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권 30화 – 자매간의 비무

자매간의 비무

맹주는 묵향을 본채의 널찍한 거실로 안내했다. 묵향은 사군자와 한영영을 데리고 맹주를 따라갔다. 한영영도 묵향이 귀한 후아주 맛을 보게 해 준다고 꼬드겼으 므로 과연 그 맛이 어떤지 보기 위해 두말 않고 따라나섰다. 묵향 일행이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맹주는 다섯 명을 함께 데리고 왔다. 그의 아들, 손자, 손녀 등 일 가족들이었는데, 그중 옥매화는 묵향이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 보고 눈에 쌍심지를 돋웠지만 지엄한 할아버지 앞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맹주는 각자의 자리 를 정해 주고 말했다.

“오랜만에 지기(知己)를 만났으니 오늘 노부가 한턱내겠다. 너희들도 사양 말고 많이 들거라.”

그러면서도 주위에 있는 그의 혈육들에게 어기전성으로 한마디 하는 걸 잊지 않았다.

《대화를 새겨듣거라. 주옥(珠玉)과도 같은 논검이 될 테니까…….》

묵향의 앞에 자리를 잡은 맹주는 후아주를 한잔 가득히 부어 주고 자신의 잔에도 부으면서 말했다.

“뇌전 영감과는 어떤 대화를 나눴나? 듣자하니 밤새도록 얘기를 나눴다고 그러던데……?”

“그건 제령문의 제자들에게 물어보시죠. 꽤 재미있는 대화였습니다.”

“뇌전 영감도 나와 비슷한 경지던가?”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직접 겨뤄 봐야 완전히 알 수 있죠. 두 분 다 정파의 최고로 꼽히는 분들이 아닙니까?”

“자네는 누구에게 검술을 배웠나?”

“여러 사부들에게 배웠죠. 그중에서 유백 사부에게서 가장 많은 걸 배웠습니다.”

“유백? 들어 본 적이 없군. 그의 검술이 그렇게 대단한가?”

“아뇨, 대단하지는 못하죠. 하지만 제자들을 참 잘 가르치시더군요.”

“제령문에서 듣고도 설마 했는데, 아까 령인이와 비무를 할 때 보니 그대는 특히 근접전에 강하더군. 노부도 근접전을 벌인다면 적수가 되기 힘들 거야. 어쩌면 떨 어진 거리에서는 좀 오래 버틸지도 모르지만 근접전에서는 10초도 넘기기 어렵겠더군.”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냐. 자네는 초식을 초월했더군. 그 정도 경지에 오르기는 참으로 힘들지. 노부도 오랜 수련을 해왔지만 그 정도까지 부드럽게 넘기기는 힘들어. 자네는 어떤 검법을 익혔나?”

“여러 가지죠. 본교의 검법, 불문의 검법, 도가의 검법 등 본교에 보관 중인 건 거의 다 봤죠. 하지만 그게 다 그거더군요. 요즘 들어서는 이게 그건지 저건지 헷갈 려서 아예 상대가 쓰는 검법이 뭔지 잘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무초식의 검법을 구사한다 하더라도 하나의 큰 규칙성은 있게 마련이지. 그 검법의 이름은 뭔가?”

“오래전에 제가 한 가지 검법을 만들었는데, 그건 무상검법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하지만 그건 하나의 검법이라고 부르기는 그렇고, 그냥 그저 그런 무공입니다. 예전에는 무공을 사용하면서 무상검법의 형식을 따르려고 노력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그것도 귀찮아져서 되는대로 펼치고 있죠.”

“그 검법의 비급은 만들었나?”

“아뇨. 처음에는 만들려고도 했지만 여러 가지로 생각하다가 그 양이 너무 많아 끝이 없을 거 같아 아예 포기했습니다.”

“자네는 노부가 마지막 벽을 못 뚫어서 아직 현경에 못 올라갔다고 했는데 그 벽이 뭔가? 알려 줄 수 있나?”

