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2권 15화 – 코끼리도 잡을 수 있는 독약

코끼리도 잡을 수 있는 독약

호화로운 근위기사단 복장을 하고 있는 기사에게 안내되어 식당으로 들어섰을 때, 그곳에 미네르바가 기다리고 있었다. 매우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거대한 식 당에는 오직 한 개의 넓은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바로 이곳이 미네르바가 단장급의 고위 기사들과 만찬을 즐기는 장소였다. 미네르바는 식당 앞에 서 있던 경비병 이 “치레아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하고 보고하자,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문 앞까지 마중을 나왔다.

“경은 나가 보게.”

“옛, 전하.”

미네르바의 지시에 이곳까지 다크를 안내해 온 기사는 인사를 한 후 즉시 뒤돌아서서 돌아갔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자, 이리로…….”

미네르바는 다크에게 직접 자리를 권한 후 옆에 하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의자까지 밀어 주는 필요 이상의 친절을 보였다.

“식사를 가져오너라.”

“예, 전하.”

시녀가 인사를 한 후 물러나자 미네르바는 한껏 표정을 부드럽게 하여 말을 걸었다.

“그래, 무슨 일로 왔지?”

“잘 알 텐데, 왜 물어?”

“잘 모르니까 묻지. 이쪽은 미란을 정복한다고 바빠서 다른 나라의 일에 신경 쓸 정도로 한가하지 못했다구.”

“좋아, 내가 온 목적은 동맹이야.”

물론 미네르바는 다크가 이쪽으로 온 목적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덜컥 좋다고 답하고 앉아 있을 미네르바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미네르바의 입장에서 봤을 때, 코린트보다도 더 위험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적은 다크였으니까…….

“동맹이라……. 크라레스도 꽤 힘든 모양이군. 미란의 일을 따지러 온 줄 알았더니 동맹이라 이거지? 하지만 사람을 잘못 부른 거 아니야? 나는 군대를 총괄할 뿐 이지 외교는 내 소관이 아니라구. 가레신 후작을 불러 줄 테니 그와 상담을 하는 것이 좋을 거야.”

“이봐, 나는 크루마의 총사령관의 힘이 그렇게 형편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그렇게 빼지 말고 같이 대화를 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편이 서로에게 득이 될 텐데 말이야.”

“망해 가는 크라레스하고 동맹을 맺어서 좋을 게 뭐가 있겠어?”

“당연히 좋은 것이 있지. 본국이 망한 후, 그다음 차례는 크루마가 될 것은 뻔하잖아. 코린트는 아마도 6년 전에 당한 그 수모를 결코 잊지 않을 거야. 안 그래?” “글쎄……. 그거야 그때가 되어 봐야 알겠지. 코린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쪽도 결코 만만한 국가는 아니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고 식사부터 하지.” 서로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음식물들이 들어왔다. 대 제국 크루마의 총사령관이 먹는 식사답게 메뉴는 정말이지 호화로웠다. 그리고 갖가지 음식들이 담겨 있는 식기들도 모두 다 금이나 아니면 호화롭게 구워진 도자기들이었다. 미네르바는 다크에게 식사를 권한 후 여러 개의 접시들에 담긴 음식들을 조금씩 먹으면서 말을 했지만, 상대는 그냥 대화만을 나눌 뿐 식사를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미네르바는 식사가 시작되고 10여 분이 흐른 후에도 상대가 가만히 앉아 있자, 결국은 참지 못하고 짜증스런 어조로 말했다.

“왜 그래? 뭐 독이라도 넣었을까 봐 그러는 거야? 나는 그런 치사한 짓은 안 한다구.”

다크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맞받았다. 그녀도 옛날 별의별 치사한 수법이 난무하는 무림에서 잔뼈가 굵어졌기에, 그따위 도발에 넘어가지는 않았다.

“글쎄. 나는 적이 권하는 음식은 먹지 않는 주의라서 말이야. 친구가 아니면 모두 적 아니겠어?”

“쪼잔하기는…….?

미네르바는 포크와 숟가락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다크가 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탁자는 대단히 넓었기에 여러 걸음을 걸어야 그녀가 있는 곳에 도착 할 수 있었다. 미네르바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크의 자리에 놓여 있는 모든 음식들을 조금씩 먹었다. 음식에 장난을 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행동이 었다.

“이제 믿겠어?”

다크는 대답 대신에 앞에 놓여 있는 음식들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미네르바는 그녀가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 만 그녀가 몇 발자국 가지 못했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포도주는 마시지 않았다구.”

미네르바는 일부러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한껏 만들어 보이며 다시 돌아가서는 다크의 앞에 놓인 포도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꿀꺽꿀꺽 다 마셔 버린 후 일그 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됐어?”

다크는 그런 미네르바를 향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미소를 보낸 후 포도주를 잔에 가득 따랐다.

“충분히 믿을만해.”

