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2권 8화 – 케락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케락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전하, 치레아 기사단과 접전에 들어갔다고 연락했었던 윌리엄스 후작 말이옵니다.”
레티안의 보고에 로체스터 공작은 흥미를 느낀 듯 질문을 던졌다.
“왜? 새로운 정보라도 있는가? 벼룩으로부터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고양이는 그대로 있다고 했잖은가? 또 치레아 기사단은 미란에 파견 나갔다고 했고 말이야. 그래서 밀성에 나타난 것은 아무래도 치레아 기사단은 아닌 것 같다고 결론짓지 않았던가?”
레티안은 고개를 끄덕여 로체스터의 기억이 맞다는 것을 확인해 주며 말을 이었다.
“그랬사옵니다. 하지만 그게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사옵니다. 윌리엄스 후작은 황금빛 타이탄들, 그러니까 치레아 기사단이 가지고 있는 드라쿤들과 교전에 들어 갔다고 했었으니까요.”
“뭣이? 그렇다면 미란에 간 것은 또 뭐라는 말이냐? 분명히 벼룩은 치레아 기사단이 미란으로 갔다고 했잖은가?”
“예, 그래서 미란에 있는 정보원들에게 자세히 알아 보라고 지시해 뒀사옵니다. 그리고 밀티성에서 연락이 왔사온데…….”
“그런데?”
“윌리엄스 후작 이하 타이탄 부대가 그때의 보고 이후로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부하의 보고에 로체스터 공작은 엄청나게 놀랐다. 타이탄 40대로 이루어진 막강한 부대가 행방불명이라니.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 다.
“그렇게 중요한 사안을 왜 이제야 보고하는가?”
“적들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던 타이탄이 40대이옵니다. 적들과 교전한 후 노획품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까지 생각하며 기다리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 숲 쪽으로 척후병을 파견했는데, 전투의 흔적만 발견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옵니다.”
“멍청한 것들!”
로체스터 공작은 마법사의 꼴이 더 이상 보기 싫다는 듯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쪽에는 해골 가면을 쓴 용병대장이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서 있 었다. 용병대장도 이번 사건이 뭔가 상당히 석연치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40대의 타이탄을 흔적도 없이 박살 낼 정도의 실력이라면, 이건 엄청난 적일 것이다. 로체스터 공작은 다시금 시선을 제임스 쪽으로 돌렸다.
“까미유는 어디 있나?”
“예, 후작 각하께서는 금십자 기사단을 도와준다고 나갔사옵니다, 전하.”
“좋아, 까미유한테 수도로 돌아오라고 전해라.”
“옛, 전하.”
“그리고 근위 기사단에도 출동 명령을 내려라. 내가 직접 가겠다.”
“예? 그렇게 되면 수도가…….”
“괜찮아, 로젠 공작이 있으니까 말이야. 안 그런가? 로젠 경.”
로체스터 공작의 호명에 로젠 드 발렌시아드 대공은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서며 외쳤다.
“맡겨만 주십시오, 전하.”
로젠은 2차 제국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발렌시아드 기사단을 거느리고 이곳 수도에 진을 치고 있었다. 흑기사들로 이뤄진 발렌시아드 기사단이 있는 한 근위 기사 단을 밖으로 빼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으므로 로체스터 공작은 자신이 직접 근위기사단을 이끌고 사고 현장으로 달려갈 생각이었다.
“한 30분쯤 후에 까미유의 제2근위대가 도착하면 경이 그 지휘를 맡아 주게. 발렌시아드 기사단과 제2근위대가 있으면 수도를 지키는 데 아무런 무리가 없을 게 야.”
“알겠습니다, 전하.”
“좋아, 이동 마법진을 준비하라고 일러라. 참, 자네도 갈 텐가?”
로체스터 공작의 물음에 용병대장은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공손히 대답했다.
