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0권 20화 – 나이아드와 묵향의 대결
나이아드와 묵향의 대결
아르티어스가 정신없이 돌진해 들어간 곳은 블루 드래곤 키아드리아스의 레어였다. 키아드리아스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영토로 공간 이동해 온 엄청나게 강렬한 드래곤의 기척에 약간 정신이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찾아온 손님을 마중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레어 밖으로 나온 키아드리아스는 자신의 레어로 허락도 받지 않고 붉은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접근해 오고 있는, 아름답지만 광폭한 기운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 는 호비트를 볼 수 있었다.
강렬한 드래곤의 존재감에 저 생김새……. 머리카락의 색깔만 금색에서 붉은색으로 바뀌었을 뿐, 저 트랜스포메이션한 모습은 키아드리아스의 뇌리에 잊혀지지 않고 남아 있는 악몽과도 같은 기억과 함께 되살아났다.
“누군가 했더니, 아르티어스 님이었군요. 여기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오신 거죠? 여기는 말토리오 산맥이 아닌데…….”
아르티어스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곳에는 초록색의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엘프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고혹적인 커다란 눈동자로 아르티어스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에는 절대로 환영의 빛은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남의 영역에 허락도 없이 들어온 것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느낄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절대로 아니었다. 아르티어스는 자신이 찾아온 당사 자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카렐! 카렐은 어디에 있지?”
갑자기 아르티어스가 자신이 생명과도 같이 사랑하는 카렐을 찾자 키아드리아스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예전에도 한 번 겪어 봤지만 아르티어스는 정 말 무서운 드래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렐은 왜 찾나요?”
아르티어스는 카렐의 위치는 알려 주지 않고 우선 그를 찾는 목적부터 물어보는 키아드리아스에게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남의 영역에 들어와 있는 만큼 그로서는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참으며 최대한 친절히 대답해 줬다.
“그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그래.”
“부탁이라고요? 당신이 엘프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쓸데없이 말을 빙빙 돌리자 아들의 실종으로 초조하기 이를 데 없는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벌컥 화부터 냈다.
“제발 닥치고 카렐이 있는 곳이나 말해.”
하지만 드래곤들 간에 이렇듯 남의 영토에 들어와서 신경질부터 내는 경우는 매우 예의에 어긋난 행위였다. 아무리 아르티어스가 키아드리아스보다 7백 년쯤 더 살았다고 하더라도 키아드리아스에게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던 것이다. ‘전에 내가 그랬을 때는 엄청나게 신경질을 내놓고는…’이라고 생각하며 키아드리아스는 일부러 더욱 비꼬듯 말했다.
“호호호…, 말을 해 주지 않으면 무력 사용도 불사하겠다는 것인가요?”
약간 애를 태우며, 아르티어스가 자신의 연인인 카렐을 찾는 이유를 탐색하려는 의도였지만, 키아드리아스가 처음부터 상대방의 감정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라 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죄였다.
“젠장, 그래! 무력 사용도 불사할 각오가 되어 있다. 하지만 각오해! 내가 힘을 쓰면 전처럼 날개 하나 부러뜨리는 정도에서 끝내지는 않을 거야. 으드드득, 나에게 시간을 그만큼 낭비하게 했으니 이번에는 아예 죽여 버릴 거야!”
키아드리아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어떻게 남의 영토에 다짜고짜 찾아와서 이렇듯 폭언을 해 댈 수 있는 것일까? 그것도 어린 드래곤도 아니고 이제 고룡이 다 되어 가는 영감이 말이다.
예전에 아르티어스의 영토에서 깝죽거리다가 치고받았을 때가 무려 2천 년 전이었다. 아무리 블루 드래곤이 골드 드래곤보다 강하다고 하지만 사실 그렇게 압도 적인 힘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 키아드리아스는 아직 성장기에 있었던 반면 아르티어스는 성장을 마치고 완숙기에 접어든 상태였다. 그렇기에 키아드리아스가 묵사발이 났었지만 그때만을 생각하고 이렇듯 오만하게 나올 수는 없는 것이었다.
거의 7백 년의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키아드리아스도 이제는 완숙기에 접어든 웜급 드래곤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상대의 영토에 무단침입해서는 저렇듯 오만하 게 나올 수 있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설혹 아르티어스가 이긴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상대로 그리 손쉬운 승리를 장담하기는 힘들 텐데 말이다.
