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2권 18화 – 유래를 찾기 힘든 전쟁
유래를 찾기 힘든 전쟁
두두두두두……
50여 명의 기병들이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 이들은 모두 사슬 갑옷을 입고 있었고, 중요 부위는 두터운 철판으로 된 금속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그것 때문인 지는 몰라도 기병들이 지나가자 희뿌연 먼지와 함께 지축을 울리는 듯한 엄청난 소음을 내고 있었다. 그들은 마을 안에 들어와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기에, 길거리 를 지나가던 주민들은 그 서슬에 놀라서 길의 좌우로 황급히 비켜섰다.
기병들의 목적지는 마을의 위쪽에 있는 작은 요새였다. 그 요새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버니즈 백작은 요새를 중심으로 반경 30킬로미터에 가까운 광활한 대지의 관리를 황제로부터 위임받고 있었다. 영지가 넓은 만큼 버니즈 백작은 거의 4백여 명에 가까운 사병(私兵)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지금 마을을 빠른 속도 로 가로질러 달려오는 무리들도 백작의 사병들이었다.
요새 위에 서 있던 보초병은 달려오는 기병들이 몇 시간 전에 이 요새에서 출발한 잭슨 남작 일행이라는 사실을 알아보고는 아래쪽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잭슨 남작님께서 돌아오셨다. 문을 열어라!”
기병들이 요새의 정문에 도착할 때쯤에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기병들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요새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갑옷, 그리 고 기병들이 가지고 있는 긴 창날과 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낼 만큼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모두들 쉬어라, 수고했다.”
잭슨 남작은 도착과 동시에 말의 고삐를 종자에게 넘겨 준 후 요새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영주인 버니즈 백작에게 갔던 일의 전말을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나?”
“예, 영주님. 농노들이 봤다는 그 수상한 무리들은 피난민들이었습니다.”
“피난민이라고? 어디에서 왔다고 하던가?”
“예, 발크레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발크레라면 여기서 겨우 이틀거리인데……. 설마 거기에까지 적들이 나타났다는 말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피난민들에게 물어보니 갑자기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나고, 요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고 합니다. 적들은 곧이어 물러갔지만,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되어서 피난을 간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처리해 놓고 왔는가?”
“예, 일단 영지의 경계선에 검문검색을 강화하라고 병사들에게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피난민들을 설득해서 고향으로 다시 돌려보내라고 지시했지 요.”
“잘 처리했군. 이 기회를 이용해서 농노들이 도망칠지도 모르는 일이야. 그러니 영지 내의 농노들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게.”
“주의하고 있습니다. 참, 딴 곳에서 흘러온 한 농노 가족을 붙잡았는데 어떻게 처리할까요?”
농노를 붙잡는 일이 그렇게 희귀한 일은 아니었기에 버니즈 백작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늘 하던 대로 처리해.”
“예, 그런데 그 농노의 딸이 상당한 미인이던데요? 그냥 노예로 팔아 버리기는 아깝더군요.”
잭슨 남작은 슬며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부하의 말투가 자신에게 달라는 듯 느껴졌는지, 버니즈 백작은 잭슨을 힐끗 바라 본 후 말을 이었다. “뭐 좋다면 그 계집은 자네가 가지게. 대신 그 아버지는 교수형을 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노예로 팔아 버리는 것 잊지 말게.”
“감사합니다, 영주님.”
이때 갑자기 비상종 소리가 울려 펴졌다.
땡땡땡땡땡
하지만 그 소리는 급격히 잦아들더니 곧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버니즈 백작은 급히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비상종을 가지고 장난치는 못된 녀석이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가 본 것은 못된 녀석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아니라, 비상종 밑에 쓰러져 있는 병사의 시체였다. 그것을 보고 버니즈 백작의 등으 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적이다.”