“예, 전하.”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거대한 도시. 이것이 코린트 최대의 상업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케락스의 모습이었다. 케락스는 예전에도 코린트 제2의 도시에 어울릴 정도 로 거대한 도시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곳에 황궁이 들어서면서 황족들과 함께 모든 귀족들과 신하들까지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 거기에다가 덧붙여 기사단과 대규 모 군대까지 주둔하게 되어 더욱 흥청거리는 거대 도시로 변모하고 있었다.
“흐흐흐흣! 저 거대한 성을 보니 제대로 찾아왔군.”
시 외곽에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는 엄청난 규모의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내뱉은 다크의 소감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성은 최강의 제국 코린트를 상징할 만큼 규모가 대단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팔시온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더니 참견을 시작했다.
“이봐, 진짜로 할 거야?”
“그럼, 내가 뭐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다크는 저 멀리 보이는 코린트의 황궁을 확인한 후 일행에게 지시했다.
“자, 이제 목표지에 도착했으니까 밥이나 먹자.”
“뭐?”
“새벽에 출발한다고 아직 밥도 제대로 못 먹었잖아? 우선 식사나 하고 일을 시작하자구.”
느긋하게 말하는 다크를 보며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가 그게 적국의 한복판에 도착해서 할 말인가 말이다. 하지만 어쨌든 명령은 떨어졌으니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짐보따리를 뒤적거려서 먹을 것을 꺼내기 시작했고 곧이어 식사가 시작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황궁을 힐끗거리며 하는 식사는 상 당히 스릴이 있었다.
가스톤은 음식을 우물거리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여기는 적국의 수도에 가까운 곳이니까 어딘가 탐지 마법진이 쳐져 있을지도 몰라. 놈들이 먼저 알아채고 공격해 오면 어쩔 거야?”
“어쩌기는… 싸우면 되지. 거기까지 찾아갈 수고를 덜 수 있으니 더욱 좋잖아.”
태평스레 말하는 다크를 보며 모두들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그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양은 한정되어 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 시간은 종료를 고했다. 다크는 천천히 일어서서는 뚜둑 소리가 나도록 이리저리 몸을 흔들더니 가스톤에게 지시를 내렸다.
“자, 이제 식사는 했으니 가볍게 한판 해 볼까? 너희들은 탈출 준비를 해 놓고 여기에서 기다려.”
“뭐? 그렇다면 저길 너 혼자 갈 거야? 미쳤냐?”
“제정신이야. 대신 좀 위태로워지면 이리로 돌아올 테니 탈출 준비를 해 놓고 있으란 말이야. 재빨리 도망치게 말이야. 또다시 명령이란 단어를 떠올려야 말을 들 을 거야? 자자, 군소리하지 말고 준비들 하라구.”
“알았어.”
가스톤이 마법진을 그리고 있을 때, 다크는 자신의 타이탄을 불러냈다. 거대한 청색 타이탄이 다시금 긴 잠을 깨고 공간을 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안드로메다는 타이탄 특유의 저음으로 말했다.
<불렀는가? 주인이여.>
“멍청한 녀석! 불렀으니까 나왔지. 자 가자구. 한바탕 멋지게 휘저어 놔야지.”
<바라던 바다. 오늘은 일거리가 많아서 좋군.>
“자, 머리를 열어라.”
다크는 청기사 위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일행들에게 외쳤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꼼짝하지 말고 기다려!”
이윽고 청기사의 그 거대한 머리가 원상태로 돌아갔다. 청기사는 허리에서 거대한 검을 뽑아 들었다.
“이건 시작일 뿐이야! 걸리는 놈은 모두 다 죽여 줄 테다! 자, 기대하라구. 오호호호홋!”
청기사는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대지에는 거대한 발자국을 남기며…….
“정말 못 말리겠군.”
“어쩌겠냐? 아무리 해도 말을 안 듣는데…. 가스톤! 탈출 준비나 서두르라구. 우리가 할 일은 그것뿐이니까 말이야.”
