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3권 16화 – 다크와 라나의 재회

다크와 라나의 재회

로체스터 공작의 행동은 은밀하면서도 재빨랐다. 귀족들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코린트 전체가 로체스터 공작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알았을 정도였다. 로체스터가 평소에 믿고 의논하던 레티안마저도 따돌리고 행한 갑작스런 행동이었기에 그들로서는 아예 대비할 생각 자체를 못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이제 남은 길은 항복하고 목숨을 구걸하든지, 아니면 국외로 탈출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들은 영지에 포함되어 있는 농노들을 단속하고 산적들을 토 벌하거나 황제의 부름에 응하기 위해 꽤 많은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그들을 거느리고 무력 투쟁을 벌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기사단이 새로운 황제 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로체스터 공작은 이번에 벌어진 군부의 행동에 정당성을 더하기 위해 아데나 신전에서 흘러 들어온 신탁을 이용했다. 여태껏 지그문트 황제를 등에 업고 못된 짓 을 해 온 귀족들을 코린트의 앞날을 혼돈케 하는 무리들이라고 매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타파하기 위해 나타난 영웅으로 비스마 드 아그립파 후작을 내세웠 다. 이것으로 정적들을 몰살시키고 새로운 황제가 제위를 이어받는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신탁을 빌려 해석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사태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자 의문을 느낀 사람은 제임스였다. 수녀와 함께 로체스터에게 건네준 신탁에 나와 있는 암흑의 기운은 절대로 썩어 빠 진 귀족들을 의미하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수녀를 찾아갔다.

“안녕하셨습니까? 오랫동안 이곳에서 무료하게 지내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수녀는 여태껏 그래왔듯, 법식에 따라 흰색 로브를 입고 그를 맞이했다. 수녀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그녀에게는 제자가 딸려 있었기에 이곳에서 제자를 교육시키 며 소일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저에게는 보람 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신탁에 나와 있는 암흑의 기운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것을 물리치는 영웅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과연 그 영웅이 코린 트의 황제 폐하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죄송하지만, 그것은 저도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수녀님은 이곳에 계시기에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실 겁니다. 지금 로체스터 전하께옵서는 그 신탁을 이용해서 정적들을 소탕하고 계십니다. 그리 고 신탁에 나오는 영웅으로서 비스마 드 아그립파 후작을 지목했지요. 아마 정적의 소탕이 일단락되면 그가 제위에 등극할 것입니다.”

제임스의 설명에 수녀는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정적이 암흑의 기운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그녀 자신은 거기에 그려져 있던 시커먼 것이 마왕이나 뭐 그 런 사악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발렌시아드 후작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과연 로체스터 전하께옵서 하시는 일이 선한 것이라고 확신하시나요? 그리고 전하의 정적들이 악한 무리들이 라면 일단 암흑의 기운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확실합니다. 제 상관으로서가 아니라 위대한 무인(武人)이시자, 그분께서 평소에 보여 주신 검소하면서도 소박한 행동, 그리고 권력에 집착하지 않으시는 마음가짐을 저는 믿고 있거든요.”

열정적으로 말하는 제임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수녀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 같은 분의 존경을 받고 계시다면 그분이 하시는 일이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자연히 그것을 역행하는 무리들은 암흑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 렇다면 여기에서 또 다른 의문이 하나 생기는군요. 과연 그 작업에서 주체가 되시는 분이 누구신가 하는 것이지요. 로체스터 전하신가요? 아니면 비스마 후작이신 “가요?”

제임스는 곰곰이 생각해 본 후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는 로체스터 전하신 것 같습니다. 물론 비스마 후작을 표면에 내세우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 모든 명령은 전하께서 내리고 계시니까요. 또 현재 소탕 작 업을 벌이고 있는 기사단들이나 군대도 로체스터 전하께서 관할하고 계시구요. 비스마 후작은 황실의 직계자손이 아니기에 세력이라 부를 만한 게 아무것도 없거 든요. 그렇다고 기사단을 통솔할 만한 그런 대단한 직위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구요.”

