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0권 9화 – 말토리오 산맥의 침입자들

말토리오 산맥의 침입자들

드넓은 엘프리안 아카데미 연병장의 한쪽 구석에서 검술 교육을 받고 있는 일단의 젊은이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던 미네르바는 손을 들어 한 소년을 가리키며 말 했다.

“저 아이가 크라레스의 제1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엘리안 폰 그래지에트 왕자인가?”

미네르바의 물음에 노마법사는 재빨리 대답했다.

“옛, 전하.”

“제법 쓸만해 보이는군. 그래 실력 테스트 결과는?”

“대단히 우수하옵니다. 이곳으로 오면서 많은 정예 무사들을 거느리고 왔었지만 정작 아카데미에 입교하면서 두 명의 시종을 제외하고 모두 다 돌려보냈사옵니 다.”

미네르바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제법 배짱이 있군.”

“예, 전하. 그 시종들은 중년의 부부인 것으로 조사되었사온데, 열과 성을 다해서 왕자를 모시고 있었고 왕자 또한 그들을 대단히 세심하게 배려해 주고 있는 것으 로 알고 있사옵니다.”

미네르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군.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배려할 줄 모른다면 이미 윗사람으로서의 자격 미달이지. 꽤 탐나는 인재야.”

“아무리 탐나는 인재라도 적국의 왕자인지라……?”

“그건 별로 이유가 안 되지. 그건 그렇고 대인 관계는 어떻던가?”

“예, 잘생긴 외모에 동맹국의 왕자라는 직위, 거기에다가 세련된 매너로 다른 학생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있사옵고, 벌써 친구도 몇 명을 사귄 것으로 알고 있사 옵니다.”

“호오, 대인 관계까지 원만하시다 이거군. 일국의 왕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놈이구먼. 프랑크 황제에게는 왕자가 저 녀석 하나뿐인가?”

“아니옵니다, 한 명 더 있사옵니다.”

“그래? 그 녀석은 어떻다고 하던가?”

“예, 첩보부의 조사 결과로는 성격이 완전히 정반대라고 하옵니다. 사색과 책 읽는 것을 좋아해 심성이 착하지만 유약한 젊은이온데, 낯가림이 심하여 사람을 잘 사귀지 못한다고 들었사옵니다.”

미네르바는 혀를 찼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동정을 나타내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게 잘되었다는 듯 기분 좋은 미소까지 어려 있었다.

“쯧쯧…, 그런 녀석은 일찍이 도태시켰어야지. 아니면 때려잡아서 교육을 좀 더 강압적으로 시켜 놓던지.”

“예, 그게 아무래도 형이 너무 잘나가는 바람에 그에 따른 열등감, 그리고 타고난 성격도 있고, 뭐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서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던 모양이옵 니다. 최근에 엘리안 왕자가 황태자로 책봉되면서 제2왕자에게는 아예 황위 세습에 대한 교육을 중지한 것으로 보고받았사옵니다.”

“정말인가?”

미네르바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웬만한 제국들의 경우 세 명에서 다섯 명 정도의 황위 계승자를 교육시킨다. 물론 그들 중에서 정식 황위 계승권을 지닌 인물 은 두세 명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두세 명을 더 기르는 것이다. 황제로서의 예비 교육을 받았지만 황제가 되지 못한 인물들은 대부분 황실의 중신 (重臣)으로 성장할 정도로 그 교육은 대단히 치밀하고도 어려운 것이었다.

거기에다가 그들은 장차 황제가 될 인물과 함께 교육을 받으며 자라기에 서로 간의 우정을 나눌 기회도 많았다. 그 때문에 뛰어난 황제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신하 와 친구인 경우도 흔했던 것이다.

“예.”

“으음, 그 부분을 철저히 조사해라. 그리고 만약에 불행한 사고에 의해 제1왕자가 황위를 계승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누구에게 황위가 갈 것인지에 대한 조사도 병행하도록 해. 알겠나?”

“옛, 전하. 그런데 그것은 갑자기 왜?”

