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3권 18화 – 아르곤과 알카사스의 위기
아르곤과 알카사스의 위기
인간들에 대한 몬스터들의 조직적인 공격이 시작되자, 각국은 저마다 그 대비책에 부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국가는 아무래도 아 르곤이었다.
그들은 크라레스를 막강한 군사력으로 밀어붙이며 크로나사 평원의 삼분지 일을 집어먹은 상황이었다. 거기다가 포스타나 대신관의 실정으로 인해 점령지 인구 의 태반을 잃어버렸다. 물론 그 모두를 종교 재판으로 학살한 것은 아니었고, 민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죽인 인구와 국외로 탈출한 인구까지 포함한 수치였다. 포스타나 대신관은 자신이 점령지의 책임자라는 점을 악용하여 그를 고발했던 사목관에게 도리어 무고죄(誣告罪)를 덮어씌워 처형해 버렸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 은 본토와 점령지를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쟈코니아 산맥 덕분이었다.
포스타나 대신관의 손을 통하여 도착하는 정보에는 많은 오차가 있었다. 그런 엉터리 정보만을 기준으로 점령지의 상태를 판단하고 있던 주교원에서는 사목관의 목숨 건 밀고를 무고로 단정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포스타나 대신관의 독주도 오래 갈 수는 없었다. 점령지가 더욱 넓어진 데다가 크라레스가 사실상 항복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자 주교원에서는 점령 지를 서쪽을 관할하는 가니에 법왕(法王)의 관할지로 편입시켜 버렸다.
아르곤에 단 네 명만이 존재하는 법왕은 아르곤을 4등분하여 그것들을 하나씩 다스리는 고위직의 성기사였다. 물론 교황처럼 실세가 없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 래도 유사시에 그들이 지니는 권력은 막강한 것이었다. 법왕은 교칙상으로 봤을 때 주교보다 한 단계 높은 엄청난 직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법왕은 새로운 자신의 관할지를 둘러보는 과정에서 성기사들의 밀고를 받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점점 더 파고들어 포스타나 대신관을 탄핵할 수 있는 충분한 자료 를 모아들였다. 그런 후 포스타나 대신관은 여태껏 자신이 수없이 많은 점령지의 주민에게 했듯이, 종교 재판을 통해 형을 언도받은 후 뜨끈한 장작불 위에서 통구 이가 되어 버렸다.
포스타나 대신관의 죽음으로 점령지 주민들에 대한 정책은 더욱 온건한 것으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주민들의 민란이나 국외 탈출 역시 급속히 사그라졌다.
이렇게 아르곤의 점령지가 서서히 안정을 되찾고 있을 때, 각지에서 무차별적인 몬스터들의 공격이 새벽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피해가 이제야 어느 정도 집계 되는 중이었다.
“생존자들의 보고로는 적들은 놀랍게도 몬스터들이라는 것이옵니다.”
“그것은 정확한 정보인가?”
“옛, 법왕 전하. 엄청난 몬스터의 대군이…….”
법왕은 부하의 보고를 믿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여태껏 타이탄이 개발된 이후 몬스터는 인간들의 손쉬운 사냥감이었기 때문이다. 타이탄을 위협할 수 있을 만 한 초대형 몬스터는 독립행동을 좋아했고,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몬스터는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것들이었다.
“말이 되는가? 오크나 고블린 같은 집단 서식을 하는 몬스터라도 그 수가 천을 넘어가지 않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2개 용병 기사단을 전멸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는 말인가? 이것은 필시 타국이 몬스터의 행동을 빙자하여 본국을 침략하는 것이 아닌가?”
“법왕 전하, 지금까지 드러난 정보를 종합해 볼 때, 세 방향에서 침공을 시도하고 있는 적의 침략군은 각각 1만이 넘는 몬스터들이 확실하옵니다.”
그 엄청난 숫자에 법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다면 3만이라는 말인가?”