“그렇다면 그 암흑의 무리를 없애는 영웅은 로체스터 전하가 되셔야 하겠군요.”

그 말에 제임스는 약간의 정정을 가했다.

“그건 아마도 전하께서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비스마를 앞에 내세운 것은 그를 제위에 올려놓기 위해서겠지요. 아무래도 비스마는 황제로 선택되기에는 명목이 좀 약한 것이 사실이니까요.”

“글쎄요. 저는 다만 여신을 받드는 무녀일 뿐, 정치를 알지는 못합니다. 신탁은 여신께서 내리시겠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또 사용하느냐는 인간들의 몫이 겠지요. 하지만 한 가지는 정확할 것입니다. 여신께서 영웅이라고 하셨다면 그는 만인이 영웅으로서 확신할 수 있는 인물일 것입니다. 비스마 후작처럼 날조된 영웅 이 아니고 말입니다.”

제임스는 수녀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듣고서야,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신탁에서 지시하는 영웅은 따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암흑의 세력 또한 존재할 것이다. 그림 상으로는 그냥 널찍하게 뿜어진 검은 잉크였다. 신전에서는 그것을 ‘세계’로 해석했지만 ‘코린트’로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다는 것이 문 제이긴 하다. 그렇지만 세계를 뒤집건 코린트를 뒤집건, 뒤집을 만한 세력이 하나 존재한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그는 코린트의 기사였으니까 말이다.

어쨌건 이 방문을 시작으로 제임스는 틈이 날 때마다 수녀를 찾아갔다. 그도, 수녀도 어둠의 세력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싶다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 었다. 그러면서 둘은 친분을 쌓아 갔다. 강인한 무사임과 동시에 귀족적이면서도 우아한 품성을 가지고 있는 제임스와 다소곳하며 여성스러운 수녀는, 그러면서 서 로에 대한 존경심을 쌓아 갔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은 눈발이 살짝 흩날리고 있었다.

“저는 아마도 그 영웅이 당신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임스는 마시던 차가 뿜어져 나오려는 것을 황급히 꿀꺽 삼킨 후 콜록거리며 기침을 해 댔다. 제임스는 어느 정도 기침이 진정되자 황당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 다.

“어디서 그런 오해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시는 것이지요?”

“코린트에는 저 말고도 뛰어난 기사들이 많기 때문이지요. 수녀님이 병원에서 만나신 까미유나 로체스터 공작 전하, 그리고 또 한 분. 모두 다 대단한 기… 검객들 입니다. 제가 끼어들 여지는 거의 없어요.”

제임스는 자신의 아버지 키에리를 슬쩍 끼워 넣었다. 물론 키에리가 들어간다면 기사라는 단어를 쓰기 힘들었기에 검객이라는 말로 바꾼 것이다.

“그런가요?”

“예, 저는 제1근위대를 맡고 있습니다. 제2근위대는 까미유가 맡고 있죠. 만약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는 일에 기사들을 투입해야 한다면 제2근위대가 투입됩니다. 그리고 아주 강력한 적이 나타났을 때는 전하께서 직접 나서시죠. 이래저래 저는 직접 나설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아, 그래서 발렌시아드 님께서는 영웅이 될 수 없다고 하신 거군요.”

“그렇죠.”

“하지만 지금 암흑의 세력에 대해 가장 열심히 파고드시는 분은 발렌시아드 님뿐이시잖습니까?”

“글쎄요. 하지만 한 달 정도 지나면 까미유가 퇴원할 겁니다. 그때는 아마 로체스터 전하께서는 그에게 이 사건을 일임하시겠죠. 저는 그가 퇴원하기 전까지 그에 게 도움이 될 만한 자료들을 모으고 있는 중이구요.”

“그러신가요?”

“그건 그렇고 오늘 가 보실 데가 있습니다.”

“예?”