이렇게 해서 다크의 식사는 시작되었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짠돌이 황제의 밑에 있었던 다크로서는 그야말로 처음 먹어 보는 진수성찬이었 다. 다크는 여태까지 먹지 않고 있었던 10여 분을 보상받으려는 듯 맹렬한 기세로 먹기 시작했다. 그렇듯 열심히 먹고 마시고 있는 다크를 미네르바는 만족스런 표 정으로 바라봤다. 이윽고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미네르바는 깜빡 잊었다는 듯 과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경은 포도주보다는 좀 더 강한 술을 좋아한다는 걸 깜빡 잊었네.”

“괜찮아.”

“아니, 손님의 취향을 잘 알면서도, 내가 강한 술을 싫어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대접을 엉터리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이봐!”

근처에 서 있던 시녀는 재빨리 대답하고 미네르바의 곁에 다가갔다.

“예, 전하.”

“술 담당자에게 말해서 좀 강한 술을 한 병 내오라고 일러라. 참, 내가 달라고 했다면서 ‘로얄 크루마에’를 받아 오너라.”

“로얄 크루마에 말씀이옵니까? 알겠사옵니다, 전하.”

시녀는 재빨리 나가더니 잠시 후 고풍스러운 도자기병에 담긴 술을 한 병 가져왔다. 시녀가 조심스럽게 술을 따라서 다크의 앞에 올려놓았지만 그녀는 그냥 포도 주만을 마실 뿐, 거기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미네르바는 자신을 계속 의심하고 있는 다크를 향해 얄밉다는 듯 쏘아 댔다.

“이봐, 좀 작작 해 두라구. 그것까지 내가 맛을 봐야겠어?”

“물론이지.”

넉살좋은 대답에 미네르바는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잠시 후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나는 강한 술을 좋아하지 않아. 그러니 시녀보고 대신 맛을 보라고 해도 괜찮을까? 안 그러면 마시지 마. 황족이나 마실 수 있는 정말 귀한 술을 특별히 생각해서 내왔더니……. 쯧쯧.”

“뭐, 시녀가 맛을 봐도 상관은 없겠지.”

자신의 안전이 확인되기만 한다면, 특별히 강한 술을 좋아하는 다크가 이렇듯 귀한 술을 마다할 리가 없었다. 그녀가 이것을 마시지 않고 있는 것은 미네르바의 의 도를 믿을 수 없다는 단 한 가지뿐이었으니까 말이다. 다크가 살며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미네르바는 시녀에게 무뚝뚝한 어 조로 명령했다.

“시음()하거라.”

“예, 전하.”

시녀는 조심스럽게 한 잔을 다 마셨다. 다크는 시녀가 혹시 마시는 척하면서 입에 머금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녀의 목젖을 잘 관찰하고 있다가, 그것이 아래위로 꿀떡거리면서 액체를 위장으로 흘려보내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기다렸다. 다크는 자신에게 위험을 안겨 줄 수 있는 독이 이 세상에 존재할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과거 여러 차례의 경험으로 미루어 독 대용품, 즉 무림에서 사용하는 몽혼약(滕昏藥) 따위에는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금만 정신이 흐트러져도 미네르바 같은 고수가 상대라면 위험할 수 있었다.

시녀는 술을 마신 후 어딘가로 가 버린 것이 아니라 계속 식사 시중을 든다고 서 있었다. 그녀의 볼은 약간씩 올라오는 취기로 발그레해져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뭔가에 중독된 듯한 증상은 보이지 않았다. 한 10여 분을 기다린 후 다크는 이제 충분하다고 느끼고는 고풍스러운 도자기병을 기울여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것도 잠시, 다크는 눈앞이 희뿌예지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다크는 비틀비틀 일어섰다.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눈앞이 흐려지고 있었다. 다크는 더 이상 지체하면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탈출을 시도했 다. 하지만 그대로 탈출하면 미네르바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을 우려가 있었다. 다크는 재빨리 검을 뽑아 들며 미네르바에게 달려들었다.

상대가 공세를 취해 올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미네르바는 황급히 검을 뽑아 들어 상대의 공격을 막았다. 미네르바는 다크의 검술 실력이 얼마나 무 서운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검에는 충분한 마나를 실었다. 시퍼런 빛을 아련히 뿜어내고 있는 미네르바의 검이 황금빛의 검과 부딪쳤을 때, 그때서야 미네르바는 상 대의 검에 힘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는 황급히 힘을 뺐다. 하지만 이미 그것은 때늦은 조치였다.

