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권 23화 – 현상범은 싫다
현상범은 싫다
묵향은 천지문을 벗어나자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급히 호계악 차석장로가 쫓아왔다.
“부교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교주님께서는 이 일이 끝나는 대로 근신하시라고…….”
“일이 아직 안 끝났어. 매, 국!”
“예!”
“너희들은 호 장로를 모시고 교로 돌아가라. 그리고 옥 외총관.”
“예.”
“설 우외총관을 좀 빌립시다.”
“예?”
“어디 좀 다녀올 데가 있는데, 여태까지 금을 배우던 것이 있으니 며칠 더 빌립시다. 그리고 교주님께는 일이 끝나는 대로 돌아갈 거라고 전해 주시오.”
“시간이 얼마나 걸리시는지?”
“두 달 내로 돌아갈 거요.”
“제발 부교주님! 그러시면 저희들 목이 위태롭습니다. 좀 더 줄여 주십시오.”
“그럼 한 달 반! 더 이상은 안 돼.”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오실 거라고 교주님께 아뢰겠습니다.”
묵향은 설약벽에게 금을 배우며 천천히 길을 갔다. 뒤따르던 설약벽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응, 묵은 빚을 받으러.”
“빚이라구요?”
“그래.”
“어디에 빚이 있으십니까?”
“무당파와 태진문! 그 녀석들이 간 크게도 본좌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지. 많이 걸면 본좌도 묵인해 주려고 했는데, 겨우 은자 40냥 정도……. 날 뭘로 보고…….”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그 두 문파 장문인 녀석들 다리뼈를 부숴 놔야겠어.”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혈풍이 불게 된다니까요.”
“상관없어, 혈풍 따위 불어도……. 내가 천마신교에 관계되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어. 너희들은 근처까지 따라와서 내가 그 두 문파를 완전히 초토화시키는 걸 구경이나 하라구.”
난과 죽, 그리고 설약벽은 무당파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묵향을 설득하려 했지만 묵향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최후에는 설약벽이 결심한 듯이 외쳤다. “만약 뒤집어엎으려면 아예 무당파를 멸문시켜 증인을 완전히 없애 버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근처 분타들에 연락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상대는 군대가 아니야. 활이나 쇠뇌 따위로 공격하지 않고 방패도 쓰지 않지. 나 혼자서도 충분해.”
묵향은 문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무당파의 제자 다섯 명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더니 차갑게 말했다.
“장문인을 불러다오.”
“뭐라고? 웬 미친놈이…….”
제자들은 검을 반도 뽑기 전에 네 명은 기절하고 한 명은 묵향에게 목을 잡혔다. 묵향은 혈도를 짚는 수고를 생략하고 한방씩 주먹떡을 선사했고, 늑골이 부서지 고 오장육부가 진동하는 충격에 모두 기절한 것이다. 묵향이 서서히 손아귀의 힘을 가하자 점점 목이 졸리는 걸 느낀 무당파의 제자는 기절초풍해서 검을 뽑을 엄두 도 못 내고 부들부들 떨며 종내는 검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장문인에게 안내해.”
묵향은 그자의 목을 그러쥔 상태로 무당파 안으로 들어갔다. 나머지 셋은 묵향이 하는 짓을 보며 경악해서 그냥 멍청히 바라볼 뿐이었다. 한 괴한에게 동문 제자가 목이 잡힌 채 엉거주춤 들어오자 모두 검을 뽑아 들고 외쳤다.
“웬 놈이냐.”
“게 섰거라.”
“겁도 없군.”
저마다 한마디씩 했지만 묵향은 단 한 가지만을 원할 뿐이었다.
“장문인을 불러 와라. 과거 빚진 걸 받으러 왔다고 하면 알 거다.”
반 시진 정도를 기다리고 있자니 한 도인이 여러 명의 도인들을 거느리고 다가왔다. 그는 묵향의 앞에서 간단히 포권하며 말했다.
“시주께서는 본좌에게 무슨 빚이 있다고 찾아오셨소?”