코린트의 새로운 수도 케락스. 코린티아시가 크루마의 마법 공격에 의해 먼지로 화해 버린 후, 코린트의 수도가 된 케락스시의 외곽 한구석에는 거대한 황궁이 위 용을 자랑하며 자리를 잡고 있었다. 황궁은 파괴되어 버린 ‘피의 궁전’보다도 더 거대한 규모로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얼마나 크게 만들고 있는지 1차 제국 전쟁이 끝난 후 6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완성되지 못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황궁이란 것은 코린트의 자존심이 담겨 있는 건물이었던 것이다.
아직 미완성인 황궁 건물의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붉은 벽돌로 만든 건물이 코린트의 근위 기사단 사령부였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위치한 것이 로체스터 공 작의 집무실이 마련되어 있는 코린트군의 사령부 건물이었다. 사령부 건물의 3층에 있는 넓은 회의실에서 큼직한 체스판을 놔두고 땅콩을 씹으며 체스를 두고 있는 두 사람. 그중 한 명은 로젠 대공이었고, 또 한 명은 급히 전장에서 돌아온 까미유 후작이었다.
나이트(Knight : 기사)가 룩(Rook: 성장)과 비숍(Bishop : 승정)의 도움을 받으며 상대방의 방어 진형을 압박하고 있었다. 최대한 이쪽에서도 그에 대비하기 위 해 전력을 집중시키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전력이 조금 딸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또다시 상대가 슬며시 퀸(Queen : 여왕)을 거기에 가담시키자 까미유는 짐짓 우는 소리를 늘어 놨다.
“이봐요, 로젠 형, 좀 봐주면서 두세요. 이거 원 이렇게 무자비하게 둘 수가 있는 겁니까?”
“하하핫! 이거 하수를 벗겨 먹으려니까 너무 미안하구먼. 이걸로 1백 골드 벌었군. 어때, 지금이라도 항복하시지.”
“젠장, 누가 그렇게 두 손 들 줄 알아요? 자, 어때요?”
까미유는 여태껏 아껴 두고 있던 나이트를 방어진에 가담시켰다. 이제 어느 정도 평수를 유지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순간, 로젠은 이미 까미유의 수법을 예상했는 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퀸을 대각선으로 크게 전진시켜, 까미유의 킹(King : 왕)을 사정거리에 잡았다.
“체크!”
물론 까미유의 킹이 도망갈 자리는 있었기에 체크 메이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왕을 회피시키면 왕과 함께 사정거리에 잡혀 있는 룩이 비명횡사할 것이다.
“젠장! 얍삽하게.”
그때 밖에서 분주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덜컥 열렸다. 문을 열고 뛰어 들어온 사람은 오른편 가슴 위에 금색 표식만이 없을 뿐 로젠과 똑같은 복장을 하 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부동자세를 취하며 보고를 올렸다.
“적의 기습이옵니다, 대공 전하. 일단 프로글리 경이 막고 있지만 역부족이옵니다.”
“뭣이? 누가 감히 본국의 수도에 기습 공격을 했단 말이냐? 그래, 적의 수는 얼마나 되느냐?”
“그것이…….”
““빨리 보고해라.”
“옛 적은 단 한 대이옵니다.”
“뭐라고? 너 지금 제정신이냐?”
“제정신이옵니다, 전하. 적은 엄청나게 큰 청색 타이탄을 타고…….”
까미유는 거기까지 듣고 밖으로 재빨리 뛰쳐나갔다. 까미유의 표정을 보고 뭔가 이상함을 느낀 로젠도 그의 뒤를 따라 달려왔다.
“자네,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있나?”
“형은 청기사라는 타이탄에 대해 못 들었수?”
“크라레스의 근위 타이탄이라는 그거 말이야? 하지만 이번 크라레인시 기습 작전에서 단시간에 세 대나 파괴했다면서? 그것을 보면 단독으로 쳐들어올 만큼 그렇 게 대단한 놈은 아닌 모양일 건데?”