“몰라서 묻나? 지금은 크라레스가 우방이라고 하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프랑크 황제야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해도, 제1왕자가 우리 손 아귀에 들어와 있는데 그냥 교육 잘 시켜서 돌려보낸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

미네르바의 말에 상대도 슬쩍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엘리안 왕자의 여자관계도 철저히 조사하도록 하게. 만약 여자 친구가 없다면 하나쯤 만들어 붙이는 것도 좋겠지. 물론 인위적으로 맞출 생각은 하지 말

고 엘리안 왕자가 사귀는 친구들의 여동생이라든지, 또는 같은 아카데미 안의 여학생들과 사귈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라는 말이야. 알겠나? 예를 들어서 본국 으로 귀환하기에는 모자라지만 친구 집에 가서 놀기에는 충분한 정도의 휴가를 준다든지, 아카데미 내에서 전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무도회를 개최한다든 지, 뭐 그런 식으로 말이지. 청춘 남녀들이란 것은 대충 사귈 여건만 마련해 주면 나머지는 자기들이 알아서 타오르게 되어 있으니까 너무 인위적으로 짝을 붙일 필 요까진 없어.”

“알겠사옵니다, 전하.”

“실수 없이 잘해야 하네.”

재삼 당부하는 미네르바에게 노마법사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맡겨 주시옵소서, 전하.”

아르티어스라는 망할 드래곤에 대한 수색 작업은 정말 치가 떨릴 정도로 어려웠다. 엄청난 면적에 걸쳐 촘촘하게 깔아 놓은 마법 트랙들. 그것도 험준한 말토리오 산맥 안에 깔려 있었기에 일단 그 안에 들어서면 어디가 어딘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는 관계로, 마법 트랙이 좀 더 세밀하게 깔린 곳이라든지 뭐 그런 생각으로 찾 아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 덤빌 때만 하더라도 그렇게 아르티어스의 영역이 넓은 줄 몰랐던 일행들은 인식을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법 트랙이 깔려져 있는 면적을 기반으로 추 리해 봤을 때 아르티어스의 영토로 짐작되는 면적은 무려 반경 20킬로미터에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린레이크는 부하의 보고를 듣다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뭔가 인식의 전환이 필요했다. 이렇게 무작정 찾아서는 아무리 많은 시간이 있다고 해도 모자랄 지경이 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1년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서는 몇 달이 지나더라도 찾을 수가 없겠다. 일단 지도를 가져오너라.”

그린레이크의 말에 기사는 재빨리 자신의 주머니를 뒤져 고급 양피지로 제작되어 있는 지도를 꺼내어 상관에게 건넸다.

“여기 있사옵니다, 전하.”

그린레이크는 지도를 펴 놓고 한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이곳이지?”

“예, 그렇사옵니다, 전하.”

“그리고 탈출용 마법진을 준비해 둔 곳이 이곳들일 거야. 그렇지?”

“그렇지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말이야. 아르티어스의 영토는 엄청나게 넓어. 내 기억에는 반대편 마법 트랙이 끝나는 곳이 여기니까 일직선 거리로 따져도 40킬로미터에 가 깝다는 거지. 아르티어스의 영토가 얼마나 넓은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마법 트랩이 깔려 있는 곳만을 잡아내자 이거야. 그것도 알기 쉽게 마법 트랩이 끝나는 경계 선만을 계속 연결한다. 그렇게 되면 대충 이런 모양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면서 그린레이크는 지도 위에 큼직하게 원을 그렸다.

“이렇게 외곽이 잡히고 나면 아마도 드래곤의 레어는 이 영토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지 않을까?”

부하도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면서 상관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다면 의외로 간단하게 알아낼 수 있겠군요.”

“그렇지. 일단은 외곽 경계선을 정확하게 알아내라. 그렇게 되면 지도를 통해서 중앙 부분을 정확하게 잡아낼 수 있겠지. 그런 후 중앙을 기점으로 집중적으로 찾 는다면 시간이 조금은 단축될 것 같아.”

“옛, 즉시 시행하겠사옵니다, 전하.”

시종이 쟁반에 레드 드래곤과 컵 두 개를 담아 가져왔다. 다크는 이번에 새로 시종이 된 소년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아주 눈치가 빠른 데다가 꾀부리지 않고 열심 히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크는 소년에게 방긋이 미소를 보냈다.

“수고했다.”

