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3권 11화 – 아들을 찾기 위한 노력

아들을 찾기 위한 노력

한 며칠간 열심히 세상을 휘젓고 다녔던 아르티어스는 또다시 레어에 들어앉아 머리를 싸매고 고민 중이었다. 처음 떠올랐던 ‘무식하기 그지없었던 계획이 막상 실행해 놓고 보니 힘만 들었을 뿐, 아무런 소득이 없었던 탓이다.

“젠장!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도 못 찾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아무래도 탐지 마법에 걸리지 않는 무슨 수작을 부려 놓은 것일 거야. 그렇지 않다면 이 위대하신 내가 못 찾아낼 리 없어.”

아르티어스는 한참동안 머리를 쥐어뜯으며 생각을 정리하다가 한 가지 기가 막힌 것이 떠오름을 느끼고는 ‘딱’ 소리가 나도록 손가락을 튕기면서 외쳤다. “그렇지! 정령왕이야. 정령왕에게 부탁하면 되는 것을 왜 미처 그 생각을 못 했지?”

아르티어스가 소통하는 바람의 정령왕이라면 당연히 해답을 알려 줄 것이 분명했다. 아르티어스의 지식으로는 공기(Air)가 없는 곳에서 살 수 있는 호비트는 보지 를 못했고, 또 공기가 존재한다면 당연히 바람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아르티어스가 아직까지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여태껏 이런 일로 정령왕을 불러 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아르티어스의 능력으로 찾아내지 못한 대상은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시간이 좀 많이 걸리기는 했었지만……. 물론 정령왕의 도움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다크를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행방불명된 다크를 빨리 찾아내야 했다.

“아리엘! 태곳적부터 골드 일족에게 전해지는 피의 맹약에 따라 그대를 소환한다. 모습을 드러내라!”

곧이어 희미한 음영이 아르티어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투명한 뭔가가 어른거린다는 것이 느껴질 뿐, 그 형체를 알아보기는 매우 힘들었다. 곧이어 공허한 울 림이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아르티어스여.>

“내 아들 알지? 전에 자네가 정령계에서 구해 준 그 아이 말일세.”

<정령계에서는 수컷이었다가, 이리로 가져오니 암컷이 되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그 괴상한 호비트 말이군.>

‘괴상한’이라는 말에 아르티어스의 얼굴색이 약간 찌푸려들었지만, 이쪽에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판에 그런 사소한 것을 가지고 따질 이유는 없었다. 아르티어 스는 표정 관리에 신경 쓰며 다급히 말했다.

“그래! 바로 그 아이야.”

<그 호비트가 왜?>

“그 아이가 또 행방불명이 되었다 이 말이야. 뭐 내 능력으로도 찾아낼 수는 있겠지만……. 아무래도 바람의 정령왕인 자네보다는 시간이 더 걸릴 것 아닌가? 안 “그래?”

은근슬쩍 상대를 띄워 주자 바람의 정령왕은 이 오만무도한 드래곤이 웬일인가 싶은 듯했지만, 그래도 잘났다고 치켜세우는 데야 기분이 나쁠 턱이 없었다. <물론이지. 나의 종들이 미치지 않는 대륙은 이 세상에 없다. 어디에 숨어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이목을 속일 수는 없다.>

“그래그래. 그래서 내 자네에게 부탁하려고 말이야. 그 아이를 나한테 데려와 줘. 알겠나?”

<드래곤과의 싸움도 아니고……. 고작 그 일을 시키려고 피의 맹약을 거론하다니. 자네도 성격이 많이 바뀌었군. 그런 사소한 일이라면 그냥 나한테 슬쩍 부탁해 도 얼마든지 들어줬을 텐데 말이야.>

“나한테는 다급한 일이야. 최대한 빨리 부탁하네. 알겠나?”

<알았다.>

찰스는 크리스틴의 기나긴 설명이 끝나자 다시금 확인하듯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수녀님은 그 신녀라는 사람이 내린 교시를 행하기 위해 이리로 왔다는 거냐?”

“예, 그러니까 아저씨께서 수녀님을 좀 도와주세요. 따지고 보면 아저씨의 잘못이잖아요. 아저씨가 나한테 그런 심부름만 안 시켰어도……. 흑흑.”

찰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크리스틴은 마침내 눈물 공격까지 시작했다. 하지만 찰스의 시선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크리스틴의 얼굴에 가 있지 않았다. 그만큼 크리스틴이 전해 준 말은 섬뜩한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암흑의 기운이 전 세계를 덮고, 또 그것을 퇴치할 영웅이 케락스시에서 나온다는 크리스틴의 말. 물론 어린 계집애가 하는 소리니까 웃어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짜로 그 수녀가 드로아 대 신전에서 왔고 또, 영웅을 찾고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예로부터 아데나 신전에서 나오는 신탁은 그 정확도를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 이다. 물론 상당히 추상적인 부분이 많아서 해석이 불가능한 신탁이 나오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말이다.