“그거야 그 안에 누가 타고 있느냐에 달린 거겠죠.”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들은 벌써 사령부 건물의 제일 위에 마련되어 있는 망루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푸른 타이탄과 그것을 막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흑기사들이었다. 이미 로젠에게 보고가 들어가기도 전에 적이 달려오는 것에 대한 보고를 들은 기사들이 먼저 달려갔기에 전투가 이미 벌 어진 상태였던 것이다.
로젠은 청기사의 검이 불타오르듯 푸른 광채를 뿜어내고 있는 것을 보고 경악해서 말했다.
“저것이… 청기사? 정말 대단한 기사가 타고 있군. 어떻게 아버님만이 익히셨다는 신기(神技)인 ‘오라 파이어(Aura Fire)’를 익혔지?”
오라 파이어는 코린트가 낳은 최강의 검객인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 대공이 직접 이름을 붙인 최강의 검술이었다. 키에리는 그것을 익혔지만, 아무리 가르쳐도 딴 사람은 그 기술을 익힐 수 없었다. 심지어 마스터인 로체스터나 리사마저도……
“그거야 당연하죠. 대공 전하를 이긴 상대니까요.”
까미유의 설명을 듣고, 로젠의 눈동자는 분노에 불타올랐다. 로젠의 아버지인 키에리가 모든 것을 잃고 은거하게 만든 웬수 같은 놈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뭐야? 저놈이?”
미처 까미유가 말릴 틈도 없이 로젠은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곧이어 시커멓게 생긴 육중한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보고 까미유는 기겁을 해 서는 뒤따라 달려온 기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로젠도 뛰어난 기사이기는 했지만, 도저히 그녀의 상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모든 타이탄들을 다 출동시켜라. 발렌시아드 기사단과 제2근위대를 모두 다! 즉시 명령을 전달해라!”
“옛, 각하.”
까미유는 명령을 내리자마자 건물의 아래쪽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곧이어 사령부 건물 옆에는 붉은색의 거대한 타이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제법 반응이 있는데? 상당한 실력자들이야. 안 그래?”
방패와 검으로 양쪽에서 날아오는 검들을 각각 막아 내며 다크가 중얼거렸다. 확실히 아무런 반응도 없는 놈들을 무차별 살상하는 것보다는 이렇듯 발악을 할 줄 아는 놈들을 죽이는 편이 훨씬 재미있는 것이다.
“자, 이건 어떻게 할까?”
그와 동시에 거대한 청기사가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며 사방으로 검기를 내뿜었다. 굉음과 함께 순간적으로 자욱한 먼지가 솟아올랐다. 그리고 청기사를 포위하고 있던 10여 대의 흑기사들이 방패를 앞세운 채 거의 20여 미터에 걸쳐 뒤로 밀려 나갔다. 흑기사들이 뒤로 밀린 자리에는 길게 땅이 파여 있었기에, 그들이 뒤로 재 빨리 후퇴한 것이 아님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105톤이나 되는 거구들이 20여 미터나 뒤로 밀려날 정도로 다크의 일격은 엄청난 것이었지만, 뛰어난 실력의 기사들
이 타고 있었기에 그들은 마나를 이용하여 그것을 막아 낸 것이다.
“정말 대단해. 여태껏 이만한 놈들은 보지 못했어. 호호홋!”
사실 다크도 그 정도 일격에 상대가 전멸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놈들이 뒤로 밀려나며 넓어진 공간을 이용해서 앞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청기사는 그 엄청난 덩치와 무게에도 불구하고 비둘기를 향해 돌진해 들어가는 매와 같은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앞쪽에 있던 흑기사는 뒤로 밀려나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일 텐데도, 먼지를 뚫고 상대가 자신을 향해 돌진해 들어오자 침착하게 대응해 왔다. 정말 무섭도록 훈련을 잘 받은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그것까지도 예상하고 있었던 다크는 이번에는 검이 아니라 방패로 상대를 후려쳤다. 12톤이나 나가는 방패에 엄청난 힘이 보태져 있었기에 그것을 방패로 막은 흑기사는 예상치 못한 엄청난 충격에 뒤로 튕겨나갔다. 그리고 먼지를 피워 올리며 흑기사가 땅에 곤두박질쳤을 때, 그 옆에는 방패를 꼭 쥔 흑기사의 팔이 함 께 떨어졌다. 엄청난 충격으로 팔이 부서져 나갔던 것이다. 일단 첫 번째 목표를 밀어붙인 후, 다크는 그 녀석의 옆에 서 있는 놈에게로 공격의 방향을 바꿨다.
