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0권 19화 – 정령계로 간 묵향
정령계로 간 묵향
엄청나게 짙게 우거진 숲. 평생 듣도 보도 못 했던 기이한 식물들이 엄청나게 짙게 우거져 있었다.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우거진 수풀 덕분에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시종으로 데리고 있는 제스터가 제법 검술에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재미 삼아 조금씩 가르쳐 오며 즐거움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물론 자신이 검술을 가르치며 제자가 잘 소화해 내는 것에 뿌듯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걸 역으로 생각해서 자신이 마법을 잘 따라서 배우면 아르티어스 가 얼마나 좋아할지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크는 자신이 평소에 하던 대로 바쁜 와중에도 제스터에게 약간의 시간을 내어 검술을 가르치던 도중, 갑자기 눈앞이 뿌예지더니 이렇듯 울창한 숲이 나타난 것 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여기가 어디지?”
갑자기 굵직한 목소리가 입에서 튀어 나오자 그 목소리를 낸 당사자가 오히려 더 놀랐다. 검은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사내. 그는 갑자기 자신의 몸을 내려 다보며 이게 꿈이 아닌지 만져 보기 시작했다. 그런 후 터져 나오는 만족스런 목소리.
“드디어 남자로 돌아왔어. 남자로……. 으하하핫!”
한참 웃음을 터뜨렸지만, 이윽고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자 여기는 어딜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이 무더운 온도와 해괴한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울창한 숲, 그 어떤 것으로 봐도 중원으로 돌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남만(南) 지방으로 가면 무덥다고 하던데, 설마 거기에 왔나?”
하지만 머리만 굴린다고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일단 나무 위로 올라가서 주위를 살펴보기로 작정했다. 나무 위로 몸을 날렸을 때, 묵향은 난생 처음 보는 광 경에 입을 떡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군데군데 솟아올라 있는 화산에서는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그 화산들이 차지하고 있지 않은 곳은 끝없는 밀림의 연속이었다.
바로 이때 저 먼 곳에서부터 엄청난 먹구름이 강력한 바람을 타고 흘러 들어오며 대지를 향해 마치 화살을 뿌리듯 번개를 뿌려 댔다. 아직 거리가 대단히 멀리 떨 어져 있었지만 하늘에서 지상으로 연결되는 그 뇌전의 축제는 발밑이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힘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윽고 그 먹구름은 묵향이 서 있는 곳까지 몰려들었고 사방에는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섬광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곧이어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뭐 이런 곳이 다 있지? 눈에 보이는 것은 식물뿐이고, 지독하게 퍼붓는 비, 바람, 번개……. 대기는 그 모든 것들이 뿜어내는 기로 소름이 끼칠 만큼 충만해져 있 고, 생명력이 약동(躍動)하는 이런 곳이 말이야.”
한동안 주위를 둘러보던 묵향은 여기가 어딘지 알려 줄 사람부터 먼저 찾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았던 그곳에 처음 갔을 때도 먼저 민가를 찾아 말부터 배우지 않았던가?
“젠장, 재수 없으면 전과 같은 일을 똑같이 반복하게 생겼군.”
어느 한쪽 방향을 정한 후 묵향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나무 위로 달려가고 있었기에 발밑으로 울창한 밀림들이 쏜살같이 지 나가는 듯한 착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밀림은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묵향은 강을 하나 발견했다. 나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니 강물 속에는 이상하게 생긴 거대한 물고기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일단 저걸 잡아먹고 갈까? 언제 또 먹음직한 먹거리를 발견하게 될지 모르는데…….”
잠시 그가 궁리하는 사이, 갑자기 붉은 머리카락을 나부끼는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상체에는 몸매가 완전히 드러날 정도로 꽉 끼는 옷을 입고 있었고, 하체에는 늘씬한 다리의 허벅지가 거의 다 드러나는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묵향을 잠시 노려보더니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이봐, 방금 이쪽으로 차원 이동되어 온 놈이 네가 맞냐?”
다행히 일단 말은 통하는 세계라는 것을 확인했기에 묵향은 느긋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언어의 장벽이 없는 세계라는 것을 알려 준 보답으로 저쪽의 질문 은 다 들어 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다음에는 저년에게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알아낼 작정이었지만..
“이상하네. 대상을 잘못 잡았나? 분명히 아쿠아 룰러의 기척을 느끼고 잡아들인 것이었는데, 내가 실수를 하다니……. 이봐, 너는 누구지?”
“묵향이라고 한다.”
“무키앙? 웃기는 이름이군. 어떻게 해서 네가 왔는지 모르겠지만, 너는 크라레스라는 작은 나라에서 왔나?”