“도대체 뭘 믿고 남의 영토에서 그렇게 오만한 거죠?”
“내 실력과 힘을 믿는 거지. 설혹 네가 에인션트급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빨리 카렐이 있는 곳이나 말해. 네 녀석하고 한가하게 입씨름하고 있을 여유는 없어.” 완전히 이성을 잃다시피 한 채 서슬이 시퍼렇게 말해 대는 상대를 보며 키아드리아스는 상대가 결코 좋은 뜻으로 카렐을 찾는 것이 아니라고 단정했다. 아르티어 스의 저 광폭한 눈동자는 아무래도 카렐을 찾기만 하면 찢어 죽이겠다는 의지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느낌을 키아드리아스에게 전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에게 알려 줄 수는 없어요.”
키아드리아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르티어스는 경고도 하지 않고 공격을 시작했다. 괜히 시간을 끌 필요 없이, 아직 엘프일 때 없애 버리는 게 최선의 방책이었기 때문이다. 대기를 뚫고 날아오는 엄청난 바람의 칼날을 느끼고 키아드리아스는 경악했다.
그녀는 재빨리 방어 마법을 펼치며 그것도 못미더워서 몸을 날려 칼날을 피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가 날린 바람의 칼날은 그대로 키아드리아스를 따라오며 작렬 했다.
“꺄악!”
본체의 상태도 아니고 엘프로 트랜스포메이션한 상태였기에 그녀가 황급하게 친 방어막은 그렇게 강하지 못했고, 그것이 풍압을 견디지 못하고 박살 나면서 엄청 난 충격을 그녀에게 안겨 줬다. 아르티어스는 상대를 향해 연속 공격을 감행했다.
일단 기선을 제압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키아드리아스는 상대의 공격을 피한다고 정신이 없었지만, 아르티어스는 달랐다. 아르티어스는 연속 공격을 감행하면 서 틈틈이 생겨나는 약간씩의 여유를 이용해서 바람의 정령왕을 불러냈다.
바람의 정령왕은 아르티어스의 부름에 따라 투명에 가까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인가? 아르티어스여!>
“제길! 저년을…….”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바람의 정령왕을 보고 아르티어스는 공격 목표를 지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단 정령왕을 불러내고 보니 자신이 괜한 일을 벌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렐을 통해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를 불러내어 정령계로 보낼 필요 없이, 바람의 정령왕 아리엘(Ariel)을 보내 버리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노릇이 아니던 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다크의 아쿠아 룰러를 보면서, 마음이 급하다 보니 미처 자신도 정령왕을 불러낼 수 있다는 그 사실을 망각하고, 정령왕을 불러낼 수 있는 또 다른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카렐에게 도움을 청하러 이곳까지 와 버린 것이 실수였던 것이다.
“이런 제기랄!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었잖아!”
공격의 템포가 끊긴 사이 키아드리아스는 정신을 되찾았다. 원래가 정령 마법의 특성상 전기의 정령은 방어에 약간 취약했다. 그 점을 노리고 자신을 그렇게 정신 없이 몰아붙인 것에 감탄을 하긴 했지만, 전기가 방어에 취약한 대신 공격력에 있어서는 엄청나게 강하지 않던가? 일단 여유를 찾자마자 키아드리아스는 공격을 시 작했다.
대지를 꿰뚫고 날아오는 뇌전의 세례 속에서 아르티어스는 상대에게 잠깐의 시간 여유를 준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아르티어스의 평소 성깔대로 죽여 버린 후 생각했어야 했는데, 상대를 죽이기도 전에 해결책이 먼저 떠올라 버린 것이 화근이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저년을 죽엿!”
그와 동시에 아리엘은 키아드리아스를 향해 막강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르티어스는 키아드리아스의 공격을 피하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이렇게 되 자키아드리아스가 압도적으로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처음 몇 번의 공격만을 했을 뿐, 그다음부터는 연속되는 아리엘의 공격을 회피하는 데만도 정신이 없었던 것 이다.