그러면서 검과 검이, 그리고 방패와 검이 부딪쳤다. 전투 중량이 160톤이나 되는 거대한 청기사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괴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단 한 번의 충격으 로 흑기사들은 형편없이 뒤로 밀려 나가고 있었다. 흑기사도 집단전을 위해 만들어진 105톤이나 되는 무거운 타이탄임을 감안한다면, 그것을 압도하고 있는 청기 사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무겁기에 얻어지는 효과였다.
이때, 공간이 열리면서 새로운 타이탄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붉은색과 검은색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타이탄들. 거의 20여 대가 넘는 타이탄들이 새로이 가 담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10대의 흑기사가 대충 평수를 이루면서 격전을 벌였기에, 35대로 그 숫자가 불어난다면 코린트 쪽이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할 것 같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코린트 쪽의 타이탄들은 오히려 동료들에게 걸려서 회피 기동력이 떨어진 데 반해, 다크는 이제야 해 볼 만하다 는 듯 봐주지 않고 정면 공격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청기사의 불타는 듯한 검이 대기를 가를 때마다, 불꽃이 튕겨 올랐다. 그리고 뭔가가 박살 나는 것이다. 그 전에는 공격을 당한 흑기사가 충격으로 뒤로 튕겨 나가 면서 그 틈을 옆의 타이탄들이 메우며 청기사의 공격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았지만, 지금은 뒤로 튕겨도 쭉 밀리는 것이 아니라 아군 타이탄 때문에 도중 에 서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청기사의 검이 정신없는 상대의 몸통을 그어 버렸다.
다섯대의 흑기사가 땅에 쓰러지자, 루엔은 지금 뭐가 잘못되었는지 즉시 간파하고는 10여 대만 앞으로 돌리고 나머지는 뒤쪽으로 뺐다. 소수의 적을 다수가 상대 할 때 애용되는 전법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상대의 실력이 뛰어날 때 장시간 격투를 벌임으로써 적의 힘을 빼고, 또 이쪽은 전력을 다해 적을 단시간에 막아 낸 후 뒤쪽의 힘이 넘치는 동료들과 교대를 하여 지속적인 힘을 유지하는 전법, 즉 차륜전법(車輪戰法)을 쓰도록 지시한 것이다.
“제법 하는군.”
<이 상태로 가면 위험하다.>
안드로메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위험 신호를 주인에게 보냈다. 안드로메다가 봤을 때 위험한 것이 사실이었다. 여태껏 다크는 타이탄 전투를 벌이면서 실력 없는 다수의 적을 상대한 적이 대부분이었고, 키에리와 승부를 벌일 때도 다른 적들은 크루마의 기사단이나 유령 기사단이 막아 줬기에 거의 일대일의 상황으로 전투를 전개했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얘기가 달랐다. 대단히 능력 있는 놈들로만 이뤄진 집단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외로운 싸움이었다.
한 대, 한 대 파괴되어 나뒹구는 흑기사들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만큼 청기사의 몸집에도 상처가 늘고 있었다. 워낙 많은 적에게 둘러싸여 있었기에 다크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빠른 몸놀림이 힘들었기에 벌어진 결과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크를 힘들게 한 것은 타이탄에 탄 채 강력한 적들을 상대로 싸워 본 경 험이 전무하다는 사실이었다. 일대일이나 뭐 그런 경우에는 대충 힘으로 밀어붙이면 되는 일이었지만, 이번 경우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타이탄과 자신이 완전히 한 몸이 되어 격전을 벌여야 하는데, 여태껏 혼자서 검을 들고 설쳐댔던 습성이 미묘한 불일치를 조성하고 있었다. 덩치 큰 안드로메다가 아무리 빨리 움직여 주고 있다고 해도, 그녀 자신의 움직임을 그대로 표현해 내지 못하기에 벌어지는 문제였다.