버니즈 백작은 부하들을 지휘하기 위해서 아래로 달려 내려가려 했다. 하지만 곧이어 뒤따라온 잭슨에게 붙잡혔다. 잭슨은 버니즈 백작을 꼭 붙잡은 후 상관이 무 모한 행위를 하지 못하게 설득했다.
“지금 사방에 돌아다니며 지방 영지들을 파괴하고 있는 것은 코린트의 기사단입니다. 기사들을 상대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적들은 곧 있다가 철수할 겁니 다. 그러니 몸을 잠시 감추십시오. 나중에 적들이 물러간 후에 이 영지를 관리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그, 그렇군. 내가 죽으면 안 되겠지?”
“당연하지요. 지금 여러 곳에서 놈들이 활개를 치는 바람에 지방 행정이 붕괴되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영주님께서는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주님의 영지만이라도 보존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황제 폐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확실히 부하의 말대로다. 놈들은 점령지의 확보가 목적이 아니었다. 크라레스의 지방 행정의 중심부들을 파괴하면서 크라레스가 망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다. 이때는 잭슨 남작의 말대로 용감하게 적들과 싸우는 것보다는 비겁하게라도 살아남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래야 놈들이 떠난 후에 다시 이곳의 치안과 행정력 을 복구할 수 있을 테니까. 버니즈 백작은 거기까지 생각하며 자신에게 충언을 해 준 잭슨 남작에게 감사를 보냈다.
“그렇군. 경의 현명한 조언에 감사하네. 자네 같은 젊은이들이 있는 한 크라레스는 무궁히 발전할 수 있을 것이야. 내 오늘의 일을 잊지 않겠네.”
영주의 말에 잭슨 남작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영주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출세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또, 크라레스는 코린트군의 기습 작전으로 수많은 지방 영주들이 사망한 상태였다. 만약 버니즈 백작이 뒤를 밀어준다면 작은 지방의 영주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감추 려고 해도 미소가 떠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사합니다, 영주님. 그건 그렇고 빨리 몸을 피하셔야만 합니다. 자, 이쪽으로…….”
버니즈 백작이 잭슨 남작의 안내를 받으며 달려간 곳은 요새 외곽으로 빠지는 비밀 통로가 있는 곳이었다. 잭슨 남작은 비밀 통로의 문을 연 후 다급한 어조로 외 쳤다.
“빨리 들어가십시오, 영주님.”
하지만 버니즈 백작은 어둡고 습한 비밀 통로를 앞에 두고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 놈들이 올지 모릅니다. 겨우 병사 몇백 명으로 기사들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자, 빨리..
자신을 채근하고 있는 잭슨 남작을 향해 버니즈 백작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일단 비밀 통로의 앞에 도착해서 언제든지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기에 버니즈 백 작의 마음은 상당히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참, 그러고 보니 가족들이……. 나만 이렇게 빠져나갈 수는 없지 않겠나?”
잭슨 남작은 필요 이상으로 서두르고 있었다. 사실 적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성내의 경비병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요새 안까지 단 한 명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속도가 빠른 기사들은 다수의 병사들과 싸울 때 가능한 한 운신의 폭이 좁은 실내에서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지금 움직인다면 영주의 가족들을 구출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가족도 아니고, 겨우 영주의 가족을 구한다고 목숨을 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지금 이 상태로 가족들을 구하러 간다는 것은 자살 행위입니다. 영주님, 빨리 나가셔야만 합니다. 일단 영주님께서는 살아남으셔야 하지 않습니까? 놈들이 언제 실내로 진입할지 알 수 없습니다. 서두르시지요.”
버니즈 백작은 몸을 뒤로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요새 내의 연병장 위에서는 지금 그야말로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수많은 시체들이 널려 있었고,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적들을 향해, 겁에 질린 병사들이 도망치다가 학살을 당하고 있었다. 아니, 도망이라도 치는 놈들은 그래도 용감한 녀석들이었다. 아예 겁에 질려서 부 들부들 떨며 그냥 서 있거나, 아예 오줌까지 지리고 있는 놈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것을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적들은 밖에 있는 병사들을 모두 처치한 후 실내로 진입해 들어올 것이다.