“예, 법왕 전하. 확실한 정보이옵니다. 몬스터들은 쟈코니아 산맥을 중심으로 더욱 세력을 넓히며 진격해 들어오고 있사옵니다.”
“어떻게 몬스터가 3만이 모일 수가 있다는 말인가? 떼거리를 짓기로 유명한 몬스터들조차 1천을 넘었다는 보고를 들어 본 적이 없거늘.”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사목관이 슬쩍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법왕 전하.”
“말해 보시오, 형제.”
“예, 제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무리 지어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는 몬스터는 오크나 고블린 정도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오크나 고블린이 아무리 많은 떼를 짓는다고 해도 타이탄을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옵니까?”
“그렇다고 나도 생각하네.”
“타이탄을 상대하려면 오우거 정도 크기의 초대형 몬스터여야 하옵니다. 또, 그런 초대형 몬스터들은 무리를 짓지 않사옵니다.”
법왕은 고개를 끄덕여 사목관의 말이 옳다는 뜻을 밝혔다.
“레가르 형제께서는 몬스터의 수가 3만이라고 하셨습니다. 전 세계의 오우거를 다 끌어 모은다고 하더라도 3만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렇다면 여러 종류의 몬스터가 모였다고 봐야 할 텐데……. 그렇지 않습니까? 레가르 형제.”
사목관의 지적에 레가르는 자신이 알아낸 바를 설명했다.
“나도 그렇게 보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생사의 갈림길에서 정신없이 도망쳐 온 무리들의 보고라서 신뢰성은 상당히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 하지만 제 예상이 맞다면 그것은 사실일 것이옵니다. 역사상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요.”
사목관의 말에 법왕은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법왕은 성기사에서 뽑히는 직책이기에 전문적으로 여러 가지 학식을 쌓아 온 사목관보다는 아무래도 지식이 떨어지 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상 그런 일이 있었다고? 언제 말인가?”
“예, 역사상 그런 일이 수차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사옵니다. 바로 그것들 중에서 최근에 있었던 사건은 160년 전에 있었던 마왕 강림이었사옵니다.”
“마왕의 강림이라고?”
“예, 그렇게 높은 마왕이 아니어서 손쉽게 진압되었기에 별로 유명한 사건은 아니었사옵니다. 하지만, 1천5백 년 전에 대마왕이 강림했을 때는 전 세계가 피로 물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사옵니다. 보통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2백여 년 단위로 마왕들이 출현하고 있사옵니다. 흑마법이 존재하는 한 마왕의 강림은 없어질 수 없는 일이옵니다. 아마 이번 사건도 마왕의 강림에 연관이 있는 사건이 아닌가 사료되옵니다.”
“흠, 마왕의 강림이라…….”
법왕은 의자 손잡이를 툭툭 치면서 잠시 생각에 빠졌다. 마왕이라면 신에게 적대하는 세력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은 보통 사건이 아니었다. 사소한 점령지에서 의 전투 정도로 넘어갈 일이 아니라 아르곤이 전 국력을 소진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근원을 뿌리 뽑아야 하는 것이다.
“비룡을 준비해라. 내가 직접 수도에 가서 교황 성하를 만나 뵐 것이다.”
“옛, 법왕 전하.”
마도 왕국 알카사스는 제2차 제국 전쟁 초기에 스바시에 기사단을 주력으로 하는 크라레스 기사단들의 압력에 밀려 잠시 후퇴한 덕분에 알카사스의 점령지는 아 르곤보다는 월등하게 좁았다. 아르곤은 전쟁 초기부터 줄기차게 크라레스를 밀어붙인 결과 강력한 기사단들이 저지하고 있는 치레아 공국 쪽으로는 들어가지 못했 지만, 크로나사 평원의 상당 부분을 잠식해 들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알카사스는 아르곤처럼 그렇게 무리한 작전을 전개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땅덩어리가 넓어 봐야 방어하기만 귀찮아진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항구 였다. 전쟁 전에 코린트에게서 약속받은 스바시에 공국만 차지하면 다른 것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알카사스는 혹시나 코린트가 약속을 안 지킬 것에 대비하여 스바시에를 일부 점령했다. 북쪽으로 조금 더 진출하여 크로나사 평원의 서남부를 집어먹은 것은 순전히 예상도 하지 못한 특별 보너스였을 뿐이었다.
