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0권 7화 – 소년 첩자 제스터
소년 첩자 제스터
“부르셨사옵니까? 공작 전하.”
로체스터 공작은 자신의 방에 들어서는 두 젊은이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들 중의 한 명은 까미유 드 크로데인 후작이었고, 또 한 명은 이제 16세 정도나 됨직해 보 이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그래, 거기 앉거라.”
“예.”
“옛!”
까미유는 느긋한 표정으로 앉았지만, 코린트 제국의 최고 사령관을 처음 대하게 된 소년의 안색은 긴장으로 인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소년을 로체스터 공 작은 인자한 눈빛으로 바라본 후, 시선을 까미유에게로 돌려 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는 소년이 긴장을 풀기 위한 시간을 줘야 한다고 판단했기에, 소년과는 나중에 대화할 생각이었다.
“경을 부른 것은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어서야.”
“명령만 내리시옵소서.”
까미유의 말에 공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명령을 하는 것은 아니야.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마도 자네가 제일 적임자인 것 같아서 불렀지. 크로나사 평야에 가 볼 생각은 없나?”
“예? 드디어 다리엔 후작이 물러난 것이옵니까?”
“아니야, 남부집단군의 총사령관은 아직도 다리엔 후작이다.”
까미유는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명령이 아니시라면 거절하겠사옵니다. 저는 투르넨 후작처럼 다리엔 후작의 밑에 있고 싶은 생각은 없사옵니다.”
그 정도는 미리 예상했다는 듯이 로체스터 공작이 신중한 어조로 답했다.
“물론 그 경우도 생각해 봤었네. 하지만 자네의 지체나 현재의 직위, 그리고 능력으로 봤을 때 절대로 다리엔 후작의 밑에는 들어갈 수 없지. 이번에 제2근위대의 대장이 된 자네를 어떻게 다리엔 따위의 밑에 둘 수 있겠나? 자네를 그곳에 파견하는 것은 다리엔 후작이 요청해서가 아닐세.”
크루마 전쟁이 끝난 후 근위 기사단에도 상당히 많은 개편 작업이 진행되었다. 우선 두 개 부대로 나누기에는 턱도 없이 모자라는 흑기사들을 모두 한 곳에 모아 제1근위대로 만들었다. 그런 후 로체스터 공작은 대장으로 까미유를 지명했다. 물론 전사해 버린 리사에 대한 우정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 인사였다. 하지만 한 곳에 얽매이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까미유는 공작에게 찾아가 그 명령을 철회해 달라고 청을 올렸고, 그 때문에 제임스가 제1근위대의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제임스의 적기사는 프로토타입이었기에 자아가 아주 강해서 매우 다루기가 까다로운 녀석이었고, 또 이번 전쟁을 통해 적기사의 존재가 완전히 드러난 이상 구태 여 제임스와 적기사를 갈라놓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 로체스터 공작은 제임스를 적기사와 함께 제1근위대로 보내 버렸다.
그리고 이제 적기사가 두 대밖에 남지 않은 제2근위대의 대장으로 까미유를 임명했다. 겨우 두 대뿐이라고는 하지만 제2근위대의 대장이라는 직책이 대단히 높은 것은 사실이었고, 그런 그가 겨우 다리엔 따위의 밑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의문을 표시하는 까미유를 향해 로체스터 공작은 자애로운 미소를 보냈다.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이 없는 그에게 까미유나 제임스는 아들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혹독한 검술 교육이 싫다고 야밤에 도망쳐 버린 아들 따위는 이제 더 이상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자존심이 강한 무인이었기 때문이다. “내 독단이야. 자네에게 몇 명 붙여 줄 테니까 크로나사로 가서 전세의 추이(推移)를 지켜봐 주게. 크루마군이 크라레스 전선에 투입되었다는 보고를 며칠 전에 들 었지. 크루마의 기사단이 움직인 것은 아니고, 보병만 10개 사단 정도 보내 온 모양이야.”
“10개 사단이나 말씀이옵니까?”
까미유는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10만이라는 병력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로체스터 공작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네. 그 때문에 다리엔 후작의 작전에는 막대한 차질이 왔고, 지금 상당히 밀리는 모양이야. 오죽하면 그로체스 공작이 더 많은 병력을 그쪽으로 돌려 달라고 폐하께 상소를 했겠나?”
“그렇다면 독립 부대 형식으로 파견되어 다리엔 후작을 도우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아니야. 도와줄지 그렇지 않을지는 자네의 판단에 맡기겠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충분히 공작의 ‘요청을 들어줄 수도 있었기에 까미유는 세부 사항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공작 전하께서 원하시는 바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야 저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기준을 세울 수가 있사옵니다.”
“나는 그로체스 공작이 망상을 버리고 군부의 일에서 손을 떼기를 원하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사단이 크라레스와의 전쟁에서 너무 많은 피해를 입기를 원하
는 것도 아닐세. 무슨 말인지 알겠나?”
“예.”
“그것뿐이라면 나는 제임스를 보냈을 거야. 자네나 제임스, 둘 중의 한 명은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해. 그런데 왜 자네를 택했는가 하면, 첫째는 크라레스에 있는 그 소녀에 대해 자네가 제임스보다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둘째는 제2근위대장인 자네가 몸을 빼기가 훨씬 더 수월할 것 같아서야. 제임스는 수도 를 방위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하니까 말일세. 전에 그녀가 혹시 헤즐링이 아닐까 하는 귀중한 정보까지 자네가 입수했으니, 그 뒤도 자네가 책임져야 하지 않겠나?”