“환자를 한 명 부탁드리기 위해서 왔거든요. 대단히 중요한 환자이기에 수녀님께서 그녀를 치료한 것에 대해 모두에게 비밀로 할 수 있다는 맹세를 해 주셔야만 합니다. 그것 때문에 그 환자는 아직 누구에게도 치료를 받지 못한 채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맹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임스는 그동안 수녀에 대한 뒷조사를 충분히 해 뒀다. 드로아 대 신전에서 엘리트 코스의 교육을 받았으며, 나이에 비해 상당히 높은 수준의 신성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신앙심이 깊은 무녀였다. 그녀의 행적에 있어서 단 한 가지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 의문점은 첫 번째 교육 수련 중에 그녀와 동행하던 스승이 사망한 것 정 도였지만, 그다음 스승에게서는 아무런 문제없이 교육을 수료했다.

자세한 것은 드로아 신전 내의 기밀 사항에 들어가기에 알아낼 수 없었지만,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 봤을 때 신뢰할 수 있는 우수한 무녀였기에 이런 부탁을 하게 된 것이다.

“교단에 보고해서도 안 되는 것인가요?”

“예, 설혹 신녀님이 묻더라도 침묵의 계율을 지켜 주실 수 있어야 합니다.”

신녀님이라면 아데나 교단의 우두머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기밀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뭘까 생각하며 수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데나 여신의 이름으로 맹세 드리지요. 고통받는 환자가 있다면 그가 누구라도 치료해 줘야 한다는 계명(誡命)을 받았습니다.”

“좋습니다. 준비해 주시죠. 물론 제자 분은 데리고 가실 수 없습니다.”

“예.”

제임스가 수녀를 데리고 간 곳은 황궁의 한쪽 구석 은밀한 곳에 마련된 작은 집이었다. 집은 예쁘고 아담하게 지어져 있었지만, 집을 중심으로 반경 1백 미터를 둘 러싸고 있는 거대한 마법진의 모습은 상당히 이채로운 것이었다.

“상당히 특이하면서도 아름다운 집이군요.”

수녀는 눈발이 조금씩 흩날리는 가운데서 마법진 위에 만들어져 있는 넓은 정원에 꽃이 만발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것이다. 만약 그 약속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제자를 데리고 왔을 것이다. 호기심이 왕성한 제자는 이 광경을 보고 얼마나 놀라워할 것인가?

수녀는 이 커다란 마법진이 저 마도 왕국 알카사스의 마법진과 같이 온도를 제어하는 마법진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각 거대 제국에 대해서 교양 과목으로써 책으 로 많은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녀는 이 마법진이 눈가림일 뿐, 정작 중요한 마법진은 그 속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가 전문적으로 마법진 공부를 한 것도 아니었고, 또 그 마법진은 지하에 숨겨둔 채, 그 위에 또 다른 마법진이 이중으로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꽤 그럴듯한 장소죠?”

수녀는 주위를 휙 둘러본 후 말했다.

“저에게 그렇게 다짐을 하신 것에 비해 관리는 허술하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집 주위로 엄청난 경계망이 쳐져 있죠. 설혹 황제 폐하라 하더라도 이 정도까지 철저한 경호를 받지 못하십니다. 수녀님도 저와 함께 오셨기

에 통과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가요?”

수녀는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녀 자신이 보기에 병력이라고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리로 오시죠.”

수녀는 제임스와 함께 정원으로 들어서는 작은 문을 통해 마법진 안으로 들어섰다. 마법진 안은 지금의 계절을 비웃듯 매우 따뜻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이렇듯 많 은 꽃들이 피어 있는 모양이다. 수녀는 마법진 안의 모습이 신기한 듯 둘러보며 제임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똑똑.”

가볍게 노크하자 문에 붙은 작은 창문이 슬쩍 열렸다가 닫혔다. 그런 후 곧이어 문이 열렸다.

“어서 오십시오, 후작 각하. 그런데 함께 오신 분은 누구십니까?”

