 고통이 너무나 지독해 도저히 인간으로서 참을 수가 없지. 단 한 번이라도 비명을 지르면 기가 흩어져 그때까지의 고생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거기다 다시는 이 방법을 쓸 수가 없다. 네가 참아 낸 것이 대견하구나.”

그러면서 묵향은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리고 아직도 어벙벙한 상태에 있는 좌중을 훑어 보고 진양에게 포권했다.

“그럼 안녕히… 저 아이는 나중에 천지문을 이끌어 나갈 최고의 고수가 될 것입니다. 잘 키우시기 바랍니다.”

그는 아이에게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꼬마야! 다음에 만났을 때는 그따위 엉터리 도법이 아닌 좀 더 좋은 솜씨를 보여 주기 바란다.”

그런 다음 외쳤다.

“돌아가자.”

모두들 묵향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하는데, 미소를 머금은 설약벽이 진양에게 인사를 했다.

“손자 분의 성취에 축하드립니다. 저 무공은 진골축근마공(珍骨縮筋魔功)으로 극마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시전이 가능한 대단히 높은 경지의 무공입니다. 본교의 모든 젊은이들이 저 수법을 받아 보기를 원하지만 실지로 받은 사람은 거의 없어요. 부교주님께서 손자 분이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저 수법을 받는 도중에 아이 에게 충격을 주면 안 되기에 다급한 상황이라 손을 썼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뇌옥에 갇힌 천지문의 제자들은 본교의 제자들이 호위해서 안전하게 보내 드 리겠습니다. 그럼.”

설약벽은 경신술을 사용해 순간적으로 말이 기다리고 있는 문 쪽으로 몸을 날렸다. 천지문의 중인들은 그녀의 그 비쾌한 경신술을 보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정말 대단한 신법이군.”

“음희는 냉혹하고 지독한 손속에 음란한 계집이라고 들었는데 소문이란 게 얼마나 믿을 게 못 되는지 오늘에야 알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