“너는 가서 병동 담당 마법사를 불러오너라.”

찰스의 말에 크리스틴은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되물었다.

“예? 그럼 아저씨가 마법사님께 말씀해 주실 거예요?”

“그래, 빨리 가거라.”

“예.”

얼마 지나지 않아서 크리스틴은 마법사를 데리고 왔다. 마법사는 찰스를 보고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지금 당장 저 아이와 함께 왔던 수녀를 나한테 데려오시오.”

찰스의 명령에 마법사는 당혹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아무리 상대가 오너급의 기사라고는 하지만, 들어주기 어려운 명령이었던 것이다.

“예? 하지만 그건 어렵습니다. 이 병동 내에서 환자의 신상을 누설하는 것은 절대로 엄금하고 있습니다. 만약 꼭 그렇게 하셔야 한다면 병원장님과 상의를 해 보시 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지금 당장 불러오시오.”

“저, 그런 것은 정말……..”

마법사가 끝까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난처한 듯 발뺌을 하자, 찰스는 표정을 굳히며 확정적으로 말했다.

“자네는 내가 누군지 아는가? 나는 대 코린트 제국의 제2근위대장 까미유 드 크로데인 후작이다. 네놈이 감히 내가 병든 것을 악용해서 명령을 이행하지 못하겠다 고 하는 것인가?”

까미유의 말을 들은 마법사의 안색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상대가 기사급인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거물일 줄은 미처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또, 이런 거물이 명령한다면 병원장이라고 해도 거역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자신처럼 병동을 책임지는 말단 마법사라면 말할 나위도 없었다. 상대의 신분을 듣는 즉시 마법사의 허리는 순식간에 90도로 꺾어졌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후작 각하!”

“이거 뭔가 잘못되지 않고서야 바람의 정령왕이라는 놈이 이렇게 시간을 끌 수가 있나? 아니면 또 딴 놈이 뭔가 부탁을 해서 그거 들어준다고 시간을 잡아먹고 있 는 것 아냐? 내가 그래서 피의 맹약까지 들고 나왔거늘…….”

아르티어스가 투덜거릴 만도 했다. 그 정도 일은 매우 손쉽다는 듯 큰소리를 쳐놓은 주제에 아리엘은 사흘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던 것이다.

“젠장!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아리엘! 이 빌어먹을 녀석아, 나의 소환에 응해랏!”

곧이어 아리엘이 그 투명한 모습을 드러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찾아보기나 한 거야?”

으르렁대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아리엘의 풀이 죽은 음성이 울려왔다.

<실피드와 실프들을 총동원하여 세계 곳곳을 이 잡듯이 뒤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호비트가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다. 뭔가 마법적인 것을 통해서 결계(結界)를 쳐놨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만약 그렇다면 나로서는 그 호비트가 있는 곳을 알아낼 수 없다.>

“젠장할, 꼴도 보기 싫으니 꺼져 버렷!”

아리엘은 아르티어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재빨리 모습을 감춰 버렸다. 물론 그가 그렇듯 빨리 사라져 버린 것은 아르티어스의 말을 잘 들어서는 절대로 아니었 다. 드래곤과 정령왕 간에 이어져 오는 피의 맹약을 요구했을 때, 정령왕은 드래곤의 요구를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줘야만 했다.

태초에 드래곤과 정령왕 간에 이루어진 이 피의 맹약에 따르면 드래곤은 정령왕에게 평생을 통해 단 한 가지의 ‘강압적인’ 명령을 할 수 있었다. 정령왕은 드래곤 이 ‘피의 맹약’이란 조건을 들고 나오면 자신의 소멸 같은 말도 안 되는 명령이 아닌 한 거의 다 들어줘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을 완수하지 못했을 때는 벌칙으로 또 다른 명령을 들어줘야 했는데, 이번에는 아예 거부의 권리마저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아르티어스가 지금은 내릴 명령이 없으니 다음에 보자구’라고 했다면 상관없겠지만, 꺼저 버렷!’하고 명령조로 말했으니 정령왕 쪽에서 본다면 엄 연히 이것도 ‘명령’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호기를 놓치지 않고 사라진 것이다.

“어떻게 한다? 이거 원…, 정령이란 놈들처럼 관계를 맺은 자와 뭔가 심령으로 연결되지 않고서야 아무리 나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알아낼 방법이 없잖아.”

무심결에 지껄인 소리였지만,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깨달았다는 듯 벌떡 일어서면서 외쳤다.