“알겠네. 그렇다면 자네가 가서 내 가족들을 이리 데려다 주지 않겠나?”
“예?”
적들이 언제 실내로 진입해 들어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영주의 가족들을 구한답시고 왔다 갔다 하다가 적에게 걸리면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 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니즈 백작은 밖에서 벌어지는 일에 신경 쓰며 말했다. 얼마 버티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놈들이 실내로 진입해 들어와서 여기까지 오려면 시간이 있을 거 라고 생각했다.
“놈들은 아직 요새 안으로 진입해 들어오지 못했어. 지금 움직인다면 가능할 거야. 부탁…….”
버니즈 백작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잭슨 남작이 뒤에서 단검으로 그의 등을 찔러 버렸기 때문이다.
“으윽! 네… 네놈이 이럴, 이럴 수가 있느냐?”
비틀거리면서 검을 뽑아 들려고 애쓰고 있는 상관을 보며, 잭슨 남작은 단검을 옆으로 던지고 허리에 꽂혀 있는 장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잭슨은 한껏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죽고 싶으면 네놈이나 가서 죽어. 나는 살아야겠어. 겨우 네 녀석 가족 따위 구한다고 창창한 내 목숨을 걸 수는 없다구! 알아?”
잭슨 남작의 검은 비틀거리며 간신히 서 있는 버니즈 백작의 옆구리를 베어 들어갔다. 잭슨 남작은 우람한 근육질의 소유자였지만 그의 검은 버니즈 백작의 몸통 을 완전히 반으로 가르지는 못했다. 반쯤 잘라 버리다가 힘이 부족해 그만 멈춰 버렸던 것이다.
잭슨 남작은 이제 시체가 되어 버린 버니즈 백작의 몸통을 발로 차서 뒤로 넘어뜨리고는 자신의 검을 뽑아냈다. 그런 다음 피 묻은 검을 든 채로 황급히 비밀 통로 안으로 사라졌다. 그는 어찌 되었건 이 망할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일단 살아남아야 영주건 뭐건 직책을 받아서 호의호식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어쨌든 코린트 기사단의 크라레스 공격은 엄청난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각 지방의 행정과 치안, 그리고 세금의 징수를 담당하는 지방 영주들이 그 공격 대상이 된 것이다. 이런 전투 방법은 여태껏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수백 명에 달하는 피난 행렬. 소나 말이 끄는 수레에 짐과 아이들을 태우고, 어른들은 그 고삐를 잡고 앞장서서 터덜터덜 걷는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그래
도 나은 편이다. 등과 한쪽 손에 짐을 잔뜩 들고 남은 한쪽 손으로는 아이의 손을 꼭 쥐고 걷는 사람들. 아이들은 다리가 아프다고 투정을 해 대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피난 행렬은 비단 이들만이 아니라 이번에 아르곤에 점령된 거의 대부분의 영토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인구의 대 이동이었다.
국가끼리 전쟁이 벌어졌을 때, 피난민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듯 대규모의 피난민이 이동을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왜냐하면 평민들의 경우 거주 지를 이동할 자유가 있었지만, 영지에 소속되어 있는 농노들의 경우 주거지를 이동할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옆 마을에서 격전이 벌어져도 피난을 떠 날 수 없었다. 거주지를 이탈하여 탈주한 농노라는 것이 밝혀지면 노예로 팔려가거나 아니면 교수형에 처해지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후 새로운 주인이 영주가 되어 나타나면, 그들은 또다시 농사를 지어 그 영주에게 바치는 생활이 지속되게 된다. 평민이나 귀 족들이야 적군이 쳐들어오면 엄청난 생활의 변화가 오겠지만, 농노들의 경우는 바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농노의 생활을 하도록 법으 로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많은 피난민들이 발생했다는 것은 농노들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피난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 사태가 벌어졌 을까?
