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0권 16화 – 다시 나타난 정령왕 나이아드
다시 나타난 정령왕 나이아드
“히야!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경치구먼.”
다크는 문득 자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이 오래전에 아주 신물 나게 봤던 것임을 깨달았다. 정령왕 나이아드에게 걸려서 엄청나게 고생하던 매일 매일이 악 몽과 같았던 그때. 사실 그때는 모든 것이 시커멓게 보였을 뿐 주위 경관이 보이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경관들을 볼 수가 있었고, 제일 마지막에 나이아드와 만났을 때는 아주 확연하게 이 작은 이상한 세계를 볼 수 있었다.
“그놈이 아는 곳은 여기밖에 없나? 맨날 여기로 불러내는 것을 보면..”
그녀는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호수 옆에 있는 바위를 하나 찾아내고는 그곳에 가서 앉았다. 새파랗게 빛나는 호수는 대단히 아름답게 보였지만, 그 안에 물고기 는 살고 있지 않았다. 또 새파란 하늘과 호수 주변에만 있는 몇 그루 안 되는 나무들. 그 외에는 사막과 같은 드넓은 척박한 대지였다.
다크가 느긋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을 때, 호수의 물이 갑자기 치솟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잘생긴 남자가 나타났다. 그 남자는 황금빛 머리카락을 뒤로 쓱 쓸어 넘긴 후 꼭 땅 위에서 걷듯 물 위를 천천히 걸어왔다.
“오랜만이로군.”
오만한 표정으로 인사하는 상대를 향해 다크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나 역시! 그런데, 아직도 나한테 볼일이 남아 있나?”
“물론, 남아 있지. 이제 약속한 1년도 다 되었으니 나에게 협조를 해 줘야 하지 않겠나?”
상대의 말에 다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약속한 1년?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리고 협조는 무슨 협조?”
상대의 반응에 나이아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이런, 이런……. 아르티어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군. 나를 위해서 한 가지 일을 좀 해 줘야겠어.”
나이아드가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다크는 재빨리 답했다.
“거절한다.”
“뭐야? 무슨 일인지 들어 보지도 않고 거절이야?”
“들어 보나 마나야. 나는 남의 일 해 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네 녀석처럼 뻔뻔하게 부탁해 오는 놈의 청을 들어줄 정도로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야.”
“쯧쯧…, 이런 식이라면 전번과 달라진 점이 하나도 없군. 네년은 꼭 두들겨 맞아야 말을 듣는 타입인 모양이지?”
나이아드가 이죽거리며 말하자, 다크는 슬며시 몸속의 마나를 움직이며 자신의 몸 상태가 최적의 상태라는 것을 재삼 확인했다. 몸 상태는 정상, 그렇다면 겁날 것 은 하나도 없었다.
“글쎄, 그게 뜻대로 될까?”
“정 소원이라면 몇 대 때려 주고 다시 대화를 시작해 보기로 하지.”
그 순간 나이아드의 몸에서 수십 가닥의 미세한 물줄기가 뻗어 나가 다크를 강타했다. 하지만 다크의 몸 주위에 생겨나기 시작한 푸르스름한 막을 뚫지는 못했다. 소녀가 자신의 공격을 간단하게 막아 내 버리자 나이아드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전에 미쳤을 때 만났을 당시에도 상당히 강하기는 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정도 실력이라면 조금 어렵기는 하겠지만 못 할 것도 없겠다 싶어 찾아왔는데, 해괴한 마법을 써서 자신의 힘을 차단하다니?
“그게 무슨 마법이냐?”
“멍청하기는……. 말 못 해 주겠으니까 한번 맞혀 봐라.”
그때부터 소녀의 가공할 만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나이아드는 소녀의 공세를 막는 데 급급한 형편이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소녀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주문이나 시동어 따위를 외친 적이 없었다는 것.
엄청난 강기(氣)의 회오리가 덮쳐 오며 나이아드가 구축한 거대한 물의 장벽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강철도 뚫는 물의 힘이었지만, 소녀가 뿜어내는 힘은 그 보다 더욱 강했던 것이다.
“크으윽!”
나이아드의 형체는 엄청난 힘에 의해 찢겨져 나갔고, 소녀는 이죽거리며 서서히 나이아드가 있던 곳에 다가가 자신의 작품을 감상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물의 정령왕이니까 물로 도망쳤나? 크흐흐흐,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떻게 하지 못할 것 같아?”