또다시 사내가 고개를 까딱하자,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말했다.
“다크라는 계집과는 어떤 관계지? 그년을 잡아들였는데, 왜 네가 있는지 그걸 묻는 거다.”
“다크? 다크라면 난데?”
“오호호홋, 미친 녀석! 그 계집애가 자기라고 말하다니 진짜 미…….”
갑자기 그녀는 말을 중지했다. 잠시 잊어먹고 있었지만, 아쿠아 룰러의 주인은 원래 남자였다. 그러나 저주를 받아 여자로 변한 것이다. 이곳은 물, 불, 바람, 뇌전,
대지를 주관하는 5대 정령이 다스리는 정령계였다. 차원이 바뀌었기에 묵향을 소녀로 만드는 저주를 주관했던 마왕 크로네티오의 힘도 여기서는 그 빛을 잃게 된 다. 그렇기에 묵향의 저주는 풀리게 되고, 다시 남자의 모습을 되찾게 된 것이다.
“오호호호호….바로 여기에 놔두고 찾는다고 그 난리를 피웠었군. 나를 기억하겠냐?”
묵향의 뇌리에는 저렇게 퇴폐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는 계집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을 보고 계집이 생긋 웃더니 어느 순간 그 모습이 확 바뀌어 버렸다. 몸이 허물어지는 듯 보이다가 다시 재구성되는 것을 보면 괴물인 듯 보이기까지 했지만, 다시 나타난 얼굴을 보는 순간 묵향은 그 상대의 얼굴을 며칠 전에 봤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나이아드?”
빛나는 금발을 뒤로 쓱 쓸어 넘기면서 남자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이제야 기억을 하는군. 네년을 제압하기 위해 이런 수고까지 하게 만들다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나에게 복종하겠다고 맹세해라. 이곳은 정령계. 여태까지의 금제는 사라지고 나는 모든 힘을 다 쓸 수 있다. 그러니 괜한 생각하지 말고 일찍이 포기하는 것이 좋아.”
““미친놈!”
“흐흐흐…, 매를 버는구나. 그래 네년은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타입이었지. 오냐, 원대로 해 주마.”
그때부터 묵향에게는 악몽의 연속이었다. 자신과 주종의 관계를 맺었던 타이탄은 어디로 도망갔는지 나오지도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어떤 무 공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나이아드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생명이 있는 곳치고 물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으니, 물을 주관하는 나이아드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헉헉헉..
묵향으로서는 자신을 이렇듯 숨차게 만든 사람을 만난 적이 거의 없었다. 아마도 묵향이 제일 마지막으로 만났던, 자신을 고생시킨 인물은 그의 마지막 사부 유백 뿐이었을 것이다.
“젠장! 아무리 기(氣)가 충만한 곳이라고 해도, 이렇게 되면 밑 빠진 독에 물……. 아니지, 기가 충만하다면 한번 해 볼 만하지.”
묵향은 슬쩍 몸을 숨긴 채, 나이아드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렸다.
“히히히…, 겨우 여기까지밖에 도망치지 못하다니. 내가 시간을 줘도 그 모양이라니. 호비트란 것들은 고집만 세고 정말 쓰잘데기가 없어.”
거의 포기한 듯 힘없는 눈으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묵향을 보며 나이아드는 이죽거렸다.
“이제 포기한 것인가? 포기했다면 빨리 나에게 충성을 맹세해라.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네년을 잡고 실랑이하는 것도 귀찮은 노릇이니까 말이야. 으하하하핫.” 바로 그 순간 묵향의 손에서 빛나는 막대기 같은 것이 쑥 솟아올랐고, 그와 동시에 묵향의 몸은 나이아드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나이아드는 재빨리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그 빛나는 검의 목표는 나이아드가 아닌 나이아드와 비교적 가까운 땅속 깊은 곳을 흐르는 기였다.
쿠콰콰콰콰…….
대폭발이 일어났다. 대지의 기운을 충돌시키는 이 무공을 깨달은 이후, 최고로 강력한 위력이었고, 그 강기의 폭풍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주위를 완벽하게 초토 화시켰다.
“헉헉헉…, 간신히 끝난 모양이군.”
바로 그때 묵향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오오, 다오(Dao : 대지의 정령왕)가 슬퍼하겠군. 그가 아끼는 숲을 이렇듯 묵사발을 내놓다니 말이야.”
흠칫 굳어 있는 묵향의 뒷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나이아드는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어조는 상당히 꼬여 있었다.
“어때?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지 깨달았나? 겨우 그따위 공격으로 나를 없앨 수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