“못 알려 드릴 것 없죠. 너무 생각이 많아서 그러시는 거죠.”

“생각이 많다니?”

“저자를 어떻게 죽이면 되지? 다음 검초는 뭘 쓸까? 저자가 쓰는 검법은 뭔데 그중에서 어떤 초식을 쓰면 요런 초식으로 맞받아쳐야지……. 상대는 강한 것 같은 데 어떻게 피하는 게 좋을까, 상대는 수가 많으니 한 명씩 꾀어내서 하나씩 죽이는 게 좋을 거야. 상대는 수가 많으니 이쯤에서 도망가는 게 좋겠지……. 뭐, 이런 것이죠.”

“자네 말이 틀렸네. 노부는 적과 싸울 때 무아의 경지에서 자신을 잊고 대결을 하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아.”

“하지만 그걸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입장일걸요? 내 수하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만 너무 들어가는 게 아닌가? 수하들을 후퇴시키고 나 혼자서 저들을 절단내 버 리는 게 피해가 적겠지……. 안 그래요?”

“하지만 그건 수하들을 거느리는 자로서 당연한 거 아닌가?”

“아니죠. 정말 최고의 경지에 오르려면 완전히 모든 걸 잊고 무아의 상태에서 오직 베고 베고 또 베고 피를 덮어써야 하는 거죠. 내가 지금 적을 만나 어떤 초식을 사용할 것인지조차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순간 순간을 나의 의지가 아닌 검이 원하는 지점을 따라가며 검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신검합일(身劍合一)의 상태를 만들어야 합니다. 검의 의지가 나의 의지이고 나의 의지가 검의 의지! 이것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좋은 검법을 만들지 못하죠.”

“신검합일이라. 노부는 이미 그 경지를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겠죠. 그건 검을 맹주님의 의지에 완전히 일치시켰을 뿐, 검의 의지는 하나도 살아나지 않았죠. 그걸 이룩하면 바로 어검의 경지가 눈앞에 펼쳐질 겁니 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옥매화가 냉소를 흘리며 비웃었다.

“흥! 말은 잘하는군.”

묵향은 싸늘하게 옥매화를 쏘아보았다.

“모르면 옆에서 닥치고 있어. 이 어르신이 말씀하는데, 젖비린내 나는 것이 까불기는…….”

그러자 옥매화가 대로(大怒)해서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네 녀석이 남자라면 비무를 해 보자. 너 같은 쓰레기가 그렇게 고수라는 걸 본녀는 믿지 못하겠다.”

“너 같은 것 하고 겨뤄 봐야 이 어르신의 품위만 손상될 뿐이야.”

“미친 녀석! 겁먹은 주제에 둘러대기는…….”

“정 그렇다면 상대해 주지. 나와라.”

옥매화는 검을 검집에 넣고는 앞장서서 나가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못 나갈 줄 알고? 빨리 따라와!”

널찍한 공터로 나온 옥매화는 씨근거리며 검을 뽑았다.

“검을 뽑아라. 네 녀석에게 본맹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려 주지.”

“흥! 네년이 상대할 사람은 본어르신이 아니라 옥령인이지. 이봐! 네가 비무를 해 봐.”

“저, 저는…, 언니는 저보다 훨씬 더 강해요.”

“괜찮아. 이제부터 내가 네게 전음으로 지시를 할 테니 그대로 해라. 이 비무를 잘 기억한다면 대단히 높은 성취를 얻을 수 있을 거야. 내가 말하는 대로 재빨리 펼 쳐야 한다. 준비되었느냐?”

“예.”

“본인은 옥령인 소저의 몸을 빌려 무공을 사용하려 하오. 물론 차력대나인수법(借力大拿引手法)을 사용하는 건 아니고, 그냥 전음으로 지시만 할 거외다. 여기서 옥령인 소저가 진다면 그건 본좌가 진 것으로 생각해도 무관하오. 그럼, 시작해 보기로 하지.”