“그렇지! 나이아드가 있었지.”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가 비록 아쿠아 룰러라는 매개체를 통해서였다고는 하지만 일단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정령과의 관계는 그 정령을 불러냄으로 인 해서 성립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정령술사들의 경우 상대가 어떤 정령을 불러냈는지를 매우 귀신처럼 알아내게 되는데, 그들은 정령을 불러낼 수 있는 특별한 능력 이 있는 만큼 서로 간에 맺어지는 영적 교감을 읽어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령왕 같은 경우 자신과 한 번 영적 교감을 맺은 상대라면, 공간은 물론이고 차 원에도 제약을 받지 않고 상대를 찾아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만큼 정령과 정령왕 간의 능력의 차이는 극심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그 즉시 자신의 레어 깊숙한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레어의 가장 깊숙한 곳에 만들어진 방의 한쪽에 아들 녀석의 부탁대로 아쿠아 룰러가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봉인해 뒀기 때문이었다. 다섯 겹의 마법진이 중복으로 그려진 막강한 결계 속에 아쿠아 룰러는 봉인되어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그 결계 안으로 서슴지 않고 들어섰다. 결계는 자신이 만들었고, 아르티어스는 그 결계 안에 자신만이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르티어스는 아쿠아 룰러를 가지고 결계 밖으로 나온 후 반지의 정령을 불러냈다. 소녀의 모습인 반지의 정령은 상큼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 왔다.

“부르셨습니까? 아르티어스 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래, 빨리 가서 나이아드 좀 불러와라.”

아르티어스의 말에 반지의 정령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예? 나이아드님을요? 불러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실 텐데요.”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내가 결정해. 네 녀석은 빨리 가서 불러 오기만 하면 돼.”

“알겠습니다.”

반지의 정령은 사라졌지만, 나이아드는 곧바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도대체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지? 이상한 일이군……. 누군가 선약이 있나?”

또 다른 정령술사나 드래곤이 정령왕을 아르티어스보다 먼저 소환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널린 것인 정령이지만 정령왕은 하나뿐이었기에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이런 때는 물론 먼저 소환한 쪽에 우선권이 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아르티어스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은 1분, 2분 흘러가더니 이윽고 5분, 10분 단위를 넘어서서 한 시간을 넘어 두 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누가 정령왕을 이렇듯 오래 잡고 있단 말이야? 웬만한 일은 부탁하면 후딱 헤치우…….”

아르티어스는 그제야 생각이 미쳤다. 나이아드와 마지막 만남이 결코 서로 간에 유쾌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젠장, 겨우 그딴 일로 꽁해가지고 안 나온다 이거지. 정령왕이란 놈이 쪼잔하기는…….”

아르티어스는 투덜거리면서 또다시 반지의 정령을 불러냈다. 반지의 정령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번에는 상당히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예, 또 부르셨어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나이아드 님께서는 아르티어스 님과 만나기 싫다고 하셨는데요.”

“쯧, 그럼 이렇게 전해라. 내 레어 안에 봉인되어 영원히 세상 구경하기 싫다면 좋을 대로 하라고 말이야. 알겠어?”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반지의 정령이 모습을 감춘 후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나이아드는 재빨리 모습을 드러냈다. 반지에서 뿜어 나온 물이 순식간에 형상을 만들더니 곧이어 거대한 오우거로 변했던 것이다. 흉측한 몰골의 오우거는 아르티어스를 비웃듯 노려보더니 이죽거렸다.

“아쿠아 룰러를 봉인하겠다고? 그게 네 녀석 마음대로 될 줄 알아?”

거대한 오우거의 목소리라서 그런지 레어 안이 울릴 정도로 그 목소리는 컸고, 아주 굵직했다. 그리고 인간이나 엘프와 같은 섬세한 구강 구조를 지니지 못한 탓인 지 중간 중간에 바람이 빠지는 듯한 거북한 소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쨌건 만나자마자 대뜸 시비부터 거는 상대를 향해 아르티어스는 느긋하게 말을 건넸다. “마음대로 될지 안 될지는 두고 보면 알걸?”

“훗! 에인션트 실버 드래곤 쟈키므로네가 만든 아쿠아 룰러를 봉인하겠다고? 겨우 네 녀석 실력으로? 오래 살다 보니 별 미친 소리를 다 들어 보겠군.” 비웃고 있는 나이아드를 향해 아르티어스는 일침을 가했다.

“후훗, 물론 아쿠아 룰러 자체를 봉인할 수는 없지. 하지만 이곳 레어 안에서 그 누구도 아쿠아 룰러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둘 수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모양 이군. 그런 후 나는 기다릴 거야. 내가 아쿠아 룰러를 봉인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때까지 말이야. 그런 다음 계약을 무위로 돌리고 이걸 단순한 금덩어리로 만들어 버릴 거야.”