아리엘은 드래곤인 아르티어스와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엄청난 공격을 퍼부어 댔다. 그리고 그사이 아르티어스는 본체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황금빛 광채가 솟아 나오는 가운데 거대한 아르티어스의 몸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정말 잠시지만 이 순간이 아르티어스에게는 대단히 위험한 때였다. 공격이고 방어고 할 수 없 는 무방비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키아드리아스는 바로 그 절호의 찬스를 아리엘의 공격을 피하면서 이빨을 갈며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전기의 정령왕 카르스타를 불러냈다면 모르 겠지만, 아리엘은 그녀에게 그 작은 틈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아르티어스의 황금빛 거체가 완벽하게 모습을 드러냈을 때, 키아드리아스는 절망적인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곧이어 그녀는 드래곤으로 돌 아가 보지도 못한 채 생을 마치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제야 키아드리아스는 아르티어스가 한 말을 이해했다. 자신의 실력과 힘을 믿는다는 말. 그리고 상 대가 에인션트급 드래곤이라고 해도 겁나지 않는다는 말. 자식도 낳지 않고 온갖 무예를 익힌다고 떠돌았던 아르티어스는 키아드리아스에 비해 실전 경험이 엄청 나게 많았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본체로 돌아가자마자 즉각 용언 마법을 펼쳤다. 그에 따라 아르티어스의 두 손에서 무시무시한 붉은색 방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양손에 각각 8사 이클급 공격 마법 헬파이어를 쓰려고 하는 것이었다.
얄미울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이며 승기를 잡는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키아드리아스가 차라리 깨끗한 최후를 맞이하겠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산 밑에서 금빛 광 채가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아르티어스와 같은 찬란한 금빛 광채를 뿜어내고 있는 그것이 급속도로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지만 아르티어스 와 같은 거대함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키아드리아스는 드래곤 두 마리가 싸워 대는 소리를 듣고 잠시 자신의 집으로 내려갔던 카렐이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 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카렐이 강하다고 해도 이 무지막지한 아르티어스에게 이길 수는 없다고 키아드리아스는 생각했다. 키아드리아스는 아직도 정신없이 계속되고 있는 아리엘의 공격을 피하며 절망적으로 외쳤다.
“카렐! 오지 마요. 달아나요! 제발!”
자신은 죽어도 괜찮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연인까지 죽는 것은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르티어스의 두 손에 맺힌 붉은 덩어리. 그것은 이제 발사를 앞두고 있는 응집된 힘의 결정체였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그걸 키아드리아스에게 발사하지 않고 잠시 멈췄다. 그리고 그 엄청나던 아리엘의 공격도 그때 멈췄다.
<그렇게 죽고 싶냐? 이제 그만 싸움을 멈추는 것이 어때? 나는 너 따위와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생과 사의 기로에서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키아드리아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승낙했다는 것을 확인한 아르티어스는 곧장 자신의 양손에 맺혀 있던 두 개의 붉은빛의 덩어리를 소멸시키면서 아리엘에게 말했다.
<부탁이 있다.>
<뭐냐?>
<지금 곧장 정령계로 돌아가서 내 아들을 구해 다오.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가 여기서는 도저히 손을 쓰지 못하자 정령계로 그 아이를 끌고 갔다.>
<정말인가?>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나?>
<그 청은 수락한다. 이계의 생명체를 정령계로 끌어가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행위…….>
그리고 그 순간 투명하던 아리엘의 모습을 더 이상 찾아볼 수는 없었다. 아리엘이 모습을 감춘 그때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등 뒤를 압박해 들어오는 엄청난 압력을 느꼈다.
<이건 또 뭐야?>
아르티어스는 날아오는 그 엄청난 힘의 근원이 아들 녀석이 주로 애용하는 ‘괴상한 마법과 유사하다고 느꼈다. 아마도 예전의 아르티어스였다면 이 일격으로 상 당한 상처를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아르티어스의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그 엄청난 기운은 설혹 드래곤 본이라 해도 간단하게 찢어발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아들 녀 석에게 용언 마법을 가르치기 위해 며칠 동안 고민하며 드래곤 하트를 단전으로 대체하게 하는 그 힌트를 역으로 자신에게 적용하여, 검술이란 것을 상당한 수준까 지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순간 아르티어스의 몸에서 뿜어 나오던 금광이 더욱 밝아졌다. 그리고 그 몸체에 카렐이 뿜어낸 강기 세례가 부딪쳤을 때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뿐 이었다. 아르티어스는 흔히 호비트들이 검술에 써먹듯 자신의 비늘에 마나를 주입한 것뿐이었지만, 마나를 주입받은 드래곤 본은 상상도 못 할 강도를 발휘했던 것 이다.