차력대나인수법은 자신의 공력을 남에게 빌려 주어[借] 그의 몸을 완전히 사로잡아(大拿] 원하는 대로 이끄는引) 수법이다. 허공을 격하여 공력을 전해 상대를 움직이므로 시술자의 공력이 대단히 많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움직임을 펼쳐 나갈 수 있다. 그렇지만 묵향은 전음으로 지시만을 하겠다고 했 으므로 당연히 약간의 시간차이가 생기게 되고, 또한 사용할 수 있는 무공도 옥령인이 알고 있는 것으로 한정되므로, 옥매화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좋은 조건이었다. 옥매화는 그래도 옥령인이 묵향의 지시로 움직인다는 생각에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내력을 끌어올려 상대가 검을 뽑기를 기다렸다. 옥령인은 천천히 검을 뽑은 후 옥매화에게 권했다.

“언니, 그럼 이제 시작하기로 해요.”

옥매화가 옥령인의 예에 답하는 걸 보고 묵향이 말했다.

“예법은 생략하고 곧바로 시작합시다.”

묵향의 말은 예의상 허초를 교환하기 번거로우니 바로 실초를 사용하자는 말이다.

<곧바로 달려 나가면서 6초, 피하면 그 방향으로 따라 붙으며 12초.>

옥령인의 몸이 앞으로 쏘아 나갔다. 옥령인은 옥매화에게 뛰어나가면서 초식을 펼쳤다.

“적하비룡(赤霞飛龍)!”

“흥! 겨우 적하무류검법 따위로…, 악!”

옥매화는 처음에 공격해 들어오는 초식을 보고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적하무류검법인 줄 알았지만, 순간적으로 그것이 검무가 아닌 패도적인 검초로 핏빛 노을과 함께 몇 줄기의 강인한 검기가 쏘아 오는 걸 보고 경악성을 지르며 피했다. 그와 동시에 검초를 펼치려 했지만 한 번 잃은 선기를 잡을 수는 없었다. 옥매화가 옆으 로 피함과 동시에 더욱 가까이 따라붙은 옥령인은 두 번째 초식을 펼쳤다.

“적하매개(赤霞梅開)!”

그와 동시에 여섯 번의 찌르기. 공력이 충만히 실려 검에서는 약간 푸른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옥매화가 이 기습적인 공세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자신이 적하무류검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래 적하무류검법에서는 실초와 허초를 포함해 스물네 번의 찌르기가 들어가지만 그걸 여섯 번으로 줄 인 만큼 모두가 실초였으며 더욱 깊이 찔러 들어왔다. 그녀가 가까스로 오른쪽으로 피하자 묵향은 옥령인에게 말했다.

<선 채로 22초.>

옥령인은 옥매화가 가까스로 피해 나가자 묵향의 지시대로 제3초를 날렸다.

“적하낙일(赤霞落日)!”

동시에 옥령인의 검에서 하나의 붉고 큰 검기 덩어리가 붉은 노을 사이를 빠져나와 엄청난 속도로 옥매화를 덮쳤다. 옥매화는 더 이상 수세에 몰리면 재미없겠다 는 걸 느끼고 맞받아치기로 작정했다.

“백매낙월(白梅落月)!”

그녀의 자세는 불안했지만 그런대로 훌륭히 검초를 펼쳤고 검기의 덩어리와 그녀의 검초에서 뿜어낸 검기가 충돌해 폭발성을 울렸다. 서로가 그 충격에서 비틀거 리며 물러났다. 옥매화는 뒤로 물러서서 외쳤다.

“이건 엉터리예요. 저자는 분명히 자신의 공력을 전해 주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번 초식으로 저 파렴치한 인간이 차력대나인수법을 사용해 공력을 보냈다는 게 확 실해졌어요.”

그러자 묵향이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헛소리하지 마라. 그건 분명히 옥령인의 공력이야. 안 그렇습니까, 맹주?”