“예.”
까미유가 수긍하고 나오자 공작은 이제 시선을 그와 함께 들어온 소년에게로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 너를 부른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란다.”
소년은 로체스터 공작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기에 용기를 얻었다.
“예, 전하.”
“너는 어린 나이에도 제법 검술 실력이 괜찮다지?”
물론 그 소년의 검술 실력은 발군의 것이었다. 하지만 겨우 16세의 소년이 검술을 익혔으면 얼마나 익혔겠는가? 자신의 또래 중에서는 상당히 앞서가는 위치였지 만 그래도 검술을 제대로 익히려면 최소한 20년 이상 더 검술을 익혀야 했다. 소년도 자신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겸손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공작 전하께서 자 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매우 기분이 좋아진 상태였다.
“전하께서 관심을 쏟으실 정도는 결코 아니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오래전이기는 했지만 자신에게도 저 소년과 같이 자신의 자그마한 검술 실력을 남이 알아주면 우쭐했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 다.
“물론 그것은 나도 잘 알고 있지. 이게 방금 까미유와 말했던 소녀의 초상화다. 잘 기억해 둬라. 연약하게 생긴 소녀지만 그녀의 신분은 대단하지. 급속도로 진급해 서 지금은 공작의 칭호를 받은 소녀다.”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던 소년은 로체스터 공작의 설명을 듣고 초록색의 눈동자를 크게 뜨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초상화에 그려진 가냘픈 소녀를 다시 한 번 더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초상화를 뜯어 봐도 자신의 또래 정도로 보였기에 소년은 매우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바로 이 소녀,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은 지금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다. 치레아 지구 총독인 만큼 그녀는 크라레스 공격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있지. 일단 조치 는 취해 놨으니까 자네는 그곳에 가서 소녀와 그녀가 접촉하는 인물들을 잘 감시해야 할 거야.”
소년은 초상화에서 시선을 돌려 로체스터 공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것이 제 임무입니까? 하지만 저는 너무 어리고 경험도 없습니다. 그리고 검술도 저보다 능한 사람이 많은데요?”
소년으로서는 대단히 겸손하게 말한 것이었다. 웬만한 소년들이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이 좋은 기회를 자신이 해낼 수 있을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덥석 허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의 이런 깊은 생각이 담겨진 말에 공작은 미소 지었다.
“그렇지는 않지. 아무래도 첩보 교육을 받은 인물들은 자신들이 교육받은 습성 때문에 들킬 확률도 높아지지.”
물론 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정식으로 정보부에 도움을 청한다면 그 자료는 그로체스 공작에게도 보고 될 가능성이 아주 높기에 이번 작전은 로체스터 공작이 비 밀리에 독단으로 세운 것이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경험을 쌓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네. 자네는 이 일을 기회로 아주 많은 색다른 경험을 쌓을 수 있을 거야. 또 가장 중요한 사실은 닭 한 마리 잡 을 힘이 없어 보이지만 그 소녀는 소드 마스터야. 키에리를 격패시킨 장본인이 바로 그 소녀라구.”
소드 마스터에다가 그 소년이 가장 존경했던 키에리 발렌시아드 대공을 격패시킨 장본인이라는 말에 소년은 경악했다.
“예에?”
“그녀라면 상대가 어느 정도나 무술을 익혔는지 아주 간단하게 알아볼 수 있겠지. 그 때문에 너를 선택한 거야. 너는 아직 어리고 검술도 미숙하지. 하지만 그녀의 주위에 침투시키에는 매우 적합해. 이제 네가 선택된 이유를 알겠느냐?”
“예에.”
“아마 네가 열성을 다해서 그녀를 위한다면, 그녀는 너에게 자그마한 상을 내릴지도 모르지. 자질이 뛰어난 너를 선택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 그녀가 너의 재능을 알아본다면 아마도 검술을 가르쳐 줄지도 몰라. 그것을 열심히 익혀라. 너에게도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을 통해 그녀가 누구에게서 검술을 배웠는지 알아내는 데도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야. 알겠느냐?”
“옛, 공작 전하.”
“될 수 있다면 그녀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입수하면 좋겠지만, 쓸데없이 정보를 입수한다고 돌아다니지는 마라. 그래야 의심을 받지 않는다. 너를 그녀의 주위에 배치하는 것은 상대방의 작전 따위를 훔치려고 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야. 너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중을 들면서 그녀가 접촉하는 사람들을 슬그머니 살펴봐라. 그녀가 누구를 가장 좋아하는지 그걸 알아 보라는 말이다.”
“예.”
“그녀가 크라레스를 돕는 이유가 어떤 사람을 좋아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그것만 알아 보면 된다. 그러려면 너는 그녀와 아주 친해 져야만 해. 군의 기밀 따위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니까 슬며시 시간과 장소만 잘 맞추면 손쉽게 말해 줄 가능성도 있다.”
“알겠습니다, 전하.”
“까미유 자네는 제스터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비밀리에 도와줘라. 그리고 제스터와 나 사이에 연락을 담당해 주면 좋겠군.”
“옛,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