순간적으로 소녀의 손에서 푸른빛이 튀어 나오더니 쑥쑥 자라서 하나의 검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소녀는 막강한 기(氣)를 투입해서 검의 형상을 만들어 내자마자 그것을 나이아드가 사라졌던 그 얕은 호수 바닥을 향해 거침없이 쑤셔 넣었다.
쿠콰콰콰콰..
그와 함께 거대한 기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 반구형의 강기 덩어리가 급속도로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호수에 고인 물과 충돌을 일으켰다. 엄청난 굉음을 울리며 주 위의 공간이 찢어질 정도로 파괴되고 있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위력!
소녀는 주위가 황폐화되다 못해 완전히 박살이 나고, 자신이 서 있는 곳 주위에 거대한 웅덩이가 생겼는데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또다시 그 기술을 사용했다. 엄청 난 힘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그 순간 더 이상 소녀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이아드가 만들어 놓은 공간이 찢어지듯 박살 나 버렸다.
“어? 여기는?”
다크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재빨리 눈동자를 굴려서 주위를 둘러봤다. 그곳에는 자신을 향해 애처로운 눈길을 보내고 있는 아르티어스가 서 있었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에요?”
아르티어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변명했다.
“네가 잘 있는지 궁금해서 와 봤지.”
“맡긴 일은 다 끝내고 여기서 노닥거리고 계신 거예요?”
아들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헛바람을 삼키며 변명에 급급했다.
“저, 그게 그러니까 말이다. 아직 다 끝내지는 못했는데, 아마도 내일 점심때쯤이면 끝낼 수.
“빨리 나가서 일해요. 여기에서 노닥거리지 말구요. 내일 아침까지 끝내라구요. 드래곤은 한꺼번에 1년도 잘 수 있지만, 그 반대도 가능하다고 자랑했었잖아요. 빨 리 안 가요?”
다크는 아르티어스의 변명을 들을 생각도 안 하고 몰아붙이기 시작했고, 아르티어스는 왜 자신이 그 일을 해야만 하는지 아리송한 표정을 지은 채, 신세 한탄만 늘 어놓으며, 돌아가서 일이나 할 수밖에 없었다.
“에구구구…, 내 팔자야…….”
아르티어스가 나가고 난 후 다크는 몸을 일으켜 옆에 놔뒀던, 미네르바가 선물한 크루마산 브랜디, ‘블랙홀’을 한 모금 마신 후 아쉬운 듯 투덜거렸다.
“아깝다. 완전히 끝장을 낼 수 있었는데…….”
다크는 가볍게 입맛을 다시며 다시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나이아드란 놈이 한 번 더 자신의 눈에 띄기만 하면 다시는 자신의 앞에 나타날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만 들어 버릴 작정이었다.
소녀의 숨소리가 점차로 잦아들기 시작하자, 소녀가 끼고 있던 반지에서 물줄기가 천천히 흘러나오더니 방금 전 소녀와 격투를 벌였던 바로 그 황금빛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아름다운 청년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젠장! 정말 이 계집이 호비트가 맞기는 맞는 거야? 내가 5천 년 전에 공들여 만들어 놓은 세계를 완전히 박살 내 버리다니……. 어떻게 호비트 계집애 따위에게 공간을 박살 낼 정도의 힘이 있는 거지? 그런 공간은 밖에서는 깨기 쉽지만 안에서 부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데 말이야. 하기야, 저 정도 힘이 있으니까 이용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보다 너무 강하다는 것이 문제로군.”
나이아드는 도저히 닭 모가지 하나 비틀지 못할 것 같은 순진한 얼굴을 하고 평화로운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소녀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봤다.
“으으윽! 저 아이를 어떻게 하면 이용할 수 있지? 지금 그녀의 힘은 내가 이 공간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의 한계를 넘어 서 버렸어. 조금만 탈출하는 것이 늦었다면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받을 뻔했을 정도니까 말이지. 그렇다고 꼬마 애 하나를 상대하자고 다른 정령왕에게 부탁하자니 자존심이 걸리고……. 으음…, 이래저래 문제구만. 저 아이를 끌어들이는 것은 좀 더 궁리를 해 봐야겠어.”
나이아드는 깊이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유지하는 듯하더니 순간적으로 물이 되어 허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