맹주는 약간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말이 맞다. 옥령인은 오늘 부교주의 도움으로 엄청난 내력의 증가를 거뒀지. 대신 부교주가 지금까지 적하무류검법에서 발전시킨 적하마령검법만 쓰고 있 으니 잘해 보도록 해라.”

두 자매의 공방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했다. 옥령인이 묵향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고 하지만 언제나 약간의 시간차가 있었기에 옥매화가 그렇게 밀리지 는 않았다. 순식간에 50여 초식이 교환되었고, 묵향이 조합해 나가는 초식을 보면서 맹주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탄성을 지르기도 하면서 그 초식의 운용에 감 탄했다.

아마 직접 묵향이 옥령인과 같은 공력으로 적하마령검법을 펼쳤다면 5초도 되기 전에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옥령인은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기에 묵향의 주문대 로 부드러운 초식의 연결을 하지 못한다는 데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50초가 넘어서자 이대로 장기전으로 들어가면 불리함을 깨달은 묵향이 연속 공격을 주문했 다.

<따라붙으며 6, 2, 22초를 동시에.>

그러자 옥령인이 미꾸라지처럼 피해 나가는 옥매화를 향해 검을 들고 뛰어들면서 외쳤다.

“적하비룡(赤霞飛龍), 적하유천(赤霞流天), 적하낙일!”

옥매화는 그 엄청난 공세를 신법과 백류매화검법으로 가까스로 헤쳐 나가며 자신의 실력을 있는 대로 발휘했다. 하지만 그녀도 겨우 지시만 받는다고 해서 동생이 이 정도 괴력을 발휘하리라고는 짐작도 못하고 있었던 터라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검만 알고 살아온 내가 겨우 버티기만 할 수 있을 줄이야. 먼저 공격을 해 대면 령인이가 겁에 질려 지시를 어기게 되지 않을까??

일단 생각을 굳히자 몸을 돌보지 않고 강공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백매천심(白梅天沈), 백매일절(白梅一切), 백매유향(白梅流香)!”

그녀의 검기와 검풍이 사방으로 몰아치자 급기야 실전 경험이 떨어지는 옥령인의 눈에 공포가 자리 잡았다. 그녀는 묵향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몸을 놀 려 피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거기에 그녀는 묵향의 지시에 따라 강공을 펼칠 때 차마 언니에게 독수를 쓰지 못하고 손속에 인정을 두어 몇 번이나 위기를 모면하게 해 준 후라 언니가 이토록 물불을 안 가리고 독수를 펼치자 심약한 그녀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자신의 지시로는 어떻게 되지 않음을 느낀 묵향은 1백 초식 정도 지시를 하다가 입맛을 다셨다.

“본인이 졌습니다. 저 바보 같은 맹꽁이는 내 말을 듣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군요.”

그러자 옆에서 보고 그 속사정을 짐작한 맹주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묵향을 위로했다.

“저 아이가 심약해서 그런 거니 꼭 자네가 진 게 아니네. 20초 정도 싸웠을 때 상대가 피할 길목을 골라 연속된 검초로 적을 몰아넣는 그 방법은 본좌도 감탄했다 네. 그런데 저 아이가 차마 독수를 못 써서 잠시 미루는 사이 매화가 빠져나간 거지. 저 둘이 자매간이 아니면 자네가 이겼을 거야.”

그러나 재미가 없어진 묵향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진 건 진 거죠. 그러니 더 이상 헛소리하지 않고 제 숙소에 들어갈까 합니다, 그럼.”

맹주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일이 이런 식으로 풀려 묵향에게 더욱 많은 질문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운명과 옥매화의 경솔함에 울분이 터졌지만 이미 떠나 버린 화살이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묵향은 나머지 날 동안 한영영을 잘 통제하여 본타로 돌아왔다. 한영영은 워낙 묵향에게 혼쭐이 나서 그런지 돌아올 때는 별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