제임스는 수녀를 슬쩍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데려왔다. 아데나 신전의 무녀로서 신분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전하의 허락 없이 누구도 그녀를 만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지금 전하께서는 이런 하찮은 일에 매달릴 시간이 없으시다는 것을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수녀의 신분에 대해서는 내가 보장할 테니 눈감아 주게. 나는 그녀가 그렇게 고통받고 있는 것을 덜어 주기 위해서 이분을 모셔 왔으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각하.”

“지금은 상태가 어떤가?”

“방금 전까지는 많이 괴로워했는데,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뭐, 하루에 네다섯 번은 그런 발작을 일으키니까요.”

“이쪽으로.”

제임스가 안내한 방에는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독한 술병을 앞에 두고 벌컥벌컥 들이켜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술이 좀 들어가면 고통이 둔해지니까 그러 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과 거의 흡사한 얼굴, 흐트러진 긴 금발머리, 가녀린 어깨, 작은 체구. 물론 그렇게 생긴 소녀가 이 세상에 여러 명 존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는 한 그런 소녀 중에서 저렇듯 독한 술을 좋아하는 술고래는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어?”

수녀는 경악했다. 왜 그가 여기에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에게 내려진 저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것일까?

“아저씨가 왜 여기에 계신 거예요?”

수녀는 놀란 탓인지, 자신의 본분도 잊어버리고는 옛날의 습성대로 툭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질문을 받은 상대 또한 놀라서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매우 더럽게도 기분 나쁜 추억과 마음속 깊이 증오라는 단어와 함께 기억되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무녀를 의미하는 각종 문양이 그려진 흰색 로브를 걸치고, 또 로브에 달린 모자를 깊게 눌러쓴 상대를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일부 그렇지 않은 교단도 있었지만, 아데나 교단의 경우 무녀들이 교단 밖에 나갔을 때에는 불상사를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녀들의 미모가 드러나지 않도록 항상 모자를 깊게 눌러써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년은 누구지?”

날카로운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수녀는 깊이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뒤로 젖히며 감격 어린 어조로 대답했다.

“저, 라나예요. 기억하시겠어요? 그런데 아저씨는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정말 놀라워요.”

그 말을 들은 소녀의 인상이 소태를 씹은 듯 팍 일그러졌다. 더 이상 꼴도 보기 싫었던 계집이 눈앞에 떡하니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이번에는 또 무슨 횡액을 당하게 하려고…….

이때, 제임스는 모자를 벗은 수녀의 모습을 처음 봤다. 여태껏 수녀의 얼굴이 어딘지 눈에 익은 듯했지만, 그는 그것이 친근감 정도일 것이라고 받아들였었다. 하 지만 이마 위쪽까지 푹 가리고 있던 로브의 모자가 뒤로 젖혀지자 수녀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 얼굴 생김새는 다크의 것과 쌍둥이라고 불러도 과 언이 아닐 정도로 거의 똑같았다. 다만 키라든지 몸매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얼굴 생김새로 봤을 때는 거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둘의 생김새만으로도 경악할 지경인데, 서로가 나누는 대화는 또 어떤가? 왜 수녀는 치레아 대공을 보고 ‘아저씨’라고 부르는가? 아무리 눈을 뚫어지게 봐도 자신 의 눈에는 소녀로밖에는 안 보이는데, 수녀가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수녀가 예전에 치레아 대공을 만났을 때, 그때는 남자였다는 말인가? 사실 드래곤의 경우는 암수 구분이 없었고, 뭐로도 변신할 수 있지 않은가?

여태껏 치레아 대공과 싸우면서 알아낸 바로는 그녀는 마법에 있어서는 거의 수준 이하라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일까? 또, 치레아 대공은 왜 수녀 를 보자마자 꼭 무심결에 곰쓸개를 핥은 듯 인상이 일그러져 있는가? 도대체가 제임스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임스가 눈이 휘둥그레진 채 둘을 번갈아 보며 별의별 생각을 다 하는 사이, 둘의 대화는 계속 연결되었다. 하지만 그건 꽤나 악의에 가득 찬 일방적인 것이었다. “못된 년. 빨리 내 눈앞에서 사라져! 꺼지란 말이다! 왜 잊을 만하니까 나타나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거야? 죽고 싶냐? 오냐 죽여 주겠닷!”