챙하는 소리가 크게 들리면서 다크는 그 반동으로 뒤로 나뒹굴었다. 그리고 다크의 검은 튕겨 나가서 천장에 부딪치더니 아래로 떨어지면서 식당 바닥에 꽂혀 버 렸다. 아마도 다크의 검이 드래곤 본으로 만들어진 강력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주인의 몸과 함께 두 토막이 났을 것이다. 미네르바는 우선 다크에게로 걸어가서 그녀를 상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크는 쓰러진 후 완전히 정신을 잃었는지 평온한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그제야 미네르바는 천천히 황금빛 검이 있는 곳으로 걸 어갔다. 검을 뽑은 후 날을 세밀히 살펴봤지만, 그 어느 곳에도 이빨이 나간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이 녀석이 주인의 생명을 건졌군. 그때도 느꼈지만 정말 좋은 검이야. 이런 최상품을 어디서 구했을까? 참, 그렇지. 이 애의 양부가 드래곤이니까 아마도 그 드래 곤이 선물했겠지.”

미네르바는 다크의 허리에 걸려 있는 검집을 풀고는 자신이 들고 있던 검을 그 안에 천천히 꽂아 넣었다. 그런 후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다크를 바라보고 있는 시 녀를 힐끗 쳐다봤다. 아마도 시녀는 자신이 먹은 것이 뭔가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얼굴빛이 노래져서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미네르바는 다크에게서 뺏은 검 을 자신의 허리춤에 찔러 넣은 후, 주머니를 뒤적거려서 뭔가를 꺼내어 시녀에게 건넸다.

“네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을 테니 걱정 말거라. 자, 받아라.”

미네르바가 건넨 것은 부피는 아주 작은 것이었지만, 그 안에는 금화로 가득 차 있는 그녀의 비상 지갑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드는 시녀를 향해 미네 르바는 아주 차가운 어조로 속삭였다.

“이 일을 외부에 발설하면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 버릴 테다. 알겠느냐?”

“예, 절대로,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사옵니다, 전하.”

“밖에 나가 보면 마리나 지오그네 경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녀보고 들어오라고 전해라.”

“예, 전하.”

잠시 후 마리나 지오그네가 시녀의 인도를 받으며 근위기사 한 명과 함께 들어왔다. 지오그네는 문 앞에 서 있는 경비병들에게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지시한 후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지오그네는 탁자 위에 긴 금발머리의 자그마한 체구를 지닌 사람이 엎어져 있는 것을 보고, 역시나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듯 의기양양 한 미소를 지었다.

“저 소녀를 자루에 담아라.”

“옛, 전하.”

마리나 지오그네와 함께 들어왔던 근위 기사는 이미 뭔가 지시를 받았는지 큼직한 자루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공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자신이 가지고 들어 온 자루의 용도를 비로소 깨달았는지 약간 흠칫하는 듯했지만, 곧이어 재빨리 소녀를 자루 속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미네르바는 기사가 소녀를 자루 속에 집어넣고 있는 장면을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뒤로 돌려서 시녀에게 말했다.

“너는 술 담당자에게 가서, 내가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내 방으로 오라고 전해라. 알겠느냐?”

시녀는 미네르바의 말을 듣고 저 소녀를 쓰러뜨린 약물이 술 속에 들어 있었을 것이란 것을 눈치 챘다. 하지만 그녀는 오랜 궁중 생활을 해 오면서 터득한 것이 있 었기에, 자신이 뭔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자신의 표정에 무심결에 떠오르지 않도록 조심했다. 이곳에서 오래 살려면 될 수 있다면 조용히,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듯, 또 아무것에도 관심 없다는 듯 행동해야만 했던 것이다.

“예, 전하.”

“어디로 옮기면 되겠사옵니까? 전하.”

“으흐흐흣, 당연히 지하 감옥이지.”

미네르바는 다시 시선을 마리나 지오그네에게로 옮겼다.

“저 소녀를 제압할 만한 마법 도구 같은 것이 있나?”

“물론 있사옵니다, 전하. 마나가 모이지 않도록 모으는 도구가 있지요.”

“그녀는 무술도 엄청나게 강하지만, 마법도 쓸 줄 안다. 그 두 가지를 다 막을 수 있어야 해. 알겠나?”

미네르바의 말에 마리나 지오그네는 놀랐는지 눈이 둥그레졌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다. 어떻게 마법까지 함께 익혔으면서도 저 정도의 고수가 될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진짜로 마검사(魔劍士)입니까?”

“내가 알고 있는 한은 그렇다. 그리고 그녀가 이곳에 잡혀 와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몰라야 한다. 알겠느냐? 비밀 유지에 만전을 기하도록 해라.”

“예, 전하.”

“그럼 가 보거라.”

“전하께서도 함께 가시는 것이 아니었사옵니까?”

“아니, 나는 할 일이 하나 있어. 그것을 끝내고 그리로 가지. 그동안 일을 끝내두도록!”

“옛, 전하.”

마리나 지오그네를 따라 큼직한 자루를 든 기사가 식당 밖으로 나가 버리자, 미네르바는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식당을 나섰다. 그녀가 가는 곳은 당연히 다크와 함 께 온 팔시온 일행이 묶고 있는 숙소였다. 그들까지 모두 잡아 버린다면, 만약에 나중에 드래곤이 찾아와서 다크를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린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발 뺌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