시종에게 간단하게 고마움을 표시한 후 다크는 레드 드래곤을 한 컵 가득히 부어서 아르티어스에게 건넸다. 아르티어스는 술잔을 들어 향기를 쓱 맡아 본 후 인상 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아르티어스는 이렇게 강한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술 말고는 안 마시는 거냐?”

“그것밖에 없으니까 할 수 없죠. 디지드는 다 마셔 버렸잖아요?”

“디지드? 우욱!”

아르티어스는 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며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말했다.

“디지드보다는 이게 낫지. 아니, 내 말은 이거 말고 좀 순한 술은 없냐는 거지.”

아르티어스의 투정에 다크는 간단하게 자신의 술에 대한 취향을 피력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좋아하는 술을 따로 확보할 정도로 세심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의 의견은 바로 이거였다. 싫으면 안 마시면 되지.

“술이야, 찌르르 울리는 그 맛에 마시는 거지 뭐 딴 이유가 있어요? 안 그래도 이것도 별로 남아 있지 않으니까 마시기 싫으면 관둬요.”

“아니, 마실게. 마신다구.”

레드 드래곤을 한 모금 마신 후 컵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아르티어스가 심각하게 말했다.

“으음, 느낌이 좋지 않아.”

“예? 술맛이 이상해요? 아니면 제가 그 안에 독이라도 넣었다는 거예요? 으음, 드래곤이 쪼잔하게 독을 겁내요?”

“그 말이 아니야. 레어 주위에 접근하는 녀석들 말이야. 처음에는 화전민(火田民) 정도인 줄 알고 놔뒀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이제는 아주 레어 근처까지 다 가왔어.”

“도둑인가요?”

“글쎄, 그건 가 봐야 알겠구나.”

다크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잘 다녀오세요.”

하지만 아들의 대답이 아르티어스에게는 의외라는 듯 그는 급히 반문했다.

“뭐? 애비가 가는데 너는 함께 안 갈 거냐?”

“제가 왜 가요?”

“애비의 집이 털릴지도 모르는 이런 중대한 사건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하나뿐인 아들 녀석이 나 몰라라 하다니 이럴 수가 있는 거냐?”

“그럴 수도 있죠. 황금도 엄청나게 많던데, 조금 나눠 준다고 해서 뭐 그게 대수인가요?”

“내가 황금 때문에 이러는 줄 아느냐? 드래곤의 둥지인 줄 뻔히 알면서 접근해 왔다면 그 목적은 뻔하지. 하나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꿈꾸는 멍충이들이고, 또 하나 는 마법이야.”

“마법이요?”

“그럼, 레어에는 내가 연구하던 마법서들이 가득 쌓여 있는데, 그걸 훔치려고 들어온 거야. 말토리오에 둥지를 튼 후 3천5백 년 동안 내 둥지에 접근해 온 녀석들 의 목적은 그 둘 중 하나였어.”

“글쎄요. 그렇다면 처음 하신 말하고 약간 앞뒤가 안 맞는데요? 드래곤 슬레이어라면 최소한 둥지가 털릴 염려는 없잖아요. 주인이 없으면 그냥 돌아가지 않을까 요? 오래전에 드래곤을 잡으려는 사람들을 봤는데, 그들의 목적은 황금이나 마법책 따위가 아닌 드래곤 자체였다구요. 아버지는 여기 있는데 뭐가 걱정이세요?” 아들의 말이 대충 맞는 것 같았기에 아르티어스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말이 그렇게 되나? 아니잖아! 내가 없다면 빈집을 털어 갈 가능성도 있다고 봐야지. 갈 거야 말 거냐? 솔직히 할 일도 없잖느냐? 이렇게 애비가 부탁하는데 할 일 도 없으면서 안 가겠다는 거냐?”

아르티어스가 이렇게 사정조로 나오면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예, 따라가 드리죠.”

다크는 자신이 응답함과 동시에 눈앞이 희뿌예지는 것 같더니 돌연 눈앞의 사물이 명확하게 보이면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의자에 앉은 자세 그대로 의자를 놔둔 채 공간 이동을 했으니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윽!”

주저앉은 채로 주위를 둘러보니 과거 아르티어스와 단란하게 지냈던 바로 그곳, 아르티어스의 레어에 자신이 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그때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먼지가 조금 쌓여 있었다는 점만 빼고 말이다.