피난민들이 이동해 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의 수는 30여 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두터운 갑옷과 검과 창으로 무장을 갖추고 있는 진짜 병사들이었 다. 그들은 피난민을 보자 그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서라,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가라, 더 이상 앞으로 갈 수는 없다.”
병사들이 막아서자 피난민들의 대열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철없는 아이들을 제외하고 모두들 병사들의 모습을 보자 허탈한 표정으로 바뀌어 갔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정들었던 집과 생활을 보장해 주던 토지를 버리고 이곳까지 온 것이다. 그들에게는 집과 토지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목숨이었다. 아무리 호화로운 집과 많은 소출을 내는 토지라도 목숨이 없다면 필요 없는 것이다.
“우리들을 보내 주시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외쳐 봤지만, 병사들에게 그런 부탁은 통하지도 않았다. 병사들은 지휘자의 구령에 맞춰 검을 뽑아 들고 피난민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 들로서도 상관으로부터 받은 명령이 있기에 불쌍하긴 하지만 이들을 그냥 통과시킬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병사들이 자신들을 통과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느끼자 피난민 행렬은 잠시 멈칫하더니 여태까지의 체념이 분노로 바뀌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들에 게는 갈 데가 없었다. 돌아가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죽으나 돌아가서 화형당하나 똑같은 것이다. 아르곤의 종교 재판에 걸려 얼마나 많은 사람들 이 목숨을 잃었던가…….
피난민들은 저마다 지팡이로 쓰던 나무 막대나 수레에서 꺼내든 농기구를 들고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피난민들이 이렇게 거칠게 나오자 병사들도 검을 휘두르 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다간 맞아죽을 테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사방에 피보라가 일기 시작했고, 피난민들은 더욱 흥분했다.
죽기 살기로 덤벼 오는 피난민들의 몽둥이에 병사들이 하나 둘 쓰러지고 있었다. 아무리 상대가 허접한 무장을 갖춘 시민들이라고 해도 숫자는 이쪽의 몇 배나 된 다. 부하들의 절반 이상이 광기 어린 시민들에게 죽음을 당하자 병사들의 우두머리도 어쩔 수 없었는지 퇴각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평소에 교육받은 대로 열심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10여 명의 동료들의 시체들을 뒤로하고 말이다. 그리고 피난민들도 앞을 가로막는 병사들이 없어지자 또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수십 명이 넘는 이웃이나 친지들의 시체를 뒤로하고……. 어느 쪽이나 뒤끝이 깨끗하지 못한 허무한 전투였다.
바크론 요새의 포스타나 대신관의 집무실에는 지금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포스타나 대신관으로서는 지금 상상도 해 보지 못했던 보고가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형제가 지금 하는 말은 민란이 발생했다는 말과 같은 뜻 아닌가?”
대신관의 말에 보고를 올린 사목관은 변명했다.
“아니지요, 대신관님. 민란하고는 거리가 있습니다. 점령지의 주민들이 대대적으로 크라레스 쪽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는 보고는 어제 드렸잖습니까?”
“물론 그랬었지. 그래서 내가 형제에게 그것을 막으라고 지시했던 것 아닌가? 땅이란 것은 몇 달만 경작을 하지 않아도 황무지로 변하니까 말이야. 형제도 알다시 피 주교원에서 아직까지 전쟁이 완료되지 않은 이곳에 이주민을 보낼 리가 없지 않겠나? 또 많은 이주민들을 보내온다 하더라도 산맥을 통과하여 여기까지 도착하 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네. 그러니까 본국에서 이주민이 도착할 때까지 토지를 경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구는 남아 있어야만 하기에 내린 지시였네.”
“예, 그래서 각 사단장들에게 대신관님의 지시를 전했습니다. 사단장들의 보고에 따르면 피난 가던 주민들은 병사들을 보자마자 공격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래서 지금 곳곳에서 군대와 주민들 간에 격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그게 민란이란 소리 아닌가?”