자신의 공격을 아주 간단하게 막아 낸 드래곤을 향해 카렐이 경악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사이,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그 거대한 몸을 천천히 뒤로 돌렸다.
<네가 카렐이냐?>
“그렇소.”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녀석! 네 녀석이 내 아들에게 아쿠아 룰러만 주지 않았어도 이번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아쿠아 룰러라는 말이 나오자 카렐은 흠칫했다.
“으응? 다크라고 하던 그 소녀를 말하는 것이오?”
<그래. 그 아이는 나이아드의 술수 때문에 지금 정령계에 끌려가 있다. 네 녀석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크하하하하…….>
“자, 잠깐, 이럴 시간이 없지 않소? 그녀가 위험하다면서? 내 이프리트에게 부탁하면 될 거요.”
당황한 어조로 말하는 카렐에게 아르티어스는 그딴 거 필요 없다는 듯 이죽거렸다.
<이미 아리엘을 보냈으니 이프리트 따위는 필요 없다.>
“그래도 상대는 나이아드인데, 정령왕 하나보다는 둘이 좋지 않겠소?”
상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기에 전의에 불타고 있던 아르티어스는 조금 누그러든 어조로 말했다.
<그럼 빨리 보내라.>
이때, 여태까지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앉아서 오가던 대화를 도청(盜聽)하고 있던 키아드리아스도 한마디 보탰다. 나이아드에게 납치된 아르티어스의 아들이 누구 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같은 드래곤을 죽일 각오까지 할 정도로 아들에 대한 아르티어스의 사랑이 극진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만약 이대로 아들을 찾지 못한다 면 아르티어스는 엄청난 분노를 터뜨릴 것이고 그 분노에 희생될 첫 번째 대상은 자신과 카렐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방금 전의 격전을 되씹어 봤을 때 그들 둘 이 힘을 합한다고 해도 아르티어스를 이길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그렇기에 무조건 아르티어스의 아들을 정령계에서 구출해 와야만 했고, 또 정령계에서 그 아이를 데려올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려면 키아드리아스 자신도 끼어드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잠깐, 나하고 소통하는 카르스타도 보내죠. 정령왕 둘보다는 셋이 좋지 않겠어요?”
키아드리아스까지 이렇게 말하자 아르티어스는 더욱 누그러든 어조로 말했다.
<좋을 대로…….>
묵향은 절망감을 느꼈다. 아무리 자기 집에서는 강아지도 한 수 먹고 들어간다고 하지만, 상대가 이렇게 막강하게 탈바꿈할 줄은 감히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최후 의 비기까지 동원해 봤지만, 상대의 옷자락 하나 찢을 수 없었던 것이다.
“크흐흐흐…, 이제 그만 포기하지 그래. 나에게 복종하면 네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느꼈던 그 어떤 것보다 강한 쾌락과 신에 가까운 힘을 주마. 너와 나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아.”
이죽거리는 나이아드를 향해 묵향은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쓱 손으로 훔친 후 쏘아붙였다.
“젠장! 사양하겠다.”
묵향의 온몸은 나이아드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인해 만신창이에 가까웠다. 하지만 나이아드는 묵향을 일단 살려 둬야 했기에 그렇게 심한 상처가 생기도록 하지는 않고 있었다.
도저히 방법이 없자 묵향은 죽을 각오를 하고 온 힘을 동원해서 주위의 모든 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전에 살던 중원이나 얼마 전까지 살았던 새로운 세계보다 도 이곳은 더욱 기가 충만한 곳이었다. 그 약동하는 대자연의 기운을 온몸이 터져 나갈 정도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단전을 가득 메운 기운은 이제 혈맥에 가득 쌓 였고, 조금 더 지나자 최하부의 말단 세맥에까지도 꽉꽉 들어차기 시작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엄청난 양의 마나가 상대의 몸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느꼈지만, 나이아드는 처음에는 그걸 그냥 놔뒀다. 아무리 제까짓 게 용을 쓴다고 해 도 자신을 능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나가 겨우 한 명의 호비트 몸속에 그야말로 한없이 흘러 들어가고 있자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 르렀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엄청난 물줄기가 묵향의 몸을 강타했다. 물론 나이아드에게는 묵향을 이용해야 한다는 목적이 있었기에 그렇게 강한 일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태껏 그래왔듯 묵 향에게 중상(重傷)을 입히기에는 충분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묵향에게 심각한 타격을 줬던 그 공격은 단번에 튕겨 나가 버렸다.