다크는 쥐고 있던 술잔을 신경질적으로 들어서는 라나에게로 힘껏 던졌다. 미친 듯이 분노에 차 있는 다크는 확실히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라나는 재빨리 손을 뻗어 가볍게 술잔을 잡아챘다. 신성력에 의지하여 근력 증가를 시켜 놓은 그녀에게 있어서 그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옛날과 별로 변한 것은 없는 것 같은데, 어디가 아프시다는 거죠?”

갑자기 수녀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왔기에, 제임스는 일순간 상대의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의 머릿속은 지금 터져 나갈 만큼 혼란스러우면서도 복잡한 상태였다. 하지만 일단 질문이 주어진 만큼 제임스는 성심껏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대답해 주었다.

“예? 아, 예. 그러니까 정신계 마법에 의한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 때문이죠.”

“제가 좀 살펴볼 수 있도록 잠시 좀 잡아 주시겠어요?”

“뭐, 그러죠. 어려운 것도 아닌데…….”

제임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뒤따르는 행동은 절대로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리 다크에게 접 근한 후 손을 날렸다. 하지만 상대의 동작을 눈치 채지 못할 다크가 아니었다. 현재 마나를 일으킬 수 없다는 것뿐, 그의 눈은 보통 사람보다는 월등히 뛰어났기 때 문이다. 상대의 손이 뒤통수를 때리는 순간, 다크는 거의 본능적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세차게 손을 내저었다. 그의 동작 하나하나가 숙련에 의해 만들어진 본 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퍽!”

제임스는 일부러 피하지 않은 것이다. 그녀의 주먹이 보통 매서운 것이 아닌 듯했지만,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자신에게 타격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 이다. 그는 피하는 대신 두 번째 공격을 연이어 날렸다.

“퍽!”하는 소리가 뒤이어 들려왔고, 곧이어 “쿠당!”하는 소리와 함께 다크가 큰대 자로 드러누워 버렸다.

“자, 보세요. 쉽죠?”

그렇지만 수녀 몰래 옆구리를 살짝 매만지는 것을 보면 결코 손쉬웠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수녀는 제임스가 왜 그렇게 무작스런 방법을 동원해서 다크를 기절시 켰는지, 첫 번째 주먹을 다크가 손쉽게 피하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다크가 붙잡힐 가능성이 별로 없었고, 괜히 엎치락뒤치락 해 봐야 다크의 몸 에 상처만 생길 것은 뻔한 이치였던 것이다.

어쨌든 수녀는 드러누워 있는 다크를 안아 들었다.

이제 그 시절로는 도저히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다크를 찬찬히 바라보며 수녀는 감회가 새로웠다. 다크의 작고 가녀린 몸을 들 어 올리며 자신이 옛날에 이렇게도 가녀렸던가 하는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아저씨를 만난 후 얼마나 많은 사건이 있었던가? 그리고 그때는 왜 그렇게 철없이 굴었던가? 그 때문에 이 아저씨는 버릇없었던 나를 못 잡아 먹어서 길길이 날뛰었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기는 하지만 남에게 말하기는 쑥스러운 까마득한 추억이었다.

수녀는 다크의 머리에 손을 얹은 후 신성력을 발동시켰다. 그에 따라 그녀의 몸에서는 신성한 빛이 살며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빛은 사라졌 다.

“무슨 마법을 쓰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로군요. 이런 말씀드리기는 죄송하지만 저로서는 그것을 바로잡을 능력이 없습니다.”

“어떤 방법이 없겠습니까?”

“저의 능력으로는 약간의 도움밖에는 드릴 수가 없군요. 이분이 두통으로 고통받는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있죠?”