‘그때는 열심히 청소를 했었는데…’하는 기억이 떠올랐고 추억 어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르티어스가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방금 전에 자신이 엉덩방아를 찍었다는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말을 하고 공간 이동을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짜증스럽게 말하는 아들에게 아르티어스는 멋쩍은 웃음을 흘려 댔다.

“헤헤…,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이동한다는 것이 그만 그렇게 되어 버렸구나. 미안하다, 얘야.”

아르티어스는 손을 뻗어 다크가 일어서는 것을 도와줬다.

“정말 오랜만이지? 너와 처음 만난 게 엊그제처럼 느껴지는데…….”

아르티어스가 이렇게 감상적으로 나오면, 일이 빨리 진척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다크는 모질게 말을 끊었다. 아르티어스에게는 시시때때로 자신들이 거 기에 왜 있는지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수명이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이 드래곤들은 게을러 터져서 오늘 못 하면 내일 하면 된다는 신념을 가진 족속들이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해치우고 돌아가자구요. 참, 식사도 대충 하셨는데 디저트로 드시는 것은 어때요?”

아들의 무지막지한 말에 아르티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가끔씩 아들 녀석과 함께 살면서 느끼는 의문이 또다시 일었다.

“너 정말 호비트 맞냐?”

“물론이죠. 도와 드려요?”

“아니, 도와줄 필요는 없을 게다.”

슬쩍 아르티어스가 튕겼다. 물론 여기까지 따라왔으면 도와주려고 들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아들 녀석은 언제나 그렇듯 자신이 마지못해 도와준다는 듯 말을 이 었다. 짜식! 자기도 한판 하고 싶으면서 말을 돌려 대긴…….

“함께 가 드릴 수는 있지만, 그걸 나눠 먹지는 못해요. 내가 먹지 않는 유일한 동물이 ‘인간’이니까.”

“그렇다면 도와주려고?”

“아뇨, 드래곤이 사람 먹는 것은 한 번도 못 봤거든요. 꽤나 자극적일 것 같은데…….”

“으이그…….”

그린레이크는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수색이 며칠째 계속되고 있었고, 또 아르티어스의 영역도 엄청나게 넓었기에 그들은 지금 영역의 중앙 부분에 천막을 쳐 놓고는 임시 지휘소로 삼고, 주위를 철저하게 수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임시 지휘소의 왼편에 위치하고 있던 산비탈의 한쪽이 사라지면서 거대한 레어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두 명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감히 어떤 놈들이 나의 단잠을 깨우느냐?”

아르티어스가 호기스럽게 외치자 다크가 옆에서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언제 잠을 잤다고 그래요? 지금 막 도착해 놓고는…….”

“원래 다 그렇게 말하는 거야. 그래야 저놈들이 내가 언제나 여기에 있는 줄 알지.”

“그건 사기잖아요?”

“사기가 아니라는데도 그러는구나.”

그린레이크는 낮은 목소리로 아웅다웅하는 두 남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부하들이 저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이미 그걸 듣고 있었던 것 이다.

그 모습을 보고 처음에 호기스럽게 외쳐댔던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미청년이 그 포악한 드래곤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애써 그 의 문을 쫓아 버리며 정중하게 말했다.

“위대하신 골드 일족의 후예이시여. 저희들이 이곳에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청이 있어서…….”

물론 그린레이크는 서로 대화를 터 보자고 입을 연 것이었는데, 이것이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다. 아들하고 얘기한다고 정신이 팔려 자신이 원래 이곳에 온 목적을 망각하고 있던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상대의 그 말에 제정신을 차렸던 것이다. 일단 제정신을 차리자 아르티어스는 더 이상 다정다감한 청년처럼 보이지 않았다.

한 번만 봐도 오금이 저릴 것 같은 싸늘한 표정에, 무시무시한 위화감을 뿜어내는 저 광폭한 눈동자. 아르티어스는 지독할 정도로 싸늘한 어투로 그린레이크를 향 해 말했다.

“청? 헛소리하지 마라. 내 영토에 들어온 대가는 잘 알고 있겠지?”