묵향의 몸에 차고 넘치는 그 엄청난 힘이 자연스레 묵향의 몸 주위에 보이지 않는 장막을 치며 보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묵향은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나이아드에게 당한 상처 곳곳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 그가 악귀와도 같은 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볼 만했다.
“네 녀석에게 복종할 바에는 차라리 죽겠다.”
그 말을 끝으로 묵향은 자신의 모든 축적된 힘을 발을 통해 대지에 쏟아 부었다. 묵향의 몸속에 축적된 힘은 그 어느 때보다 막대했고, 그것이 몽땅 다 대지의 기운 과 충돌을 일으켰으니 그 결과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콰콰콰콰…….
그야말로 엄청난 대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 강기의 회오리는 약동하는 대지 밑으로 흐르고 있던 마그마를 건드렸고, 엄청난 화산 폭발 까지 동반했다.
온몸의 기운을 폭발적으로 써 버린 묵향은 그야말로 자살 행위에 가까울 정도로 무리한 기의 운용으로 인해 심각한 내상까지 입고서 이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 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아직 묵향이 화산 폭발의 한가운데에서 살아 있는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그는 폭발적으로 자신의 공력을 발밑으로 뿜어냈고, 그 반동에 의해 몸이 하늘 위로 솟아 올라와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인간의 몸이 하늘을 날 수 없다는 간단한 자연의 법칙에 따라, 곧이어 용암이 흐르고 있는 저 불타는 대지를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하지 만 그에게는 더 이상 내공이 남아 있지 않았기에 그는 절망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앉아서 화산 폭발에 휩쓸려 죽을 수도 없었다. 그는 무리해서 주위의 기운을 빨아들여 비공술(飛空術)을 펼쳤다. 그에 따라 아래로 곤두 박질치던 묵향의 몸은 그 속도를 줄이는 것 같더니 다시 날아오르기 시작했고, 곧이어 속도를 얻어 화살과 같은 빠르기로 용암의 대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이어 진기가 역류하면서 묵향은 입으로 피를 뿜을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로 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라면 언제 절명해도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지독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그렇듯 무리한 공력 운용을 해댔으니 몸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의식의 끈이 거의 다 끊어져 가는 가운데 묵향 의 몸은 중심을 잃고 빠른 속도로 대지를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가물가물하는 의식 속에서도 묵향은 자신의 몸이 대지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는다면 죽음뿐이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손바 닥에 끌어 모았다. 대지에 격돌하려는 그 위험천만의 순간, 단전은 이제 텅 비어 버린 상황이었지만 그의 의지에 따라 기적적으로 주위의 기가 동조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묵향의 몸은 급속도로 감속하기 시작하더니 안전하게 대지에 안착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묵향은 의식을 잃었다.
“젠장할! 이렇게 지독한 놈은 내 평생 처음 보는군. 하지만 이제 네 몸뚱이는 내 것이야. 크하하핫!”
나이아드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의 그 웃음소리는 또 다른 목소리에 끊겨 버렸다. 그것은 아주 공허한 울림을 담고 있는 특이한 목소리였다. <누구 마음대로?>
서서히 한쪽에서 투명한 음영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나이아드는 뭔가 장난질을 치다가 들킨 아이마냥 깜짝 놀라서 외쳤다.
“어엇? 아리엘?”
<그렇다. 다른 차원에 있는 살아 있는 생명체를 이곳으로 끌어 오는 것은 금기된 사항이다. 너는 그것을 어겼어.>
나이아드는 주변을 휙 둘러보며 또 다른 정령왕의 존재를 가늠해 보며 아리엘을 향해 대꾸했다.
“그렇다면 이제 다 잡아놓은 먹잇감을 놔 주라는 말이냐?”
<그렇다.>
나이아드의 감각에는 땅 밑에 또 다른 한 명의 정령왕의 존재감이 잡혔다. 하지만 그것이 그를 더욱 안심시켰기에 나이아드는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핫. 그렇게는 못 하겠다. 아무리 그것이 금기라고 하더라도 나는 해야 하겠어. 이 녀석이 얼마나 강한지 여기로 끌고 오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거든. 다 오와 내가 세운 계획을 실행하려면 이 녀석이 꼭 필요하지. 안 그런가? 다오.”