“제기랄! 이렇게 되면 속도가 아니라 힘으로 승부하겠다.”
다크는 계속되는 간발의 차로 적을 놓치자 신경질이 바짝 나서 외쳤다. 두 명의 적을 공격한 후 또 다른 타이탄을 먹이로 휘두른 검이 허공을 갈랐을 때 내린 결정 이었다. 그녀는 또다시 적들과 격투를 벌이는 것을 포기하고 그대로 검을 대지에 박아 넣었다.
쿠콰콰콰콰…….
대지의 기운과 검의 기운을 충돌시키는 최강의 검법. 그 검법을 타이탄에 탑승한 채 시현한 것이다. 흑기사들의 제일 앞 열은 그 순간 흔적도 없이 바스러져 버렸 고, 외곽을 싸고 있던 타이탄들은 그것을 봄과 동시에 뒤로 후퇴했지만 거대한 강기의 회오리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반경 수백 미터에 걸쳐 순식간에 강기의 회오 리가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회오리가 지나간 후에 남은 것은 철저한 파괴의 현장이었다.
강렬한 검강의 회오리가 지나간 후 살아남은 코린트의 타이탄은 단 한 대. 겉이 너덜너덜해져 버린 적기사뿐이었다. 그 적기사는 주인의 생명을 지켜 내는 데 모든 힘을 소진했는지 천천히 땅바닥에 그 거대한 몸체를 눕혔다.
<정말 대단하다.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인가?>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안드로메다가 자신이 이런 엄청난 기술을 쓴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뇌까렸다.
“자기가 하고도 몰라? 이 머저리야. 후우~ 힘들어 죽겠군.”
다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천천히 훑어봤다. 일어서 있는 적의 타이탄은 단 한 대도 없었다. 일단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다는 것을 확인한 후 다크는 천천 히 말했다.
“이봐.”
<왜 그러는가? 주인이여.>
“내가 말이야. 지금 기…, 아니 마나를 좀 보충해야 하는데 말이야. 지금 마나를 빨아들여도 너한테 상관없을까?”
<그것은 안 된다. 나 또한 마나를 흡수해서 생을 유지하는 몸. 나의 마나를 뺏긴다면 생명을 마칠 수밖에 없다.>
“제길, 그럼 머리 열어. 그리고 너는 돌아가. 나도 어디 가서 손실된 마나를 좀 보충해야겠어. 이 기술을 타이탄에 탄 채 쓰는 것은 아무리 나라도 좀 힘들군.”
안드로메다는 선뜻 머리를 위로 들어 올렸다. 다크는 아래로 뛰어내린 후 자신이 만든 작품을 다시 한 번 감상했다. 형체를 제대로 유지하고 있는 타이탄은 단 한 대도 없었다. 심지어 청기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했던 10여 대의 타이탄은 거의 몸체의 절반 이상이 파괴된 채 널브러져 있을 정도였다.
“휘유~ 대단하군.”
다크는 청기사가 공간을 가르고 돌아가는 모습을 확인하지도 않고 재빨리 팔시온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아무리 지쳤다고 해도, 이렇듯 위 험한 곳에서 운기조식을 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급보를 받고 돌아온 로체스터 공작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처절한 광경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단 한순간에 키에리라는 검호가 공들여 키웠고, 또 흑기사라는 막 강한 타이탄들로 무장한 발렌시아드 기사단이 전멸을 당한 것이다. 그것도 적기사들로 이뤄진 제2근위대와 함께 말이다.
“생존자는 있느냐?”
“옛, 전하. 다섯 명이 생존했사옵니다.”
“단 다섯 명인가? 누가 생존했느냐?”