‘갑자기 분위기가 이렇게 바뀔 수 있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은 짧았다. 대신 그린레이크는 상대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상기하며 재빨리 말했다. 이 때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예? 황금 말씀이십니까? 여봐라, 빨리 준비해 둔 선물을 가져와라.”

그린레이크의 부하 몇 명이 천막으로 큼직한 선물 궤짝을 가지러 갔지만, 그린레이크의 예상과는 달리 아르티어스에게는 그따위 선물이 필요 없었다. 그에게 필요 한 것은 바로 이놈들이 이곳에 다시는 얼씬도 못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현실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크흐흐흐, 누가 황금 따위를 말하는 것이냐? 대가는 목숨이다.”

아르티어스가 맹렬한 속도로 주문을 외우며 손을 천천히 위로 쳐들자 두 손에서 불그스름한 방전(放電)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린레이크는 순간 경악했다. 저렇 게 순간적일 정도의 짧은 시간에 8사이클급 대인 공격 마법 중에서 최강의 위력을 지녔다는 금지된 마법을 구사할 줄이야…….

“헬파이어다. 모두들 도망쳐라.”

그린레이크는 재빨리 외치고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기사들과 마법사들도 뒤로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드래곤답 게 8사이클급 주문을 엄청난 속도로 완성해 버리고 말았다. 물론 본체로 돌아간 상태였다면 주문 따위 외울 필요도 없었을 테지만, 호비트의 모습으로 트랜스포메 이션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그건 어쩔 수가 없었다.

“헬파이어!”

공간을 찢어발기며 거대한 붉은 빛줄기가 날아갔다.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사방으로 분산해서 도망쳤기에 그 마법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것은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르티어스도 이들을 모두 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 몇 명은 시범 케이스로 통구이를 만들 필요가 있었지만, 일부는 살아 돌아가서 아르티어스란 드래곤의 포 악함과 무시무시함을 선전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다시는 찾아올 놈이 안 생길 테니까.

헬파이어는 정확히 그린레이크 쪽으로 날아갔지만 그는 극한의 마법 방어막과 회피 기동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대 폭발의 소용돌이 속에서 튕겨나자마자

그는 약속된 장소로 달려갔고, 그와 동시에 부하들은 공간 이동해 버렸다.

다크는 붉은 빛줄기가 산의 한쪽 귀퉁이를 박살 내며 대 폭발을 일으키고 있는 모습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검술이란 정밀도로 승부하는 것이지 이렇듯 무식 할 정도로 강력하지는 않았다. 전에 봤던 유성 소환도 엄청났고, 이번에 보는 헬 파이어도 마찬가지. 마법에 대한 그녀의 인식을 바꾸기에 충분한 위력이었다. “정말 대단하네요. 이게 무슨 마법이죠?”

아들의 물음에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헬파이어라는 거다.”

“나한테는 이런 강력한 마법을 한 번도 가르쳐 준 적이 없었잖아요?”

“가르칠 수가 없었지.”

“왜요?”

“너는 8사이클급 마법을 그렇게 쉽게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방금 그게 8사이클 마법이에요?”

“그럼. 저 정도 마법을 혼자서 구사할 수 있는 호비트는 없지. 엘프라도 불가능해. 오직 우리 드래곤만이 가능하지. 흐헤헤헤..

자만심에 가득 차서 음흉스런 웃음을 터뜨리는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다크는 한소리 쏘아 주고 싶었지만, 일단은 한 가지 목적이 있었기에 참고 물어봤다. “저도 불가능해요?”

물론 대충 찔러 본 말이었지만, 아르티어스의 대답은 다크로서는 의외의 것이었다.

“아니, 너는 가능하지.”

“하지만 배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겠죠?”

“아니,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지도 않지.”

아르티어스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다크는 해실해실 미소를 지으며 반쯤은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자신이 아무리 나이가 많은 노고수라고 해도 이런 치매 드래곤 과 함께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좀 더 손쉽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했고, 또 자연적으로 습득하게 됐다.

“헤헤, 그럼 가르쳐 줘요.”

아르티어스는 아들을 미소 띤 표정으로 바라봤다. 홀딱 빠질 것 같은 아들의 연기력에 그만 가르쳐 주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뻔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그것을 초인적인 인내로 참아 냈다. 이번 것은 그렇게 쉽게 넘어갈 정도로 가치 없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금만 더 사탕발림을 한다면 좀 더 나은 대가를 받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강한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들 녀석의 성격을 자신이 거의 꿰뚫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으니까.