그러자 땅속에서 정말 듣기에도 껄끄러운 꽉 쉰 듯한 텁텁한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나이아드의 말대로다. 아리엘, 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우리 둘을 이길 수는 없다.>
희미한 음영을 만들고 있던 아리엘은 순간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자신이 강하다고 해도 정령왕 둘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5대 정령왕의 힘은 거의 비슷비슷 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꺼져라. 네가 아무리 금기를 떠들어 대도 소용없어. 일단 이 녀석을 손아귀에 넣는 데 성공했으니까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있을 필요는 없어. 곧이어 놈 이 살던 세계로 돌려보낼 거다. 자네는 그때까지만 눈감아 주면 돼. 아주 잠시면 모든 일이 끝날 테니까 말이야. 흐흐흐.”
하지만 이번에도 나이아드의 웃음소리는 또 다른 목소리에 의해 가로막혀졌다. 그 목소리는 멀리 떨어지지 않은 대지를 흐르는 용암 속에서 울려 나왔다.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모처럼 카렐이 부탁했는데, 나는 그것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거든. 그리고 너는 금기를 어겼으니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동시에 하늘 위에서도 우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그래. 그 녀석을 돌려보내라. 우리 셋이서 너희들을 응징하기 전에.>
또 다른 정령왕 둘이 거의 근소한 시간차를 두고 약속이나 한 듯 등장했기에 나이아드는 당황했다. 이제 사태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2대 2로 싸워도 승리를 장담하 기 어려운 것이 사실인데, 2대 3이라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제기랄. 도대체 이 녀석이 뭐길래 정령왕 셋이서 이놈을 구출하려는 것이냐? 너희들은 그렇게도 할 일이 없냐?>
<일단 약속은 약속! 돌려보내라. 우리가 너희들을 죽이고, 너희의 뒤를 이을 정령왕이 탄생하도록 만들기 전에.>
아리엘의 말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다른 세계에서는 정령왕이 자신의 힘을 모두 사용하지 못한다는 금제가 붙지만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이점도 있었다. 하 지만 이곳 정령계에서라면 얘기가 다르다. 여기서는 모든 힘을 쓸 수 있지만 소멸당하면 그야말로 죽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령왕이란 것이 죽는다고 변하는 것은 없 었다. 정령왕이 사멸하고 나면 그를 대신할 또 다른 정령왕이 거의 순간적으로 태어나기 때문이었다.
“겨우 호비트 한 마리 때문에 그 오랜 세월 사귄 우리들을 없애겠다는 말인가?”
나이아드가 항변했지만, 그의 말은 이프리트에게 간단하게 묵살당했다.
<네 녀석이 언제 나하고 사귀었단 말이냐? 나는 언제나 꼴 보기 싫은 네 녀석이 사라지기를 원하고 있었어.>
이제 나이아드와 다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잘못하면 자신들이 무(無)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돌려보내자.>
다오의 체념적인 말에 나이아드는 화를 벌컥 냈다. 그냥 놔 주기에는 여태까지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닥쳐! 내가 이년을 어떻게 잡았는데 그렇게 쉽게 돌려보낸단 말이야?”
<그렇다면 너는 무로 돌아가고 싶나? 선택하라!>
이프리트의 최후통첩에 나이아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로서도 더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데리고 가라!”
<잘 생각했다, 나이아드여.>
“젠장! 언젠가는 너희들에게 복수하고야 말겠다.”
나이아드는 자신이 오랜 시간 공들여 이룩한 것이 완전히 물거품이 된 것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며 그 존재감을 지워 버렸고, 곧이어 땅 밑에서 느껴져 오던 기척 또한 함께 사라져 버렸다. 두 정령왕이 사라지자 아리엘은 거의 시체처럼 창백하게 쓰러져 있는 벌거벗은 청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아직 죽지는 않았군.>
아리엘은 투명한 자신의 손을 호비트 청년에게로 뻗어 그를 안아 들었다. 아리엘의 몸이 원체 투명했기에 청년은 축 늘어진 채 저절로 공중에 떠오르는 것처럼 보 였다. 아리엘은 청년을 안아 들자마자 아르티어스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차원 이동을 감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