사목관은 얘기가 통하지 않아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민란은 아니죠.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태니까요.”
서로의 해석 차이로 인해 말이 겉돌자, 대신관의 눈초리가 위로 올라갔다. 주민들이 군대를 향해 무기를 들었다면 그것이 민란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형제, 지금 나하고 말장난을 하자는 것인가?”
사목관은 대신관의 눈을 마주 쏘아봤다. 하지만 그는 곧 시선을 아래로 푹 내렸다. 그는 대신관에게 따지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도저히 그 말을 할 용기가 없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대신관의 무리한 이교도 사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왜 농노들이 자신들의 정든 터전을 버리고 이동을 시작했겠는가? 도망갈 틈도 안 주고 막 다른 통로로 계속 밀어붙이니 반발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사목관은 대신관에게 고개를 조아려 사과했다. 따져 봤을 때 대신관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었지만, 어차피 상대는 자신보다 월등하게 높은 직위를 지녔기 때문이다.
“아, 아니 죄송합니다, 대신관님. 결코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좋아, 어차피 청소 작업이 앞당겨졌을 뿐이야. 병력을 총동원하여 반항하는 무리들은 싹 쓸어버려라. 내가 관장하는 지역에서 민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주교원에
서 안다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나? 다시는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싹부터 철저히 짓밟아 버리게. 알겠나?”
“하지만 그렇게 하면 더욱 사태는 겉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 민란을 일으키면 어떤 꼴이 되는지 보여 주면 다시는 그러지 못할 거야. 원래 민중이란 것은 겁이 많거든. 즉시 실행하게.”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자 사목관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대신관님.”
사목관은 대신관의 집무실을 나와서는 휘하 장교들을 불러서 대신관이 명령한 사항을 전달했다. 일단 위에서 명령이 내려왔으니 그것이 아무리 잘못된 것이라도 일단 실행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 후 사목관은 걸음을 옮겨 자신의 숙소를 향했다. 사목관의 숙소는 그 전에 이곳 요새에 소속되었던 장교들이 묵었던 방이었 다. 사목관은 한숨을 푹 내쉰 후 장문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 현재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말이다. 그런 다음 그는 서랍을 열고 얇으면서도 작은 양피지 조각을 꺼냈다. 그리고 그 옆에 놓여 있던 두툼한 책자 하나도 꺼냈다. 그런 다음 사목관은 자신이 방금 썼던 편지의 내용을 두 툼한 책자 안에서 찾아내서는 그것을 얇은 양피지 안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전서구를 통해 편지를 보내려면 비밀 유지를 위해 이렇듯 암호를 이용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사목관은 편지를 모두 다 쓴 후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비병을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목관님.”
사목관은 양피지를 아주 조그마하게 돌돌 말아서는 작은 통 속에 넣었다. 그 통과 밀랍으로 봉인한 편지를 경비병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전령에게 보내게 지급으로 말이야. 주교원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전서구는 3일이면 도착하겠지만, 편지는 족히 한 달은 걸릴 것입니다. 그렇게 급하신 일이시라면 엔드슨 수사(修)님을 불러다 드릴까요?”
엔드슨 사제라면 통신의 권능을 가지고 있는 사제였다. 하지만 지금 사목관이 하고 있는 일이 만약 대신관의 귀에 들어간다면 큰일이었다. 그렇기에 사목관은 고 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닐세. 엔드슨 수사도 일이 많이 바쁠 테니 그를 부를 필요는 없네. 자네가 처리해 주게. 이건 전서구로 보내고, 이건 전령을 통해서 보내게. 될 수 있다면 빠르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사목관님.”
경비병이 밖으로 나가고 나자 사목관은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요새의 담장 저 밖으로 삐죽삐죽 솟아오른 나무 장대들이 보였다. 오늘도 많은 시민들이 이교도 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것으로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것을 보고 사목관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