“물론 가르쳐 주지. 단, 지금부터 계속 아버지가 아니라 아빠라고 부른다면.”

“끄응…….”

고민에 빠져 있는 아들을 향해 아르티어스는 열심히 설득 작전을 전개했다.

“방금 그 마법은 정말 대단한 위력이란다. 작은 도시 정도는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릴 수 있는 위력이 있지. 그런 엄청난 힘을 가지고 싶지 않냐? 모든 마법사들의 꿈 이 저 마법이란다. 어때? 괜히 오기부리지 말고 허락하지 그래?”

“그거 말고 딴 조건은 안 돼요?”

“으음,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잠자기 전과 후에 뽀뽀 한 번씩.”

혐오감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아들이 재빨리 답했다.

“으엑, 그것보다는 아빠가 좋겠어요.”

“좋아, 허락하는 거냐?”

“으음, 그런 거 안 배워도 나는 충분히 강한데, 그런 게 과연 필요할까?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봐야…….?

그런 아들을 보며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재빨리 말했다. 이런 너구리를 넘기려면 생각할 시간을 줘서는 안 되는 것이 철칙이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네 무술은 아주 대단하기는 하지만 저 정도 위력은 없잖냐? 그리고 이건 아주 장거리 공격도 가능하지. 살다 보면 이렇게 강력한 게 필요할 지도 몰라. 안 그러냐? 평상시에는 생각도 안 하면서 웬 생각하는 척을 하려고 그러냐? 그냥 네가 원하는 대로 해. 겨우 ‘아빠’라는 말하고 최강의 힘을 맞바꾸는 거 야. 어때? 이런 기가 막힌 거래는 평생에 한 번 걸릴까 말까 한 거란다.”

결국은 아르티어스의 꼬임에 넘어간 다크. 깊이 생각하지 않는 성격인 만큼 일단 마음을 정하자 대답도 시원스러웠다.

“좋아요, 허락하죠.”

“으헤헤헤, 약속한 거다.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야.”

“누가 아버지 같은 줄 알아요?”

“아버지가 아니라 아빠라니까?”

“좋아요. 누가 아빠 같은 줄 알아요?”

“글쎄, 네가 자주 하는 말 있잖아. 그건 거짓말이었어’라고 둘러댈지 누가 알아?”

“기억력도 좋아요. 이건 정말이에요, 아빠!”

아빠라는 발음이 약간 이빨 갈리는 듯 들리자 아르티어스는 투덜댔다.

“그런 어조도 안 돼. 밝고 부드럽게 아빠.”

“좋아요, 아빠.”

“흐흐흐. 그럼 이제 전수를 해 주마. 일단 네 검을 뽑아라.”

“….”

마법을 가르쳐 준다고 하고는 갑자기 검을 뽑으라고 하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검을 뽑아 들며 다크가 물었다.

“이렇게요?”

“그래, 그렇게 한 후에 목표물을 정해서 검을 겨눠.”

“이렇게요?”

“그래. 그런 후 최대한 마나를 검 속에 밀어 넣으면서 외치는 거야. ‘헬파이어’라고 말이지.”

“헬파이어!”

그와 동시에 붉은 빛줄기가 뿜어져 나갔다. 다크는 자신이 검 속에 밀어 넣은 것 외에도 엄청난 양의 기가 검 속으로 순간적으로 흡수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기겁 을 했다. 하지만 예전에 마력검을 사용할 때 검 속으로 기가 흡수되었던 것이 떠오르자 그 놀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자신의 검에 엄청나게 많은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예사로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막강한 마법이 숨겨져 있었다니.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어때?”

아르티어스는 또다시 자신의 영토 한 귀퉁이가 묵사발이 된 것이 가슴 아팠지만 그걸 억누르며 아들에게 물었다.

“약간 피곤해요. 마나의 소모가 엄청나네요.”

“물론 엄청나지. 아무리 너라도 그걸 한꺼번에 세 번 이상 사용하기는 힘들 거야.”

“글쎄요. 그건 그렇고 일 끝났으면 돌아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