묵향은 이제 장문인을 만났기에 더 이상 그 제자를 잡고 있을 필요를 못 느끼고 주변에 칼을 뽑아 든 채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던졌다. 갑자기 동문을 자신들에게 던지자 그들은 앞으로 겨눴던 칼을 황급히 내리며 날아오는 동문을 받아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묵향이 그냥 목만 잡고 있었는데도 그의 목에는 묵향의 손자국 이 벌겋게 찍혀 있었다.
“왜 왔느냐고? 나를 보고 싶었으니까 내 목에 현상금을 걸었을 게 아닌가?”
묵향의 싸늘한 대답을 듣고 장문인은 경악했다.
‘바로 그 검귀로구나. 뇌전검황이 고혼이 된 걸로 미루어 보아 오늘은 길(吉)보다는 흉(凶)이 많겠구나. 모든 제자가 달려든다면 죽일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그 피 해가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가지 않으니……. 그렇다고 은거하신 사숙조(師叔祖) 어르신을 부를 수도 없고…….
장문인은 먼 산을 가만히 보고 있더니 제자들에게 명했다.
“모두 물러서라.”
이때 장문인의 왼편에 서 있던 젊은이가 장문인을 말렸다.
“장문인께서는 참으십시오. 제가 해 보죠.”
그리고는 묵향의 앞으로 나섰다.
“그대는 누군가?”
“나는 황룡문의 부문주다.”
“자네와는 별 상관없는 일인 것 같은데. 또 황룡문과 원수지기는 싫으니 비키게나.”
“황룡문을 알고 있다면 여기서 물러서 주시오.”
“제기랄! 황룡문은 어디에 있지? 나는 시간이 별로 없어. 황룡문까지 잿더미로 만들 시간은 없다구. 빌어먹을, 빨리 비켜!”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자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기운을 읽으며 묵향도 천천히 묵혼검을 뽑았다. “제법이군.”
그 젊은이는 묵향의 빈정거림에 약간 화가 났는지 기를 있는 대로 끌어올렸다. 그는 옷이 한껏 부풀어 오르자 곧바로 공격해 왔다. “직교단월(直交斷月)!”
그와 동시에 10여 개의 반월형의 푸른 검강들이 묵향을 향해 뻗어나갔다. 순간 묵향의 몸이 앞으로 튕겨 들어왔다. 그때 묵혼검은 검게 빛나며 검푸른 빛과 같은 것이 검신 주위에 다섯 치 두께나 되게 타오르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묵향은 묵혼검을 이용해서 푸른 검강들을 파괴하며 앞으로 다가서더니 곧바로 젊은이의 오른쪽 허리에서 왼쪽 어깨 위 방향으로 베어 올렸다. 그 젊은이는 경악해 서 최대한 빠른 속도로 몸을 뒤로 빼며 묵혼검을 자신의 검으로 막았다. 하지만 묵혼검은 그 젊은이의 검을 두 토막 내며 위로 올라갔다. 다행히 그 젊은이의 몸은 묵혼검의 사정권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다. 묵혼검이 짧기에 얻어진 요행이었다. 하지만 묵혼검의 앞쪽으로 흘러나온 어검술의 강기에 휘말려 젊은이의 호신강기는 완전히 박살 났고, 그의 옷과 함께 오른쪽 허리에서 왼쪽 어깨까지 살덩어리가 찢어져 나갔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았기에 내장까지 흘러내릴 정도는 아니었다.
주변의 무당파 제자들이 황급히 그를 부축하자 그는 고개를 숙이며 피를 토했다. 아마 호신강기가 무너지면서 상당한 내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요행이라도 그 젊은이의 호신강기가 강력했기에 이 정도에서 끝난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검술에서 뻗어 나온 강기의 회오리에 말려 두 토막이 났을 것이다. 그 걸 본 묵향은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
“쯧쯧, 겨우 청월검법(靑月劍法) 따위를 믿고 나를 상대하려고 했다니……. 그 검법을 10성까지 익힌다고 고생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다른 사람 대신 목숨을 걸고 나설 정도는 아닌 것 같군. 이보시오, 장문인! 이제 당신이 나설 차례인 것 같소만…….?”