제임스는 수녀에게 치료를 부탁한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고 느꼈다. 황궁 안에도 여러 종파의 신관과 무녀들이 있었고, 또 그들 중에서 신뢰할 수 있는 몇 명이 이 미 다크를 치료하려고 시도했었지만, 아무도 성공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예, 어떻게 아셨습니까?”

“두통은 이분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실타래가 엉클어지며 나타나는 현상이죠. 점점 간격이 짧아진다는 것은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는 것이구요. 빨리 치료를 해 야만 합니다. 안 그러면 나중에 미치거나 바보가 되실 수도 있습니다.”

“병의 원인을 아신다면 치료를 하실 수도 있으실 것 아닙니까?”

“물론이죠. 하지만 제 능력으로는 완전히 회복시켜 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엉키는 속도를 늦출 수 있을 뿐이죠.”

“그렇다면 그거라도 부탁드립니다. 수녀님께서 치료하시는 동안, 아데나 신전에 연락하여 더욱 실력 있으신 무녀님을 초청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예, 그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지만 교단에서 응해 주실지 모르겠군요.”

수녀의 말에 제임스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원래 저희 교단은 여신님의 신탁을 받는 것이 큰 사명인 만큼, 신탁을 받다가 잘못되어 벌어지는 각종 정신 질환에 대한 치료가 발달해 있죠. 하지만 저희 교단에 서는 이런 정신계 질환에 관련된 치료는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신의 영역은 여신님이 관장하시는 부분이고, 그 부분을 파고들 수 있는 것은 본 교 단의 무녀들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저희 교단의 무녀가 아닌 사람이 정신적인 질환을 겪을 때는 그것이 자연적인 것이 아닌 한 치료를 금지 하는 것입니다. 그가 가해자든 피해자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단에서는 그것을 무녀들의 영역을 침범한 행위로 간주하니까요.”

“그렇다면 수녀님께서는 어떻게 이분을 치료해 주시겠다고 허락을 해 주신 건가요? 나중에 혹시 교단의 추궁을 받으시는 것은 아닌가요?” 수녀는 살짝 고개를 가로저으며 쑥스러운 듯 말했다.

“저는 과거에 저분에게 아주 큰 빚을 진 것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치료를 해 드리는 것이죠. 결코 발렌시아드 님의 부탁 때문이 아니니까 마음의 가책을 가지실 필 요는 없습니다.”

“아, 예. 그러십니까? 그럼, 우선 치료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제임스는 수녀가 다크를 치료하는 것을 뒤에서 바라보며 나름대로 속셈을 굴리고 있었다. 수녀가 마음의 빚 때문에 치료를 허락한다는 말은, 교단도 뭔가 빚 또는 압력이 있다면 굴복할 수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 아닌가? 어떤 수단을 동원해야 신녀를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리저리 방법을 궁리해 보는 제임스였다.

“정말인가?”

“예, 전하. 분명 그렇게 말했사옵니다.”

“흐음.. 그 외에 수녀에게서 알아낸 것은 없나?”

“예, 더 이상은 말해 주지 않았사옵니다. 아무래도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은 확실하오나, 그렇다고 잡아다가 고문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옵니까?”

“그거야 그렇지. 이런 상황에서 괜히 아데나 교단까지 자극할 이유는 없지. 그럼 어떻게 한다? 참, 그녀를 치레아 대공과 자주 만날 수 있게 해 주게나. 그러면 둘 사이에 뭔가 대화가 오고 갈 거고, 그것을 엿듣다 보면 뭔가 실마리가 잡히지 않겠나?”

“저도 그렇게 생각하옵니다, 전하.”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레티안이 끼어들었다.

“치레아 대공을 시중들고 있는 시녀를 닦달해 본 결과, 그녀는 며칠 전에 월경을 끝마쳤다고 하옵니다.”

“그런가?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예, 그렇다면 그녀는 완전한 여자라는 것이옵니다. 정말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의 말씀대로 수녀가 ‘아저씨’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면, 그녀는 도중에 변신을 거쳤 다는 말이 되지 않겠사옵니까?”

“그거야 그렇지.”