“으드드득! 네 녀석은 그럴 자격이 없어. 왜 네놈이 실버 일족과 나 사이에 만들어진 계약을 없애려고 든단 말이냐?”

“물론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얘기는 달라지지. 봉인 같은 것 하지 않고 아쿠아 룰러에 어울리는 멋진 주인을 찾아주겠어. 어때?”

“호오, 갑자기 웬 뜬금없는 협박을 해 대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군. 좋아. 그렇게 터무니없는 궁리를 하고 있는 골드 일족의 사생아께서 나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뭐 “지?”

‘사생아’라는 말의 뜻을 알고 있는 아르티어스는 엄청나게 성질이 치솟으려고 했지만, 일단 이쪽에서 부탁을 해야 하는 입장이기에 꾹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 사 실 드래곤에게 있어서 사생아라는 것이 있을 수 없었기에 그런 미약한 도발에 이성을 상실하기는 힘들었다.

“내 아들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너는 그 녀석과 관계를 맺었으니 어디에 잡혀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안 그래?”

“오호라! 바로 그거였군. 이 위대하신 나로 하여금 그날 그 치욕적인 일을 당하게 한 그 계집 말이야? 그년이 행방불명되었다니 축하할 일인데 그래.”

이죽거리는 나이아드를 향해 아르티어스는 화를 벌컥 냈다.

“농담을 할 대상이 따로 있지, 빌어먹을 녀석! 어쨌든 그 아이를 이리로 당장 데려와. 그럼, 내가 이곳에 아쿠아 룰러를 봉인하지 않고 새로운 주인을 찾아줄 것을 이 아르티어스라는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다.”

드래곤으로부터 맹세를 얻어 내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지만 나이아드는 상대가 그런 소중한 맹세를 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모양 이었다. 나이아드는 콧방귀를 뀌며 이죽거렸다.

“헷! 놀고 있군. 그래서 나한테 얻어지는 이익이 뭐지? 한 번씩 세상 구경을 하는 것 말인가? 하지만 겨우 그따위 것으로 짓뭉개진 나의 이 자존심이 치료될 것 같 아? 이 미친 드래곤아. 그따위 아쿠아 룰러가 없어도 나는 세상 구경을 할 수 있어.”

물론 나이아드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 퍼져 사는 드래곤들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자랑하는 것이 실버 드래곤이었다. 그 실버 드래곤이 뭔가 부탁을

하기 위해 나이아드를 부를 수도 있었고, 정령력이 강한 엘프가 그를 소환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쟈키므로네 같은 할 일 없는 노룡이 또 다른 아쿠아 룰러 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아르티어스이기에 속이 뒤틀리기는 했지만, 한 발자국 물러서서 흥정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 주기를 원하나? 너의 그 계획을 도우라는 말인가? 좋아. 그 대상이 내 아들만 아니라면 그것도 도와주겠어. 자네가 이 세상의 모든 호비 트를 다 죽여 없애려고 해도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대상에서 내 아들만 제외한다면 말이야.”

매우 파격적인 제안임에도 나이아드에게는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미친 소리 하고 있군. 그 사건이 있기 전에 그런 약속을 했다면 나도 환영했겠지만…, 지금은 시효가 지나 버렸어. 이번 일로 모든 게 명확히 드러나 버렸단 말이 야. 아무리 나와 다오가 연합해서 움직인다고 해도, 또 다른 정령왕 셋이서 반대한다면 이루어질 수 없어. 그런 의미에서 내 계획이 완전히 좌절되도록 만든 그 호비 트 계집이 사라져 준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지. 나는 이제 돌아가서 다오하고 축배나 들어야겠어. 작은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야. 으하하하…….” “젠장! 그럼 아리엘에게 부탁해서 중립을 지키게 해 줄게. 그러면 되지 않나?”

“헛소리하지 마! 네놈 말고 또 다른 골드 드래곤이 아리엘에게 막아 달라고 부탁한다면 그딴 약속은 휴지조각이 되겠지. 그걸 모를 정도로 내가 멍청한 줄 알아? 그럼 다음에 보자구. 아니, 너같이 재수 없는 녀석은 다시는 안 봤으면 좋겠어.”

나이아드가 사라져 버린 후 아르티어스는 바닥에 뿌려져 있는 물을 보며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아드가 심통이 날 것은 당연했다. 그딴 계획이 틀어져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령계에서 최강의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자존심이 짓뭉개진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아르티어스로서는 나이아드를 불러 낸 것이 오 히려 역효과였다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아드는 다크를 찾아내는 것을 도와주는 것은 고사하고, 이제 기회를 만났다는 듯 수색 작업을 방해할 가능성 까지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르티어스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외쳤다.

“으아아아! 빌어먹을!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