지금 점령지인 스바시에의 항구에는 알카사스의 깃발을 단 선박들이 이미 몇 척인가 왕래를 시작하고 있었고, 수십 척의 선박들이 건조 중에 있었다. 그리고 본토 와 왕래가 가능한 영구 이동 마법진도 건설 중이었다. 이 항구들이 제몫을 하게 된다면, 알카사스의 번영은 영원히 약속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새벽 알카사스는 미래를 향한 원대했던 꿈을 빼앗겼다. 몬스터의 대군단이 돌진해 들어와서 항구를 박살 냈고, 건조 중이었던 선박들을 불태웠 다. 그리고 한쪽 귀퉁이의 크로나사 평원의 일부도 토해 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엔테미어 공국을 향해 몬스터의 대군이 침입을 개시한 것이다.
그것이 알려지자 원로원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더 이상의 침략 작전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전방에 포진하고 있던 기사단은 후퇴시켰고, 앞으로 모든 점 령지는 스바시에 공국이라는 새로운 허수아비 괴뢰 국가를 만들어 편입시킬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엔테미어 공국처럼 누군가 협상 능력 좋은 놈을 대공으 로 앉혀 놓으면 일은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토대부터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젠장! 그렇게 빨리 기사단을 철수시키는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오.”
“기사단 철수를 제일 먼저 주장한 것은 당신이 아니었소? 국왕파의 힘이 더 이상 강해지면 안 된다며 철수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하지 않았소!”
“하지만 당신들도 그것에 찬성하지 않았소? 왜 그것이 모두 내 잘못인 양 말하는 거요!”
“시치미 떼지 말고 잘못을 시인하시오. 다 당신의…….”
“쾅쾅!”
제일 상석에 앉아 있는 의장이 탁자를 몇 번 두들긴 후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우리가 모인 것은 누가 잘못했는지를 가려내어 벌을 주자는 것이 아니지 않소? 지금 본국은 피땀 흘려 얻어 냈던 것을 모두 다 뺏기는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직면 해 있소. 그런 상태에서 꼭 집안싸움을 하고 싶소?”
의장의 질책에 모여 있던 마법사들은 일제히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의장님.”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소?”
“왜 그렇게 많은 몬스터들이 모여서 공격을 펼치는 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상대는 엄청난 규모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선 팔콘(Falcon) 기사단을 보내어 급한 불부 터 끄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 왜 원로원 직속의 기사단을 보내자는 거요? 국왕 직속의 기사단을 보냅시다. 그래야만 나중에 잘못되어도…….”
“지난번 전쟁에서 국왕 직속의 기사단 둘을 보냈었소. 그러니 이번에는 그들을 예비로 돌리고 원로원 직속의 기사단을 보내는 것이 이치에 맞소. 안 그러면 반발 이 일어날지도 모르오. 거기에다가 레드 이글이나 콘도르 기사단을 보내려면 국왕과 협의를 해야 하오. 지금 사태는 급박한데 괜히 그런 데다가 소비할 시간이 어디 있소?”
“자네 말이 맞겠군. 팔콘 기사단을 보내기로 하는 것이 좋겠어. 자네는 지금 바로 팔콘 기사단에게 출동 준비를 지시하게. 그런 다음 어느 정도 적의 규모가 파악되 는 대로 국왕파의 기사단을 보내든지, 아니면 호크(Hawk) 기사단을 추가로 파견하기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