로체스터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레티안은 말을 이었다.

“트랜스포메이션 마법으로는 절대로 성별이 바뀔 수는 없사옵니다. 만약 여자가 근육질의 남자 모습으로 바뀐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인 형상은 여성일 수밖에 없사 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 또한 마찬가지구요. 오로지 단 한 존재를 제외하고는 남녀의 모습을 완벽하게 바꿀 수는 없사옵니다. 바로 그것은 드래곤이죠.”

“드래곤? 하지만 전에도 말했지만 그녀가 드래곤이나 헤즐링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결론짓지 않았었나? 헤즐링이 그렇듯 엄청난 검술을 익힐 수는 없어. 마법 이라면 몰라도.”

“그것은 저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그녀가 헤즐링이라면 사건은 더욱 복잡해지옵니다. 자신의 자식이 행방불명되었다고 그 골드 드래곤이 떠들어 댄다면, 이 세상의 모든 드래곤들이 그녀를 찾기 시작할 것이옵니다. 드래곤 한 마리라면 몰라도, 그 많은 드래곤들이 설치고 다닌다면 곧이어 들통 날 것은 확실하옵니다.” 레티안의 말을 들은 로체스터 공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과연 일이 그렇게 돌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드래곤의 헤즐링에 대한 광적인 보호는 익히 알려져 있으니 까 말이다. 공작은 단호한 어조로 제임스에게 말했다.

“수녀를 잡아서 고문을 하든지, 아니면 치레아 대공과 대질심문을 시키든지,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그녀의 정체를 빨리 밝혀내라.”

“옛, 전하.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제임스가 서둘러서 밖으로 나간 후, 레티안은 서류 몇 장을 로체스터 공작에게 건네며 말했다.

“사흘 뒤에 있을 폐하의 대관식 말이옵니다. 거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사옵니다.”

공작은 서류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뭔가?”

“황제 폐하께서 암살당하시는 바람에, 크라레스의 황제가 케락스에 오는 것이 연기되지 않았사옵니까? 사실 이쪽에서도 그동안 반대파의 숙청을 감행하느라 정 신이 없어서 크라레스에 압력을 넣을 형편도 아니었사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정도 국내 사정이 안정되었기에, 그쪽에 황제 폐하의 대관식에 참석하여 새로운 황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고, 항복 문서에 서명하라고 권고를 보냈사옵니다. 이것이 그 답장이옵니다.”

“그런가?”

로체스터 공작은 서류를 뒤져 봤다. 앞부분은 크라레스에 보낸 명령서의 복사본이었다. 그리고 제일 뒤쪽에 붙어 있는 답장.. 그것을 읽은 로체스터 공작은 화 가 난 어조로 말했다.

“이놈들이 지금 정신이 있는 건가? 항복 따위는 할 수 없다니 그게 제정신을 가진 놈들이 할 수 있는 대답이냐 그거야.”

“글쎄요. 그건 잘 알 수 없사옵니다. 복잡한 국내 사정 때문에 본국은 그동안 타이탄 생산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사옵니다. 그에 비해 크라레스는 이를 악물고 전쟁 준비를 했을 테니, 최소한 카프록시아급 타이탄 15대는 더 만들었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큰소리 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옵니까?”

“혹시, 크루마와 다시 손을 잡은 것이 아닐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사옵니다. 크루마는 치레아 대공을 이쪽으로 넘겨주지 않았사옵니까? 왜, 크라레스와 손을 잡으려고 하겠사옵니까?”

“글쎄, 그건 알 수 없지. 미란을 털도 안 뽑고 꿀꺽한 후 시간이 좀 흘렀으니 또 다른 먹잇감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본국이 크라레스와 한판 하고 나면 중간 에서 이익을 볼 국가는 현재 크루마뿐이지 않은가? 제2차 제국 전쟁에서 아무런 피해도 당하지 않았으니 그놈들의 군사력은 최고조를 달리고 있을 것이야.” “서둘러서 조사를 실시해 보겠사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