“옛, 로젠 대공 전하와 까미유 후작, 그리고 제2근위대 소속의 오스카 경, 스칼 경, 그리고 발렌시아드 기사단의 메글리 경이옵니다, 전하. 지금 마법사들이 치료를 하고 있사오나 최소한 두 달은 정양을 해야 한다고 하옵니다.”
부하의 보고에 로체스터 공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젠과 까미유가 살아남았다는 것이 그에게는 그나마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그런가?”
로체스터 공작은 그제야 주위를 쭉 둘러봤다. 황궁의 한쪽 귀퉁이가 완전히 박살이 나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단 한 명의 인간이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로체스터 공작은 용병대장에게로 잠시 시선을 멈췄다. 용병대장 또한 이 엄청난 파괴의 현장을 보고 할 말을 잊은 듯했다.
“용병대장!”
“예, 전하.”
“잠시 나 좀 보세.”
“예.”
부하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후에야 로체스터 공작은 소리를 낮춰 얘기했다.
“무슨 기술인 것 같나?”
“글쎄……. 나도 생전 처음 보는 기술이야. 이런 기술이 있다는 말도 못 들어 봤어. 어떻게 수십 대의 타이탄을 한꺼번에 박살 낼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 로체스터 공작은 힐끗 파괴의 현장을 다시금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이로써 분명해졌군. 그녀가 있는 한 크라레스는 무적이라는 사실이 말이야.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근위 기사단을 밖으로 빼면 안 되겠어. 근위 기사단 전력을 그대로 보존해 놓고, 부하들만으로 크라레스의 뿌리부터 흔들어 놓는 수밖에 없어. 이번 기회에 크라레스를 멸망시키지 못한다면 나중에는 역으로 본국이 크라레스에게 먹히고 말 거야.”
로체스터 공작은 확신에 찬 얼굴로 비장하게 말했다.
로체스터 공작이 크라레스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다시금 다짐하고 있을 때, 다크는 일행들과 함께 멀찌감치 공간 이동하여 운기조식에 들어간 후였다. 그녀가 운기 조식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를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일행들의 얼굴은 활짝 펴졌다. 거의 모든 힘을 소진한 듯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돌아온 그녀가 아 주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이제 몸은 괜찮아?”
“어느 정도는……. 그건 그렇고 그동안에 아버지하고는 연락 해 봤어?”
“응, 가스톤이 했지. 그런데….”
“그런데?”
“카슬레이 백작이 출발한 후 30분 이상이 흘렀는데도 아직 연락이 없다고 하시더군. 원래는 그 전에 보고가 올라와야 정상이거든.”
“그게 언제야?”
“한 20분쯤 전이었던가?”
“젠장, 그럼 나를 불렀어야지.”
“하지만 네가 그러고 있을 때는 주변에 다가가기가 겁난다구. 저걸 봐.”
팔시온은 다크가 운기조식을 위해 앉아 있던 곳 주변에 서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나무에는 별로 이상이 없는 듯 보였지만, 다크가 앉아 있던 곳 주위에는 수많은 벌레들이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한눈에 척 봐도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네가 그러고 있을 때 주위에 있는 마나를 엄청난 기세로 흡수한다구. 아마 잘은 모르겠지만 저 나무도 하루만 지나도 나뭇잎이 다 떨어져 버릴걸? 전에도 그런 일 이 있었잖아.”
다크도 그 나무를 본 후 깨닫는 바가 있었다. 북명신공을 이용해서 있는 대로 기를 빨아들였으니, 주위의 생명체가 살아남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다크는 더 이상 그것을 문제 삼지 않고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그럼 어떻게 하지? 가스톤, 가스톤은 어디 있지? 미란으로 가야겠어. 가스톤에게 마법진을 그리라고 해.”
“이미 그리고 있어. 네가 마나를 빨아들이는 바람에 여기서는 마법을 쓰기 어렵다고 멀찌감치 떨어져 저쪽에서 작업을 하고 있지.”
팔시온의 말에 다크는 슬쩍 미소를 보냈다. 역시 오랜 시간 일해 왔던 동료들은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