방금 전에 보여 준 묵향의 무공에 경악하여 제자들이 엉거주춤 물러서자 장문인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이 모든 일은 본인 혼자서 저지른 일이오. 나만 죽이면 될 것이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왜 검을 뽑지 않지?”
“뇌전검황도 그대의 손에 목이 날아갔는데, 빈도는 도저히 그대의 적수가 되지 못하오. 5초도 안 되어 끝날 텐데 반항해서 뭐 하겠소. 그냥 내 목을 베고 조용히 떠 나 주시오.”
뇌전검황의 목이 날아갔다는 말에 방금 전에 묵향에게 덤벼들었던 ‘우물 안 개구리’는 피를 토하는 와중에도 경악한 시선으로 묵향을 바라봤다. 장문인은 옆에 있 는 도인에게 말했다.
“풍진(楓進) 사제가 내 뒤를 이어 주시게나. 절대로 내 복수는 하지 말게. 뇌전검황의 제자들도 그의 유언을 듣지 않고 복수를 하려다가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자네도 알 걸세.”
묵향을 에워싼 무당파의 제자들은 무림인 같지도 않은 새파랗게 젊게 보이는 눈앞의 청년이 사실은 반노환동(反老還童)의 경지에 들어선 고인(高人)이라는 점에 놀랐는지 조금씩 더 뒤로 물러섰다. 묵향은 초연한 장문인을 보고는 선뜻 베지 못하고 묵혼검의 그 맑게 빛나는 검은 검신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후…, 그대와 같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주 힘드는 일이오.”
묵향은 묵혼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대의 목숨을 살려 줄 테니 나중에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소?”
“그럴 수 없소. 지금 내 목을 치시오.”
“목숨을 잃는 것보다 작은 부탁 하나를 들어주는 게 더 좋을 텐데.”
“어떤 부탁은 목숨을 잃는 편이 더 좋은 것도 있소.”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군. 나는 당신이 내 부탁 한 가지를 나중에 들어주기를 원해. 물론 그 부탁을 들어 본 후에 거절할 권리도 있지. 내가 부탁한 것 중에서 당신이 들어줘도 상관없는 것 하나만을 택해 들어주면 되오.”
“그렇다면 당신의 조건을 받아들이겠소.”
“이건 부탁은 아니지만 한 가지 물어보겠소. 태진문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는 게 가장 빠르오?”
“저쪽으로 걸어가면 되오. 60리 정도 가면 볼 수 있을 거요. 하지만 내가 사과할 테니 태진문으로 가는 걸 그만 두는 게 서로가 좋지 않겠소? 현상금은 내가 태진 문주에게 말해서 취소하겠소.”
묵향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소. 나도 쓸데없는 살생은 하고 싶지 않소.”
묵향은 무당파에서 걸어 나가며 정문 부근에 서 있던 세 명에게 말했다.
“돌아가자.”
묵향 일행이 말을 타고 멀어지는 걸 보며 무당의 장문인은 혼잣말을 나직이 뱉었다.
“오늘 운이 아주 좋은 건지도 모르겠군. 내 평생 전설의 어검술을 볼 수 있을 줄이야. 어검술에 죽을 수 있다면 억울한 것도 아니지…….”
장문인이 부상 입은 청년을 돌아보았다.
“너무 억울해하지 마시게나 저 정도 검객과 검을 섞어 본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시게나. 저자는 아마 무림사상 두 번째 현경(玄境)의 고수로 기억될 거야.” 그러자 그 청년도 피가 묻은 입 주변을 소매로 쓱 닦더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사람이 저 정도로 강해질 수도 있다는 걸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괴물과 은원(恩怨)을 맺으셨습니까?”
“말하자면 기네. 안으로 들어 가세나. 치료도 해야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